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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전환, 하이퍼, 파괴 / 이경진
2018년 05월 05일 21시 12분  조회:1724  추천:0  작성자: 강려
{공유} 전환, 하이퍼, 파괴  / 이경진

1. 들어가는 말 
*( )는 전부 주(注)이므로, 참고할 것. 이글은 <문학과 창작>2002.7월호에 발표된 글임.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듯, 2차원의 세계는 곡률(曲率)이 없으나 3차원 공간엔 곡률이 존재한다. 그래서 세 각의 합은 180°가 아니라 그 보다 커진다. 여기서 결정론의 환상이 무너진다. 지구는 3차원 공간이며 우주는 다시 4차원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곳에 가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란 형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모든 게 휘어지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들은 지동설 시대에 교육을 받았으며, 삼각형 세 각의 합은 180°라고 배워왔다. 그들은 무슨 무슨 법칙이나 원리를 암기하며 성장해 온 세대이다. 아직도 그들은 확실성에 익숙하며, 중심과 주변, 주와 객을 따지는데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편이 아니면 남이거나 적이라는 편협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대, 질서를 무질서로 전환하는데 인색한 세대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비슷비슷한 사유의 한계, 상투적인 이념의 한계, 안일과 나태로 함몰된 철학성, 낡은 감수성, 고갈된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치열성이 사라진 자리엔 실험의식이나 새로움을 창조할 여력조차 남지 않는 법이다. 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기성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은 어떤가.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치유하고 극복할 대안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시인들을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기성세대처럼 비본질적인 문학의 행태에 안주하지 말고, 끝없는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실험의식으로 무장하길 바란다. 기성의 안일에 오염되지 말고, 새로운 상상력의 집을 지어주기 바란다.

그들의 선배들이 실패한 혁명가로 전락했던 원인을 제대로 읽고,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 혁신이 없는 전통주의에 물들거나 협소한 지방적 근성에 사로잡히지 말기 바란다. 
이 글은 70년대에 출생하여, 현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조망함으로써, 그들의 가능성을 진단하고, 특히 기성세대와의 변별성을 찾기 위하여 쓰여진다. 특히 상상력의 구조를 주목할 것이며, 그들만의 독특한 사유방식을 하이퍼텍스트 세대의 특징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작가 선정 및 작품 선정은 《문학과 창작》(2002. 7월호)에 의거했음을 밝힌다. 


2.하이퍼 텍스트 세대의 사유 

(하이퍼 텍스트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는 텍스트의 블록들(Roland Barthes는 이것을 렉시아〈lexia. 어휘소〉라고 불렀다)과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킨 전자적 연결점들로 구성된 텍스트를 나타낸다 : 조지 P 랜도우《하이퍼 텍스트 2.0》여국현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 p14. 
하이퍼텍스트는 디지털 사회를 해석하는 중심개념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매체와 장르를 초월한, 기존의 인쇄물 텍스트에서 한층 발전된 텍스트 형태이기 때문이다 : 류현주《하이퍼텍스트 문학》김영사. 2000. p32.) 

우리는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으며, 시대의 인식소(episteme)가 변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동요인은 디지털화와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조정> 때문이다. 이 시대는 중심과 주변, 위계질서, 그리고 선형성의 사상적 토대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그것들을 다선형성, 결절점(nodes) 
(결절점(nodes), 結節(결절)이란 살갗 위로 내민 망울이란 뜻. (nod)는 점의 머리(点頭)의 뜻. 따라서 결절점은 그물망의 매듭이나 바둑돌의 점들을 생각하면 좋다. 컴퓨터 전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듭과 점들은 좌우, 상하로의 수평적 확장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수직적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얽힌 무수한 관계의 매듭이 결절점이다.)

, 링크(links), 네트워크와 같은 개념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텍스트는 기표들의 은하군이지 더 이상 기의들의 구조가 아니며, 시작과 끝이 없는 구조, 전복이 가능한 덩어리들, 어느 것이 중심이라고 명시할 수 없는 권위의 파괴를 주장한다. 따라서 텍스트는 한정되거나 결정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작가 중심적이거나 구어적, 권위적인 글쓰기의 시대가 급격히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조는 이미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우주 탐사의 놀랄만한 성과들, 천문학과 물리학의 비약적인 발견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갈릴레이>나 <보이저>의 탐사 결과 태양은 태양계를 지키는 노쇠한 왕이었으며,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태양계 밖에는 다시 천만 개의 계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런 사고야말로 유치한 ‘지방적 근성’ (칼 세어건의《창백한 푸른 점》민음사. 1996 에 근거를 둔다. 우주의 비밀이 벗겨질수록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가 우주의 대표성을 지니는 것 또한 아니란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세계의 보편적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 독단에 빠져있거나, 세계의 중심이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고 생각하는 우매한 편견이 바로 지방적 근성이다. 동양의 고사에 요동지시(遼東之豕)란 말이 이런 상태와 흡사하다. (옛날 중국의 요동땅에 살던 농부가 돼지를 길러 새끼를 얻었는데 그중에 흰돼지 한 마리가 끼어있었다. 신기하여 황제에게 진상해야겠다고 황하를 건넜다. 그랬더니 황하 남쪽의 농가엔 흔해빠진 것이 흰돼지 아닌가) 이형기《존재하지 않는 나무》고려원. 2000. p154) 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가 정해진 전형을 요구하거나 권위나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계질서를 요구하는 횡포이며, 거기서 혁명적인 상상력의 신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거울 안에 우울한 표정의 鐵男이 서 있었다 
모공에서는 강철털이 솟아올라 
온몸이 고통의 전율로 떨고 있었다 
차고 단단한 車體와 같은 살갗 위로 
꿈꾸는 달빛이 불길한 무늬를 그렸고 
강철로 된 손톱이 피부를 뚫고 나왔다 
그는 벨벳 커튼으로 달빛을 가려 막고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까닭 없이 배가 고팠다 견딜 수가 없었다 
시계를, 핸드폰을, 라디오를, 
VTR을, 텔레비전을, 컴퓨터를 먹어치운 뒤 
鐵男은 꽃병 속의 도청기와 
천장 속에 감춰진 몰래 카메라도 삼켜버렸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군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안의 
怪獸들처럼 보였다 패스트 모션으로 움직이는 
半人半獸들이 지나쳐 갔다 
세계는 鐵男이 움직일 때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곤 했다 
골목 어디에선가 외투, 중절모, 가죽 장갑이 
빠져나와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킬러들의 螢光 눈빛이 벌레 소리를 내며 
대기 중으로 날아올라 그를 찾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무쇠뿔이 솟아 있었다 
견갑골 쪽에서도 금속성의 통증이 밀려 왔다 
어디선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달렸다 거리의 모든 것들을 쓰러뜨렸고 
부딪치는 모든 것들이 그의 망치 주먹에 
부서졌다 네 바퀴 怪獸들의 연쇄 충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13명의 兒孩들, 
부서진 소화전 위로 뿜어져 나오는 물기둥, 
찢어진 자동차의 앞자리에서는 용암처럼 
눅진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 저지선이 설치되었다 
앰뷸런스 소리, 경찰차 소리, 총 소리 
人間 兵器는 자신의 벅찬 숨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견갑골 위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장이지 <鐵男> 


