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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 임 봄 , 문학평론가
2018년 11월 03일 20시 36분  조회:1046  추천:0  작성자: 강려
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고래와 수증기』를 통해 본 김경주의 시세계
  
 
 
                                                             임 봄,  문확평론가
 
 
 
 
 
시의 특권이자 기쁨은 낯선 이미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이 개념에 저항하며 포괄적 세계를 구성한다는 데 있다. 엘리아데는 “이미지들은 모두 無明으로부터 깨달음으로의 이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는 젊은 시들의 경우 단어와 기호 등 다양한 이종교배 형식으로 파장이 깊고 넓고 복잡해졌으며 예전에 비해 특별한 메시지를 담지 않으려는 경향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무정형의 시들은 독자에게 어떤 과제를 부여하는 느낌도 든다. 현대시 독법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이런 힌트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그 힌트들은 대부분 이미지로 주어지고 상징계와 상상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때론 모호하게 때론 도발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시뮬라시옹이 난무하는 현대의 이미지즘은 젊은 시인들의 시 속에서 기이하게 분절된 이미지로 낯설지만 나름대로의 새로운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무엇을 내포하고 어떤 형식을 구성하며 흐르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경주 시인을 지칭할 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단어는 ‘천재’다. 특히 『기담』에서 보여준 다양한 시적 실험들과 그 실험을 통해 생산된 다양하고 현란한 이미지들은 많은 시인과 평론가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일명 ‘프랑켄슈타인어’라는 말이 붙기도 했으며 ‘괴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런 화려한 명성에 비한다면 시인이 이번에 발표한 『고래와 수증기』는 단순하고 평범해 보인다. 첫 번째 시집에서 보여준 낭만적 언어들의 퍼포먼스나 장르의 문법을 넘나드는 현란한 시적 실험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으며 뜻을 최대한 되살린 시적 언어들이 각 행마다 깊고 확장된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동안 다양하게 모색됐던 그의 시적 실험들이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반갑다. 김경주의 시에는 언어가 갖는 실재들이 기호화하며 때론 전체적인 문맥을 벗어난 독립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때론 각각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전체 속으로 녹아들며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파레르곤’, 처음과 끝이 사라진 이미지들
 
  김경주의 시에서 언어와 기호들로 이뤄진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의 전체적인 의미로 볼 때 의미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를 하나로 꿰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뒤흔들지만 그렇다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작품을 발생시킨다.
 
  데리다는 그의 저서 『호화 속의 진리』 에서 하나의 작품이나 원작에 영향을 미치며 서고 간의 경계를 없애는 존재를 ‘파레르곤’이라 정의한다. 파레르곤은 미술작품의 경우 액자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거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전에 제작했던 다양한 소품들이 원작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김경주의 시에서 하나의 작품을 위해 만들어지는 각각의 이미지들 역시 전체적인 시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고 나중에는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개개의 이미지를 소멸시키고 있다. 낯설지 않은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이미지들은 시 전체적인 메시지나 형식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파레르곤으로 기능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시를 완성하는 파레르곤 현상들은 김경주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이다.
 
  순록들 내 입술 위를 걸어간다
  혀로 발아래 얼음을 핥으며 간다
 
  얼음 밑에 거꾸로 떠오른
  누군가의 희멀건 발바닥을 핥는다
 
  순록은 내 입술을 뜯어 먹는다 차가운 나무뿌리를,
  얼어 죽은 새끼 순록의 뿔에서 돋아난
  푸른 잎사귀들을 뜯어 먹는다
 
  수염고래 한 마리가
  내 입술 위로 올라온 적도 있다
  귀가 뜨거워지면 얼음이 녹아내리므로
  순록은 가만히 퍼덕이는 고래를 핥았다
  내 입술에 쌓인 나뭇잎 아래서 순록은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순록은 내 입술 위에 앉아
  수평선이 혀에 얼어붙을 때까지
  서러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눈들의 지느러미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설국(雪國)으로 끌려가서 비관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암각(暗角)이 되기도 했어요
  속눈썹을 얼음 위로
  하나씩 떨어뜨리며
  되돌아오는 길을 표시했지요
 
  행렬 속에서 길을 잃고
  얼음 위에 서서 잠들어버린 순록은,
  봄이 되면 내 입술 위의 따뜻한 얼음이 된다
  살얼음 아래로 녹아내려 내 입술이 된다
 
  내 입술 위의 벼랑 끝에서
  순록들은 아슬아슬하다 
 
  - 「내 입술 위 순록들」 전문
 
  김경주의 시에서 이미지들은 서로를 연결하며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느리게 음미할수록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현실이나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며 독자들에게 낯선 세계를 부여한다. 시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신선하고 새롭다. “입술”과 “순록”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단어다. 그러나 타자와의 소통을 꾀하는 입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눈 덮인 북극지방에 사는 순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시적자아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멀지 않은 심연에서 파견돼 의미 없이 분절된 낱말들은 표면 위에서 스스로 직조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파레르곤적인 이미지들은 때로 단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주어와 서술어를 가진 하나의 문장이 될 수도 있다. 기호가 될 수도 있고, 행간의 침묵이 될 수도 있다. 입술과 순록은 본연의 이미지에서 탈주하고 서로 접속을 꾀하면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어쩌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숙명을 보는 것도 같다.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힌 시인은 자신의 분신이자 입술의 분신인 순록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적기법으로 아름답고 슬픈 동화 같은 시 한편을 선보이고 있다.
 
