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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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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법률 기계(78-86)
2018년 10월 21일 15시 37분  조회:808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 Rhizoma *^^* | 뿌리줄기
원문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174
법률 기계


유형지의 고문 장치에서 우리는 추상적인 법률 기계를 만난다. 하지만 『소송』의 여러 에피소드들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형성되고, 완전하게 작동하는 법률 기계, 즉 사람, 텍스트들, 제도들, 실천들, 건물들, 사물들 등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사회적 기계의 다중적인 아쌍블라주를 발견한다. 『소송』에는 그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기계들(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술적인 기계들”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법의 다양한 요소들 - 그것의 관리들, 희생자들, 하인들, 조수들, 현장들과 장비들 - 은 하나의 기계로서 매우 [잘] 기능한다. 비록 기계를 흐름들의 체계로 폭넓게 규정하는『안티오이디푸스』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세우는 과정에서 노동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루이스 멈퍼드의 분석을 언급함으로써 “사회적 기계” 개념을 정교화한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멈퍼드는 파라오, 그의 사제들과 관료들, 그리고 실제로 피라미드를 세웠던 수천 명의 노예들이 함께 그 최초의 “거대-기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프란츠 르로의 고전적인 정의와 어느 정도 일치하게, 하나의 기계가 에너지를 활용하여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각각이 기능상 특화되어 있고,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작동하는) 저항 부분들의 조합으로 규정된다면, 그렇다면 위대한 노동 기계가 모든 국면에서 진짜 기계였다. 그것의 구성요들이, 인간의 뼈, 신경, 그리고 근육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것들의 적나라한 기계적 요소들로 환원되고, 그것들의 제한된 임무들의 수행을 위해 엄격하게 표준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Mumford 191) 『소송』의 법률 기계는 파라오의 피라미드 건설 장치처럼 분명 노동 기계는 아니지만, 그것은 진정 일정한 종류의 작업을 수행하고 특정한 종류의 인간 상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카프카의 사회 기계가 욕망하는 생산의 결말-개방적인(open-ended) 사회적 기계라는 점이다.
『소송』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에 연결되어 있고, 모든 장소가 사법적 행위의 장소이다. 체포[인상적인?] 관리들을 따르는 세 명의 무기력한 젊은이들은 은행원들이고, 은행의 저장실에서 K는 나중에 그들에 대한 K의 불평 대문에 채찍질 당하고 있는 체포[인상적인?] 관리들을 만난다. K의 아저씨는 K가 그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그 사건(case)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 아저씨는 K를 변호사에게 소개한다. 그 변호사의 하녀인 레니는 피고들, 변호사들, 판사들과 다 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가 티토렐리는 법정 화가이고 대성당 사제는 감옥 교회사(敎誨師)로 판명된다. K가 그의 사건(case)에 대해서 역시 들어 알고 있는 공장주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소송』169) 모든 곳으로 K는 가고, 법은 그와 함께 가며, 모든 곳에서 법은 에로틱하게 된다. K는 먼저 프뢸린 뷔스트너의 방에서 심문을 당하고, 창문 걸쇠에서 물신적인(fetishistic) 하얀 블라우스가 어른거리자, 나중에 그녀를 쫒아가 그녀의 목에 흡혈귀처럼 키스를 한다. 법정의 법전은 외설스런 그림들이 들어 있다. K는 우선 그에게 법정을 보여준 음탕하게 보이는 세탁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나중에는 레니에게 마음을 빼앗기는데, 그는 그의 변호사의 거처에 처음 방문하는 중에 그녀와 성교를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마조히즘적 에로티시즘이 프란츠와 뷜렘(Willem)의 채찍질을 퍼뜨리고, 티토렐리의 작업실 바깥의 젊은 소녀들의 얼굴은 “어린애같음과 비행의 복합물”(『소송』178)을 드러낸다.
