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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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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창작론

한국의 수필작법 묶음
2013년 03월 29일 21시 00분  조회:5159  추천:0  작성자: 강려
정목일 수필론
 
처음 수필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수필은 삶의 문학 -정목일(鄭 木 日)
 
1 
수필은 멀리 있지 않다. 나의 생활 곁에, 삶의 곁에 있다. 슬픔의 곁에, 눈물의 곁에, 기쁨의 곁에, 그리움의 곁에, 정갈한 고독의 한가운데에 있다.
삶과 가장 근접해 있는 문학이 수필이다. 원대하거나 화려하거나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맑고 투명한 거울이다. 한숨이 나오거나, 그리움이 사무칠 때나, 외로움이 깊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 백지 위에 무언가 끄적거려 보고 싶어진다. 그냥 낙서일 수도 있고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끄적거림'은 별 의식 없이 나온 것이지만 마음의 독백, 마음의 토로로서 이 속에 자신의 인생과 느낌이 담겨진다는 뜻에서 중요하다. 이 끄적거림이 발전하면 삶의 기록, 인생의 기록이 되며,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발견이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기록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의식과 영원성을 수용하게 된다. 기록은 삶을 성찰하여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기록하는 일을 통해 삶은 더욱 진지해지고 충실해지며 가치로워진다.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다. 체험(사실)에다 상상과 느낌을 보태어 재구성과 해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수필이다. 기록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만, 수필은 사실에 상상과 느낌을
불어넣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 낸다. 우리 삶의 얘기가 그냥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수필로 승화되기 위해는 상상과 의미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필은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일기, 고백, 기행, 감상, 편지- 어느 형식이든지 자유롭게 마음을 토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수필을 쓰기 위해선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과의 대
화에 과장과 허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긴장을 풀고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장신구도 떼어내고 화장도 지워버리고 홀가분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 입고 침실에 눕거나, 턱을 괴고 앉아 친구에게 마음을 토로하듯 쓰는 글이다. 애써 잘 쓰려는 의식이나 남에게 보일려고 하는 마음도 없이―. 권위의식, 체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일체의 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동심으로 돌아가 순수무구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에게 잘 보일려는 욕심에서 치장하고 수식하고 싶어 안달을 부리게 된다. 겨울 언덕에 선 벌거숭이 나무처럼 녹음· 꽃· 단풍도 다 떨쳐버린 맨 몸으로 보여주는 진실의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마음의 산책' '독백의 문학'이라 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 내는 문학임을 말한다.
수필의 입문(入門)은 어느 문학 장르보다 쉽지만 수필의 완성은 실로 어렵다. 성공한 인생은 많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작은 쉬웠지만 점점 들어갈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글이 수필이다. , 소설, 희곡 등 픽션은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넌픽션인 수필의 경우엔 작가와 작품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경지에 따라 수필의 경지가 달라진다. 수필은 인생의 거울이므로 사상, 인품, 경륜, 인생관 등이 그대로 담겨진다. 심오한 사상, 고결한 인품, 맑고 따뜻한 마음, 해박한 지식, 다양한 체험이 수필을 꽃피우는 요소이고, 이런 인생 경지에 도달한다는 자체가 구도, 자각, 실천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이 아니라,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문학이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통한 의미와 가치를 최상으로 높이는 도구다. 수필을 쓰려면 무엇보다 겸허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꽃피우는 문학이므로 스스로 교만과 허위의 옷을 벗어야 한다. 마음속에 항상 자신의 영혼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을 깨끗이 닦아 두어야 한다. 마음속에 양심의 종을 매달아 두어서 불의나 탐욕의 손길이 뻗힐 때 스스로 자각의 종소리를 내게해야 한다. 마음속에 맑고 깊은 옹달샘을 파 두어서 거짓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 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경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진실과 겸허의 눈으로 말하고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마음속의 울림 그대로를 끄적거려 보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낙서라고 해도 좋다. 단 몇 줄의 문장을 만들고 점차 자신의 마음을 토로해 나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수필과의 만남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습성을 가지는 일이 수필을 쓰는 첩경이 된다. 삶의 기록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① 체험의 서술
② 체험 + 느낌
③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④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 감동
 
①은 자신이 겪은 대로 쓴 것이어서 기록문에 불과하다.
② 수필이 되려면 체험과 느낌이 조화를 이뤄야 함을 말한다. 체험이 많고 느낌이 적을
땐 정서감이 부족하여 딱딱하게 느껴지고, 체험이 적고 느낌이 많은 경우엔 추상적이고 현실감의 결여를 느끼게 한다.
③의 수준이면 수필에 진입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창출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인생의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④의 경우엔 '감동'을 주문하고 있다. 수필이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한 글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나 인생의 의미를 일깨우고 읽는 보람을 안겨 주기 위해선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은 문학성의 핵심 요소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 수필쓰기는 자신의 삶을 가치롭게 꽃피우는 자각과 의미 부여의 행위이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의미의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을까, ― 이것이 수필을 쓰는 핵심이며 궁극적 목표가 아닐 수 없다.
 
2. 수필은 어떤 글인가
 
鄭 木 日
. 수필의 정의
수필은 비교적 짧은 글로써 자신의 삶과 체험을 개성적, 관조적으로 자유롭게 진솔하게 나타낸 산문 형식의 한 장르이다.
. 수필의 語源
수필은 서양어로는 essay이고 동양어로는 隨筆이다.
에세이는 프랑스이 몽테뉴에서 비롯되었고 시론(試論), 시도(試圖)라는 뜻이고 이것이 영구으로 건너가 발전되어 온 형식이다.
동양의 경우 '隨筆'이란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 이는 12세기 남송(南宋)의 홍매(洪邁)(11231202)로서 그가 쓴 「容  隨筆」에 연유한다.
한국의 경우는 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1260)을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며 용어상으로 조성건(趙性乾)의 한거수필(閑居隨筆, 1688), 연암 박지원(蓮岩 朴趾源, 17371805)일신수필(馹訊隨筆) 등을 들 수 있다.
본래 에세이는 '시금(試金)', '계획(計劃)'의 의미를 가진 말로 '계량(計量)하다', '음미(吟味)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의 「엑시게레 exigere」라는 어원에서 나왔다.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 몽테뉴이고 다음에 에세이라는 말을 써 넣어 이 용어가 쓰이도록 한 사람은 영국의 베이컨이 「명상록」이란 의미로 썼다.
. 수필의 종류
(1) 수필과 에세이
「영어의 essay라는 말에는 '評論'이라는 뜻과 '隨筆'이라는 뜻의 두 가지가 있다.
에세이를 보통 수필이라고 번역할 때, 평론부문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의 수필을 의미한다.(文德守, 「現代文章作法」, 서울靑雲出版社, 1964, p 261)"수필은 동양적인 에세이요, 에세이는 서구적 수필"이라고 윤오영씨는 말했다. 프랑스의 R.M 알베레스는 "에세이는 그 자체가 원래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된 문학"이라고 설명했으며 일본의 요시아 세이이찌(言田精一) "수필론에서 에세이는 구분해서 정의할 수 없다."고 정의했다.
(2) formal essay Informal essay
formal essay
객관적 진리와 무게있는 지식은 정연한 논리적 전개를 통해 나타낸 글(重隨筆, 논리적수필 輕隨筆)
Informal essay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고 정서와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글( 經隨筆, 서정수필 軟隨筆)
영문학에 있어서 유달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세이는 포오멀 에세이(formal essay)와 인포멀 에세이(Informal essay)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종류는 내용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전연 다른 것으로 그 후자가 우리가 말하는 수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포멀'이란 말은 正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객관적 진리와 무게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독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독자를 자극시키지 않고 마음을 늦추게 하는 글이다. 한가한 시간에 쓰여지는 글이며, 한가한 시간에 읽는 글이다.
이 에세이는 논문이 아니므로 무엇을 증명하거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여 필자의 주장을 독자에게 설명을 시키려 들지 않는다. 정연한 논리적 전개를 필요로 하지 않
으며, 오히려 遠廻와 脫線을 하다가 제길을 찾아 들어서는 버릇이 있다. 명상적이요, 철학에 가까운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조직적 체계를 설립시키지 아니한다. 그리
고 포멀 에세이는 반드시 정확해야 할 引用句, 引喩, 參照 등도 어느 정도의 誤診은 容認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포멀 에세이는 횡설수설하는 잡담은 아니다.
(3) essay Miscellany
'수필'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외국어로는 Miscellany  essay가 있다.
  Miscellany
우리 나라에서 흔히 통용되는 수필은 Miscellany에 속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身邊雜記나 感想文, 雜文을 일컬어 Miscellany라고 하는 데 그에 비추어 우리 나라에 쓰는 수필은 역시 그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부드럽고 정서적인 문체로서 엮어가며 스스로의 見聞 또는 感想을 우리의 수필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essay
Miscellany에 비하면 어떤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小論文, 論說에 가까운 것이다.
중국의 예를 빌린다면 論, , , , 序記, 說 같은 것이 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수필의 특성
(1) 산문(散文)의 문학(文學)
 산문 정신이 강한 글, 소설, 희곡이 조탁(彫琢)된 글이라는 인상이 짙고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구성을 나타내지만 수필은 소재를 자기 생각에 나타나는대로 표현한 글; 자기 생활을 계획적인 의도없이 사실대로 드러낸 글이다.
(2) 고백적(告白的) 자조문학(自助文學)
소설과 희곡에서는 표현 뒤에 주제를 숨기지만 수필은 겉으로부터 그것을 드러낸다.
픽션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마음을 드러낸다. 자기의 취미, 지식, 이상,정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등과 습관까지도 솔직하게 노출시킨다.
스필쓰기는 자신의 삶과 인생을 진실의 거울 앞에 비춰보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진실이 바탕이 된다. 수필이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것도 진실에 입각한 고백적 자조문학임을 말한다. 수필은 ' 넌픽션'이라는 특징을 나타낸다.
(3) 무형식(無形式)의 형식문학
수필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을 말한다. , 소설, 희곡에 비하여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에 형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형식은 내용 즉, 정서, 상상, 사상을 예술화하는 그릇이므로 어떤 장르이든 문학형식의 제약을 받지만 수필은 비교적 제약을 덜 받고 자유롭게 써 갈 수가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예컨대 구성이 없는 문학장르가 있을 수 없지만, 수필엔 의도성, 계획성보다 써내려가는 중에 지연스럽게 구성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조화의 미와 작자의 체취와 멋을 드러낸다.
(4) 다양(多樣)한 제재(題材)의 문학(文學)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무엇을 담든 필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 자연풍물, 신변잡사와 보고 느낀 것 모두가 수필의 조재가 된다.
다만 이를 가지고 어떻게 '수필' 로 빚어낼 것인가 하는 것은 필자의 솜씨의 경지에 다라 달라진다. 산문시적 수필이 된 수 있고, 유머가 흐르는 경쾌한 산문이 된 수 있고, 운취가 그윽한 서정수필, 논리정연한 논리수필, 예리한 비판정신이 번쩍이는 비평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주변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원대하고 심오한 사상, 철학에 이르기까지 양한 소재를 담을 수 있는 문학이다.
(5)해학(諧謔)·비평정신(批評精神)의 문학(文學)
수필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냉철한 비판정신과 내일을 제시해 주는 지표가 깃들어야 한다.
유머, 지혜와 위트, 비판정신은 수필의 본질이다.
(6) 개성의 문학
수필은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학이다. 자신의 주장, 주의, 세계, 발견,명상, 습관, 체취 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데서 수필의 묘미가 있다.
따라서 자신만의 독자성과 체험의 세계, 정서의 시계를 펼치는 것이야말로 수필의 개성(個性)을 꽃피우는 일이다.
(7)경지의 문학(文學)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그릇이므로, 인생경지에 따라 수필의 경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 소설, 희곡은 작가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수필은 곧 자신(삶과 인생)이므로 작가와 작품은 일체이며 동일시된다.
심오한 사상, 고매한 인품, 유머와 위트, 다양한 체험, 폭넓은 지식, 따뜻한 인간애 등이 좋은 수필가가 될 수 있는 요건이 되며, 이를 갖추기 위해 부단한 인격의 도야 훌륭한 인생연마가 필요하다.
좋은 수필을 만난다는 것은 곧 좋은 인간을 만난다는 것을 말한다.
수필의 경지는 바로 인생의 경지를 뜻한다.
수필이 경지의 문학인 까닭에 완성의 문학이 아니라, 깨달으며 완성을 향해 나가는 구도의 문학인 것이다.
 
3강 수필의 모습
                                                    鄭 木 日
 수필은 고해성사와도 같다.
 촛불 앞에서 자신이 지닌 모습을 그대로 진실의 거울 앞에 비춰보이는 일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선 맑게 닭여진 마음의 거울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촛불 앞에서 행하는 고해성사, 그 자체는 아니다. 모든 것을 진실의 거울앞에 다 드러내 놓았을 때, 마음 속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다 흘리고 난 뒤의 독백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온갖 감정의 앙금과 갈등의 응어리를 눈물로서 씻어내고 자신의 영혼이 맑은 거울을 갖게 되었을 때, 수필의 모습은 비로소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참모습이며 영혼이다."
 무심결에 탄식처럼 토해내는 이 독백이 수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독백이 다 수필이 될 순 없다. 사람마다 지닌 마음의 거울은 제각기 다르다. 이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는 일이란, 곧 인격의 수련과 마음의 연마
를 말한다. 아무리 철학과 사상이 심오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수필가가 되기 위해선 마음의 연마가 필요하다. 마음의 거울에 삶을 어떻게 비춰내느냐 하는
것이 수필이다. , 철학과 사상, 학식이 수필의 요건이 될지언정, 수필 그 자체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요건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결부시켜 인생에 어떤 해석과 의
미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유의 것으로서, 독자들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
. 독백이되 그냥 자신의 푸념이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에게 공감과 새로운 발견과 의미를 제공해야만 수필이 될 수 있다.
 수필은 맑은 가을, 산야에 피어나는 들국화와 같다.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수수하고 소박하다. 자신을 과장해서 보이려거나 뽐내려 들지 않고, 진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걸음 물러선 마음의 여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겸허, 꾸밈없는 소박함 속에 수필의 향훈이 있다. 들국화는 화려한 모습은 아니나, 그냥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샘물에 막 얼굴을 씻고난 모습처럼 그 표정엔 맑은 고요가 가라앉아 있다. 단번에 눈길을 끄는 꽃은 아니나, 볼수록 아리잠직하고 샘물
을 길어 올리는 듯한 신비감이 깃들어 있다. 이 평온하고 정한(靜閑)한 발견과 경지가 수필의 참모습이 아닐까 한다.
 수필은 시와 소설의 중간 거리에 조촐하게 자리잡고 있다. 시의 정서적 율격, 소설의 사실적 재미를 함께 지니면서 시로는 토로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 소설로선 수
용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수채화일 것이다.
 시가 여백을 남긴 동양화라면, 소설은 사실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서양화에 비유될 수 있다. 수필은 시처럼 지나친 압축과 상징, 또한 비유를 수용하지 않고 소설처럼
장황하거나 독자들에게 흥미와 충격을 주어 현혹시키려 들지 않는다.
 수필은 시와 소설의 거리 중간쯤에서 시와 소설이 지닌 장점을 취하면서 특유의 빛깔을 만들어낸다. 수필은 전형적인 현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런 격조를 지님
으로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부담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 문득 깨달음을 주는 삶의 이야기, 평범한 생활인의 철학,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 해학을 제공한다. 수필의 친화력, 자연스러움은 누구나 쉽게 독자로 끌어들일 뿐 아니라, 글을 쓰고픈 마음을 갖게 한다. 이것이 수필이 갖는 장점이요, 특질의 하나다.
누구든지 써보라고 마음을 끌지만, 좋은 글을 빚어내기란 쉽지 않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항상 마음의 거울을 청결히 닦아두어야 하고, 그 거울에 인생의 멋과 정
감이 비춰져야 한다. 마음의 바탕에 심오한 사상, 고매한 인품, 삶의 철학과 명상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 향기가 배여나야 한다.
 수필은 마음의 대화이다.
 사람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지려 하고 남기고 싶어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가.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은 그가 엮어낸 인생 얘기가 오
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억되는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비록 역사에 남지 않는 인물일지라도,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름다운 이야기를 남겨놓은 사람들이다. 정의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 지순한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연인들, 평생동안 우정을 나눈 친구들, 가난했지만 고고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삶과 얘기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가 상대방의 가슴속에 감동의 등불이 되어 켜져 있을 순 없을까. 두고두고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향기로 남을 순 없을까. 수필은 긴 얘기가 아니다. 평범
하고도 소박한 이야기이나, 그 속에 비범의 세계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수필은 연꽃처럼 피어난다.
 남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진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어느날, 환한 연꽃첨럼 피어난다. 흙이 썩어야 연꽃을 피울 수 있듯이 냉대와 소외의 기다림 속에 한 송이 연꽃
이 피어난다. 수필은 원대한 포부나 찬란한 꿈을 지니지 않는다. 욕심으로부터 초탈한 마음의 경지, 소박한 생각이 피어올린 꽃일 따름이다. 자신의 가숨속까지 다 썩
힌 바탕에서 뜻밖에 연꽃이 피어난다. 연꽃을 피우려고 진흙구덩이 속에 자신을 묻고 기다릴 줄 알아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수필의 세계는 다양하다. 굳이 장미나 난()만이 꽃이 아니듯, 꽃마다 일생을 통해 피어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각자의 삶과 개성으로 피어낸 수필을 가꿔야 한다. 개성과 함께 자신이 추구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가진다든지, 전문성을 지니는 일도 중요한다. 한국인은 논리성보다 정서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지만, 얖으로는 논리적인 글, 철학적인 글, 명상적인 글도 많이 나와야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서 얼마나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며, 감동의 물결을 일으켜 놓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수필을 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을 쓰는 자세일 것이다. 시와 소설과 희곡과는 달리, 수필은 바로 자신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신변잡사(身邊雜事)의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진실의 발견, 본질의 탐구, 의미의 창출이 있어야 한다.
 수필이야말로, 어떤 글보다 진지하고 심오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풀꽃이 되어/개성있는 수필로
                                         鄭 木 日
 
나의 수필은 가야 토기였으면 한다.
청자나 백자처럼 우아하고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자기(磁器)가 될 수 없다.
고려청자에는 우리 나라의 해맑은 가을 하늘이 얹혀 있다. 조선 백자에는 봉창 문을 물들이는 달빛의 맛, 순백의 선미(禪味)가 깃들어 있다.
나의 수필은 그냥 토기였으면 한다. 토기는 청자나 백자와 같이 흙으로 빚었지만 매끄럽지 않고 눈을 끌지도않는다. 청자가 장미라면 백자는 난이요, 토기는 이름도
없는 풀꽃일 것이다.
나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냥 손으로 빚어 만든 토기 항아리에 더 정감을 느낀다. 문명의 얼굴을 쓰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체온이 느껴지는 토기는 천 년 전의 손길과 진솔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 준다.
토기 항아리엔 수천 년 전의 풀내음과 인간들의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빗살무늬 하나에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 짐승들의 뒤를 쫒던 숨소리, 들판에서 듣던 풀벌레 소리가 잠겨 있다.
자기는 흙을 빚어 천삼백 도 정도의 온도로 구워 낸다. 흙이 불 속에서 하나의 자기로 될 때까지 도공들은 자신의 영혼과 솜씨를 불에 태운다. 흙이 화염 속에서 자기가 될 때까지 도공들은 신열 속에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나 빛깔은 재주나 지혜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흙과 불과 도공의 영혼과 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보태어졌을 때라야만 명품(名品)을 얻을 수 있다.
청자이되 고려인의 마음이 맑게 비치는 신비스런 하늘빛은 아무리 마음을 맑게 닦아 낸 도공일지라도 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빛을 보듯, 한 그릇의 정화수를 대하듯 부드럽고 고요한 백자의 빛깔을 불 속에서 완성하는 일은 자신의 재주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흙과 불과 도공의 영혼이 어떤 영감을 얻어 일체감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에 무릎을 치는 명품 한 점을 얻을 수가 있다.
나의 수필은 그냥 덤덤하고 수수한 수필이길 바란다. 아예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지도,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열성과 인내도 없을뿐
더러 솜씨마저 시원하지 못하다.
그냥 소박하게 흙으로 마음대로 주물러서 빚고 싶다. 장식도 없이 세상에 남겨 놓아야 할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빚고 싶다.
하지만 흙은 좀 가려 쓰고 싶다. 내가 나서 자라던 고향 언덕의 흙, 동무들과 어울려서 뒹굴던 들판의 흙, 그리고 내가 묻힐 땅의 그 흙으로 빚고 싶다. 그래야 만이 나의 토기에는 나의 고향과 생각과 생명이 담겨질 것만 같다. 결국 내가 태어나서돌아가야 할 곳은 흙의 품인 것을 알기 때문에 …….
토기 항아리에 담긴 물, 풀꽃이 내 생각이며 나의 세계이다.
나의 수필은 난()이 아니다.
청초하고 우아한 기품이 깃든 난이 될 수는 없다. 그냥 풀꽃이나 민들레 같은 소박한 꽃이면 한다.
나의 수필은 고귀한 학()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학이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늘 높이 구름속에서 보리밭으로 떠어지면 자우자재로 노래부르는 종달새가 될 수 없을까.
고상하고 품위 있다거나 깨끗하다는 고정관념 속에 빠져 버리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는 자유, 어떤 형식,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것이 수필의 매력이다. 꼭 학일 필요가 없고 학이라야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들판의 허수아비에 놀라 달아나는 참새나 미루나무 꼭대기에 보금자리를 지은 까치가 돼도 좋으리라.
나의 수필, 내가 쓰고자 하는 수필은 완숙한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가다듬는 일은 일생을 수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좋은 문장은 곧 좋은 인품과 사상과 인생관을 포용한다.
완숙한 문장이기보다는 서툴러 보이나 개성적인 문장을 쓰고 싶다. 문장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물을 보는 눈과 느낌이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사물에서 나만의 발견, 어떤 내 나름대로의 생각한 조각을 어떻게 찾아낼 수 없을까.
나의 발견법, 명상법, 그리고 조촐한 미학을 어떻게 진실되게 형상화 시켜 놓을 수 있을까…. 나는 표현보다도 먼저 발견과 명상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결국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서 생명의 신비, 우주의 생명률(生命律)을 찾아보려는 것이 내가 수필을 쓰는 데 항상 갖는 고민이며 관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늘 영감적인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달빛을 머금은 풀꽃과 같아질 수 있으며, 고기장수 아주머니의 심정과 같아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같아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다만 마음을 맑게 닦아 두어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두는 것이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길임을 터득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수필은 고상하지 않으나 속되지 않고, 다정한 벗님의 편지를 받아 읽을 때처럼 그리움을 전해 주길 원한다. 국화꽃 곁에서 읽는 벗님의 편지글에서처럼 잊었던 추억의 등불이 켜지고 다시금 순수한 정의 샘이 솟아났으면…….
나는 되도록 형용사와 부사, 비유법을 쓰지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형용사와 부사는 얼마나 차이가 많으며 과장되기 쉬운가. 주어와 술어로써 든든한 뿌리를 박고 과장법과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의 실체를 진실 되게 나타낼 수 없을까…. 뿌리가 든든해야 한다. 형용사나 과장법은 무성한 잎새이거나 화려한 단풍잎일 뿐 겨울이면 떨어져 버릴 것이다. 미문(美文)이란 사치스런 옷에 불과하다.
나의 수필, 나의 삶이여. 그것은 무명의 한 작은 별이며, 풀숲에 피어 아직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않는 풀꽃이다.
 
5강 수필의 서두(序頭)
 
   
 
 모두(冒頭)라고도 일컫는 서두의 어의(語意)는 대개 발단, 시작의 개념을 갖는다.
단문(短文)형식의 수필에 있어선 서두가 차지하는 비중이 시, 소설, 희곡등에 비해 훨씬 높다.
 서두는 '첫인상' '일기예보' '예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서두라는 도입부가 좋지 않으면 끝까지 읽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서두'는 글의 격()과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 한 줄의 서두를 끄집에 내기위해 많은 시간에 걸쳐 고심한다. 헝크러진 생각의 실타래에서 첫머리를 찾아냈다면, 마음속에 이미 대강의 구성까지 이뤄졌다고 봐도 좋다. 고심 끝에 서두를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셈이다.
 단 한 줄의 서두를 얻기위해 피나는 산고(産苦)의 아품을 경험하기도 하고, 우연하게 쉽게 서두를 찾아낼 때도 있다.
 수필에 있어서 서두는 '첫머리'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필의 경지랄까, 솜씨를 첫눈에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수필가 한흑구는 『나무』라는 수필의 서두를 찾아내는데 5, 『보리』라는 서두를 얻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고 술회했다.
 『나무』라는 작품의 서두를 끄집어내기 위해 수없이 찢고 다시 지우고 쓰고 하길 5년만에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라는 서두를 건지는데 성공했다. 이 서두는 『나무』의 결구(結句)이기도 하다.
 유명작가의 경우도 한 글의 서두를 얻기 위해, 오랜 고뇌의 진통을 겪는다는 것을 안다면, 신인이나 초보자들은 '서두'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수필의 서두가 갖추어야 할 요건등에 대해서 任軒永(문학평론가)씨는 이렇게 제시한다.
 
1) 이색적인 의경제시나 사람의 흥미를 끌게 할 것
2) 속담, 격언, 일화, 명언을 인용한다.
3) 사실과 사건, 생각등을 거두절미하고 쑥 끄집어 낸다.
4) 장소나 시간, 분위기, 자연, 환경, 인물의 묘사들으로 시작한다.
5) 가정적 설문, 문제점 제시, 대화, 독백, 고전(古典)의 출전을 밝히는 것, 강조하고 싶은 것등을 제시한다.
6) 결론 부분, 강조하고 싶은 것등을 앞세운다.
 
수필 서두에 대한 유의점
 
 수필의 서두에 있어서 유의점을 든다면 다음 사항을 생각할 수 있다.
1) 소박하고 차분하게, 글의 성격에 맞아야 한다.
2) 진부한 전제나 설명을 하지 않도록 한다.
3) 흥미, 기대, 호기심을 주도록 할 것
4) 함축, 상징성이 있도록 할 것
5) 본론의 내용과 동떨어진 것이 아닐 것
6) 독자들에게 전체 흐름을 혼돈시키지 말 것
7) 본론과 밀접하지 않은 부분을 도입부에 넣어서 처음부터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을 것
8) 서두는 가능한 간결하게 할 것
 
수필 서두쓰기의 실제
 
 수필의 서두를 어떻게 시작할까?
 첫머리 도입의 방법과 실제를 몇가지로 예시해 본다. 작가의 성격, 취향, 개성, 문체에 따라 '서두'의 모습도 달라진다.
 
1) 주제나 제목의 해석으로 시작
 보통 주제나 제목에 대한 해석과 관점을 끄집어 내면서 시작하므로서 주제를 선명하게 하고 흥미를 유발시키게 한다.
*김태길(金泰吉) 『낙엽』
 '낙엽이다.' - 서두가 간결하고 산뜻하다. 제목을 재인식 시켜주고 있다.
 '그것이 조락(凋落)이요, 죽음인 것이다.' -이는 결미인데 주제를 강조했다.
 
*이양하 『글』
 '글을 쓴지 오래다' - 서두가 차분하고 겸손하게 출발하면서 제목을 뒷받침하고 있다.
 ' … 만일 내게 애인이 있어 이 글을 재미나게 읽었노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 - 이 부분은 결미인데 주제를 강조했다.
 
*공덕룡(孔德龍) 『펜과 칼』
 '펜은 칼보다 강하다.'
 
2) 글을 쓰는 동기부터 시작
 
*김태문 『헤밍웨이가 사는 집』
 '지난 여름 미국 출장길에 키웨스트에 있는 헤밍웨이의 집을 찾아볼 기회를 가졌었다.'
 
*반숙자 『나의 가계부』
 '해마다 여성 잡지의 신년호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모 화장저의 가계부를 부록으로 내어놓고 있다. 십장생(十長生)의 그림이나 화려한 꽃무늬의 겉장을 보노라면, 살림하는 여자라면 누구나 「올해는 꼭 가계부를 써봐야!」하는 결심을 할직도 하다.'
 
*염정임 『침대에 관한 명상』
 "언제인가부터 나는 침대에 관한 글을 한 편 써 보고 싶었다.'
 
3) 묘사에서부터 시작한다.
*姜凡牛 『나는 아직도 49세』
 '병자년(丙子年)의 마지막 달력을 떼어버린다.'
 
*金時憲『빈자리』
 '아홉시가 되면 서둘러 집을 나선다. 손에는 끈달린 검은 가방이 늘어진다.'
 
*김영배 『5월이 열리는 뜨락에서』
 '오랜만에 목발짚은 몸을 엘리베이터에 싣고 내려와 현관 앞 콘크리트 난관에 기대고 섰다. 5개월만에 처음 나가본 바깥세상이다.'
 
*도창희 『임자없는 나룻배』
 '늦가을 삽삽한 강바람에 촐삭대는 나룻배 한 척이 강물에 떠있다. 수양버들 밑둥에 묶여 임자는 보이지 않는다. 부는 바람에 부대끼어 긴 고비의 탄력은 팽창할대
로 팽창해 있다. 금방이라도 글만 끊기면 달아날 듯 바람의 인력에 못이겨 선체만 기뚱거리고 있다.'
 
4) 설명에서 시작한다.
*김소운 『두잔씩 커피』
 '중년부인네 한분이 다방으로 들어와 커피를 마신 뒤에 '한잔 더'라고 두 번째 잔을 청했다.'
 
*서정범 『잘 먹어야 본전』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다.'는 말이 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말이 생겼을까. 내가 어원사전을 쓰고 있는데, 그러한 자료를 얻고 확인하기 위해 알타이어권인 터
, 위글, 가자르. 야크트 등 터키권과 몽골어, 부리야트어 등 몽골권과 만주 퉁구스어권인 오르촌, 에벵키, 에벵 우데헤, 나나이어 등의 시베리아를 현지 답사하면서
어학적인 자료외에 귀중한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철호 『색의 의미』
 '색이란 것은 남녀간에 말하는 그런 애정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변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란 두 가지의 형태로 구별할 수 있는데 첫째
는 모양을 나타내는 형색(形色)이며 둘째는 빛을 나타내는 현색(顯色)이다. 이 색이란 것을 불교에서는 형태가 있는 물질을 가리켜 색이라 말하고 있다.
 
*柳蕙子 『모차르트와 찰스램』
 '모차르트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로 자작곡을 연주했다. 성장 후에도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가장 좋아한 악기가 피아노였던 만큼 '두개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세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등 복수 피아노 작품과 '네 손을 위한 소나타'까지 남겼다.'
 
5) 대화에서 시작한다.
 
*이상보 『제 얼 지키기』
 ' "아 유 래디?"
  "."
  "세이 예스!"
  "예스!"
 1999 3 4일에 대한민국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른바 초등학교 영어학습 첫날의 광경이다.'
 
 - 초등학교 초기 영어교육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국어사랑'을 강조하는 글에서 첫장면을 대화체로 시작하면서 효과를 얻고 있다.
 
*고임순 『빈집』
 ' "어멈아. 밥 먹자꾸나."
  ", 어머님."
  "여기 있어요"
  "엄마 내용돈, 차비"
  "엄마 내 체육복"
  "그래 알았다. 알았어."
 아침이면 내 몸은 열이라도 모자란다.
 
- 주부가 아침에 겪는 일상의 풍경을 대화체로서 효과 있게 나타내고 있다.
 
*장인문 『청소이야기』
 ' "이 동네 사십니까?"
  "예 그렇소만,"
  "이 동네는 양반 동넵니다."
  "?"
  "한번 보이소, 담배꽁초나 휴지 조각 하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얼마전 택시 기사와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 필자가 살고 있는 마을로 주거지를 옮긴 이후 20년 가까이되는 세월 동안 골목 안길을 청소하는 등 노력으로 깨끗한 마을이 되었음을 얘기하는 글인데, 대화체 도입부로 깨끗한 동네의 인상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6) 인용에서 시작한다.
 
*이 숙 『바람』
 '바람이란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세상일을 가르친.'고 장자가 말했다.
 
*이희수 『외인촌』
 '하이얀 모래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의 고독한 그림속으로 파아란 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인문계 고등학교 문학 시간은 사실 詩를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시에 관한 문제를 푸는 시간이다. '
 
*박지연 『바가지』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다.
*안병욱 『인생은 예술처럼』
 '에드워드 카펜더는 '사랑은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7) 독백에서 시작한다.
 
*최규찬 『순진한 부자의 착각』
 '살다 보면서 개인 사정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간청을 고사(固辭)해야 할 때가 있다. 상대방은 나를 믿고 좋은 뜻으로 하는 부탁이지만 내 처지에서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그 간청을 거두도록 설득해야 할 경우에는 이만저만이 곤혹이 아니다.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가 혼례식의 주례이다.
 
*호병규 『거기 가는 길』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평을 본다. 몹시 피곤한 여정, 나는 지금 어디쯤 왔을까? 두 손을 허리에 받치고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본다. 속절없는 세월, 유수와 같다더니 어느덧 흘러간 60여 평생. 이제와 여기서니 꿈같은 세월이다.
 
8) 질문(의문)에서 시작한다.
 
*정숙자 『아버지를 닮은 불상』
 '택시 안에서 잠시 후면 만나게 될 그녀를 생각해 본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
 
*김진수 『기쁨』
 '누가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했는가.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기쁨의 바다'이기도 하다.'
 
*문형동 『지선이』
 "언니는 우리 아빠 봤어?"
 지선이는 지금 몇 살. 내 어린 조카이다.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아이여서 몹시 귀엽다.'
 
*허세욱 『조명의 안팎』
 '잔서가 아직도 기를 쓴느데 얼음판 구경이 웬말인가? 그것도 얼음위에 원무가 흐르고 조명이 왁자글 부서지는 아이스쇼 말이다.'
 
*박종숙 『바다』
 '바다, 그 마음의 평화는 어려서부터 오는 것일까? '
 
*강경애 『인간의 가치』
 '인간은 만들어 지는가. 영국의 유전학자는 잡념의 연구 끝에 복제 양() 돌리를 탄생시켰다.'
 
9) 상징이나 비유에서 시작한다.
*피천득 『순례』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다.'
 
*피천득 『수필』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정목일 『땅끝 마을 가는 길』
 '절은 산의 한 가운데, 고요의 한 복판에 있다.'
 
*김 학 『진짜, 아니되옵니다』
 '역사의 강물에는 건져올릴 물고기들이 많다.'
 
10) 일의 동기나 결과에서 시작한다.
 
*윤재천 『동행자의 이탈』
 '자동차의 정기점검에 들어갔다.'
 
*정명숙 『나이 값』
 '어느 벼룩시장을 지나다가 민화보았다.'
 
*김장호 『이승과 저승사이』
 '아내는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주영훈 『두 이야기』
 '책장 정리를 하는데 한 책갈피에서 누렇게 퇴색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배혜숙 『검정고무신』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샀다.'
 
*김정희 『매화 꽃 그늘에서』
 '새벽마다 나서는 남편의 등산길을 따라 나섰다. '
 
*지연희 『아들을 군에 보내며』
 '지난해 12월 초 큰 아들이 군에 입대를 했다.'
 
*오희숙 『낯선 전화요금 고지서』
 '때늦은 전화요금 고지서 한통이 날아왔다.'
 
11) 계절에서 시작한다.
 
*김병권 『그날의 증언』
 '7월이다. 태양의 달이라고 일컬어지는 7월의 산하는 육중한 녹음에 짖눌려 질식할 것 같다.'
 
*고임순 『해빙기』
 '4월의 나이아가라 폭포는 울고 있었다.'
 
*김구봉 『가을을 간다』
 '어느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나는 지금 소백산 연화봉 밑 구인사의 공명당 앞 뜰에 서 있다.'
 
*이귀복 『목련에게 바치는 연가』
 '입춘이 지나 구정을 넘기고 우수를 맞이할 무렵의 2월은 새순이 움트는 대지답게 젊고 싱그럽다. '
 
*박경룡 『찔레꽃』
 '찔레꽃은 지고 흔적도 없다. 연인처럼 왔다가 연인처럼 떠난 것이다. 청순한 5월의 신부여, 나는 너를 그리워하며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하는가.'
 
12) 사색에서 시작한다.
 
*배대균 『침묵이 흐르는 곳에…』
 '타인과 접촉하면서 행동이나 말을 한다면 이를 '대화'라 할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아닌 자신과 말을 한다면 그것은 '침묵'하는 것이다. 침묵! 이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위대한 정신적 세계이다. 조용히 침묵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득은 실로 엄청나다. 만약 그로부터 침묵을 앗아간다면 그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만큼 마음의 양식으로 인간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유정희(兪正姬) 『목련나무의 여운』
 '비오는 날, 창밖이 내다보이는 대청마루에 서서 뜰을 마주보며 두 눈 속에 담아둔 목련나무 두 그루를 떠올리고 상념에 잠긴다. 가을비에 젖고 있는 그루터기에 떨어진 낙엽들이 뒹굴고 있어 공허감으로 가슴이 가득해진다.'
 
*김시헌 『나무』
 '지금은 겨울이다. 대부분의 나무가 잠속에 들어갔다. 분주하게 일하던 봄 여름을 보내고, 낙엽의 가을을 맞이 하더니 어느덧 하늘을 쳐다보면서 표정없이 서있다.
가 큰 미루나무 아래를 거닐어 본다. 싸움의 흔적같은 어수선한 낙엽의 조각이 흩어져 있는데도 모목(母木)은 아랑곳 없다는 듯이 바람부는 겨울속에 알몸을 매놓고 단단한 자세로 잠들어 있다.
 
*류지연 『인연』
 ', 나의 삶속에 우뢰, 번뇌와도 같은 인연들이 더러 찾아든다면 내 인생에 얼마나 축복이랴…. 나는 '만남'이라는 낱말을 무척 좋아한다. 뜨거운 입김 사이로 쏟아져 흘러나오는 만남이라는 말의 표현은 나의 마음을 충분히 이게 하는 그리움을 지고 있다.'

1. 주제

1) 주제란 무엇인가?
주제와 구성과 상상을 문학의 3요소라 한다.
주제를 독일어로는 테마(Thema), 영어로는 (Theme), 혹은 서브젝트(Subject)라고 한다.
주제란 마디로 말해서 글의 중심 사상이다.
작가가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요, 주안점이다.
수필에는 뜻이 담겨야 한다.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본질, 핵심이 주제이다.
주제가 뚜렷하지 않으면 애매모호하여 무엇 때문에 글이며,
핵심이 무엇인지를 몰라 혼란을 일으킨다.
글을 짓는 데는 대개 순서와 방법이 있다.

