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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2018년 11월 06일 17시 18분  조회:30  추천:0  작성자: 강려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서언>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원리1, 원리2>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원리3>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원리4>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원리5,원리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원리 1, 원리, 2>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원리 4>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원리 5,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거울단계>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거울단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中)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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