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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
2018년 02월 13일 20시 57분  조회:1801  추천:0  작성자: 강려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
 
 
  들뢰즈는 자신의 사유를 강화하기 위해 많은 개념어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유를 따라잡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또한 분열증적인 글쓰기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상당히 난삽하기도 하다. 그의 글쓰기는 이성에 의해 구조화되고 질서화된 의식이 표출되는 논리적인 문체적 특징을 벗어난다. 이는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사유와 감각의 분열을 일으키는 인간의 원자적 특성들을 표현하는 현대시와 유사한 점이 있다.
  현대시라는 말의 이면에는 기존에 것에 대한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시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논리적인 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대신 인간의 순수하고 원초적이고 광기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비춰내려고 한다. 시인은 이런 무의식을 자신의 작품에 드러낸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시인의 욕망의 언어는 무의식의 시학일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가 진단하는 글쓰기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발현과는 다르다. 들뢰즈에게 글쓰기는 무의식과 의식의 교차로서 체험한 경험의 재료에 표현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완전한, 언제나 형성적이기에 중간에 있는, 그리고 어떤 체험 가능한 혹은 체험한 경험의 재료를 넘어서는 생성 혹은 되기의 문제가 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아이가 된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에서 시인은 프로이트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는 여성과 아이, 혹은 동물이 되고,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시인은 국가철학적인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아이와 동물이 된다.
  시인은 또한 여행가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지도를 그린다. 상상 속의 여행지든 실제적인 여행지든 그곳을 통과하면서 시인은 자연과 삶과 합일을 이루는 새로운 생성을 활성화하면서 지도를 그린다. 이런 여정은 들뢰즈가 말하는 지도의 의미를 갖는다. 지도는 단순히 길의 형상을 그대로 그린 것도 아니고, 지표면의 형상을 정확히 재현한 것도 아니다. 시인은 지도그리기에서 길의 형상과 지표면의 형상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즉 체험 가능한 혹은 체험한 것들을 그대로 나타내는 재현의 권력에서 탈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재현은 창조적 가능성을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지도그리기는 창조적 가능성이 잠재된 생산적인 글쓰기여야 하고, 시인은 전형화된 형식과 표현에 탈주선을 그려야 한다. 이는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이 실재화되는 경우이다.
  글쓰기의 창조적인 탈주선은 우리의 지도를 구성하기도 하고, 시 창작에서 시인이 타자가 되듯이 자신을 구성하게 한다. 시인의 글쓰기는 다양한 출입구가 그려진 지도이자 리좀이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나면서, 수목적인 나무와 달리 자신의 어떤 지점과 다른 지점을 연결 접속한다. 리좀은 단어와 단어, 어구와 어구, 행과 행을 연결하면서 아주 상이한 기호체제들뿐만 아니라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지도이자 리좀적인 글쓰기는 전통적인 문체의 접근과는 다르다. 들뢰즈는 문체를 언어의 연속적인 변이 과정으로 접근한다. 그에게 있어 문체는 변이 속에 언어를 배치하는 과정이고, 변조이며, 통사론의 질료이다. 언어의 연속적인 변이의 과정 속에서 문체는 개인적인 심리학적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배치이다. 들뢰즈가 문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바는 보편적인 형식의 언어 속에서 문체라는 형식의 변이선을 가동함으로써 새로운 표현 형식, 새로운 언어들을 창안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미지와 리듬을 강조하는 시의 언어이자 시의 문체가 아니겠는가!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에서 김혜영은 여성이라는 언표행위의 배치 속에서 금기화된 성담론을 여성적 언어로 전통적이고 남성적인 성담론을 해체하고 희화화한다. 더불어《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황병승은 선형적인 서사성을 해체하여 들뢰즈의 분열적인 글쓰기와 같은 리좀적인 서사구조를 통해 제도적인 통사적/의미적 틀을 무너뜨린다. 이 작품들은 이런 면에서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을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다.