장이지의 상상력은 하이퍼텍스트의 시대를 실감나게 구현한다. 그래서 낯익은 풍경들마저 낯설다. 저건 기성에서 보아온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선한 한 편의 디지털 영상이다. 그래서 한 컷 한 컷이 속도감 있게 흘러간다. <철남>은 누구일까. 그건 장이지가 발굴해 낸 새로운 짜라투스트라다. 
그렇다. 인류문화의 목표는 수평화된 행복에 있지 않다. 더 이상 이상국가란 부재한다. 오직 상황이 인간에게 부여한 고통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개성의 천재, 짜라투스트라만이 필요하다. 그는 시지프스적 존재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문제적 주인공’ (루카치의 용어이다.) 
이기도 하다. 
때로 파괴는 창조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모두들 파괴를 두려워한다. 그것이 타성과 관습을 낳는다. 전통적이란 미명의 멍에를 씌운다. 그래서 시인은 관습의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 
현대를 규정하는 담론이 폭력이라면, 더구나 파괴가 절실해진다. 그래서 <철남>은 이 시대의 홍길동이며 장길산이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라 외로운 대중이다. 다수이면서도 동시에 혼자인 왜소한 인간이다. 현대의 공포와 저주에 맞선 불안한 인간, 그래서 그는 <철남>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다. 이 멋진 반전을 보라.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 모르는 그는 소외된 현대인이며, ‘통증’을 느끼는 자다. 그는 누굴까. 무잡하고 황량한 시대의 시인, 그 슬픈 초상은 아닐까. 


나는 걷는다, 명동의 벽돌로 된 육감적인 
길을, 또각 소리를 내며, 그림자를 
보며 걷는다, 내 침묵은 뒤뚱거린다, 

“베벨 질베르토의 「탄토 템포(Tanto tempo) 있나요?” 
묻고 나는 다시 침묵의 날갯죽지를 살핀다, 
“만 칠천 원입니다.”, “고마워요.” 
말 ‘하는’ 것보다 침묵 ‘하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랜, 아주 오랜, 

나의 시는 자장가처럼 들린다, 독이 든, 
나의 한국어는 모퉁이를 돈다, 나의 
한국어는 외롭고 異國의 언어처럼 
들리고 잿빛이고, 진짜 그렇다, 


장이지 <탄토 템포> 중에서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철남>이란 어휘의 작위성, (이 시대가 온갖 작위적인 것들의 결합이나 링크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미지를 구성하기 위해 삽입된 억지스런 행위들이 그렇다. 
내가 장이지의 시를 주목한 이유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그건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낯선 상상력의 힘이다. 좀 거칠면 어떤가. 새로운 세대란 이런 발랄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며, 방향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탄토 템포>는 화상 위로 떠오르는 정보들, 문자들, 그리고 다시 소실되는 화면의 구성을 시각화하고 있다. 그쪽에도 일정한 템포가 있을까. 사유의 방황이 존재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 템포란 시인의 자기투쟁을 암시한다. 자꾸만 단절되는 언어의 마디처럼 템포는 끊긴다. 끊겼다간 이어진다. 그것이 컴퓨터 화면의 속성이다. 그것은 배반의 언어에 대한 애정이며, 불구가 되어버린 모국어를 향한 연민이다. 그건 시인 내면의 ‘소리’이며 ‘그림자’다. 
아니다. 그건 뒤뚱거리는 ‘침묵’이며, 사유하는 점들이다. 이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부호들의 결집은 그래서 시각적 잔상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 잔상 효과란 무엇인가. 관습적 의미망의 해체와 중심 허물기가 그것이다. 


그 겨울 내내 잠을 자도 羽化하지 못했다. 애벌레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병실 창문으로 간신히 스며들던 햇살을 흰 옷소매로 털어 냈다 어머니 창문 좀 닫아주세요 다알리아 화분을 입에 물고 어머니가 병실로 들어왔다 약 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2월의 나무들, 날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들었다, 슬금슬금 장미 이파리 위로 기어 다니는 벌레의 뒷다리, 꿈속에서, 신경 세포와 세포 사이로 추락하는 벌레의 신음 소리. 잠자지 않았는데 간호사가 아침 밥을 은쟁반에 담아왔다 자기들끼리 키들거리는 간호사들, 어머니 제발 집에 가서 주무세요 
306호 병실 사람들은 자판기 커피액처럼 한군데서 잠들었다 간호사 누나, 잠자는 주사 한 대만 놔주세요 아무 데나 쏟아져 있는 커피의 흔적, 늦게 잠자고 일찍 일어나 병원 앞마당에서 보건 체조 했다 창문 틈으로 나뭇가지가 만져졌다 새벽 이슬에 몸 적시고 있는 벌레들이 알약처럼 녹는 소리를 들었다 나무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옹이 박힌 다리로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나갈 수 없는 새벽, 철문으로 닫혀진 병동 끝에서 성장이 멈춘 나무가 되었다 곪아 가는 상처에 입을 대고 앉아 더 깊은 고름을 빨고 있는 나무가 되었다 잠자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걸 보았다 


