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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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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영의 시세계 ―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 / 이선
2018년 05월 11일 21시 29분  조회:320  추천:0  작성자: 강려
 
  채수영의 시세계
   ―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
 
     이선

 
  채수영은 4,000여 편의 방대한 시를 쓴 다작의 시인이다. 2018년 봄에 34편째 시집을 받았다. 한국에서 시집해설을 가장 많이 했다는 평판을 듣는 것도 채수영이 글쓰기를 사랑하며 작가로서 치열하게 저작활동을 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필자는 작년에 채수영의 「장자론으로 본 채수영의 시 세계」 평론을 쓴 후, 이번에 두 번째 시평을 쓰게 되었다. 젊은날부터 여든이 가깝도록 수십 년 동안 쓴 방대한 시를 몇 편으로 한정하여 논평함이 유감이다.
필자는 채수영의 시의 특징을 몇 개의 음으로 나누어 화음을 넣는 반주기법으로 분석하였다.그리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로 분류하였다. 비발디의 사계처럼 각각 다른 계절의 조화로운 화음을 펼쳐서 노래하는 채수영 시의 구조를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정의한 것이다.
  음악은 단일구조보다 복합구조를 가지고 화음을 넣을 때 관객의 청각을 아름답게 자극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단일구조보다 복합구조를 가지고 복합 이미지로 구조화했을 때 감각적 미의식이 증폭된다. 아래에 예시된 시를 통하여 그 기법을 논의하여 보자. 아래 시는 채수영의 2017~2018년에 발간된 신간 시집 6권 중에서 13편의 시를 조명하였음을 밝혀둔다.
 
 
  1. 봄의 환타지, 아르페지오 기법
 
   채수영 시의 매력은 하나의 음색을 내지 않고 다변적이며 다각적인 화음을 낸다. 구조상 2중구조, 3중구조, 다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어와 비유는 직선구조가 아닌, 곡선구조와 겹쳐그리기 기법의 복합구성을 하고 있다. 아래 시를 읽고 상세히 논의해 보자.
 
  꽃잎에 빗물이 닿으면 뭐가 되는가
  그렇게 벚꽃이 지는 길을 걸었다
  젖어 흐르는 봄날의 나그네가 되어
  무게가 가라앉는 나무들
  윤나는 푸른 표정 앞에
  옮겨 딛는 발길
  하늘을 가린들 그게
  슬픔으로 보이던가
  예약을 손짓하면서 다가오는
  희망은 그렇게 언덕에 있었다
  ― 「초록으로 오는 세상을 위하여」 전문
 
  위의 시는 제목부터 봄의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다. 1-10행의 간결한 시어들이 한 편의 시에서 러너처럼 연속성을 갖고 수식된다. 행마다 일상적 결어를 거부하고, 다음 행과 배열을 어긋나게 잇는다. 시의 낯설게하기를 실현하여 감각적 미의식을 새로이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다.
  위의 시의 1행 ‘꽃잎에 빗물이 닿으면 뭐가 되는가’는 의문형이다. 그런데 2행의 ‘그렇게 벚꽃이 지는 길을 걸었다’는 1행의 물음에 대한 대답 행이 아니다. 되받는 문장은 전혀 순치적이지 않다. 역행의 문장으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한 심미적 미의식을 준다. 필자는 이 문장들의 구성과 연결을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명명하였는데 여러 이질적인 음들이 내는 화음으로 분류한 것이다.
  위의 시에서는 다른 시인들이 낱말과 낱말의 언어충돌을 시도하는 것과 달리, 문장과 문장의 이미지 충돌을 시도하여 ‘놀람 교향곡’처럼 음악적 화음을 펼치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21세기 시와 음악, 미술은 통합적 예술의 형태로 합성되고 있다. 채수영의 시는 미술의 색채요소와 음악요소를 통합하고 있다. 뒤에서 음악적 요소는 또 상세히 언급하기로 하자. 채수영의 시는 화음을 넣어 여러 악상들이 모여 세련된 연주를 한다.
  3행-8행을 살펴보자. 행마다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행과 엇박자로 연결된다. 3행 ‘젖어 흐르는 봄날의 나그네가 되어’는 4행 ‘무게가 가라앉는 나무들’과 연결된다. 그런데 4행은 명사형의 결어 부분이 아니다. 다시 5행의 ‘윤나는 푸른 표정 앞에’와 문장이 연결된다. 이와 같이 ‘옮겨 딛는 발길(6행)/ 하늘을 가린들 (7행)/ 슬픔으로 보이던가(8행)’까지 연속성을 가진 문장들이 의문형으로 끝난다. 채수영의 시는 짧은 시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투어가 없다. 어긋나게 연결된 행들이 아름답다. 필자는 이러한 채수영의 시 창작기법을 곡선구조와 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분류한다. 여러 방향의 화음을 넣은 음악처럼 감각적이다.
  8행과 9행을 살펴보자. ‘예약을 손짓하면서 다가오는(8행)/ 희망은 그렇게 언덕에 있었다(9행)’의 두 행도 낯설게하기를 하여 어긋난 문장은 비대칭이다. 채수영은 언어를 노련하고 완숙하게 절대 미학을 살려 표현하고 있다. 끝날 것 같은데 끝나지 않고, 용트림하여 비비꼬며 다시 살려내어 연결시킨다. 그리고 다음 행과 묘하게 어긋난 문장으로 만나게 한다. 이러한 기법을 필자는 겹쳐그리기 기법이라고 명명한다. 채수영 시의 문장과 낱말들의 비틀림과 낯설게하기는 노래와 연주의 화음처럼 2중구조, 3중구조, 다중구조로 결합되어 화음을 넣고 있다. 짧은 문장들의 행진 속에서 아르페지오 기법의 도드라진 매력을 지닌다. 아래 시를 읽고 다시 논의를 계속해 보자.
 
