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3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블로그

나의카테고리 : 중외문학향기

심상운의 디지털시 하이퍼시 모음
2020년 02월 09일 18시 29분  조회:2114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ㅡ 시의 꽃이 피는마을 디지털 시 하이퍼시
 
심상운의 디지털시 하이퍼시 모음
 
 
빈자리  -낮 12시 25분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수돗물을 세게 틀었다
 
              오후 4시 30분
              책상 위의 헌책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붉게 타오르던 유리병의 꽃이 시들시들하다
 
              나는 주방廚房의 수돗물을 세게 틀었다
             
               쏴아-
               뇌세포 속으로 퍼져나가는 파란 물소리
               청각聽覺이 파르르 떤다
               유리병의 꽃이 파르르 떤다
 
               그때 핸드폰에서 터져 나오는 경쾌한 음악
                싱싱한 푸성귀 냄샐 풍기는 그의 목소리
 
                전파電波를 타고 날아온
                강원도 산속 공기가 내 귀를 파랗게 물들인다
 
    물고기 그림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바다 사진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 무장한 미군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엎은 40대의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흰 거품을 토하며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어두컴컴한 매립지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 
      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
      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
      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
      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싱싱해서 좋다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기억에 대한 명상
  
나는 심심할 때, 크레파스를 들고 내 뇌腦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저장된 기억을 뽑아내어서 색칠을 한다. 그러면 파란 기억. 노란 기억, 발그레한 기억, 푸른 기억,검은 기억, 희뿌연 기억. 그들은 색유리가 되어 반짝이다가 아주 가끔 새로운 모자이크 그림이 된다.그들은  타다남은 내면의 불꽃같이 아니면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시간의 눈빛같이 아니면  버스 창문 밖으로 지나가버린 아카시아 숲의 향기같이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냄새도 없는, 단지 모니터의 영상 속에 숨어 있는, 그러다가도 아, 하는 순간 시퍼런 손자국을 남기고 심장을 관통하는 전율. 그러나 그러나 이따금씩 봄바람이 되어 나를 흔드는 그림. 나는 그 그림들이 띠운 풍선風船을 타고 기억 이전으로, 그 이전의 이전, 부모미생전 父母未生前으로 날아가는 연습을 한다. 아주 홀가분하게 '야호' '야호' 소리치며.  여행지의 들판에서 피어오른 듯한 눈부신 무지개의 등 위에 올라타기도 하며.
 
   길
 
              길이 1cm 쯤 될까 말까한
             배추벌레 한 마리가
      
             퍼런 배추 잎 위로
             배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벌레가
             지나온 흔적이 보일 듯하다
 
             (배추 잎에 붙어서 분비한 듯)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분비물의 자국!
          
            마추픽추의 무너진 벽돌 계단 위에 
           노란 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
 
          * 마추픽추:페루 중남부 안데스 산맥에 있던 고대 잉카 제국의 요새 도시.
마추픽추의
 
  바람소리
 
 
 
 
 겨울 밤 침대에 누워서 읽는 바람소리. 바람은 소리의 알맹이고 소리는 바람껍질인가? 그런 건 알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바람소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히잉히잉 말 울음소리가 내 잠의 줄기를 흔든다. 잠의 뿌리는 짙은 안개 속에 잠기면서 알타이 초원의 기억을 재생한다. 초원의 별빛이 지붕을 뚫고 쏟아져 내린다. 나는 벌거숭이 망아지처럼 초록 들판을 뛰어간다.
 
 기억은 시간과 어떤 관계일까? 기억은 시간의 집에 놓여있는 오래된 가구일까? 집 안 여기저기엔 지나간 시간들의 지문이 찍혀있고 아직 사물 속에 갇혀있는 시간들도 있다. 그들은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은박지같이 반짝이고 싶어서 스스로 해방공간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바람소리가 또 창문을 흔든다. 나는 집 밖에 나와서도 창문 소리 듣는 것이 즐겁다.그 소리에는 별사탕같이 달콤한 파랑, 초록, 노랑, 빨강, 하양 빛이 묻어있다. 들어가서 살 수 없는 집 울타리엔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있다
 
이미지 여행
 
 너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거기에는 빛도 어둠도 아닌 것들이 웅숭그리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만 무엇이 휘익 휘감는 느낌만 든다고? 너는 그림자여서, 그 느낌은 빛이 발산하는 백색의 전율이라고?
 