첫째, 무엇을 쓸까? 하는 데서 주제(主題) 마련돼야 한다.
둘째, 주제에 알맞은 소재(素材) 캐내야 한다.
셋째, 주제와 소재를 갖고 구상을 한다. 따라서 글쓰는 방법은
쓰고 싶다 (중심 사상 = 뼈대),
뼈대에 살을 붙이기 위한 (재료) 구한다,
중심 사상에 따라 엮어 짜는 순서로 진행된다.
주제는 문장 전체를 거느리는 등뼈나 대들보와 같다.
문장 전체를 이끄는 사상적 기둥이다.
주제(主題), 주장(主張), 화제(話題) 따위를 통틀어서 중심 사상(中心 思想)이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소재나 흥미 있는 소재라 할지라도 주제에 맞추어야 한다.
주제에 꽃이 되고 향기가 주지 않는 소재는 가치와 소용이 없다.
주제 없는 문장은 목적지 없는 여행이나 다름없다.
행로 없이 산책을 나서서 보고 느낀 점을 썼더라도 발견을 통한 일치된 견해,
집약이 있어야 하며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글을 처음부터 주제를 설정해 놓고 전개해 가는 경우가 있고
글을 가는 과정에서 글쓰는 목적, 이유 등을 생각하면서 주제를 정하는 경우가 있다.

포멀에세이(베이컨식 에세이, 중수필) 경우는 보통 주제를 설정하고 쓰는 경우이고
인포멀에세이(몽테뉴식 에세이, 경수필) 경우엔 가는 중에 주제를 구체화할 수도 있다.
어떤 문학 장르이건 주제가 없이는 뼈대가 없는 건물에 불과하며
문학으로서의 형태를 유지할 없다.
그러므로 주제 설정은 문학의 성패와 직결된다.
주제 설정 형상화 과정에 있어서 유의점을 든다면 다음과 같다.

1.
주제의 선명성
2. 주제의 통일성
3. 주제의 일관성
4. 주제의 의미성

주제는 애매모호해서는 되며 독자들에게 뚜렷하게 전달될 있어야 하고,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수필에 주제를 여러 설정하면 작가의 핵심 사상이나
메시지가 무엇인가 의아하게 되고 혼란을 일으킨다.
또한 주제가 설정되면 소재의 수집, 구성, 전개 등이 어디까지나 주제를
살리기 위한 장치와 방법이 되어야 한다.
주제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인생과 결부하여 의미를 부여할 있는 것이 좋다.
주제의 드러냄에 있어서는 포멀에세이(중수필) 경우엔 선명하고 뚜렷하지만,
인포멀에세이(경수필) 경우엔 분명한 주제를 앞세우지 않고
독자들이 느끼고 생각하게 여운을 남기므로 더욱 인상을 깊게 만들기도 한다.

주제를 살리는 방법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뚜렷하게 부각시키느냐
간접적으로 은근하게 숨겨 놓느냐 하는 것은 작가에게 달려 있다.
주제는 작품 전체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문장의 부분,
또는 마무리 부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소재를 만나면서부터 주제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주제가 떠오르면서 소재를 찾는 경우가 있다.
주제를 설정하는 일은 독자가 글을 읽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일이다.

주제의 구실
주제가 분명하면 문장의 윤곽을 잡을 없다.
주제가 분명하면 문장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소재를 취재 선택하는 기준을 세울 있다.
주제가 분명하면 문장의 통일성과 일관성에 도움을 준다.

주제 설정의 유의점
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 왔던 일을 다뤄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분야에 관한 것일수록 좋다.

누구나 공감을 느낄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가질 있게 하려면 흥미성, 참신성, 시대성, 보편성, 의미성이 있어야 한다.

주제를 설정하기 위한 단계
→ →
주제의 탐색 주제의 정리 주제의 확정
무엇에 대해 자신의 능력에 자신의 견해를 것인가 맞춰 방향,
범위 한정 분명히 드러낼 문제 선택

1단계에서는 어떤 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
민족문화' 대해 글을 쓴다든지, '이민' 대해 글을 보겠다든지 하는 계획을 세울 있다.

2단계에서는 보고자 하는 주제의 내용을 정리하고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
자신이 주제를 충분히 다룰 있는 능력과 범위를 판단하여 정해야 한다.
터무니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소화해 없는 주제를 설정한다면, 어려움에 부딪치고 것이다.

3단계에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드러낼 있는 주제를 확정한다.

주제 의식 갖기
작가는 모름지기 주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평생을 통하여 다루고 싶은 중점 주제를 갖고,
이를 문장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어떤 소재를 모을 것이며,
압사, 취재, 문헌을 통해 예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자신만의 주제를 갖도록 힘쓰는 일이 중요하다.
뚜렷하고 의미 있는 주제를 개만 설정하여 평생을 통해 탐구해도 좋을 것이다.
주제가 분명하면 글쓰기의 방향이 잡혀 있기 때문에
'무엇을 쓸까?' 하는 고민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방향을 따라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주제(主題) 전달 방법
장편소설의 경우 여러 토막의 서사(敍事) 구성되므로
갈래 주제를 종합함으로써 주제를 설정할 있다.
이에 비해 수필은 주제가 표출되는 문학의 형식이다.
수필은 결국 나를 표현하는 것이고 , 소설에 비해 직설적으로 나타난다.

주제를 전달함에 있어 수필은 형식상 뚜렷한 특징이 있다.
예시(illustration) 부분과
일반화(generalization)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개개 사례의 구체적 서술이고,
개개의 사례가 지니는 개연적 의미를 군데에 묶어 일반화하는 과정이다.
과정에서 필자의 주관적 견해와 함께 주제가 담겨진다.
어떻게 배치하고 글을 엮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수필 전개의 요체가 된다.

<
균형>

언제나 직장에 제일 먼저 출근하는 P씨가 늦게 나왔다.
집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를 보고 동료가 물었다.
딱한 일이 벌어져서….
P
씨의 얘기는 이렇다.
도시 근교에 살고 있는 그이 집에선 5 전부터 진돗개를 키우고 있었다.
1 전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사흘 전에 귀여운 새끼를 마리나 낳았다.
고양이 식구가 늘어나자 P 가족들은 새끼 고양이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복했고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고양이 새끼들이 예쁘지요?
호랑이, 곰의 새끼도 예쁘단다.
아이들의 물음에 답해 주면서 P씨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가족들이 집에 드나들 때마다 새끼 고양이들을 들여다보며 자라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새끼건만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들이 앙증스럽도록 귀엽기만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진돗개가 별안간 어미 고양이를 물어 죽인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어미를 잃은 마리 새끼 고양이들을 바라보니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아용 젖통을 빨려 보았으나 먹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꼼짝없이 죽고 것이라는 하소연이었다.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생명이 위급한 처지일 그냥 죽게 내버려 수는 없는 일이다.
새끼 고양이들이 혼자서 있는 만큼 자라야 이웃에게 나눠주든지 있지 않겠는가….
P
씨의 고민을 짐작할 만했다.
나는 P씨의 집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개와 고양이를 기르는 전원 주택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개와 고양이는 집에서 주인의 보호 속에서 살고 있지만,
언제나 경쟁 관계로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주인의 관심과 애정에 따라서 삶의 기상도가 달라지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개와 고양이는 인간들이 보이는 사랑과 관심을 살피며 경쟁 상태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살아왔다.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평화와 공존을 유지했던 것은
그들을 기르는 인간의 평등한 베풂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면서부터 사랑의 베풂에 균형이 깨지고 말았다.
모든 가족들이 고양이에게만 관심을 갖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자,
개는 질투가 아닌 생존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동물들은 눈빛으로, 온몸으로 주인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삶을 영위해
것이다.
개로서는 고양이에게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것이 자신의 소외요
생존의 위협이나 다름없는 중대사였을 것이다.
, 내가 P씨였더라도 미처 깨닫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어미 고양이를 죽인 것은 바로 주인이라고 하지 않을 없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 진돗개에게도 평소처럼 사랑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고양이에게 더욱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했다면,
개에게도 고양이를 위해 똑같은 보살핌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동물들에게 주는 사랑도 이처럼 균형과 배려 속에서 행하여야만 비로소 화평을 이루는 이치인데,
하물며 자녀들을 기르는데 있어서 편애와 차별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미운 아이에게 하나 주고
사랑스런 아이에게 하나 든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가정에 평화를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애완동물을 탈없이 기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자녀들을 온전하고
원만하게 키우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사랑의 배려가 필요한 것인가.
가정의 평화는 가족들의 관심과 애정을 조화시켜 울리는 사랑의 오케스트라가 아닐 없다.
다음날 아침, P씨는 출근하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신기해요. 동물병원에 상담했더니, 고양이에게 먹이는 젖통이 따로 있었어요.
그걸 사용했더니, 새끼들이 빨아먹어요.
P
씨는 이제야 근심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 껄껄 웃고 있었다.
작품은 작가가 남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통해, 자신의 견해와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어미를 잃은 고양이 새끼
진돗개가 고양이 어미를 물어 죽임
균형이 깨어짐
자녀 사랑에 형평성이 중요하다. 편애는 좋지 않다.

대목이 직장 동료에게 들은 얘기를 나타낸 예시화 부분이고
일반화 부분으로 작가의 상상력과 해석이 들어간 일반화 부분
이다.
7] 수필의 문장
 
수필의 문장
 - 隨筆의 文章에 대하여 -
 

1. 문장은 곧 인생이다.
 
  문장은 어느 문학 장르나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짧은 글인 수필에 있어 서는 전부라도 과언이 아니다. 문장은 바로 사람이다. 는 말이 있듯이 수필 쓰기에 있어서 문장은 곧 수필이다. 는 말이 적용된다. 文章은 인생경지의 총체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2.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마음을 맑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영혼이 맑지 않으면 사물을 관조할 수도 없으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꾸밈없이 거울에 비춰 놓은 글이기에 마음이 거울처럼 깨끗하지 않고선 자신의 모습조차 비춰 보일 수 없을 것이다.
 
3. 문장의 연마는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문장의 연마는 바로 인생수련에서 얻어지는 것, 기교는 수련 끝에 얻게 되지만, 인생의 깨달음과 삶의 이치, 나아가 인생의 멋과 향훈은 고결한 인품과 아름다운 삶에서만이 얻어진다.
 
4. 수필의 문장은 진실해야 한다.
 
  진실의 힘, 진실의 미()가 수필의 생명이다. 소설과 시처럼 허구일 수 없는, 자신이 체험한 진솔한 인생의 발견이며 인생의 의미와 해석이 있기에 수필을 찾는다. 진실의 토로, 진실의 호소, 진실의 독백이 빛나게 한다.
 
5. 허황된 미사여구는 쓰지 않고 간결한 문장을……
 
  지나친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은 오히려 진실을 가리게 한다. 형용사와 부사의 남발은 자신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화장과 치장에 애쓰는 것과 같다. 이런 과시, 체면, 허위, 유혹, 눈속임을 떨쳐 버려 야 한다. 고운 단풍을 떨쳐 버리고 겨울 언덕에 서 있는 나무의 모습처럼 진실의 알몸,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선 문장이 간결해야 한다. 간결한 문장은 힘이 있고 아름답다.
 
6. 문장은 쉬워야 한다.
 
  알기 쉬운 문장이 좋은 글이며, 작가의 의도나 정서가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글이 좋은 글이다.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글, 모두가 공감하는 글이 최상의 문장이다.
 
7. 개성적인 문장이어야 한다.
 
  수필은 자신의 개성적인 인격의 반영이며, 사상의 표현이므로 작가의 특성, 독자성이 깃든 문장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8. 수필은 시와 소설의 중간 위치에 있는 글이다.
 
  시의 장점인 운율과 비유를 취하고 소설의 장점인 사실적 묘사와 줄거리를 취하여 가장 이상적인 문장을 만들어 가야 한다. 수필 문장은 시와 소설의 중간에서 두 장르의 특성과 장점을 취하여 조화시킨 이상적인 글이어야 한다.
 
9.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듯이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순접(그리고), 역접(그러나), 전환(그런데)의 접속어 사용을 남발하지 않는 게 좋다. 추상적인 표현 대신 구체적인 설명을, 전문용어 대신 평범한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10. 문장은 가락을 살리는 게 좋다.
 
  작가마다 개성이 있듯이 문장에도 호흡과 가락이 있다.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게 독자와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문장의 가락을 살려야 한다.
 
11. 첫머리는 첫인상이다.
 
  첫머리엔 전체 내용을 가장 압축하여 그 윤곽을 전해 주는 모습, 분위기, 이끌림이 있어야 한다. 문장에 있어서 서두야말로 글의 성패를 좌우한다.
 
12. 여운이 있어야 한다.
 
  작가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 버리면 글의 여운을 못 느낀다. 독자에게 상상력을 부여하여 생각하게 하는 글이 되게 해야 한다.
 
13. 품위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성공담, 과시, 자랑은 삼가는 것이 좋으며 저속, 비속어를 쓰지 않는 게 좋다. 수필엔 향기가 우러나야 한다.
 
14. 수필엔 인격의 향기가 우러나야 한다.
 
  수필은 작자의 인생이므로 글에서 인격의 향기가 우러나야 한다. 그러므로 인격의 도야에 힘을 쏟아야 한다.
 
15. 교훈적, 직설적 표현은 피하는 것이 좋다.
 
  수필은 간접적이고 은근하게 접근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설득력을 갖는다. 너무 교도적이고 직선적인 문장은 거부감을 갖는다.
 
 
 
<작품감상>
 
백자(白磁)와 홍매(紅梅)
 
鄭 木 日
 
  내가 자주 들르는 P 화랑 한구석, 사방탁자 위엔 목이 긴 조선 백자병이 하나 놓여 있다. 화랑에 들를 때마다 무심결에 그 백자병에 눈이 머물곤 했다. 담담한 그 빛깔과 태깔을 바라보고 있으면 목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온 곡선이 내 눈길과 마주쳤다. 모르긴 해도 백자는 달빛을 담아 둔 그릇 같았다. 볼수록 은은하고 마음이 비칠 듯한 그릇이었다.
  어느 날, 이 백자병에 홍매(紅梅)가 꽂혀 있었다. 화랑의 주인 S여사의 솜씨였다. 목이 긴 조선 백자의 미끄러지는 곡선미와 쭉쭉 뻗은 가지에 점점이 맺힌 붉은 꽃망울 …….
  백자와 홍매의 만남이야말로 기막힌 조화의 극치이며 대화이다. 그저 할말을 잊어버리고 마음으로 주고받는 대화는 어떤 말일까. 서로 은밀한 얘기로써 매화 가지에 물이 오를 때 백자는 그윽한 달빛이 되어 피리 소리를 띠고 있는 것일까.
  꽃병은 꽃을 꽂는 그릇이지만, 마음을 담아 두는 그릇이다. 담는 이에 따라 병도 다르고 꽃도 다르다. 또한 이 꽃병을 꽂는 위치도 달라진다.
  조선 백자병이 사방탁자 위에 올려져 있을 때, 백자병에 홍매가 꽂혀 있을 때, 시간과 공간의 만남, 그 의미와 멋은 사뭇 달라진다. 이런 멋의 깊이, 눈썰미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백자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눠 정이 들대로 들어야 그 맛을 터득하게 되는 법이다.
  백자를 어느 공간의 어디에 놓아두어야 할까. 그것을 깨닫기에도 오랜 세월이 걸린다. 더군다나 백자에 어떤 꽃을 꽂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선 하나의 재능이요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우선 병이든지 항아리든지 간에 꽃을 꽂을 그릇을 잘 알지 않으면 안 된 듯 싶다. 오랫동안 항아리를 쳐다보며 어떤 꽃을 꽂을 것인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의 경지인 것이다.
  드디어 매화가 피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가지를 꺾을 것인가 생각하는 것은 선()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매화나무 아래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한 송이 매화가 맺히기까지의 전 과정을 생각하면서 백자 항아리의 흰 곡선을 떠올릴 것이다. 아무 가지나 꺾는 법이 아니다. 나뭇가지 밑에서 조용히 바라보면서 생각해 둔 것― 마음에 드는 가지 한 가지를 꺾어 항아리에 담으면 되는 것이다. 눈에 거슬리는 두 세 가지를 잘라 내고 꽂으면 그만이다.
  그냥 한 가지면 족하다. 소탈하게 툭 던져 담아 두면 될 것이다. 여기에 어떤 기교나 방법이 따로 필요치 않다. 백자 항아리를 그냥 두고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데 꽃을 담았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어머님은 안방의 탁자 위에 흰 책보를 펴놓으시고 그 위 백자 항아리에 복사꽃이나 살구꽃을 꽂아 두셨다. 항아리에 물을 넣어 줄 때도 옥양목 책보에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정성을 들이셨다.
  며칠이 지나고 나면 책보 위에 꽃잎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떨어진 꽃잎을 책보에 싸서 바깥에 나가시어 조용히 털고 오셨다.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을 대하면, 지금도 어릴 적의 흰 책보 위에 단정히 놓인 백자 항아리와 복사꽃 이 떠오르며 향긋한 꽃 내음을 느낀다.
  요즘엔 꽃꽂이를 수반에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꽃꽂이에 대한 책과 강습회도 자주 열린다. 현대 여성들이라면 꽃꽂이의 기초 정도는 익혀야만 행세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의 꽃꽂이는 자연미보다 너무 기교적인 조형미에 치중하는 감이 없지 않다. 이쪽의 가지가 이렇게 뻗었으니, 저 쪽의 가지는 요렇게 뻗어야 한다는 식의 공식적인 기교에 얽매이고 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나 깊고 고요한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형식적인 미는 있지만,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 어쩌면 수필을 쓰는 법도 꽃을 꽂는 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필이라는 문학 형식이 꽃을 꽂는 그릇이라면 꽃을 꽂되 어떤 꽃을 꽂아야만 되는 것일까.
  겨우내 매화 피기를 기다리며 항아리에 물을 채워 두는 마음 ― 매화나무 아래서 어떤 가지를 한 가지만 꺾을까 곰곰 생각하는 경지가 수필을 쓸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한다.
  소탈하게 한 가지만 툭 꺾어 항아리에 던져 담은 멋, 이것이야말로 수필을 쓰는 비법이 아닐까. 노력도 없이 짧은 시간에 단숨에 멋들어진 꽃꽂이 솜씨를 보이려는 생각은 무모한 것이다.
  항아리에 홍매 한 가지만으로도 족한 것인데 나는 어리석게도 장미, 라일락, 튤립, 안개꽃 등 보이는 대로 욕심을 부려 왔지 않았는가.
역시 항아리에 꽃을 꽂는 법을 터득하려면 먼저 마음을 맑게 닦아 달빛이 쌓일 수 있는 깊이와 백자의 담담한 선미(禪美)를 알지 않으면 안될 듯 싶다.
  누구나 항아리에 꽃을 꽂을 수 있는 것처럼 수필도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백자 항아리가 지니는 미의 세계에 도달하기도 어려운 일이고 여기에 어울리는 꽃을 꽂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어릴 적에 하얀 책보 위 백자 항아리에 살구꽃을 꽂아 놓으시던 우리 어머님 같은 분은 어쩌면 꽃꽂이 솜씨만은 보통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꽃꽂이 전시장에 출품된 눈부시게 화려하고 정교한 솜씨의 작품들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항아리에 그냥 꽃가지를 꺾어 담아 놓으시던 우리 어머님보다 점수를 더 주고 싶지 않다.
  P 화랑의 사방탁자 위 조선 백자병의 매화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쉰다. 홍매는 가엾게도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며칠 후면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지만, 백자는 사방탁자 위에 언제나 그래도 있을 것이다.
  한 순간에 잠깐 피어 지는 매화와 죽지 않는 생명을 지닌 백자가 이처럼 기막히게 어울릴 수 있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백자가 홍매와 만나 더 우아롭고 향기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고, 홍매 역시 백자를 만나서 그 자태를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다.
  백자와 홍매의 만남도 인연이다. 항아리는 항아리대로, 홍매는 홍매대로 눈을 감고 조용히 만남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홍매가 아니더라도 백자의 태깔에 어울리는 꽃을 알고서 꽂는 법을 터득할 수 없을까.
  나도 백자 항아리의 매화와 같은 수필을 한 편이라도 써 보고 싶다.
8] 소재란 무엇인가
 
소재론(素材論)
 

1. 소재란 무엇인가?
 
  흔히 재료나 바탕을 일컫는 말이다.
  '―감', '―거리'를 말하며, 주제를 살리는 데 필요한 선택적인 재료를 제재(題材)라고도 한다.
  재료나 바탕이라고 하더라도 문학의 소재와 미술의 소재는 개념상의 차이가 있다.
  예컨대 공예의 경우만 하더라도 소재에 따라서 목공예(木工藝), 석공예(石工藝), 금속공예, 유리공예, 칠보공예, 도자기공예 등으로 분류가 되며, 이것이 곧 문학의 소재와 동일한 개념은 아닌 것이다.
  공예나 조각에 있어서 재료(소재)는 작품을 형상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물질을 가리키지만, 문학의 소재인 자연물, 인간사(人間事), 느낌과 상상 등은 정신적인 대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 소설, 희곡, 수필 등 어느 문학장르이든 글감이 없이는 글을 써 나갈 수 없다. 집을 지으려면 나무, 시멘트, , 기와 등이 필요하듯 글을 쓰려면 글감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

  수필에 있어선 글감(소재)은 무궁무진하다.
  다른 문학장르와는 달리 수필의 소재는 무엇이든 다 수용할 수 있다.

  ① 자신이 경험한 신변잡사
  ② 자연에 대한 관찰, 감상
  ③ 자신의 생각, 주의, 주관, 견해
  ④ 사회생활, 제도, 풍습, 양식, 인정 등 세간사(世間事)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

  수필은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든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 (金晋燮)
  인간성에 관한 것이나 관습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교육, 과학, 정치, 경제, 종교, 스포츠 등의 모든 방면의 것을 제재로 할 수 있다. (白鐵)
  평론의 대상은 문학이요, 수필의 대상은 사유(思惟)의 전영야(全領野)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수필인 것이다. (金東里)

  수필의 글감은 천지간(天地間)의 모든 사물과 인간사(人間事)와 인간이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해당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들이 수필의 소재(제재)가 될 수는 있지만, 필자의 선택에 따라 글감이 정해지면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필자의 안목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될 수 있어도 필자의 눈에 들어 선택되지 않으면 소재가 아닌 것이다. 소재를 많이 가진 작가가 있고, 소재 빈곤으로 글을 쓰지 못해 고민하는 작가도 있다.
 
2. 수필에서의 소재의 중요성
 
  수필은 소설, 희곡에 비해 비교적 짧은 산문이기 때문에 소재의 선택 여부에 따라 수필의 성패가 좌우된다고도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물과 세간사(世間事) 중에서 작가가 어느 것을 소재로 선택하게 될 때는 마음속에서 주제와 구성까지를 함께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소재 선택은 작가가 지금까지의 삶을 통한 총체적인 가치 기준의 발동이며, 안목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소재 선택에 자신의 취향, 관심, 개성이 작용하며 품격, 미의식, 인생관, 가치관이 포함된다. 수필집의 목차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삶의 모습, 의식, 정신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이 까닭이다.
  수필은 자신의 삶의 모습과 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학이므로 소재 선택이 곧 문학의 성패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장르 가운데서 수필 소재의 비중은 소설이나 희곡에 비하여 현저하게 크고 무겁다.
  하나의 자연물에서, 친구의 얘기에서, 눈이나 비가 오는 모습에서 갖는 느낌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지만, 소설이나 희곡은 줄거리가 있어야 한다.
  오물, 변소 등 악취가 나는 소재를 다루더라도 글 속에 고결한 인품의 향기를 뿜는 사람이 있고, , 매화 등 고아한 향기를 내는 소재를 다루더라도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다. 소재 선택도 중요한 것이지만, 어떻게 빚어내느냐(형상화)하는 역량과 솜씨에 따라 그 경지는 달라진다. 돌멩이, 모래알을 그냥 보잘 데 없는 것으로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 소재에 몇 천년의 세월과 삶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많은 소재들 중에서 소재를 선택할 줄 아는 안목, 그리고 이 소재를 바탕으로 작품으로 빚어내는 솜씨가 있어야만 자질을 갖춘 수필가라 할 것이다.
 
3. 소재(素材) 찾기의 요령
 
  수많은 소재감 가운데서 어떤 것을 나의 글감으로 골라잡을 것인가?
  이것은 쉬운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다. 어느 것 하나, 마음놓고 골라잡을 수 있게 만만한 게 없다.
  소재감을 그냥 봐 넘겨서는 안 된다. 소재감에서 나를 찾는 의식, 소재에서 인생적인 것을 찾아보는 의식이 있어야만 소재가 눈에 띈다.
  백일장에서 나무라는 제목이 나왔다고 생각해 보자. 백일장에 참가한 사람들은 저마다 나무를 떠올리면서 어떻게 써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때, 나무라는 대상만을 생각할 게 아니라, 나무와 나, 나무와 4계절, 나무와 해, 나무의 삶, 나무와 인생 등으로 연관시켜 시야를 넓혀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주제와 구성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소재에서 인생과 관련하여 그 어떤 모습, 성격, 가치, 의미를 발견하고 생각할 줄 아는 힘, 그것이 바로 작가의 안목이다.
  소재에서 인생적인 것을 찾아보는 작업이 곧 글을 쓰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① 대상으로서의 소재감
  ② 소재감에서 나를 찾는 작업 → 소재와 나를 결부시킴
  ③ 소재감에서 인생적인 것을 찾아보는 작업 → 연관화 작업
 
  ① 은 단순, 평면적이어서 좋은 글이 나오기 어렵다.
  , ③은 소재감에서 인생과 결부, 연관화시킴으로써 대상이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소재감에서 인생적인 것을 찾아보는 연관화 작업이 이뤄지려면 △관찰 △연상(인생과 결부) △의미 부여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연관화 작업으로 다음의 방법이 유용하다.
 
 . 동질성 찾기

    두 가지 이상의 소재에서 동질성을 찾아 비교하는 방법
   ㅇ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수냑)
   ㅇ 「나의 사랑하는 생활」(피천득)
 
 . 이질성 찾기

   두 가지 이상의 소재에서 이질성을 찾아 비교하는 방법
  ㅇ 「아내와 나」 (김태원)
 
 . 상반성 찾기

   두 가지 이상의 소재에서 상반성을 찾아 비교하는 방법
   ㅇ 「세느강과 청개천」(정봉구)
 
 . 개성 찾기

   두 가지 이상의 소재에서 각각 개성을 찾아 비교하는 방법 
   ㅇ 「달빛 백자」(정목일)
 
  소재감이 궁할 때는 어디서 구해 오나? 하고 궁리를 해 보아야 한다.
  소재를 잘 찾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작가라 할 것이다.
 
  ○ 과거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뒤돌아 혹은 삶의 성찰을 통해 깨달음과 교훈 을 얻을 게 없는가 더듬어 본다. 일기장, 메모장, 사진첩, 편지철 등 이 소재감을 제공해 준다.
 
  ○ 현재

   오늘날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현장과 모습을 살펴보면서, 삶의 질()과 인생의 경지를 높이려는 노력을 생각해 본다.
독서, 예술 감상, 여행, 대화, 교육, 취미활동 등의 노력에서 소재를 얻을 수 있다.
 
  ○ 미래

   미래에 대한 대응과 삶의 설계를 통해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길의 모색과 소재를 얻을 수 있다. 상상, 계획, 희망 등을 펼쳐 봄으로써 소재를 얻을 수 있다.

  처음 수필을 써 보려는 사람들에겐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과 일, 감명을 받았던 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일,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한 일, 가장 아끼는 것이나 사랑하는 일들 등에 대해 쓴다면 쓸거리가 많아 쉽게 풀려질 것이다.
 
  소재 찾기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의 수많은 소재감 중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소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발견하는 안목을 넓히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이 일은 단숨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인생 체험과 경지에 따라 얻어지는 것인 만큼 부단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소재 발견과 선택은 이것을 가지고 주제에 맞게 작품으로 빚어내야 하므로 형상화하는 (글을 써 나가는) 과정에서 무리 없이 소화해 낼 수 있는 것으로 골라야 할 것이다.
 
  ○ 관심에서부터 발견

   소재 찾기는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찾는 것이 글을 써 나가는데 무리가 없다. 관심 분야는 늘 자신이 주의 깊게 통찰하고 생각해 오던 것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다.
  예컨대 야생화의 생태, 나무들의 관찰, 패션, 수집, 취미, 사상, 주의 등에 있어서 일관성 전문성을 가지고 탐구하는 자세와 실천이 뒷받침돼야 한다.
 
  ○ 주변에서부터

  먼데서, 고귀한 것에서 소재를 찾으려 들지 말고,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가까운데서,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 → 가정(가족) → 이웃(친구) → 사회 → 국가 → 세계로 소재를 나에서부터 밀접하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점차 확대해 나간다.
  일상사 중에서, 단순하고 스쳐 가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 일들은 내 인생에 무슨 흔적을 남기는가? ― 이런 발상과 시각으로 삶을 두루 살피는 가운데서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소재들이 광채를 내고 다가올 수 있다. 주변에서부터 소재를 찾아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 옛 것과 새로운 것에서

   삶은 언제나 과거 ― 현재 ― 미래로 진행된다. 옛 것은 과거의 내 모습 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과 과거의 삶을 비교 점검하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삶을 예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과 미래는 무턱대고 뿌리 없이 피어난 것이 아니고, 과거라는 토양에 서 이어져 온 것인 만큼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를 보고, 또한 오늘의 삶에서 과거(역사)를 통찰하는 눈을 가짐으로써 변화와 비교 선상에서 소재를 발견할 수 있다.
 
  ○ 체험의 확대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체험의 한계를 부수고 확대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취재, 여행, 탐구활동 등은 직접적 체험의 확대가 되며, 독서, 예술감상, 얘기 듣기 등은 간접 체험의 확대이다.
  체험의 확대는 넓게 깊게 그리고 높게 사유의 폭을 확대하고, 새로운 세계로 눈을 뜨는 것인 만큼 글을 쓰는 동기를 부여해 준다.
 
4. 어떤 소재가 좋은가
 
  어떤 소재가 좋은가? 하는 점은 작가에 따라서, 또한 독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보편적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좋은 소재의 요건을 생각해 본다.
 
 . 흥미성

   아무리 분할성이 뛰어난 작품이라 할지라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독자들에게 외면 당한다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성 속에는 흥미성까지도 포용하고 있어야 한다.
독자에게 흥미를 주는 대상(소재)이어야만 친근감을 얻을 수가 있다.
 
 . 참신성

   사람들의 관심을 언제나 새로움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다. 예술은 기존의 틀과 질서를 깨고 새로운 질서와 세계를 구축하려는 데서 이뤄진다.
  소재 자체가 구태의연한 것이라든지, 일상에서 언제나 대면하는 것들이라면 독자들에게 흥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독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 탐구, 발견, 생각을 펼치는 데서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한다.
  이 새로움은 독자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참신성은 새로운 체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겪는 일상생활에서, 혹은 모두가 진부하다고 느끼는 평범한 것들에서 작가가 얼마든지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참신성을 불어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소재 자체가 참신하면 더욱 좋겠지만, 평범 속에서 비범을 발견할 줄 아는 새로움의 눈과 진부한 것에서도 전연 새로운 발상과 해석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안목과 경지에서도 참신성을 느낄 수가 있다.
  참신성은 깊이에의 천착이며 명상을 통한 발견에서도 얻어진다.
 
 . 특이성

   소재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경험하기 힘든 특이성, 전문성이 있다면 독자의 관심을 끄는 요건이 된다.
  정신과 전문의, 동물사육사, 곤충연구가, 기상관측사, 식물재배가, 탐험가, 오지여행가 등의 글에서는 특이한 체험 세계를 펼치므로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게 된다.
  수필가들도 자신만의 탐구분야를 개척하여야 하며 전문가 이상의 지식과 연구로 수필의 영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 개성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보다 자신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소재 발견과 선택에 있어서 자기 개성과 잘 맞는 것을 고르는 게 좋다. 개성에 맞는 소재이어야만 유감없이 자신의 체험세계를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다.
  얌전하고 도덕률에 길들여진 사람이 파격적인 소재나 유머, 위트 등을 다룬다면 흥미를 불어 일으키겠지만, 무리 없이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생기발랄한 성격의 소유자는 경쾌하고 발랄함이 잘 드러나는 소재를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소재찾기의 관점
 
 . 소재발견의 과정

  1) 관심

   우연하게 소재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재를 찾기 위해서는 항상 소재를 찾으려는 의식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소재감 중에서 구체적으로 소재로 선택하고 싶은 것이 발견되면,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한다. 발견과 관심은 밀접한 거리에서 상관돼 있다. 관심을 갖는데서 몰랐던 세계나 특징을 포착할 수 있고 소재와의 접근을 꾀할 수 있다.
 
  2) 관찰

   관심을 가진 소재에 대해서는 이모저모를 관찰한다. 무엇보다 소재가 가진 전모와 세계를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 세밀한 관찰이 있어야 한다.
 
  3) 교감

  소재와 자신이 일체감을 갖기 위해서는 마음을 통해야 한다. 서로 정()이 들도록 말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컨대 꽃, 나무, , 산 … 등을 피상적으로 보지 않고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 교감할 수 있어야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4) 의미부여

   소재의 발견 → 관심 → 관찰 → 교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이나 인생과 결부시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때엔 구체적인 구성이나 윤곽보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생각 속의 의미 부여를 말한다.
 
 . 소재 찾기의 관점

  여행이나 어떤 일을 동시에 경험했으면서도 이를 소재로 선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관점에 따라 소재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소재를 잘 찾으려면 안목을 넓혀야 한다.
 
  1) 뒤집어보기

   사물, 사건, 입장을 자기편에서 일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쌍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의외로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고개를 다리 사이로 넣어 거꾸로 바라보는 풍경은 일상적으로 바라보던 풍경과 딴판으로 보인다. 뒤집어 보는 시각에서 포용성, 상대성을 얻을 수 있다.
 
  2) 전체로 보기

   한 물체, 하나의 사건을 그 자체만으로 살필게 아니라, 시대, 환경, 문화, 역사적 측면에서 통찰한다. 부분적인 면만 보지 않고 전체성으로 시. 공간적인 안목에서 살피게 될 때 안목과 사유가 확대된다.
 
  3) 내면 보기

   외형적으로나 표피적으로만 보지 않고 내면을 들여 다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내면을 보기 위해서는 명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면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안목이야말로 비범의 경지를 얻는 길이라 할 것이다.
 
6. 소재를 찾기 위한 준비물
 
  언제 떠오를지 모를 참신하고 기발한 생각, 자연물에서 얻는 어떤 느낌, 새로운 발견, 흥미로운 얘기거리 등을 놓치지 않으려면 평소에 메모 습관을 길러야 하며 항상 기록에 필요한 준비물을 구비하여야 한다.
 
 . 메모장과 필기구

  메모장과 필기구(23)는 필수 휴대품이다. 이것이 없다면 무기없는 병사나 다름없다.
 
 . 사진기

기록만으로 부족할 때, 현장 느낌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는 카메라로 촬영해 둘 필요가 있다.
 
 . 녹음기

생생한 사투리, 토속어, 대화체를 녹취하기 위해서 녹음기를 휴대하는 것이 요령이다.
 
7. 소재 찾기의 방법
 
실제로 소재 찾기의 방법으로 유용한 일을 알아본다.
 
 . 독서

  독서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연상시켜 소재 거리를 발견할 수 있고, 간접 체험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견해를 나타낼 수도 있다.
 
 . 취재

  알고자 하는 사항에 대해 취재를 통해 폭넓은 지식 습득과 체험을 얻을 수 있다.
 
 . 답사, 여행

  답사나 여행은 곧 소재 찾기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 수집

  자신의 관심, 탐구분야의 대상물이나 문헌, 자료수집은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 준다.
 
 . 취미

  취미활동은 자연스레 소재의 발견과 획득에 큰 도움을 준다.
 
 . 영화 예술작품 감상

  영화나 예술작품 감상 기회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하고 소재의 폭을 넓혀 준다.
 
 . 얘기 듣기

  전문가, 경험자, 유명인사의 얘기를 듣는 것도 소재발견의 방법이 된다.
 
 . 국어사전 보기

  가끔 국어사전을 뒤적거려 보면서 속어, 고유어, 마음에 드는 낱말들을 찾아보면서 자
신의 경험과 연관시켜 봄으로써 글을 써 보고 싶은 충동을 얻는다. 
 
8. 소재의 분류
 
  소재감으로 끌어 모은 것을 분류하여 글을 쓸 때 사용하기 쉽도록 해 두는 것도 수필 쓰기의 요령이다.
 
 . 쓸거리

  모은 소재 중에서 쓸거리가 무엇인지를 판단하여 정리하거나 분류해 둔다.
 
 . 버릴거리

  쓸모가 없는 소재는 아낌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주제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소재별 또는 주제별로 모으기

  음악에세이, 미술에세이, 역사인물에세이, 과학에세이, 독서에세이, 야생화, 사라져 가는 것들, 사찰, 석탑을 찾아서 등 내용별로 소재를 모으는 방법과 어떤 주제별로 소재를 꾸준히 수집해 나가는 것이 연작, 또는 테마 수필을 쓸수 있는 준비 단계가 된다.
[9] 수필의 구성과 실제
 
수필에 있어서 구성의 요건과 실제
 
  수필은 비교적 짧은 글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중에 자연스레 짜임새가 이뤄진다. 구성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소설, 희곡 등에 비해 의도적인 구성이 요구된다고는 볼 수 없다. 수필에선 비구성적 요소를 특성으로 들기도 했으나, 어떤 장르의 글이든 구성이 필요하다.
  수필은 짧은 글이기 때문에 더욱 구성의 효과가 요구될 수도 있다. 수필의 구성에 있어서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마음속에서 글을 쓰는 중에 자연스레 구성이 이뤄지는 경우다.
  이 때도 '무구성'이라기 보다는 이미 마음속에서 구성이 이뤄졌다고 보아야 한다. 서두를 어떻게 끄집어내며,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까를 염두에 두고 써내려 가는 동안 자연스레 구성이 이뤄진 경우일 것이다.

  둘째, 글쓰기 전에 몇 단계로 나눠 밑그림을 그린 후 쓰는 경우다. 대개 체험과 느낌의 2단계 구성, 서론(서두), 본론(전개), 결론(마무리) 3단계 구성, (), (), (), () 4단계 구성 등이 보편화돼 있다.
  소설과 희곡 등 산문 장르의 경우엔 클라이맥스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수필의 경우엔 오히려 서두와 결미가 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수필의 구성에 있어서 반드시 생각해 볼 구성상의 요소가 있다면 체험(사실)과 느낌(주관)을 어떻게 배분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기, 기행문 등에 있어서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라면, 기록문에 불과하다. 사실에다 작가의 느낌이 있어야만 문학성을 띄게 된다.
  수필은 체험(사실)을 토대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그릇인 만큼, 어디까지나 작가의 체험이 밑바탕이 되는 것이지만, 문학인 이상 상상, 느낌과 함께 작가의 해석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작가가 겪은 체험담, 에피소드, 일 들을 사실대로만 써 놓은 글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기록문은 그 자체로서 가치성이 있는 것이지만, 문학은 아닌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체험(사실)과 느낌이 뒤섞여 있지만 조화를 이뤄야 한다.