따라서 법은 모든 것을 포위하는, 에로틱한 사회적 기계이다. 모든 사람은 법의 대행자이고, 모든 현장은 사법의 장소이며, 자신의 사건(case)을 뒤쫓는 K의 추격(pursuit)은 개인들, 담론들, 코드들과 사물들의 하나의 아쌍블라주로부터 다른 아쌍블라주로, 하숙집 아쌍블라주로부터 주택/법정 아쌍블라주, 은행 아쌍블라주, 법률 사무소 아쌍블라주, 스튜디오 아쌍블라주, 대성당 아쌍블라주로 이어진다. 연결된 구성요소들의 결말-개방적인 계열들, 내재적인 욕망으로 불러일으켜진 모든 것. 작가로서의 카프카의 행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소송』이 어떻게 끝없이 욕망하는 기계로서 기능하는지를, 부단한 그리고 영속적인 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종합의 발동기로서 기능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정교한 사회적 기계의 요점은 무엇인가? 카프카는 단순히 법의 불합리함(absurdity)을 증명하고 있는 것인가? 현대의 사법 장치들이 우스꽝스러운 루베 골드버그의 기계가 베케트식의 돌을 집어삼키는 기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카프카는 종종 사회 제도들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해지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비판적”이라는 게 사회적인 재현들에 대한 외부적인 논평을 의미하는 한에서만 [그것에] 동의한다. 그 대신 그들은 카프카가 “사회적 재현들로부터 언표의 아쌍블라주와 기계적 아쌍블라주들을” 뽑아냄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아쌍블라주들을 분해함으로써”(K 85; 46) 내재적인 비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글쓰기는 “이러한 이중의 기능을 갖는다 - 아쌍블라주들로 전사하는 것과 아쌍블라주들을 분해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K 86; 47) 카프카는 “크게 기뻐하며 웃는 작가이다.”. 그렇지만 또한 “극단적으로(?) 그는 정치적 작가이다.”(K 74; 41) 그리고 그의 정치적 행동은 아쌍블라주들을 전사하고 분해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사회적 재현들에 대해 논평하는 대신, 카프카는 그것들을 실험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송』은 “하나의 과학적 연구로, 기계의 기능에 대한 실험 보고서로 간주되어야 한다.”(K 80; 43-44) 그리고 그 기계의 기능하기는 그것의 분해하기가 곁들여진 기능하기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카프카의 정치 안에는 이미지적인 것도 상징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 혹은 몇몇의 카프카의 기계들 안에는 구조도 혹은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카프카의 실험 속에는 해석도 의미(significance)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경험적/실험적 계획안들이 있을 뿐임을 믿을 뿐이다.”(K 14; 7)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재현들의 전사와 분해가 비판의 형식인가? 이러한 작동이 어떻게 실험의 유형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사와 분해가 동일한 것인가?
사회적 재현들을 아쌍블라주들로 전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익숙한 코드들과 제도들을 사회적 기계라는 낯선 용어들로 다시 쓰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듯이, 카프카는 법에서 관례적, 상식적 논리를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낯설게 한다. 『소송』에서 법은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이고, 고발들은 상술되어 있지 않으며, 범죄는 자동적으로 가정되어 있다. 접근할 수 없는 권위는 판결을 내리고, 판사들, 법정 관리들, 그리고 변호사들이라는 끝없는 수준들은 아무렇게나 선택된 피고들의 모호한 사건들(cases)을 처리한다. 규칙, 위반 행위들, 증거, 증명들과 평결들의 논리를 갖춘, 낯익은 법 체계는 사법과 공정함의 규범들과는 무관한, 권력의 비잔틴적[권모술수적] 메커니즘임을 드러내지만, 세력들의 위계, 즉 포괄적인 유죄의 추정 그리고 형벌 대행자들의 피할 수 없는 네트워크에 의해 조절된다. 이 메커니즘 속에는 신의 판결의 집행을 통해 신의 명령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신의 종교적 전통 속에 뿌리박은, 범죄의 문화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가 사법 체계를 하나의 정교한 기계로 전사(轉寫)하는 것은 권력으로서의 법에 대한 비판을 구성한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송』의 이러한 차원이 -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 오직 예비적인 비판으로 기능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위적인 사회적 제도들 자체에 의해 확증되고 유지되는 권력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프카는 권력이 본래적으로 중앙집중적이지도 위계적이지도 않으며, 누군가 소유하거나 결여하고 있는 어떤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계적인 것으로서, 사법적 기계의 순환을 퍼뜨리고, 모든 개인들과 기계의 구성 요소들을 세력들의 장에 포함한다. 