 어디서 둥둥둥둥 소리가 들려오고 막이 오르면, 무대 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너는 거기서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는 원소가 된다고? 그곳에는 시간을 지워버리는 안개의 덩어리들이 솟구쳐 오르고, 너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으로 둥둥 떠올라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너는 아침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나일 강을 내려다보다가 히말라야 하얀 눈 산 위를 지나간다고? 너는 도시의 전동차 안을 떠돌기도 하고,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나는 너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앙코르와트 사원 숲 푸른 공기 속을  둥둥 떠간다. 그때 사원의 짙은 그늘과 무한 질량의 환한 햇살 사이를 넘나들며 UFO처럼 번쩍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보인다.
 
북한산의 레몬 향기
 
 
 
 비봉(碑峰)이 눈앞에 탁 마주서는 북한산 계곡 비탈길에서 허옇게 누워있는 늙은 눈<雪>을 만났다. 늙은 눈은 피부가 푸석푸석하다. 그 옆에는 오전 11시의 햇빛이 벗어 놓고 간 잠옷이 보인다. 꽃나무와 밤을 보낸 햇빛의 잠옷에 발그레한 향기가 묻어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옷 속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노란 빛이 뿜어져 나온다. 1937년 4월 17일 오전 4시 20분 일본 동경제대부속병원(東京帝大附屬病院) 어두운 침대 위에서 28세의 뼈만 남은 이상(李箱)이 눈을 감고 있다. 그는 임종의 순간, 갑자기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고 한다.진달래나무 가지들이 무성한 계곡, 일주일 전에 속옷마저 훌훌 벗어버린 겨울이 허공에서 와와와와 소리치며  하얗게 쏟아져 내리던 비탈길. 등산화에 밟히는 늙은 눈의 몸에서는 질척한 체액이 흘러내린다. 그때 갑자기 북한산이 꿈틀거리며 체취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노란 레몬 향기가 사방에 퍼진다. 정오의 환한 빛 속에서 수염을 깎지 않은 이상(李箱)이 웃고 있다. 꽃이 피지 않은 꽃나무가지가 반짝인다.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 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 꽃들과 어우러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 종일 은백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UFO:미확인 비행물체 
 
    사각형 스크린
 
 
비 그친 아침, 나는 닫힌 창문을 연다. 스르륵 열린 사각형의 스크린 속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구름 A, 구름 B,구름 C. 이어서 펼쳐지는 파란 여름바다의 영상.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출렁인다. 동해 화진포에는 빨간 사과 빛 안개. 나는 그곳에 푸른 비늘 덩이로 살아 움직이는 집을 지어 놓았다. 그 집은 환상의 집.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시간 밖에서 일하는 푸른 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별빛이 찬란한 밤바다 모래 위를 걷는다. 사각형 스크린은 무한 공간. 그 속에 가득한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는 나뭇잎에서도 출렁이고 땅강아지 집에서도 출렁이고 아스팔트 속에서도 출렁이고 노래방에서도 출렁인다. 젊은이들은 동해의 고래를 잡으러 가자며 매일 밤 어깨동무를 하고 여름바다로 떠난다. 그들에게 바다는 황홀한 전율의 출렁임. 햇빛 번쩍이는 검푸른 등을 보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사각형 속 스크린도 부르르 부르르 온 몸을 떤다. 스크린은 사각형을 확 밀어버리고 수영복차림으로 뛰어나가려는 거 같다. 그때 사각형 스크린 밖에서 사람 A가 열무, 가지, 오이, 호박을 트럭에 싣고 와서 스피커로 “무공해 싱싱한 채소를 싸게 팝니다.”라고 소리친다. 캄차카 바다 돌고래들이 펄떡펄떡 솟구치고 있는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한 아침이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 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녹색 전율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숨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박쥐 또는 소녀
 
 
   동굴 탐사요원으로 다녀 온 그의 디지털 카메라 속에서는 신생대新生代의 동굴 속 벽에 검은 부챗살 날개를 접고 붙어 있던 박쥐 떼들이 동영상으로 변해 푸르르 푸르르 날아다니고 있다. 박쥐들은 휘황한 불빛에 놀라 어둠의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듯 날개를 퍼덕이며 난다.
 
 하얀 시트 위에 누워 내시경內視鏡 검사를 받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사춘기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까? 그녀의 동굴에서 어둠을 모아 발그레한 찔레꽃을 계속 피워 내고 있는 볼이 빨간 소녀.
 