  ① 체험이 많고 느낌이 적을 경우
  ② 체험이 적고 느낌이 많을 경우
  ③ 체험과 느낌이 반씩일 경우
  ④ 체험, 느낌, 의미부여가 3분의 1씩인 경우
 
  체험과 느낌의 배분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순 없다. 소재 및 주제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며, 작가의 개성과 구성기법에 따라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것보다는 조화가 있는 쪽이 더 좋은 효과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①의 경우엔 사실성, 기록성은 강하나 딱딱하고 작가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②의 경우엔 현장감이 약하고 추상성, 현학성에 빠질 우려가 있다.
  ③의 경우엔 균형감각과 조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① ② ③ 의 경우에 있어서도 반드시 간과해선 안될 요소가 있다면 의 경우처럼 작가의 인생에 대한 발견과 의미부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삶과 인생에 있어 꼭 기억해야 할 소중한 체험이라고 할지라도 독자들의 인생에 필요한 자료와 의미가 되기 위해선 작가의 발견, 해석, 의미부여가 있어야 한다.
  수필에 있어서 얘기 중심의 줄거리수필과 느낌 중심의 이미지수필이 있다.
얘기 중심의 수필인 경우, 하나의 줄거리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테마에 따라 23개의 얘기가 동원될 수도 있다.
  줄거리 수필에 있어 구성상의 요체는 발단, 전개, 결말 순으로 할 것인지, 결말, 발단, 전개 순으로 할 것인지, 작가의 해석과 의미 부여를 어느 부분에 삽입할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미지 수필의 경우에도 분위기, 관찰, 느낌, 맛을 몇 개의 대문으로 나눠 구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행 수필의 구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쓸 것인지, 장소에 따라 쓸 것인지, 테마에 맞춰 쓸 것인지, 인상 깊은 체험이나 느낌을 중심으로 쓸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구성의 기법은 작가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좋은 구성의 요건을 생각해 보면 몇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①자연스런 구성이어야 한다. 의도성, 작의성이 드러나지 않게 물 흐르듯 자연스런 구성이 돼야 한다.
  ②평면적인 것보다 입체적인 것이 좋다. 한 가지의 사례나 얘기로서 주제를 부각시키려는 것 보다 복수의 사례나 얘기를 동원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전개 방식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적으로 하는 것보다 경우에 따라선 현재와 과거, 결말과 동기 등을 바꾸어 구성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③서두와 결미의 중요성이 소설이나 희곡 보다 더 요구된다.
  ④작가의 인생에 대한 의미부여 부문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작가의 인생 경지를 볼 수 있는 글이므로 무엇보다 작가의 인생에 대한 발견, 의미부여가 있어야만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다.
 
  필자의 「가을 금관」이란 작품을 사례로 구성의 요건에 대해 살펴본다.
  필자의 「가을 금관」은 처음부터 3단계 구성을 시도하여 1,2,3으로 구분하여 놓았다.
  이 작품은 어느 해 가을, 온양에서 개최된 수필세미나가 종료된 후 인근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을 찾아간 기행문의 형식을 띄고 있다. 『수필공원』의 편집 주간을 맡고 계시던 박연구(朴演求)선생이 필자에게 '맹씨행단'을 찾은 소감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아 응하게 되었다.
  맹씨행단은 조선시대 명재상(名宰相)이며 청백리(淸白吏)였던 맹사성(孟思誠)의 고택(古宅)이 있는 곳을 이름한 것이다.
  이곳에 와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겠고 소재도 각자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맹사성에 대한 얘기를 소재로 삼을 법도 하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황금빛으로 물든 수백 년 된 세 그루 은행나무에 빠지고 말았다. 은행나무의 모습이 황금빛의 금관처럼 느껴졌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영원의 시·공에 높이 치솟아 오른 '은행나무'를 통해 살아있는 금관을 보는 듯했다. 이와 같은 느낌은 박물관에서 신라 금관을 보았을 때의 감정과 연관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는 '은행나무 = 금관'을 머리에 그리면서 쉽게 구성을 끝냈다.
 
1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라 금관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나는 한 그루 황금빛 나무를 연상했었다.
  박물관 유리 진열대 안에 들어 있던 천 년 신라 유물들은 대개 시간의 침식에 못 이겨 퀴퀴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망각 속에 덩그렇게 놓여 있었지만 금관만은 어둠 속에 촛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빛깔로 너무나 선명한 모습으로 살아 있어서 천 년 신라를 말해 주는 촛불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나는 우두커니 이 천 년 신라의 황금빛 촛불 앞에 서서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았다. 금관의 출자형(出字型)은 그 형태가 나무의 가지를 본 뜬 것처럼 보였다. 어떤 학자는 사슴의 뿔을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에겐 나뭇가지처럼 여겨졌다. 그냥 나무가 아니라, 항상 새롭게 싹터서 영원 속에 가지를 뻗치는 무성한 생명력의 나무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1단락 : 박물관에서 신라 금관을 보았을 때 한 그루 황금빛 나무를 연상했었다.(신라 금관 → 황금빛 나무)
 
2

  어느 날, 나는 뜻밖에도 박물관이 아닌 장소에서 금관을 보았다. 황금빛 가지들을 하늘 높이 뻗친 세 개의 금관. 그것은 놀랍게도 아직 내가 보지 못했던 살아 있는 금관이었다. 황금빛 가지가 청명한 하늘로 뻗어 나가 마치 수만 개의 출자형(出字型)을 이루었고, 순금빛 나비형 영락을 달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이 너무 맑게 열려 있어서 피리를 불면 가장 잘 퍼져 나갈 듯한 가을날이었다. 가을의 한복판에 세 그루의 금관이 하늘 높이 서 있었다. 육백 년 수령의 세 그루 은행나무. 살아있는 가을의 금관이었다. 가을의 찬양이었고 극치였다. 세 그루 은행나무들은 황금 빛깔로 가을의 절정을 그 자신이 가을 금관이 되어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직 그토록 장엄하고 화려한 가을 빛깔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2단락 : 은행나무를 보고 살아 있는 신라금관을 보게 되었다. (은행나무→신라금관)
 
3

  온양에서 열린 수필문학세미나를 마치고 인근에 있는 맹씨행단을 찾기로 했다. 내가 시간을 내어 문학세미나에 참가하는 것은 평소 글로만 익혀 오던 필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맹씨행단(孟氏杏壇)은 조선시대 명재상(名宰相)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맹사성(孟思誠)의 고택(古宅)이 있는 곳이다. 이 곳엔 수백년 자란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단()을 쌓았기 때문에 맹씨행단이라 부르고 있다.
  맹사성의 고택을 본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수백 년 자란 은행나무와 대면한다는 기대는 자못 설렘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수백 년 자란 은행나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순간의 황홀한 환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맹씨행단에 도착하여 육백 년 수령(樹齡)의 세 그루 은행나무와 만났다.
 
  3단락: 은행나무를 보게 된 배경, 수필세미나 후의 맹씨행단 구경과 감상,(은행나무 → 신라금관 → 맹씨행단의 가을)

필자의 [가을 금관]에 시도된 3단계의 서두를 보면 뚜렷하게 구성의 요소를 엿볼 수 있다.
 
  맹씨행단(孟氏杏檀)에 와서 세 그루 은행나무가 빚는 가을 교향악을 들었다. 나에게도 한 순간이나마 은행나무와 같은 아름다운 삶의 순간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은행나무는 가을 금관이 되어 육백 년의 명상과 노래를 천지 사방에 마구 뿌리고 있었다.
  위 부문은 [가을 금관]의 결미로서 다시 한 번 은행나무와 금관을 결부시켜 가을의 정경을 심화시키려 했다.
 
  수필에 있어서 글을 쓴 동기부문이 서두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을 금관' <금관 = 은행나무 = 가을 금관>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동기 부문을 끝 부분에 배치시켰다.
  수필에 있어서 '무기교 무구성'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대목은 수필의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운 면을 강조하려는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짧은 글인 수필에 있어선 구성의 요소가 더욱 필요한 게 아닌가 한다. 구성이 없는 글은 조화, 감동이 덜하며 어딘지 부조화, 군더더기가 느껴지고 덜 깔끔하고 완성도가 미흡한 것을 엿보게 한다
10] 바로 잡아야 수필의 개념
 
바로 잡아야 할 수필의 개념
 
  수필의 개념과 성격에 대한 정의(定義)로 고정 관념화 돼온 것들이 있다.
  '여기(餘技)의 문학',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산만과 무질서, 무형식의 글', '40대의 문학' 등이다.
  그러나, 현대에도 수필에 대한 이 같은 개념들이 타당성을 갖고 있는가, 재점검해 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수필의 개념들은 30년대에 정립된 것으로,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여기(餘技) 삼아 수필을 써 왔던 때에 이뤄졌다. 당시엔 본격적 문학의 대상이 아니라, 여유가 있으면 쓰는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 쯤으로 가볍게 인식하였던 게 사실이다. 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씨가 수필은 '비전문 문학'이다 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문단에 수필가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신춘문예, 종합 문예지들이 문단 데뷔 종목에 '수필'을 포함시켜 전문 수필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 시점(時點)은 우리 수필문학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종전까지 '주변문학', '아웃사이드 문학', '비전문 문학', '여기의 문학'으로 수필을 경시해 오던 문단의 인식변화를 보여준 것으로 대등한 문학 장르로서 공인하는 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현대의 다양한 삶의 양식, 고학력화 속에서 생산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독자로 나눠졌던 엄격한 구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문 직업인들과 독자들도 자신의 삶을 기록하거나 작품화하여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애매해지면서 생활 속의 문학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추세 속에서 픽션보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논픽션인 「수필」이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게 되었다. 수필이 대중적인 문학, 삶의 문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현대인들의 자의식이 높아진 점, 시와 소설의 중간 위치에서 양 장르의 장점을 취하면서 대중들의 구미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시의 압축, 비유, 절제, 리듬을 살리면서 소설의 사실, 설명, 묘사, 구성법을 활용하고 시의 난해성과 의사 전달력의 취약성, 소설의 읽기의 시간 부족에서 벗어나 적당한 독서물로서 '수필'이 대중 속에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수필문학은 「여기(餘技)의 문학」,「주변문학」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삶과 직결된 문학 장르로서 자리 매김과 함께 미래문학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수필의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향상이 따르지 못한 점, 수필문학을 본격적 문학으로 보지 않는 문단의 사시적 시각을 바로 잡지 못한 데 대해서는 수필문단은 진지한 성찰과 각성이 필요하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 투철한 작가 정신, 치열한 창작열, 전문성 등과 함께, 고정 관념화 돼 온 수필의 개념 및 정의에 대해 과감한 수정과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첫째,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 아니다.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라 했던 것은 농경시대의 사고(思考)이며, 당시 시, 소설, 평론을 썼던 문인들이 본업 외 시간이 날 때, 여기로 수필을 써 왔기에 어느새 '수필=여기의 문학'으로 굳어진 것이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수필가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오늘의 수필가들은 '여기'로 수필을 쓰고 있지 않다.
  시와 소설이 치열한 삶과 다양하고 복잡다난한 시대상, 사회상을 수용하는데 비해, 수필이 다소 느긋하게 한 걸음 물러서 인생을 바라보는 면도 없지 않으나 종전처럼 '여기의 문학'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수필도 시와 소설처럼 치열성, 실험성, 본격성, 전문성, 개성, 참신성을 추구해 나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여기(餘技)의 문학'으로 안주한다면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무한경쟁과 무한 변화 속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현대에서 「여기」로 멈춰 있는 것은 생존 이유를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다. 시대상과 삶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수필은 더욱 치열성, 전문성, 본격성, 개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김광섭 「수필문학 소고」) 이라는 개념은 수정돼야 한다.
  이와 같은 개념은 '隨筆'이란 어원의 해석에서 나온 말이 굳어진 것이다.
  수필을 '여기의 문학'으로 알던 농경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물론 수필의 형식상 자유스러움을 말하는 부분이 있지만, '마음대로 쓴 글', '아무렇지 않게 쓴 글'로 인식되어 수필을 폄훼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오랜 인생수련과 습작을 통해 고도의 구성과 표현 기법과 질서를 획득하여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써 내려가는 경지의 글을 말한다. 그럼에도 누구나 쉽게 마음 내키는 대로 쓰면 수필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인식하여, 수필을 경시하는 풍조를 불러왔다.
  수필은 소설, 희곡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이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은 산만, 중복, 과장이 있기 쉽다. 수필은 짧은 글이기 때문에 보다 치밀, 함축, 사색을 요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수필은 '산만과 무질서, 무형식의 글'(김진섭「수필의 문학적 영역」)이 아니다.
  시와 소설은 허구(픽션)의 세계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논픽션)의 세계이다. 진실을 생명으로 삼는다.
  작가가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쓰기 때문에, 상상력과 허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 소설에 비해. 더욱 적나라하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명쾌하고 절서 정연하기는 쉬워도 '산만하고 무질서하다'는 말에는 설득력이 없다. 본격 수필 시대에 '산만과 무질서'를 수용할 수필가가 있을지 의문이며, 이는 농경시대 '여기(餘技)의 문학'이라고 인식할 때의 개념인 것이다. '무형식의 글'이라는 개념도 수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 소설, 희곡에 비해 엄격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런 표현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지, '무형식'은 아닌 것이다. 수상, 일기문, 서간문, 기행문, 칼럼 등 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글들이 많아서, 일일이 형식을 정해 엄격히 적용시키기보다는 작가에게 창의성과 자유성을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상, 일기문, 서간문, 기행문 등이 '무형식의 글'은 아니다. 형식과 구성이 있으되, 엄격한 형식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넷째, 수필은 '40대의 문학이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피천득 씨는 「수필」이란 글에서 '수필은 서른 여섯 고개를 넘어선 중년 여인의 글'이라고 했다. 또한 수필을 가리켜 '40대의 문학'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수필이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형상화하는 문학임을 들어, 다양한 체험과 인생적 경지를 담기 위해선 40대가 돼야만 비로소 좋은 수필을 낳을 수 있는 연령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해석에 수긍하면서도,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없어야 하며 '40'으로 한정하여 고정관념화 해선 안될 것이다.
  10대의 순수, 20대의 감수성, 30대의 정열은 수필의 소중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또 수필에 대한 개념으로 '청자연적이 있다. 피천득 씨가 자신의 수필론을 전개한 '수필'에서 수필을 '청자연적'에 비유하였다. 수필을 도자기예술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청자연적'에 비유한 것은 기능과 깨달음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에서 피워 올린 꽃으로 생각한 까닭에서다. 수필의 참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한 빛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피천득 씨의 수필관(隨筆觀)이다. 수필 '토기 항아리', '유리 그릇'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다양성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라는 말은 수필의 고귀함과 높은 경지의 문학임을 일깨워 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청자연적'은 피천득 씨의 추구 목표이자, 개성으로 보아야 한다. 수필을 쓰는 모든 사람이 '청자연적'을 수필 쓰기의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발견과 깨달음을 최대한의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최상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수필 쓰기의 방법이 돼야 한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바르지 못한 수필의 개념들을 깨트려야 한다. 낡은 틀을 벗어 던져야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제11장] 수필의 문장과 수사법
 
수필의 문장과 수사법
 

1. 수필의 문장
 
  수필은 비교적 짧은 산문이기 때문에 '문장'이 작품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장 = 사람'이라는 등식의 말을 곧잘 하는데, 이를 '문장 = 수필'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문장은 글쓴이의 총체적인 이생의 경륜과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을 안 것은 사람과의 접촉의 결과에서가 아니라, 책(문장)과 접촉한 결과이다."라고 프랑스 소설과 아나톨 프랑스는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 좋은 문장일까. 문장을 쓰기에 앞서 목적에 부합되는 글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지식, 이해가 목적인 글 : 설명문, 해설문
  설득, 동조가 목적인 글 : 논설문, 논증문
  감화, 공감이 목적인 글 : 묘사문, 서정문
  사건, 흥미가 목적인 글 : 기사문, 서사문

  첫째, 진실된 글이어야 한다. 수필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 글이므로 진실의 힘과 감동이 잘 전달되도록 해야 하며 허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바른 글이어야 한다.
  품위 있는 글 : 어휘, 바른 관점의 글
  문법에 맞는 글 : 맞춤법, 띄어쓰기, 월점
  셋째, 쉬운 글이다.
  단락의 변화나 한계가 뚜렷한 글 : 구성상 짧고 간결한 글 : 문체상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은 글 : 표현상
  넷째, 재미있는 글이다.
  화제나 내용이 새롭고 재미있는 글. 서술이나 표현이 참신하고 개성적인 글. 변화 있는 구성으로 지루함이 없는 글

2. 수사법
 
  문장의 표현에 있어서 많은 수사법이 사용된다. 그러나 수사법은 여인의 화장법과 흡사한 것이어서, 지나친 수식어의 남발은 문장을 천박하게 만들며 되려 진실을 오도하게 한다.
  화장을 하되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훌륭한 방법이듯, 문장의 수사법도 진실의 바탕을 가리거나 해치지 않아야 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또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 수사법의 3대 원리

  문장의 수사법에는 기본 원리가 있다. 강조의 원리, 비유의 원리, 변화의 원리이다.
 
  1) 강조의 원리

    작가의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이나 감정 중에서 어느 부분을 더욱 또렷하게 전달하며 강한 인상을 주려고 할 때 사용한다.
 
  2) 비유의 원리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어떤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보임으로서 명확한 인상을 주려고 할 때 사용한다.
가령, '날 좀 보소' 라는 평범한 말을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라는 비유법으로 더욱 선명하게 전달한다. 미인을 '장미처럼 아름다운 미인'이라 표현한다.
 
  3) 변화의 원리

    문장의 단조로움이나 지루함에 변화를 보려고 할 때 사용한다. 사람들은 변화를 추구한다. 수사법(修辭法범; rhetoric)이란 원래 웅변의 기술을 뜻하던 라틴어에서 나온 말인데, 이제는 작문상의 기법을 의미한다. 수사란 문장을 미적이고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사용하는 비유, 수식 등의 방법을 뜻하며, 수사법은 그 방법으로부터 확립된 기교의 형식을 의미한다. 문장의 기술, 문체, 비유법 등 여러 가지 뜻으로 대용되는 수사법의 역사는 인간의 문자 발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서양에서는 그리스에서 민주 정치의 한 방편으로서 중시하던 웅변술의 훈련을 위해서 수사법이 발달되었다.
  동양에서는 중국을 비롯해 우리 나라에서도 주로 시작법(詩作法)의 기교로 발달하였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이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설득을 위한 모든 수단을 고찰하는 기능'이라고 정의한 이래 시대에 따라 수사에 대한 개념이 변천해 왔다. 초기에는 미적 효과를 중시하던 개념에서 시작하여 차츰 정확하고 효과적인 표현과 전달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① 비유법

    비유법이란, 기존의 의미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얻기 위해, 어떤 의미의 말이나 현상을 그와 유사성이 있는 다른 현상이나 말에 결부시킴으로써, 의미를 새롭게 전이시키는 것을 말한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비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 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이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은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피천득의 「오월」 전문-
 
  오월에 비유되는 것으로는 ①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 ②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 ③ 앵두 ④ 어린 딸기 ⑤ 모란 ⑥ 신록으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 결부 작용은 대체로 유사점의 발견과 유추를 통해서 이뤄진다. 여기서 '오월'을 '원관념'이라 하고 ①∼⑥가지의 보기를 '보조관념'이라 한다.

  비유법에는 직유법, 은유법, 상징법, 풍유법과 우화, 의유법, 대유법, 중의법, 의성법, 의태법이 있다.
 
  ○ 직유법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를 '―처럼', '―같이', '―인', '―인 듯' 등의 말을 매개로 하여 '무엇은 무엇 같다.' 혹은 '무엇 같은 무엇' 식으로 결부시키는 비유법이다.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가 숨어 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 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풀어 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나도향의 「그믐달」 전문 -
 
  「그믐달」에서 직유법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철모르는 처녀 같은',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와 같이', '여왕과 같은', '공주와 같은', '천상과 같은',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 마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그믐달 같은' 등이다.
 
  ○ 은유법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하여 '무엇은 무엇이다'는 식의 비유이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 피천득의 「수필」의 서두 -
 
  '수필'이란 원관념에 도자기를 비유하여 '청자연적', 화초에 비유하여 '난', 새에 비유하여 '학', 여인에 비유하여 '몸맵시 날렵한 여인'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은유법이라 한다. 피천득의 '수필'은 전문이 거의 은유법으로 돼 있으며 수사법 중 가장 함축성이 뛰어난 비유법이다.
 
  ○ 상징법

   비유의 폭과 깊이를 고도로 확장·심화시킬 수 있는 비유법으로, 원관념은 언어 진술의 표면에 직접 나타내지 않고, 보조관념만 드러내는 식의 비유법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란 시집에는 '임'이란 말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에는 '들'이란 말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지만, 그것의 원관념에 해당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는 표현이 진술되지 않았다. 원관념은 우리가 여러 가지 조건들을 고려하여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비유를 상징이라 한다. 상징은 이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의 관계가 아니라 1:다(多)의 관계를 가지며, 본문 속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 풍유법

   원관념은 드러나지 않고 보조관념만 드러나는데, 그 보조관념들 모두가 비인격적인 것들이라는 점에서 의인법이나 상징법과 다르다. 풍유나 우화를 구성하는 보조관념들은 주로 동식물의 생활 풍습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의 생활 풍습을 암시한다. 단순한 동식물에 관한 얘기는 풍유나 우화가 아니다.
풍유로 된 이야기를 풍유라 한다. 동물 이야기를 주로 하는 작자 미상의「토끼전」, 「별주부전」등이 그 예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티끌 모아 태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 활유법과 의인법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생명이나 인격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활유법은 무생물을 생물의 속성에 비유하는 비유법이고, 의인법은 비인격적인 유정물을 인간의 속성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돌의 숨소리를 듣는다.'는 활유법이고, '소가 웃는다.'라는 표현은 의인법이다.
 
  철이 바뀌고 가을달이 명랑했다. 이슬은 안개처럼 내리고 귀뚜리 소리는 홀어미가 아니라도 구슬프게 들릴 무렵 창 밖에서 홀연히 부스스 인기척이 일어난다. 의아하여 문을 홱 열어 젖히면 이슬방울을 푸른 잎 위에 굴리며 가을 바람과 회롱하는 파초가 서서 있다. 이때 가서야 파초의 신세가 가엾다. 확실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파초다. 향수를 머금고 이내 시름을 날리기 위하여 남국(南國)의 파초는 북국(北國)의 가을 바람과 숨바꼭질을 한다.

-朴種和의「芭蕉와 思惟」-
 
  ○ 대유법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대치하는 비유법으로, 어떤 사물과 밀접히 관련된 것을 사용해서 다른 사물을 나타내는 환유법과, 개체로 전체를 혹은 전체로 개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이 있다. 시골 사람을 '핫바지', 형사를 '가죽잠바'로 표현하는 것은 환유법이고, '약주'로 술 전체를 '밥'으로 음식 전체를 표현하는 것은 제유법이다.
 
  ○ 의성법

   어떤 사물의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이고, 의태법은 사물을 그것의 생김새나 움직이는 모양으로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바람의 부는 모습을 표현한 '산들산들', '한들한들', '살랑살랑' 등이 의태어의 일종이고, '삐이 삐이 뱃종 뱃종', '호올 호로롯', '찌이잇 잴잴잴잴' 등은 새소리를 형용한 의성어이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의태법)
  아이가 아장아장 걷는다.(의태법)
  까마귀가 까옥까옥 울고 간다.(의성법)
 
  ② 강조법

   강조법이란 글 중의 일부를 강조하는 효과를 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강조법의 종류는 과장법, 반복법, 열거법, 영탄법, 점층법과 점강법, 현재법, 대조법, 억양법, 미화법, 문답법, 명령법, 돈호법, 치환법, 괄진법이 있다.
 
  ○ 과장법

   사물을 실제보다 과장하여 표현하여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이 수사법은 실제보다 크게 또는 많게 표현하는 확대 과장과 실제보다 작게 도는 적게 표현하는 축소 과장으로 나뉜다. '벼룩의 간 만하다.', '모시야 적삼 안에 분통 같은 저 젓 보소/ 많이 보면 병환 나니 담배씨 만큼만 보고 가소.'의 '담배씨 만큼' 은 축소 과장이다.

  하늘을 찌르는 듯이 높은 산, 살을 에는 듯이 찬바람
  찌는 듯한 더위
  부모의 은혜는 산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다.
  모기 소리만하게 속삭인다.
  밴댕이 만한 소갈머리
  눈곱만치도 주려고 하지 않는다.
 
  ○ 반복법

   같은 단어와 어구를 반복함으로써 어떤 뜻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달빛이 싫어, 달빛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 의 반복어들은 '달밤이 싫다'는 뜻을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옛날 옛날 또 옛날에.
  멀고 먼 나라.
  깊고 깊은 바다. 
  기나긴 밤.
 
  ○ 열거법

   같은 부류에 속하는 말을 늘어놓아 뜻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들에는 풀들이 많기도 하다. 꽃다지, 질경이, 애기똥풀, 쑥, 냉이, 패랭이, 엉겅퀴, 방랭이, 뱀딸기……. 하늘에는 별이 그렇듯, 들에는 온통 들별들이 떠 있다.' 에서도, 들에 여러 가지 종류의 풀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풀의 이름을 열거함으로써,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운동화에. 국방색 당고바지에 검정 저고리에, 오그라붙은 칼라에, 배배 꾄 검정 넥타이에, 사 년 된 맥고자에, 볕에 탄 얼굴에, 툭 불거진 광대뼈에, 근천스럽게 달라붙은 안면 근육에, 깡마른 눈 정기에…… 이 행색과 모습은 백만장자의 지배인 겸 비서 겸, 이러한 인물이라 그는 매우 섭섭해 보입니다. 

 - 蔡萬植 「太平天下」-
 
  ○ 영탄법

   마음속의 깊은 정회를 드러내는 표현법, 즉 참을 길 없는 감정의 흥분을 표현하는 강조의 수법이다. 이 때는 흔히 감탄사나 감탄의 정회를 나타내는 말을 쓴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노래한 정지용의 시「유리창」의 끝 구절 '고운 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뉘는 山人새처럼 날러 갔구나!' 의 구절도 이런 수법이다.
 
  ○ 점층법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점점 강하게 고조시켜 가는 표현법이다. 점강법은 그 반대의 표현이다. '둘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셋이 있어도, 다섯이 있어도, 열, 스물, 백 명이 있어도 말은 어디론가 자꾸자꾸 도망친다.'는 점층법이고, '눈이 감겼다, 숨이 끊어졌다. 마주 잡았던 손이 방바닥으로 스스로 느러졌다. 마침내 온 방 안은 견디기 힘든 침묵으로 가득 찼다.' 는 점강법이다.
 
  ○ 현재법

   사물이나 사건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을 현재의 일처럼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든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든 // 그 무성하고 푸르든 나무같이 / 늘 안녕히 계세요' 는 현재법의 좋은 예이다.
 
  ○ 대조법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과 서로 대립되는 것을 대조하는 수사법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이 그런 예이다. 대조법이 대구법과 다른 점은 전자는 의미상으로 대립이 되고, 후자는 리듬, 호흡, 운율 상으로 대칭이 된다는 점이다. 전자는 강조법이고 후자는 변화법이다.
 
  ○ 억양법

   어떤 것에 대해 의미상 앞에서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뒤에서 긍정적으로 표현하던가, 혹은 그 반대로 표현하여 강조하는 표현법이다. 이 수사법은 어떤 것에 대해 변호를 하거나 공격을 할 때 많이 쓴다. '그는 좀 모자라지만 사람은 착해', '얼굴은 고운데 마음이 나빠' 식의 표현이 그 예이다.
 
  ○ 미화법

   하찮고 추하고 나쁜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강조법이다. 변소를 '화장실'로 걸인을 '자유인'으로 도둑을 '밤손님'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 예이다.
 
  ○ 문답법

   어떤 문제나 사물을 강조하기 위해 묻고 대답하는 형태로 표현하는 강조법이다. 이는 답변이 있다는 점에서 설의법과 다르다. '백제의 도미 부인, 신라의 수로 부인, 고구려의 유화 부인 중에서 누가 더 애절하게 아름다울까? 애절한 아름다움으로야 백제의 도미 부인이 제일이다.' 식의 수사법이다.
 
  ○ 명령법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명령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는 격문, 선전광고문 등에서 많이 사용한다. '싸워라, 이겨라, 건아들이여!', '당신의 간장, 이 한일의 약으로 지키십시오.' 등이 그 예이다.

  ○ 돈호법

   인격화된 사물이나 현존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거는 표현법이다. '어머니, 당신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일림아, 촛불을 끄렴, 이제 우리 머언 나라로 다시 긴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겠니?' 등의 표현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식의 수사법이 그것이다.
 
  ○ 치환법

   이미 사용한 말이나 내용을 철회하거나 부정하고 다른 말이나 내용으로 대치하는 수법이다. '황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아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다기보다도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든다.', '사랑은 뜨거운 것이다. 아니 뜨겁다기보다 차가운 것이다.' 등이 그런 예이다.
 
  ○ 괄진법

   이미 장황하게 서술한 것을 통괄해서 독자에게 확실한 인상을 주는 표현법이다. 대개 어떤 문단이나 글의 결말, 결론 등에 사용된다.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에서처럼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가 그 예이다.
 
  ③ 변화법

   변화법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서술하다가 너무 단조롭고 지루하게 되거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표현상의 변화를 필요로 할 때, 표현에 변화를 줌으로써 인상깊고 생생한 감동을 주어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수사법이다. 변화법으로는 설의법, 인용법, 도치법, 생략법, 대구법, 반어법, 역설법, 곡언법, 냉조법, 비약법이 있다.
 
  ○ 설의법

   평서문으로 서술해도 될 것을 의문문으로 바꾸는 표현법이다. 이 수사법은 권유, 연설, 변론, 공격 등의 내용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다. '그래도 그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술의 해독이 이와 같거늘 어찌 술꾼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가 그 예이다.

  ○ 인용법

   다른 사람의 말, 주장, 의견, 이론 혹은 고사, 격언, 속담 등을 빌려오는 방법이다. 원문 그대로를 인용하는 직접인용법/ 명인법과 그 내용만을 간접적으로 차용하는 간접인용법/ 암인법으로 나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지상의 일체 생물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삶(生)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도치법

   문장의 변화를 주기 위해 문장의 어순을 바꾸어 쓰는 변화법이다.
  가거라, 어서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그리구 흰옷이―
  참 섭섭해요. 여름내 계실 것 같이 말씀 들었더니― (도치법)
 
  ○ 생략법

   생략법은 문장의 압축미와 여운을 주기 위해 문장의 일부를 생략하는 변화법이다.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레 소리……(들렸다), 바다 소리가(들렸다), 바퀴 소리가 (들렸다) 별안간 눈앞이 환해지더니 열차의 마지막 바퀴가 쏜살같이 눈앞을 달아났다.

- 李孝石의 「豚」-
 
  ○ 대구법

   대구법은 변화를 주기 위해 리듬, 호흡, 반복성에 대칭성을 마련하는 표현법이다. 의미상의 대립을 목표로 하는 표현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대조법과 다르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 '방실방실 웃는 임을 못 다 보고 해 다 지네/ 해 다 져서 못 다 보면 돋는 달로 다시 보지.' 등이 그런 예이다.
 
  ○ 반어법

   반어법은 의미상의 긴장과 상충, 대조를 드러냄으로써 표현의 변화를 꾀하는 표현법이다.
 
  ○ 역설법

   역설법은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불합리한 듯하나, 면밀히 고찰해 보면 진실임을 깨닫게 되는 진술이다. 존 던의 종교시 「내 가슴을 때려 주소서」의 끝 부분에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생명을 잃어야 한다.', '저를 당신에게로 잡아가, 투옥해 주소서,/ 왜냐하면 당신이 저를 가두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결코 자유로울 수도,/ 결코 정숙할 수도 없사옵니다, 당신이 저를 겁탈하지 않으신다면' 등이 그 예이다.
 
  ○ 곡언법

   주장하는 것보다 적게 말하는 변화의 수법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그는 대단히 영리하다) 그녀는 미인이 아니다(그녀는 아주 못생겼다) 그 시험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었다.( 그 시험은 대단히 어려웠다)' 가 그 예이다.
 
  ○ 냉소법

   남의 약점을 조롱의 어조로 들추어내는 표현법이. '안내양, 이 버스 오늘 중으로는 떠나지? (버스가 너무 오래 정차하고 있음을 조롱하는 표현), 야, 너희 주인 정미소에 갔니?(주문한 식사가 너무 늦도록 나오지 않음을 조롱하는 표현)' 등이 그런 예이다.
 
  ○ 비약법

   평탄하게 순서대로 천천히 서술되던 문장이 갑자기 속도와 순서를 변화시키면서 서술의 방향이나 내용의 단계를 건너뛰어 서술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다. '전주, 밤안개가 짙은 동짓달, 자욱한 안개 속, 그리고 이슬비, 늘어선 간판들 주위만이 희미하게 밝다. 한 사람이 길을 걷다 포도 위에 쓰러진다. 주위는 갑자기 더 고요해진다. 죽고 싶다.'는 예문의 경우, '한 사람이 포도 위에 쓰러진다.'라는 문장과 '죽고 싶다.'라는 문장 사이에 많은 말들이 감추어져 있어, 의미상의 비약이 일어나고 있다.
  어둡다. 요란하다. 우레 소리, 번갯불, 바람은 천지를 쓸어 가란 건가. 구름은 우주를 뭉개 버리란 건가. 파도 소리, 저 파도 소리, 절벽을 물어뜯는 저놈의 파도 소리, 수십 길 절벽을 뛰어 넘어 이 집을 쓸어 가려는 듯, 차라리 쓸어 가 버려라, 집까지 섬까지 한 묶음을 삼켜 버려라.
[제12장] 제목 달기
 
제목 달기
 
  모든 사물과 개체에는 이름이 있다. 모양과 형태가 있는 것엔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대상물을 찾을 때, 제일 먼저 이름을 보고 찾는다. 이름은 사람이나 동식물에게나 그 대상물의 얼굴이며 상징이다. 문학 작품의 제목은 사람의 이름과 같다.
  제목이 좋으면 그 글이나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고,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제목이 좋지 않은 것은 독자들이 외면하여 찾지 않기 때문에 호응을 받기가 힘들다. 작가나 출판업자들은 책의 제목 정하기에 무척이나 고뇌한다. 책의 얼굴이어서 첫인상이 좋아야 맞선(독서)이라도 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간혹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보기도 한다. 이것은 제목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경우이지만,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이다. 글 중에서 '이름 모를 꽃', '이름 모를 새', '이름 모를 곤충' 등으로 무책임하게 기술한 것에서, 공허감 같은 것을 얻게 된다. 작가는 동식물 도감이나 사전류를 다 찾아서라도 이름을 알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은 태도이고, 그래야만 독자들에게 신뢰를 준다.

  수필에 있어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제목은 상품의 상표와 같아서 제목만을 보고도 그 상품의 질과 품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을 상징하는 총체적 이미지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먼저 부르기 좋고(소리의 조화), 뜻이 좋고(의미의 조화), 획수(모양의 조화)가 어울리는 것이 좋다. 글의 제목도 산뜻하고, 의미가 깊고, 흥미로운 것이 좋다.
  글을 읽고 나서도 뚜렷하게 '제목'이 각인 되어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좋을 것이다.

  강석호 씨는 「제목, 어떻게 붙일 것인가」(수필문학 1998. 5월호 pp.23∼25)에서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제목들의 유형들을 분류하여 제시했다.
 
  ① 주제를 집약한 것(추상적)
  ② 주제를 풀이한 것
  ③ 문장의 줄거리를 압축, 집약한 것
  ④ 문장의 목적을 내세운 것
  <아버지께 드리는 글> (서간문), <두만강 7백리>(기행문), <어느 비오는 날의 서정>(일기문), <사랑하는 님의 영전에>(조사)
  ⑤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한 것
  <피서지에서 생긴 일>, <교단 생활 40년의 회상>,<비에 젖은 소풍>
  ⑥ 명사 하나 만을 붙인 것
  <나무>(이양하) <보리>(한흑구) <달밤>(윤오영)
  ⑦ ~과 ~의 나란히 꼴(⑥의 복합형)
  <꽃과 바람>, <믿음과 사랑>, <돼지와 미소>
  ⑧ 계절명이나 지명을 사용
  <봄이 오는 소리>. <가을의 전령>, <여름날의 소나기>, <지리산 철쭉>
  ⑨ 적당한 제목이 없을 때
  <無題>, <實題 >, <數題>, <有感> 등
  ⑩ 시적 효과를 노린 것
  <사랑의 파도를 넘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⑪ 작은 표제 중의 하나를 택한 것
  정병욱의 수필 <물과 기름의 대화>는 <올빼미의 눈>, <옷이 날개라고는 하지만>, <음식보다 보약으로>, <온돌 문명과 영토>, <물과 기름의 대화> 등 소제목 중에서 하나를 택함
  ⑫ 매혹적인 것
  < 그녀와 나는 이렇게 헤어졌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안개는 나를 유혹한다>
  ⑬ 불연속적 용어의 결합
  <잉크와 안경>, <돌과 바람>, <책과 가위>, <미녀와 강도>
  ⑭ 한자로 된 제목
  <溫故而新>, <可逆反應>, <貧利泌禍>, <異人異說>
 
  정주환(鄭周煥)은 「현대수필 창작입문」에서 제목 붙이는 유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주제를 집약한 것; 「아버지」「손수건의 사상」
  ② 화제(토픽)를 나타낸 것; 「애인」 「자유부인」
  ③ 중심 인물을 가리킨 것 ;「상록수」「바다와 노인」
  ④ 본문 중의 중요한 사항을 나타낸 것; 「태백산맥」「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
  ⑤ 인상적인 것을 나타낸 것;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⑥ 상징적인 것 ; 「주홍 글씨」「감자」
  ⑦ 글의 줄거리 또는 인물명을 나타낸 것; 「늙은 창녀의 노래」 「낙엽을 태우며」
  ⑧ 내용의 일부 또는 전체를 나타낸 것; 「내인이면 늦으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⑨ 분위기를 나타낸 것 ; 「달빛 고요」
  ⑩ 문장의 목적을 나타낸 것; 「한국의 영혼」「우리 문화 산책」 「이집트 기행」
 
  이상과 같은 방식에 따라 제목을 붙인다. 그러나 제목을 붙일 때, 첫째, 내용과 너무 동떨어진 것은 피해야 하며 둘째, 평범하지 않고 특색 있는 제목을 택할 것이며, 셋째, 간결하고 선명할 것이며 넷째, 흥미를 끌고 매력적인 것으로 제목을 붙여야 한다.