박진성 <나쁜 피> 


<나쁜 피>는 한없이 가벼운 세계, 곧 일상화, 획일화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 ‘나쁜 피’의 원인은 유전적 형질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 책임의 한 끝에 전통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환유인 ‘어머니’가 서있다면, 또 다른 쪽엔 생명의 연장을 위해 복용되지만 결국은 피를 오염시키고 마는 ‘약’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시의 근원적 갈등은 ‘어머니’와 ‘약’으로 수렴되는 현실, ‘병실’로 대치된 감금의 세계로부터 ‘羽化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그곳에 존재하는 세계상이란 그래서 환자의 모습이다. ‘약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2월의 나무들’이나 ‘신경세포 사이로 추락한 벌레’가 그걸 대신한다. 
그래서 그 현실은 불구의 모습이며, 뒤틀리거나 어긋나버린 세계다. 잠을 자도 꿈속으로 날지 못하듯 잠자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세계인 것이다. 이 시대란 전광석화같은 스피드, 광고의 유혹과 소비의 충동, 그리고 편리와 안락을 향해 문이 열려있다. 그래서 모든 게 풍족하고 화려하게 빛난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비판적 성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사회라도, 생산된 재화와 쓸 수 있는 부의 양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회는 구조적 과잉과 구조적 궁핍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과잉된 것은 신의 몫, 제물로 바치는 부분이 되거나 사치스런 지출, 잉여가치, 경제적 이윤 또는 위세과시용 예산이 될 수 있다. 어느 한 사회의 부와 그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이처럼 미리 떼어낸 사치부분이다. 왜냐하면 그 부분은 항상 특권 있는 소수의 몫이며, 카스트나 계급특권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장보드리야르《소비의 사회》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1. p59.) 

하지만 그것이 마냥 좋은 것인가. 시인 박진성의 세계관이 미더운 이유를 나는 먼저 밝혀야겠다. 그는 획일화된 욕망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 속에서 그가 발견한 건 ‘자판기 커피액처럼 한군데서 잠든’ 현대인의 모습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보편적 세계관, 객관적 질서로부터 이반된 사람이다. 객관적 질서 속에 끼어있는 상투성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같은 빛깔로 물드는 ‘커피의 흔적’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병든 세계의 환부를 스스로 아파하며 ‘고름을 빨고 있는 나무’다. 그러므로 그는 외로운 소외자이며, 문명의 은택으로부터 버려진 ‘성장이 멈춘 나무’다. 누가 ‘벌레들이 알약처럼 녹는 소리를 들’을까. 어쩌면 그는 진심으로 이 시대를 연민하는 사람은 아닐까. 
누가 젊은 세대의 사유를 가볍다고 속단하는가. 박진성은 다르다. 그는 기성세대의 문법에서 확실히 비켜선 채, 새로운 세대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티피컬한 매너리즘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시인과 오브제 사이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보라. 더구나 탄탄한 의미망의 결속력과 결구의 능력도 이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진성의 빛나는 에스프리는 그 밖의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당신은 지금 
유성신경정신과 창 너머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 
내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 
공황장애 안내문 아래서 
내 영혼의 인화지 같은 백지를 
당신의 무거운 침묵으로 채워 넣고 있다 
항우울제의 날들은 다 지나갔다고 쓰고 있다 
거리에는 신경안정제 같은 눈발 날리고 
유성신경정신과 전문의 박동희 의사는 다음 환자 
박진성을 찾고 있는데 
당신은 계속 편지를 쓰고 있다 

항불안제의 불안함과 항우울제의 우울함 속에서 
당신은 무덤을 파듯 볼펜으로 
종이 위의 내 영혼을 파고 있다 
한 삽 더 파면 심장, 또 한 삽 더 파면 
心根… 자꾸만 깊은 곳으로 
당신의 펜대를 집어넣고 있다 
들어오세요 당신의 자리입니다, 
좁은 여백 위에 썼다가 지운 글씨를 더듬는다 
당신은 유성신경정신과 창 너머에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푸른 촛불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박진성 〈알프라졸람을 먹기 6분전, 혹은 6년전〉 


<알프라졸람을 먹기 6분 전, 혹은 6년 전>의 경우를 보자. 시인에게 이 시대란 ‘공황장애’와 ‘항우울제의 날들’로 환기되는 신경질환의 세계다. 그러한 시대상황에서 마침내 시인 자신도 환자가 된다. 문맥 속에 끼어든 시인의 돌연한 출현은 ‘유성신경정신과’란 구체적 공간을 통하여 긴장이 증폭된다. 
그러나 시인의 질환이 무엇인지가 밝혀진다. 애매하지만 그 질환이란 바로 시쓰기를 연상시키는 어떤 행위다. 그것이 세상과 변별성을 유지하는 시인의 진실인 셈이다. 심근경색(心筋梗塞)은 관상동맥의 통로가 막히는 병이다. 시인은 여기서 기발한 착상에 당도한다. 심근이 염통벽의 힘살이 아니라, 심근(心根), 곧 마음의 뿌리로 대치되는 것이다. 
시인의 질환이란 마음의 뿌리에 이르는 통로가 막힐 때 신경정신과적 질병에 걸린다. 그러므로 그걸 치유하는 길은 ‘종이 위에 영혼을 파’거나 ‘펜대를 집어넣’는 일이며, 그곳이 환자(시인)의 자리가 된다. 그래서 수술의 흔적은 결국 ‘썼다가 지운 글씨’인 것이다. 


