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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글쓰기의 양화
2019년 03월 12일 20시 35분  조회:1120  추천:0  작성자: 강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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