  그러면 알렉산드로 뒤마 페르(Alexandre Dumas Pere)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써 놓고 표제를 붙이는데 고심한 그 실례를 보자
  그는 이 소설이 나오기 3년 전인 1842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망명(亡命)중이던,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뒤마는 제롬의 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엘바섬에 갔다 오는 길에 괴상한 바위섬 하나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뒤마는 뱃사람에게 그 섬 이름을 물었더니 ‘몽테크리스토 섬’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 그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13세기에는 승원(僧院)이 있었다. 그러나 터키군이 이 섬에 침공했을 대, 승려들이 달아나면서 섬 어딘가 에다 보물을 감추어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섬이라는 것이었다.
  뒤마는 그 섬 이름의 어감(語感)이 좋을뿐더러, 재미나는 전설까지 전해져 오므로 제롬에게 함께 여행한 기념으로 ‘몽테크리스토 섬’ 이란 제목으로 소설을 꼭 쓰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다 써 놓고 막상 제호를 붙이려 할 때, ‘몽테크리스토 섬’이라 붙이려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아, 고심하던 끝에 ‘섬’ 대신 ‘백작’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소설이 출간되자, 파리에는 새로운 유행어가 생겨났다. 즉 이 소설의 제명인 ‘몽테크리스토’ 란 말이 어감이 좋다 하여 파리 시민들은 무엇이든 마음에 들고 좋은 것이면, 다 이 ‘몽테크리스토 !’ 라고 하고, 큰 황소를 보아도 ‘아, 몽테크리스토 !’ 하고 감격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이 소설은 내용도 재미있지만, 그 제명으로서도 성공한 보기라 하겠다.
제13장] 나의 수필 작법
 
발견과 깨달음
 

  소재를 선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순간적으로 마음이 끌렸거나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대상은 어떤 인연법에 따라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낱말 하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가 내 눈과 마음에 들어오기까지 나와 인연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긴 해도 생각 중에 눈맞춤 해 두었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고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놓고 대화하고 싶어진 게 아닐까.
  내 마음을 끄는 소재는 수수하고 소박하며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다. 누가 한 번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을 듯 외로움을 간직한 대상들이다. 다가가 다정히 손을 잡아주고 말을 건네고 싶다. 소재의 선택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자 만남이며,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하늘 아래 땅 위의 삼라만상이 수필의 소재가 되는 것이지만, 진정 소재가 되려면 은밀한 교감과 애정이 없으면 안 된다. 글을 쓸 대상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영혼교감을 이루지 못하며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한 소재의 발견이야말로 삶의 오묘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어서 대상을 경이의 눈으로 들여다 보아야한다는 걸 알고 있다.
 
  「본다」는 것은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살피는 것이지만, 일생의 총체성으로 한 사물과 만나는 일이다. 인생의 경지에 따라 보는 법이 달라진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체험한 것만큼 보이고 명상한 것만큼 보인다. 한 사물을 두고서, 한 번 보는 것으로 세상 이치를 터득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수십 번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소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작가의 개성, 취향, 관심, 전공, 기질에 따라서 다를 것이지만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한다. 좋은 소재를 발견할 줄 아는 눈은 결국 좋은 인생을 볼 줄 아는 눈일 것이다. 마음속에 맑고 깨끗한 거울을 달아두어서,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맑게 닦아두어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람, 마음속에 해맑은 옹달샘을 파두어서, 넘쳐흐르는 물로 마음에 묻은 얼룩과 때를 말끔히 씻어낼 줄 아는 사람, 마음속에 깊고 은은한 소릴 내는 종을 달아두어서, 양심의 종을 스스로 울릴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글감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의 연마가 필요하며 깊은 체험과 명상이 있어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수필 쓰기는 결국 마음의 안목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인격의 향기, 깨달음의 꽃은 고도의 인생 경지에서 얻어진다.
 
  주제 설정에도 작가에 따라 소임 같은 것, 역할 같은 것을 느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수필을 쓰는 분명한 이유가 드러나야 한다. 나는 체험을 통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겠다는 소박한 뜻에서 한 걸음 나아가 평생동안 추구하고 탐구한 세계와 깨달음을 전하고 싶다. 민족의 고유한 미의식과 민족정서의 재발견을 수필문학을 통해 현대 감각에 접목해 놓고 싶다. 그 길을 가다가 쓰러진다면 행복하겠다.
  구성은 없는 듯 있는 듯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의도성, 작위성이 아니라, 마음의 물결을 타고 자연스럽게 가락을 타고 이뤄진다. 비교적 짧은 글이기 때문에 치밀한 구성이 필요한 것인데도, 마음속에서 써내려 가는 중에 무심결에 짜여지는 경우가 많다. 첫머리를 어떻게 끄집어낼까, 이것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명상 세계로의 몰입이요, 미의식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수필 구성의 요점은 서두다. 장마철 끝에 먹구름 속에서 파아란 하늘이 나타나듯이 서두가 풀리면, 전개 부분은 쉽게 이어진다. 마무리 부분에선 공을 들여야 한다. 이 세 가지 요건만으로도 3단계 구성이 이뤄지는 것이다. 나는 종전에 이미지 중심의 서정수필을 많이 써왔으나, 줄거리가 있는 서사수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은 생명이요,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장이 곧 사람이요, 수필 문장은 작가의 인생 경지와 품격을 드러낸다. 맑은 글에선 맑은 인생의 향기가 풍기고, 좋은 문장에선 좋은 인간의 삶을 느낀다. 픽션인 시와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논픽션이기에 작품이 곧 작가가 아닐 수 없다. 픽션은 작가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논픽션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므로, 작가의 인생과 삶을 그대로 투영시킨다. 수필이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높은 경지의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간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은 경지의 문학이 아닐 수 없다. 문장은 정확하며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마음으로 타고 흐르는 가락이 있어야 좋다.
  수필 한 편을 쉽게 발표하고 곧 후회하곤 한다. 고쳤으면 하는 데가 드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다. 좀더 공을 들여서 내보지 않았을까 후회하곤 한다. 술도 오래 묵힐수록 맛이 나는 법이 아닌가. 한 소재를 마음에 담아 두고 정을 들이고 다듬어야 하며, 이쯤 떠나보내야 그리워질 법할 무렵에 얼굴을 내놓아야 한다.
 
  나는 수필을 쓰면서 하늘에 빌고 싶다. 가끔 은혜처럼 좋은 생각이 떠올라 부족한 마음을 채워주길, 눈에 띄지 않는 말, 순결한 말을 들을 줄 아는 귀와 평범 속에 깃들은 오묘한 세계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게 해달라고... 마음의 연마, 인생 도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지를 쉽게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동경한다.
  수필은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다. 친숙하고 정다워 거리낌이 없다. 남녀노소가 삶의 체험과 느낌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이다.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대중적인 삶의 문학인 동시에 좋은 글을 만나기란 실로 어려운 문학이다.
  수필은 완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도달이 없는 깨달음의 도정으로 뻗어있을 뿐이다.
[제14장] 퇴고
 
퇴고
 

  글을 다 쓰고 나서 정확한 문장인지, 맞춤법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살펴 바른 문장이 되게 바로 잡는 작업을 '퇴고'라고 한다.
  발표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원고를 살피는 과정이므로 글쓰기의 마무리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작가의 마음에 들게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 해도, 오자, 탈자가 나오고 맞춤법에 맞지 않으면 독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탈고 후에도, 적어도 서너 번에서 대여섯 번 정도의 퇴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발표 후에 잘못을 발견하기 보다, 사전에 꼼꼼하게 퇴고 과정을 거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술도 오래 된 것에 맛이 들 듯, 퇴고도 가능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두고두고 보면서 고쳐 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교정은 자신이 여러 번 보아도 잘못된 것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전문성을 지닌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갓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퇴고를 세밀하게 중요시하는 작가가 좋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명문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퇴고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고시의 유의 사항

  ○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 사용이 틀리지 않는가 살핀다.
  ○ 중복어가 없는가 살핀다.
     (초가집, 해변가 등)
  ○ 추상어 사용을 자제한다. 
  ○ 한자어 사용을 줄인다. 
  ○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아도 문장이 될 때는 삼간다.
  ○ 외래어 사용을 자제한다.
  ○ 조사의 쓰임에 유의한다.
  ○ 시제의 사용이 맞는가 살핀다.
  ○ 주어를 생략해도 좋을 곳엔 빼낸다.
  ○ 주어와 서술어가 제대로 연결되고 있는가 살핀다.
  ○ 지나친 수식어 사용을 삼간다.
  ○ 문장의 어순은 올바른가 살핀다.
  ○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썼는가를 본다.
  ○ 문장의 길이가 적당한가 살핀다.
소재를 발견하는 법
 
소재를 보는 안목
- 보는 법의 터득 -
 
 

  문학의 소재 발견이나 창작에 있어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 5감각(感覺) 기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보는 것은 글을 쓰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기능을 한다.
  숱한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재(題材)로 선택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의 안목과 경지에 따라 달라지며,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유적이나 풍경을 함께 접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시각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는 제재를 얻을 수도 있고, 그냥 스쳐버릴 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백 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을 보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문학을 하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다름없다.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앞면만, 어떤 사람은 측면만, 어떤 사람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일부분만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될 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의 삶을 통한 총체적 경험과 지식 정보를 투과해서 인식하는 행위이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본다고 할 때, 한쪽에서 보는 한, 4면을 보지 못하고 항상 3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어떤 사물에서 얻어지는 측면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에서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고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 바퀴 돌아야 하며, 공중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피라미드들 그냥 거대한 입방체의 구조물로만 보아선 안 된다.
 
  도대체 망망한 사구(沙丘) 위에, 인간의 힘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을 왜, 무엇 때문에, 세워 놓았으며 그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불가사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의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누비고 지나가다가 사막의 하늘을 찌르고 있는 피라미드와 마주쳤을 때, 그들은 멍하니 숨을 죽여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시대에 그리스의 성현들이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할 때, 피라미드를 그 첫째로 꼽았다.
  피라미드가 불가사의한 것은 이 구조물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있다. 피라미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였지만, 정확히 그 용도와 위치 선정, 건축 방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데리고 간 과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이집트의 국토 조사를 위임했을 때 그들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경도를 재었다. 하류 이집트의 지도를 완성했을 때 이 중심 경선이 나일강 하구에 의해 형성된, 사실상 하류 이집트 전역을 이루고 있는 델타 지역을 정확하게 이분하고 있다는 우연의 일치에 놀랐다. 그리고 피라미드에서 직각으로 대각선을 그으면 그 안에 델타 지역이 완전히 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더욱 놀랐다. 또한 연구 끝에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단지 이집트의 중심 경선으로서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중심 경선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피라미드는 정확히 세계지도의 중앙분할선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대피라미드의 위치에서 기인한다. 피라미드를 통과하는 세로 선을 그으면 그 동편에 있는 육지의 면적은 서편의 육지 면적과 동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피라미드의 경도는 자연히 지구를 통틀어서 제로 선이 된다. 지구에서 대피라미드가 접하고 있는 위치는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피라미드의 네 사면(斜面)이 나침반의 네 방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물이 세계의 중심선에 놓여야 한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힘으로써 상상을 강요한다.

  인간은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매달린다. 사막 한 가운데 마주치는 고대 인류가 세운 가장 거대한 구조물인 이 피라미드는 풀리지 않는 영원한 물음표로 탐구와 명상의 화두를 던져 준다. 피라미드는 이 불가사의성으로 인류가 피운 고대 문명의 꽃이 되고, 명상의 한 복판에서 삼각뿔의 위용을 조금도 변색시키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나일강만은 알고 있을 테지만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 낸 것 중에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는 곧 신비성의 획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막 가운데서 조우하는 피라미드는 기하학적 단순성을 취하고 있지만,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에 견딜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견고한 구조체인 것만 분명하다.
  이것이 무덤으로 '영혼의 집'으로 건축된 것인지, 아니면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능과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기념물로 지어진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구조물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영원성의 꽃으로 당시의 모든 역량과 총체성을 다 기울여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재화가 투입되었다. 거기에다 모든 지혜와 경험이 보태어졌다.
  사막의 한 가운데 덩그랗게 하늘 높이 치솟은 피라미드를 보면서, 한 시대의 총력을 다 끌어 모아 저것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될 절대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었던가, 생각해야 한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생사(生死)와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와 믿음을 포용한 신앙적인 힘을 터득한 소치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한가운데엔 언제나 '인간'이란 화두가 있다. 피라미드를 보면서 그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의문 앞에 서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삶과 죽음은 무엇이며, 사후의 세계란 또한 무엇인가. 인간으로 풀 수 없는 영원한 물음 앞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모든 힘을 기울인 끝에 건립해 놓은 것이 바로 피라미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피라미드는 불가사의한 의문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피라미드의 외형만을 보지 않고, 신비 속에 가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나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가시영역의 것일 뿐, 지하의 불가시영역의 뿌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나무의 보이는 모습과 접촉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햇빛, 바람, 비, 세월, 새, 나무의 일생을 연상해서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닿아있는 세계까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눈을 통한 ‘가시영역’에만 국한돼 있다. 그리고 가시영역의 대상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수필을 쓰는 법을 깨닫는 일이다.
  새를 보면서 단순히 보이는 외양만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구름, 자유, 방향, 바람, 새의 삶, 이런 불가시영역의 것까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꽃의 외양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꽃의 보이지 않는 세계, 꽃씨가 새싹을 틔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햇빛, 물, 바람, 나비 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져야 할 때와 의미까지를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충동, 발견, 관찰, 탐구와 관련이 돼 있다. '본다'는 행위가 오감과 닿아있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다음 동시, 시 한편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살펴본다.
 
  꽃씨 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 <최계락 ‘꽃씨’ 전문> -
 
  답답할 땐 귀 대고 / 바다 소리를 듣노라/ 네 목소리 듣는다
  격정의 성난 파도/ 어떻게 잠 재웠나
  피가 맺혀 뼈가 된 / 빠알간 산호초
  비늘 고운 물고기떼/ 헤일 길 없는 네 가슴 속
  그 세상이 꾸는 꿈은 / 미주알 고주알까지
  알고 싶어 슬픈 날엔 / 귀 대고 듣는다
                                            - <유안진 ‘소라 껍질’ 전문>  -
 
  '꽃씨'라는 소재에서 외형적으로 보는 것은, 꽃씨의 모양(생김새)이지만, 이 보이는 것과 접촉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은 '파아란 잎', '빠알간 꽃', '노오란 나비 떼'가 있다. 글쓰는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라 껍질'이란 소재는 그냥 외형적으로는 한낱 조가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바다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성난 파도, 천길 물 속, 헤아릴 길 없는 네 가슴속을 응시하고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가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소재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단번에 글이 씌어지지 않는다. 이 소재를 면밀히 관찰하여 속속들이 알고 나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오랜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소재와 친근해지지 않으면 그 소재가 지닌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컨대, 어떤 집에 할아버지가 정성껏 기르던 난초에 꽃이 피었을 때, 할아버지에게선 1년만에 감격과 전율을 느끼는 큰 일이 되겠지만, 무관심했던 다른 가족들은 감격하지 않는다.
  미지의 별 하나를 찾기 위해 밤마다 망원경으로 우주공간을 탐색했던 천문학자가 드디어 새로운 별을 찾아냈을 때, 충격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관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곧 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소재와 대화를 나누고 정을 들여야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사회학자, 법률학자, 의사, 생물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는 각각 자신의 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 할 것이다. 보는 법과 시각을 달리한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움과 개성이 빛을 말한다.
  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이치를 깨닫는 일이며 글을 쓰는 법을 깨치는 것이 된다.
  가시영역의 것만 보지 않고 불가시영역의 것을 보는 법, 가청영역의 것만 듣지 않고, 불가청영역의 것도 듣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보는 법'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
  *바깥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본다.
  *시(時), 공(空)을 초월해 본다.
  *정면에서만 보지 않고 거꾸로 본다.
  *일시적으로 보지 않고 오랫동안 본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본다.
  *형식만 보지 않고 내용을 본다.
  사물을 보는 눈썰미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과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20세기 한국 수필문학의 궤적과 반성
 
20세기 한국 수필문학의 궤적과 반성
 

  20세기 끝에 서서 저물어 가는 한 세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석양을 받으며 어둠의 뒤안길로 사라지려는 20세기의 뒷모습을 연민의 눈으로 배웅하고 있다. 지금 지구상에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탄생시키고 삶을 누리게 했던 「100년간」의 시·공간이 물살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새 밀레니엄을 찬양하여 맞이하기 전에, 우리를 낳고 길러 준 「20세기」의 품속을 생각하면서 삶의 발자취들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서구에 있어서 1571년에 프랑스의 몽떼뉴(1533-1592)에 의해 에세이가 쓰여진 것에 비하면 우리 나라의 수필에 대한 역사는 유구하다. 비록 수필이라는 장르 의식을 갖고 쓴 글은 아니나, 수필류에 분류할 수 있는 글을 찾는다면 신라 때 혜초가 727년에 쓴 「왕오천축국전」이란 기행수필을 들 수 있다. 고려조에는 李仁老의「破閑集」, 崔滋의「補閑集」 등과 조선조에「筆苑雜記」「太平閑話」 등 각종 문집, 잡기, 만필류를 비롯한 글들과 「서포만필」이나「패관잡기」「다산문집」「한중록」「열하일기」 등이 수필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에 들어와서야 수상, 수감, 산문, 산필, 수필 등이 무려 25종의 각종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비로소 수필이란 말로 새로 사용하게 되었다. 1908년을 우리 나라 현대수필의 기점으로 삼는 것은, 이 해에 창간된 잡지「소년」에 〈半巡城記〉 〈평양행〉 등 기행수필이 선보이기 때문이다. 1914년에 창간된 「學之光」에 서간문과 수상문이 발표되어 수필의 여명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현대수필의 효시적인 작품으론 유길준(1856~1914)이 〈서유견문〉을 꼽는다. 1920년대는 이광수와 최남선을 비롯하여 나도향, 김석송 등이 「생장」지에 수필을 발표하는가 하면 이희승, 유진호 씨 등이 「문우」지에, 양주동, 현진권, 심훈 씨 등이 「문예시대」에, 김동환, 김진섭 씨 등이 「조선문단」에 수필을 발표하고 있다. 이외도 「개벽」,「백조」, 동아일보 등에 적잖은 수필이 발표되고 있으나, 문학적인 향취가 풍기는 수준급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수필에 대한 두드러진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수필문학에 대한 활발한 이론이 전개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수필전문지 「박문」이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김기림이 1933년에 「신동아」에 〈수필을 위하여 〉라는 글을 싣고 김광섭은 1934년에 〈수필문학고〉를 발표했으며, 김진섭은 1939년 동아일보에 〈수필의 문학적 영역〉을 써내는가 하면, 1938년에는 박문서관에서 최영주를 편집 및 발행인으로 한 수필전문 월간지인 「博文」이 1940년까지 20여호를 발간하게 되었다.

  1940∼1950년대에 질이 높은 수필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정수필 중에서도 노자영이나 방인근 등이 보여준 서정성의 미문체 수필과 이태준, 이병기 등이 다룬 자연예찬 등의 수필, 이양하의 〈나의 소원〉,〈조그만 기쁨〉,〈신록예찬〉 등의 수필이 이를 증명한다. 이 시기에는 김진섭의 「인생예찬」,「생활인의 철학」을 비롯하여 이양하의 「이양하수필선」(1947) 이광수의 「돌베개」(1948), 마해송의 「편편상」(1948), 김소운의 「목근통신」,「마이동풍첩」, 노천명의 「산딸기」,「나의 생활백서」, 김태길의 「웃는 갈대」, 전숙희의 「탕자의 변」(1954), 조경희의 「우화」(1955), 이희승의 「벙어리 냉가슴」(1956), 피천득의 「금아시문선」(1959) 등이 발간되어 질적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서서히 수필의 저변확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965년에 「한국수필문학전집」전5권이 국제문화사에서 간행되고, 1966년에 동아출판사에서 「세계수필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
  우리 나라 현대 수필의 시발을 1900년대로 잡는다면 1세기가 되었지만, 수필의 대중화가 이뤄진 것은 1970년대이며, 그로부터 30년간이 수필문학 중흥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수필문학」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월간문학」, 「현대문학」 등 종합문예지에서 수필을 문인등용장르에 처음으로 포함시켜 신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한국 문단이 비로소 「수필」장르에 대한 새로운 인식변화를 보여준 것이며, 이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결과였다. 일찍이 프랑스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가 「수필이 미래의 모든 장르를 흡수해 버릴 것이다」라고 예상한 바 있다. 오늘날 신문을 비롯한 모든 인쇄 매체에서, 수필은 대중에게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문학 장르로 정착되는 단계를 밟고 있다. 생산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독자로 엄격히 구분되던 시기가 지나가고, 글쓰기가 대중화 일반화되는 추세를 보임에 따라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자신의 삶과 체험을 통한 진실을 형상화하는 수필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수필은 수필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만인의 공유물로서 자신의 삶에 의미 부여와 가치 창출을 위한 탐구와 노력의 한 방법으로 채택되고 있다.

  1970년대 이전, 수필 문학에 대한 문단 및 독자들의 시각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수필은 마치 아무나 쓸 수 있는 장르처럼 인식돼 와 「서자문학」 취급을 당해 왔다. 시인과 소설가 등 문필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지식인들이 쉽게 자신의 체험과 사상을 형상화할 수 있는 문학 장르로 인식돼 왔다. 수필은 시, 소설, 희곡 등 픽션과는 달리 논픽션이라는 장르상의 특성 때문에 굳이 수필가만의 전용물일 수 없으며, 만인의 공유물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친숙감을 제공하며 문학의 저변확대와 일반화에 기여하는 일면이 있는 반면, 전문성 문학성의 결여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수필문학의 활성화가 이뤄진 것은 우리 수필문학사상 가장 괄목할 만할 현상으로 중흥의 계기를 마련한 시기였다. 수필에 대한 편견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수필이 문학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하며 백안시하는 사람이 있고, 「주변문학」, 「비전문 문학」으로 가볍게 인식하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수필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지성과 비평을 갖춘 문학, 감성과 논리성을 겸비한 문학, 인생적인 경지를 끌어올리는 문학, 자유롭고 다양성을 지닌 문학, 미래적이고 가능성이 많은 문학으로 생각하고 있다.

  현재 수필전문지만 들어도 월간 「수필문학」,「월간 에세이」, 격월간「한국수필」,「수필과 비평」, 계간「현대수필」,「창작수필」,「에세이문학」,「수필」,「수필춘추」 등으로 발표지면의 증대와 함께 매년 신인배출만도 2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수필동인회 결성이 전국 시·도로 확산되고 정기적인 수필동인지들이 간행되고 있다. 대구·경북지방의 수필가들이 동인으로 참여하는 「영남수필문학회(구 경북수필문학회)가 창립 31주년을 맞이하는 것을 필두로 「부산수필」,「경남수필」,「수향수필」,「전남수필」,「무등수필」,「광주수필」,「전북수필」,「충청수필」,「충남수필」,「강원수필」,「제주수필」,「울산수필」,「처용수필」,「제물포수필」 등이 간행되고 있다. 또한 종합문예지와 수필전문지를 통해 나온 수필가들만의 동인회가 결성되어 수필문학세미나 개최와 수필동인지를 정기적으로 간행하고 있어서 수필문단에 활기를 불어넣는 요소가 되고 있다. 「대표에세이문학회」(월간문학 출신),「현대문학수필작가회」(현대문학 출신),「한국수필동인회」(한국수필 출신), 「수필문학동인회」(수필문학 출신),「한국현대수필가협회」(현대수필 출신 및 회원),「해바라기수필동인회」(창작수필 출신),「수필과 비평 동인회」(수필과 비평 출신)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 신문사에서 설립한 문화아카데미를 비롯하여 대학의 평생교육원과 사회교육원, 백화점, 구청, 사회단체의 교양·문화교실에서 수필이 인기를 얻고 있다. 수강생들이 지도 교수의 도움으로 수필동인회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동인지를 발간하며 지속적인 활동 무대로 삼는 경우도 있다. 과히 수필의 홍수 시대를 맞고 있으며 바야흐로 급격한 양적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문예지들의 신인 양산이 문학의 질적 저하와 품위 손상을 가져온다는 지적도 적지 않게 받고 있다.

  수필의 양적 팽창에 따라 질적 성숙과 내실화를 위한 노력과 시도도 추진되었다. 수필문학에 대한 이론 정립과 방향 모색이 활발히 이뤄졌다. 수필문학세미나, 수필전문지의 특집을 통한 방법이었다. 연례적으로 수필세미나를 열고 있는 단체로는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한국수필문학회, 대표에세이문학회 등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수필가 윤재천 씨가 자비로 내고 있는 「수필학」을 들 수 있다. 대학에 재직하는 교수들을 필진으로 취약한 수필문학의 이론계발과 전개, 방향 모색을 학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시도와 노력은 종전까지 없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로 평가된다. 학문적 이론적인 뒷받침을 강구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문학 발전을 위한 청신호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수필문학사상 본격적인 창작론, 작가론, 작품론이 시도, 발표된 것은 큰 수확이다. 또한 수필가 박연구 씨에 의해 화가 김용준, 문학평론가 김동석의 수필이 발굴, 재조명된 것도 우리 수필의 영역을 넓힌 일이었다.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평론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수필전문평론가가 출현하여 비평작업을 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윤재천, 강석호, 이정림, 하길남, 한상렬, 김종안 씨 등이다. 수필전문지와 종합문예지 등에 월평, 계평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상비평의 수준에 머물고 있으나, 작가론 작품론이 전문수필평론가들의 작업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수필 평론부분에 본격성과 발굴성이 미흡하다. 수필계 전반을 통찰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방향모색, 이론의 계발, 날카롭고 참신한 제시가 부족하다.

  수필문학의 정리작업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금성사, 범조사 등 출판사에서 한국수필문학전집이 출판되었으며 범우사, 자유문학사 등에서 수필문고를 펴내어 수필문학의 정리작업과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의 대부분은 시인, 소설가와 저명 필자들의 것이어서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아쉬움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 1999년에야 현역 수필가들만을 대상으로 수필문고가 선우미디어, 수필문학사에서 시도, 간행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수필시대를 여는 좋은 전조가 되고 있다. 모든 문학장르는 점차 영원성 심오성을 취하던 태도를 버리고 쾌락성과 흥미성으로 상업주의와 결탁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대중화 일반화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에 따라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려는 시장경제 마인드가 도입되기 시작하고, 문학도 권위주의를 벗고 서비스적인 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문학의 대중화와 저변확대에 있어서 대중과 가장 친화력을 가진 수필이 양적인 팽창을 보이는 것은 시대적 욕구와 문화적 현상일 수도 있다. 출판가에서는 「특수 체험」을 파는 시장이 형성돼 있고, 고백, 자전, 폭로, 회고형식의 수필집, 수상록이 판을 치고 있다. 문학수필이 발붙일 곳을 찾기가 어렵게 된 것은 좋은 수필가와 수필작품의 빈곤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대중적인 기호가 자극적이고 통속적 흥미주의로 흘러가고 있으며 여기에 상업주의가 편성하여 부추기고 있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20세기의 수필문학을 살펴보면서 두드러진 현상으론 급속한 양적 팽창 속에 질적 미흡을 들 수 있다. 수필의 대중화와 저변확대엔 큰 진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질적 성장과 발전엔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신인을 양산하는 데 만 급급했지, 수필가를 키우는 덴 무관심했다. 치열한 작가 정신, 역량, 노력이 타장르에 비해 뒤떨어졌다. 전문성 참신성 개성 실험성이 부족하였다. 수필계가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빈곤을 드러낸 것에 대해, 모든 작가들은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해야 한다. 외화내빈의 현상을 조율하지 못하고 이대로 가면 수필의 발전을 기대하지 못한다. 수필이 미래의 본격적 문학장르가 되기 위해선 치열성, 전문성, 본질성, 탐구성을 추구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수필문학의 중흥기라 할 1970년대 이후, 신춘문예,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수필가들의 수가 어림잡아 1천명이 더 될 것으로 보이는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작품면에서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게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제, 소재의 다양성과 기법, 체험의 확대 등은 괄목할 만한 전진을 보았으나, 인격 정서 사상을 통한 감동을 수반하지 못하고 있다. 논픽션인 수필은 시, 소설과는 달리 작가와 작품이 일치를 보여야 하는 까닭에 인생적 경지에 따라 수필의 격조가 달라진다. 아무리 전문지식과 기법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인생수련과 인격도야를 통한 인생경지가 높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수필장르가 갖는 특질이기도 하다.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 빈약하다는 것은, 작가는 많지만 인생경지 높은 작가가 드물다는 것을 말한다. 시, 소설 등은 픽션이기 때문에 상상 흥미 구성 등 요소를 통해 작가가 사상과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만, 수필의 경우는 작가의 삶과 인생적 경지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 수필의 어려운 점이다. 현대의 물질 풍요는 정신 빈곤을 가져왔고, 지식 범람은 인격 저하를 불러오게 했다.

  수필문학의 이론정립과 전개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문학 진흥회, 한국수필문학회와 수필의 비평, 현대수필, 창작수필지에서 매년 정기적인 수필세미나를 개최하여 수필이론의 전개와 방향모색을 해 왔다. 정진권씨가 제기한 「수필에서의 허구의 수용문제」는 수필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 동수필, 해양수필, 테마수필, 장편수필, 3인칭 수필 등이 논의되고 시도됐다. 서정수필 일변도 현상에서 벗어나 논리 철학 명상 학문적 수필에의 개척과 탐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수필문우회와 한국수필가협회 주최로 국제수필세미나를 마련하여 세계수필의 흐름을 살피고 수필교류에도 노력을 보였다.
  한국의 수필계가 무풍지대로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나, 시와 소설장르에 비해 작품의 질적 향상이 못 미치고 뛰어난 작가를 양성하지 못했다. 또한 수필전문지마다 출신 수필가들로 구성된 수필동인회를 중심으로 분파를 이루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한국수필가협회나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한국수필문학회 등이 수필문학발전에 노력을 하고 있으나, 조직적 통합적인 활동이 이뤄지지 못하고 협회별로 분산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 수필문단이 경계하고 자제해야 할 일은 협회별 수필전문지별로 분파를 이루는 형태의 활동이다. 양적 팽창에 앞서 이제는 질적인 발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이르렀다. 문학성이 높은 수필을 창작하는 전문수필가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수필이 「여기의 문학」,「마음의 산책」이라는 가벼운 생각에서 벗어나, 치열한 자기 탐구,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과 명상, 각고의 노력과 체험으로 이뤄진 기행,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세계의 탐구, 독자적인 개성과 깊이, 실험성과 새로운 시도가 전개돼야 할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현대의 삶을 담는 그릇이 수필일진대, 앞으로 수필의 모습은 보다 진지하고 다양하고 자유스런 모습을 보이되, 인간주의 자연주의로 나가야 할 것이다.
  좋은 수필을 바라는 것은 곧 좋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는 것이 되므로, 21세기를 맞아 인간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질이 높은 수필들이 많이 나타나길 기원하지 않을 수 없다.
[제17장] 수필의 효용성
 
수필의 효용성
 

  행복은 물질보다도 마음에 있다. '부자 되는 법'과 함께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어느 한 쪽만으로 치우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공부'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수필 공부'도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한다. 수필을 '독백(獨白)의 문학'이라고 한다. 독백은 자신의 마음을 모두 비워 하얗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비우면 맑고 편안해진다.
  마음속에 거울을 하나 달아두어서 자신의 영혼을 비춰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거울을 잘 닦아두어야 한다. 이기라는 먼지, 집착이라는 때, 욕심이라는 얼룩을 잘 닦아내야 한다.
  마음속에 샘을 하나 파두어서 샘물로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티끌과 먼지가 쌓이게 된다. 불경(佛經)에서 말한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없애야 한다. 수도자가 아닌 이상 이를 제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독소를 씻어내 마음을 깨끗이 할까.
  욕심이 많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음을 비워야만 대자유를 얻을 수 있고,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마음에서 매화 향기가 풍겨야 얼굴에 맑은 미소가 퍼지고 고요해진다.
  마음속에 종을 하나 달아두어서 양심의 종을 스스로 울릴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비어 있지 않고선 종은 어떻게 깨달음의 소리를 듣고 울릴 수 있을 것인가.

  수필은 마음을 꽃피우려는 문학이다. 누군들 일생을 통한 깨달음의 꽃을 피워놓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시, 소설처럼 픽션문학이 아니고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아낸 논픽션문학이니 만큼 작품경지가 곧 인생경지가 된다.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만 문장에서 향기가 풍기지 않으랴.
  수필은 심오한 지성과 냉철한 비판정신을 지닌 산문을 추구한다. 단순한 지식과 비판정신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바깥으로부터 들어온 앎인 지식이 아니라, 내부에서 체험을 통한 깨달음의 꽃으로 피운 것, 곧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 수필이다. 논리와 이성으로 비판하되 인본주의에 의한 따스함을 잃지 않는 것이 수필의 모습이다.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과 마음을 읽는다는 말이 된다. 한 사람의 수필집을 본다는 것이야말로 픽션류의 작품집을 보는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이고 만나는 일이다. 수필에 있어선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방법론보다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생론이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수필을 잘 쓰려면 먼저 좋은 삶과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수필을 좋아하며, 인생의 의미와 깨달음을 주는 수필을 원한다. 문장에서 인격의 향기가 나며 따뜻한 인간미가 우러나오는 글을 좋아한다. 해학과 정곡을 찌르는 비판으로 삶을 일깨워주는 글을 좋아한다. 시대정신과 오늘의 삶과 의식이 깃든 수필을 찾아보길 원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과 인생을 비춰 보이는 문학이다. 교수나 학자가 노동자나 서민의 삶과 인생이 될 순 없다. 수필가마다 자신의 삶에서 피운 경지의 꽃을 피워놓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수필의 개성과 장점이 되는 동시에 한계와 단점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 독자들은 서정수필가에게 땀과 고뇌의 현실문제와 사회의식의 부족을 지적하고, 서사수필가에게 감성 부족과 이미지의 결여를 지적하기도 한다. 기행수필가에게 왜 여행만을 테마로 하는가 라는 질문은 쓸 데 없는 일이다. 꽃을 평생의 테마로 삼는 수필가에게 다양성과 소재빈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약 중수필과 경수필, 서정수필과 논리수필로 구분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는 식의 논란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는 효용성의 문제이며, 독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수필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수필을 쓰는 목적은 수필가에 따라 다를 것이나 원대한 포부를 성취시키기 위한 것이거나 구원과 같은 거창한 의식의 발로와는 거리가 멀다. 평범 속에서 진실과 감동을 얻고 깨달음의 꽃을 피워보자는 데 있다. 마음의 평온과 미소를 얻어보자는 데 있다.
  나는 수필을 쓸 때 누가 기다리고 읽어줄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심심풀이로 쓰는 경우가 많다. 너무 적막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까워 글을 써볼까 마음을 낸다. 재미있는 일이 있기만 하면, 글을 쓰려는 생각이 좀체 일지 않을 것이다. 이왕 쓸 바엔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써보려고 생각한다. 혹시 독자 한 명이라도 내 글을 읽고 잠시동안이라도 생각해 주는 고마운 이가 있다면 하고 자위하면서 쓴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의 침식에 못 이겨 퇴색되고 낡아져서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 어떤 가치와 의미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퇴색되어 잊혀져가게 마련이다. 시간의 물결에 흔적 없이 떠밀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발버둥을 치는 행위가 나에게선 수필이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필을 써오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는 자괴심이 일어 마음을 위축시키지만 자신의 삶과 인생을 기억하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한시적인 삶을 살뿐인 인간이 영원을 수용하는 장치로써 가장 슬기로운 것이 있다면 수필 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수필 쓰기는 완성이 없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이란 없는 것이기에 완전이나 완성에 이르는 수필이 없다고 본다. 수필은 끊임없는 습작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치기와 평범을 넘어 차츰 달관과 깨달음으로, 평범의 경지에서 비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든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치면 경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수필 쓰기는 마음의 경지와 인생 경지를 얻는 공부이며 과정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지적 과시, 성공담의 피력, 인생론의 설파, 개인사의 기록, 선전의 도구, 진실의 호도, 정신적인 사치에 목적을 둔 듯한 수필 쓰기도 보인다. 이런 개인적인 이기와 영달에 목적을 둔 수필 쓰기는 생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 자신의 체험과 인생을 바탕으로 쓴 글이지만, 자신을 위한 글이 아니라 독자들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주는 글이어야 한다.
  수필을 쓰기 전에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를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독백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진실 앞에 서야 한다. 자신을 위한 글인지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글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효용성 없는 글은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의미와 가치가 되길 원한다. 한 번으로 끝나는 글이 아닌, 읽고 또 읽고 싶은 그 무엇을 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무엇이 수필의 효용성이 된다. 효용성이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문학 이론으로 쉽게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작자와 독자가 영혼 교감과 감동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수필 대중화는 수필의 효용성으로 확대되었다. 시와 소설의 중간 거리에서 시의 장점과 소설의 장점을 취하면서 가장 알기 쉽고 진솔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분량과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신변잡사에서 얻어낸 삶의 발견과 의미의 확대는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의 생명과 효용성은 허위가 아닌 진실에서 온다. 허구의 도입을 통해 영역 확장을 꾀해보자는 것과 '상상'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워 주제에 벗어나지 않는 허구의 수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수필에서도 허구 아닌 상상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 수필이 허구와 체험의 조합품이라면 소설과 무엇이 다르며 수필을 읽는 효용성이 무엇인가. 수필의 생명과 효용성은 체험과 진실을 통해 맛보는 삶과 인생일 것이다.
오창익 교수님의 수필교실
1 第1話  序 說
(1) 創作 本質
 
문예 창작은 운문이든 산문이든 그 장르 여하를 막론하고 정서(情緖)와 사상(思想)과 상상(想像)의 세 가지 본질적 요소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 세 요소는 시, 소설, 수필 등 장르적 특성에 따라 각기 분산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융합, 분해, 동화됨으로써만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이루게 된다.
이를테면, 시가 주로 정서의 상상화를, 소설이 상상의 사상화를, 수필이 정서와 사상의 구체화를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하고 있음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짧든 길든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창작활동에서 언제나 ‘예(藝)’가 중시되고 있음은 그런 이유에서다. ‘문예(文藝)’란 글을 짓는 재주로 곧 ‘기술’을 뜻한다. 정서를 구체화 하고, 사상을 상상화 하고, 사상을 다시 정서화 하기도 하는 작자 나름의 수단이나 능력이기도 하다.
물론 수단이나 능력은 천부적인 소질과도 관계되겠지만, 계속적인 자기 연마나 고된 훈련의 과정을 거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연과 인생을 보고, 느끼고, 헤아리는 철학관이나 가치관의 정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사(多寫), 다상량(多商量)이 창작 기술의 대명사가 된 것도 그래서이다.
남의 글을 많이 읽어야 지적인 자기 세계가 확장되고, 또한 쓰고, 베끼고(남의 글), 생각함이 많아야 자기 정서의 구체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예창작을 정서와 사상을 상상적으로 처리하는 말(言語)의 미학(美學), 또는 그 말의 형상학(形象學)이라고 하는 것이다. 창작성을 요구하는 본격수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2) 創作 機能
 
인생이 자기 실현의 무대라면, 문예창작은 어디까지나 자기표현의 구체적인 수단이다.
때문에, 문학의 기능 중에서도 특히 창작수필은 교시성(敎示性)보다는 쾌락성(快樂性)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쾌락성은 단순한 놀이나 재미가 아니다. 미적(美的) 충동이나 감동으로 인해 유발되는 즐거움을 뜻한다.
그래서 허드슨(Hudson, W.H)도 그의 표현 본능설에서 쾌락은 ① 자기 표현을 위한 욕망 ② 인간과 인간 행위에 있어서의 흥미로운 것 ③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우리의 존재를 떠올리는 상상 세계에 있어서의 흥미로운 것들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행위’이거나 ‘만족할만한 상태’라고 했다.
때문에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간에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고된 작업 속에서는 불만과 갈등이 해소되고, 좌절과 방황이 극복된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열정과 욕망이 뜨겁게 연소됨으로써 발산하는 극적인 ‘환희의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이러한 환희의 순간들이 근래에 와서 시나 소설보다는 수필에서 더욱 활발하게 작품화 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여가선용이나 취미생활이기 보다는 소외된 인간의식 즉, 인습이나 제도에 가리워졌던 자기 확인 및 그 회수작업의 일환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전문적인 작가 수업이 아니 되더라도 교양으로서의 문학의 가치, 즉 조화로운 인간 형성이나 자기 확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책, 좋은 글을 만날 때의 기쁨을 아름다운 꽃이나 잘 익은 과일에 비유한다. 더욱이 그 꽃과 과일이 손수 씨뿌리고 심은 자기 노력에 의한 결과였을 때, 그 맛과 그 향기는 감격적일 수밖에 없다.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맛과 향기는 문예 창작에 관한 한, 심은대로 안일하게 방치하는 잡초와 잡목과 같은 것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교훈’이요, ‘쾌락’이기도 하다.
제재(題材)와 주제, 문체와 문장, 성격과 구성 등 선택과 자기화와 객관화의 고달픈 과정을 겪어야 함은 물론이다. 제재 선택을 위한 개성적인 시각이 있어야 하고, 주제의 자기화를 위한 인생관의 정립이 따라야 하고, 진실의 객관화를 위한 보편성의 유지가 보장되어야 한다.
 