  좁고 어두운 입술의 안쪽과 광활한 입술의 바깥쪽이 얼음으로 차단되면서 말을 잃어버린 자아는 세계와의 단절을 겪는다. 그에게 있어 “수염고래”는 감춰둔 이드(ID)로 세상 속에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면 “귀가 뜨거워지”고 그로인해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상과의 단절이자 자신을 가두는 존재인 얼음은 녹이기 힘든 존재이자 녹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고립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김경주는 이런 숙명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입술이 순록을 낳고 순록이 다시 입술이 되는 무한순환을 통해 처음과 끝을 상실한 각각의 이미지들은 김경주에게 있어 윤회의 삶을 성찰하는 자세이며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순록이 뱉어내는 서러운 독백은 시인의 독백이며 때론 모호한 이미지로 시를 쓰는 미래파 시인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절벽에 표류된
  등반가
  품에서 지도를 꺼낸다
  협곡을 후 불어
  밀어내고 있다
 
  날아가는 협곡들
 
  바위가 부었다
  조용히
  연필을 깎는다
 
  지우개는 면도 중이다
 
  햇볕이 서서 졸다가
  발밑에서 잠들었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 
 
  -「백치」 전문
 
  행이나 연들은 완성된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며 투명해진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날아가는 협곡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라는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선명한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백치’라는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향해 마치 짧은 영화필름을 돌리듯이 전개되며 서로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모든 필름이 상영된 후 남겨진 이미지들은 ‘백치’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쏠리면서 점차 페이드아웃(fade-out) 된다. 여기서 각각의 이미지가 내포하는 의미들을 하나하나 쫓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희미한 기의들을 따라가고 그 이미지들이 연결되면서 최종적으로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만 떠올리면 된다. 그 이미지는 본연의 이미지와 연결된 것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시인마다 갖고 있는 무늬이자 세상을 읽는 시인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김경주의 파레르곤 방식의 이미지들은 시인이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탈주를 감행하며 자신만의 시적세계를 구축해내는 도구, 주체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시인의 독특한 사유 방식인 셈이다.
 

  감각의 노마드과 탈주의 상상력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새 떼를 쓸다」 전문
 
  노마드는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체의 방식은 철학적 개념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까지도 두루 포괄하고 있다. 노마드는 단순한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땅으로 바꾸는 것,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가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노마드는 김경주 시의 기저에 깔려 있는 자유로운 사유의 여행이다.
 
  일반적으로 ‘새’는 ‘자유’의 상징이다. 새와 자유는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다. 현실과 이상의 이 기묘한 조합은 새라는 상징물과 탈주를 도모하는 시인의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새로움을 시도하는 탈주, 그리고 그 지점에 시인의 상상력이 접속했을 때 새는 비로소 자유와 비상을 꿈꾸는 제3의 존재로 재탄생 한다.
  ‘A=∞’를 만들어내는 이런 이미지 공식은 현대 시단에 쏟아지는 시들에서 많이 접하게 되는 것으로 김경주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러나 김경주가 생산해 내는 이미지들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평범한 단어들을 조합해 낯설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과 그 이미지에 오래 머물수록 더 깊은 의미의 울림을 음미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것들은 편안하고 낯익었던 세계에 독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특정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비상하는 ‘새’는 시인의 시작詩作을 위한 도구적 방식으로 이번 시집에는 유독 이런 새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김경주의 ‘새’는 시인의 본질이 노마드에 닿아있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시를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새 떼’로 표현되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간절함은 어느새 역동성을 갖는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상상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존재다. 모든 시의 기저에는 자유가 있으며 자유가 사라진 문학은 상상하기 어렵다. 감각은 예리하게 벼려있는 날선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길들여진 감각은 이미 죽은 감각이다. 야생에서 먹이를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본능적인 행위다. 이런 본능에서 살아있는 감각이 사유된다. 김경주의 시 쓰기는 이런 야생의 살아있는 번득임에서 비롯되고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그래서 낯설지만 신선하다.
 