  너무 무겁다. 푸른 잎을 토해내는
  중량. 임부姙婦의 먼 예약처럼 희망을
  꽃으로 단장하고 길은 다시 수채화일 때
  신은 실수인지 연신
  푸른 물을 엎지르느라 정신이 없고
  땅을 비집는 아우성이 혁명을
  부르짖는 소란 속에서도
  사람들의 놀란 표정에도 여백을
  채우는 산천은 손놀림이 분주한데
  바람은 다시 소식을
  전하려 이름을 呼名하는
  바쁜 일 사월을 점령하는 오직
  푸른 이데올로기일 뿐이네
    ― 「4월이면」 전문
 
  위의 시는 봄과 꽃의 이미지를 <임부―수채화―혁명―이데올로기>로 점층적 구조로 표현하고 있다. 확산적 사고의 파고가 높다. 혼합된 이미지들의 합창은 화음이 증폭되어 툭툭, 치받고 올라간다. 임산부와 4•19 혁명의 이미지에서 발상의 전환의 극점을 본다.
  1-4행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너무 무겁다. 푸른 잎을 토해내는/ 중량. 임부姙婦의 먼 예약처럼 희망을/ 꽃으로 단장하고 길은 다시 수채화일 때’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임산부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녹색의 배설을 폭발적 이미지로 그렸다. 꽃이 피고, 잎이 난다는 단순한 자연현상을 희망예약으로 표현한 점이 압권이다. 나무는 꽃과 열매를 약속하니 틀림없는 희망예약이다.
  ‘신은 실수인지 연신/ 푸른 물을 엎지르느라 정신이 없고’(4-5행) 부분을 살펴보자. 앞다투어 피어나는 잎들의 전쟁, 꽃들의 전쟁을 왁자지껄 보여주는 이미지다. 빠른 템포의 행진곡 같다. 녹음예찬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기 발랄한 이미지가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화음의 극치를 이룬다. 아르페지오 음악기법 시창작의 극점을 본다.
6  -13행의 중심어를 살펴보자. <혁명―소란―놀란 표정―손놀림이 분주―바람은 다시 소식 전/ 이름을 呼名/ 바쁜 사월/ 푸른 이데올로기(6-13행)‘로 압축된다. 바람의 역할과 뿌리의 바쁜 움직임, 산천초목의 녹색화 과정이 생동감있게 빠르게, 바쁘게 전개된다.
  시는 시인의 성격과 무의식을 대변한다. 선이 굵고, 직선적인 채수영의 성격처럼 문장은 빠르고 힘차다. 또한 솔직하며, 세련되고, 미려한 언어의 합주가 화려하다. 꽃과 나무들이 다투어 자라고, 숲을 녹색으로 채색하는 모습을 혁명이라고 표현한 이미지가 압권이다. 아래 시를 읽어보자.
 