 
 
1) 프로이트 욕망, 삐딱하게 보기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중첩을 통한 분석은 새로운 이야기 꾸미기가 될 수 있다. 들뢰즈의 프로이트 욕망에 대한 비판은, 모든 욕망이 본질적으로 성욕에만 집중된다는 것, 모든 욕망이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 아버지는 법과 질서, 문화, 문명을 대변하는 자이고, 아버지에 의한 일차적인 욕망의 억압은 하나의 상징계로서 문명화된 모든 인간적 질서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과 같이 세 가지로 압축된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성욕, 어머니에 대한 욕망, 절대적인 상징적 아버지에 집중한다. “당신의 숨소리 날 삼켜보실래요?”(“동백섬”), “허벅지의 3분의 2지점에서 가로선이 잘리고 두 팔은 다 드러나지요 뭉클하게 처진 젖가슴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배치되어 있네요”(“토르소”), “야릇하게 꼬물거리는 여배우 입술을 쳐다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슬그머니 내 허벅지에 손을 갖다 대었어”(“오랜만에 쓰는 근육들”), “전쟁이 시작되었네 사춘기 꼬마가 침대에 두 손이 묶여 있네 수음하는 아이의 떨리는 눈동자 목사 아빠가 저녁 식가를 금지하네 하얗게 질려가는 아이들 [중략] 아빠, 귀걸이가 필요하지 않아요 난 엄마가 아니예요”(“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 다락방에 앉은 바둑판 엄마의 잠옷 밑으로 손을 넣는 사자”(“별자리”), “눈이 파란 꼬마가 누나에게 묻네 사랑하면 물어뜯는 거야? 목덜미를 깨무는 아빠는 죽지 않는 거지?”(“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아버지는 얼룩, 보이지 않는 시선”(“별자리”).
이 시들을 프로이트적으로 분석하면 욕망과 무의식으로 수렴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억압된 욕망은 무의식 깊은 곳에 남는다. 깊숙한 무의식에 처소하는 욕망은 꿈이나 환상 등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재현되거나, 문학이나 예술에서처럼 암묵적 혹은 암시적 형태로 재현되거나, 법에서 금기하는 부정적 형태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게 된 욕망은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드러낼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다양한 표상들로 재현된다. 이런 결과로 삶은 무의식이 펼쳐지는 하나의 극장이 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작품도 무의식의 극장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이 하나의 절대적 상징계이기에 억압된 욕망의 무의식이 하얀 종이 위에서 춤을 춘다는 대응은 얼마나 작위적인 등가식인가?
  프로이트의 이러한 정신분석은 들뢰즈가 제기하는 네 가지 기호체제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네 가지 기호체제 중에서 전제적인 기표적 기호체제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에서 남근(혹은 전제 군주)이라는 기표는 다른 기표들이 잠정적이나마 기의를 갖도록 고정시키는 기표가 되어 특권적인 중심의 역할을 한다. 이런 식으로 들뢰즈는 기표적인 기호체제의 중심에 전제 군주의 기표가 있다고 한다. 그 기표는 전제 군주처럼 모든 기표의 자리를 할당하고 그것의 의미를 주거나 박탈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기표는 전제적 기표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표에 수렴될 뿐이고, 그 무서운 권력의 중심점에 아버지가 현존한다. 아버지는 푸코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자 권력이다. 그의 시선은 푸코의 일망 감시체제와 마찬가지로 규율과 훈육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낸다. 그는 주체를 구성하는 대타자이자 주체를 공포에 떨게 하는 절대적이고 폭군적인 초자아다. 다양한 의미적 접근은 거부되고 오직 하나의 의미, 다시 말해 기표는 오직 본질적으로 하나의 중심적인 기표, 특권적인 기표로 환원된다. 아버지의 기표로. 이러한 기표적인 기호체제를 들뢰즈는 편집증적인 체제라고도 하고, 전제 군주적인 체제라고도 한다.
  황병승은 “아빠”에서 이러한 중심적인 기표인 아버지의 기표를 탈영토화한다. “[중략] 아빠 하고 부르면/ 우선 배가 고프고/ 아빠하고 부르면/ 아빠는 없고/ 아빠라는 믿음으로/ 개 돼지를 잡아먹는/ 먼 나라의 아빠 숭배자들처럼/ 먹어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아빠를 … [중략] ”(《트랙과 들판의 별》 77). 아버지의 의미가 위계적인 상징적 질서의 중심점에 있다면, 아빠의 의미는 그 질서를 탈영토하여 친밀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친밀한 아빠조차도 “아빠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채 아버지의 상징성을 흔적으로 간직한다. 이중적인 의미로서 “아빠”는 절대적인 폭군과 동일한 아버지라기보다는 분열된 주체의 다양한 양태를 대변하는 표상일 뿐이다. 이렇게 시인은 중심적인 기표인 아버지를 탈주하여 다채로운 분열적 기표들을 생산한다. 이러한 분열적인 주체로의 탈주는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을 암시한다.