병원은 가스관이 묻힌 사거리를 품고 있다 포크레인은 가스관을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애완견을 가슴에 품은 미망인은 신호를 기다린다 인부들의 손짓이 기사에게 세밀한 부위를 알려준다 농협 건물의 옥상엔 버리기 쉽지 않은 건축 자재들이 쌓여 미망인은 애완견의 머리를 자식처럼 어루만진다 동네 어귀 그 흔한 소문으로 나는 그녀의 치부를 동정했다 화재는 1년 전 일이다 보도블록의 잡초처럼 발길 드물게 솟는 상처들 섣부른 치기였다 관을 통해 가볍고 충동적인 가스는 땅속을 흘러 다니다 돌발적이다 담을 타고 오르는 등나무 줄기들 집요하다 나는 어제 저 사거리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나의 자학은 막다른 자괴에 있다 인부들은 낮술을 먹고 미망인은 횡단보도의 선을 밟지 않으려 엉거주춤 걷는다 가스관 위로 포크레인은 흙 한줌씩 넣는다 수술 자국 위로 돋은 실밥을 당겨보면 달빛 촘촘히 올라온다 매설은 애증이거나 욕망이다 


최승철 <가스관 묻힌 사거리> 


최승철의 작품도 새롭고 낯설다. 그의 시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본다. 이것은 최승철의 바로 앞세대 시인, 박정대 시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최승철은 박정대와 구별되는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과 암호를 몇 겹으로 매설하거나, 이야기를 집요하게 숨기는 은유적 전략이 그것이다. (박정대(1965~ )의 『단편들』(세계사. 1997) 속엔 〈거울 속에 빠진 양조위〉〈아비정전〉〈동사서독〉〈타락천사〉〈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등, 영화를 소재로 하거나 영화의 주변을 탐색한 작품들이 주종을 이룬다. 박정대가 기존의 영화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최승철의 이 작품은 시적 암시와 은유적 전략을 채용하여, 하나의 시나리오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시인은 왜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걸까. 그는 시적인 것의 마지노선, 시적인 상황과 비시적인 문법의 아슬한 경계를 안다. 아니다. 어쩌면 최승철은 시와 소설의 장벽을 허무는 시, 시와 영화의 틈새를 메꾸는 시, 그런 새로운 장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반드시 최승철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양식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는 그만의 실험에 골몰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런 방식의 시적 실험이 특히 이 시대 시인들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누가 영상미학을 거부할 것이며, 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한 영상을 간과할 수 있는가. 오히려 시와 영상은 상상력의 보완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 시의 독특한 아름다움 또한 이런 영상 효과에 있다. 
화소를 이루는 이 시의 구성방식도 특이하다.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거나 딴전을 피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거나 비약적인 연상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리게 하거나, 다양한 경로의 유추를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글을 쓰는 나 또한, 다양한 경로의 유추 가운데 한 경우를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먼저 ‘가스관’은 ‘가볍고 충동적인’ ‘욕망’의 집결 장소다. 그것은 ‘등나무 줄기’와 마찬가지로 ‘돌발적’이며 ‘집요하다’ 중심 인물인 ‘미망인’은 ‘선을 밟지 않으려’고 바장이지만 위태롭고 힘겨워 보인다. ‘선’은 물론 탈선을 암시한다. 그녀는 ‘흔한 소문’으로 시달린다. 그 소문의 은유가 1년전의 ‘화재’다. 화자에겐 그녀의 치부마저 ‘동정’의 대상이다. 
이제 잘 꾸며진 한 편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여기서부터 시인의 상상력이 거침없이 빛을 발한다. ‘나’는 가스관이다. 아니 등나무 줄기다. 그래서 1년전 화재와 시적 화자는 깊은 관계를 지닌다. 그녀의 상처가 사실은 나의 ‘수술자국’이었으며, ‘포크레인’의 흔적이다. 소문의 잔해인 ‘화재’는 가스관이 묻혀있는 한 언제나 재발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화재는 ‘달빛 촘촘히 올라’오는 충동, 혹은 ‘애증’이거나 ‘욕망’인 것이다. 
드라마틱하게 뒤엉킨 매설의 경로란 이처럼 상징적 인서트들, 또는 은유적 회상 화면으로 강화된다. 


보이지 않는 나리, 나리, 개나리 
여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아 고마운, 
다음 생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독한 悽然 
마디마디마다 곧 떠나도 될 날들 
황사 속으로, 선잠 속으로 하늘이 내려와 또아리 틀면 
잔가지에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열어 
뭉게구름 같은 나비떼 만날 수 있으려니 
나리, 나리, 개나리 속으로 
당신의 혀처럼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새싹들 
문득 다운 받은 봄 하늘에 봉분 쌓여 
서러워진 자리, 나리, 나리, 개나리 


최승철 〈개나리 입에 물고〉 중에서 


이같은 최승철의 연상력은 <개나리 입에 물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연상기법은 추억을 객관적 상관물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잔 가지에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연다거나 ‘당신의 혀처럼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새싹들’에 에 이르면, 그의 투사능력이 얼마나 정밀한가를 눈치채게 된다. 새로운 시대의 시는 구문법이나 상상력 자체가 이처럼 새로워야 한다. 응당 최승철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1.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업고 신작로에 서 있었다. 커다란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었다. 짚가마니 썩은 냄새가 났다. 미루나무 아래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아버지 검은 뒤통수에 대고 나는 물었다. 저기,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 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셨다. 아버지는 구멍, 숭숭 뚫린 메주통, 곰팡이 포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까치집에서 달이 돋았다. 받아라 네 어미다, 아버지는 지푸라기로 여자를 엮어 내 목에 걸어주셨다, 어머니. 