 나는 가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 암흑의 물질들이 떠다니는 무의식無意識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동굴의 후미진 곳에서 푸드덕대며 날아가는 박쥐가 보이고 그때마다 그녀의 방 벽에 걸려 있는 <9월의 사과나무>에서 빨간 볼의 사과들이 햇빛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까르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모형 전시실 또는 깨진 유리창
 
 
 6월의 태양이 눈부신 한낮 국립박물관 모형 전시실에서는 신석기시대 근육질 젊은 사내의 돌칼 가는 소리가 난다. 사내는 숫돌에 칼을 갈다 가끔씩 고개를 들고 사냥할 때 쓰던 돌화살촉을 움켜쥐고 유리 상자를 깨고 뛰쳐나오려는 듯 허연 수은등 불빛을 노려보고 있다.
 
12월이 되면  카메라를 메고  세찬 눈보라로 뒤덮인 겨울날 뻘겋게 이글거리던 드럼통 석탄 난로 곁에 둘러서서 외지外地로 떠나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방금 검은 탄 속에서 나온 듯 이빨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젊은 광부들의 뿌연 입김이 깨진 유리창에 묻어 있는 30년 전의 K역을 찾아서 눈길을 떠나는 그녀.
 
 낮 12시 20분, 나는 그녀의 모형 작업실 벽에 걸려있는 컬러사진 검붉은 고철古鐵들의 무더기 사이로 돋아난 풀잎의 푸른 혈관 위에 앉아 있던 벌 한 마리가 잉잉 잉잉 방안을 돌며 유리창에 몇 번 몸을 부딪칠 듯 하다가 열린 유리창 밖 환한 빛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자살폭탄 또는 푸른 울음
 
 
자신의 부풀어 오른 봉오리를 만지며 은밀한 욕망 속으로 잠입하는 영화 속의 그녀. 밤마다 폭탄을 준비하는 그녀의 몸은 800만 화소의 선명한 영상 속에서 움직인다.
 
날카로운 과도果刀로 사과를 도막내어 빨갛게 익은 사과의 중심에 박혀서 스스로 소리 없는 폭발을 꿈꾸고 있던 까만 씨앗 몇 개를 들여다본다. 그들도 촉촉한 살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있던 걸까?
 
<아프가니스탄 카블 시내 한복판에서 자살폭탄 테러 사상자 10명>
 
TV 뉴스 자막이  사라지자, 한여름 밤 안동 지레 마을 산 개구리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쏟아내는 푸른 울음소리가  달빛 속을 벗어나서 무한허공으로 출렁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오전 11시 40분의 통화
 
도봉산 성인봉 하얀 바위벽 아래 깊은 골짜기에서
옆의 푸른 빛 솔잎에게 빨갛게 불타는 자신의 순수한 몸뚱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가을 단풍나무를 본다.
 
산새 몇 마리 그들 사이를
포르르 포르르 포르르 재빠르게 옮겨 다니는
오전 11시 40분
 
-삐 소리 후 소리샘 픽 보이스로 연결되오며 통화료가 부가됩니다.
내 휴대폰에서 거듭 흘러나오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
 
순간 하얗게 눈 덮인 소림사 마당에 달마를 찾아온 혜가가
붉은 피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팔 하나를 들고 서 있는 그림이
만월암 바위벽 스크린에 나타나고
 
하얀 침대시트 위에서 좌선坐禪의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는
*남구의 감은 눈이 불그레해진다.
 
* 남구: 오남구 시인
 
 아침 드라마
 
 아침 8시 TV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빨갛게  부풀기 시작하고
 나는 1,2,3,4...숫자에서 벗어난 그녀의 시간이 접시 위 생선토막에
 빨간 소스로 뿌려지는 상상을 한다.
 
(낳자마자 자식을 버린 어미를 어찌 어미라고 할 수 있단 말이야!)
드라마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고 그녀는 생선을 구우며 눈물을 흘린다.
 
그때 40대 여자의 가슴에서 뭉클 솟구쳐 나온듯한 한 뭉치 희끄무레한 연기가
주방의 작은 창문으로 빠져나가고
 
(파란 신호등 앞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머니와 딸)
 
나는 또 그녀가 울면서 헤쳐 온 시간의 숫자들이 둥근 공이 되어
아스팔트 위를 통통통통 뛰어가는 상상을 한다.
  
(오늘 서해상에는 시계 30m의 안개가 걷히고
중부지방엔 오전까지 10mm의 비가 내린 후 날씨가 점차 맑아지겠습니다.)
 
계속되는 미해결에서 잠시 빠져나온 대도시의 아침시간은
유리창에 줄줄 빗물 흘러내리는 거리에서 초록, 노랑, 빨강 물이 든 풍선을 펑펑 터뜨린다.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시 20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都市建築物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태초의 빛
 
 컴컴한 칠흑 공간 속에서 빛 한 줄기 휘익 환한 선을 그으며 지나가는 찰나 여기저기서
 펑 펑 펑 펑 터지는 불꽃들. 아 아 소리치며 태초의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간 나는 눈부신
 빛의 알갱이들이 파랑, 초록, 노랑, 빨강, 하양 색깔로 부서져 흘러내리는 프로방스의 야경
 사이프러스 숲에서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떠오르는 물고기가 된다.
 