  들뢰즈의 욕망은 존재자체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을 갈구하지만, 그 대상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프로이트의 욕망이 아니다. 그의 욕망은 다양한 접속을 통해 신체가 작동하는 것이다. 신체와의 접속을 통해 욕망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성적 욕망으로만 치환되지 않는다. 접속하는 항(혹은 상황)이 달라지면 다양한 욕망이 생산된다. 황병승의 “멀고 춥고 무섭다”에서 분열된 주체인 음악가 ㄱ, 음악가 ㅁ, 음악가 ㅂ 처럼. 들뢰즈는 욕망과 기계를 하나로 연결한다. 절단하고 접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기계이다. 가령 입-기계는 절단하고 접속되는 방식에 따라 말하는 기계, 먹는 기계, 사랑하는 기계가 된다. 다른 접속에서 다른 욕망이 생산된다. 욕망과 기계가 혼합된 욕망하는 기계는 무한한 잠재적 공간 속에서 접속에 따라 긍정적인(혹은 부정적인)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그것이 무엇과 접속하는 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며 분열된다. 그 결과 기계화된 욕망의 본성이 이웃항에 달라지기도 한다. 즉 어떤 기계를 둘러싼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욕망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욕망은 고정된 어떤 본성을 갖지 않고, 관계에 따라, 접속되는 이웃항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김혜영이 프로이트를 활용해 법과 무의식의 해방을 욕망하듯, 황병승이 분열된 주체를 통해 동일화된 주체의 해방을 욕망하듯, 욕망은 그 배치에 따라 다양하게 꿈틀거리며 분열된다.
 
 
2) 기호이야기
 
  들뢰즈는 기호체제를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 탈기표적인 정염적 체제, 전기표적인 원시적 체제, 반기표적인 유목적 체제와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한다. 프로이트의 욕망에 근거한 남근적 혹은 전제적 기표는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이고, 이에 대조적인 기호체제가 탈기표적인 정염적 체제이다.
  기표적인 체제는 전제적인 특징을 갖는다. 기표들이 중심적인 기표로 환원하는 것은 전제 군주 체제에서 쉽게 드러난다. 전제 군주의 말 혹은 기호는 신하와 사제들에 의해 무한히 해석된다. 하지만 전제 군주는 그 해석들을 하나의 의미로 통합할 수 있다. 전제 군주는 의미화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는 기표가 기의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갖는다. 비록 기표가 무한히 미끄러지더라도 전제 군주의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 기의는 소용이 없다. 오직 전제 군주의 말 혹은 기호가 법이자 신의 계시가 된다.
  탈기표적인 체제는 기표적인 의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체계다. 이는 기표적인 권력에 익숙하게 길들어져서, 그 권력에 복종하던 것을 중단하기에 배신의 체제라고 불린다. 탈기표적인 체제는 탈주선에 의해 시작되는 체제이고, 지배적인 의미작용과 확립된 질서 세계를 거부하고 배신하는 체제이다. 비록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탈영토화하지만, 자기-동일화적인 주체화 과정에서 기호들은 해석되고 재영토화된다. 기독교의 교리를 자기 본의로 해석하여 사리사욕에 열중하는 사람들과 같이, 탈기표적인 체제에서는 자기 주체적으로 기호를 해석하기에 다양한 해석이 생산되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기호체제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혼합된다. 오직 기표-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의미만을 추구할 수 없거니와 기표의 계속적인 미끄러짐을 통해 무한한 의미작용 또한 가능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끊임없이 간섭하고, 서로에 대해 되작용하고, 서로를 각자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속성은 김혜영의 “기호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당신이란 상상 속의 기호를 혼자/ 사랑했지요. [중략] 만 년이 지난 뒤/ 무의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 당신이란/ 기호가 꽃으로 피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당신이 흡혈귀처럼 내 피를 빨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십오 년이 지난 가을이었죠./ 당신만 피를 빠는 줄 알았는데 난 당신의/ 다리에 붙어서 이(邇)처럼 당신의 살갗에/ 혀를 갖다 대곤 했죠. 