  우리집 정원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바람들이 산다
 
  춥다는 것과
  따스하다는 것 사이에
  건널 길 몰라 망설이는
  또 하나 바람이 산다
 
  어둠에서 아침으로나
  아침에서 어둠으로나
  색깔로 드러난 거리엔
  안개가 드리워
  건너갔다 되돌아오는
  밤이거나 낮이거나
  구름을 몰고 온 바람과
  해 따라오는 바람과
  가로지르는 사이에서 신음하는 얼굴엔
  낯선 바람이 묻어 눈을 뜬다
   ― 「변명―산수유 · 31」 전문
 
   위의 시에서 보여주는 채수영 시의 페르소나(persona)는 이중구조를 갖는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그림자(shadow) 이론을 적용하면, 자아는 2중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집 정원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바람들이 산다(1-2행)’를 살펴보자. 1연의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바람’은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가면을 쓴 대외용 자아와, 무의식에 은밀하게 숨겨 둔 열등한 자아로 구분된다.
  2연에서는 <춥다- 따스하다- 건널 길 몰라 망설이는> 등 3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바람의 춥다는 이미지는 시원하다는 복합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바람은 폭력성인 동시에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아르페지오 연주처럼 확산적 문장이 주는 화음이 심오하다. 앞면, 측면, 후면으로 바람의 이동방향과 거리는 자유롭다. 방향을 바꾸거나 되돌아오거나 바람의 속성은 방해받지 않으며, 비난받지도 않는다.
  3연에서는 <어둠에서 아침으로나 아침에서 어둠으로나/ 건너갔다 되돌아오는/ 밤이거나 낮이거나/ 구름을 몰고 온 바람과 해 따라오는 바람>의 표현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경계가 없다. 바람의 자유분방한 속성을 명쾌하게 명시한 문장이다. 교향곡처럼 각각의 악기들이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어우러져 또렷하게 아름다운 화음을 낸다.
 
  채수영의 시는 맛있는 김밥 같다. 당근, 오이, 우엉, 달걀, 단무지, 김 모두 각각의 맛을 살려낸 음색이다. 샌드위치처럼 망가뜨리지 않고 어우러져 맛깔스럽다.
  위의 세 편의 시에서 보여주는 대상, 제목, 내용의 하모니는 부족함이 없다. 아르페지오 화음이 내는 오묘한 소리를 듣는다. 채수영이 다루는 색채이미지와 시어의 깊이가 선명하게 도드라진 수작이다.
 
 
  2. 여름 환타지, 아르페지오 기법
 
   필자가 선택한 채수영의 작품 중에서 신록의 환희를 노래한 여름 시가 별로 없어 아쉬움을 갖는다. 단 한 편만 다루려니 안타깝지만, 그도 채수영의 색깔일 것이다. 겨울에 대한 주제는 또 너무 많다. 목적시나 데모선동 시가 아닌 경우에는 여름의 뜨거움을 주제로 한 시가 드물 것이다. 시창작 과정에서 절제된 이미지로 압축하기 때문이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꽃이기 위해서는 뿌리를 알아야 한다.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겉에 흐르는 슬픔의 물맛을 모르고 어찌 열정의 미소를 알 수 있을 것인가 몰라도 세상은 말로 풀어내는 길이 아니더라. 꽃이거나 아니면 근처에 도달한 기다림이라 하자. 그렇더라도 향기를 건네주는 뜻을 이해하는 일이야 말로 세상의 넓이를 지나는 사람의 고갯짓이려니, 사랑이여, 우리 어디에서 당신의 이름 위에 내리는 慈雨이기를 바램하는 향기이련가, 하여 눈으로 보는 암담함도 함께 하는데……
  ― 「생태학적으로 쓴 이름―꽃 · 4」 전문
 
   위의 시 부제처럼, 꽃은 사랑의 상징이며 대표어다. 사랑 시를 쓰면서 관념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시인의 역량의 표출이다. 특히 ‘―랴’ 라는 역설적 문장이나, ‘―자’ 라는 청유형 문장, ‘―가’라는 의문형 문장은 관념에 빠지기 쉽다. 시에서 시인의 의지를 표출하는 문장표현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더욱 청유형으로 의도성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의 시는 사유와 직관의 시다. <꽃이기 위해서는 뿌리를 알아야 한다/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슬픔의 물맛을 알아야 열정을 안다/ 세상은 말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시적 표현은 시인이 노년기에 얻은 깨달음의 깊이다.
  시에서 사랑학개론을 펼칠 때 관념을 피하기 위하여, 채수영은 시적장치를 마련 하였다. 그 날렵한 문장표현 기술을 살펴보자. ‘꽃이거나 아니면 근처에 도달한 기다림이라 하자.’(3행)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자. 채수영의 시가 절대 관념에 빠지지 않고, 표현주의 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유다. 감각적 미의식이 통통 튀는 음악처럼 조화로운 문장이다.
  꽃향기로 대변되는 사랑의 향기를 표현한 문장을 살펴보자. ‘사랑이여, 우리 어디에서 당신의 이름 위에 내리는 慈雨이기를 바램하는 향기이련가’(5-6행)라는 표현은 자칫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운 주제를 이미지로 풀어낸다. ‘당신의 이름 위에 내리는 慈雨(자우)’라는 미려한 표현은 애인에게 주는 최고의 찬탄이다. 관념을 탈피한 문장이다.
마지막 6행을 살펴보자. ‘하여 눈으로 보는 암담함도 함께 하는데……’ 부분은 사랑의 결어다. 사랑은 암담하고 슬프고 아프다.
채수영의 사랑학개론은 노교수의 철학을 담은 성심과 진정성이 있다. 이보다 향기로운 사랑학 연주와 아르페지오 화음이 있을까?
 
