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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강희안
2018년 11월 06일 12시 29분  조회:29  추천:0  작성자: 강려
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애지문학회 사화집, 『날개가 필요하다』(종려나무, 2009)에 대하여


강희안




1. 혼질적 기호의 파장을 찾아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서 변하지 않고 본질적이며 사회적인 언어 체계를 랑그, 혼질적이고 비본질적인 언어 체계를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signifie, 시니피에)의 관계를 지녔다는 특징을 지닌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란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사회에서 공인된 언어를 말한다. 즉 이 말은 여러 가지 상황에도 절대 변화하지 않고 언어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본질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이와는 상대적인 관점의 파롤은 현실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개인이 사용하는 구체적인 언어를 지칭한다. 랑그와 파롤의 관계는 기표와 기의로 설명할 수 있는데, 낱말들의 음성을 나타내는 기표와 낱말들의 개별적인 뜻을 나타내는 기의의 결합으로 개개의 낱말들이 자의적인 차이를 나타낸다는 말과 동일하다. 언어학에서 자의적이라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우연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에서는 상상력을 통해 누가 그 간극을 다변화하는가에 따라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라는 매체의 특성이 기존의 언어 관념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정서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애지문학회에서 낸 사화집의 시편들은 서로 유사한 랑그로써 세계와 언어의 자의식을 각기 다른 파롤의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어 이채롭다.




2. 개인적 랑그, 사회 파열의 자의식


랑그와 파롤의 개념을 처음 창안한 소쉬르는 언어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랑그밖에 없다고 단정했는데, 그것은 파롤이 상황에 따라 쓰이는 느낌, 또는 뉘앙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공적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독창적인 개성을 강조하는 시적 언어인 경우에는 파롤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과 의미 구성체인 시니피에의 개념을 착안한다. 언어는 표층적인 음운 구조와 그 이면의 의미 구조를 동시에 지니며, 이 두 구조는 불가분의 행복한 결합 관계라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 이론에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보탠 자크 라캉은 기호 표지인 시니피앙이 단순한 음성 이미지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을 배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 이 본질인 시니피에를 견인한다는 이론이다. 라캉의 언어철학은 현대 시인들의 언어 의식과 세계 인식에 강력한 파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어적 관념은 이 글에서 다루는 애지문학회 시인들에게서도 주류를 형성할 만큼 강력한 인자로 작동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그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다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병력을 컴퓨터 자판에 두드리면 네모 번듯한 운세가 슬픈 바코드로 떠오른다 아무 이유 없이 궁합이 맞지 않듯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전봇대의 전단지처럼 생사의 모호한 경계를 사람들이 참새처럼 몸을 떨고 있다 수만 볼트의 전깃줄에 꿈적도 하지 않는 참새 한 마리, 발바닥이 간지러운지 끊임없이 발 바꾸기를 한다 벼랑 끝에서 당당한 맨발은 없다 오늘도 그는 시한부 선고 중이다
― 김연종, 「돌팔이 의사 생존법」 전문


김연종은 근작시에서도 보여지듯 능청을 떨면서 세태를 꼬집는 알레고리를 자유자재롭게 구사하는 시인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임상체험에서 얻은 시적 모티프를 재미있고 맛깔스럽게 알레고리화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인용시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작품으로서 자본을 위해서 목숨값을 흥정하는 의사의 권력을 풍자하고 있다.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돌팔이 의사’(기표)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기의)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병자들의 유약한 특성을 이용하여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는 기표를 통해 권력의 위악성이란 어처구니없는 기의를 드러낸다. 나아가 그가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시의 화자는 무엇보다도 비상동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삶의 이율배반적 허위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권력에 방기된 병약한 인간들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하게 발생하는 기의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 갔을까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
한 개로 압축된 목,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


두 눈으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뱉어지는 눈곱 같은 질문
두 귀로 밀려와서 하나의 입으로 쏟아지는 귀지 같은 상념
두 코로 달려들어 하나의 입으로 들어오는 꼬딱지 같은 먹이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
이어지는 
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다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다
― 김혁분, 「구멍에 대한 담론」 부분