 
 머리나 입술이나 가슴이나 허리에서 빛이 찬란하게 꿈틀거리는 밤길. 괭이를 멘 농부들은
 별빛에 휘감긴 듯 비척거리고, 지나가는 역마차도 흥이 났는지 더 털털거린다. 그때 점점 더
거칠어지는 빈센트 반 고흐의 숨소리.
 
<그는 태초의 빛이 태어나는 노란 집에서 잠시 외출했던 걸까?>
 
 한여름 밤 놀이 공원 은하수가 빛나는 스카프를 목에 두른 유모차 속 아이는 잠이 들고, 태초의
 빛 속에서 나와 웅성거리던  어른들은 실로폰 소리가 나고 이어서 “아홉 십니다”라는 여자의 예
 쁜 음성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다.
 
   사진을 찍는다
 
  그는 카메라를 메고 사물들의 꿈을 찾아서 매립지埋立地의 안개 속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나는 방 안에서 거울 속의 내 눈동자를 찍는다. 내 눈동자 속에 나를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
  그 나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3,4,5,6,7,8,9,10,...의 나, 나, 나, 나............
 
 *第一의兒孩/第二의兒孩/第三의兒孩/第四의兒孩/第五의兒孩/第六의兒孩.........................
 
  나는 만다라曼茶羅 속에 들어가 뱀 옆에 피어 있는 빨간 꽃잎속의 꽃잎에 카메라의 렌즈를 고정한다.
 
  그가 찍어온 <6월의 사진>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대학로 큰 길을 점령한 시위대의 고함 소리  가 계속 울리고 있다.
 
    * 1930년대 아방가르드 시인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 (시 제 1호)에서 발췌
 
 초여름 풍경
 
뱀 굴에서 미끈미끈한 몸뚱일 좌우로 흔들며 뱀 한 마리 뱀 두 마리 뱀 세 마리 뱀 네 마리 나온다.가늘고 긴 혀 날름거리며 나온다. 엊저녁 기억들은 푸른 가지 사이에 허연 비닐봉지로 걸어놓고 햇빛 속으로 스르르르 스르르르 미끄러지며 나온다.
 
발가숭이 햇빛들은 분수噴水에서 물장구치며 깔깔거리고 아이스크림처럼 햇빛을 빨아먹는 가로수 잎사귀들 사이로 풍선 하나 풍선 둘 풍선 셋 풍선 넷 둥둥 떠오른다. 찢어진 풍선들은 보이지 않고 새 풍선들이 떠오른다.
 
초여름 풀 향기 풍기며 19살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청계천 물속에서 나온다. 눈이 큰 헵번, 입이 큰 헵번이 눈웃음치며 나온다. 휴대폰을 들고 시청 앞 광장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목이 긴 헵번은 빨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다.
 
가슴에 철퇴를 맞고 허물어진 50년 전 건물들의 폐자재 더미 속에서 나온 유리창의 파편 조각들이 반짝인다. 덤프트럭에 실린 우그러진 창틀을 향해 반짝인다. 원주민들의 구멍 난 양말짝,찌그러진 양재기, 찢어진 홑이불에 묻어있는 얼룩을 보며 반짝인다.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밤 12시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 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구멍탐색
 
 
아침나절 5월의 숲 속으로 들어가면 개미떼들이 제각기 까만 등을 반짝이며 들락거리고 있는 쓰러진 나무의 구멍에서 작고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 방울들은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서 나와 초록 이파리 사이사이로 떠돌고 있다. 
 
 맥주를 좋아하는 그는 시를 ‘황홀한 탐색’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탐색은 카메라를 메고 존재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존재의 구멍은 탄생의 출구? 구멍 속의 시간은 언제나 태초? 병 속에 갇혀 있던 맥주가 구멍에서 나와 투명한 유리 컵 속에서 하얀 거품을 뿜어낸다. 
 
 밤 10시, 나는 TV 채널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산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탐험대들을 본다. 컴컴한 굴속으로 들어간 그들은 전조등을 켜고 굴의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굴 속에서는 맑은 샘물이 솟아 흐르고 불빛에 비친 종유석이 찬란하다. 산의 구멍은 컴컴함 속에 찬란함을 숨기고 있다. 한 탐험대원은 꿈틀거리며 굴의 벽을 기어가는 작은 생명체를 촬영하고 있다. 
 