이러한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권력 묘사를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제1권에서 행한 푸코의 권력 분석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카프카는 권력의 순환이 또한 욕망의 순환이며, 법이 피고들을 심리하기 위한 기계일 뿐만 아니라, 권력/욕망이 모든 순환[회로]을 통해 스며드는 욕망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권력의 문제가 단지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의 문제,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권력 관계를 특징짓는 리비도적 투자들의 문제, 피억압자들의 유순함과 자신들의 억압에 있어서의 공모의 문제라는 것을, 뿐만 아니라 훈육적 규제의 광범한 순환들 전반에 걸쳐 있는 강제(coercion) 심리(mentality)의 만연한 확산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제의 억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억압자들 및 피억압자들의 위치가 권력-욕망의 일차적인 순환의 이차적인 생산물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억압은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 양자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욕망의 이런 혹은 저런 아쌍블라주로부터, 기계의 이런 혹은 저런 상태로부터 흘러 나온다. ······ 억압이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K 103; 56)
하지만 카프카가 법을 욕망하는 기계로 전사하는 것은 또한 기계를 분해하는 것이며, 지배와 권위의 세력들이 예견할 수 없는 배치들 속에 풀려지고, 재구축되고 재배치되는 방식들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하는 생산에 두 개의 극 - 배제적이고 분리적인 흐름들의 분할인 편집증적인 극과 포함적이고 조합적인 흐름들의 종합인 분열적 극 - 을 설정했음을 기억한다. 카프카는 법에 대한 편집증적인 관점을, 중앙집중화되고 거리가 멀고, 전제적이고, 관리들・조수들・보조자들이라는 복잡한 관료제를 통해 구획되어 있고 관리되는 것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또한 법의 분열적 배치를, 법정 체계를 규정되지 않는 관계들 속에서 연결하는 수단이라고 상술한다. 은행은 은행 저장 사실(私室)을 통해 처벌 장치에 연결된다. 티토렐리의 작업실과 법정들은 도시의 반대편에 면해 있지만, 작업실의 뒷문은 법정으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공동주택 건물은 재판소를 수용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교체가능한 사무실들의 미로를 가지고 있다. 세탁부 프뢸린 뷔르스트너와 레니는 접속구들로 기능하면서 K를 사법률 기계의 초현실적 미궁 속의 다양한 길들로 내려 보낸다. K 자신은 하나의 전환(switching)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면서 법의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는 접속들을 매 접합 때마다 탐험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사법에 속한다면, 모든 사람이 사제에서 어린 소녀에 이르기까지 사법의 보조물이라면, 그것은 법의 초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내재성에 의한 것이다.”(K 92; 50)
하지만 편집증적 및 분열적 극들이 모두 욕망의 극들임을, 법의 배제적이고 분리적인 적용과 법의 포함적이고 조합적인 활용이 사회적 장에서는 언제나 둘 모두 활동적임을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공존하는 욕망의 상태는 법의 두 가지 상태이다. 한편으로 초월적인 편집증적 법은 결코 유한한 단편(segment)을 진동시켜서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대상으로 만들고, 이것 혹은 저것으로 결정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내재적인 분열-법은 하나의 사법[정의]처럼, 하나의 반법(反法)처럼, 편집증적 법을 그것의 모든 아쌍블라주들 속에서 분해하는 하나의 ‘절차’처럼 기능한다.”(K 108-9; 59) 『소송』의 모든 곳에서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규제들은 부과되고 있으며, 동시에  파열적이고(disruptive) 돌연변이적인 연결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쌍블라주라는 말로 사회적 재현들을 전사하는 것은 편집증적인 법 내부에서 분열-법의 내재성을 펼치는 것이자, 법적 체계를 구성하는 낯익고 상식적인 요소들이 실제로 거대기계의 구성요소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거대기계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의 편집증적이고 위계적인 법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기계의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연접적, 이접적, 통접적 종합들을 형성하는 분열-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분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동일한 것 - 내재성의 아쌍블라주들의 발견, 그리고 그것들의 분해 - 이다.”(K 109; 59)