김혁분은 풍요로운 이미지보다는 사유 쪽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 장기를 지닌 시인이다. 인용시에서도 사람의 ‘입’이라는 구멍에 대한 사유의 기표가 ‘항문’이라는 기의로 환치되는 구조적 역설을 보여준다. 시의 화자는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한 개로 압축된 목”을 제시하면서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라는 전제를 내세운다. “두 눈”이나 “두 귀”, “두 코”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배출하는 일이란 “질문”이나 “상념”이나 “먹이”라는 기의를 얻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삶이란 기실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이어지는/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로 요약된다는 전언이리라. 따라서 화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며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입으로는 향기로운 척하지만 뒤가 구린 인간의 생,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채 “후끈한 염문”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독설”로써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인간들의 비애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부분이다. 따라서 인용시는 하나의 ‘입’이란 기표는 결국 ‘항문’의 기의와 동일하다는 역설적인 감각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정위된다.


새벽잠이 점점 없어져 갈 때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항문의 괄약근만은 아니다


아래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면야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은근슬쩍 뒤처리도 염려 없으니
불안함 한 덩이쯤 탈 없으나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
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
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
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입의 괄약근이다


― 박현, 「괄약근에 대하여」 부분


박현의 시는 젊은 시인답게 현대적인 다양한 소재를 차용하여 도발적인 상상력의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주로 ‘악어가방’을 통한 문명비판, 자본주의적인 위악성 풍자, 나아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도저한 언어의 저돌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용시 「괄약근에 대하여」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편에 속한다. 여기서의 ‘괄약근’(기표)은 ‘입’(기의)과 동일화의 범주로 포섭하여 무리 없이 형상화한다. 항문의 괄약근으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거나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불안함 한 덩이쯤”은 별 문제 없겠다고 단언한다. 곧이어 화자는 그 다음 연에서 기표를 뒤집는 아이러니한 상상력을 선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입의 괄약근”이라는 실존적인 진실의 발견이다. 따라서 화자는 ‘항문의 괄약근’이란 기표와는 다르게 ‘입’이란 기표는 “힘주어 꼭 다물지 않으”면 “빠지지도 녹슬지도 않는 미늘”로 남아 “염치 모르는 생채기”(기의)를 남긴다는 쓰디쓴 전언을 남긴다. 마지막 연의 “견뎌 낸 시간이/치욕이 되지 않기 위해선/괄약근 관리에 힘쓸 일”이란 진술이 설득력을 배가하는 이유도 바로 그 까닭이다.


허, 그란디그란디 이 말은 꼭 해야쓰겄소
쌀 무시 달걀 마늘 밀가리 동동주 되야지괴기값, 게다가 우마차비(費)에 동네 또랑에서 멱 감는 돈꺼정 나라에서 직접 관리허겄다고 했담서요 와따매 요것은, 항꾸네 생산해서 항꾸네 나눠 묵자 식(式) 이데올로기를 가진, 저 웃녘 추운 나라 어떤 독재자가 실패허고 확 조져분 이론이여라 전하, 통촉허씨요야
이바구 끌텅을 파다본께, 동네 의원(醫院) 갈 때 나라에서 주는 보조비부텀 주택청 토지청 파발청 저수지청 등등 나라에서 운영허는 각종 청(廳), 말 안 듣는 신문청 방송청을 돈 많은 상단(商團)으로 팔아분다는 전하의 야리꾸리헌 경제구상꺼정, 헐 말쌈이 오살나게 많아분디 오늘은 진짜로 그만허것소
나도 목구녕이 포도청이요, 말은 요로코롬 촉새거치 했지만 공마당에 촛불 쓰로 갈라, 포대기채 걷어 가불까 싶은께 데불고가지 못허고 하루씩 돌아감시롱 각시 대신 애새끼 볼라, 눈구녕 뛩그랗게 까제낀 욱엣놈 눈치 살필라, 허벌나게 바뿌요야 금메, 하루하루가 살강 욱에 요년허니 영거져 있는 밥그럭 신세당께요
― 양해열, 「옹색지(壅塞誌)」 부분


