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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2018년 11월 06일 12시 48분  조회:31  추천:0  작성자: 강려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박영호
(문학평론가, 협성대 교수)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현대문학』 05년 1월호)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창작과 비평』 04년 겨울호)
*조용미, 「도룡뇽 수를 놓다」(『문예중앙』 04년 겨울호)
*정진영, 「이상한 상자」(『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작가세계』 04년 겨울호)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시작』 04년 겨울호)
*이길원, 「개 4 ―항변」(『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Ⅰ.

시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주로 파악할 때 효용론적 관점은 성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가의 여부와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시가 독자에게 미친 영향은 다시 ‘교시적 측면’과 ‘쾌락적 측면’으로 분류된다.
“시는 유용하고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는 아놀드(M.Arnold)의 진술이나,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시는 흥을 일으키고, 인정을 살피게 하며, 무리 짓게 하고, 원망하게 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게 하고, 멀게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많은 이름을 알게도 한다” 라는 구절은 모두 시의 교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문학의 본질은 ‘미’의 추구에 있으며, 이때의 ‘미’는 세속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윤리 도덕과는 일차적으로 단절된 비목적적 차원의 체험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보다 앞서 예술활동이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숭고한 지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무목적의 목적성’을 주장하였던 칸트의 견해는 시의 쾌락적 기능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의 기능을 구체화하는 방법에 있다. 필자는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로 대별된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진술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이미지보다는 진술에 의존한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든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쾌감을 제공해주거나 반성을 통한 신생(新生)의 의지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절에 출간된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일별(一瞥)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여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선별하였다.

Ⅱ.

시인이 자신이 정서를 구체화할 때 대상과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보여주기’라고 한다면, 시인이 시적 화자가 되어 직접 진술하는 방식을 ‘말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여주기’는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대상을 이미지로 승화시켜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으로 ‘묘사’에 의존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쉬가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또는 “시는 사실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 이미지를 통한 간접적인 발화방식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가능한 한 진술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보기로 하자.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새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 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 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수면 아래로 반쯤 몸을 숨긴 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리의 긴장된 모습은 둘째 연까지 지속된다. 견고한 긴장은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순간 물을 차고 비상하여 하늘로 퍼지는 셋째 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원경(遠景)에서 근경(近景)으로 좁혀오며 점차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오리가 비상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씩 조금씩 근접해오고 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에 비례하여 밀도는 조밀해진다. 그래서 독자 역시 점차 숨이 막혀온다. 끝 부분에 이르면 결빙된 얼음이 깨져나가는 듯한 숨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이다. 무엇을 말하고자함이었을까? 수면 위로 드러난 오리의 형체는 비록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서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물갈퀴를 젓고 있다는 감추어진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림과 동시에 비상하는 오리처럼 격발(擊發) 직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우리 삶을 응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어떠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작품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반감된다는 사실이다. 낡은 의미로 덧칠하여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오독(誤讀)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범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허만하 시인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인은 진술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직 정경만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의미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행간과 행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약해오는 시적 기법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일촉측발과도 같은 긴장감, 이런 것들만으로도 훌륭한 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 울타리 싸리 역시 변한 것은 아니다. 더 붉어 보였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내가 퇴락해갈 뿐.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러한 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천천히 수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인식한 사실을 작품 어느 곳에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자신이 인식하기까지의 치열함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가슴 시린 숙연함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이를 다시 통합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는 동안 자신의 정의(情意)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으로부터 생성되는 서늘한 자장(磁場)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허만하 시인과 최하림 시인의 작품은 진술보다는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그림을 보는 듯한, 그도 아니면 몇 장면의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거듭 읽다보면 묘사 뒤에 숨겨져 있는 많은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좋은 시로 평가되는 것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는 모두 다 좋은 시가 되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리듬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별의 정한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좋은 시로 평가받는 것이다.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의도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의미가 여실하게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일관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정반대로 파악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인들은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비유와 대비 등과 같은 시적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슬쩍 흘려놓는다. 다음에 인용한 두 편은 묘사에 의존하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시키거나 시적 대상에 자신의 정서를 응축시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지율(知律), 계율을 안다
거짓되고 그릇되게 행함을 막는 율법을 안다는 이 말,
참으로 무서운 말 아닌가
내가 아는 한 비구니의 법명이 지율이다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천 가지 연꽃이 핀 것 같은
천성산(千聖山)
아래 내원사에서 조용히 수도하며 지냈던
눈매가 그윽하고 맑고 단단한 사람

그가 깊은 산 속 깨끗하고 차가운 물에만 산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산다는 꼬리치레도롱뇽을 살리려고 생명을 내놓았다