2. 첫사랑 

나는 팔을 뻗어 달을 집어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졌고 순식간에 나는 깜깜해졌다. 나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그녀 뒤로 다가섰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어, 다시는 수음을 하지 않겠어, 나는 떨며 돌멩이를 움켜잡고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달이 내 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반짝, 꽃들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그녀가 웃었다. 내 몸 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 나는 들고있던 돌멩이를 들어 내 성기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내 몸에선 석유 냄새가 났다. 나는 흐느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게, 검게, 꽃물 드는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최금진 <월식> 


최금진의 신화적 상상력은 일품이다. <월식>이란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 달이 가리워지는 자연의 신비다. <월식>은 많이 쓰여진 소재다. 그중에서도 김명수의 <월식>(1977)이 돋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금진의 <월식>은 그 시와도 다른 각도의 신화적 상상력을 지닌 시다. (김명수의 「월식」(1977)은 사나이인 지구가 곧 가해자이며, 여성인 달이 곧 피해자로 설정된 심리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침해를 받음으로써 비로서 완성된다는 에로티즘의 차용도 볼만하다. (이경교《즐거운 식사》두남. 2002. pp45~46을 참고할 것) 
이에 비하여 최금진의 「월식」(2002)은 지구의 그림자와 달의 겹침을 남녀의 성교행위로 대담하게 대치한다. 이때 성교는 남성의 죽음으로 그려지며, 성교의 유사행위로 수음이 연상되는 등, 앞의 시보다 공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최금진은 신세대적 주술을 즐겨 쓴다. 그만큼 언어운용도 구태의연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이미 독자적이다. 신세대 시인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바로 이런 독자성의 구축이다. 
<1. 어머니>에서 달은 어머니이며, 월식은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된 독특한 기억이다. 어머니는 과연 죽었을까. 그러나 그건 불분명하다. 달이 여성의 상징인 것은 오래된 관념이다. 그래서 월식과 여자의 죽음을 대치하였을 것이다. 그럼 죽은 여자는 어머니였을까. 그것도 애매하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성이 또한 현대시의 특징이다.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란 질문은 고도의 메타포어다. 그것은 월식의 종료와 함께 달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뜻하기도 하지만, 뜻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교 장면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박상륭이 <죽음의 한 연구>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성교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경교〈새로운 세기의 문학을 위하여〉위의 책. pp268~277을 참고할 것) 

이러한 징후는 문맥 속에 치밀하게 삽입되어 있다.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는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건 바로 여근 속에 흡입된 남근이미지다. 달에 의해 삼켜졌던 아버지가 뱉아지는 순간은 월식의 종료 시점이며, 그것은 죽었던 어머니의 부활 시점이다. ‘받아라 네 어미다’가 그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는 지구의 대치이며, 어머니는 달과 동일시 된다. 더구나 ‘썩은 냄새, 메주, 곰팡이’의 냄새가 환기하는 성적인 무드는 <2.첫사랑>으로 계속 연장된다. 
<2.첫사랑>에서 월식은 화자의 성적 욕망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1.어머니>에서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동일시다. 그것은 달밤에 이루어진 ‘수음’에 대한 연상이다. 그 연상이란 행위하고 싶은 욕구와 수음으로 끝나버린 체험 사이에 달처럼 떠있다. 수음 순간의 몰입을 ‘깜깜해졌다’고 말한 것은 달이 곧 여성이며, 여성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그것이 월식의 어둠이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성욕이란 일종의 살해의식인 셈이다. 그러나 달과 내가 한몸이 되는, 곧 배설의 순간, 내가 그런 것처럼 달 또한 제빛을 회복한다. ‘내 몸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석유냄새’와 ‘꽃물드는 밤’이란 배설의 기억이며, 월식에 대한 뜻밖의 해석이기도 하다. 
드라마적 구성과 상징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이채롭거니와, 감각적인 해석은 그의 뛰어난 자질이다. <고흐와 함께하는 달빛 감상>에서 ‘모든 색의 혼합인 어둠’이라거나 ‘비릿한 석양’이라고 말한 것도 모두 이런 자질의 산물이다. 


3. 주변인들 
(여기서 주변은 변두리(outskirts), 변방 등을 뜻하는 말로 중심(中心)과 반대개념으로 쓰인다. 따라서 주변은 고정이 아니라, 유동적 태도이며 정신이다. 전근대적 사유의 출발이 중심 세우기에서 비롯된다면, 정보테크놀러지 사회의 특징은 중심의 해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출발은 로고스 중심주의를 무너뜨린 탈구조주의에서 그 전조를 찾을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이 유목민에서 출발하듯이 현대의 네티즌들이 웹써핑에 몰두하는 행위는 신유목민적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이 바로 주변인적 특성이다. 역사와 문화를 순환의 과정으로 볼 때, 문화는 중심의 옹호가 아니라, 주변의 탐색에서 그 풍요로움을 회복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시와 시의 생산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태도들이 그것들의 환경을 제공한 특정한 형식의 정보테크놀로지와 시적 기억의 테크놀로지에서 산출되었다는 걸 안다. 다만 우리는 그 시대 문화적 바탕에 기대어 읽고 쓰며 사유하는 주변인들인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한 것은 상황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감지하였으며 주변인적 숙명을 읽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적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정보의 테크놀로지는 일깨운다. 현대 물리학의 한 정점에서 타자중심적 사고, 곧 혼돈이론과 만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미래의 시가 나가야할 방향도 여기서 찾아진다. 나를 앞세울 때 시는 이야기로 전락하며, 장황한 설명으로 퇴행한다. 따라서 말만 많아진다. 그래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공허하거나 공소한 넋두리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결정론의 허울만 남게 되는 셈이다. 
미래의 시는 선형성이 아니라 다선형성을 지향해야 한다. 진리란 결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주변을 주목해야 하며, 타자중심적 세계관을 배워야 한다. 더 이상 환상은 실재의 반개념이 아니라, 실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자각하자. 시적 상상력은 과학이 미칠 수 없는 우주, 지하핵이나 바다밑을 향하여 뻗어나가야 한다. 시의 형식과 내용도 다채로우며 자유분방해야 한다. 
과거의 어떤 유형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며, 독자나 평론가의 구미에 응하지 않아야 한다. 그 근거를 밝히면 이렇다. (강한시는 상식적 삶과의 관계나 요구로부터 분리된 영역 안에 존재한다.) Rorty : Beyond Postmodern Politics. Routledge. 1994. p48.) 
(독자로서의 대중이나 독자로서의 평론가들은 작품의 1차 생산자가 아니다. 더구나 대중에겐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을 뿐 창조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경교. 앞의 책. pp298~299 참고할 것.) 
가능하다면 과거와 전혀 다른 실험의식으로 충만해야 한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에게 이 점을 당부하고 싶다. 