양해열의 시는 80년대 김지하의 「五賊」이란 시를 방불케 하는 풍자의 구조(기표)로서 시대의 환부(기의)를 통렬하게 짚어내는 특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전통적 형태로써 현대적 리얼리즘 시의 계보를 잇고 있어 주목할 만한 신인이다. 그의 걸쭉한 입담은 가히 판소리를 차용한 김지하의 담시(譚詩)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의 시는 재치를 앞세워 불합리한 세태의 문제를 해학적 어조로써 꼬집어 낸다. 남도 사투리의 자유자재로운 운용은 결국 서민들의 애환을 담지하는 특장을 지니는 바 시의 질박한 서민들의 애환을 자연스럽게 표백하는 특질까지 함유한다. 권력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거대 리얼리즘이 퇴조하는 우리 시단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긴요한 신인을 얻었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현실에 산재한 불합리한 모순의 문제를 질박한 남도사투리의 어조로써 유장하게 끌고 나간다. 인용 부분은 현 이명박 정부가 자가당착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 즉 공영화와 민영화 문제가 뒤바뀐 현실에 대해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능청스런 해학을 동반하고 있어 흥미롭게 다가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육덕진 그의 입담(기표)에 잘근잘근 씹히는 권력의 허구(기의)를 목도하는 쾌감에 동참한 듯하다.


낚시에 걸린 학꽁치가 날고 있다
팔 할이 시퍼런 멍 자국이다
살 속에 탱탱한 가시 박아 넣느라고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
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을 냉큼
업어 달아나는 파도,


서로 기대본 적 없는 파도의 등을
낮달이 등(燈) 되어 준다.
― 윤영숙, 「파도, 등 푸른」 부분


윤영숙은 서슬 푸른 독기의 기표로써 시의 이미지의 파장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이를 다시 기의로 응집해 내는 저력이 돋보인다. 예를 들면 생명의 힘이란 정서를 “수액 당겨 꽃 피워내는 아귀 같은 힘”(「아이리스 벽화」)이라거나 “물관의 중심이 비틀려 옹이 박혔을 것”(「겹 겹」)이라는 언표로 일갈하는 대목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시의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갈기 휘날리며 밀어붙이던 파도에도/뼈가 있고, 등이 있어 뛰고/휘어지고 굽다가 거꾸러”진다고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나아가 “아버지가 골진 등짝으로 나를 키웠듯/파도는 거꾸러지는 등의 힘으로/등 푸른 생선을 키우고/등대 허리 꼿꼿이 잡아 세”운다고 은유화하고 있다. 더구나 ‘학꽁치’의 이미지를 빌려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에 박힌 푸른 멍의 이미지를 초점화하면서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고 부연한다. 나아가 시의 화자는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 파도의 등”과 “낮달이 등(燈)”을 pun의 고리로 엮어 동일화하기 위한 은유 전략이리라. 인용시는 ‘파도의 등’(기표1)에서 출발하여 ‘아버지의 등’(기표2), ‘학꽁치의 등’(기표3), 그리고 ‘낮달의 등(燈)’(기표4)으로 이어지면서 둥근 중심을 세워 고통과 맞서는 도약의 에너지(기의)를 분출하고 있는 환유적인 고리가 예사롭지 않다.


휴일 봄날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한다
잔돈에 커피까지 대접하며 전표함에 두었는데
퇴근시간 다 되어 뱀 한 마리 튀어 나왔다
어디에 있었나? 저 뱀
모두들 놀라 손사래를 치는데
전표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뱀이 대가리 들고 내게 오더니
마치 내 잘못을 질책이라도 하듯 뒤통수를 깨물었다
아차, 내 수기계산이 잘못되었다고
발버둥치는 나, 툭툭 터지는 봄꽃들
얼른 지갑을 털어 대납했음에도
오랜 시간 물고 늘어지던 긴 그림자
― 이광구, 「뱀」 부분


이광구의 시에는 소소한 일상에서 겪는 삶의 비애가 잔잔한 수채화 물감 번지듯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근작 시편들에서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그는 섬세하고도 따뜻한 마음결을 지닌 시인이 분명하다.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뱀’이라는 기표를 실제의 뱀과는 무관하게 삶의 어떤 ‘비가시적인 힘’의 상징으로 차용하여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드러낸다. 화자는 “휴일 봄날”에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하다가 퇴근 무렵이 되어서 “뱀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고 진술한다. 그 뱀은 양심이어도 좋고, 상사의 의심에 어린 눈초리여도 좋고 그 무엇이어도 무방한 상징이다. 그만큼 ‘뱀’이라는 기표는 우리의 도처에 산재하는 권력이어도 좋고, 자본에 휩쓸리는 소시민들의 일상이라는 기의여도 상관없다. 그만큼 상징의 장력이 크다는 것은 시의 파롤의 힘을 배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따뜻한 시가 갈수록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
귀에 그 구멍을 대고
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