형상이 있거나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 한다는데
산정에 펼쳐진 늦가을 화엄벌은 흰 눈이 덮인 듯 억새의 물결로 장엄해
관통 터널 공사도 도롱뇽 소송도 다 잊고 사람들 탄성을 지른다

이 화엄벌의 늪에 지율의 친구 도롱뇽이 산다
갈색 등에 노란 점무늬가 별처럼 펼쳐져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꼬리치레도롱뇽은 겨울잠에 들었나

화엄늪의 화엄세계가 바로 너의 우주인데
팔색조야 황조롱이야 청딱따구리야 삼광조야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지율(知律), 어둑해져가는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롱뇽 수를 놓고 있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뭇생명을 살리려 하고 있다
―조용미, 「도롱뇽 수를 놓다」

경부고속철 노선이 천성산을 관통하는 것에 반대하여 석 달 넘게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지율 스님에 시인은 자신의 의도를 투사하고 있다. 모두가 격의 없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곧 ‘화엄의 세계’이다. 그런 화엄이 깨지는 것은 우리 삶의 근거지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다고 토로한다. 그렇지만 천성산 아래 속세는 어떠한가? 억새의 물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탄성을 지른다. 이들 속세의 사람과 한낱 도룡뇽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는 지율 스님은 명백하게 대비된다.
시인의 의도는 분명하다. 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을 잊고 마는 우리의 천박함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뭇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룡뇽 수를 놓고 있을 지율 스님의 거룩함을 대비시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필자가 위 작품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법 때문이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기로 하자.

내 안에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바느질함이 열렸다
사개 물려놓은 한쪽 귀퉁이가
밤새 울컥이며 삐걱거리더니
그 닫혀 있던 뚜껑이 털썩, 한숨 내려놓듯 열린 것이다
가득 붉은빛이다
내 안에서 들썩이던 바람을 꾹꾹 눌러 박음질 해둔
붉은 솔기들이 보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 속으로 들어와 촘촘히 박혀
망설임으로 새겨진 무늬들
그 붉은 날들을 내 안 깊숙이 넣어두고
오랫동안 재워 두었던 밤들
어쩌자고 그대로 넣어두려 했던 것일까
나를 비집고 나온 솔기들이
저렇듯 곱고 생생한데

아직 그대로 있는 마음

이제는 열어 두기로 한다
―정진영, 「이상한 상자」

시를 읽고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나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왜 나는 할말이 없었겠는가. 망설이다 고작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침묵은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서 상처로 남아있다. 상처를 달래며 보낸 밤들 그 끝에서 결국 상처는 곪아터지듯 내 가슴에서 붉은 빛으로 터져나왔다. 막상 터져나오자 곱고 생생하다. 하여 이제는 내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앞에 인용했던 조용미 시인은 ‘지율’과 ‘사람’ 그리고 정진영 시인은 ‘바느질 함’과 ‘비집고 나온 솔기’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시어를 대립시켜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묘사와 진술을 혼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율 스님의 단식과 바느질함으로부터 비집고 나온 솔기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시를 읽는 일이 시인이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함축을 통해 숨겨놓은 사실을 찾아가며 시인과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두 작품은 바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묘사에 의존하는 ‘보여주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시인이 직접 시적 화자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도를 진술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새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地球를 끌어안 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와 말간 내 두 손바닥을 대비시켜 삶에 대하여 강건한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위의 시는 주지하듯 묘사보다는 시인의 심회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진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슬링 선수와 자신의 대비는 지속되는데, 작품 중반부와 후반부에 이르면 귀가 짓뭉개지도록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레슬링 선수의 비애와 내 것 아닌 다른 사람의 절망에는 귀기울여 본 적 없는 나의 이기심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다짐이 울림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준열한 반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대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삶을 반성하고 새로이 강건한 삶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지천명 넘어서면
먼 강 아스라한 적벽의 시간들이
아름다워질 때 있을 것이다.
억새밭 거기 상처투성이
아픈 급물살들이 풀어놓은 여울 곳에
이름없는 시인의 불우한 노래 한 편
홀로 숨어살 수 있어서
어진 농부 가난한 땅으로 돌아가
착한 시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이나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부끄러울 때 많이 있다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
장차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걱정이라며
남한강 건너 논밭 바라보는
그의 눈 바로 보지 못하는
나 또한 대죄인인 것이다.
시를 써서 세상을 속인 죄
얼마나 큰줄 아냐고
저 강물이 나에게 단호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