 
   3. 가을 환타지, 아르페지오 기법
 
  채수영의 가을 이미지 시 3편은 결실의 기쁨과 성취감을 노래하기보다는 배신의 아픔과 비련과 허무를 이야기한다. 릴케의 사랑시나, 베를렌느, ‘가을날 비오롱의 슬픈 가락’을 이야기하는 외국시인이나, 한국 시인이나 색깔이 같다. 시는 슬프고, 시인은 아프다.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끝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열매를 맺거나 또 아니면 어떠랴, 살아온 세상을 그림으로 그린단들 어디 채색으로 이루어진 당신의 캔버스에 보남파초노주빨이 빨주노초파남보로 혼돈의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마술을 부리지 않던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날은 이미 인간에게 거덜난 거짓말인데 그걸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사람들을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인데……
― 「생태학적으로 쓴 이름/ 낙엽 · 6」 전문
 
   위의 시는 낙엽의 쇠락 이미지를 압축한 시론이며, 인생론이다. 인생과 시는 같다. 굳이 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없다. 오늘의 과학적 가설은 내일 다른 과학자에 의하여 깨진다. 인생도 사람도 믿을 것이 못 된다. 내가 나를 모르듯이, 네가 나를 모른다. 또 알았던 네가 네가 아니듯, 네가 알았던 나도 내가 아니다. 인생 세옹지마라, 굳이 갇혀 있지 말고, 풀어놓으라는…… 인생 별거더냐? 채수영은 되묻고 있다.
  채수영의 시는 한정적이거나 지시적이지 않다. 넓고 깊게 사고의 확장을 하여 독자의 참여공간을 만든다.
  채수영의 깨달음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처럼. 천천히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가지에 꼭 잡은 집착을 풀고, 아다지오로 천천히. 매우 느리게.
 
  아래 가을을 주제로 한 시를 살펴보자.
 
   맺어야 하지만 맺는 것도 슬픈 일이다. 어차피 섞바뀌는 동그라미의 어질음은 버릴 수 없는 운명이거니 갈 곳이 있다면 가는 길은 곧장 가보고 말 일이다. 다시 우주를 담고 문을 닫았지만 문은 언젠가 열리게 되어 있는 아슬한 길에 왕자를 기다리는 고개 또 고개의 높이를 누구에게 물어야 정답은 환한 문을 열 수 있을 것인가. 고개 숙이는 하루는 어디에서 당신의 키와 나란할 수 있을지 몰라……
  ― 「생태학적으로 쓴 이름/―열매 · 5」
 
  인간과 인생을 관통하는 촌철살인의 문장이다. 짧고 명쾌하다. 맺은 인연과의 갈등, 금지된 인연도 가고 싶으면 끝까지 가보라고 한다. 인간관계는 동그라미다. 동그라미의 본질은 끝없는 순환이다. 가고, 가고, 또 간다. 인생의 가을, 화자 자신이 열매인 시점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쇼펜하우어의 니힐리즘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날 서서 대립할 필요가 없다. 풀어놓아라, 그냥 놓아두면 동그라미로 순환할 것이다. 채수영은 권고한다. 굳이 가둬두거나 갇히지 말라고.
  인생 후반부에서 좌절된 자존감을 ‘고개 숙이는 하루는 어디에서 당신의 키와 나란할 수 있을지 몰라’ (5행) 라고 독백한다. 열매인 내가, 인생의 많은 맛난 열매를 다 맛본 시적 화자인 내가 느끼는 자유를 향한 니힐한 외침이다
 
  그림자가 주인을 포장해버리는
  에피소드 앞에 땀 흘리는 오늘은
  외롭다. 그때마다 슬픈 가슴을 위로하기 위해
  돌아보는 일에 허무가 무성하고
 