그는 내일 오래 비워둔 집에 들어가서 보일러 연통청소를 하고, 3만6천 피트의 하얀 구름 위에서 빨간 바다 새우를 맛있게 먹었다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한다.
 
 
노란 색을 주조로 한 세 개의 그림
 
 
구파발에서 의정부 쪽으로 뻗은 큰 도로 옆엔 봄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꽃 울타리가 석재상 마당 한쪽과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돌부처 돌마리아 돌사자 돌여인 돌사슴의 머리와 가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나는 그 석물들과 손잡고 노는 상상을 하며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를 툭툭 치고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 때문일까? 돌부처와 돌마리아가 손을 잡고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둘레를 돌사자 돌사슴 돌여인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들이 뛸 때마다 개나리 울타리에서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와 그늘진 석재상 마당이 환해지곤 한다.
 
목만 있는 늘씬한 젊은 여인이 노란 원피스를 걸치고 서 있는 대형 마트 의류 코너. 그 건너편 쪽에는 목만 있는 청년이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끌려나온 현대판 노예라고요?> < 그들은 초현실의 예술품이 아니라고요?> <생각이 없는 그들은 얼마나 자유롭겠어요.> <그들 목에 노란 풍선을 매달아 주면 어떨까요?> <그들은 성가시다고 하지 않을까요?>
 
강남 터미널 대형 TV에서 갑자기 콸콸콸콸 흙탕물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떠내려 온 가재도구들이 큰 물살에 둥둥 떠가다가 나무그루에 걸려있는 게 보인다. 주민들은 무너진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무어라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멀리서 털털털털 헬리콥터 소리가 나고 노란 조끼를 입은 구조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경을 하던 청년 셋이 TV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간다. 그때마다 모니터에서 튀어나온 흙탕물이 내 몸에 확확 끼얹힌다. 내 옷에서는 노란 개나리꽃 향기가 난다.
 
우아우아 아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검푸른 파도 펄떡이는 돌고래 (산의 어깨 위로 솟구치는 검붉은 불길)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다시마 미역 멍게 해삼 조개 (풀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불길 속의 주택들)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란 바다 빨간 구름 허연 맥주 거품 (47인치 모니터에서 풀썩풀썩 뿜어져 나와 중계동 은행사거리 상공을 떠도는 LA의 검은 연기 검은 연기)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도소리 기타소리 사각사각 사과 먹는 소리 (거대한 공동묘지 상공 떼 지어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 위에서 반짝이는 하얀 눈 하얀 눈)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뜨거운 모래밭 달빛 속 엉덩이 (당신은 죽은 30대 여인의 목에서 반짝이던 나비날개 모양의 보석을 보았다고요?) (그녀는 나비가 되어서 봄 나라로 날아갔을 거라고요?)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모닥불 하얀 잿더미 빈 맥주병 (당신은 사람들이 모두 복제품 같다고요?) (검푸른 파도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혁명을 꿈꾸는 체 게바라의 가슴을 껴안고 싶다고요?)
 
꿈틀꿈틀 아침 바다 붉은 핏덩이 핏덩이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블랙홀(black hole)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되어 소멸하는 거대한 별에는 정지된 시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고요? 그들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석化石 속의 물고기처럼 박혀 있을 거라고요?
 
아산병원 영안실에 있는 그녀의 시신屍身도 자세히 관찰하면 연료가 모두 소모된 마지막 순간에 자체의 중력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되어 생성하는 죽은 별들의 검은 구멍과 다르지 않다고요?
 
오늘 밤 당신은 35000피드 상공의 비행기가 컴컴한 허공 벽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우주의 얼음덩이 속에서도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남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환각제 복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의 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볼록한 가슴선에선 노란 봄꽃냄새가 물씬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있던 둥근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가득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아스팔트 위의 맨살 여자
 
 
아스팔트 위에서 30대의 여자가 전라의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허벅지 사이에 넣고 앉아있다. 둥근 여자의 몸은 매끈한 살덩이 바퀴가 되어 아스팔트 도로를 굴러갈 것 같다.
 
(화가는 왜 여자를 달팽이같이 둥글게 말아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놓은 것일까?)
 
(여자는 화가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시공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일까?)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를 굴려 본다. 그녀는 공기가 팽팽한 고무공같이 가볍게 구른다. 그녀는 통통 튀기도 한다. 구름이 그녀를 태워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파란 바다로 굴러가며 깔깔거린다. 그때 100km로 달려오던 육중한 화물차가 삐익 소리를 내며 간신히 그녀를 비켜간다. 핏발선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휙 스친다.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란 바다가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도로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 맨살로 앉아있는 30대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너무 뜨겁다.
 