홍일선 시인의 창작 모티프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의 삶이다.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농촌과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주변 사람이 하나 둘씩 떠나도 자신만은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근심한다. 그러나 이경희씨가 정작 근심하는 것은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다 자신도 결국 고향을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길함이다. 그래서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그를 통해 시인은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상을 바로 알리고, 때로는 어긋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을 감당하여야 할 책무를 지닌 시를, 오히려 자신은 세상을 속이는 데 활용했던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를 향하여 강물은 세상을 속인 죄가 고향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이경희씨의 근심보다 더 큰 죄라고 호통치고 있다.
박후기 시인의 작품과 홍일선 시인의 두 작품 모두 묘사보다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시의 본질이 함축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길고 긴 여운이라고 한정한다면, 두 작품은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결연한 의지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지도 제 잘못은 압니다
제가 화분을 쓰러뜨리자
주인님은 신문지 말아
툭툭 치며 주의를 주었지요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그 후 화분 근처에선 발걸음도 무거웠지요
제가 어디 화분을 그곳에 둔
주인님을 탓하더이까
귀 닫고 남의 탓이라 하지도 않지요
개 주제인 제가 보기에도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이길원, 「개 4 ―항변」

작품의 화자는 ‘개’이다. ‘개’가 ‘인간’인 주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미물인 개조차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주인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라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은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잘못을 세상 탓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 역시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작품 전체가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인의 말하고자 했던 위와 같은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인화(擬人化)된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박후기, 홍일선 시인의 작품은 모두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종결하고 있다. 세 시인이 보여준 각오와 다짐이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삼백 편에 일관하는 정신을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사무사란 무엇인가? 세속의 욕망으로 인하여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는 정화작용을 의미한다. 시를 읽는 행위를 처음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교시적 기능은 성립된다. 박후기, 홍일선, 이길원 세 시인의 작품은 시가 교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Ⅲ.

감기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래서 지친 심신을 안정하고 휴식하는 일 이외에는 특효약이 없다. 마음으로부터 온화한 정서를 생성시켜 주는 한편 세속의 잡다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점에서 시를 읽는 일 또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는 작품일수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찰과 다짐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이다. 보여주는 시이거나 말하는 시이거나 작품을 감기가 주는 경고로 인식한다면 갈등과 분쟁도 사라지지 않을까. 겨울이 쓰러지는 끝자락을 보았다. 겨울과 봄의 접점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경계 허물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주경림
(시인)



*유자효, 「새」(『시와사상』 04년 겨울호)
*박승미, 「마음 心 둘」(『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황상순, 「흔적 1」(『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성우, 「접시」(『현대시학』 05년 1월호)
*이영식, 「이별연습」(『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1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3차원이란 지구상에서 전후, 좌우, 위 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이동이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 시의 세계에서 시인은 3차원의 세계에 몸을 두지만 상상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4차원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3차원의 현실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첨가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세상 만물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시간 따로 공간 따로 편을 갈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권해서든 시인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라는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 편의 시는 그 공간에서 하나의 우주와 맞먹게 되어 시인이 먼지 한 톨을 들어도 우주가 몽땅 따라 들리며 티끌 한 개를 놓아도 우주가 모조리 함께 놓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그 공간에서는 시를 따라 자연과 독자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일체 경계가 없어 죽음과 삶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다. 경계를 허물고 희노애락의 감정의 소통이 자유로운 시의 세계를 엿보기는 즐겁지만 이 땅에 시인으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과 꿈의 부조리가 만만치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가 암울할수록 상상력의 변주를 더욱 화려하게 펼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시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을 엿보기로 한다.

2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개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유자효, 「새」

유자효 시인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비극상을 현재의 시간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본 닭의 화석에서 그는 죽음이나 절망, 슬픔처럼 어두운 모습이 아닌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다. 뜨겁게 잿빛이 된 돌멩이 하나에서 그 사랑의 유효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새」에서 어미의 사랑은 목숨을 초월해 화석이라는 형태로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갓 부화한 새끼들은 날갯짓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안타까운 운명이었지만 어미와 새끼들은 한 몸으로 오롯이 작은 불덩이가 되어 행복한(?) 산화를 했다. 그들 또한 화산재를 뒤집어쓴 인간 화석과 함께 ‘최후의 폼페이인’인 셈이다. 유자효 시인은 섣불리 연민을 표시하거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동영상의 화면을 보여주듯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언어를 조종하는 감독으로서의 시인의 연출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을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 소심 한 촉이 꽃을 피웠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
그 모습이 여름내 더위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달래 주더니
지는 모습이 어찌 그리 다소곳한지
한 잎 또 한 잎 꽃이 질 때마다
차마 그 꽃잎 주워
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다 지고 난 다음
조용히 다가가 보니 떨어진 그대로
마음 심 자가 분명했다
그 마음을 이 마음속에 깊이 깊이 뿌리 내리기로 했다.
―박승미, 「마음 心 둘」