<중략>


활자도 지워지고
얼굴도 지워졌다


드디어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었다
똥의 말을 말없이 받아주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
― 정준영, 「주름」 부분


정준영의 시는 현미경적 관찰을 토대로 하여 일상의 소재를 아주 감각적으로 새롭게 재구하는 특질을 내보이고 있다. 인용시에서도 그러한 그의 역량이 충분하게 발휘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힌다. 사소한 일상에서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시의 명제에 충실한 시편들이다. 예를 들어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귀에 그 구멍을 대고/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라는 구절에서도 그의 섬세한 상상적 감수성의 역량이 여실히 발현되어 있다. “활자도 지워지고/얼굴도 지워”져야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는 종이의 기표를 통해 그와는 너무도 먼 간극에 있는 인간이 늙는다는 것의 궁극이란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기의를 꺼내들고 있다. 환언하면 화자가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랑그)는 것이 부드러운 영혼(파롤)을 얻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가편이라 여겨진다.


힘 빼기 연습이다
네트 가까이에 떨어지는 공을 되받아 쳐야 되는 그 순간 모았던 힘을
건듯 놓기 위한


<2연 중략>


몇 겹의 쇠사슬로 서로를 동여매고도 믿기지 않아 발 동동 굴렀던
내, 사랑도 그랬다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을


힘껏 공을 멀리 보내거나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
몸에 새기는 중이다
― 조영심, 「헤어핀 레슨」 부분


조영심은 은유와 상징을 표현 기제로 삼으면서도 자재롭게 인간사의 진실을 크로즈업해 내는 특질을 지닌 시인이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그는 배드민턴 기술 중의 하나인 ‘헤어핀 레슨’이란 특성을 통해 사랑의 역설을 드러낸다. ‘강한 것(기표)은 약한 것보다 못하다(기의)’라는 이 공식은 이 시를 지배하는 조건인 바 인간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시의 화자는 “머리핀을 꽂는 이 손놀림의 작전”은 “허허실실(虛虛實實)”과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여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화자는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몸에 새기는 중”인 것이다. 기존의 고정 관념을 뒤집는 역설은 무엇보다도 기표와 기의의 거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더구나 기존의 이성의 법칙이란 결국 감성의 법칙과는 상대적 관점을 유지한다는 사실의 환기에 기여하는 기제로 차용한 것이다. 그의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필력이 더더욱 날개를 펼치기를 기대해 본다.


생면부지의 꽃과 ‘꽃’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분명
질펀한 교합이었으리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
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
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으리
망설임의 그림자 부산했으리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
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
저 욕정의 이모티콘들
― 최명률, 「오래된 소통」 부분


최명률의 시는 격정적인 언어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중심인데, 인용시는 그 틈서리에서 약간은 비껴서 있는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기표와 기의가 동일한 언표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냥 ‘꽃’과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을 분리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은 ‘조화’(造花)라는 기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화로 상정된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저 욕정의 이모티콘들”이라고 비판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작적인 문명적인 인터넷 기호(기의)를 통해 아주 감각적인 꽃의 이미지(기표)를 현상해 내고 있어 흥미를 유발한다.




3. 어긋난 파롤, 자아 교응의 불문율


소쉬르가 주장한 랑그가 실제적으로 시에 표현된 언어라고 한다면 파롤은 텍스트 생산자인 시인의 무의식층에 자리한 시의식에 비유된다. 그러니까 매번 다르게 문맥적인 구조에 의해 굴절되는 언어의 모습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랑그란 머릿속에 저장된 말, 즉 관습적으로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한한 사회적 언어를 말한다면, 파롤은 실제로 쓰이는 말로서 무한하며 개별성을 지닌다는 특질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이라는 잉여의 부분을 내장하기 때문에 창조적이므로 시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이다. 한문에서의 ‘어’(語, 랑그)가 “이인상어일어(二人相語曰語)”라고 하여 유한한 사회적 언어로서의 소언(小言)이라면, ‘언’(言, 파롤)은 “자언일언(自言曰言)”이라고 해서 개인의 언어를 지칭한다. 무한한 개인적 언어로서의 대어(大言)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 두 가지 계열층을 형성한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기표’로 표현되지만 이차적으로는 시인의 특수한 언어 구조에 의해 재창조된 ‘또 다른 기의’가 내장되기 마련이다. 거개의 시인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것을 다시 조화롭게 동일성의 원리로써 포섭한다. 이는 전통적인 시 형식의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인데, 애지문학회 시인들 중에서 서정시의 기본 원리에 충실한 시편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쉿,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
소리
― 강서완, 「그믐」 부분