파란 의자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우주의 시간
 
그 미술관 대형 바다 그림 <신의 바다> 속에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그녀의 가족들이 푸른 살 번득이며 파도치고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다.
 
 밤 11시20분, 사이언스 TV에선 은하계 넘어 어느 별에 납치되었던 지구의 사람들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귀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4,400명의 귀환인 들은 우주의 0의 시간 속에서 살다왔다고 한다.
 
3월에 내리는 함박눈은 서로 다른 집에 살면서 애태우다가 떠나간 이들이 만나서 산과 들과 바다에 눈부신 알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하얗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눈의 입자 속에서는 눈물을 안고 살아온 1000년도 우주의 0의 시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공과 아이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속에서 가지고 나온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쫒아 소리 지르며 뛰어간다. 거리의 유리창들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침 9시, 공을 따라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 공은 주택가를 빠져나와 통통통통 공장 굴뚝을 오르기도 하고, 통통통통 푸른 가로수 가지 위로 올라가 나무 위에서 건너뛰기를 하다가 초록 들길을 달리는 버스 지붕 위에 내려 앉아 잠시 멈춰 있다. 아이도 버스지붕 위에서 흰 구름을 보며 쉬고 있다.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그 아이의 집은 해초들이 나부끼는 바다 속인 거 같다고요? 아이의 몸에선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요? 빨간 공은 수평선의 해 같다고요?
 
버스 지붕 위에서 쉬고 있던 아이가 빨간 공과 함께 노랗게 불타는 한낮의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밀짚모자를 쓴 이중섭이 화판을 메고 걸어가고 있다.
 
   돌밭의 아우성이 만들어 낸 연상
 
 
발가숭이 햇빛이 남한강 물 위에서 팔짝팔짝 놀고 있는 낮 12시 30분. 돌밭에선 하얀 돌멩이들이 피 묻은 깃발을 손에 들고 아우성치며, 아우성치며 파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날아오른 돌들은 한 순간 붉은 동백꽃이 되어 푸른 강물 위를 둥둥 떠가기도 하고 흰 날개 퍼덕이는 두루미 떼가 되어 들판 습지로 날아간다. 나는 수많은 돌중에서 허공으로 떠오르다 물속으로 떨어진 검은 돌 하나를 주워서 걸망에 넣는다.
 
정동진 새벽바다 뻘겋게 번지는 핏물 위에서 퍼덕이는 금빛 살점들. 그 거대한 물 밑에서 아 아 아 아 아 아 소리치며 꿈틀거리는 붉고 둥근 돌 하나. 그때 둥둥둥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 그 후끈 후끈한 소리 속에 그가 있을지도 몰라. 10년 전 지상을 떠나간 그가 비늘 번쩍거리고 있을지도 몰라. 새 빛 번지는 백사장에 나가 껑충껑충 학춤 추는 무의식 속의 나.
 
<나는 두 명의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일몰을 보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피처럼 빨갛게 바뀌었다. 나는 그 자리에 발걸음을 멈춘 채 다리 난간에 가까이 갔다.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다. 검푸른 협만峽灣의 도시 위에는 피와 혀 같은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고, 나는 남았다. 공포에 떨면서 ... 그리고, 나는 풍경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큰 외침을 들은 것이다.>
 
 
*< >부분은 스에나가 타미오의『색채심리』에서 노르웨이 화가 뭉크(Edvard Munch)의 일기를 인용한 글임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 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 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 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비오는 날의 아우슈비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고 작은 언덕같이 쌓여있는 머리칼이랑 가죽 가방 일곱 살 아이들의 꽃무늬 구두가 유리창 진열장 속에서 푸르르 푸르르 떨고 있는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1940년 5월 감옥을 쌓는 회색 벽돌에서 푸른 하늘 한 자락을 꺼내들고 환한 햇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내가 있었다고요? 그가 벗어 놓은 듯한 파란 상의上衣가 높은 감시탑 지붕 끝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고요?
 
나는 영하의 겨울밤 서울 을지로 지하철역 시멘트 바닥에 박스를 깔고 새우잠 자는 노숙자露宿者의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온 파란 손수건을 본다. 영하 25도의 얼음 꽃밭에서 환한 햇빛 속으로 팔랑팔랑 날아오른 노랑나비 한 마리가 그의 잠든 머리 위에서 날고 있다.
 
비오는 날 폴란드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의 어둡고 침침한 허공에서 쪼로롱 찍찍 쪼로롱 찍찍 쪼로롱 이름 모르는 새소리가 들린다.
 