 
1. 創作性 雜文性
 
책머리에서도 밝혔지만, 문학에 있어서 ‘잡문성’과 ‘창작성’ 문제는 비단 수필 장르에만 국한될 일은 아니다.
왜냐 하면, 수필이 아닌 여타 장르에도 창작성이 결여된 잡문 같은 시, 잡문 같은 소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문단 현실은 ‘잡문’하면 으레 수필을 들먹이고, ‘잡문성’하면 신변사나 세상사를 두루 제재화 하는, 수필의 그 산만성만을 건드린다. 일부 독자나 평자에 따라서는 그게 마치 수필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거나 본질처럼 여겨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굳이 그렇게 된 원인을 밝히려 들자면 ’70년대 이후 대폭 확장된 발표지면이나 엄청나게 양산된 작품 수에도 이유는 있다 하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수필 나름의 장르적 특성, 즉 형식의 자율성이나 내용의 무제한성 등을 전혀 고려치 않은 편견(偏見)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정한 형식이 없다는 산만성, 아니 형식이 보다 자유롭다는 무제한성, 즉 ‘形式的 自律性’이 곧 문학으로의 수필의 성격이자 운명임을 외면한 편협성에 있다고 보겠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은 내용이 없이 존재하는 ‘形式’은 우상처럼 무조건 받들려고 하나, 형식 없이 존재하는 ‘內容’은 아무리 귀하고 알뜰해도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문학 풍토, 특히 수필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재에의 동화, 그를 충분히 자기화함으로써만 문학일 수 있는 수필에서는 어디까지나 내용이 형식을 선택할 뿐, 형식은 내용을 결코 좌우할 수는 없다. 문학에서의 내용은 창작의 목적일 뿐, 형식이야 말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릇 학문엔 이론과 실제가 공존한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특히나 생활문학인 수필에서는 이론보다는 작품이 우선한다. 작품으로 말을 하고, 작품으로 형식의 모형을 제시해야 한다.
때문에, 수필의 성격이자 운명이기도 한 형식의 자율성으로 하여 부수되는 그 ‘雜文性’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문학일반의 창작성, 즉 문예성을 강조하는 길 밖에는 달리 왕도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본격수필이 요구하는 제재의 자기화나 주제의 의미화도 가능하고, 미래문학으로의 장르의식도 구체화 될 것이다.
 
2 構成的 要素와 機能的 要件
1. 構成的 要素
 
수필은 미래 산문문학의 대표적인 장르다.
따라서, 소설이나 희곡과 같이 한 편의 작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구성적 요소들이 모여 유기적으로 연결 조합되어 통일체를 형성해야 한다. 그 구성적 요소로서는 크게 나누어 ① 제재(題材) ② 주제(主題) ③ 구성(構成) ④ 문장(文章)을 들 수가 있다.
하지만 여타 산문과는 달리 ‘無形式의 形式化’, ‘無秩序의 秩序化’, ‘無論理의 論理化’라는 창작수필의 특성을 체질화 하기 위해서는 이들 구성요소들은 필히 다음과 같은 기능요건들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즉 ‘제재에의 동화(同化)’, ‘주제의 의미화(意味化)’, ‘구성의 다변화(多邊化)’, ‘문장의 개성화(個性化)’가 그것이다. 이는 수필의 속성이자 운명이기도 한 잡문성을 극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기도 한다.
 
 
2. 機能的 要件
 
(1) 題材의 선택
 
제재란 곧 ‘글감’이다.
옷을 짓는 데 옷감이 필요하고, 요리를 하는 데 요리감이 있어야 하듯, 한 편의 수필을 쓰는 데 있어서도 그 맛과 모양(주제)을 내기 위한 재료(제재)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흔히들, 수필은 신변사나 생활일상에서의 생각이나 느낌을 제재로 하는 글이라 글감이 흔해서 편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흔한 글감들이 자리만 옮겨놓으면 곧 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물전에 생선이 가득하고, 포목전에 직물이 가득차 있어도 특정한 ‘맛’과 ‘멋’을 내는 재료는 따로 있듯이 인생과 자연, 개인과 사회, 경제와 문화 등 글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나 수필가에게 취사선택되는 제재는 역시 한 둘에 불과하다.
때문에, 수필의 제재는 양(量)보다는 질(質)에 있고, 질보다는 적소(適所)에 적재(適材)를 선택하는 데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요리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시래기로 버섯요리는 만들 수가 없는 법, 결국 양질의 제재로써만 좋은 글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면, 좋은 글을 위한 좋은 글감은 어떻게 해야 얻어지는가. 경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5구분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 첫째는, 주제의식을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구체화 할 일이다.
수필을 쓰다 보면, 제재보다 주제가 먼저 결정될 때가 있고, 반대로 제재가 주제보다 먼저 주어질 때가 있다.
지금은 전자의 경우로서, 주제가 먼저 결정됐을 때다.
주제가 정해지면 그만이지 구체화는 또 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장형의 문학인 소설과는 달리 비교적 짧은 형식의 문학인 수필에서의 주제는 보다 단순․선명하고, 압축적이어야 한다. 넓게 보다는 좁게, 크게보다는 작게 응축시킴으로써 주제의 핵(核)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성격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래야 주제가 필요로 하는 제재의 종류나 범위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봄꽃으로 봄을 노래하되 ‘先驅者的 意識’이란 주제가 사전 구체화 되어야 그를 충족시킬 수 있는 꽃, 즉 개나리나 진달래가 손쉽게 찾아진다는 말이다. 같은 봄꽃 중에서도 살구꽃이나 복사꽃이라면 그 수필의 주제는 회고(懷古)나 사향(思鄕)으로 그 맥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적재(適材) 선택의 사전 요건은 역시 ‘주제의식의 구체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둘째는, 평소 사물을 예의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는 일이다.
평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도 무심히 보아넘기지 않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를 주의깊게 관찰하다 보면, 길가로 밀려난 돌멩이에서는 ‘소외된 생명의식’, 눌리고 짓밟힌 풀에서는 ‘끈질긴 생명력’ 같은 것을 어렵잖게 관조할 수가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뜻이 있음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마음을 주지 아니 하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 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고 했다. 이렇듯 제재는 먼 곳에 숨어있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있는 것이다.
출퇴근 때 서서 기다리는 전철 정류장엔 유명 시인의 명시가 여기 저기 걸려있다. 하지만 그걸 매일처럼 쳐다보면서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몇 해가 지나도 그 시와 그 시에 담긴 진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먼지 낀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쓰레기통에선 결코 예쁜 장미가 필 수 없다고 하지만, 주의깊게 관찰을 하기만 하면, 장미보다도 더 값지고, 더 생명력있는 ‘힘’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못쓰게 된 ‘비닐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는 어른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뒤따라 가던 어린 학생은 버린 그 우산이 자기에게는 쓸모가 있다고 집어든다. 비닐을 벗기고 나면,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나무 살이 있고, 그 살로는, 마땅한 재료가 없어 미루어오던 꽃바구니를 예쁘게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역시 마음이 있는 곳에 뜻이 있음이다.
잠자리 날개를 무심히 보아넘기지 않았던 라이트 형제가 있었기에 오늘의 비행기가 있다. 뉴톤이 발견한 ‘인력의 법칙’도 예외는 아니다. 떨어지는 사과를 무심히 보아넘기지 않았던 관찰자의 뜨거운 마음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청개구리의 오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염상섭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거나, “보리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한흑구의 수필 <보리>)”와 같은 오류도 실은 사물을 주의깊게 관찰하지 않은 데서 온 옥의 티인 것이다.
 
그 셋째는, 솔직한 자기 눈, 자기 마음으로 제재를 찾을 일이다.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상대라 해도 제 마음에 들어야 제 것이 된다는 말이겠으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무리 귀하고 값진 물건이 앞에 있다고 해도 제 눈에 꼭 맞는 돗수의 안경(가치관이나 인생관)을 끼고서야 제대로 볼 수도 있고, 제대로 평가도 가능하다는 말도 된다.
제재와 수필가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질좋고 귀한 글감이라 해도 제 마음, 제 눈으로 정확히 보고 헤아리지 않으면 관념이나 상식에 가려서 그 글감의 고유한 질감은 추출해내기가 어렵다. 수필이야 말로 진리가 아닌 ‘진실의 힘’으로써만 독자의 공감이나 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성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간벽지에서 가난하게 사는 국민학교 어린 학생이, 밤새 뜰에 내려 가득히 쌓인 흰눈을 보고 이렇게 글짓기를 했다고 하자. “……저 흰눈이 모두 흰쌀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아마도, 그 글을 읽던 산골 학교 담임선생님은 순간 마음이 찡 했을 것이다. 코허리가 시큰했을 것이다. 글씨는 비뚤비뚤 볼품이 없었겠지만, 읽어가던 선생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켰으니, 그 문장, 그 글이야 말로 명문일 수밖에 없다.
일년에 고작 한두 번, 생일에나 명절 때에만 먹을 수 있었던 쌀밥이었기에, 그렇게도 간절했던 마음 「진실」이 있었기에 그 어린 학생의 눈에는 뜰에 내린 하얀 눈이 모두 흰쌀로 보였을 것이다. 역시 제 눈으로 본 제 마음의 솔직한 진실이었다.
부유한 도시 가정에 태어나 우유나 토스트만을 기호하며 쌀 걱정없이 사는 학생이라면 그런 작문은 짓지도 못했을 것이고, 설혹 지었다 해도 읽어가던 담임선생의 마음을 감동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수필에 있어서, 특히 창작수필에 있어서의 공감이나 감동은 제가 볼 수 있는 한의 ‘제 눈’이 있음으로써만 절대 가능하다. 때문에, 살얼음을 딛고 핀 이른 봄의 개나리꽃을 본다 해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게 기쁨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고, 미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좋은 제재를 찾는 수필가에게 필요한 것은 개성어린 ‘제 눈, 제 마음’인 것이다.
 
그 넷째는, 깊이 있는 경험을 통해 자신있는 제재를 택할 것이다.
문학의 본질적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想像)에는 ‘再生的 상상’과 ‘創造的 상상’이 있다. 체험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는 ‘재생적 체험’이 있고, 과거와 과거, 또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간접경험도 포함하여)을 서로 접합하거나 반대로 분리, 분해함으로써 얻어지는 ‘창조적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재생이든 창조이든 절실한 체험, 풍부한 체험은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제재(소재)를 취사선별하는 일에는 가장 확실한 준거(準據)가 된다. 체험이야 말로 더없이 정직한 인생의 교사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교훈을 주고, 확실한 방법을 준다.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특히 수필가에게 있어 체험이 곧 생명임은 그래서이다.
수필은 정직성이나 사실성(寫實性)을 체질로 하는 공감의 문학이다. 그래서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작가는 저무는 창가에서 노을을 붙잡고 어린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밤새워 풀벌레 소리에 귀기울이며 젊은 날의 고독을 다시 줍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예고도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하루 종일 전철을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기도 한다. 모두 경험을 되살리거나 새로운 체험을 통해 질감있는 제재, 또는 주제가 요구하는 적재(適材)하나를 얻기 위해서다.
그래서 노벨상의 작가 헤밍웨이(1898~1961)도 일찌기 어린 나이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전쟁을 실감하고 체험했다. 명작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나 ≪해는 또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는 모두 그 전쟁의 생생한 체험에서 얻은 수확임은 물론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작가 마가렛 밋첼(1900~1949)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집필하기 전 작자는 3년이란 긴 시간에 걸쳐 남북전쟁의 격전지를 찾아 당시의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보냈다고 한다. 물론 수집한 자료들을 통해 몸소 전쟁과 비극을 체험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깊이있는 체험이야 말로 자신있는 글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다섯째는, 글감을 항시 메모하고, 그를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
는 일이다.
‘忘却은 곧 創作’이란 말을 쓰는 사람도 있다.
이는 옛 것(미완성이나 미해결의 것)의 보완이거나 그 연장작업으로서는 결코 새 것을 창출할 수가 없다는, 그래서 새롭게 시도해야 된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글감 고르기에 있어서는 ‘忘却’은 그와는 정반대 의미를 갖는다. 망각하지 않도록 기록해 두어야, 다시 말하면, 그 때 그 때의 느낌이나 생각을, 그리고 상황이나 사건들을 자세하게 메모해 두어야 창조도 창작도 가능하다.(미해결의 것도 포함하여)
자투리 천 조각을 하나씩 눈에 띄는 대로 모아두다 보면, 또는 버리기가 아까운 나무 토막을 정성들여 모아두다가 보면 언젠가는 훌륭한 조각이불의 거죽이 될 수도 있고, 쓸모있는 가구 하나가 만들어지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기계와 달라서 언제까지나 기억을 저장할 수도 없고, 또 담아두는 양에도 한계가 있다. 더욱이 산업사회, 그 후기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생활은 하루가 다르게 복잡해지고 다양해 진다. 바쁘게 좇으며 쫓기다 보면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것들을 잊게 된다. 소중한 기억들의 망각, 신변사나 생활일상이 소재가 되는 수필문학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 손실을 막기 위해 작가는 평소 메모하는 습관을 생활화 해야 한다. 또한 그 메모를 정리하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메모, 그 자체는 주제가 요구하는 자료제공이라는 단순행위에 그칠 수도 있지만, 그 메모의 정리작업은 창작활동에 있어서 동기유발이란 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소장된 메모를 정리하다가 맥을 같이하는 몇몇 제재들을 하나로 묶게 되면, 생각지도 않던 의외의 생각이 곧 귀한 주제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메모광의 문인이라면, 가까이로는 시인 이하윤(1906~1974)을 들 수 있고, 멀리로는 소설가 도스토에프스키(1821~1881)를 꼽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그의 수필 <메모狂(1939, 5 ≪文章≫ 4호)>에 잘 나타나 있고, 후자의 경우는 그가 죽은 후 발견되어 문인들의 귀감이 된 10여 개나 되는 ‘메모 상자’로 익히 알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도스토에프스키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메모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에도 메모지를 옆에 두었고, 여행이나 산책을 할 때에는 물론, 작품 구성을 할 때에도 조각 조각 메모지의 아귀를 맞추어 가며 완성을 했다고 한다. 실로 그는 위대한 메모광이었다.
 
지금까지 열거한 위의 문항들은, 제재보다 주제가 먼저 결정(지정)됐을 때의 제재선택 방법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다가 보면, 그와는 반대로 주제보다 제재가 먼저 주어질 때가 적지 않다. 신변사나 일상사를 소재로 하는 생활수필인 경우에는 오히려 후자의 경우가 더욱 많다고 보아야 한다.
주어진 소재, 그로부터 어떤 주제를 추출해내는가는 개성을 기조로 하는 수필문학에서는 가히 생명적이라 할 수 있다. 작자의 사상이나 인생관, 또는 가치관에 희석되고 여과됨으로써만 가능하기에 그 작업은 대단히 중요하다.
편의상 그 작업을 제재에의 ‘自己同化’라 칭하고, 살펴보기로 한다.
 
(2) 題材에의 同化
 
제재에의 동화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질화(同質化) 현상이다.
이는 내가 물(物)이 되고, 물이 내가 되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상태로서, 철저하게 나를 먼저 제재 앞에 비움으로써만 가능하다. 비운만치 그 자리에 다시 채우는 순수(純粹), 그게 곧 물(物)의 마음이요 나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 진실 하나를 얻기 위해 수필가는 헐벗은 산이 되고, 고독한 나무가 되고, 때로는 이끼낀 바위가 되기도 한다.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나무, 그 바위를 통해 읽는 동화된 상태에서의 진실만이 그 수필의 ‘主題’가 될 수 있기에, 그 작업은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수필가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제재에의 동화작업에는 자기를 비우는 일만치 중요한 게 또 하나 있다. 비운 자리에 채워진 그 순수 속에 끝내 유지돼야 하는 인간성, 즉 인간화 된 자기 ‘個性’인 것이다. 그 개성이 마모되거나 탈색되어 빛을 잃을 때에는 그 수필도 같은 운명으로 시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무를 통해 삶을 말하든, 바위를 통해 영원을 말하든 그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작자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개성, 그 개성의 유지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비우는 고통만치 지키려는 자기노력이 병행됨으로써만 보다 완벽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어떤 이는 한 두 달, 어떤 이는 1, 2년씩이나 기다리며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보리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라는, 옥의 티를 남긴 한흑구의 명작 <보리>도 작자 자신의 고백으로는 2년이나 걸렸다고 했다. 비우고 채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미당(未堂)의 명시 <국화 옆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마지막 제4연(聯)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의 그 한 마디를 찾기 위해 그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 역시 마지막 그 한 연이 국화의 마음이자 동화된 그의 마음이요, 그의 개성이었기 때문이다.      
3 主題, 그 意識의 具體化와 意味化 / 想像化
1. 主題意識의 具體化
 
주제란 글의 핵심이며 요점이다.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사상으로 그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영어의 Theme 또는 독일어의 Thema에 해당하는 이 말은 수필문학에 관한 한 가히 운명적인 것으로써 글의 사활과 직결된다. 수필에서의 주제는 여타 산문과는 달리, 선택된 소재에 대한 작자 나름의 자기 해석이며 평가이며 또한 이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에서의 주제가 사건이나 행위의 통일원리라면, 수필에서의 주제는 작자가 선택한 현실(제재)을 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자기화 하는 ‘觀點’이기도 하고, ‘意味賦與’이기도 하다.
때문에, 주제의 결정, 또는 그 의식의 구체화 과정도 소설이나 여타 산문과는 같지 않다.
소설의 경우, 소재를 다루어나가는 통일원리, 즉 ‘起, 承, 轉, 結’의 수순만 지키면 별 무리가 없겠지만, 사건이나 행위가 없는, 즉 소설에서의 그 ‘結’의 마지막 단계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수필에서는 주제의 설정은 보다 개별적이고, 보다 개성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너비가 좁고, 비록 지엽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의식의 구체화는 보다 알뜰하고, 보다 완벽해야 한다.
예컨대, <봄>이란 제재로 수필 한 편을 쓴다 해도 의식의 구체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면, ‘蘇生’, ‘希望’, ‘出發’, ‘思鄕’, ‘懷古’ 등 유사한 사상이 서로 인접 내통함으로써 오히려 중심사상을 분산, 확산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
그 인접 사상을 전부 수용할 수도 없고, 또 수용해서도 안 되는 게 단형(短形)의 문학인 수필의 체질이자 성격이기 때문이다.(장편수필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따라서 수필의 주제는 보다 간명․단순하고, 그 의식의 구체화는 보다 완벽해야 한다. ‘蘇生’이면 소생, ‘希望’이면 희망, ‘思鄕’이면 어디까지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 하나로 집약되고 응축되어야 한다.
20년대를 대표하는 수필 몇 편에서 그 예를 찾아 본다.
≪그믐달(羅稻香, 1925, <朝鮮文壇>4호)≫의 주제는 ‘고독’이다. 그 고독을 살리기 위해 “그믐달은 가슴이 저리도록 쓰리고 가련한 달이다.”,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그믐달은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와 같은 소(小)주제의 문장으로 ‘고독’이란 의식의 구체화를 도모한다.
≪어린이 讚美(方定煥, 1924, <新女性>11호)≫의 주제는 <아름다움>인데, 여기서도 “어린이가 잠을 잔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모아서 그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의 ‘고요함’과 “평화라는 평화 중의 그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의 ‘평화로움’과 “시퍼런 칼을 들고 핍박하여도 맞아서 아프기까지는 방글방글 웃으며 대하는 이가 이 넓은 세상에 이 이가 있을 뿐이다.”의 ‘순진함’이 어울려 순진무구의 그 <아름다움>이란 중심사상을 구체화 한다.
≪靑春禮讚(閔泰瑗, 1926, <別乾坤>, 21호)≫도 예외가 아니어서, “靑春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動하는 심장은 巨船의 汽罐과 같이 힘있다.”에서의 ‘힘’, “우리의 靑春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理想! 이것이야 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에서의 ‘理想’, “人生에 따스한 봄바람을 불어보내는 것은 靑春의 끓는 피다.”에서의 ‘뜨거움’으로, <情熱>이란 주제의식을 구체화 한다.
이렇듯, 제아무리 값지고 귀한 주제라 해도 그 의식의 구체화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귀한 수필, 공감과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문예수필은 결코 기대할 수가 없다.
4  主題, 그 意識의 具體化와 意味化, 想像化
2. 主題의 意味化 
 
의미화란 주제의식을 구체화 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자기화(自己化)의 수법(手法)이다. 기법(技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자 자신의 독창적인 수법인 것이다.
때문에, 그 의미화 작업은 틀에 매인 방법이나 요령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작자 나름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으로 주어진 제재를 분석하는 개성이요, 이해하는 마음인 것이다.
창작수필에서 이 의미화의 작업이 필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수필문학이야 말로 간단없는 정서의 흐름, 그 정서의 자연스럽고도 알뜰한 구체화 작업으로써만 절대 가능한 의미부여의 문학이요, 인간해석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부는 바람을 무정한 인생에 비유하고, 흐르는 물을 덧없는 세월로 의미화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 바람을 덧없는 세월로 바꾸어 보고, 그 물을 무정한 인생으로 달리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꼭 그래야만 되는 게 수필의 생리이자 수필문학의 개성인 것이다.
예컨대, 반쯤 벌레에게 먹혀 볼품없이 땅에 떨어진 낙엽 한 잎을 집어 들고, 그를 제재로 하여 주제의식을 추출, 그 사상을 구체화 한다고 하자.
쉽게는 조락의 의미로서 ‘別離’나 ‘虛無’, ‘彷徨’이나 ‘絶望’ 등으로 어렵잖게 의미화가 가능하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와는 차원을 달리해서, 먹히다 남은 그 반쪽마저 벌레에게 깨끗이 주고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지금 그 낙엽이야 말로 아쉬워 하고 있다는 ‘獻身’의 정신으로도 의미화는 가능하다. 그 의미화가 인간성, 즉 보편성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다른 경우, 쏟아지던 비가 개이자 받고 가던 우산(구멍이 나서 쓸모없게 된 우산)을 길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뒤따르던 꼬마 중학생은 버린 그 우산도 자기에게는 쓸모가 있겠다고 집어든다.
비닐 거죽을 벗기고 나면,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나무 살로는 꽃바구니나 여치집을 만들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그 때, 버린 자는 새삼스럽게 느낀 바 있어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바라다 보며 생각한다. 쓸모없다고 버린 자와 쓸모가 있겠다고 그걸 다시 집어든 자와의 시각의 차이……. 사과 한 알의 낙하로 부터 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톤의 눈도 별 게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작은 의미부여에 지나지 않았음을 절감한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의미화는 꼬마 중학생의 ‘發想’이나 버렸던 자의 ‘깨달음’이나 ‘切感’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날의 느낌을 생활일상에 역류시키거나 자기 사고에 여과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솔직한 자기 반조(返照), 즉 의미있게 헤아리는 ‘인간화’의 작업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필에서의 의미화란 대상의 개인적인 해석이나 보편적인 이해로써만 가능한, 다시 말하면 대상을 내면적 요구에 의해서 합리화 하는 작자의 사상(思想)이요, 이상(理想)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화는 어디까지나 보편성을 기조로 한 인간과 삶의 조화로운 ‘品’이요, ‘格’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산(怡山) 김광섭도 생활은 수필의 심경에서 성숙되고, 그 수필은 시(정서)와 산문(사상)의 조화에서 성숙된다고 했다. 소재는 개성적이로되 주제는 항상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이다.
다음 예문을 통해 현대수필에 나타난 그 의미화의 실상을 확인해보자.(방점은 필자의 것으로, 곧 의미화의 부분이다)
 
(A)
A)는 방정환의 ≪어린이 讚美(<新女性>1924)≫의 한 부분이다.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순수함을 갖춘 어린이의 자는 얼굴을 ‘산 하느님’으로 의미화 하여 ‘아름다움’이란 주제의식을 구체화 하고 있다.
 
(B)
아침마다 도시락 가방을 챙겨가지고 골목으로 나가서 “어머님 차조심 하세요.” 당부를 하며, 아드님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모자를 바라보니 만감이 서린다.(……) 인생유전, 베풀고 받는 관계, 다만 의무가 아닌 사랑의 수혜여서 아름다운 게다.
 
(C)
아침 산책을 가는 마을 뒷길에는 때로는 암소 한 마리가 매어져 있다. 큼직한 몸으로 길을 막고 서 있기 때문에 그를 돌아서 언덕 밑으로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엉덩이를 철썩 친다.(……)
작은 눈, 길게 빼놓은 모가지, 두껍을 등에 메고 어정 어정 걷는 느린 동작, 일 년 이 년을 있어도 말한 마디 없는 침묵의 화신, 거북은 성가신 행동이 도무지 없다.
 
(D)
격정의 밤이 깊어 한 줄기 밧줄 같은 소나기라도 쏟아져 보라. 바람도 자고, 맑게 갠 이튿날 아침, 하얀 모래밭에 흩어진 빨간 꽃잎들, 그 꽃잎들이야 말로 임을 그리다 그리다 지쳐 병실의 하얀 침대요 위에 쏟아 놓은 30대 여인의 각혈(咯血)이 아니겠는가.
 
(A)는 방정환의 ≪어린이 讚美(<新女性>1924)≫의 한 부분이다.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순수함을 갖춘 어린이의 자는 얼굴을 ‘산 하느님’으로 의미화 하여 ‘아름다움’이란 주제의식을 구체화 하고 있다.
(B)는 반숙자의 ≪당신의 봄(<월간 에세이>’88, 5.)≫의 일부다. 이 수필은 “머리가 허연 아들이, 이름표를 단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한다.”라는 서두로 출발한다. 머리가 허연 아들은 작자의 부군이고, 이름표를 단 어머니는 82세가 된 작자의 시어머니다. 망부에의 정한으로 몹시 고독해 하는 어머니를 작자 내외는 숙의 끝에 노인대학엘 입학시켜 드린다.
하여, 작자는 “베풀고 받는 관계, 다만 의무가 아닌 사랑의 수혜여서 아름다운 게다.”라고, 말미의 단 한 문장으로 경외와 그를 기리는 겸허한 생명관(주제)을 ‘아름다운 것’으로 의미화 한다.
(C)는 김시헌의 ≪암소와 거북(<문학정신>’88, 5)≫이란 수필이다.
작자는 등산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굼뜨고 충직한 한 마리 소로부터 꽤나 많이 닮은 자신의 모습을 관조한다.
또한 무거운 두껍을 등에 지고서도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제 길만을 가는 거북을 만나 “일 년 이 년을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침묵의 화신”이라고, 답답하리 만치 과묵한 자기 내연(內燃)의 일상을 조용히 반조(返照)한다.
관조와 반조가 어우러지는 조화의 상태가 곧 의미화 세계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D)는 필자의 졸작 ≪海棠花≫란 수필의 종결구다. 주제는 ‘熱愛’다. 바다 건너로 멀리 떠나간 임을 그리는 여인을 해당화에 비유하고, 그를 기다리다 지친 여심(女心)을 비바람에 진 빨간 꽃잎으로 의미화하여 “30대 여인의 각혈”이라 했다.
 
5 主題의 想像化
 
주제의식이 제아무리 완벽하게 구체화되었다 해도 그 전달이 여의치 않아 부자연스럽거나 산만하면, 흙에 묻힌 보석이나 다름이 없다. 주제의 상상화, 즉 문장을 통한 중심사상의 상상처리는 바로 그 주제의 효과적이고도 원활한 의미전달을 위해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수필의 주제 전달은 사건이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다만 정서의 구체화나 의식의 형상화로써만 가능하기에 그 방법은 지적(知的)이기 보다는 정적(情的)이어야 하고,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이어야 효과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 내용이 설사 교훈적인 것, 비평적인 것, 지시적인 것이라 해도 그 전달은 어디까지나 독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느끼게 하고, 공감케하는 동화의 수법이어야 한다.
설사, 객관적인 사실을 논의하고 평가하는 내용이라 해도 일단은 작자의 심경(心境)에 적셔 여과되지 않고서는 문예화의 기능은 결코 기대할 수가 없다. 수필이야 말로 진리보다는 ‘진실’을, 머리보다는 마음을 통함으로써만 주제 전달이 가능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지적인 것이든 정적인 것이든 간에 수필이 문학이기 위해서는, 즉 미적(美的) 감동과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그 전달방법(문장화)은 어디까지나 상징, 비유, 암시, 생략 등 상상적일 수 밖에 없다.
앞에 예시한 ≪그믐달≫의 경우,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한 가장 한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한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라는 문장으로 정서를 구체화 하고, 말미에 가서 단 한 줄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로 주제의식을 운치있게 ‘상상 처리’한다. ≪靑春禮讚≫에서도 예외는 아니게 “理想! 빛나고 귀중한 理想, 그것은 靑春이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들은 순진한지라 감동하기 쉽고, 그들은 點染이 적은지라 죄악에 병들지 아니 하였고, 그들은 앞이 긴지라 현실에 대한 自信과 勇氣가 있다.”로 사상의 구체화를 도모하고, 역시 말미에 가서 “그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의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에는 生의 讚美를 듣는다. 그것은 웅장한 관현악이며 미묘한 교향악이다. 뼈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의 소리다.”라는 비유 일색의 문단(文段)으로 중심사상을 ‘상상 처리’한다.
≪어린이 讚美≫에서의 말미의 문장 “나는 지금 성당(聖堂)에 들어간 이상의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스런 하느님(위엄 뿐만의 무서운 하느님이 아니고)의 자는 얼굴에 예배하고 있다.”도 주제의식을 상상 처리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6   주제 선택의 조건
수필의 주제 선택은 그 어느 장르의 경우보다도 어렵고 까다롭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작자 주변의 신변사 일상사를 제재로 하면서도 그 중심사상의 핵은 항상 진리가 아닌 '眞實'이어야 하고, 개인이 아닌 '人間'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재는 작자의 눈으로 선택하는 개별적인 것이지만, 주제는 항상 독자와 같이 나누는 이해와 공감, 보다 인간적인 보편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고 까다로운 주제의 선택이나 그 선정의 조건들을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선명한 주제
주제는 그 글의 핵(核)이요, 중심사상이다. 그 사상이 선명하지 못하면 그만치 그 글의 호소력은 떨어지고, 설득력은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창작수필의 주제는 가급적 단순·간명해야 한다. 크게 보다는 작게, 넓게 보다는 좁게, 전체보다는 부분적이거나 국부적이어야 한다. '나무'를 그리되, 소설이라면 뿌리, 줄기, 가지를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완벽하게 갖추어 놓음으로써 형상화가 가능하지만, 수필의 경우 그와는 다르다. 가지나 뿌리, 잎이나 열매 중 그 어느 하나를 통해 나무 전체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제가 단순 명료하면, 중심사상의 확산을 피하는 것은 물론, 읽는 독자에게도 친근함을 주어 이해나 공감이 쉽고 빠르다. 흠이라면, 흔히 명제(제목)와 제재(소재)가 동일한 경우가 많아 독자로 하여금 중심사상을 쉽게 엿볼 수 있게 하는 점이다. 기대감이나 호기심의 유발을 감하게 한다.
그래서 이 때의 서술은 가급적 직서(直敍)를 피하는 비유나 상징, 암시적인 문장이 효과적이다. 나도향의 <그믐달>, 이양하의 <나무>와 같은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나무는 德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分數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도 아니 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 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厚薄과 不滿足을 말하지 아니 한다. 이웃 친구의 處地에 눈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 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 보되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 대로 스스로 足하고, 진달래는 진달래 대로 스스로 足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보슬비 내리는 가을의 저녁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내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팔이 옴짝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제목과 소재가 동일한 수필 <나무>의 한 부분으로써 그 서술은 비유의 문장으로 일관한다.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이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부칠 수도 없이 깜찍하게 어여쁜 계집애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삼키려는 독부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비정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公主)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만,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들어 하는 이나 못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은 보여주는 이가 별로이 없을 것이다.
나도향의 대표작 <그믐달>의 서두부로서 역시 비유와 상징적 문장으로 주제의 선명도를 높여 주고 있다.

2.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
주지(主知)적인 것이든 주정(主情)적인 것이든 수필의 내용은 친구와 마주앉아 격의없이 나누는 '말'과 같아야 한다. 그 말은 문장의 경우에도 해당되고, 주제 설정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수필에 관한 한 말이 곧 문장이고, 문장이 곧 그 글의 주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라 해도 마주앉은 사람(독자)을 무시하는 주장, 설교일 변도의 고담준론으로써는 이해나 공감은 결코 얻어내기가 어렵다.
때문에, 수필의 문장은 가급적 완곡(婉曲), 온유(溫柔)해야 하고, 그 주제는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심사여야 한다. 이 경우, 자칫 교훈이나 비평에 치우치기가 쉬우므로 적의적절(適宜適切)한 예시로 보다 자연스럽게 주제의식을 구체화 해야 한다.
박종화의 수필 <淘河와 靑莊>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세상에 가장 가련한 것은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것이요, 그 대신 가장 가증한 것은 놀고도 잘 먹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불평과 눈물의 반 이상이 여기에 연유함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淘河勞而常飢 靑莊佚而常飽'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淘河는 애를 쓰고도 늘 주리는데, 靑莊은 놀면서도 늘 배불리 먹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淘河와 靑莊이라는 것은 물새의 이름이다. 一名으로   라고도 하는, 俗名으로는 '사다새'이니, 이 새는 하루종일 고기를 엿보며 강물의 뻘흙 속으로 다니면서 날개와 입부리를 더럽혀 가며, 고기를 찾느라 애를 쓴다. 그러나 꽤많은 고기들은 淘河의 그림자를 피해 물가로 숨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靑莊은 항상 물가에 멀쑥하니 서서 밖으로는 한가한 척 아무것도 구하는 것이 없는 듯이 보이나, 淘河에게 쫓겨 물가로 숨어 나오는 고기들을 아무런 수고도 없이 날름 날름 배부르게 잡아먹는 것이니,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일찍이 淘河와 靑莊을 世間利慾人에게 비겨 말해 온 것이다.
애를 쓰고도 항상 굶주리는 淘河와 놀면서도 항상 배불리 먹는 靑莊을 예시로 하여 작자는 어렵잖게 '불평등'이란 주제의식을 공감케 한다.
옛날 朝鮮의 국화는 無窮花이다. 그리고 조선을 그의 날개 밑에 품고 있는 白頭山에는 무궁화가 많이 핀다.
무궁화, 그 이름조차 아름다운 이 꽃은 조선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는 名花라고 한다. 이 꽃은 반드시 백두산에만 피는 것이 아니요, 조선 각지, 어느 구석에든지 반드시 피는 꽃이다. 이 무궁화, 그는 조선사람의 마음을 대표하느니 만치 결코 화려한 꽃은 아니다. 청초한 맛은 있으나 진하고, 그리고 可憐한 꽃이다.
이 꽃에 둘러있는 반도는 그 꽃의 상징과 같이 화려한 역사는 가지지 못하였다. 조선의 역사가 말하는 것과 같이 항상 紛亂과 戰亂이 있었고, 따라서 외적의 침범도 많이 받았다. 무궁화 반도는 그 꽃과 같이 항상 슬픔과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가련한 역사의 줄기를 걷고 있었다.
노자영(春城)의 <半島山河 禮讚記>의 서두부로서, 온유하고 완곡한 문장이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고, 따라서 작자가 의도하는 주제의식을 쉽게 공감케 한다. 수필이 대우(對偶)적인 문학임을 실감케 하는 예다.
 