당신이란 기호는/ 중세의 흑기사처럼 남도를 따라 가다가/ 해가 떠오르는 새벽에 입맞춤을 했지요./ 당신이란 기호를 기다리며 붉은 와인을/ 식탁에 놓고 멍하니 바라보곤 했지요./ 밤마다 낡은 옷장 문을 열고 내려와/ 이부자리에 나란히 눕는 당신이란 기호는/ 거대한 박쥐가 되어 천장으로 올라갔지요./ [중략] 얄밉기도/ 하지만 당신이란 기호가 오래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지요. 혼자 찬밥을 먹는/ 중세의 겨울 저녁을 견딜 수 없을 거야./ 당신이란 기호를 그리워하는 또 하나의 기호.”(“기호이야기”)
  시 속에서 “당신”은 하나의 기호이다. 시인이 “당신이라는 기호”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라는 기호는 시인이 체험하거나 상상한 수많은 경험들과 사유들이 농축되어 있기에, “당신”은 기표적인 의미화로 해독될 수 없다. 여기서 “당신”은 탈기표적인 체제의 흐름을 갖는다. 즉 “당신”은 기표 차원보다는 시인의 상상과 사유 속에서 형성되어 있는 기의 차원의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이것을 기호이야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기호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기호이야기라고 한 것은 “당신”의 의미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의 연인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적인 속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또한 시인이 그리워하는 “당신”은 “꽃”, “흡혈귀”, “이”, “흑기사”, “박쥐” 등의 질료로 표상된다. 이러한 질료들을 통해 “당신”은 미움과 애정이 점철되기도 하고 사랑이 가득차기고 하면서 강밀한 주파수와 공명을 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점에서 “기호이야기”는 일대일 대응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탈기표적 속성이 강하지만, 추상화된 사랑과 그리움의 관례적인 의미를 완전히 탈주할 수 없기에 기표적인 의미화 속성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안정적으로 구축된 1몰(mole)의 원자 혹은 분자 속에 6.02×1023 전자의 인력․척력과 주파수․공명처럼, “기호이야기”는 예속화된 해석을 거부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이야기지만 사랑과 그리움의 의미를 충만하게 가득 채우면서 재영토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파수의 떨림과 공명이 충만한 언어적 표현은 황병승의 “문친킨”에서 두드러진다. “문친킨”은 들뢰즈가 강조하는 언어를 더듬거리게 하는 방식을 잘 드러낸다. “[중략] 문친킨 문친킨/ 스위트 워러의 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말을 자주 중얼거린다/ 배고플 때/ 외롭거나/ 답답할 때/ 잠이 오지 않는 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일 때/ 뒤죽박죽으로 출렁거릴 때/ 담배를 뻑뻑 피우며/ 문친킨 문친킨 … 하고 말이다 [중략]”(“문친킨”). 문친킨이 “무슨 뜻이든”, 문친킨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리듬 같이 떨림과 공명을 주는 “문친킨”이라는 기호는 의미의 탈영토화 뿐만 아니라 통사적 구조의 탈영토화를 구현한다. 동시에 “시적 언어의 원시적 에너지, 혹은 마법적인 신비를 보유한다”(《트랙과 들판의 별》 210). 이는 감각과 사건이 일치하여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자 제도화된 언어를 탈주하는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하나의 기호는 김혜영의 “토르소”에서 풍경과 중첩되기도 한다. “[중략] 뭉클하게 처진 젖가슴/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배치되어 있네요/ 사막의 능선을 닮은 허리와 엉덩이의 구조/ 어때요? 난 뮤즈예요/ 사막에 드문드문 나 있는 잡초처럼 검게 처리된 음모/ 흑백 사진 안에 내 얼굴은 없어요/ 심장이 멎을 듯 떨리던 입술, 화면을 사로잡는/ 시선이 없어도 당신을 소유할 수 있지요/ [중략] 드디어 1분, 당신은 카메라 셔터를 닫는군요/ 시간은 잠시 어항 속에 넣어두었죠/ 선인장이 꽃을 피웠군요/ 사막에는 오래 전에 죽은 소의 머리뼈가 누워 있군요/ 난 뮤즈에요. 얼굴이 없는”(“토르소”).