강서완의 시는 이미지로 말하는 방식을 터득한 방법론으로서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넓혀 놓는다. ‘그믐밤’의 특성을 의인화하여 시각의 이미지를 청각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감각적인 이미지 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의 원래 기의는 가족 중에 늦게 귀가한 가장이 식구들이 깰까봐 조심해서 들어오는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의미한다.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또한 조심스레 문을 닫는 상황을 암시한다. 나아가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는 나뭇잎 소리의 특성을 생동감 있게 활용하여 자기 전에 몸을 씻는 행위를 연상하게 해준다.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는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고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에서는 그림자가 포개지는 성적 메타포를 끌어들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소리”라는 생명의 격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시각적 현상을 묘사하지 않고 청각적 이미지로 들려주기 때문에 더 생동감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강서완 시인만의 개성적 자질이다. 따라서 2부분에서 “눈 감지 마라//눈 감으면 어둠이다”라는 평범한 표현이 ‘달’이라는 생명의 원형성과 맞물리면서 싱그러운 생명 감각으로 전이되는 경이감을 맛볼 수 있다.


오늘따라 밭이 호미를 튕겨내며 까탈을 부리고 있다
햇살이 짐승의 발톱처럼 파고드는 오후
군대만 생각하면 오줌을 누고 싶다는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가
아!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 같아
등에 멍에를 얹고 나서면 들판이 부스스 일어서고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빛 속으로 느릿느릿 사라지던 아버지


풀을 매고 돌아서 보니 이랑이 하얗게 말라 간다
감자 너머 고추 너머 고구마 너머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
굵고 거친 씨앗들을 촘촘히 넣어본다
― 김종옥, 「멍에고랑」 부분


김종옥 시인은 평범한 일상적 현상을 아주 재치 있게 시로 버무려 낼 줄 아는 섬세한 미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용시도 그러한 감각이 돋보이는 시에 속한다. 화자가 밝힌 ‘멍에고랑’이란 “자갈들이 불거져 있”고 “곡식보다 풀이 더 성”하다가는 “나무들이 느닷없이 들어서”는 곳이다. 시의 화자는 ‘멍에고랑’의 기표에서 출발하여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란 기표와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라는 기의를 결합한다. ‘아이’에게 ‘군대’란 잊히지 않은 “빨갛게 익은 목덜미”의 기표라면 ‘소’의 ‘목덜미’는 멍에로 인해 털이 다 빠진 기의에 속하는 셈이다. 나아가 화자는 소에게 ‘멍에’를 얹는 ‘아버지’에게는 자식이라는 멍에의 기의가 얹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더구나 화자는 하얗게 말라가는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라는 의문점을 제기한다. 거기에는 ‘아이’와 ‘소’의 기표가 ‘아버지’의 등에 짊어진 기의, 즉 ‘자식’이란 멍에로 미끄러지는 환유의 고리가 연쇄되어 있다. 이 같은 투사의 축을 전제로 화자는 척박한 ‘멍에고랑’에는 “굵고 거친 씨앗들”이 제격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이끌어 내는 특질을 선보인다.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에
봄이 오네요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
깊은 잠을 털어내면
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
달그락 달그락
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려요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네요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요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
지그시 웃네요
묻고 싶어져요
울고 있는 바리공주가 보이는지
이곳은 거친 바다예요
― 김지유, 「모란꽃살문」 부분