  7 새롭고도 독창적인 주제
 
주제는 지나치게 가벼워도 안 되고, 무거워도 좋지 않다. 너무 가벼우면 그저 그런 것이려니, 읽어보나 마나 한 넋두리 쯤으로 여겨져 독자를 가까이 마주앉힐 수가 없다.
반대로 지나치게 무거우면 문맥이 경색되거나 문장이 관념화 되어 주제의식은 이해와 공감의 벽을 넘지 못해 허공에 뜰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제는 항상 참신하고 독창적인 것이라야 좋다.
봄을 통해 인생을 관조하되 작자의 시각은 보다 새로워야(개성적이어야) 하고, 꽃을 보고 삶을 노래하되 그 의미화의 수법은 보다 개성적이고 보다 독창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소재는 눈으로 선택하나 그 주제는 마음으로 결정하는 창작수필이 될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수필로 쓴 수필론인 피천득의 <수필>을 들 수 있다.
 
수필은 청자(靑瓷)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설흔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 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 하며, 검거나 희지도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우아우미(優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띄게 한다.
 
수필로 쓴 ‘수필론’이란 독창성을 보인 피천득의 <수필>의 서두부로서 비유와 상징 일변도의 서술 또한 개성이 두드러져 주제의 독창성에 한 몫을 다하고 있다.
 
촌가의 질화로는 가정의 한 필수품, 한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情), 그들의 사랑의 용로(熔爐)이었다. 되는 대로 만들어진 흙으로 구운 질화로는, 그 생김생김부터가 그들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건마는, 지그시 누르는 널찍한 불돌 아래, 사뭇 온종일 혹은 밤새도록 저 혼자 불을 지니고 보호하는 미덥고 덕성스러운 것이었다. 갑자기 확확 달았다가 이내 식고 마는 요새의 문화 화로와는 무릇 그 본성이 다른 것이다.
이 질화로를 두른 정경은 안방과 사랑이 매우 달랐다.
안방의 질화로는 비록 방 한구석에 놓여 있으나, 그 위에 놓인 찌개 그릇은 혹은 ‘에미네’가 ‘남정’을 기다리는 사랑, 혹은 ‘오마니’가 ‘서당아이’를 고대하는 정성과 함께 언제나 따뜻했다. 토장에 무우를 썰어서 버무린 찌개나마 거기에는 정이 있고, 말없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 표현하지 못할 그윽하고 아름답고 정다운 세계가 있었다.
 
양주동의 <질화로>의 서두부로서 주제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예다. ‘에미네’, ‘남정’, ‘오마니’ 등의 토속적이면서도 회고적인 낱말을 통해 “소재는 눈으로 선택하나 그 주제는 마음으로 결정하는 창작 수필”의 실상을 보게하는 예다.
 
 
  8 文章은 主題 意味化의 生命的 要素(1)
 
 현대수필에서의 문장의 기능은 생명적이다. 장편 문학형식인 소설의 경우라면,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조직화로도 ‘主題 傳達’이 용이하겠지만, 단편의 문학인 수필에서는 고작 한 두 줄의 문장구성, 즉 정서의 의미율(意味律)이나 중심사상의 구체화나 의미화(意味化)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타 산문과는 달리, 수필의 문장은 효과적인 의미전달을 위한 솔직성과 진실성, 그리고 상징과 비유, 암시와 상상적 수사기능(修辭機能)을 생명시 한다. 장편수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작자 자신이 항상 자기 작품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지나친 ‘論理’나 ‘主張’, ‘誇張’이나 ‘美化’로서는 독자의 공감과 감동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현대수필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創造․白潮․廢墟’ 시대의 주정적(主情的) 수필이나 목적성이 두드러졌던 ‘傾向派, 民族派’ 계열의 작품에서 문예성을 찾기 어려움은 그래서이다. 다행스럽게도 본격수필의 성장기인 80년대에 들어와서, 어휘의 다의성(多義性)이나 심리성(心理性)을 수용하는 문예화의 수사기능이 폭넓게 구사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더구나 현대수필은 지금 산문을 대표하는 미래문학형식으로서의 격상을 서두르고 있다. 현대수필이 안고 있는 기사성이나 잡문성, 주제 의미화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수사의 문예적 기능, 즉 의미전달의 ‘個性的인 文章手法’은 연구 계발되어야 한다.
1. 수필의 문장은 精密․具體的이어야 한다
서술이나 묘사에 있어서 표현이 모호하거나 추상적이어서는 독자를 가까이 마주앉힐 수가 없다. 수필의 문장은 작자와 독자 간의 격의 없는 ‘情感의 交流’이며 그 정감의 실체인 ‘眞實의 共感帶’이다.
때문에, 주제는 크든 작든 보다 선명해야 하며, 문장은 길든 짧든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인 표현으로서는 그 진실에의 접근이나 공감은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의 경우처럼 상황이나 성격, 심리의 변전 등을 길게 묘사할 수 없는 게 수필의 운명이고 보면, 짧은 한 두 문장으로 중심사상을 소화해야 하는 부담도 없지 않다. 그래서 비유, 암시, 유머, 위트 등 수사기능을 극대화 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면서 듣기도 하는 텔레비젼 연속극의 화법(話法)이 아니라, 오직 듣는 것 하나만으로 보고, 느끼고, 상상해야 하는 ‘라디오 연속극의 화법’, 즉 입체적 수사기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경희야, 10월인데도 지금 삼촌네 집 뜰에는 해바라기가 뜨겁게 타고 있다.”
이는 단일 문장인데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라는 상황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뿐만 아니라, 경희는 조카이고, 작가는 그의 삼촌인 관계까지도 알 수 있다. 대개 이런 문장은 상황이나 배경을 경제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작품 서두부에 오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김기진(金基鎭)의 문제작 ‘幻滅期의 朝鮮을 넘어서(1924, <開闢> 46호)’와 鄭震權의 ‘작은애를 기다리며’의 앞부분이다.
 
① 절름발이가 온다. 절름발이가 간다. 한 편짝 발을 절름거리는 사람이 오고 간다. 어찌하여 사람의 세상에는 절름발이가 이다지 많으냐. 한 쪽 다리를 수선한 사람은 다시 한 편짝 다리를 수선하게 되었다. 두 쪽 다리가 다 같이 병신인 사람은 앉아서 다닌다. 조선이 불구자다. 이상한 환경이다.
② 작은애가 지금 군에 가 있다. 돌아오는 토요일이면 제대를 한다. 며칠 남지 않았는데 하루가 지루하다. 오늘은 작은애네 결혼식 때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그 애들을 오래 생각했다.
작은애가 석사과정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학교길이 멀어서 고생이 많았다. 그래 내가 타던 차를 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차 안을 보니 뒤창 아래에 인형이 하나 놓여 있었다. 노란 모자에 빨간 옷을 입고 기타를 치는 사내아이였다. 생김새도 귀엽고, 태엽을 감아 주면 딩동거리는 음악까지 흘러나왔다. 퍽 정교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작은애가 산 물건 같지는 않았다.
 
①과 ②는 모두 대상을 정밀․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2. 수필의 문장은 情緖를 知性化 해야 한다
 
수필은 정서를 본질로 하는 인간화, 지성화의 문학이다. 수필에서의 지성화란 어디까지나 자기 감정의 순화(醇化)요, 승화(昇化)작용이다. 따라서 정서를 객관화함으로써 가능한 자기 해석이요, 자기 이해일 수도 있다.
때문에, 그 지성화의 작업이 여의치 못할 때는 흔히 자기 몰입이나 흥분에 사로잡혀 문장은 관념이나 추상에 붙들리고 만다. 넋두리가 되고, 감상(感傷) 일변도의 잡문이 되는 것도 예외없이 그 정서를 과장되게 처리하는 추상성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해서, 정서의 지성화에는 감정의 과다노출을 제어하는, 다음 몇 가지 금기사항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① 대화(對話)가 빈번하거나 길어서는 안 된다. ② 한정어나 수식어, 의태어나 의성어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③ 관념어나 시어(詩語)로 의식의 비약을 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지성화의 문장은 어디까지나 정서를 집약, 구체화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는 입장에서 서술해야 한다. 또한 지성화의 문장은 주제보다 소재가 선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시적(例示的)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조합되어 일단의 분위기를 형성해야 하고, 주제의식 또한 맥을 같이 하는 그들 문장 속에 충분히 희석되어 유현하게 나타나야 한다.

청춘! 아,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소리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동하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쩍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방점은 필자의 것임)
 
‘靑春禮讚(閔泰瑗), 1929, <別乾坤> 21호’의 한 문단으로서, 방점 부분이 지성화의 대표적인 문장이다.
또한 지성화의 문장은 정서와 사상이 동화(同化)돼야 한다. 동화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질화 현상이다. 사상과 정서의 동질화가 요구되는 것은, 소설이나 여타 산문은 정서로부터 사상이 엄격하게 독립된 상태로서의 ‘眞理’를 대상으로 하지만, 수필은 그와 반대로, 사상이 정서 속에 충분히 용해된, 가장 순수한 상태로의 ‘眞實’만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민들레의 생각이 옳다. ‘남은 자의 마음’은 가면서 남긴 아린 자국도 아니고, 보내고 못 잊어하는 애끓는 그리움도 아니다. 보내고도 남은 걸 마저 보내기 위해 더 깊이 살아가야 하는, 그런 세월이다. 기다림이다.
필자의 ‘餘情’이란 수필의 말미로서, 사상과 정서의 동질화를 위해 시도해 본 문장이다.
 
9 수필의 문장은 때로 知性을 情緖化 해야 한다
 
수필은 개성을 위주로 하되 어디까지나 대우적(對偶的)인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명제(命題)는 작자의 것이로되 결론은 작자 혼자만의 것일 수 없다는 동화현상, 즉 공감이나 감동의 동질화 현상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성이 독주하면 명제는 빛이 나고 주제의식은 분명해질지 모르나, 독자와의 대우적 관계를 유지해주는 정서의 흐름은 막히고 끊길 위험이 있다. 진리의 구상학(具象學)인 장편문학인 소설에서는 때로 지성의 독주가 용허되지만, 오직 진실 하나만의 형상학(形象學)이어야 하는 단편문학인 수필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결국 지성의 정서화는, 소재 보다는 주제가 선결된 작품에서 요구되는 문체로서, 문학의 2대 기능 중의 하나인 지나친 교시성(敎示性)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나 같은 인생이 자살할 것을 두려워서 여러 가지 방책을 쓴다. 첫째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리라’는 희망을 내 정신 속에 심어둠이다. 이것은 진실로 생명수다. 이것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내일이다, 내일이다……’하고 상한 가슴과 피곤한 다리를 끌고 허덕허덕 인생의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다.
 
이광수의 수필 ‘人生의 香氣(1924, <靈台> 1호)’ 중의 한 문단으로서,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리라’에서의 지성(知性)을, 방점 부분의 문장으로 정서화 하고 있다.
또한 정서화의 문장은 사상의 정서화도 원활하게 이루어야 한다. 사상의 정서화란 제재를 내면적 요구에 의해, 즉 작자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으로 합리화하는 개성적인 시각이요, 마음이다. 이 때의 개성은 시(詩)에서의 주관성과는 그 본질이 같지 않다. 어디까지나 보편성을 기조로 한 인간과 삶에 대한 자기 분석이요, 자기 평가이다.
때문에, 지성의 정서화는 사상의 정서화가 보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
 
① 땅이 깨끗하고 하늘이 깨끗하면 그 나라의 정치 또한 깨끗한 법인가 하여, 슬그머니 주머니 속으로 여권을 만져보며, 내 땅 내 하늘의 빛깔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② 유월에 장관을 이룬다는 철쭉이 보고 싶어 이 지리산을 찾아 왔다. 그러나 날짜를 잘못 짚었는지 철쭉은 보지 못하고, 지금 나는 인적 없는 뱀사골에 앉아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금은 유월 초순, 나뭇잎이 가장 순한 연두빛을 띠고 있는 계절. 조금 있으면 연두빛은 짙은 녹색으로 변하고, 더 있으면 그 녹색에 노인의 반점처럼 검은빛이 섞여들 것이다.
 
①은 필자의 졸작 ‘부겐빌레아’와 ②는 李正林의 ‘뱀사골의 물빛’의 한 문단으로서, 방점 부분이 지성을 정서화한 일단의 문장들이다.
 
10 수필의 문장은 主題를 想像化 시켜야 한다
 
주제의 효과적인 의미전달을 위해서다. 여기서의 ‘효과적’이란 직접성이 아니라 간접성, 즉 상상성을 뜻한다.
하지만 단편의 문학인 수필에서는 산만한 소재를 자기화 하고, 그를 다시 주제화 하는 작업은 그리 용이하지 않다.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수필의 창작적 기능, 즉 ‘주제의 상상화’ 작업이다.
사건의 치밀한 사전 구성에 의해 과학적으로 전개되는 소설과는 달리, 수필에서의 주제는 대개 일차원적인 구상(具象)이나 집상(集想)에 의해 한 두 문장으로 표현된다. 해서, 소설에서의 묘사나 대화(對話)의 역할을, 수필에서는 몇 개의 단어나 한 둘의 문장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는 부담을 안고 있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자연적이다”라는 한 문장이 그 수필의 서두이면서 결구요 또 주제라는 사실은, 제재나 형식의 무제한성에 비해 단편 문학이라는 ‘제한성’때문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난’, ‘학’, ‘청자연적’들은 이 작품의 주제를 상상적으로 처리하는 ‘비유어’들이다.
그래서 상상화의 문장들은 흔히 상징, 암시적인 어휘를 선택하거나 생략, 함축적인 문구들을 요구한다. 때로는 의인(擬人), 우화(寓話), 해학(諧謔) 등을 수용함으로써 주제의 상상화, 즉 문예적인 기능을 감당하기도 한다.
아이, 그 놈의 개구리 우는 소리에 잠이 와야지. 그래서 만주로 가는 길이야.
야인(野人)의 ‘땅(1924, <朝鮮文壇> 1호)’이란 수필의 한 문장으로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농지탈취로 더 이상 제 땅에서는 살 수가 없어 만주로 쫓겨가는 한 농부의 익살이다. 발붙일 곳이 없어 유랑의 길을 떠나면서도, 가는 이유가 어이없게도 ‘개구리 우는 소리 때문’이라니, 주제의식을 상상 처리하는 자조(自嘲), 자탄(自歎)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서양인은 13의 수를 싫어하여 여관이나 선실에도 12 다음에는 14호가 된다 하며, 전화에도 13번은 싫어한다. 하기는, 우리 조선도 13도(道)로 가르더니 별로 좋지를 못하였다.
 
이광수의 수필 ‘談片(1924, <朝鮮文壇> 1호)’의 일절로서, 이 역시 일제하의 참상을 풍자하는 주제를 상상 처리한 비유의 문장이다.
 
소나무로 테를 둘러 터놓은 좁은 공간, 비록 한 평에도 못 미치는 창문이지만 내게는 그 어떤 명품이나 고가의 보석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다. 대를 이어 아이들에게, 그 다음 세대까지라도 소중한 가보이 듯 길이 전해지고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호마(胡馬)나 월조(越鳥)에 버금가는 실향민의 아픔으로, 간절한 기다림으로.
지금은 한란(寒蘭)의 계절, 마침 열 송이가 피어 고향가는 기러기인 듯 날개짓을 하기에, 북창(北窓) 가까이로 그 화분을 옮겨놓는다.
 
필자의 ‘北窓’이란 수필의 종결구로서, 이 역시 ‘思鄕’이란 주제를 상상처리하기 위해 시도해본 문장이다.
5. 簡潔․鮮明하면서도 情的이여야 하고, 比喩․含蓄的이면서도 知的이어야 한다
 
지적인 문장은 정서를 사상화함으로써 주제에의 접근과 그 이해를 돕고, 정적인 문장은 사상을 정서화함으로써 독자와의 공감관계를 유지해 준다. 이해와 공감, 그것이야 말로 현대수필이 지향하는 문예화의 기능과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① 심산 속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의 품에서 그대로 퍼질대로 퍼지고, 자랄대로 자란 싱싱하고 향기로운 이 산나물 같은 맛이 사람에게도 있는 법이건만, 좀체 순수한 이 산나물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요새 세상엔 힘드는 노릇같다.
산나물 같은 사람은 어디 없을까? 모두가 악세고, 꾸부러지고, 벌레가 먹고, 어떤 者는 가시까지 돋쳐 있다.
어디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을까?
② 나는 감방의 벽면이 저러려니 생각되었다. 그리고 더구나 화가인 K군을 위해서 그 사막의 벽면에다 만년필의 잉크라도 한 줄기 뿌려놓고 싶었다.
벽이 그립다. 멀찍하고 은은한 벽면에 낡은 옛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그 아래 고요히 앉아 보고 싶다. 배광(背光)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리운가 보다.
①은 盧天命의 ‘山나물’과 ②는 李泰俊의 ‘壁’의 말미로서, 방점부분이 ‘情的’, ‘知的’ 문장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유한근 수필론

  1  수필 이란 무엇인가 
(1) 글은 우리에게 필요한가
    글을 왜 쓰는가를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문제는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좋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잊어서 안될 점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개인 개인마다에게 있어 문학의 효용성이 다르겠지만, 문학은 인간의 혼돈된 정서(감정)와 사고(사상)에 질서를 부여해주는 일을 한다.
    인간의 내부적인 혼란 혹은 갈등이나 외부의 힘에 의한 갈등 및 대립을 우리는 글을 쓰면서, 또는 책(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순화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혼돈의 질서화' 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혼돈의 질서화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미래의 비전을 내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글에는 글쓴이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문체(文體)라고 하기도 하고, 문채(文彩) 혹은 문채(文采)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글쓴이의 냄새와 색깔 그리고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품위있는 글, 인격이 고매한 글, 교양을 느끼게 하는 글을 선호하게 된다. 글은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인간의 체취를 혹은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글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라도 참다운 글은 자신의 진솔한 모습을 그려낸 것
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식을 위한 것, 품위를 혹은 인격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모습을 찾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문학은,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작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작은 깨달음으로 문학창작은 가능해진다. 깨달음은 사물에 대한 혹은 사상(事象)에 대한 새로운 인식 없이 가능해지지 않는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자연물들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그것으로부터 인간과 삶의 문제로 끌어오는 통찰력 없이  글은 쓰여지지 않으며 문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혜 획득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글을 쓴다는 자세는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예민한 통찰력 또는 관찰력을 선행조건으로 가져야 한다.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 있다. 글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특이하지 않고 보통의 평범한 삶이라 해도 이를 어떤 상상력으로 증폭시키느냐에 따라 글의 감동이나 분위기 그리고 주제는 달라진다. 그 상상력은 언어의 낯설게 하기 연습을 비롯하여 이미지 연상, 그리고 의도적으로 형식을 비트는 표현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연습 혹은 훈련은 글을 쓰는 데 있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창조적인 사고를 유지하고 개발하는 데 있다.   
    창조적 삶을 위한 창조적 사고와 참신한 감성, 이것이 더욱 삶에 있어서나 글을 쓰는 데 있어 필요하다고 본다.
     (2)  말과 글의 힘은 무엇인가
    언어와 생각은 일반적으로 따로 따로 관찰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생각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을 때, 그 형태에 알맞는 언어를 만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지(人智)는 발달하게 되었으며 문화도 고급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야스퍼스의 언급처럼 "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비로소 사유할 수 있다" 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며 글은 창조의 도구로까지 그 힘을 미치게 된다.
    비창조는 정체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반면에 창조는 기존의 것에 대한 이탈에서부터 이루어져 왔다. 
예컨대 한자(漢字)가 '눈'으로 만들어 졌고, 한글이 '입'으로 만들어 졌다면, '코'로 하나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는 착안이나 확신 없이 새로운 글자는 창조될 수 없다. 새로운 학문은 여기서 비롯된다. 새로운 창조도 또한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 '눈'으로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그리고 '입'으로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제작의 원리나 구조, 그리고 그 특징의 면밀한 검토 후에 코로 글자 창조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위의 인용문처럼 인간의 생각 혹은 지혜를 정착시킨 글 자의 발명은 하나의 창조를 가능하게 했으며 그로인해 창 조하려는 인간 의지를 창출하게 된다. 만약 글이 없었다면  창조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인간 의지도 희박했을 것이다.
           이렇듯 언어는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가능케 했으며 창조의 길을 터주게 된다. 그리고 남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김 기림은 그의 저서 <문장론 신강>에서 이렇게 말한다.
 원시 사람들이 그들의 소원이나 간청이나 경고를 서투른 말로써 나타냈을 적에 맞은편에서 이편 뜻대로 움직여 주거나 청을 들어주거나 경고대로 방비태세를 취할 적에, 그들은 저들 자신의 힘(남을 움직이는 힘)에 자못 스스로 감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이 바로 저들의 말 그것에 유래하는 것을 깨달았을 적에 그들은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말의 위력에 탄복하였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그들의 사회생활을 밀어나가는 데 있어서 말을 유력한 연장(Instrument)으로 썼던 것이다. "지식은 힘이다." (Knowledge is power)라고 부르짖은 것은 <베이콘> 이지마는, 그야말로 말은 힘이다.
 이 원시사람들이 말의 이 위대한 힘을 가장 긴하게 쓴 것은, 그것을 귀신들을 달래는 주문(呪文)에 이용했을 적이다. 원시 사람들은 산천초목 할 것 없이 천지간의 만물 뒤에는 모두 심령한 힘이 있어서 홍수와 폭풍, 가물음, 죽음 같은 것이 모두 이 신령한 힘 또는 귀신들의 흑장질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귀신을 퇴치하여 불행과 재난으로부터 사람을 구해내기 위하여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신령스러운 무기인 말을 이용하였다.  
 민속학의 거두 영국의 <프레이저>(Frazer)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 <<미신>> (Psyche's Task) 등 저서에 의하면 미개사회(未開社會)에서는 귀신을 달래는 주문을 외우는 일은   그 종족의 왕의 행정사무에 속하는 일로, 그는 그 방면의 전문가라 한다.
  주문을 외워 능히 귀신도 물리치는 까닭에 왕은 그 종족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그들 위에 큰 권위를 가지고 임하는 것이다.
  속담에 "여자의 말은 유월에도 서리가 선다."는 말이 있다. 여자의 원망을 한번 잘못 샀다가는 그 저주에 그만 녹는다는 것이다.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리", "그 놈의 집 망해빠지지", "날 괄시하는 놈들 어찌 되는가 보지" 하는 게 모두 기실은 원시적인 저주의 남은 흔적이겠다.
  매파들이 중매 서는 데 주장 쓰는 수법도 말이거니와 제아무리 벽창호라도 내 말에는 녹는다는 말의 위력에 대한 원시적 자신(自信)이 그에게는 만만한 것이다.
  웅변은 맨 처음에는 기도신을 의미하는 '오라토리움'(Oratorium) 안에서 신에게 기도하는 말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오레이순'(式辭,Ortion), '오레이터'(웅변가,Orator) 라는 일련의 말들  이 <라틴>의 '입', '말한다'를 뿌리로 하고 뻗어나온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필립왕과 알렉산더 대왕의 침노에 반항하여 일어난 아테네의 자유의 대변자'데모스테네스'의 일대웅변에서 말의 이 방면의 발달은 그 절정에 도달했던 것이다. 
오늘 말의 힘이 가장 쓸모있게 쓰여지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과학에서다. 말이 없이는 생각해 갈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과학의 힘으로 자연환경을 지배하며 사회환경을 통어한다. 그런데 그 과학은 그것을 표현하는 말의 힘을 빌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루는 대상의 세계를 기술해낼 도리가 없으며 그것을 일반화 하여 정식을 세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저들의 정(情)의 세계를 가장 잘 조절하기 위하여, 태도를 정돈하기 위하여, 세계와 인생에 대한 전체적인 통찰을 파악하기 위하여 문학, 그 중에서도 시(詩)라고 하는 말의 순수한 모양을 확립시켜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말이 가장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선전(宣傳, Propaganda)이라고 부르는 방면일 것이다. 2)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김 기림은 말의 힘을 '선정성'에서 그 위력을 찾아낸다. 남을 설득하는 힘이 그것이다.  그러나 말 또는 글의 힘은 남을 설득하는 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점이다. 
이에 대해 이 규호는 그의 책 <말의 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인간의 내부생활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언어가 비로소 인간의 내부세계를 대상화 하고 그것을 인식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 자아를 인식한다.
인간은 그의 성격과 도덕적인 인격과 윤리적인 행위들 그리고 감정적인 기호 등을 외부세계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해석을 통해서 비로소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내부세계는 일정한 언어를 통해서 미리 마련된 길 곧 일정한 언어의 얼에 의해서 제시된 길을 따라서 전개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사용하는 언어가 그에게 하나의 고정적인 인간성의 탈을 제시하고 인간은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과 윤리적인 행위들의 개념들을 제시하고 인간은 이러한 주어진 가능성들과 개념들 중에서 결단을 통해서 그 자신의 것을 선택하고 이렇게 마련된 틀을 통해서 그의 행위를 규제하고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형성한다. 곧 인간은 그의 존재를 언어속에 마련된 틀에 맞추어서 형성한다.3)
  특히 글은 위의 인용문처럼 자아를 인식하게 하는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탐색을 가능하게 하며 나아가 인간다움에 대한 개념을 성립하게 한다. 
 글은 실용적 측면에 있어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먹고사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또는 확대 해석하여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글은 생명의 힘으로 작용되기도 한다.
       한마디의 말이, 한 줄의 글이 절망으로부터 구원받는 예를 우리는 보아왔기 때문이다.
(3) 삶이 수필이다.
   초가을은 사십 고개를 접어든 조용 나직한 女人의 눈매와 같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거니와 사십은 실상 人生의 초가을이다.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닌가 싶다. 십대의 소녀를 봄의 푸른 싹과 같다면 이십대는 꽃봉오리다. 웃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곱고 아름다운 꽃이다. 삼십대가 되면 작열한 향기를 피우며 떨어지려는 정열의 꽃이랄까. 오뉴월 염천의 수은주와 같이 상승할 줄만 아는 불꽃이다. 그러나 四十고개에 들어서면 어느덧 눈가에 싸늘한 침착성이 나타나며 진주같은 눈에는 슬기로운 이슬까지 돈다. 인생을 음미하고 생활을 다시 한 번 가다듬으려는 지성의 의지와 알뜰한 부지런에 틀이 잡혀갈 때 그의 눈매에는 엷은 애수가 깃든다. 오십에 서리가 앉아 육십이면 이미 겨울이다. 그래서 나는 초가을을 四十 고개를 접어든 女人의 눈매라고 한다.
                                           -<초가을>중에서
  위의 글은 윤 오영의 수필 <초가을>이다. 나이 40대 여인의 모습을 초가을에 비유하면서, 초가을이 곧 40대 여인의 모습임을 은유하고 있는 글이다. 40대 여인의 '싸늘한 침착성' '진주같은 슬기로움' '지성의 의지' '엷은 애수'등 그 특성을 수필의 특성으로 정리하고 있듯이 수필은 온축된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체험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곧 문학 작품이라 할 수는 없다.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감동을 줘야한다는 문학의 절대 명제를 위해 감동 전달을 위한 방편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메시지를 사회적 언어로 직접 전달하기만 했다고 해서 문학 작품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체험을 기반으로 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문학 작품과 실용적인 글과의 차이이다.
  예컨대, 수필과 칼럼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필이 문학적 혹은 예술적인 언어로 감동을 전달하는 짧은 글이라 할 때, 칼럼은 사회적인 언어로 메시지만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짧은 글이라는 개념 규정이 그것이다.
따라서 수필을 삶의 감동적인 요소를 재구성한 또다른 삶이라 할 수 있다.
 
註1) 유 한근, 별과 사막 (도서출판 청송 1991. 1. 30) p73
     註2) 김 기림, 문장론 신강 (심설당. 1988.4.5) p25-28
     註3) 이 규호, 말의 힘 (제일출판사 1968.10.20) p124   
 
2  수필의 종류
 
(1) 수필의 네가지 모습
    우리의 생각과 느낌은 붙잡을 수 없다. 생각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은 간혹 자신의 생각이 움직이는 방향을 볼 수가 있어 그것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느낌은 그것조차 불가능 하게 된다.
    물론 명상가들은 느낌까지도 조정하여 그 흐름을 막고 끊으며 그 흐름의 길을 바꾸어 놓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정체조차도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과 느낌, 그 정체를 다소나마 알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림이나 음악 등으로 표현하여 그 흐름을 대신하려 하며 그 정체를 옮겨보려 한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를 문화 가치의 창조 행위라 부른다.    
인간은 크게 네 그가지의 문화 가치 창조 능력이 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사고능력 (Das Denkvermogen, thinking faculty) 으로   이를 우리는 진(眞)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둘은 의지에 따른 도덕적 행위 (Die Moralische handlung, moral conduct)로 이는 곧 선(善)이다. 그리고 셋은 신앙을 통한 종교적 생활(Das Religiose-leben, riligious Life)로 이는 성(聖)이며, 마지막은 정서적 표현의 미적 활동(Die Asthetische tatligkeit, aesthetic activity)으로 미(美)라 부른다. 이 네 가지 활동 능력 중 미학에 속한 인간의 능력은 마지막에 언급한 미(美)에 국한된다.
  그러나 인간이 문화가치를 창조하는데 있어 또는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데 있어 위의 미적 견해로만 국한 시키지도 않고, 또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도 않게 된다. 진, 선, 성, 미가 같이 활동하며 생각과 느낌은 정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행위가 독립적이지 못하듯이 수필의 종류도 명확하게 분류할 수는 없으나 편의상 인간의 문화 가치 창조 행위에 따라 나눌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지성적 사고 능력에 따른 수필, 둘째, 도덕적인 의지행위에 따른 수필, 셋째는 종교적 생활의 수필 그리고 넷째는 미적 활동에 따른 수필이 그것이다. 
1.지성적 사고 능력에 따른 수필 [ 수필]
  이 수필을 우리는 흔히 중수필(엣세이)이라 부른다.
    우리는 교활을 사악하고 비뚤어진 지혜라고 보고 있다. 확실히 교활한 사람과 현명한 사람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정직한 점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에는 화투장을 잘 꾸리기는 하지만 화투 놀이를 잘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유세(遊說)나 당쟁에는 능하지만 다른면에 있어서는 무능한 사람도 있다.
    또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사물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의 기질에 대해서는 십분 통달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실무에 있어서는 그다지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보다는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경향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충고보다는 실무에 더 적합하다. 그들은 다만 자기의 좋은 무대에서만 잘 할 뿐이다.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응대(應對)시키면 그들은 조준(照準)을 잃고 만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를 판별하는 옛날의 방식, '두 사람을 벌거숭이로 해서 낯모르는 사람에게로 보내 보면 당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교활한 사람들은 마치 조그마한 상품을 파는 잡화상과 같은 것이므로, 그 상점을 들추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교활의 요점의 하나는 이야기하려고 하는 상대방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주이트 교도들이 그 교훈으로 삼고 있는 것이지만, 현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슴속의 비밀을 얼굴에는 뚜렷이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시치미를 떼고 눈을 슬쩍 내리감는 체해야 한다. 제주이트 교도들이 흔히 그렇게 한다.
   또 한 가지는 당신이 지금 빨리 서둘러야할 어떤 일이 있을 때에는 상대방을 어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농락하는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이의를 제시하지 않도록 상대방의 눈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고문관 겸 대신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의 서명을 받기 위해서 법안을 가지고 갈때에는 반드시 먼저 여왕을 국사(國事)에 관한 어떤 이야기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만큼 법안에 대해서는 마음을 적게 쓰도록 하였다.
   이와 비슷한 기습(奇襲)으로는 상대방이 급히 서두르고 있어서 제안된 문제를 차분히 생각할 수 없을때를 보아서 제안하는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훌륭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제안할지도  모르는 일을 방해하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좌절되도록 스스로 그것을 제안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서 마치 말문이 막힌 것처럼 중단하면 상대방 마음에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더욱 불러 일으키게 한다.
   무엇이든 자진해서 제안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질문을 받고 알아차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른 표정과 안색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상대방의 질문을 유도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평소와 달라진 것이 무슨 까닭이냐고 묻게 하는 기회를 주려는 목적을 위해서이다.        
예를들면 느헤미야가 그렇게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국왕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라는 것이 있다.
  신중을 요하고, 또 불쾌한 일에 대해서는 누군가 그의 말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하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을 만한 사람의 말은 우연히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보류해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 더 좋다. 예를 들면 나르키소스가 클라우디우스에게  메살리나와 실리우스의 결혼을 이야기할 때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어떤사람이 자기자신의 생각을 보이고 생각을 보이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세상의 이름을 비는 것이 교활의 한가지 요점이다.   예를들면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든가 '이러이러한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편지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용건은 추신에다 적고 마치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이게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또 한 사람은 이야기를 하게 될 때, 그는 가장 말하고 싶어하는 문제는 슬쩍 남겨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되돌아와서 마치 그것을 거의 잊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 편에서 급습을 당하도록 하는 자들도 있다. 자신들이 농락하려고 하는 상대방이 갑자기 자기에게 찾아온 그러한 때에 깜짝 놀라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 그 자신의 손에 편지를 쥐고 있거나 또는 평소에 하지 않는 어떤 짓을 하여 상대방에게 들킨체 한다. 그것은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일을 그들이 질문하도록 그들 앞에 갖다 놓는 것이다.     
교활의 다른 하나의 요점은 자기 자신이 어떤 말을 터뜨려 놓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익히고 사용하도록 하고, 그렇게 되면 그것을 역이용한다. 내가 알고 있는 두사람은 엘리자베드 여왕시대에 국무대신의 자리를 얻으려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고, 또 일에 관해서는 서로 의논을 하였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쇠퇴기에 있는 왕조의 국무대신이 되는 것은 불안한 일이며, 자기로서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곧 이 말을 받아들여 그의 각계 각층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에 쇠퇴기에 있는 왕조에 그가 국무대신을 원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먼저 사람은 그 말을 잡아서 그 말이 여왕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는 수단을 썼다. 여왕은 쇠퇴기에 있는 왕조라는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며 그 다음부터는 다른 한사람의 청원은 전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영국에는 '남비속에서 고양이를 뒤집는다.'라고 하는 일종의 교활이 있다. 이것은 즉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말한 것을 타인이 자기에게 말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을 말하면 그와 같은 문제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을 때, 그들 가운데 누가 먼저 말을 시작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것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부정(否定)을 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고, 따라서 타인을 암암리에 헐뜯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티겔리누스가 부르후스에 대해서 한 것처럼 '황제의 안전을 바라는 것 이외에는 두 가지 목적은 나에게 없다' 고 그는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화제와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서, 무엇인가 엇비슷하게 말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을 이야기로써 덮어 씌울 수 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을 더욱 안전한 위치에 둘 뿐만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유쾌한 마음으로 전파하도록 한다.
  자기가 바라는 대답을 자기의 말이나 제안으로 만드는 것도 교활의 한 가지 좋은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덜 주저케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며, 또 얼마나 멀리 우회를 하며, 또 그 목적에 접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는 기묘한 일이다. 이것은 많은 인내를 요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매우 유용하다.
  갑작스럽고 대담한 의외의 질문은 대개의 경우 사람을 놀라게 하며, 그 사람의 진실을 토로케 한다. 변명(變名)을 사용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성 바울 사원을 걷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갑자기 그의 등뒤에 와서 그의 진짜 이름을 불렀을 때, 곧 뒤를 돌아보았다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구레하고 보잘 것 없는 교활함이 무한이 있다. 그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활한 인간이 현명한 인간으로서 통하는 것 이상으로 국가에 해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히 세상에는 일의 시초와 끄트머리는 알고 있지만 일의 골자에는 파고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편리한 계단과 출입구는 있지만 훌륭한 방  없는 집과도 같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결론에서는 그럴 듯한 결말을 찾아내지만 문제를 검토하거나 논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 그들은 자기의 무능력을 이용해서 지도적인 재간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견실한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남을 속여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하며 그 사람들이 계략에 걸리도록 꾀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고 말하였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교활에 관하여]
 
  (2) 도덕적인 의지 행위에 따른 수필 [ 수필]
   이 경향의 수필은 사회 윤리나 도덕을 중시하는 수필로서 인간의 인품 또는 인격을 중시하는 수필의 특성을 고려한 수필이다. 위의 프란시스 베이컨의 수필 [교활에 관하여]도 이 경향으로 볼 수 있다.
  
  (3) 종교적 생활의 수필 [ 수필] 
  이 수필의 경향은 신앙인들이 글에서 그 성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며 종교적인 수필이다.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老僧)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 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주는 것이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었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버리고 안 계신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히 살아있는 노사의 상(像)이다.
  산에서 돌아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그떡 않던 아름들이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아밧티이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殺人鬼) 앙굴리마알라를 귀의(歸依)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神通力)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慈悲)였다.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 법정의 [설해목]  
(4) 미적인 수필 [ 수필]  
  이 경향의 수필은 미적 존재인 인간의 성향이 잘 나타난 수필로써 생활의 미학을 탐색하는 수필이다. 김진섭, 피천득 등 한국의 대표적인 수필가의 작품들에서 쉽게 찾아지는 경향이다.
 