  큰소리의 행방 앞에 바람만 횡행하는데
  소주 맛은 여전히 허무를 위로할 수가 없고
  공허의 벼랑에 빈 껍질의 크기가 알맹이가 될 수 없는
  정답이 외로운 벌판에서 씨앗을 심는 괴로움은 언제
  싹이 되어 봄을 구가하려는지 오늘은 허허한 메아리가
  가슴을 헤집는데 향기만을 따라간 사람들은
  분간 못하는 취기에 비틀거리는 지금
  향 짙은 꽃은 여전 내 뜰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찌 위로의
  먼 길을 말해 줄까 지금은
  할 말이 없을 뿐. 할 말이 참으로 없을 뿐
 
  인간 세상이 이상하다   
  ― 「그림자가 포장하는」 전문
 
   채수영이 팔십 평생 살아오면서 겪은 회고록이다. 1연을 살펴보자. ‘그림자가 주인을 포장해버리는’(1연 1행) ‘에피소드’ 같은 세상이다. 의리도 없고, 배신을 당하는 세상이다.
  위 시의 중심 감정을 요약해 보자. <외롭다―슬픈―허무―공허―빈껍질―알맹이가 없는―외로운 벌판―허허한―괴로움―가슴을 헤집는데―비틀거리는―여전―어찌―먼 길―할 말이 없을 뿐, 할 말이 참으로 없을 뿐―인간 세상이 이상하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배신과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부정어로 점철되어 있다.
  시, 영화, 연극, 소설은 같은 맥락의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배경은 내면의 갈등과 부정이다. 한 편의 시에는 대하소설 분량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된 일가족 살인사건이나, 신혼여행지에서 아내를 살인한 경우도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자아의 과대망상적 분노 표출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페르소나는 시적화자의 목소리로 대변된다. 라깡의 ‘자아의 타자화’ 이론을 위의 시에 적용해 보자. 시를 쓰면서 시인은 주관적 자아를 교묘하게 시적화자라는 이름으로 숨겨 놓는다.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쓴 시는 나의 무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소재 선택과 시어 배열, 문장전개와 구조화까지 시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시인의 자아는 타자화된 시적 자아다. 그래서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개진하여도 사회적으로 치외법권자이다. 몸을 구속하지도, 위협하지도 않는 정서해소 행위인 시는 무죄다. 치열하게 산 인생에 노교수의 가을 고백록이 슬프다.
  위에서 논의한 인생의 가을에 많은 결실을 한 채수영의 3편의 시는 시적 화자의 정신적 고뇌가 가슴에 꽂혀 아프다. 안단테, 안단테, 안단테 아르페지오. 채수영의 슬픈 자서전을 읽고 힘들게 책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공감과 감동을 받는 독자도 시인처럼 에너지를 빼앗긴다. 카타르시스는, 아픈 공감 뒤에 남는 맑은 이슬방울 같은, 여리고 약한 에센스다.
 

  4. 겨울 환타지, 아르페지오 기법
 
   채수영 시인이 이천 전원주택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며 살기 때문인지 봄의 꽃과 가을의 열매, 겨울 이미지 시가 많다. 그런데 유독 겨울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는 것은, 시인이 노년기인 겨울은 건너가는 중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필자가 선택한 겨울을 주제로 한 시가 6편이다. 추려내려니 아깝다. 지면이 길어지더라도 다 언급하려고 한다.
  채수영 시인이 필자에게 처음 15편의 시집을 선뜻 내주었다. 올초에 4편의 신간시집을 다시 부쳐왔다. 2편의 신간시집을 최근에 추가로 받았다. 그리고 올해 시집을 내고, 다시 시를 쓰지 않겠다고 필자에게 다짐하는 말을 했다. 작년에 큰 수술을 받고, 인생의 겨울 시기에 주변을 정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필자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채수영 시인 살아생전에, 그의 시를 제대로 비평하여 세상에 그 진가를 알리자고 결심하였다. 인간 대 인간으로, 시인 대 시인으로, 계산없이 제대로 한번 시와 평론으로 맞붙어볼 생각을 하였다. 그 시작은 필자의 문학적 집착과 휴머니티, 의협심의 발로이다. 또한 겁 없이 덤비는 당돌한 도전이기도 하다. 아래 시를 읽어보자.
 