사랑이란 별 게 아니더라구요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라는 세 가지의 화학물질이 분비돼 형성되는 일종의 정신 상태이죠 이 화학 물질이 분비된 뒤 2년 쯤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지요 그러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보다 화학 물질 생성이 느리다고 하지요 당신 남자의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는 지극히 이성적이지요 2년 뒤 당신 남자의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는 거예요 

슬퍼하지 말아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잖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요 시간이 약이에요 2년 뒤에는 당신에게도 항체가 생성될 테니까요 


박서진 <항체, 생기셨나요?> 


박서진의 상상력은 분업화 시대, 인터넷 혁명의 시대 상상력이라 부를만 하다. 세밀한 분석, 하나의 관념을 집중적으로 분해하려는 태도가 그러하다. 이것은 모든 개념이 정밀화, 속도화된 인터넷 정보의 산물이며 소프트 웨어 시대의 반증이다. (여기서 비트(bit)와 나노세크(nano sec) 비트(bit)는 컴퓨터의 데이터 통신상 최소단위. 인간으로 비유하면 하나의 세포에 해당하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최소단위 원자와 흡사한 개념. 나노 세크(nano sec)에서 sec는 second, 즉 ‘초’의 약어. 나노는 그와 반대로 아주 짧은 찰나에 비견될 수 있다. ) 
로 상징되는 단위의 축소와 시간의 축소가 가능해진다. 
이 시대란 통합이 불가능하며, 전인(全人)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감성적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대신, 과학적 정보방식으로 사랑을 대치한다. 느린 템포의 시적 진술은 정보를 유출하기 위해 시인이 차용한 전략인 셈이다. 
말하자면 사랑을 원거리에서 조망하던 과거와 달리, 그는 세포와 분비물에 대한 감응, 그리고 시간과 항체의 상관관계로 사랑을 해부한다. 가히 현미경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사실은 디지털 사회를 해석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작품 <활짝 웃었다>에서 소리와 시간을 집요하게 추적한 태도도 바로 그것이다. 
컴퓨팅의 특징이 모든 정보를 물질적 표면 위에 물질적 표시로 저장하기 보다 전자적 약호들로 저장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박서진의 시에서 독자가 만나는 ‘사랑’의 경로는 여러개의 블록들과 연결점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텍스트성이다. 독자들은 그의 시와 연결된 가상적 링크 속에서 자극과 반응을 나타내면 될 뿐, 어떤 결정도 유보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연은 거슬린다. ‘슬퍼하지 말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요’에서 독자를 간섭하려는 의도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우리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전형적인 설명이다. 
열린 시의 가능성이 하이퍼텍스트 세대의 상상력이라 한다면, 더구나 그것이 디지털의 속성이라면, 그렇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걸음마 걸음마>는 앞의 시들과 달리, 너무나 구시대적 발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막이 오르자 
한 남자가 칼을 갈고 있다 
푸른 부싯돌에 달빛이 서리고 
쭈그린 남자는 비장했다 
<20년이 흐른 뒤> 
남자는 아직도 칼을 가는데 
수염이 허연 그의 사부가 무대에 나와 
한수야, 네 원수는 이미 늙어서 죽었다 
와하하하하! 
칼은 난초처럼 빛나게 허공을 가르는데 
방청객들은 박수를 치면서 웃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폭폭한 얼굴로 대문을 열어주려 
꼬부랑 꼬부랑 걸어 나온다 
박수 소리는 어디에도 없는데 
적들은 구름 보다 빨리 늙고 
나는 그 비운의 칼잡이처럼 
중얼거리는 것이다 

저것은 누구의 얼굴인가 
저것은 누구의, 칼자국인가 


이지현 <어떤 코메디> 


젊은 시인들의 감각은 역시 다르다는 느낌을 이지현의 시에서 본다. TV에서 본 <코메디> 프로그램도 시가 된다. 이지현의 문장력, 어휘구사력은 새롭다. 그건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첫 번째 자질이다. 
시인에게 한맺힌 원한이란 무엇이며, 원수는 또 누구인가. <어떤 코메디>의 도입부에서 이미 그 전제가 주어진다. ‘원수’란 표적의 상실과 ‘박수’ 사이의 허탈감이야말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차연’을 떠오르게도 한다. 
‘칼은 난초처럼 빛나게 허공을 가르’다니! ‘무사’와 시인 사이엔 어떤 상관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원수’의 자리에 대치된 ‘아버지’의 등장을 기억하자. ‘적들은 구름보다 빨리 늙’는다지 않는가. 
저질 코메디는 어떻게 고상한 시가 되나? 여기서 시인의 재구성 능력, 소재를 버무리는 독특한 안목과 만난다. 제2연을 날렵하게 끼워넣어 시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 도사린 트라우마를 부각시킨다. 
이거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다. 실존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며 에토스에 대한 전복적 반격이다. 이 시를 새로운 충격으로 흡수하게 하는 힘은 이러한 전복에서 우러나온다. 
그것은 습성화된 관습을 빗나가게 만드는 시인의 분방한 상상력 때문이다. 이것이 젊음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로 환유된 기성에 대한 적의조차도 눈부시다. 권위와 폭력에 대한 그 저항은 아름답다. 의당 젊은 시인은 그래야 한다. 
그러한 신세대적 감수성은 마침내 ‘신은 발이 네 개’<병상일기>란 잠언을 낳는다. 하지만 <중앙시장>은 지난 시대로 갑자기 퇴행한 느낌이다. 그것은 기형도식 우울과 감상으로 몸이 쏠린 탓이다. 시인의 모습이 갑자기 왜소해진다. 