  벌써 40여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지 얼마 안 되어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가지고 가려고 깎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깎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무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못들은 척이다. 차 시간이 바쁘니 빨리 달라고 해도 통 못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깎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달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나도 기가 막혀서 '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요.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늘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노인은 또 깎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방방이는 다 깎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모양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와야 하는 나는 불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와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보면 배가 너무 부르면 힘들어 다듬다가 옷감을 치기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 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이 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가 쉽다.
요렇게 꼭 알맞는 것은 좀체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대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죽기(竹器)는 대쪽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竹器)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숙지황(熟地黃)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길을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九蒸九포) 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 번 쪄낸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찔리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나 같은 청년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 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 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다 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 깎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採菊東籬下다가 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시귀가 새어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다듬이질 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萬戶수衣聲>이니 <爲君秋夜수衣聲>이니 애수(哀愁)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
 
3  한국수필의 현황
  (1) 오늘의 한국 수필
 
  오늘의 한국수필계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수필 전문지인 [한국수필] [수필문학] [현대수필] [창작수필] [수필과 비평]등에 발표되고 있는 작품들을 일별하면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작품을 통해 문제점도 도출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①신변잡기적인 수필의 과다 ②문학성의 결여 ③허구성에 대한 시비 ④수필문학론  부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한국 수필계에 고언을 주는 글이 윤오영의 <현대 한국 문장의 발달 소고>이다. 다음은 그의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하는 만큼 수필 창작을 위한 전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같이 수필이 대량으로  발표되고 출판되고 수필문학인이 문학가의 서열을 차지하고, 수필에 대한 설명과 이론이 많은 때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양적(量的)생산이 반드시 질적(質的)향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문학가의 서열을 차지했다고 반드시 수필이 문학작품으로 향상된것도 아니다. 일인일설(一人一說)의 수필론은 차라리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할 뿐이다. 문학인으로서의 자세는 우리 태동기의 작가를 못따르고 작품의 수준은 우리 개안기의 작품들만 못한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나는 지금을 수필문학의 혼란기(混亂期)라고 본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열의를 가지고 수필문학을 지향하려는 일부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청신한 신진들의 작품이 기대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또 수필문학의 모색기(模索期)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을 정리하고 모색을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기성 문학인들의 새로운 분발도 물론 필요하다.
  세간에는 어떤것들을 수필이라고 하느냐? 수필이란 어떤것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수필이 어떻게 해야 문학이 되느냐? 어떤 수필이 문학 수필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옛날에 수필이 어떠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의 수필이 어떻게 나가야 하겠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비로소 수필의 구체적인 문학성과 앞으로의 전망이 파악되는 것이다. 몽테뉴의 문장이나 베이컨의 글을 말하고, <破閑集>이나 <白雲小說>을 말하고 <閑中錄>이나 의유당(意幽堂)을 들추는 따위는 현대 수필의 문외한임을 자인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비평적인 논문을 비롯하여 수상록, 서간, 자서전, 서평, 사설같은 형식들이 모두 수필류에 속한다'거나 '말하자면 의견표시이며 대화적이며 교훈적'이라거나 '수필은 생활 철학이어야 한다'거나 등등 무정견(無定見)한 말들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런 말들은 아무 귀를 기울일 가치조차 없는 말들이다. 그들은 아무 수필 문학관(隨筆文學觀)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이다.  
무릇 어떤 종류의 문학을 막론하고 문학을 논하는 사람은 논자로서 입장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학구적 입장이요 하나는 평론가적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작가적 입장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학구적 수필론이란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하다. 그러나 그 어느것이든 수필 문학관의 정립(定立)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직 가능하고 또 유익한 것은 오직 작가적 입장에서의 수필론이다. 작가란 글을 쓰는 사람이요 논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문학의 탐색기(探索期)나 창작기(創作期)에 있어서는 이론의 제창이 선행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자기세계의 개척을 의미하며 작품모색의 과정의 기록인 것이다. 여기서만 우리는 구체적인 문학론을 들을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에 예시하는 皮千得의 <수필>은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글의 하나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 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을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 관찰, 인간성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이 이 문학은, 차가 그 방향을 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된다. 세익스피어는 해물리트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는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 졌었다.  
이 균형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 인가 한다. 한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피천득의 수필론이다. 논(論)이라면 학술논문(學術論文)이나 논설문(論說文)을 생각할지 모르나 수필가로서 쓴 것은 문장론(文章論), 작품론(作品論), 시사론(時事論)이 다 수필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의 수필관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수필을 논한 글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글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라'고 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피요 눈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 이라고 했지만, 남성적일 수도 있다. 반드시 이 수필론에 매일 필요는 없다. '수필은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 이라고 했지만, 모든 것이 신기하고 청신하게 느껴지는, 때 안 묻은 소년의 글일 수도 있고, 인생을 회고하며 생(生)을 거의 체념한 노경(老境)의 글일 수도 있다. 이 수필론으로 포섭할 수 없는 외타의 수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런 수필론들은 우리에게 아무 흥미도 없다. 수필문학을 파악하는 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오직 한 작가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수필문학을 이해하려 할 때 이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이것은 한 작가로서 자기의 문학세계를 말해 준 것이요, 스스로의 수필 문학을 탐색하는 과정의 기록인 까닭이다.       
이 수필의 세계에 공명하고 동도(同道)에 반려가 되어도 좋고, 또 다른 세계를 개척하며 자기의 수필을 탐색하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 그리하여 여러 개성들의 수필론이 기록되고 또 탐색되고 작품화 될 때 비로서 수필 문학은 정립될 것이다. 우리의 산문문장(散文文章)은 이미 한 단계 탈피해서 문학성을 추구해 가며 자기세계의 개척과 개성적인 문체로 문학수필을 지향하고 있다.
  
 (2) 21세기의 수필 문학을 위하여
  사이버 작가가 등장했고 사이버 문예지가 창간된 지금, 21세기의 문학 지평에 관한 한 자명해 진 것은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술이 사멸할 수도 있다" 고 예언한 헤겔의 말과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 졌다. 즉, 예술 자체로서도, 사회 전체에 대한 예술의 관계에 있어서 조차도 자명한 것이 없게 되었다"고 자신의 저서 [미학이론]에서 말한 T.W아도르노의 견해에 대한 반박 이론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설정하여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만들어진 하나의 존재물인 만큼 그 형성된 조직이나 체제가 무너질 때 사멸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헤겔도 인정했듯이 예술의 절대적인 면으로 간주되었던 사상 내용은 사멸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따른 형식 미학의 변용은 불가피 하더라도 예술의 사멸은 그 누구도  장담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문학에 있어서 장르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사멸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장르는 문학 정신을 담는 그릇인 만큼 그릇의 변용이나 파괴가 곧 정신까지도 파괴할 것으로 믿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19세기의 문학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내용 및 형식의 측면에서 도전을 받아왔던 것을 우리는 안다. 리얼리즘 문학 운동이 다다이즘, 큐비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등 파격적인 모반적인 예술운동의 도전을 안팎으로 받아 왔으나 금세기 말까지 버텨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버틸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문학 작품의 창작이 아니라, 그 창작품을 실을 매체에 대한 불안과 염려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정보 매체인 컴퓨터의 역할이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가, 그 확대 여부와 기능에 따라 예기치 않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수필을 위해서, 그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고도화되어 가는 사이버 시대에 전개될 사항을 간과 할 수는 없다.
 고임순은 이점을 고려하여 <2000년대 수필문학의 위상 그 장르성 특성>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 '이 시대는 무엇보다 卽時(real time)의 시대로 향후시대는 개인주의의 시대라는 것을 문인들은 깊이 인식해야 하고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는 크게 변하고 있다'는 말 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PC통신을 보면 거기에는 독자와 문인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환경을 수필가들은 인식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은 독자가 있을 때 생명이 있다. 독자에 의해서 작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21세기 미래의 독자(시청자)들의 취향에 맞는 수필쓰기를 연구하기에앞서 한편의 수필을 누가 읽느냐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그래서 이제 미래 독자층의 특성을 정리해볼 필요를 느낀다.
  읽기보다 보기가 지배하는 미래사회의 주역들은 과거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서도 갖지 못했던 자유로운 상상력과 개성을 체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릴때부터 컴퓨터로 훈련된 명석한 두뇌와 모험심과 창조력이 학교교육과 더불어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립된 인격체로도 손상이 없는 성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반면, 여가영역에서 멀티미디어가 더욱 상품화될수록 정체감의 균열이라든지 인간적 정서의 황폐화를 가져올 위험성도 안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자신의 큰 관심사는 오직 자신뿐, 극단의 이기주의로 흐르는 '나홀로족'의 특성이 두드러질 것이다. 정보사회가 뿌리내린 신천지, 인종차별이 없고 국경도 초월한 그곳만이 자신의 천국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폐쇄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을 아울러 지닌 독자들을 겨냥해서 수필작가들은 작품창작의 방향을 연구해야할 시점이다.  
수필의 대중화와 인구증가만이 능사가 아니다. 종전의 천편일률적인 감동없는 내용의 신변잡기식 잡문은 신세대 독자들은 단호히 외면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 수준이 높은 컴퓨터 두뇌들은 세련되어 수필과 수필 아닌 것의 玉石을 가려낼 줄 알기 때문이다. 사진사와 사진작가가 다르듯이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과 잡문을 쓰는 사람을 분명히 갈라놓을 것이다. 작가들은 이점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2) "미래 첨단과학시대는 만져보아도 못 믿는 불신시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는 사람들의 사고방법도 다양한 개성의 문학인 수필문학을 요구한다"고 볼 떄 다음과 같은 수필 쓰기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계의 일부가 되어 생활하는 피곤한 독자를 위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길이가 짧고 서정성 짙은 감성적 수필. (글씨 그림 사진 그래프등을 곁들여도 좋음)  작가의 육성을 포함한 영상수필.
  둘째, '시간에 쫓기는 고속화 시대, 지식의 증가로 머리만 있고 가슴을 잃어버린 독자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알맞는 독서량으로는 자연과 인간사랑을 주제로 한 잔잔한 감동을 수반하는 명상수필. 마음을 훈훈하게 적시는 정겨움이 담긴 인생 체험수필.
  셋째,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고도의 지적 탐구의 독자들이 보다 폭넓은 지식을 원하기 때문에 그 수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성적인 중수필, 또는 사회 종교 철학 역사 시사 기행 등 주제가 있는 장편수필, 그리고 비평에 가까운 포멀 에세이(formal essay)등이 선호될 것이다.        
 미래사회의 독자층을 젊은층과 중노년층으로 나누어 볼 때 인쇄매체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독자의 상상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으므로 나름대로 독자를 확보하게 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컴퓨터의 통신망 속에서 생활하는 젊은층 독자가 늘어나는 미래에는 지적 관심의 중수필 쪽으로 관심과 비중이 커지리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지금 컴퓨터 통신문학은 컴퓨터 소설의 연재, 컴퓨터 수필집등 기존의 인쇄매체 중심 문학에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수필계는 컴퓨터 통신 등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여 컴퓨터 수필잡지, 컴퓨터 수필집 등을 시도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활발한 비평과 독자대중의 확보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필 내용 면에서도 새로운 매체를 통한 신세대의 생활등을 새로운 영역으로 도입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정보사회와 관련된 내용들이 주제가 될 수 있고 새로운 수필장르, 즉 '정보계통의 미래 수필, 과학에세이, PC통신수필이라는 장르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수필문학의 새로운 시도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가.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우리의 전통을 살펴 보자는 것이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위한 미래적 지평을 과감하게 열어야 함은 물론이어서 필자는 우리의 값진 전통문화 속에 꽃 핀 고전수필에서 그 맥을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가장 인간적이 되기 위해 순수를 지켜왔던 우리 삶의 수필화 작업, 앞으로 어떠한 첨단과학시대가 온다 해도 수필은 자기의 삶의 현장과 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진지한 질문에 동참할 장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점차 부상되어 가는 수필의 위상은 수필의 본질인 나의 존재가치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첨단과학시대를 맞는 수필가들의 임무는 막중하다 하겠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수필 쓰기로 수필 장르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수필의 대중화와 인구 증가로 관심이 모아진 미래수필문학의 작품 경향은 더욱 지성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언어의 시대를 반영시켜야 할 것이다.
  아무리 미래문학으로서의 수필문학이 그 장르적 특성으로 전성기를 이룬다 해도 문제는 그 질적인 작품 내용에 있다. 제도의 개혁의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장르 역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시재의 연관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 시대에 맞는 제도로 만드는 것처럼 장르도 변함으로써 문학의 발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글의 생명이 되는 수필정신이다.
  '한국은 앞으로의 발전 모델을 굳이 서구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불교와 유교라는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근대적 삶의 형식과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안타깝다'라고 한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어 수필문학에 접목시키면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이 철학가의 말에서 필자는 우리의 전통인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우리의 삶과 조화시켜 수필화하는 것만이 우리가 지향하는 수필정신이라는 귀결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문학예술을 창조하면서 앞으로 2000년대에는 이 수필정신을 살린 자기 체험적 사실의 표현인 수필장르만이 관심이 높아지리라 나름대로 내다보는 것이다. 
 
4  등단경로 수필창작실습 1
 신춘문예의 경우 각 신문에 따라 매년 신인 작품을 공모하여 신인을 배출 한다.  그러나 신문사의 경우에는 시, 소설, 평론 위주의 공모가 시행될 뿐 수필 공모는 많지 않다.
 따라서 모든 문예지에서 시행하는 신인상 공모에 및 추천 제도를 통해 수필가는 문단에 등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수필전문지에서는 수시로 신인들을 배출하는데 격월간인 <한국수필>, 계간지인 <수필문학> <현대수필> <창작수필> <수필과 비평> <수필춘추>등이 대표적인 수필 전문지이다. 심사위원은 각 문예지의 사정에 따라 위촉되어 실시된다.
. 종합 문예지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모집 안내
월간 문학은 지금까지 86회째 신인 작품상을 모집하여 문단에 많은 신인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본지는 아래와 같은 규정으로 참신하고 역량 있는 신인들의 작품을 계속 모집합니다. 제87회 신인상 모집 마감은 `99년 1월 10일 까지입니다.
1. 종별                      
*시, 시조: 5편이상                  
*소설:200자 원고지 100장이내        
*수필:200자 원고지 20장 이내 (2편)              
*희곡:단막물 100장이내
*평론:200자 원고지 100장 이내
*아동문학:동시-5편이상
          동화-200자 원고지
               30장 이내(2편)
 2. 규정
*정확한 역량을 측정하기 위해 시, 시조 및 동시는 각 5편을 보내고 수필과 동화는 2편을 보내야 한다.(그 밖의 부문은 각1편)
*응모 작품은 4개월에 1회씩 심사 발표한다.
*당선된 작품은 본지에 게재됨과 동시에 소정의 고료를 지불한다.
*당선작가는 1회의 당선으로 기성문인으로 대우받으며, 당선과 동시에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한다.
*심사위원은 고정시키지 않으며, 본회의 이사장이 매회 위촉한다.
*응모작품은 반환하지 않는다.
*응모작품의 끝에는 주소와 전화번호, 본명을 명기해야 한다.
*봉투에 '00부문 응모 작품'이라 써야 한다.

보낼곳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의 117번지 (예총회관내)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편집부

 . 한국문인협회 <月刊文學>. 수필전문지 <창작수필>
             '創作隨筆 新人償' 응모규정
 본지는 본격수필이 요구하는 창작문학으로서의 위상정립과 그 장르의식의 구체화에 참여할 신인을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모집한다.
*종목 및 분량
   종목:창작수필
   
분량:200자 원고지 15장 내외 (장편수필은 제한 없음)
*규정
① 응모된 작품은 년 4회로 심사 발표한다.
② 당선은 매회 1명씩을 원칙으로 하나, 응모된 작품 수나 그 내용에 따라 증감할 수도 있다.
③ 당선된 작가는 기성 수필 문학가로 대우하며, '창작수필문학회' 및 '창작수필문인회'의 입회자격을 갖는다.
④ 당선은 '수준작' 2편을 원칙으로 하고, 동시에 발표한다. 단 2편 이상 본지의 '수필문예란'에 발표된 작품은 심사위원 동의를 얻어 응모작 1편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타지에 추천완료 또는 당선된 사람도 이에 준한다.
⑤ 심사위원은 본지 발행인이 위촉하는 권위있는 수필가, 평론가로 한다.
⑥ 응모된 작품은 반환하지 아니한다.
⑦ 응모작품에는 <신인상 응모>라 명시하고 끝에는 주소, 전화번호, 본명을 적어야 한다.  
   *보낼곳
    우411-314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밤가시마을 1354
           건영빌라 910-106호
           창작수필 일산 편집실  
           전화: (0344) 904-7496-7
           FAX: (0344) 904-7498
아래의 글은 피천득의 수필작법에 대한 에세이이며, 이에 따른 수필이다. 이를 참고로 하여 자유제목의 수필을 창작하라.
    삶의 흥을 돋구어 스스로 意味를 발견하는 作業
                                             皮千得
 나는 요즈음 통 글을 쓰지 않고 있다. 그런 나더러 '수필작법'을 쓰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양을 해도 집요하게 청을 하는 편집자에게 대접이 아닌 줄 알면서 아래의 졸수필(拙 隨筆) <시골 한약국>을 감상한 수필가 윤오영(尹五榮)씨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문책(文責)을 면하고자 한다. 과람(過濫)할만큼 호평을 한 것이지만 편집자가 요구하는 수필 노트가 되려는지 모르겠다.
 이 글의 실질적인 내용은 '양복 한 벌 운운(云云)' 이하가 된다. 그러나 시골 한약방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 출발점이다. 실질적인 내용을 먼저 쓰고 한약국을 뒤에 서술하면 그것은 비유가 된다. 그런 비유란 아무런 효과도 없다. 먼저 씀으로써 '흥'이 된다. 흥이란 정서다. 여기서 비로소 전편의 정서가 산다. 우리나라 고가(古歌)에 사모곡<思母曲>이 있다. 호미도 날이언마는 낫같이 들 리도 없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이 사모곡의 빛나는 점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호미에, 낫을 어머니에비유한 것으로 해석하는 까닭에 그 노래를 잡쳐 버린다.
 학생 시절의 회상. 병이 나서 촌으로 휴양. 유하게 된 집 할아버지. 그의 권유로 진찰. 의원이 맥을 본다. 전신쇠약. 보약을 먹게 된다. 약재도 없고 약 살 돈도 없는 약국 (그래서 돈을 취해 주게된다.) 약장의 서랍이 많지 않다. 가난한 모습이다. 약 저울에 녹이 슬었다. 한층 강한 묘사로 가난한 모습을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하게 표현했다. 달리 길게 쓰면 문맥이 혼미해지거나 시들어 버린다. 천장의 먼지 앉은 약봉지는 강한 묘사가 아니다.  아랫말과 잇기 위해서 좀 부드럽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단을 바꾸어서 두 문단을 순하게 이어 갔다. <내마음이 그에게 끌렸던지>로 문맥 돌변을 피했다. 청양서 사오십 리나 되는 촌이었다는 것이 여기서 비로소 밝혀진다. 돈 없는 약국 주인과 같이 갔으니 자연 약재 살 돈을 취해 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돈을 바꾸어 달랬다거나, 동정심을 발했다거나 등등의 사설이 끼면 문맥이 침체된다. 그래서 돈을 주었다고 쓰고 '취해주었다'고도 하지 아니했다. 다음은 병이 나서 휴양이 끝나고 돌아오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낚시질 다니고 밤이면 곤히 잠들던 생활이 스침으로써 한약의 효과나 한의가 용했다던가 하는, 이 글과는 상관없는 데로 독자의 눈이 향할 것을 막고, 무드를 한층 곱게 할 수가 있었다. 만일 낚시질 다니는 강촌의 풍경을 삽입하면, 풍경의 묘사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문맥은 흩어진다.
 또 한가지 문제가 있다. 돈을 준 것은 물론 취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짓고 결과를 빠트리면 글이 이가 빠지고, 필요  없는 사건은 군더더기가 되나.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로 이 두 점을 넌지시 풀어 버렸다. 더욱이 '지금은'이란 석자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었음으로 다시 요약해서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며, 문장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등장이 이것이다. 비상조차도 없을 충청도 그 시골약국이란 말로 한층 도타워 졌다. 이 책들은......  진피 후박 감초 박하 행인같은 것들이라는 데서 우리는 그 천장에 걸렸던 약봉지 밑의 글씨를 보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문장의 조응(照應)에서 오는 효과다. 이런 경우에는 약명을 한자로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작자는 글 전체의 조화를 위하여 한자로 안 쓴 것 같다. 이 값싼 약들이 우황 웅담들의 값진 약을 끌어낸다. 값싼 약으로 마무리짓지 않고 우황, 웅담....... 같은 약이 아쉬울 때면 그 시골 약국을 생각한다는 데까지 와서 끝냄으로써 문맥이 생동한다. 이상 더 쓰면 사족(蛇足)이다. 문맥에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물론 작자가 일일이 인식하고 썼을 리는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런데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면 작품이 독자에게 안겨 준 것은 무엇인가. 고요하고 따뜻한 정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줄기 아득하고 따뜻한 정서를 얼룩이 안 지게 끌고 나가는 것이 문맥이다. 이 글을 좋아하고 아니 하는 것은 읽는 이의 기호에 달린 문제다. 그 개성과 소재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문맥을 구김새 없이 살려 나가는 묘리(妙理)는 같다.
<代表作>
시골 한약국    
 나는 학생 시절에 병이 나서 충청도 어느 시골에 가서 몇 달 휴양을 하였다. 그때 내가 유하던 집 할아버지의 권고로 용하다는 한약국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한 제 지어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의원은 한참 내 맥을 짚어 보고서는 전신쇠약이니까 녹용과 삼을 넣은 보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 약방에는 약재가 없고 약 살 돈도 당장 없다고 하였다. 사실 약방에는 서랍이 많지 않았고 서랍 하나에 걸려 있는 약 저울도 녹이 슬어 있었다.
 약국 천장을 쳐다봐도 먼지 앉은 봉지가 십여 개쯤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내 마음이 그에게 끌렸던지 그 이튿날 나는 그 한의와 같이 4, 5십리나 되는 청양이라는 곳에 가서 내 돈으로 나 먹을 약재를 사고, 약국을 해 먹으려면 꼭 있어야 된다는 약재를 사도록 돈을 주었다.
 약의 효험인지, 여름 시냇가에 날마다 낚시질을 다니고 밤이면 곤히 잠을 잔 덕택인지 나는 몸이 건강해져서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돌려주었던 그 돈은 받았는지 받지 못하였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후 셰익스피어의 극 <로미오와 줄리엣>속에서 로미오가 독약을 사는 약방이 나올 때 비상조차도 없을 충청도 그 시골 약국을 회상하였다.
 양복 한 벌 변변한 것을  못해 입고 시들인 책들을 사변통에 다 잃어버리고 그후 5년간 애면글면 모은 나의 책은 지금 겨우  삼백권에 지나지 아니한다. 나는 이 책들을 내가 기른 꽃들을 만져 보듯이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자라는 아이를 바라보듯이 대견스럽게 보기도 한다.
  물론 내가 구해 놓은 이 책들은 예전 그 한방의사가 나한테서 돈을 취하여 사온 진피 후박 감초 박하 행인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황, 웅담, 사향영사, 야명사같은 책자들이 필요할 때면, 나는 그 시골 약국을 생각하게 된다.
 
 
  5  수필의 형식
 수필의 특성의 하나로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윤재천은 다음과 같이 수필의 형식에 대하여 언급한다.
'무형식의 형식'이니 '무작법의 작법'말에 압축되어 있듯이 분명 수필은 일정한 형식이나 작법에 따로 없이 발전해 온 장르이다. 그러나 이말의 진의는, 쓰는 사람에 따라 특유의 작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요, 소재나 내용에 따라 그에 가장 적절히 부합되는 형식을 발견하고 창조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수필을 가까이 할 수는 있으나 진정으로 좋은 작품을 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수필다운 수필이 결국 삶의 연륜과 슬기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윤재천의 <수필문학산책> 31쪽
    
 따라서,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말은 형식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형식이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특성 때문에 제형식을 살펴보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몽테뉴와 베이컨에 관한 이해이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에세이의 유래를 살펴보아야 하며 이를 통해 수필의 제형식에 대한 원론적 이해가 따라야 한다. 다음의 글은 제1회 한국 수필가 협회 세미나 (1982.6.26-27)에서김진만이 발표한 <영국의 에세이>라는 글이다.
 영국에서 제일 먼저 '에세이'라는 말을 쓴 사람이 베이컨(1561-1626)이었다. '에세이'라는 말을 우리가 '수필문학'이라고 부르는 소위 수필서부터, 논설 , 수상, 여행기, 비공식적인 문예비평까지를 널리 포괄하는 종류의 글을 가리키는 것으로 넓게 해석할 때, 영국 '에세이'가 베이컨으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PEN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영국의 생물학자 쥴리언 학슬 리가 뽑혔을 때, 그는 생물학자로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넓은 의미의 에세이스트로서 PEN의 총수로 추대되었었다. 문학이론적으로 수필이 소설, 시, 희곡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문학의 한 독립된 '장르'가 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다. 서구의 각 민족의 문학사, 특히 영문학사에는 소설, 희곡, 시의 세 장르 중 어느것으로도 분류될 수 없으나, 영어와 영국인들의 문학사에서 버릴 수 없는 수많은 산문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베이컨의 에세이를 위시해서, 후커의 영국 교회론, 밀톤의 출판자유를 논한 불후의<아레오파지티카>, 18세기의 신물수필 또는 평론, 보즈웰의 <죤슨전>, 뉴먼의 <대학교육론>, 아놀드의 <감미로움과 빛>, 그리고 드 퀀시 와 찰즈 램의 주옥같은 글들이 그런 것이다. 이와같은 길이와 문체를 각기 달리하는 잡다한 산문작품들을 통틀어서 '에세이'라고 부르고 그 작가들을 '에세이스트'라고 통칭하는 것이 영국의 전통이다. 그리고 그 전통의 효시가 베이컨이었다고 하는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전통은 어쩌면 극히 영국적인 전통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유럽에서는 '에세이스트'라는 말이 국경을 넘어서 전통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영국의 에세이를 생각할 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은 베이컨이 아니라, 18세기의 애디슨이나, 스틸, 더욱 간절하게  는 <엘리아 수필집>의 저자 차알스 램(1775-1834)이다. 그리고  램의 선구자를 영문학사에서 찾자면, 베이컨이 아니라 에이부러험 카울리(1818-67)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카울리의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서 읽혀지는 것은 극히 적지만, 1967년에 펴낸 '운문과 산문으로 된 에세이식 논설'에 수록된 몇 편의 수필들을 후대로는 램을, 선대로는 베이컨이 아니라 몽떼이뉴(1533-92)를 연상시켜 준다. 결국, 우리가 램을 연상하여 생각하는 영국수필의 계보는, 카울리를 거쳐서 모든 에세이의 시조인 몽떼이뉴 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몽떼이뉴가 16세기 말에 그의 수상록 1,2권을 '에세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냈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새로운 종류의 문학을 만들어 냈다. 베이컨도 물론 그 영향을 입었고, 그 후의 모든 영국의 에세이스트들이 다 그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영문학사가 보여 주는 몽떼이뉴의 가장 진정한 후예는 단연 차알스 램인 것이다. 몽떼이뉴-카울리-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산문문학의 전통을 우리는 수필 또는 수필 문학이라고 부른다. 이 분야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온 것이 영문학이고, 에세이를 귀하게 여기고, 에세이를 쓰고 읽기를 즐기는 우리에게 영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큰 몫이 또한 이 분야의 소산이다.
 
카울리와 램의 가장 영국적인 에세이의 유래를 살피기 위해서, 베이컨과 몽떼이뉴를 비교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짤막한 노오트'이며, '전후 맥락이 없는 명상록'을 써 놓은 것이라고 한 베이컨의 에세이는 과학자다운 이론 정연한 토론과 키케로식 대구와 경구로 가득 차 있지만, 거기서 베이컨 자신에 대한 것은 단 한마디도 찾을 수 없다. 한편 몽떼이뉴의 에세이는 그 모두가 결국 '나자신을' 그린 것이다. 베이컨이 현명한 처세법을 가르치는데 에세이라는 단문을 이용하고 있는 반면,  몽떼이뉴는 자신의 생활과 생각과 편견과 기호를 거침없이 되뇌이다 보면 남의 처세를 걱정할 여유가 없다. "어떤 책을 맛만 보고, 어떤 책은 삼키듯 읽고, 소수의 책은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한다. 즉, 어떤 책은   띠엄 띠엄, 어떤 책은 대충 대충, 그러나 소수의 양서는 전부를, 즉 근면과 주의를 다해서 읽어야 한다." 이것은 베이컨이다. 문장구조에 긴장과 규율이 감돌아서 라전어를 영역한 듯이 착각을 자아낼 정도이고, 논리도 정연하지만, 베이컨 자신이 무슨책을 어떻게 읽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한편, 몽떼이뉴의 '독서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는, 산만하기 이를 데 없다. 베이컨의 독서론이 들어 있는 <학문에 관하여>가 한두 페이지의 단문인데 비해서, 몽떼이뉴의 글은, 깨알만한 활자로 장장 약 15페이지에 걸쳐서, 이를테면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된다. 독서 얘기가 나오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단지 재미를 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학문을 한다면,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학문하는 것이고, 잘 죽고,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을 찾으려는 것뿐이다." 그리고는 프로페르티우스의 시 한줄을 인용한다. 한참 내려가서 풀르타크와 세네카의 편지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낸다. 이 두 사람의 글은 체질적으로 오랜 시간 독서를 할 수 없는 자기에게는 안성마춤으로 자기가 추구하는 지식을 단편적으로 써놓은 것이어서 좋고, 읽다가 지치면 아무데서나 덮어두어도 무방이라는데 매력이 있다고 한다.

   키케로는 도덕론이 볼만 하지만, 문체가 지루해서 질색이라고 한다. 한 시간 동안 꾹 참고, 그놈을 읽고 난 후에, 읽은 대목을 회상해 보면 남는 것은 허황한 바람뿐이라고 혹평한다.
  우리가 램이 대표하는 영국의 에세이를 애정과 이해와 기쁨을 가지고 읽기 위해서 몽떼이뉴를 읽어야 하지만, 몽떼이뉴의 진미를 알기 위해서는, 플루타크와 시네카를 읽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고 보면 영국 에세이의 기원은 베이컨이나 카울리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고,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되살아난 라전 문학의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양면에서 램과 아주 가까운 18세기 영국이 낳은 많은 신문작가를 또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8세기 영국, 특히 수도 런던의 18세기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클럽과 다방의 시대였다. 그리고 신문, 잡지등의 정기 간행물의 시대였다. 정기 간행물에서는 정기적 수필-피어리오디컬, 에세이-이 가장 중요한 읽을 거리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리차드 스틸 (1672-1729)이 창설한 <태틀러>(1709)와 <스펙크테이터>(1711)를 들 수 있고, 이 두 간행물에 스록된 스틸과 그의 대학 동창인 죠세프 애디슨(1672-1719)의 에세이들이 이 시대 수필의 압권이다.
18세기 영국의 세태를 교훈, 풍자, 고발, 힐책하는데에 화제에 궁했을리 없고, 상식과 이성이 존중되는 시대에 언론의 제약이 있을 수 없었다. 유행, 도덕, 문학, 철학사상, 인물, 학문, 시사문제 등 정치를 제외한 삼라만상이 그들의 소재이자, 테마였다. 몽떼이뉴나 램의 에세이처럼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베이컨처럼 객관적이고, 격식바르고, 노골적으로 교훈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 두 사람과 이들의 본을 따서 훌륭한 에세이를 남긴, 죤슨이나 골드 스미스같은 사람들을 모두가 그 나름의 모랄리스트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소중했던 것은 절제, 합리성, 고매한 취미, 촌티를 벗어난 도시풍의 세련, 기지와 우아함-교양있고 품위있는 문화인문화인의 이상이었다. 이것은 베이컨류의 처세술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베이컨과 18세기 에세이스트들 사이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후자들은 전자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규모의 독자층을 가지게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에세이스트들은 정기간행물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예상할 수 있는 독차층과 대화와 호흡을 같이 할 수 있게된 것이다. 이것은 월리엄 해즐리트(1788-1830)와 램이 대표하는 19세기 영국의 에세이에로의 과도기요 준비기간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편중독자의 고백> <예술로서 고찰한 살인론>등 기괴한 글을 남긴 드 퀸시(1785-1859)와 함께 해즐리트와 램을 한데 묶어서 '낭만적 에세이스트'라고 부른 영문교과서가 있다. 이 세 작가가 모두 영국 에세이사에 큰 공헌을 했지만, 우리의 흥미는 주로 찰스 램에 집중된다.  이 세사람이 모두 베이컨은 물론, 18세기의 에세이스트들 보다 더 확연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글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수필 작가로서는, 작품의 양이나, 질에 있어서, 독자에게 주는 감흥의 밀도에 있어서 램이 단연 출중했다. 철저한 구어체로 강한 열기를 가지고 글을 쓴 해즐리트와는 달리, 17세기의 고어를 즐겨 쓰고, 문장의 구성도 얼른 보기에 지극히 산만했던 램의 수필이, 오늘날까지도 영국 에세이의 대표적 작품으로 애독되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램의 매력을 요령있고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램은 몽떼이뉴와 같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야기를 한다. 그 자신은 18세기 에세이스트들이 숭상하고, 고취하던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교양있는 문화인과는 거리가 멀다. 괴벽스럽고 고집이 세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가령 스코틀랜드 사람이 싫다. 유대인도 싫다. 검둥이와는 사귀기 싫고, 퀘이커들과 같이 살 생각이 없다. 그 대신, '낡은 의자, 낡은 책상, 거리, 광장, 내가 햇볕 쪼이던 곳, 내가 다닌 옛 모교'등이 좋다. 독자에게 공감과 함께 깊이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아득한 노스탈지아가 있다.  이 두가지 특징이 영어 이외의 다른 말로는 번역할 수 없고, 영어로도 파라프레이즈 할 수 없는 유머로 해서, 혐오감이나 감상주의에 빠지는 일이 없다. 몽떼이뉴와 램이 각기의 편견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또 여러 가지 기질과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회의적이면서 부정적이 아니고, 유머러스하면서 풍자적이  아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어떤 평자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부리태니카, 몽떼이뉴 항) 우리가 몽떼이뉴보다 램에게 더욱 마음이 끌리는 것은 램의 파란많은 생애를 기억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전연 알지못하고도 램의 매력을 쉽사리 뿌리칠 수 없는 것은 <엘리아> 한권의 페이지 마다에서, 행간에서 스며나는 퍼소나(Persona)가 지극히 귀하고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램이후 그의 모방자는 많았지만, 그 누구도 램의 감흥을 재생한 사람은 없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램과는 다른 의미에서 두드러지게 영국적인 에세이를 쓴 사람들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맥스 비어봄, 힐러리 벨록크, 체스터튼, 올더스 학슬리, 죠오지 오웰 등 그리고 18세기 이래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서 영국의 거의 모든, 문예 또는대중 정기 간행물에 격조와 수준을 달리하는 수많은 수필들이 실리, <더 타임즈>의 소위 제4사설인 훌륭한 수필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베이컨과 몽떼이뉴의 전통을 아울러 발전시켜 온 영국은 실상 수필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에세이사가 보여 주는 두 가지 흥미있는 사실이 있다. 그 하나는 베이컨 이후의 거의 모든 에세이스트들이 에세이스트가 되기 전에 또는 에세이를 쓰면서 세속의 직업인이었거나, 소설, 희곡, 시 등 창작을 하였거나,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을 연구하는 학구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애디슨과 스틸이 전문적인 수필작가였던 것 같이 생각되지만 둘이다 희곡을 쓴 작가였다. 램도 그의 수필은 만년의 작품이고, 일생의 대부분을 회사사무원으로 지내고, 시작을 시도한 적이 있고, 문학비평에도 일가견을 가진 당당한 문인이었다. 전문적인 직업, 수준 높은 학식이나, 식견, 또는 문학에 대한 깊은 경험과 조예를 가지지 않은, 범상한 사람 누구나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수필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영국인들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또 다른 사실은, 영국의 모든 에세이스트가 저마다 특색있고, 격조높은 문장가들이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문예부흥기의 영어산문의 표본이고, 애디슨은 18세기 산문의 자타가 공인하는 모델이었고, 램의 매력의 태반은 매력있는 퍼소나를 담아낸 그의 독특한 언어와 문장의 묘미의 소산이었다. 수필의 가치가 주제나 내용으로 저울질되는 것이라면, '수필문학'이라고해서 문학의 범주에 끼어 들기 위해서는, 주제나 내용의 적절성과 함께 언어구사의 예술로서의 볼품과 보람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영국의 에세이가 분명하게 조명해 준다.
 (애머슨쯤부터 시작하는 미국의 에세이는 따로 정리하고 논할만한 풍성한 과제이다.) 
                                   김진만의 <영국에세이> 전문
                                            (한국수필 1992 여름호)
6  주제 다양한 소재 찾기
1. 주제와 소재는 어떤 관계인가. 
  주제 (Theme, Thema, motif, object) 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 즉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이다.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그리고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작품의 주제는 나타난다. 그리고 소재는 이러한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자료인 셈이다. 따라서 주제와 소재는 결코 떨어질 수 없다.
 수필가가 소재를 얻어 그것을 주제화 (意味부여)하는 작업이 수필 창작의 과정이다. (우리는 '주제의 의미부여'를 간편하게 주제화(主題化)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소재를 문학(예술)으로 형상화(形象化)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내면적이든 가시적이든 어떤 소재에 접했을 먼저 그 소재에 대한 강한 충동(동기부여)을 느낀다. 이 충동은 곧 바로 그 소재의 의미부여(주제화)로 이어지고, 그 소재의 실상(實像)은 다시 어떤 심상(心象)으로 구체화 되면서 그 수필은 주제의식이 뚜렷해 진다.  -도창회의<수필문학론> p.153
 그러나 주제와 소재의 관계는 위의 예문처럼 소재에 따라 주제가 형상화 될 수 있다.

2. 수필의 글감은 어떤 것이 있나.
① 이러한 수필은 한국의 전통적인 수필로 말하자면 그 소재를 대개 '나'의 생활주변에서 얻고 있다. 서구적인 수필(에세이)이 대개 '나'의생활보다는 '우리'의 생활에서 소재를 얻고, 주관보다는 객관적인 사고의 경향이 짙고, 서정적이기보다는 지적인 경향이 짙은 것과 달리 우리의 수필은 대개 그와 반대의 뉘앙스를 갖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쓰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경향이 다를 수 있고, 또 자기 개성에 맞는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경향의 수필이든 그것은 지적 감각과 정서적인 감각을 다같이 지녀야 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치밀하게 사리를 따지고 사물을 관찰해 나가지만, 그것이 오히려 문학 작품으로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다. 정서적인 감각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나가는 따뜻한 분위기, 여유있는 분위기를 주지 못해 독자를 피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자도 알만한 사리를 따져 나간다는 것은 깔보는 결과가 되므로 작품으로서는 실패다. 그런 대표적인 수필이 산수를 찬미하고, 꽃과 달과 가로수와 하늘의 흰구름 등을 찬미하는 수필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미끈한 문장력으로 다시 한번 찬미해봤자 그것은 감동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감동이란 경이감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경이감은 새로운 생활의 발견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치밀한 논리가 따를 때 비로소 그 논리는 설득력을 지닌다.                  
                                                         - 김우종의 <평범속에서 발견된 진리> 중에서
② 윤재근씨는 수필의 소재는 "나"이며, 모든 현실은 나를 통해 수필이 된다고 말하고, 이런 과정에서 수필은 현실적 소재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문학이라고, 그 창조성을 주장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수필의 소재에 대해서
"1. 작가가 경험한 사실이 소재가 되어 그 소재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 수필이라는(가칭) <사실론>과,
 2. 작가가 경험한 사실에다 작가의 상상을 보태어 구성한 것이 수필이라는 <구성론>과,
  3. 모든 사물이 나를 통과하여 수필의 소재가 된다는 <통과론>"으로 세 가지 시각을 만나게 됩니다.
                                                              -이인복 <수필의 소재>        
③ 전술한 바이지만 수필의 소재는 우리의 생활체험을 통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에, 광범한 의미로 본다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우리가 겪는 모든 체험들은 모두 수필소재의 대상이 된다.  단지 그 체험들 중 수필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는 소재가 우리에겐 중요하다. (.....)
 그래서 작가가 훌륭한 소재를 발견하면 바로 수필을 한편 얻은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수필가는 소재 발견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소재를 얻으려면 자연관찰, 여행 및 많은 人生 (靈肉間)의 경험을 쌓아야만 될 것이다.
 그러면 최근 유행하는 소재들로 어떤것들이 있을까?
 시대가 변천해 감으로 인해 수필의 소재들도 많이 변해간다.
소재는 늘 새로운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경우는 아직 주정적(主情的) 소재들이 주종을 이루고, 가끔 주지적(主知的) 소재들이 수필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정이 되었든, 주지가 되었든, 의도하고자 하는 주제에 부합되는 그런 소재가 발탁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항간에 <평범한> 소재가 좋다는 말이 돌아다닌다. 그 말에도 조금은 일리가 있다. 단지 선택한 평범한 소재에다 주제의식을 멋있게 살려낼 수만 있다면  꼭 안 될 것도 없다.
  7  위트와 유모어의 문학
수필의 어원적 의미는 '무엇인가 새롭게 시도한다'는 시론(試論)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다시 상기해 보자. 수필을 새로운 실험정신에 의해 쓰려고 한다면 작가는 기존의 객관적 규범이나 상식적인 관습에 매여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파격'과 '탈법' 그리고 '일탈'의 정신으로 새로움에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유모어와 위트가 수필에서는 필요로 한다. 위트와 유모어로관습에 매어 있는 정신을 깨뜨려야 하며, 그로 인해 고지식하고 진부한 문체를 깨뜨려야 한다.
 한국 고전문학의 특성을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은 해학과 풍자성으로 보아왔다. 우리는 문학작품 뿐만 아니라 해학적인 선비들도 유난히 많다.
 이는 우리민족의 성격적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속(超俗)' 혹은 '탈속(脫俗)'적인 기질, 현실을 뛰어 넘으려는 긍정적인 기질이 이런 성격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수필의 해학성과 풍자성, 유모어와 위트를 살리는데 기질적으로 어려움이 없게 된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수필을 볼 때 그 해학성과 풍자성은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다. 국어학자 이희승의 <딸깍발이>를 읽어보자.
 