  죽어야 산다는 것도 거짓이다. 살아나기를 열성으로 기도하는 것도 역시 거짓말이다. 죽 는 것은 이미 죽는 것 오로지 그 죽음의 벌판 위에서 다시 돋아나는 싹들에게 주소를 물으면 모두 모른다고 도리질이다. 어디서 온 것도 모르는데 하물며 어디로 가는가를 안다는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다만 죽음의 잠을 위해 편안하면 될 일
……친구여, 다시 오려나?
― 「생태학적으로 쓴 이름 /―죽음 · 7」
 
  위의 시는 부제를 ‘죽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생각난다. 24편의 노래를 완성하고 다음해 죽은 슈베르트의 시는 그 자신의 죽음을 향한 무의식에 대한 표출이었다. 겨울 나그네 노래를 들으면 황량하고 추운 인생의 허허벌판에 버림받고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철학자며 방랑자인 시인이 생각난다. 고독과 죽음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전파되어 영혼이 춥다.
채수영의 겨울 이미지의 시들은 절대고독과 외로움이 죽음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다만 죽음의 잠을 위해 편안하면 될’(4-5행)‘에서 말하듯이, 죽음은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은 편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인 자신에게 마음을 다독이게 하는 말이다. 곁에 있던 친구의 죽음은 다음 차례는 나인가? 두렵게 만들 것이다. 죽어야 산다는 불교나 기독교 철학이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영생과 극락, 부활과 윤회를 부정한다. 보이는 것만 믿는 현실적 체험적 철학이다.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 구부러진 세상에
곧은 길을 가는 사람의 그림자는 길고
고독의 함량이 더해진 슬픔 앞에 당당이라는
리듬이 얼마나 아픈가는 누구나 외면하는 색
단맛을 익히는 고통보다 성찬을
생각하는 화려함의 행방은
열정없어 무미한데도 거긴 붐비는 길, 땀을
심어 길을 개척하는 용기와 아름다운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 「앵무새 죽이기」 전문
 
위의 시에서 언급한 흰색 이미지는 죽음의 색깔이다. 또한 결백을 항변하는 색깔이다. ‘구부러진 세상’(3행)에서 의협심이 있는 정의로운 사람은 ‘흰색을 색이라 말하는 것은 슬프다.’(1행)라고 시적 화자는 고백록을 쓴다. 세상을 받아들이고(1-2행), 푸르게 젖을 수 있는 여백조차 지워야 하는 물감(2-3행) 이라고 시인은 쓴다. ‘앵무새는 항상 먼저 죽어야 했다./ 하얗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11-12행)라고 초인은 쓴다. 거름이 되어 죽지 않으면, 이듬해 새 풀이 돋아나지 않듯이, 새로운 세대의 거름이 되기 위하여 니체 같은 초인은 죽어야 했다. 시인도 새로운 시대적 아픔으로 죽어야 새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로 탄생한다. 조향이 죽어서 후대에 유명해졌듯이.
그러나 필자는 채수영이 살아있을 때 그의 시를 조명해 주고 싶다. 죽은 뒤에 비창을 연주하고 싶지 않다. 겨울 나그네를 노래하기 싫다.
채수영 시인과 전원주택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유리방에서 깊이 있는 대화를 하였다. 시인도 살아서 영광을 누리고, 시인도 살아야 한다. 시단정치인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 아니다. 참 시인, 실력자가 그 영광을 누려야 한다.
 
부스럭거리는 어둠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갈 곳 없어도
세상을 아는 듯 자유자재
모습을 바꾸어도 알아차리는
물상들의 침묵에 바람도 그 때는
길을 잃은 듯 했다. 그래도 좋은데
<아는 것은 누구일까>
살아 혹은 죽은 것 같은 모두
한 공간에서 모여 있는 모습이
평화의 깃발 같았지만 도통
이해할 길 없이 무작정 길을 헤맸다.
<누가 가르쳐 줄까>
서투른 눈의 밝기로 세상을 읽어 가는 마침내
돌부리에서 눈물을 가늠하기 시작했어도
할 말이 없는 노래가 길어 길어진다
  ― 「어둠」 전문
 
  위의 시 어둠처럼, 누군가 어둠을 밝혀주려고 먼저 죽어 주었다. 후배 시인들은 먼저 죽은 선각자 시인들을 행사순서에 따라 작고문인에 대한 묵념이나 하며 산 자의 의무를 다하는 줄 안다. 죽은 시인과, 죽어가는 시인과, 죽음을 준비 중인 천재 시인들을 위하여, 아니 가난한 숨은 시인들을 위하여 기꺼이 평을 써야 한다. 시단에 좋은 평론으로 좋은 시를 증명하여야 한다.
  부스럭거리는 어둠(1행)에 길을 잃지(6행)만, 돌부리에 눈물을(14행) 가늠하여도, 서투른 눈의 밝기로 세상을 읽어 가(13행)며, 길고 긴(15행) 노래를 불러야 한다.
  시적 화자의 미궁 속 같은 세상 살아내기와 시창작의 길이 험하여도 시인은 굳은 의지를 보인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내 얼굴이 있다고 믿는 거기를 가기 위해
  길을 찾았다. 있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찾았다.
  어둠에는 없는 이 노릇에 슬픔을 알기까지는
  방랑의 나그네지만 길은 그렇게 멀리 열리고
  이쪽과 저쪽을 모르는 길이
  어디에서 시작과 끝이 이름을 말하는 것일까
    ― 「거울―여백 · 3」 일부
 