30대 여인 또는 구렁이   
 
 
한 청년이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딴다. 검푸른 살의 꽁치 한 마리가 책처럼 잘 요약
되어 삭아 있다. 이집트 미라의 여인이 관(棺) 속에서 꿈틀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대신전(古代神殿)의 조각상에서 나온 30대 여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가면을 쓴  사내가 칼을 들고 말했어” “신(神)은 인간의 피를 좋아 한다고” “나는 그와 잔 적이 있어” 그녀의 그림자 뒤에서 붉은 노을이 TV 화면 가득 이글거린다.
 
 
작은 새들이 찌르르 쫑쫑 찌르르 쫑쫑 경쾌한 소리로 날고 있는 5월의 물푸레나무 숲에서  어젯밤 드라마 속 여인이 자신의 검은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붓고 있다. 그녀의 허리가 푸른 잎 사이에서 구렁이처럼 햇빛에 번득인다.
 
 
뱀과 그녀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겨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 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소리가 묻어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통화通話
 
 
아 아, 여보세요. 40대의 사내가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서 집 나간 아내를 찾아
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는 걸 봤다구요. 그 사내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구요. 3월의 하늘에선 확성기를 든 경찰과 구경꾼들에게 주는 선물인양 하얀 눈송이를 흩뿌렸다구요.
 
말수가 적은 40대의 회사원 K씨는 1년에 한두 번 손에 날카로운 못을 들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 고급 승용차들의 차체에 굵은 금을 긋고 다닌다구요.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
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아 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
구요?
 
* 조주 선사(778-897):『육조단경』에 나오는 중국의 선승. 선가(禪家)에서는  조주고불(趙州古佛) 또는 조주라 부른다. 불교의 근본원리를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말을 했다.
 
 
검은 도로
 
 
직선의 아스팔트 도로를 100km로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검은 도로를 손짓하며 말한다.
 
“ 방금 지나온 길이 어릴 적 뛰놀던 동네 언덕이야”
“ 이 검은 도로 밑에 내가 태어난 마을이 깔려있는 거야“
" 길을 낼 때 언덕의 중심에 퍼런 정수리 뼈 드러낸 바위 하나 있었대"
" 비 오는 날이면 도로 밑에서 둥둥둥둥 풍물소리가 울려오는 거 같아" 
 
TV 속에서는 마다가스카르 맨발의 여자들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벌거숭이 아이들 손을 잡고 맑은 강물이 보이는 푸른 풀밭 언덕길을 뛸 듯이 걸어가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중계동 은행사거리 40대 사내의 붕어빵틀에서
뜨겁고 말랑말랑한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전자상가 TV 화면에는 시리아 반정부군의 자살폭탄으로
반쯤 부서진 건물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상자들
 
나는 제주산 노란 감귤 한 봉지를 사들고 행인들이 붐비는
4차선 도로를 건너가고
 
내 옆을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10대 여자 아이들
 
아파트 화단 젖은 흙속에서 10cm 가량의 검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탈출
 
 
 
제각기 자기의 방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한밤중
 
하얀 살들이 속으로 말 하고 있었어.
비 오는 날 손잡고 벌거벗은 망아지처럼 푸른 풀밭을 뛰어다니고 싶다고.
 
TV 속에서는 야생의 말들이 히힝거리며 몽골 초원의 빛 속으로 뛰어가고 있었어.
 
나는 벽에 딱 붙어서
바닥에서 통통 튀며 놀다가 창밖으로 날아가는 고무공을 보고 있는
타일 조각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빛 또는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노랑나비
 
 
비오는 날 번쩍이는 빛을 향해
어두운 헛간을 뛰어나간 고양이의 눈빛 같은
 
노랑나비 하나
내 숲의 어둠 속을 떠다니며 반짝인다
 
李箱은 <詩第十號 나비>에서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 본다. 그것은靈界에絡繹
되는秘密한通風口“라고 했다
 
그는 오늘도 靈界의 컴컴한 숲속에서
죽은 나비와 춤을 추고 있을까?
 