* <딸깍발이> - 별첨  
인용된 수필 같이 쓰기 위해서는우선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성(Logos)적인 비판의식을 감성(Pathos)로 바꾸어 쓸줄도 알아야 한다. 위트와 유모어가 있는 수필을 쓰기 위한 관건이 여기에 있다.
위트와 유모어는 지성적 소산이다. 그러나 지성적 소산만으로 수필을 쓸 때 감동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감성적 여과 장치를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유모어와 위트란 무엇일까? 
 유모어에 대하여 도창회는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학술적으로 보아 유모어는 대개 3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 우월감(superiority)이나 혹은 格下(degradation)의 상태에 있을 때 웃음이 만들어지는데, 곧 인간의 어리석음(absurdity)이나 유별남(oddness)이나 결함(infirmity)같은 것들이 우리를 웃긴다고 했다.
 둘째, 불일치(incongruity), 기대좌절, 두 생각의 엇갈(bisociation)등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학설이다.
 셋째, 프로이드는 긴장(tention)으로부터 해소되거나, 금지(혹은 억제:inhibition)으로부터 놓여나올 때 웃음이 터진다고 보는 학설이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의 우월감이나 격하의 이론은 풍자(satire), 비꼼(sarcasm), 불행(misfortune)의 웃음이고, 두 번째의 불일치와 bisocation이론은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익살의 웃음을 주지만, 세 번째의 프로이드 이론이 현재까지는 유머론 중 가장 우세하다.
                                   -도창회의<수필문학론>59쪽
 그리고 김열규는 그의 글 <수필과 해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초속이나 파격은 유머의 일면이다. 초속과 파격이 유머적인 웃음, 해방과 구원, 긴장의 폭발적인 해소와 감정의 소낙비 같은 淨化, 때로 숭고미와 짝지워지기도 하는 유머는 그만큼 공감이나 공명을 자아내어야 한다. 독자들의 재빠른 지성에 의한 이해를 번개처럼 환기해야 하고 때로 페이쏘쓰의 바닥에까지 잠기는 감정의 호응을 얻어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머는 공명의 탈법이고 공감의 파격이다. 한쪽의 異化作用을 다른 한쪽에 동화작용을 지니고 있는 인간정신이 곧 유머다.  이화작용과 동화작용은 유머라는 날렵한 새가 지닌 두 개의 날개다. 유머는 웃음에 동정이 있고 공감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유머는 화해의 웃음이다. 인생 세계와 유머리스트 사이의 화해가 이룩되는 웃음, 독자와 유머리스트 사이에 이룩되는 웃음이 곧 해학이다.
 수필은 숙명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머리스트가 되게 마련되어 있다. 금아 피천득 선생의 절묘한 수필의 비유법이 이미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 수필은 그 세계인식에 있어서나 삶을 보는 눈에 있어서나 퍽 자유롭다. 이데올로기 면에서만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형식이나 문체면에서도 수필은 제일급의 자유주의적 스타일리스트다. 그것은 좋은 의미의 댕디즘에 젖어 있다.
               
                            -김열규의<한국수필가 협회세미나 주제발표문>에서 (`86.7)
 두 글을 정리해 볼 때, 유머의 의미는 '기존의 관념이나 감성으로부터 일탈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인간 정신'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머의 힘은 '기지', '재치'오 번역될 수 있는 위트의 힘으로 가능해 진다. 순발력 있는 생각, 지혜로운 지적작용이 위트이기 때문에 유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필이 다른 문학장르와 다른 점을 아래 인용문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수필의 세계를 보는 눈길이 관습에 매여 있지 않다면, 또 상식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있다면 그것은 피치 못하게 유머리스트가 되게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수탈하고 매인데 없는 눈길이 웃음기를 머금은 순간, 항상 유머는 팝콘처럼 터뜨려지고 또 피게 되어 있다.
 실상, 다른 문학장르에서 유머는 그 작품성의 일부이거나 바닥에 깔린 속성으로 머무르기 쉽다. 수필은 바로 이 점에서 커다란 장점을 지닌다.  경구나 잠언(箴言)이 그 통사구조 전체로 유머를 엮어낼 수 있듯이 수필은 작품 전체의 구조를 유머화할 수 있는 것이다. 유머는 수필의 양식상의 기본적 전략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필이 뭣보다 그 이데올로기 면에서나 세계인식에 있어서나 자유로운데다 형식이 짧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체가 과장과 개성을 용납하고 그럼으로써 매우 활달하고 또 소탈하기 때문이다.
                                    -김열규의 위의 글에서 발췌-
8  인품의 문학
 수필의 창시자인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나는 나에게 관해서만 말한다.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나는 헤매이며 주제로부터 벗어난다."라고 고백하면서, 수필은 철저한 자기묘사, 자기자신을 철저하게 탐구하는 문학 장르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오랫동안 나를 고찰한 덕분에 남을 아주 잘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토로했다.
 수필은 인생의 해석과 생명의 이해를 위한 정서와 상상과 사상을 하나로 용해시키는 문학으로서의 "인간학"이다. 궁극적으로 수필은 인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또한 있을 수 있는 인생을 밝혀내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문학하는 일"로서의 이 수필작업이야말로 수필의 영원한 과제이기도 하다.
 흔히 수필을 퍼스널 노트로서의 체험의 자조문학(고백문학)임을 강조한다. 이 또한 생명에의 의의있는 가치평가, 즉 새로운 의미 부여로 집약되어진다. 그 점에서 수필은 무엇을 다루었던 간에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혼을 울려주는 생명의 구경적인 의미 발굴과 표현에의 인간학임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수필은 인간체험에의 언어적 의미화로서의 가치있는 시사가 아닐 수 없다.
                                    
                                   -장백일의 <고뇌와 창조>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수필은 문학의 어느 장르보다도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인간학'이다. 자기 고백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필은 글쓴이의 인격 또는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양식의 글이다.
수필은 품위가 있어야하며 고급한 향이 은은하게 풍겨나야 한다. 그래야 인격 또는 인품있는 글이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수필의 글감을 고급한 것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문방사우라든가 녹차 이야 기라든가 혹은 우아한 레스토랑 체험이나 해외 여행기등 고급하며 사치한 소재들을 택해 한껏 인품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품의 문학작품이 될까?
 여기에서 '호박'을 글감으로 한 수필 한 편을 보자.
 우수가 가까워지면 담 밑에다 드문드문 호박 구덩이를 파 놓고서 거기에다 똥을 그득하게 퍼부어 놓고는 흙으로 덮는다. 그래야 굵은 호박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꽃이 핀 다음에 거름을 주면 호박이 여물기 전에 다 빠지기 때문에 옛날부터 밑거름으로 퇴비 대신 분뇨를 이용해 왔다.
 호박씨에서 싹이 트고 나서 덩굴이 담 위로 기어 오르면 여름이 성큼 다가선다.
 시골에서는 반찬이 없으면 호박잎을 쪄서 쌈을 싸 먹기도 하고, 또 그것을 뜯어 넣고는 국을 끓이기도 한다. 호박은 1년 내내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된장을 끓일 때엔 애동 호박을 썰어 넣기도 하지만 국을 끓일때나, 지짐을 붙일때나, 범벅을 할 때도 호박은 약방의 감초처럼 긴히 쓰인다.
 호박은 알뜰히 가꾸지 않아도 1년동안 우리의 식탁을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관음보살같은 고마운 존재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곡식은 다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나물죽이 아니면 호박범벅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서 우리에게 호박은 단순한 식품이 아니고 생명의 은인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그런 호박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기는 커녕갖은 구박과 천대를 했을 뿐 아니라, 호박꽃을 못난 여자의 얼굴에 비유하면서 괜히 호박을 타박하며 천덕꾸러기로 여겨왔다. 배은 망덕한 짓이다.
 나는 지금 어느 화가가 그린 호박 그림을 보고 있다. 4호짜리 화면에 꽉 찰 정도로 잘 익은 호박 한 개가 그려져 있어, 보면 볼수록 정이 깊어진다.
 그 호박 그림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호박이 아니라 늙은 여인의 얼굴이다, 밭을 매다가 허리가 아파서 밭고랑에 퍼지르고 앉아 있는 모습같기도 하고, 자식을 키워서 객지로 다 떠나 보낸 뒤에 명절이 되어도 찾아오지 않는 자녀들을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고 앉아 있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속세 를 떠나 어느 절에 가서 염주를 세면서 여생을 보내는 보살의 얼굴과도 같이 보인다.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여 줄곧 호박만 그려 왔다고 한다. 그는 여러 차례 입상도 하여 화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그가 그린 호박을 모두 합하면 만 덩이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호박 그림에는 농민 애환이 담겨 있고 우리 민족의 깊은 사상이 스며 있다.
 호박의 원산지는 동인도라고 하는데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나라에 귀화하여서 우리의 것이 되다시피 되었다.
 호박도 기후에 따라 그 생육이 다르기 때문에 동양호박과 서양호박은 그 맛이 다르다고 한다.
 서양산은 녹말이 많고 맛이 있어서 주식 대용으로 사용하는데 비해 동양에서는 그만 못하여 부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는 마음이 언짢을 때는 호박 그림을 본다. 그러면 호박은 꾸밈없는 모습으로 나를 위로해 준다.
 때로는 꽃을 피워 삭막한 농촌 아이들에게 장난감이 되어 주기도 하고, 잎사귀에서 줄기, 열매까지 농민을 위해 바치고도 비료를 많이 달라고 보채지도 않으며, 알뜰히 보살펴 달라고 앙탈을 부리지도 않고 내다버리는 개숫물이나 어린애 기저귀를 빤 물만 주어도 고맙게 여기며 여간해서는 병에 걸리지도 않고, 한번도 남을 해치지도 않으면서 제 힘으로 나무나 풀을 붙들고 조용히 살아 간다.
 호박은 예쁘지도 않고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맛이 있는것도 아니며 영양가가 풍부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호박은 보면 볼수록 덕성스럽고 먹으면 먹을수록 깊은 맛이 있다.
 호박은 철따라 유행옷을 바꿔 입는 도시의 세련된 여인도 아니고, 말을 잘 하고 교양이 있고 매력이 넘치는 지성적인 여인도 아니고 늘 봐도 그 모습으로 남에게 넉넉한 인정을 베풀고 가난하게 살아도 인심만은 푸짐한 시골의 여인이다.
 세상 사람이 자기를 보고 호박같다고 해도 조금도 화를 내거나 토라지지 않고 늘 봐도 헤픈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우리 누님의 얼굴이다.
 면도칼처럼 남의 심장을 찌르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현대 여성보다는 꾸밈없고 진솔한 심정을 낮은 목소리로 말할 줄 아는 그런 여인이 왠지 좋다.
 호박처럼 둥글둥글하게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는 좀 모자란듯한 여인이 우리의 누님이다.
 세상이 너무 메말라 가고 인심이 무섭게 변해간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남을 짓밟고라도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아우성들이다.
 호박이 그립다. 호박같은 인심이 그립다. 콩 한 개가 있으면 이웃사람을 불러서 기어이 나눠 주던 시골 사람들이 그립다.
 그들은 다 어디 가고 가슴에 시퍼런 비수를 품은 사람들만 서로 노려보고 있는가.
 못났어도 좋으니 호박같은 여인을 만나서 은근한 눈짓이라도 나누며 살고 싶다.
                                             -정재호 수필 <호박>전문
 '호박'을 소재로 하여 쓴 수필이지만 저속함이나 천박함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구수한 호박죽이나 호박떡 냄새와 맛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인품이요, 인격이다.
 인품은 그 사람의 본질이며 본체이다. 어떠한 치장이나 화장 또는 가식으로 감출 수 없는 성품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일정한 유형이나 모델이 있는것도 아니고 어느것이 값진 것이며 가치없는 것인가라는 척도 또한 있을 수 없다. 글쓴이의 온축된 삶의 힘이 문장으로 표현되어 나타난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간을 이해하는 태도에 의해 인품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이다.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호박'을 쓴 정재호는 창작노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수필에서 표현에 핀트를 맞추고 쓴다. 내용보다도 표현에 비중을 두는 것은 문장의 격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저속한 문장이나 산만한 표현으로는 여운을 남기지 못하고 향내를 풍기지 못한다. 예술적인 문장이 되려면 표현이 개성적이여야 한다. 남이 다 쓴 문장을 모방해서는 향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 중국(당나라)의 시인 두보가 그의 문장에 대해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겠다는 각오로 어불경인 사불휴(語不驚人 死不休)라고 표현한 것처럼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윤재천 편저 <수필작법론>493쪽
 이처럼 인품은 문장표현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문장 표현 뒤에는 글쓴이의 삶과 정신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문장 표현의 방식이 하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그것도 곧 인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장연습이 인품만들기 임이 그것이다.
  9  소설과 어떻게 다른가
수필과 소설의 차이는 전자가 사실을 다룬다 할 때 후자는 허구를 다룬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차이는 이 뿐만 아니라 문장이 구조나 글의 분량, 그리고 주제 전달의 방법 등에서도 다르다 할 수 있다.
다음의 글은 김소운의 <사실과 허구를 통한 진실한 삶의 구현>에서 발췌한 글이다.
 '진실'이란 말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 란 뜻은 아니다. 사실만을 나열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장을 이루는 것은 아니요, 하물며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예술의 방법에는 크게 나눠서 두 길이 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의 위치에 두고 정시(正視)하고 추구하려는 방법과, 허구의 유리그릇 너머로 왜곡된 가상(假想)을 통해서 하나의 진실을 발굴하려는 방법-외국문학에서 그러한 예를 든다면 톨스토이나 플로베르는 그 전자요,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같은 것은 그 후자에 속한다."
 이것은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를 두고 나 자신이 쓴 해설의 첫 대문이다.(同和出版社刊, <世界의 文學大全集>, 제8권,p.540) 다자이란 작가의 '허구의 미'내지는 '허구의 진실'을 설명하기 위한 전치사지만, 요컨대 문학이란 문장에 있어서의 허구는 결코 경시할 것도 부인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이런 서두를 앞장 세워두고 나 자신의 글이란 것을 돌이켜보면 실로 '허구'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란 반드시 사실 그대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소위 내가 쓴다는 글은 언제나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목적이 있고, 읽는 대상을 의식하면서 쓰는 글 - 그것이 과연 옳은 글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윗물을 흘려버리고 뒤에 남은 진국 -침전된 알맹이- 그것이 진정의 문장이라면, 언제나 목적의식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내 글 따위는 부질없이 흘려 버리고만 있는 한갓 '윗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글이 '사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로는, 체질적으로 공상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인간의 생활 그것을 문학이나 예술성보다는 한 걸음 앞서서 언제나 직시하고 분석하려드는 성급한 내 기질에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할 말이 너무 많고 보면 결론에 도달할 최단거리에 마음이 쏠려 '허구의 진실' 같은 복잡한 수속을 밟을 겨를이 없다고 그렇게 보아주는 이는 무척 고마운, 너그러운 지기(知己)라고 할 것이다.  --  윤재천<수필 작법론>93-94쪽  
 위의 인용문처럼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다. 자신의 체험이 정신을 거쳐 토론되는 것이지만, '허구'를 일반적으로 허락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는 뒤에서 설명될 수필의 허구성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다른 강의에서 집중적으로 강의될 것이다.) 그런데 반해 소설은 '허구'에 거의 의존한다. 작가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했다 해도 그것은 '허구' 즉 진실된 허위의 기록이다. 따라서 수필은 글쓴이의 생각이 진술되는 반면에 소설은 스토리 형태로 소설속의 인물에 의해서 상황이 기록된다.
(2) 문장의 차이
 수필과 소설은 산문문장으로 쓰여진다. 산문이란 글자의 배열이 일정하지 않는 문장이라는 의미로 운문의 반대 개념이다. 이 양자의 근본적인 문장 차이는 수필이 글쓴이의 생각의 흐름에 따라 문장의 흐름이 진행되는데 반해, 소설은 글쓴이의 생각보다는 스토리 전개의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다.
 어슴프레한 어둠을 가르며 택시는 잿빛 도로 위를 달린다. 차분히 가라앉은 거리에는 정적만이 무겁게 흐르고 있다. 은색 기둥 꼭대기에 겸허하게 고개 숙인 나트륨등이 엷은 빛을 흘려댄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 주위를 살핀다. 눈에 익은 거리다. 차창에 비치는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잇다. 아니, 거리 풍경은 잘 짜여진 시이퀀스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나를 태운 차만이 홀로 멈춰 있는 듯하다. 반대 차선에서 돌연 빈 택시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껌뻑이며 달려온다. 두 대가 엇갈리는 순간 휘익, 하고 마찰음이 빚어진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이 흠칫 놀란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정적이 찾아든다. 택시는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미동도 않고 미끄러져 간다.
                                   -김익건 <이 황량한 도시에서>중에서  
 위의 인용문은 도시의 새벽 분위기를 묘사하는 소설 문장이다. 정지해 있는것과 움직이는 것의 대비를 통해 새벽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문자 이다.
 이 글은 '나'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수필의 한 문장으로도 송색이 없을 수 있다. 수필 문장의 경우에도 묘사의 문장이라기 보다는 곧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이 도시를 활보할 것이라는 상징적인 분위기를 암시하기 위해 쓰여진 문장이다. 아래의 문장은 '아침'을 묘사한 수필 문장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실감하는 때는 아침 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걷고 창을 여는 순간이다. 나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크게 뜨고 솟구치는 생명력으로 오늘 하루를 연다.
 그리고 하늘을 날고 귀소하는 새처럼 열린 창으로 나가 하루를 뛰다가 밤이 되면 오렌지 불빛이 아른거리는 창가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면 진정한 삶의 기쁨이 창문을 닫고 어둠속에 포근히 잠들 때 나를 휘감는다.
 열리는 창. 그리고 닫히는 창. 그 창 속에는 사람마다의 생활이 있고 제각기 살아가는 기쁨과 슬픔이 맴돌고 있다. 아무리 작은   창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삶을 엮고 세월을 갈면서 변모해 간다.
 창 밖에는 항상 바람이 오가고 창 안에는 언제나 따뜻한 인정이 솟는다. 창은 밝고 솔직하여 밖의 모습도 안의 움직임도 거짓없이 드러내 준다. 그래서 열린 창 속에는 활기차고 단란한 가정이 있고 닫힌 창은 병든 폐가를 느끼게 한다.                                   -고임순 수필 <창> 서두
 위의 글은 아침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토로한다. 이렇게 같은 아침을 묘사하더라도 수필은 글쓴이의 생각 또는 감정에 따라 문장이 흐르는데 반해, 소설은 상황에 따라 문장이 전개된다.
 수필가의 눈은 예리하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어떤 사건의 주변을 우회하거나 뒷덜미를 치기 위한 준비를 마련하고 있을 때, 수필가는 핵심을 보다 정확히 찌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십인십색(十人十色), 수필가의 눈은 다른 것이다.  또한 문학이란 워낙 관념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어떤 기획하에 획일적(劃一的)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범주 내에서 질서를 이루어야 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수필문학은 형식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 장르라 하여 소홀히 대할것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의 계획하에 자기대로의 작은 규모의 형식을 세우고 개념을 확고히 하는 것이 수필을 쓰는 사람의 자세이다.
 넷째, 수필은 형식적인 수사가 필요치 않다. 수필에 있어 언어의 미학(美學)이란 있을 수 없다. 수필은 시처럼 어느 한가지 사물에 대한 형용이 필요치 않고, 그에 대한 묘사가 필요한 쓸데없는 수식을 요하지 않는다. 자칫 잘못, 수필이 이러한 수식이나 형용 따위에 현혹되어 생경(生硬)한 어휘의 나열이나 고도의 관념으로 이루어졌을 때 독자는 이러한 작품에서 공감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생활관념으로 용해된 절실한 기원, 어떤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수식이라면 몰라도 형식적인 수사나 형용은 필요치가 않다.             -윤재천 <수필문학의 산책> 48-50쪽
 위의 인용문은 '수필의 관조성'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그래서 수필문장은 관조, 통찰, 직관에 의해서 쓰여지는 언어임을 강조한 글이다. 이 이론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는바 아니지만, 수필의 문장은 어떤 장르의 문장보다도 직관적이고 관료적이다. 따라서 수필 문장은 소설 문장과는 달리 단순하고 명료하고 수식이나 형용이 필요없게 된다.
  10  생활수필, 창작실습
아래의 수필은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 전문이다. 이 수필을 읽고, 글감의 특이성, 수사적 기교의 특성, 그리고 구성의 방법을 찾아본후, 이와 유사한 소재를 생활에서 찾아 써보자.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으고 떨어져서 또 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연돌(煙突)의 붉은 빛만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줄 때가 아름다운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지릅떠 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치 않는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속에 묻혀지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족족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 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이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이 냄새가 난다. 잘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때까지든지 연기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리 속에 떠올린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메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땅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 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용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이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로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둑 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의 그 태고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겨t다는 듯이 동화(童話)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다. 늘 들어가는 집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 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알을 찧어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다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 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些事)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11  수필의 처음과 쓰기
   서두는 글의 첫머리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서두는 독자의 흥미를 갖게 하되 앞으로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암시하도록 써야 하며, 글의 내용과 목적도 논리적인 글인 경우에는 밝혀도 좋다.
 바람직한 서두의 시작은
 ① 진솔한 자기 고백적인 기술로써 글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② 대개 일반적인 글에서 많이 쓰는 방법인데 기상의 변화나 장소의 환기 등으로 사실을 직접 진수하여 글읽는 이에게 다가가는 것도 바람직하다.
 ③ 의문형의 적절한 지시 내지는 열거로 글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하는 방법도 있다.
 ④ 중국의 문장가 호적은 '전적을 이용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지만, 짧고 새로운 문구나 사항을 인용하여 참신한 느낌을 주게 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바람직하지 못한 서두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쓰려고 하는 글에 대한 장황한 배경 설명이나 불평은 옳은 글의 시작이라 할 수 없다.
 ② 글의 첫머리에 개인적인 변명을 중언부언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③ 새롭지 않은 진부한 내용이나 사상 등을 제시하는 것도 독자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서두이다
 ④ 사전적 정의를 인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⑤ 끝마무리가 예상되는 서두도 좋은 글의 시작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글이 되기 위한 서두의 시작은 자연스럽고 참신하며, 독자의 흥미를 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몬로의 5단계 구성법(motivated sequence)는 ①주의 환기 ②과제 제기 ③과제 해명 ④해명의 구체화 ⑤결언, 행동화의 촉구로 글의 서두는 주의 환기이다.
                          
 서두에서 꼭 한가지 충고하고 싶은 점이 있다. 본론과 밀접하지 않는 부분을 도입부에 넣어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는 점이다.
 요즘 명사(名士)들의 '수필'중에 흔히 그런 것이 많다. 수필을 마치 어떤 '교훈'이나 '훈화'처럼, 또는 선외(選外) 논설처럼 여겨 이건 틀렸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글들이 많은데 그나마도 핵심은 간단한데 도입부가 너무 지루해서 더욱 안타깝다. 이런 글들이 저지르고 있는 도입부의 오류는 대략 이런 것들이 있다.

 ① 공개되지 않아도 될 사생활의 지나친 공개...... 남의 사생활에 독자들은 관심이 없다. 적어도 자기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위치가 아니면 지나친 사생활을 공개하지 말 일이다. 불량품을 근절하자는 내용을 쓰기 위해서는 가장 악질적인 불량품의 예를 드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뭐 딸(혹은 아들)과 언제 어느 시장에 가서 구경한 이야기부터 집안 식구들의 인물 묘사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장 작법에서는 공사(公私)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② 극히 상식적인 것을 혼자 아는 척하고 서두를 늘어놓지 말 것...... 남이 모르거나 느끼지 못한 사실로 첫 구절을 공격해야지 진부한 것으로는 안된다. 이것 역시 소위 네임 벨류가 있다는 분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류의 하나다. 글에서 서두는 일종의 기습이요, 게릴라며, 협공이여야 성공적인 것이지 선전 포고를 한 후에 동원령을 내리는 식의 문장은 실패다.
 ③ 가능하면 도입부를 짧게 할 것...... 서론을 짧게 하라는 이야기는 현대인의 상식이다. 다 바쁜 사람들이니 요점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알베레스는 현대 소설의 특징으로 바로 이 긴장감을 들었다. 즉, 모파상의 <귀환>과 말로의 <인간조건>을 그는 비교했다. 모파상은 주인공을 등장시키기 위하여 바다의 묘사부터 마을, 골목, 집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말로는 첫 구절에서 <첸은 모기장을 들춰 올릴까? 그냥 모기장 너머로 갈겨 버릴까?>로 시작한다.
 어느 글이나 현대인에겐 긴장과 요절을 처음부터 줄 수 있어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헌영의 <처음과 끝을 하나의 線으로 연결하는 작업>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수필의 시작은 중요하며 또한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시작이다. 가옥의 대문처럼 수필 전체의 구조와 어울리는 시작이여야 한다.
 
글의 결말은 끝맺음을 위한 요약 정리, 제시로 이루어진다. 본론을 요약한다든가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며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제시 및 방향 설정도 바람직한 끝맺기이다.
 그러나 수필의 경우에는 여운을 남기는 경우, 혹은 독자들이 그 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여백을 남겨두고 끝맺는 경우도 있다. 뿐만아니라 드물게 볼 수 있는 경우이지만 소설에서 절정으로 서사를 구조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말은 주제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김희보는 <문장 바로 쓰기>에서 주제법, 감상법, 대응법, 요망법, 여운법 등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문장의 표현상 독자에게 큰 감명을 주는 것은 그 결말이다. 결말의 문장은 무엇보다 전체의 통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효과 있는 결말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① 주제법-그 문장의 주제가 되는 생각을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한번 다루어 결말을 내는 방법. 본격적인 결말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② 감상법-감상의 내용은 필자의 인품과 인생관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주는 인상은 선명하다.
 ③ 대응법-서두의 내용과 대응시키는 방법이다. 문장에 익숙한 사람은 이 방법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④ 요망법(要望法)-문장의 결말에 필자의 요망이나 희망 따위를 쓰는 것은 호소하는 문장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⑤ 여운법-여운을 남기는 효과를 내는 방법으로서 지금까지의 문장 작법의 경우 흔히 사용되는 것은 자연묘사이다. 기타 다음과 같은 방법도 흔히 쓰인다. 첫째, 반성이나 자신에 대한 훈계. 둘째
, 풍자나 비판. 셋째, 전체의 요약. 넷째,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감상의 인용. 다섯째, 격언이나 명언의 인용. 여섯째, 위트가 넘치는 문구. 일곱째, 의문문의 형식에 의한 의문의 제기.
                              김희보의 <문장 바로 쓰기>p.34
 위의 5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을 쓸 것인가는 주제나 소재, 그리고 작가의 생각에 따라 효과적인 끝맺음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제목은 글의 내용이나 성격, 그리고 글쓰는 이의 성격에 따라 집필 시작 전에 붙여질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집필이 끝난 후 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제목을 붙이는 데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은 글의 성격과 내용을 잘 나타낼 수 있어야 하며, 독자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혹은 호감을 갖게 하는 제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는 강한 인상이 남는 제목이면 더욱 좋다.
 흔히 제목을 정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에는 요지가 분명하지 않든가 아니면 분명한 느낌 없이 쓰여졌기 때문이다.
 제목을 붙이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주제를 잘 나타내는 제목으로 붙이기
 둘째, 소재로 제목 붙이기
 셋째, 시간적인 개념의 문구로 제목 붙이기
 넷째, 공간적인 개념의 문구로 제목 붙이기
 다섯째, 시간과 공간을 섞어 제목 붙이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위의 방법은 서로 중복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주제를 비유하는 제목인데 공간적 개념의 문구일 수도 있고 소재이면서 시간적인 개념의 문구일 수도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위의 패턴에 의해 제목을 붙이되 문예문의 경우에는 비유적인 표현이 적절하며, 실용문의 경우에는 주제나 소재를 제목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12  에피소우드 연결 방법
수필의 구성에 대하여 구인환과 구창환은 단순구성, 복합구성, 산만구성, 긴축구성으로 나누고 있으며 (문학개론), 신상철은 단선적 구성, 복선적 구성, 환상(環狀)적 구성, 열시적 구성, 추보적 구성, 합승적 구성, 평면적 구성, 대화적 구성, 논리적 구성, 산서적 구성, 복합적 구성 등으로 그의 저서 <수필 문학의 이론>에서 나누고 있다.
 이렇듯 수필의 구성 방법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 질 수 있다.
 구성은 구상의 미학적 배열이라 정의해 보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세분해 보면 微視的구성과 巨視的구성이 있을 것이다. 미시적 구성은 한 단락 내에서의 문장의 미학적 배열을 의미한다 하겠으며 거시적 구성은 단락과 단락의 미학적 배열일 것이다.
 이러한 구성 작업은 여러 가지 단편적인 구성요소(내용)들의 순서를 정하여 문맥이 통하게 하고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논리와 유기적 통일이 있도록 질서화시키는 작업인 것이며 나아가 고도의 구성의 기법은 짜임새의 견고성, 주제의 鮮明性,그리고 강조나 印象효과의 증대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는 기능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성을 집이나 건물의 설계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미시적 구성이 내부 설계도라면 거시적 구성은 집이나 건물의 설계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미시적 구성이 내부설계도라면 거시적 구성은 외부설계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느 누가 설계도를 무시하고 글부터 써내려 간다면 그것은 마치 설계도면을 보지 않고 무작정 집이나 건물을 짓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   
습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 설계도가 되겠지만 전문가들은 새로운 형식(구성)을 창조해 내야 마땅하다.
 이를 바꾸어 말해보면 수필 창작에 있어서의 순서의 배열(구성)은 집을 지을 때와는 그 순서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건축공사에 있어서는 기초공사 뼈대공사 지붕공사 내장공사나 같은 고정된 순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수필의 구성을 필요시는 순서를 얼마든지 달리해도 상관이 없다.
 기초공사에서부터 시작하여 마감공사를 하거나 지붕공사 같은 마감공사를 한다음 기초공사를 해도 그것이 효과를 극대화만 시킬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나 사건의 순서에 따라 평범하고도 밋밋하게 전개해 나가기 보다는 주제나 내용 그리고 작품의도 등에 따라서 다양한 구성법을 도입해 보거나 아니면 기존의 구성법에 나름의 변화를 주어 새로운 구성법을 발견해 보는 것도 오히려 효과적일 때가 많다. 가령 '수필은 역설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강조의 효과와 역설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역설적 구조의 구성법을 도입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이러니효과(ironiceffect)를 내기 위해 반어적 구성법도 구사할 수 있으며 또 필요시는 콩트식 구성의 反轉식 구성도 가능할 것이다.
 비록 수필이 짧은 글이긴 하지만 짧은 만큼 소설이나 희곡과는 달리 역비례로 더욱 구성의 다양성과 전문성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철호의 <수필창작에 있어서의 구성과 그 전개>에서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수필은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수필가 나름의 구성방법을 창의적으로 개발하여야 한다. 그것이 곧 수필의 어원적 의미인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한다'와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을 쓰는데 있어서 실제로 고민되는 부분은 서두와 결말을 어떻게 쓰느냐는 문제도 있지만 글쓴이의 체험담 즉 에피소우드를 어떻게 하면 무리없이 연결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체험담을 수필의 에피소우드로 차용할 때 우선 전제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글쓴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일이다.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일은 먼저 자신의 체험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데 에서 시작하며, 이성적 판단으로만 가능해진다. 예컨대, 초보자의 경우, 남편과의 이야기를 서술할 때 '그이'라든가 '자기'라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작가자신을 객관화시키지 못한 때 발생되는 호칭이다. 이럴 때는 '남편'이란 객관적인 호칭으로 사용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일과 자신을 단순히 자기 존재만으로 귀착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확대시켜보는 안목을 갖는 일일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뿌리를 내리고 좀더 견고하게 자신을 구축하는 작업에서 인간은 나름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좀더 진실한 의미에서의 자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와는 전혀 무관했던 대상에서 그 각각의 본질과 대상들 사이의 상관적 의미를 발견하는데서 자신의 객관화가 구체화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들에 대한 언어 형식적 포용과 종합을 통하여 어느 하나 동떨어져 나동그라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구성이고 가장 확실한 조직인 것이다.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작업이 구성인 만큼 아무리 좋은 소재라 할지라도 구성의 기법이 제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수필이 내포하고자 했던 예술성은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만다.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고 체계적 논리를 갖고 있을 때 글은 단순한 언어 조합체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이다.
                      -윤재천의 <수필 문학에 있어서의 구성전개에서> 
그리고 두 번째로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유기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한편의 수필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우드는 여러 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의 주제를 나타내기 위한 유기적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야 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아무리 충격적이고 신선한 에피소우드라해도 하나의 실로 꿸 수 없는 구슬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한다.
  수필에 삽입되는 에피소우드는 소설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은 글쓴이의 구체적인 체험담이며 실화이기 때문에 글쓴이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수필의 허구성 문제와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부분이다. (수필의 허구성 문제는 제 39강에서 강의된다.) 그리고 진실성, 정직성 등 글쓴이의 인격과 직접 관련되는 부분인 만큼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어떤 체험담을 차용할 것인가에 깊은 생각이 요청된다.
13  수필의 정서와 사상
수필에 있어서 무엇을 쓸것인가 하는 문제는 주제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인간의 정서와 사상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라 할 때 그 문학성 문제는 간과 할 수 없으며 또한 서정 혹은 정서는 수필의 기본이다.
 수필의 문학성이 "감동과 정서의 의미있는 질서의 가치화에 있다"고 본다면, 수필 창작에 있어서 '정서'의 도입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정서'의 사전적 의미는 '감정의 실마리' '사물에 부딪혀 일어나는 온갖 감정'(sentiment) '생각을 따라 일어나는 심적현상'(emotion)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정서'란 희,로,애(哀),락,애(愛),오(惡),욕(慾) 이른바 인간의 칠정(七情)이라 풀이할 수도 잇다. 그리고 이것의 문학적 처리형태가 곧 '서정'(抒情, 敍情) 이란 양식으로 나타나는 셈인데 시에서는 서정시로, 수필에서는 서정수필로 나타나는 것이다.
 논리적 수필이 지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서정수필은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또한 논리적 수필이 객관적이라면, 서정수필은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정서'의 수필화는 포멀 에세이 쪽이 아니라 임포멀 에세이에서만이 가능하다. 가령 생활 수필이나 개인수필에서 쉽게 서정수필을 찾아낼 수 있는 영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서정수필을 쓰려면 첫째로 정서적 환기력이 있는 소재선택이 필수조건이다. 그런 소재로써 쉽게 선택되는 것이 인간사와 자연사이다. 인간사에서라면 가령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나 잊을 수 없는 일들이 그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사라면 가령 자연의 경관이나 어떤 자연물이나 동식물에서 느꼈던 강한 인상이 그 소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육친이나 친구 그리고 떠나간 연인에 대한 애틋한 정이라든지 또 슬펐던 일, 즐거웠던 일 그리고 괴로웠던 일 더 나아가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을 통한 인생의 은유적 의미성의 발견이나 자연의 도덕적 해석 또는 자연의 이치나 철리에 대한 관조형식이 그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일단 이런 소재의 선택이 있었다면 그 다음 단계가 바로 서정성이 있는 주제의 설정이다. 역시 정서적 환기력이 있는 주제는 기다림, 그리움, 외로움, 기쁨이나 즐거움, 괴로움이나 아픔, 슬픔, 안타까움, 허무감, 체념, 애절성, 서러움, 상실감, 무정함, 정한(情恨), 꿈이나 이상 등이 될 것이다.
  소재에서 주제가 설정되었건 주제에 맞는 소재를 선택했건 그 다음 단계가 바로 시점의 설정이다. 누구의 시각에서 보고 느낀점을 담아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미풍같은 아니면 찰삭이는 해조음 같은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는 일인칭 시점이어야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유식의 <서정수필의 미학>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정서적인 수필은 신변잡기적인 미셀러니적인 수필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정적 자아인 '나'의 시점에서 쓰여지게 되고 그럴 때 표현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서적인 수필을 쓰는 작가로는 피천득, 윤호영, 윤모촌, 윤재천,등 감성적인 수필가 들이다. 이호우의 <등꽃 아래 앉아서>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밝은 아침이다.
   화단에 물을 뿌린 다음, 발을 씻고 등나무 아래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여 문다. 하늘은 아득히 푸르고 아지랭이를 벗어버린 산들은 어딘지 먼 곳으로 생각을 손짓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가슴 꽃다발처럼 안고 소낙비보다 눈부시게 햇볕을 맞으며 어디라 자꾸 걷고만 싶은 풋풋한 아침, 햇순들 연연한 나뭇가지에 새들은 와서 노래하고, 함초롬히 이슬을 먹은 뜰에 꽃들은 다투어 피어, 마음은 한갓 아름다운 인정을 그리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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