나뭇잎 아래로 여자가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큼지막한 잎사귀를 젖히고 간다. 
여자가 지나간다. 
파란 열매가 송이송이 맺혔다. 
여자는 잎사귀 아래로 지나간다. 
바람은 불기도 하고 
안 불기도 한다. 
대신 여자의 소매 없는 원피스가 하얗게 나풀거린다. 
여자가 지나간다. 
달콤하고 물기 가득한 열매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저 가고만 있다. 
여자가 벌써 저만큼 가고 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문지방을 밟고 선 그것처럼. 
자꾸 저만큼 가는 여자는 조그맣기도 하다. 


윤예영 <길은 조금 휘어져 있었고> 


윤예영의 작품에선 미로찾기, 혹은 수수께끼적 상상력이 엿보인다. 생활양식이란 본질적으로 수수께끼의 영역이며, 삶이 미로찾기의 과정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것은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풍경이란 우리 눈의 조리개를 거치는 동안 수용되거나 배제된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 자체가 이미 선택적 여과를 거친 정신적 현상이다. 이 시는 시인의 해석에 의해 새롭게 의미화된 내면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숨은 그림의 음화와 양화처럼, 의미는 담담하면서도 신비롭게 교차된다. 나뭇잎과 여자가 길 양편으로 펼쳐지고,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아니다. 길을 이루는 건 열매나 아지랑이다. 아니다. 길을 가는 건 여자다. 
컴퓨터 화면 위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동영상처럼 시인은 일체의 관여를 자제한다. 시인의 판단은 유예되거나 정지된다. 이러한 에포케의 설정이란 세계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직결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긍정과 부정의 교란일까. 양가치적 심리의 착란일까. (희랍철학에서 유래된 판단중지(epoke)와 심리학에서 ‘망설임과 머뭇거림’을 뜻하는 양가치 심리(ambivalence), 그리고 혼돈(chaos) 이론의 중심개념인 비예측성 사이엔 놀라운 일치와 유사성이 엿보인다. 서로 다른 학문의 영역 안에서, 서로 이질적인 동기와 개념으로 만들어진 이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수렴하려는 의미는 인과론적 결정론과 확실성에 대한 부정이며, 실재와 법칙으로 규정되는 리얼리즘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걸까. 자연의 요소들, 모든 대상들, 이 시대를 구성하는 의미들, 그 모든 것들은 사실 확정할 수 없으며 예측불가능한 비예측성을 전제로 한다. 시인의 안목이 이런 배후를 지니고 있다면, 그의 사유는 신뢰할 만 하다. 
<소를 찾는 목동과 석류 열매 한 광주리>를 보면, 나의 이런 예감은 어느 정도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굳이 <심우도>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양파를 ‘자기를 벗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대상으로 해석한 걸 보라. 이 시인이 차용한 미로와 수수께끼는 감각의 편리함을 떨쳐냄으로써, 얻어진 성찰의 산물이다. 하지만 동화적 발상이 장황한 설명과 뒤엉킨 건 이해할 수 없다. 지루하거나 공허하다는 건 깊은 고민만이 풀 수 있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소리 하나가 나의 뒤꼍을 슬그머니 지나간다. 발길 뜸한 영선암 처마 끝에 깃들이는 풍경 소리 같은 영혼이 마음의 목젖에 고요히 내려앉는다, 깃을 턴다. 뒤돌아보니 블라인드 몇가닥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나부끼는 바람의 속살을 파고들고 있다. 할퀴어대는 손톱질이 격렬하다. 끌어안는 손아귀의 힘줄이 완강하다. 보지 않고 들을 때에 한없이 부드러웠던 가락, 영혼의 목젖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던 소리의 배후가 서울 한복판 빌딩의 9층 창턱에서 찢겨 너덜거리고 있다. 저 소리의 참혹한 장면을 맞바라보는 순간, 이로써 관계 하나가 시작되었다. 


김지혜 <격렬함에 관하여> 


존재란 관계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타자의식에 대한 주문이다. 물론 관계의 양상이란 복잡하고 미묘하다. 시인이 포착한 것은 뜻밖에도 ‘소리’와의 ‘관계’다. 그리고 그 소리의 배후에 ‘바람’이 있었다는 확인이다. 
바람은 남성성으로 각인된 그리움이거나 상처이며, 무의식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을 뒤흔드는 아니무스이거나 ‘격렬함’으로 환유된 체험이다. 김지혜는 느낌을 구상화하거나, 하찮은 장면을 전의식의 깊이로 확장하는 연상능력이 뛰어나다. 
대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야말로 이 시대의 정서에 부합된다. 현대성의 두드러진 한 징후를 성(性)으로 간주할 때, 그 미세한 감각의 세부 속엔 에로티즘이 숨어있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미지의 행간에 이야기를 삽입하는 테크닉도 수준급이다. 
문제는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이런 부류의 시들을 우리는 80년대 중반이후 많이 읽어왔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자기만의 깊은 철학성이 길러진다면, 우리 시의 미래도 얼마나 빛날 것인가. 


기쁨의 하늘로 뻗은 팔만큼 슬픔의 물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반짝이는 잎새와 흩날리는 가지를 가진 나는 이따금 물 속을 응시한다 슬픔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풍성한 물이끼를 헝클어 다슬기와 버들치를 감추어주고 부드러운 진흙을 풀어 바닥을 가려 준다 슬픔은 천천히 가라앉는 그림자를 품으면서 부드러워 진다 빛은 물을 거울로 만들지만 어둠은 물을 뚫어 보는 눈을 갖는다 나는 빛과 어둠 속에 뿌리내리고, 슬픔을 길어 올려 파릇파릇한 잎새를 피워 낸다 