「마음 心 둘」에서 시인은 조용히 꽃을 피워낸 소심 한 촉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한 소심 한 촉의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을 보고 있다. 수란치마는 궁중 나인들이 예식때 입던 수놓은 치마로 그 화려함 때문에 소심 한 촉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수란치마를 가지런히 펴 놓고 앉았을 때의 모습은 입고 서 있을 때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르다. 입체적인 모습이 평면으로 깔리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주위의 분위기까지 우아하게 고양시킨다. 소심 한 촉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이면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여 가야금 가락의 맑고 청아한 음색의 청각적인 효과가 그대로 ‘조용히’라는 시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또한 다 지고 난 꽃잎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음 심(心)자를 얻는다. 악보가 없었던 과거에 가야금을 배울 때는 ‘구전심수’(口傳心受: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 했듯이 떨어진 꽃잎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기로 한다. ‘그 마음’인 소심 한 촉은 이제 ‘이 마음속’인 시인에게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심장의 모양을 본땄다는 표의문자인 한자어 마음 心자가 펼쳐 보여주는 시적 변용은 따스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뿌듯하게 차오르게 해준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새들이 모여 파드득 파드득 잎을 피우는 집
먼 데 있는 새도 몇 번의 날개짓이면 금새 날아드는 집
집 없는 새도 지나가다 얼핏 깃드는 집

그 집 앞에서 누군가 발을 멈추고 쭈빗쭈빗 귓문을 연다
그의 꼬불랑한 귓속 길이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다
어떤 새소리 한가락 파릇하니 새잎을 틔운다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
째구르르 깃털을 편다
입술이 벙긋 열리고 실핏줄이 팔딱 뛰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올라앉는 높은 음의 가지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내려앉는 낮은 음의 가지
이 가지 저 가지 마음대로 옮겨앉는 마음의 가지
아아아 파릇하니 파릇한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
그리움이라는 새들이 한참 지저귀다 뚝! 그치기도 하는 집
파릇하니 파란 나무집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

이나명 시인은 사소한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는 시적 대상에게 시끄럽거나 과장되지 않게 조용히 다가가 미세한 것들에서부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그 의미를 새롭게 엮어 보여줌으로써 잠시 분잡한 현실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해준다.
「파릇하니 파란 집」 역시 나무와 새, 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을 한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그 집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자신이 먼저 귓문을 열어 깊숙하고 은밀한 마음 속 길을 꺼내는 것이다. 새소리같은 아름다운 새잎을 그 집의 나뭇가지에 내밀하게 틔우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인 것이다. 이 가지 저 가지에 마구 피워내고 싶은 잎사귀, 즉 ‘그리움’으로 마구 지저귀고 싶은 언어의 잎사귀인 것이다.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이라는 심정적인 표현처럼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한 켠마다 남아 있는 그 모든 ‘그리움의 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나명 시인은 감각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청각과 시각을 골고루 자극함으로써 높은 시적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황상순, 「흔적 1」

황상순 시인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주검이 거두어진 자리에 남은 흰 페인트의 윤곽을 지켜본다.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었을 그 자리에 이제 “그의 윤곽”만이 남아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사내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면서 ‘탈피’라는 화두를 넌지시 끄집어낸다. 시인의 응시는 목숨을 빼앗아간 비극적인 장소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대신 역설적으로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라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다. 실재와 부재 사이에 ‘탈피’를 끼워넣은,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고층빌딩에서 반사된 ‘날을 세운 빛들이” 사내의 비상을 재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거리 횡단보도나 유리창 가득한 빌딩들은 전형적인 현대도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판에 박힌듯 숨막히는 공간일 수 있다. 이미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내(혹은 여자)는 숨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사내의 죽음이 자의적인 것이든 타의적인 것이든, 죽음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현실에 남겨진 흔적은 고통스러웠던 육체의 핏자국뿐이다. 그의 영혼은 ‘비에 젖은 옷’처럼 남루했던 삶에서 탈피하여 어디에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탈피’란 허물을 벗는 일, 또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워짐을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을까 라며, 자유롭고 일탈된 사유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들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차량’ 위에 일렁거리는 환상을 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접시가 깨진다 하나 둘 쏟아지기 시작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치며 깨지고 무릎을 치며 깨진다 밥알 퉁기며 깨지고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며 깨진다 속 깊이 쌓여 있던 접시들이 와그르르,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깨진다 어휴 놀래라, 귀를 막건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신나게 깨진다 엉덩이 들었다놓으며 경쾌하게 깨진다 키득키득 입속에서 나와 쉴 새 없이 깨지는 접시! 침 튀기며 나온 접시들이 손뼉을 치며 깨지고 어쩜 좋아, 발을 구르며 깨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야 후련한 접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
―박성우, 「접시」