그러나 전사와 분해의 작동들이 동일한 것인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만약 카프카가 법의 사회적 재현들을 편재하는 법적 기계의 아쌍블라주들의 맥락에서 전사한다면, 그는 비관례적인 형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현실들을 단순하게 다시 서술하고 있지 않다. 카프카가 야누흐(?)에게 말한 바처럼, 만약 예술이 거울이라면, 그것은 “언젠가, 시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거울이다.(Janouch 143)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의 예술은 미래의 거울이며, 『소송』의 사법적 기계장치에서 우리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사악한 권력들”(K 74; 41)을 발견할 수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러한 권력들을 자본주의 미국, 스탈린주의적 러시아, 그리고 나치 독일의 관료적 상태들과 동일시한다. 다른 사람들은 현대의 경찰 국가들, 전체주의적인 체제들, 그리고 익명적인 관료제들에 대한 카프카의 선견지명이 있는 이해에 대해 논평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가 단순히 통찰력 있는 예언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소송』과 같은 작품들에서 그가 그의 시대에 현존하지만 나중에서야 자본주의적인, 스탈린주의적인, 파시즘적인 관료제들의 구체적인 형태들 속에서 현실화되는 펼쳐지는 관계들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그리고 특히 카프카가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 재해 보험 회사에서) 작동하고 있는 일반화된 관료제적인, 경찰-국가적인, 전체주의적인 “기능” -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추상적 기계”라고 부르게 될 - 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체적인 아쌍블라주들 속에서 현실화되지만, 그것은 “탈주선들”의 가상실효적 평면으로서의 그러한 아쌍블라주들과 함께, 되기[생성]의 경향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잠재적인 현실화를 향하는 운동 방향들과 함께 공존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주어진 사회 질서의 현실적 아쌍블라주들은, 경향들과 생성들의 벡터들을 갖춘 이러한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의 실존을 전제하지만, 이 가상실효적 기능, 즉 추상적 기계에 의해 그려지는 선들을 따라 형태를 취한다. 그와 동시에 이 일반화된 기능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추상적 기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표지 역할(pilot role)”을 수행한다. “추상적 혹은 도식적 기계는,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재현하기 위하여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실제적인 것, 새로운 유형의 현실을 구축한다.”(MP 177; 142) 그러한 “도래할 실제적인 것”은 다양한 형태들을 띤다 -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적인 미국, 스탈린주의적인 러시아, 나치 독일의 관료제들. 비록 이것들이 이러한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에 의해 생산될 수 있었던 유일한 형태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모델의 복잡들 중의 하나가 욕망하는 생산에 내재하는 편집증적 및 분열적 극들의 공존으로부터 나타난다. 모든 사회적 질서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서는) 기존 질서의 변조, 근절, 재규정 혹은 재배치를 통해 실존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제는 오직 사회관계들, 코드들의 재기입, 물질적 대상들과 실천들의 재배치들의 복잡한 계열들을 통해서만 구체화된다. 그러한 제국적 관료제가 아무리 고정적이고, 대단하고, 구획적이고 위계적이 되어 나타나거나 그런 모습으로 실현되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형성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이중적 과정, 코드들과 관계들의 삭제와 다시 쓰기의 이중적 과정을 통해서 발생한다.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제국적 관료제의 형성에 있어서 표지 역할을 수행하며, 관료제 장치의 엄격하고 계층화된 형태들 속에서 동시에 재영토화하는 탈영토화의 길들을 열어놓는다. 하지만 탈영토화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은 제국적 관료제 내부에 실존하며 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국적 관료제의 다른 사회 형태들로의 변신들을 위한 표지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 자체는 동시적인 탈영토화 및 재영토화의 선들을 따라 구축될 것이다. 