   위의 시는 자아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과정의 슬프고 험난한 방랑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거울의 속성은 자아의 반사이다. 그러나 실재하는 내가 아니다. 거울은 2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거울에 비친 나는 나의 모습일 뿐, 나 자신의 영혼이 담긴 현존하는 실물은 아니다. 거울을 주제로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썼다. 이상의 후예들이 겪는 존재론적 아픔을, 필자는 거울에 비친 겨울로 분류한다.
 
  때 맞춰 아버지 무덤에 가면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어있는 것인지
  갈피를 못 잡겠다. 무덤 위에
  풀에게 물어봐도 그들은 한결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람만을 부르는 시늉으로 대답을 삼으라는
  다만 손짓을 대할 때면 다시 미궁의 깊이는
  아슬한 데
  나와 아내의 생활도 무덤까지 합장한
  내 부모의 앞길을 따라가는 삶과는 같은 건지
  아닌지를 모르는 일로 머리를 쓰지만 내
  철학은 차라리 슬프다. 이런 슬픔의 옷을 입고
  함께 걷는 아내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데, 흰 눈이 세상을
  덮어버리기를 바라는
  내 평등은 끝내 어디 있는가
    ― 「내 평등은 어디 있는가/ ―虛―無無」 전문
 
  위의 시는 앞에서 존재론적인 자아를 다룬 것에 반하여,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남자가 나이 쉰이 되면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한다. 아버지의 외도, 아버지의 무능,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한다. 자신이 아버지의 유전자의 지시대로 살아왔음을 직관하고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해제한다.
  부모를 닮은 자신들 부부를 오버랩하여 조명하면, 비로소 슬픈 얼굴의 아내가 보인다. 아내는 늘 묵묵히 뒤에서 받쳐 주지만 친구, 애인, 동료였는데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위급할 때만 쓸모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날 실컷 놀고 돌아보니 늙은 아내가 고개 숙이고 있다. 슬픈 얼굴의 아내는 슬픈 나의 자화상이며, 나의 감정의 잔재물이며, 나의 사진이다. 노년기에 뒤돌아보면 아내가 외로이 서 있다. 젊어서 잊었던 아내를 노년기에 다시 찾는다. 그도 모르는 답답함이 한국 남자들이 그리는 아내학 포물선 그래프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겨울을 꽉 붙잡고 놓을 줄 모르는
  패각貝殼의 강은 입을 다물고
  묵언을 실천하는 스님인가 철새들은
  강물 틈새에 자맥질로 재미를 익히는데
  쓸쓸한 산 그림자는 세상의
  비명을 삼키고 마침내 해는 기울어
  먼 산의 흐린 윤곽 아래
  머리 벗겨진 나무들은
  산을 지키느라 꼿꼿이 서 있고
  하늘은 멍하게 석양을 받아들이는 길에
  옷깃을 여민 사람들은 지어미를 찾아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도시는 이미
  불을 켜느라 분주한 몸놀림으로
  눈을 뜨는 겨울
  강물은 아래로 신음을 잠재우면서
  가야 할 여행을 재촉하고 나 또한
  집으로 돌아가는 겨울 길에 서 있네
   ― 「겨울 소묘」 전문
 