한 편의 시를 잘 읽어서 시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알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어떤 관념이나 의미없이 ‘접시가 깨진다’의 문장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가 될 때까지 말과 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이미지의 변주에 집중하게 된다. 언뜻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도 하지만 ‘접시’를 통해 박성우 시인이 말하고 싶은 간절한 그 무엇이 궁금해진다. 접시가 깨진다는 것은 일종의 파괴 행위로 기존의 틀이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탈의 욕망에서 오는 야릇한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입속에서 나와 쉴새없이 깨지는 접시!”에 이르면 접시가 시적 화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눈치채게 된다. 접시는 시인의 말도 되고 마음도 되는지라 결국 자신의 내면의 그 어떤 것을 털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깨뜨리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지금 있는 기존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일종의 구도 행위(?)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비웠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블을 치며/ 무릎을 치며/ 밥알을 퉁기며/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엉덩이를 들었다 놓으며/ 발을 구르”는 접시들. 아무튼 독자들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접시 깨지는 소리의 소란함을 통해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발산 작용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중랑천 둔치
노부부 한 쌍 자전거와 한판 벌이고 계시다
할미는 페달 위에 안다리걸기를 시도하고
삼천리호 외궁둥이 샅바를 잡은 할배는
엉중겅중 두꺼비씨름 중이시다
뒤에서 밀면 몇 바퀴 구르다가, 기우뚱
곧추세워 놓으면 또다시 넘어질 듯, 비틀
그렇게 밀고 넘어지고 에돌아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
돌아보면 풋꿈인 듯 눈에 밟혀오는데
아이들 MTB자전거는 꼬리 물고 내달린다
목 길게 빼고 구경하던 해바라기
할배 등뒤에서 고개 꺾고 하품할 때쯤
웅크렸던 할미의 어깨가 펴지고
은빛 바큇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할배가 슬며시 꽁지를 놓은 줄도 모른 채
차르르― 자전거도로 위로 날아가는 할미새
이제 되었네그려, 혼자라도
넘어지지 말고 싱싱 나가시게
서툰 씨름판 곁에 맘 졸이던 호박덩굴
이파리 세워 갈채를 보내는데
샅바 놓으시고 뒷짐진 할배의 빈손
그늘, 너무 깊다.
―이영식, 「이별연습」

평생 해로한 부부가 죽음을 동시에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영식 시인은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심리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고 있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이지만 이제 둘 중 누군가는 혼자 남아 자전거 타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평생 할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는 아직도 자전거 타기가 서툴다. 뒤에서 밀어줘도 기우뚱거리고 곧추세워 놓아도 비틀거린다. 그러한 할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할아버지는 자전거와 의 싸움에서 쉽게 삽바를 놓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는 바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꺼비 씨름처럼 굼뜨고 하품이 날 지경이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홀로 탈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
마침내 웅크렸던 할머니의 어깨가 펴지고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이제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싱싱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홀로 설 수 있게 된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는 ‘이별연습’이 끝났음을 알고 샅바를 놓는다. 지루한 씨름이 끝나고 홀가분하게 빈손이 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그늘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깊다.”
이영식 시인은 이미 「낮달」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노인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잘 그려낸 바 있듯이 「이별연습」에서도 노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아마 허장성세(虛張聲勢) 없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천착해내는 시인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3

유자효 시인은 최후의 폼페이인이 된 「새」의 화석에서 2천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어미의 사랑이라는 보석을 찾아냈고, 박승미 시인의 「마음 心 둘」에서는 표의문자인 ‘心’자의 이미지 변주를 통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서정시의 정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나명 시인은 독특한 감성으로 새소리와 새잎이 피어나는 「파릇하니 파란 집」 한 채를 선사했다. 「흔적 1」에서 황상순 시인이 주검이라는 탈피를 통해 비상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깨뜨리기라는 파괴 행위를 통해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식 시인은 노부부의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 「이별연습」으로 죽음과 삶의 깊은 그늘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평생을 견지한 시작(詩作) 태도로 ‘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않겠다는 ‘어불영인 수사불휴’(語不營人 雖死不休)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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