이수정 <向日性> 


보들레르는 교감의 특징을 매음의 상태로 풀이한 일이 있다. 이 경우 그는 대상과 시인의 영혼이 한몸인 상태를 꿈꾸었을 것이다. (보들레르(Baudelaire)는 교감(correspon dance)의 1차적 특징을 매음(prostitution)으로 정의하고 있다. 〈김붕구. 보들레에르. 문학과 지성사. 1982. p117〉) 
이때 매음의 상태란 성교의 순간처럼, 자신과 상대방의 경계를 잊는 무아지경을 뜻한다. 좋은 시 속에서의 교감운동은 이처럼 시인과 오브제가 한 몸을 이루어, 감정과 감각이 온전히 교환하는 것이며, 교류하는 걸 뜻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시인이 흘려야 하는 감각의 피는 어떻게 보상을 받을 것인가. 
이수정의 시는 완벽한 교감을 보여준다. 시인과 나무는 이미 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햇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잎새의 꿈이 깰까 두렵다. 시인과 나무는 한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무다. 
시인에게 향일성의 자리는 어디일까. 영감의 세례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자리가 그곳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상태 또한 쉽게 오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묻는 시인의 내면은 감상의 눈부신 절제에 다다른다. 
그래서 어조는 나긋나긋하며, 정서는 따스하다. ‘슬픔은 그림자를 품으면서 부드러워 진다’ 독자인 나 또한 시인과 둘이 아니란 착각에 빠진다. ‘물을 뚫어보는 눈’을 통해 ‘우는 새의 슬픔이 하늘 끝으로 가서 묻힌다’ <너를 기다리던 별 하나>는 걸 보았으리라. 터질듯한 정막의 힘, 독자의 감성을 뒤흔드는 힘, 그건 이수정의 무기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혹한 부탁이 있다. 이건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나의 애정이란 걸 헤아려주면 고맙겠다. 이글의 테마는 젊은 시인들에 대한 변별성 찾기다. 지금까지 그걸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젊지 않다. 전대와의 차별성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전통이란 명분에서 보면 이 시는 흠잡을 데 없다. 그러나 전통은 언제나 침전과 혁신의 상호작용이란 사실을 잊지말자. 


나의 방은 물이 아니랍니다. 
나를 하늘가에 매달아 주세요. 
동그란 나의 방도 같이 매달아 주세요. 
봄이 맴도는 가지 끝 
맺힌 목련 봉오리 옆에 나란히 

나의 방은 물이 아니랍니다. 
너무나 말개서 아무나 들여다 볼 수 있는 나의 방은 
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를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높고 높은 하늘가에 매달아 주세요. 

햇볕이 나의 방을 동그랗게 데우면 
가장자리부터 한 숨씩 한 숨씩 날아가고 
나만 가지 끝에 매달려 있겠죠. 

한때 내 방이었던 투명한 잔해들이 
주위를 떠돌다가 소멸되는 걸 바라보며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飛) 연습을 할거예요. 
완고하게 움츠린 목련이 피어나는 날, 함께 


윤지영 <물 속에 갇힌 물고기를 보셨나요> 


윤지영의 감수성은 예쁘다. 맑고 깨끗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시인의 열망은 혁명적이다. 어항을 거부하는 물고기를 통해 시인의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집이 물이라고 하는 등식 또한 하나의 상투적 관습이다. 그걸 새롭게 바라보면 물은 물고기의 생존공간이 아니라, 물고기를 억압하는 감옥이다. 노자에 ‘물고기는 물에서 죽는 놈이 더 많다’고 했던가. 젊은 세대의 시를 죽이는 것이 혹시 그릇된 전통주의는 아닐까. 전통주의란 더 이상 안온한 거처가 아니다. 그래서 혁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을 죽이는 건 무얼까. 시인은 시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지만, 시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은 아닐까. 물고기가 물이라고 하는 약속의 땅을 떠날 때, 시인의 빛나는 투쟁은 새로운 상상력의 거처를 마련한다. 
물고기가 나무를 그리워하거나, 목련처럼 꽃피고 싶을 때, 그건 바로 상투성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는 시인의 욕망인 셈이다. 
하지만 이 시는 어떤가. 지나치게 단조롭지 않은가. 그러한 단조로움이 마음의 평화를 약속한다 하더라도, 그 평화가 더 이상 변화의 시대를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거듭 밝히거니와 새로운 세대 시인들은 낯익은 정서로부터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개성이란 바로 변화와 혁신을 의미하며, 그러한 혁신의 몸부림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시의 미래 또한 과거의 반복만 남는다.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이 유념해야 할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세계나 대상을 향한 포커스를 좁혀보자는 것이다. 광범위한 시야, 전인적인 태도, 느슨한 감상주의, 권위적 발상 등은 이 시대의 사유와도 크게 어긋난다. 
사실은 포커스가 세부를 지향할 때만 개성적 표현과도 가까워질 수 있다. 광범위한 시선이란 보편적 테마란 말과 짝을 이루며, 축소되고 정밀한 발상은 개성적 인식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4. 주문들 

우리는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과 관계없이 이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 몫은 역시 젊은 세대의 시인들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혁명 이전의 세대를 추종할 명분이 없다. 그리고 누구도 그걸 요구해선 안된다. 이미 전 세기와 구별되는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진행중인가.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건만 문학만은 언제나 유유자적이다. 하지만 전대의 사유에 머물기엔 한 세기가 너무 길다. 아니다. 일 년도 너무 길다. 여러분 스스로 새시대적 이념을 창조하라. 창조적 파괴란 빠를수록 좋으며, 그것은 아름다운 파괴다. 
아직도 전시대의 문턱에 안주하거나, 그 시대의 향수에 기대고 있다면 그는 진실로 새로운 세대의 시인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그들을 핍박하거나 억누를 권리가 없는 것처럼 젊은 시인들 역시 그들을 모방하거나 추종할 이유가 없다. 
시는 설명과 이해의 수순이 아니라, 수용과 감응의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상상력이 그만큼 낯설고 생경하다 하더라도 기성세대여, 그들을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새롭지 못한 걸 나무래자. 우리에겐 신인을 제대로 알아보는 <백락>이 필요한지 모른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며 나는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형식적인 칭찬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상처를 받았다. 새 세대 시인들의 전향적 자각 여부에 우리 시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글은 명지대학교 이경진교수의 글입니다.

[출처] 전환, 하이퍼, 파괴 |작성자 caea 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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