이 시에서 신체는 사막의 풍경으로 탈영토화하고, 사막은 신체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 “메 웨스트의 얼굴”에서 얼굴이 풍경을 이루듯이, 이 시에서 신체는 사막이라는 풍경을 이룬다.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로 이 시를 해석한다면, 이 모델의 신체는 성적 대상일 뿐이다. 미적인 성이 저급한 포르노 사진으로 포획되는 것과 같이. 그 결과 이 신체의 풍경은 욕망을 성욕으로만 수렴하는 권력의 기호가 된다. 하지만 이 신체가 티치아노 회화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처럼 부드럽고 격조 있는 시선을 가진 누드모델의 고운 신체라면, 그것은 미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세잔의 풍경화처럼 자연적인 풍경화로 탈영토화하는 신체가 될 것이다. 이 또한 탈기표적인 체제와 기표적인 체제가 적절하게 만나는 경우이다.
기호와 풍경이 중첩되는 다른 경우는 황병승의 “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이다. “[중략] 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 그녀는 금방 사랑받고 금방 잊혀진다/ 어둠 속, 한 여자가 울고 두번째 여자가 울고 세번/째 여자가 뛰쳐 나간다/ 기침 끝없는 기침처럼 거울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서로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 여기서 자아의 얼굴과 거울에 재현된 얼굴은 일치하지 않는다. 분열된 주체의 흐름처럼 다양한 재현된 얼굴을 거울은 반사시킬 것이다. 기표가 기의를 미끄러지듯이. 들뢰즈는 얼굴-언어 개념을 통해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를 왕(혹은 군주)의 얼굴과 상응시킨다. 성난 왕의 얼굴은 절대적 기표를 의미하고, 이 얼굴은 하나의 풍경으로서 권력적 기표를 나타낸다. 왕의 얼굴-언어는 전제적인 권력적 풍경을 표상한다. 이러한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를 배신하는 기호체제가 탈기표적 기호체제이고, 이 체제에서 얼굴은 성난 왕의 얼굴을 돌아선다. 즉 돌아선 얼굴은 탈기표적 기호체제와 상응한다. 이 시에서는 돌아선 배신의 얼굴이 아니라, 동일화된 재현을 거부하며 근원적인 자아와 마주보면서 침을 뱉는 얼굴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을 거부하는 배신의 형태로서. 이러한 얼굴 이미지는 분열된 주체를 묘사하는 풍경으로서 배치와 사건에 의해 리좀적인 흐름을 추구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생성적인 주체 이미지를 대변한다.
 
 
3) 되기 혹은 생성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사유하려 했던 사람들이었고, 고체적인 안정성을 추구하던 사람들과 반대로 액체적인 유동성을 잡아타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고정화된 존재가 아니라 유연한 되기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사이에 벌어지는,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내재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영토화되고 변이하는 삶을 촉발하는 것이다.
되기는 이렇게 자기 동일적인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이 되는 것이고, 어떤 확고한 것에 뿌리박거나 확실한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되기는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근거에서 벗어나 탈영토화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뿌리와 수목이 아니라 리좀을, 정착이 아니라 유목을, 경직된 위계질서적인 홈 패인 공간보다는 수평적이고 유연한 매끄러운 공간을, 관성이나 중력에서 벗어나는 편위를 선호하고 강조하는 것은 되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생성을 사유하고 생성적 삶을 산다는 것은 영속성과 항속성, 불변, 기초, 근본 등과 같은 초월적인 중심적 단어들과 별리하는 것이고, 변이와 창조, 새로운 것의 탐색과 실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되기는 이렇게 하나의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의 문턱 넘기이다. 되기는 권력적이고 수직적인 남성성에 대치되는 여성, 아이, 동물과 혼합된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가 있다. 여성-되기는 김혜영의 “becoming”에서 잘 드러난다. “[중략] 소녀 때부터 달마다 반복되는 일/ 우주 하나가 몸 안에 태어나/ 그믐달 지는 밤 스르르 죽었나 보다/ 분홍색 나일론 팬티를 사다주신 아버지/ 붉은 꽃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날/ 두개골을 쪼개고 지나가는 두통/ 사춘기를 통과하는 소녀의 호기심/ 남자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척추를 지그시 누르는/ 묵직한 억압은 어디서 올까?/ 인형의 시체가 가득한 쓰레기통/ 아이를 기다리는 둥근 방의 울음/ 늙지 않는 소녀가 복제되는 천국/ 소녀의 속눈썹 파르르 떨리고/ 소년의 뒷모습이 뇌리에 박힌다/ 인형처럼 아이를 낳는 시대/ 불법 복제된 첫사랑의 멜로디/ 왼쪽 눈에 새까만 음표로 떠다닌다”(“becoming”).