김지유의 시는 알레고리보다는 싱그러운 서정 감각이 돋보이는 시적 체질을 지닌 듯하다. 「들숨으로 오는 저녁」의 비극적 세계인식에 초점을 두는 시보다 인용시 같은 서정적 시편들이 그의 시적 자질을 보증한다. 인용시는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기표)을 통해 “봄이 오”는 상황(기의)을 예민한 서정의 결로써 포착해낸다. 예를 들어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깊은 잠을 털어내면/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라는 구절에서 감수성 예민한 화자의 언어 감촉이 체감된다. 나아가 화자가 “달그락 달그락/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리는 감성의 결이 결국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는 상황으로 전이하는 감각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따라서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오는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지그시 웃”는 장면으로까지 포착해 내는 섬세한 상상력의 운용도 돋보인다. 다시 말해서 ‘모란꽃살문’이란 기표에서 출발하여 ‘햇봄의 햇살’과 화자인 ‘나’, 그리고 ‘옛사람’의 이미지가 하나의 조화로운 기의로 엮어내고 있는 방식이 유연하다.


밤 한 시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
벚꽃처럼 나부낀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
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
花― 그 남자의 입김이다
이럴 수가
나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단 말인가
빈자리 가득 술내 펄펄하니 방금 내렸나 보다
어디로 떠났을까
<중략>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
삼십 년이 팔짱을 낀다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 강정이, 「크리스마스 이브」 전문


강정이의 시에는 생의 연륜에 걸맞게 생을 긍정적이면서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넉넉한 시선이 감지된다. 시의 화자가 밤 한 시에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기표)를 맡는다. 그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의 날이었다고 발화하면서 과거의 그와의 인연(기의)을 떠올린다.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가 “花―”하며 꽃향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 “그 남자의 입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다는 간극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직 사랑을 시작도 못했는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전언이다. 그는 화자에게 “텅 빈 바닷가 검게 웅크린/물수리 같던 남자”였고, “먼 하늘 바라볼 땐 지바고 같던 남자”였으며, “라라의 머플러를 선물하던 남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화자의 기표는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고 그라는 기의는 부재한 지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화자가 사는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에 그와 헤어진 “삼십 년이 팔짱”을 끼는 것이다. 이때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花―”하며 꽃잎으로 달려온다. 다시 말해서 기의와 기표가 어긋나면서 겹치는 슬프도록 황홀한 지점인 것이다.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
<중략>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듯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
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김정원, 「풍」 부분


김정원의 시는 ‘8’자 라는 pun(말우롱)의 효과를 활용하여 긍정적인 기호의 자질과 부정적인 기호의 자질을 병치하여 어머니의 팔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의 화자는 공교롭게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레가 치고/태풍이 불고/화산이 폭발하고/낡은 우뇌관이 동파하자/가지가 단박에 망가졌다”고 어머니의 풍 맞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기표의 반대편에서는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긍정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는 부정적 상황과 은근슬쩍 겹쳐 놓는다. 여기가 바로 기의와 기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때 어머니는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것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머니는 알고 있다고 단언한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더러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운에 싸인 운명적 현존을 직감한다. 화자는 여기서 ‘8자’의 구획을 통해 늘 이율배반적으로 현존하는 인간의 운명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나무꽃 사랑이 있습니다.
별자리를 닮은 비밀입니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
대나무꽃의 향기입니다.
당신의 향기입니다.


<중략>


대나무꽃이 피는 날
당신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 김원재, 「대나무꽃 사랑」 전문


상기 인용시는 스님의 시답게 아주 평이한 기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화자가 현시하는 기의는 자못 그윽한 깊이가 있다. 시적 화자는 첫 연에서 “대나무꽃 사랑이 있”(기표)다는 전제로 마지막 연의 “대나무꽃이 피는 날/당신과 만나기를 기원”(기의)한다는 미래지향적 언술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나무꽃 사랑’은 “별자리를 닮은 비밀”과 역학관계를 맺으면서 우주적 진실과 조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대나무꽃의 향기”이자 “당신의 향기”이고, “비가 내리는 숲길은/대나무꽃의 눈물”이자 “당신의 눈물”이다. 나아가 “눈이 숨 쉬는 꽃길은/대나무꽃의 꽃잎”이자 “당신의 꽃잎”이고, “달이 수줍은 숲길은/대나무꽃의 미소”이자 “당신의 미소”라는 상동성을 바탕으로 서정적 자기동일성의 세계를 현현해낸다. 그런 ‘자아’(대나무꽃)라는 기표가 ‘타자’(당신)라는 기의와 한 몸으로 동화될 때가 “대나무꽃이 피는 날”이자 “당신과 만나”는 날이라는 간극 없는 행복한 세계의 구현체, 즉 자타불이라는 미래지향적 낙원의식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다인실 병실에서는 아무도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 환자도 보호자도
가끔 커튼을 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막 들어온 신참이다