   위의 시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겨울 길에 서 있네(16행)’라고 노래한 시적 화자의 목소리 마지막 행에 주목하여 보자. ‘옷깃을 여민 사람들은 지어미를 찾아 /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도시는(11-12행)’에서 보여주는 집으로 돌아간다, 지어미를 찾아 바쁘게 간다는 인생의 요약된 국면을 보여준다. 바람피우던 남자도 고향처럼 지어미에게 돌아간다. 밖으로만 떠돌던 방랑자도 어머니와 고향, 아내에게 돌아간다. 위의 시의 중심어는 ‘귀향’과 ‘귀천’이다.
‘묵언을 실천하는 스님인가 철새들은(3행)’라는 표현에서는 노년에 얻은 깨달음이 빛난다. 말은 중요하지 않다. 침묵하여도 알 사람은 안다. 말로 말을 바로 잡지 못함은 비극이지만 현실이다. 인생은 빈자리, 침묵의 빈 겨울 이미지를 잘 드러낸 시다.
  위의 6편의 채수영의 겨울 시리즈 시가 보여주는 진선미는 모두 인생의 하모니를 노래하고 있다. 시가 지향하는 진선미가 모두 들어있는 아르페지오 합주다. 필자는 시가 지향하는 최고의 진실은 무엇일까를 자주 질문한다. 시적 진실과 시적논리는 상상력의 진실과 상상력의 논리라고 말함이 더 맞다. 다만 시가 과학적 문장과 다른 것은, 감각적 미의식과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성을 확보해야 한다. 채수영 시에서 보여주는 낯설게하기와 언어충돌, 어긋난 문장결합이 빛나는 이유다. 시인은 새로운 신선한 낱말과 문장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다. 채수영의 시에는 진선미와 사회화, 재해석까지 있다. 복합적 구조로 독자에게 정서환기를 시킨다.
 
  필자는 4개의 장으로 나누어 채수영의 시를 봄, 여름, 가을, 겨울 환타지로 보고, 아르페지오 형식으로 분류하여 그 내용을 심도있게 논의하여 보았다. 여러 편의 시를 논의한 이유는 필자가 선택한 시를 한 편도 빼고 싶지 않는 욕심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채수영 시의 전문을 그대로 읽고, 그 맛깔스런 색깔과 맛을 그대로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에 전문을 펼쳐 실었음을 밝혀둔다.
 
  대중들이 시를 언제부터 외면하였을까? 속도화시대로 바쁘게 살면서 현대인은 억압과 긴장을 풀어줄 시적 여유를 잃어버렸다. 다만 몇몇 쉽고 짧은 사랑시만 대중, 특히 청소년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연애편지의 컨닝페이퍼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술로 승화시킨 사랑은 대부분 금지된 말초적 사랑이다.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며, 부부가 하는 사랑은 정서적 쾌감과 희열이 배가된다. 그러나 튀는 스파크와 전쟁같은 정열이 없기 때문에, 대중과 예술로부터 외면당한다.
  예술은 상담심리적인 관점으로 분석하면 승화와 회피다. 프로이드는 부적응과 승화로 표현하였다. 사회적 부적응자가 승화시킨 작품을 사회적 부적응자인 독자가 읽고 감동한다고 해석하였다.
  필자는 상담심리적인 관점으로 시를 회피와 보상으로 본다. 시창작과정은 자가정신과 치료 과정이다.
 
  채수영의 아르페지오 화음은 여러 개의 화음과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점과 관점이 다각적으로 분출되는 분수쇼 같다. 이미지의 분사를 시도 한다. 한 개의 낱말과 한 개의 이미지는 2중구조를 갖는다. 필자는 채수영 시의 다변화와 확산적 사고를 추구하는 요소를 높이 인정한다. 채수영의 시는 알프스 계곡에서 염소들이 흔드는 요령처럼 여러 개의 소리들이 어울려 파장을 일으키며 화음을 만든다. 단일구조의 지정적 언어를 피하고 있다. 획일화를 거부하며 독자들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렇다면 채수영의 시는 대중의 사랑을 받을 요소들을 가지고 있을까?
  위에서 언급한 4계절의 환타지를 그린, 아르페지오 기법은 분산된 화음이 합일을 추구한다. 다초점의 특징을 갖고 있다. 심상운이 그의 하이퍼시론에서 주장한 다초점 구조를 실현하고 있다. 시어와 문장은 하이퍼시의 특징을 가진다. 한정적이거나 지시적이거나 해석을 명령하지 않는다.
  채수영 시의 특징은 운동감이 있다. 필자가 하이퍼시 시론에서 여러 번 주장하였듯이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현재형으로 표현되는 시의 특징에 과거와 미래, 현재가 한 공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운동감을 가지고 살아서 움직인다.
 
  채수영이 시창작을 하면서 의도하고 쓴 것은 아닐 테지만, 남과 다른 시를 쓰고자 노력한 흔적이 시의 곳곳에 배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미래시인 하이퍼시의 요소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작가정신의 흔적이다. 필자는 채수영의 시를 한국 최초로 음악 연주의 아르페지오 기법의 화음으로 분류하여 논의한 것과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으로 해석한 부분에 대하여, 필자 나름의 의의를 부여한다.
[출처] [공유​] 시인광장 포엠조명【283】이선의 포엠조명[2]채수영의 시세계―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8년 4월호 ㅡ통호 제108호 |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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