이 시는 소녀가 사춘기를 통과하며 호기심 어린 육체적 사랑을 통해 여성이 되는 과정을 성적인 측면에서 다룬 것이다. 차이나는 것만 되돌아온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소녀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자아로 탄생한다. 고정적이고 초월적인 주체를 부정하는 들뢰즈와 같이, 주체는 다양한 사건과 배치를 통해 유동적인 흐름을 타는 자아로 변형되거나 생성된다. 이 시의 소녀는 비록 사랑과 성이 일치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남성 중심적 성을 거부하고 그것에 대한 해방을 실현하기에 능동적인 자아의 생성을 추구한다. 즉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거부하면서 다양한 잠재적 가능성이 실재화되는 하나의 능동적 여성-되기를 구체화한다.
동물-되기는 “현무, 강서대묘 널방 안벽 벽화”에서 잘 표출된다. “죽어서도/ 한 몸이 되고 싶었을까/ 사향이 풍기는 거북의 뒷다리 사이로/ 뱀이 머리를 쑥 밀어 넣는다/ 젖무덤 같은 거북의 등짝을 휘감고/ 앞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반원을 그린 후/ 고개를 뒤로 젖힌 거북의 입술과/ 뱀의 입술이 마주 선다/ [중략] 죽은 연인의 입술에/ 봄바람 후우 불어/ 북방 아득한 곳에 태어나/ 하늘무덤 별자리로 회귀하는 현무/ 죽어서도/ 한 몸이 되어 살았을까”(“현무, 강서대묘 널방 안벽 벽화”).
시인은 시를 쓰면서 동물이 된다. 현무는 암수가 한 몸이고 뱀이 몸과 다리에 칭칭 감겨 있고 다리가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무는 암수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양과 음의 조화. 시인은 현무가 암수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동물-되기를 통해, 상수(constant)와 항상적인 관계만을 부각시키며 척도와 규범으로 현재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남성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욕망한다. 이는 또한 프로이트의 권력적인 무의식으로부터의 탈주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김혜영과 유사하게 황병승은 제도권적인 기성세계의 고착화된 사상을 거부하고 비판하면서, 동물과 아이 되기를 자신의 시에 표현한다. “[중략] 죽어도 좋아,/ 주먹을 내려다보는 소년/ 사라지는 달콤함의 시간들/ … 너의 티셔츠에선 언제나/ 검은 줄무늬 고양이 냄새가 나”(“고양이와 자라는 소년”). “당신이 내지르던 그 야단스런 음계들이 뭘 의미하는지/ 꿈에서조차 나는 알고 싶지 않는데, 나는 두드린다!/ 어린이날이라고/ 당신은 나를 피아노 앞에 주저앉히고/ 나는 더 세고 강하게!/ 두드려도 괴롭고/ 두드리지 않아도 괴롭고/ 당신은 그저 즐거워, 한다 어린이날 기념 독주회라고/ 우리 아이는요 금세 피아노의 주인이 됩니다 보세요/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전자는 동물-되기, 후자는 아이-되기가 드러난다. 이 시들은 기성세대 권력의 무의식적 환영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작가의 탈주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 속에 은폐된 환영이나 환상이 해방되어 유희하는 가장 대표적인 시가 김혜영의 “파라다이스”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삐거덕거리는 강의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햄릿의 집(Hamlet House)으로 달려갔다/ 햄릿을 읊조리던 청춘들이 막걸리를 마셨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유령처럼/ 미리내 골짜기에 홀러 다녔다/ 회색빛 우울이 번지던 군사정권 시절/ 오필리어처럼 자살을 꿈꾸기도 했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예순 살의 소녀와 소년들/ 워즈워드, 바이런, 셀리가 지은 책은 숲에서/ 블록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끝이 없는 길에서/ 만난 우리들은 서로 꼬옥 안아주었다/ 리어왕 복장을 한 교수가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외설스러운 말장난을 흉내 내었다/ 구멍을 파는 자여, 무덤을 파는 자여/ 촘스키의 통사론을 열강하시는 교수의 입술에서/ 하얀 꽃이 뛰어나왔다 어깨에 묻은 분필 가루/ 그는 나뭇가지를 칠판에 그렸다 학생들은 노트에/ 그린 나뭇가지를 연애편지에 그려 넣었다/ 폭풍의 언덕으로 질주하던 소녀와 소년들의 머리에/ 희끗희끗 풀잎이 돋아났다 환하게 열린 봄바다/ 고도를 기다리는 과거와 미래의 청춘들/ 효원 광장에 앉아 베게트와 버지니아 울프와/ 플래스가 쌓은 블록으로 푸른 숲을 만든다/ 긴 복도와 콰이강의 다리/ 미리내 계곡 너머 별이 춤추는 파라다이스”(“파라다이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클로디우스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고 분열적으로 변한다. 