탈영토화 및 재영토화의 이러한 가상실효적 벡터들이 어떤 특정한 형태들을 띠게 될지는 미리 결정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다양한 “미래의 사악한 권력들”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그와 꼭 마찬가지로 현재의 질서보다 더 좋은 사회 질서들로 귀결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유리한 위치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혁명적 기능을 고찰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의 계획이나 설계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어떠한 혁명적 행동 개념도 거부한다. 오히려 혁명적 행동은 변신, 변화, 생성을 통해, 좀체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현재의 견딜 수 없는 상황의 변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변신의 선들은 언제나 탈영토화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의 형태 속에서 실제로 현존하며, 혁명적 행동은 단순히, 특별한 사회 체제에 의해 안정화되고, 형성되고, 코드화되고 있는 [어떤 것들을] 탈안정화하고, 탈형성하고, 탈코드화하는 힘들의 강렬화(intensification)를 통해 자신의 실현을 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카프카의 정치적 전략은 억압적인 제도들에 저항하거나 유토피아적 대안들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이미 현존하고 있는 탈영토화하는 경향들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집단적 및 사회적 기계들이 인간 존재들의 엄청난 탈영토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카프카는] 그러한 경로를 따라, 절대적인, 분자적인 탈영토화의 지점까지 훨씬 더 나아갈 것이다. 비판은 완전히 무용하다.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이미 실제적인 가상실효적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체제 옹호자들, 관료들은 항상 이런 혹은 저런 순간에 운동을 정지시키고 있다).”(K 107; 58) 이러한 가속화된 탈영토화가 긍정적인 결과들을 낳을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 사이에는, 편집증적인 욕망하는 생산과 분열적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하나의 수프, 즉 관료제적인 혹은 파시즘적인 부분들이 여전히 혹은 언제나 혁명적 진동 속에 존재하는 단편적인 죽과 같기 때문이다.”(K 109-10; 60) 따라서 “우리는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 사이에, 혹은 심지어 욕망의 상이한 종류들 사이에 구분을 정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모두 역시 가능한 미래로 끌고 가야 한다. 비록 탈주 혹은 행진의 선들이 온건하고, 진동하며, 심지어 -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이 운동이 또한 그러한 선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을 희망하면서 말이다.”(K 107-8; 59)
그러므로 『소송』에서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법적 체계에 내재하는 관계들의 복잡함의 사회적 재현들에서 시작하고, 그것들을 사회적 기계의 다중적인 아쌍블라주의 용어들로 전사한다. 낯익은 법 체계는 삶의 모든 측면들로 확산하는 권력의 증식 메커니즘이 되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의 기능하기는 관계들의 편집증적이고 영토화하는 제한들과 법전화[코드화]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분열적이고 탈영토화하는 그물망들과 탈코드화에 의해서 동시에 방향잡혀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기계는 자신을 구축함과 동시에 분해하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기계를 전사하고 분해하는 것이 동일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카프카는 또한 기계의 탈영토화하는 운동들을 가속화하고, 기계의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연결들을 증식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래의 사악한 권력들”로 귀결되는 변신적 경향들을 드러내지만, 현실화될 혁명적 가능성들 역시 드러낸다. 그는 사회적인 제도들에 대해 논평하거나 대안들을 제시하기보다, 그의 세계 안에 내재하는 가상실효적인 탈주선들에 대해 실험을 행한다. 그는 “이미 사회적 장을 가로지는 전체 운동을 연장하고, 가속화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능동적인(acitve) 분해 방법”을 채택한다. “그것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실제적인, 가상실효적 영역에서 작동한다.”(K 88-89; 48) 이 방법은 “하나의 해석도, 하나의 사회적 재현도 아니며”, “하나의 실험, 하나의 사회정치적 프로토콜”이다.(K 89; 49). 따라서 분해하기, 다시 말해 전사와 함께 있는 분해하기는 또한 실험이며, 이러한 점에서 『소송』은 “과학적 고찰, 기계의 기능하기에 대한 실험 보고서이다.”(K 80;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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