  새 떼가 날아오르는 것을 “찬 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로 비유하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 역시 이런 자유의 기저 아래서만 사유될 수 있다. 한꺼번에 날아오른 새 떼를 좇으며 시인은 자유를 갈구하는 욕망을 표출해낸다. 새 떼는 시인의 시적 발화지점이기 때문이다. “새 떼”의 “종아리에”는 “능선”도 걸려있고 “찔레꽃”도 피어있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만드는 시적인 영감들이 “내 몸을 통과” 할 때까지 시인은 오랜 기다림을 갖는다. 이곳에 시적화자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시인은 시가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존재다. 시가 스스로 찾아오는 일, 오랜 기다림을 거치면서도 시마가 찾아기를 기다리는 건 어쩌면 시인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가 있을 거라 믿으며 새의 날개를 좇고 죽어 떨어진 새를 쓸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시가 찾아올 거라 믿는 믿음 때문이다.
 
  시를 갈구하는 시인은 자다가도 “혀에 하얀 새 떼가/ 돋아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이 날숨으론/ 말語에게 돌아갈 수 없다”(「詩作-干涉」)고 탄식하기도 한다. 시는 시인에게 있어 “두 눈이 없이 태어나/ 평생 서로를 몰라보는 쌍둥이”이고 “한 눈씩 나누어 가지고 태어나/ 평생 서로의 몸을 그리워할 쌍둥이”(사시斜視-시인의 피3)인 것이다.
 

  미시세계를 꿈꾸는 시어들
 
  거시적 환경에 익숙한 우리는 미시적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진 않다. 미시적 세계에서 ‘이것’은 ‘저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또한 ‘저것’은 ‘이것’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두 개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나는 뉴튼의 법칙이 적용되는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시세계’와 원자처럼 아주 작은 단위로 내려갔을 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이 서로 연결되고 쌓여 겉으로 드러난 세상이 거시세계라면 미시세계는 거시세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나 또는 허공처럼 형상이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우리는 대부분 지구에서 허용하는 법칙, 즉 개념에 익숙해져 있지만 개념을 벗어나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더 많은 신비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만일 이런 과학의 양자역학을 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운이다. 시는 가장 함축적인 문장으로 가장 거대한 담론을 지향하는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김경주가 이전에 비해 한 단계 올라섰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동안의 시 쓰기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가’라는 점에 천착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나’ 하는 점에 천착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새 떼에 걸려,
 
  문장은 기척을 내기도 한다
 
  내 얼굴에서 내려야 하는데
  얼굴을 놓쳐버린 뺨처럼
 
  문장은 행진곡을 못 듣고
  횃불로 들어가
  날을 지새운다
  기척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내 난동과
  잘 지내야 하는데
 
  꿈속의 새가
  내 배게위에 침을 흘린다
  침으로 기울고 있는
  내 얼굴처럼
 
  문장은 나의 타향살이다
 
  기척도 없이
  나를 떠난다 
 
  -「기척도 없이」전문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는 가장 최소한의 언어로 시 본래의 원형을 찾아가고 최소한의 문장과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여백 속에서 한층 확장된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각각의 행은 ‘주어+서술어’로 만들어진 문장이 대부분이며 가장 긴 문장도 ‘주어+목적어+서술어’를 넘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연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런 시적기법의 가장 큰 효과는 호흡을 그곳에서 멈추게 해 의미를 오래 되새김질 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그가 적절하게 배치하는 쉼표나 마침표들은 이런 여백에 더 강한 울림으로 작용한다.
 
  「13월의 월령체」에서는 1월부터 12월까지를 숲·그림자·햇볕·진눈깨비·속주머니·헬멧·밤·빵·집·악어포클레인·동물원·동전·달·새로 형상화해 그려내는데 문장마다 마침표를 찍어 각각의 달마다 갖고 있는 이미지들이 다름을 단적으로 표현해내고 다른 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효과적 장치를 하고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면 하나의 행이 단어 하나로 이뤄진 시가 어떤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문장들
  통성명
  하지 않아
  출생신고
  하러 온
  이미지들
 
  -중략-
 
  공원의 침들
  좋아
  발 없이 굴러간
  비눗방울
  좋아
  아무도 모르는 방
  세만
  놓지
 
   -「시인의 피 4」 부분
 
  “문장들” “통성명” “출생신고” “비눗방울” “좋아” 등은 이 자체로 하나의 행이다. 긴 문장에 삽입돼 요소로 전락한 단어들과는 달리 이 자체만으로 확장된 의미를 갖는다. 문장들은 단순한 문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출생신고 역시 그 외에 부가적으로 존재하는 많은 사연들로 의미를 확장시킨다. 언어의 미시적 효과를 톡톡히 얻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구사하도록 만드는 것은 단어가 주는 여백에 있으며 미시적 요소들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다. 김경주의 시에는 이런 미시적 세계가 주는 울림으로 더 큰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더 큰 시적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인의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고, 끊임없이 접속을 꾀하고, 끊임없이 낯선 이미지로 구축된 새로운 고원을 탈환해 내는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 언어들의 미시적 접근을 통해 시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여백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세계를 담아내는 그의 행보는 향후 그가 보여줄 시들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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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봄, 문학평론가
 ​
197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문학석사. 2009년 계간 《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계간 《시와 사상》 평론부문 당선.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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