<중략>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
아플 때 순수해지는
어느 순간,
환한 믿음이 그림자를 밀어내고
병실에서는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내는


오, 오랜만에
우리 식구들 모였구나
― 김현식, 「순수」 전문


김현식의 시는 광포한 세상에 내던져진 병약한 이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비애의 페이소스가 짙게 깔려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죽음의 문제라든가 배고픔 등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그 배면에 죽음의 그림자(기표)보다는 그것을 끌어안는 연민의 정서(기의)가 아름답게 무늬지어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화자가 경영하는 “다인실 병실”에서는 여기에서는 “신참”을 제외하면 누구나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진폐증에 걸린 “늙수그레한 아저씨”라든가 그의 “소박한 아내” 등은 자기의 문제보다도 타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폐암 환자는 제 잘못을 시인하면서 얇은 미소를 짓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는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라는 잠언적인 경구를 이끌어내는 특장을 선보인다. 이것은 “아플 때 순수해지”지고,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낼 때만이 타자조차 “우리 식구들”로 여길 수 있다는 화자의 따뜻하면서도 순수한 믿음이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인식이다.


나무들은 알고 있다.
생이 끝날 때까지,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물고기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때는 또
얼마나 몸부림을 쳐야 하는지도.
그것이 나무들이 잎을 피워
그 느낌 알 때까지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다.


<중략>


포기하지 않고 산상구어(山上求魚)를 하는
저들은 결코 얕잡아봐선 안 된다.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
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
― 최용훈, 「나무學―연목구어(緣木求魚)」 부분


최용훈의 시에는 ‘나무’란 기표를 중심으로 인간사의 잠언적 경구나 보편적인 우주의 질서를 현현하는 기의가 주류를 이루는 시편들이다. 인용시도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고사성어(랑그)를 활용하여 생명의 질서(파롤)로 의미를 확장하는 기교를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서의 ‘나뭇잎’이란 기표는 ‘물고기’란 기의와 동일화되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몸부림이나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매재로 차용된다. 나아가 “나무들이 잎을 피워/그 느낌 알 때까지/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라고 단언하는 소인은 마지막 연에 화두처럼 던져져 있다. 즉 화자에 의하면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라는 모든 생명체의 생태학적 형질은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오묘한 자연사 진리의 발견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다채로운 언어의 무늬


바야흐로 시대는 문명의 첨단을 구가하며 실제 현실보다도 더 강력한 허구적 이미지가 압도하는 후기산업사회의 길목으로 접어든 지 오래되었다. 현대 시인들은 그간 텍스트의 객체에서 주체로 부상한 독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된 셈이다. 새로운 문화의 향유층인 젊은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과 세계관, 언어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따라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감수성으로 시적 비전을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가 난제로 등장하였다.―이번 사화집을 읽으면서도 느낀 사실이지만―전반적인 추세로 볼 때 애지문학회 시인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그만그만한 스케일로 완성도 위주의 시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각기 조금씩 상이한 목소리로써 아름다운, 혹은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특성이 과연 기존의 관습적인 형식이나 관념에서 자유로웠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깊이 고민하고 숙고해 봐야 할 대목이라 여겨진다.
후기산업사회의 환경의 특징에 주목해 볼 때, 오늘날의 독자들은 원하는 문화 정보를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 나가기도 하는 역동성을 겸비한 존재다. 시인들이 교조적인 자세로 일방적인 관념을 표백하는 시적 메커니즘은 더 이상 효용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이 현대시의 현주소인 셈이다. 고객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오가면서 서로 소통하고 문화의 중심 마니아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언어 관념을 비틀면서 전통적인 문화의 틀에 균열을 가하기도 하거나, 시대 도착적인 문화적 관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이제 시인이 아닌 독자가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시인들의 텍스트에 간섭을 하는 후기산업사회인 것이다.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하고 그들의 기호에 맞는 도전적인 상상력을 창출해 나갈 때 시대감각에 걸맞는 유니크한 시인으로 대접 받는 시대로 돌변했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눈길로 애지문학회 시인들을 바라보며 신인에 걸맞는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파격에 이르는 시를 기대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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