오필리어는 햄릿의 배신으로 인해 미쳐 버린다. 환영이나 환상에 지배된 두 인물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환영과 환상에 지배되어 늘 비극을 맞이해야만 하나? 시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환영과 환상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만든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소녀와 소년은 낭만주의 시인인 워즈워드, 바이런, 셀리의 작품들을 읽는다. 하지만 전형화 돼버린 낭만주의 시에는 답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서로 간 우정의 접속만을 확인한다. 또한 촘스키의 통사론 강의를 들지만 생성문법의 위계질서적인 나뭇가지를 리좀적인 사랑의 나뭇가지로 변형시킨다. 축제는 계속된다. 축제가 열리는 봄의 공간은 탈영토화의 공간이자 접속의 공간이며, 보이지 않는 권력에 무의식이 억압될 필요가 없는 순수 매끄러운 공간이다. 국가장치의 수목적인 특성을 갖는 홈 패인 공간에서 해방된 소녀와 소년은 전쟁기계의 유목적인 매끄러운 공간을 표현했던 작가인 베게트, 버지니아 울프, 플래스의 작품들을 읽는다. 이들 작가가 됨으로써 해방의 공간 파라다이스로 향한다. 이 공간은 보링거의 추상적 선이 부각되는 고딕건축처럼 촉감적이고 유목적인 공간이자 매끄러운 접속의 공간이 된다. 이로써 축제의 공간은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이 잠재된 긍정의 공간이 된다.
  생성적 공간은 물론 수목적인 홈 패인 공간이 아니라 유연한 매끄러운 공간이다. 이 공간은 황병승이 표현하는 공간인 길과 광장이다. 길과 광장은 국가철학으로 재단할 수 없고, 유목적 사유가 유희하는 곳이다. 이런 유목적 사유는 특히 황병승의 “트랙과 들판의 별”에 구체화된다.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그러니 모든 길과 광장은 더러워져도 좋으리/ 술병과 전단지와 색종이 토사물로 뒤덮여도 좋으리/ 창가의 먼지 쌓인 석고상은 녹아버려라/ 거추장스러운 외투와 속옷은 강물에 던져버려라/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배척된 채로/ 배척된 채로”(“트랙과 들판의 별”). 여기서 시인은 초월적인 국가철학을 의미하는 석고상, 외투, 속옷을 던져 버리고자 한다. 배척된 채로 현존할 지라도, 유목적 사유가 가능한 트랙과 들판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 삶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패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과 연대를 통해 창조적인 생성이 발현하는 희망을 암시한다.
 
  새로운 사유를 구현하는 시는 새로운 사유의 감각을 촉발하고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변용시키며, 우리가 새로운 사유의 리듬에 적절하게 감응하게 만든다. 프로이트를 자기 변용화한 김혜영의 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응을 촉발시키는 강밀함과 공명을 준다. 프로이트로부터의 탈주를 갈망하는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재현으로서의 프로이트가 아니라 들뢰즈가 강조하는 생성으로서의 프로이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내해 준다. 마찬가지로 황병승도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사건과 사건의 리좀적인 접속을 실현하고, 서정적인 측면과 서사적인 측면의 혼종 교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 꾸미기를 구현하며, 리듬적인 언어의 더듬거리기를 통해 통사적 구조를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언어를 창안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들뢰즈의 생성적인 창조적 시학을 구체화하는 시도가 아닐까!
 
 
 
저자: 사공일- 부경대학교 국제지역연구소 연구교수(영문학 박사)
주요작품들
번역-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일반예술》(2006)과 주디스 슈클라의《일상의 악덕》(2011)
저서-《들뢰즈와 창조성의 정치학》(2008)
논문- 〈들뢰지와 연극: 언어와 몸짓의 변이〉,〈질 들뢰지의 재현, 잠재태, 그리고 연극의 정치학〉, 〈핀터의 The Dumb Waiter : 푸코의 권력의 전략〉, 〈들뢰즈 관점에서 본 푸코의 권력 이미지〉등 1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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