정리해고 된 40대의 사내가
중고 트럭 조수석에 아내를 태우고
휘파람 불며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노랑나비 한 마리
푸른 강물을 배경으로 날고 있다.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
  
오전 8시 30분
백화점 지하창고에서
점원들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가슴이 깨진 20대의 남녀 마네킹
새 두 마리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올라
아침 햇빛 눈부신
빌딩 사이로 날아간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며
출렁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
 
바이칼 호수 마을에서
둥 둥 둥 둥
푸른 하늘로 울려 퍼지는 북소리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에서는
환한 빛을 향해
맨 머리의 나한들이 웃고 있다
 
 
빨래판
 
아파트 창 밖 젊은 남자의 스피커 소리
-싱싱한 물오징어 한 마리가 이천 원, 이천 원
 
교실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유리창을 흔들며
바다 속 청어가 되어 퍼덕인다
 
나는 빈 방에서 생목의 가구가 내쉬는 나무의 숨소리를 듣는다
숲의 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들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서 팔만대장경판을 둘러보고 나오는 할머니가
옆 할머니 허리를 찌르며 소근거린다
빨래판만 보고 간다고
 
푸른 풍선 하나 허공에서 둥둥 떠돌고 있는 한낮이다
 
열탕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다가 어둠이 물컹물컹 밟히는 무의식의
늪지대로 들어간다. 축축하고 후끈후끈한 그 늪이 내 원시의 열탕이라는
걸 발견한다.
 
식탁에 앉아 칼질과 포크질로 죽은 암소고기의 탄력에서 느끼는 관능.
그 암소고기는 물질의 열탕 속에서 꿈꾸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수석 수집가인 그녀는 쑥돌의 속살을 문지르며
원생대 바다 속 생명체들의 숨소리를 만지고 있다고 한다.
TV에서는 시리아 난민 열세 살 키난 마살메흐가 인터뷰를 하면서
"그냥 전쟁만 멈춰줘요, 그게 전부예요."라고 외치고 있다.
 
카프치나
엔진 소리를 내며
굴삭기가 새 길을 내고 있다
 
굴삭기의 날카로운 삽날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마을의 푸른 언덕
부르륵 부르륵 퍽, 퍽, 퍽 불꽃이 튀는 굉음
언덕의 중심에 숨어 있던
바위의 정수리에서 터져 나오는 핏빛소리
길바닥엔 언덕에서 파낸 돌과 흙들이
맨 몸뚱이로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는 어제 밤 빨간 버스를 타고
19세기의 그림 속 마을
카프치나로 떠난다고 했다
산양들이 흰 구름들과 살고
있다는 카프치나
 
고산지대高山地帶의 산양들이
파란 하늘을 향해 메에 메에 노래할 때
흰 구름은 자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모습을 하고
산양들의 머리 위에서 떠돌고 있다는
카프치나 카프치나
 
아스팔트 도로의 옛 마을 우물터에서는
어릴 적 빠져죽은 계집아이가
밤마다 색동옷을 입고 나와 혼자 놀고 있다
 
빛과 시간
 
빛은 과거의 공간 속에서 탈출한 새 시간이라고?
15억 년 전에 폭발한 초신성의 빛이
지금 지구에 도착한 것이라고?
컴컴한 터널 속에서 환한 빛을 뿜으며
달리고 있는 전동차 속의 나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들을
어떻게 동일하게 맞출 수 있을까?
그녀는 꽃을 안고
천년의 시간이 파란 이끼로 피어나는
탑의 둘레를 돌고 있다       
 
지붕 없는 집
 
도로를 달리던 차가
지붕 없는 집 앞에 멈춰 서 있다
 
지붕 없는 그 집에서는 밤이 되면
하늘의 별빛들이 내려와 의자며
식탁이며 깨진 유리창 창틀에서
 아이들처럼 뛰고 노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집은 어느 날
스스로 배가 되어 별빛 찬란한
우주의 바다로 둥둥
떠갈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
 
CCTV 화면에는 60대의 여자가
목에 별빛 스카프를 두르고
아파트 옥상에 서 있는 장면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의 화면
 
그는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다.
그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걷고 있다.
태양 볕이 영상 50도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는 모래밭에 쓰러졌다.
(그는 장면을 바꾼다. 사막을 초원으로,
계절을 4월로, 그리고 구름이 덮인 하늘,
기온은 영상20도, 풍속은 .....)
그는 풀밭에 앉아 있다.
멀리 마을이 보인다.
그는 일어서서 마을 쪽으로 걷는다.
아스팔트 길이다.
(그는 1500cc 빨간 승용차를 아스팔트 길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운전을 하고 달린다.
(그는 운전석 옆 자리에 23세의 금발 아가씨를 앉혔다.)
그는 23세의 금발 아가씨와 함께 휘파람을 불며 마을로 들어간다.
(그 순간 사라지는 화면)
그는 눈을 떴다. 아침이다. 머리맡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 50분전.
그는 세수를 하고 정장차림으로 문을 나선다.
(초원, 빨간 승용차, 금발의 아가씨는 그의 화면에서 지워지고 없다.)           
 
시간
 
불빛 환한 아파트 창가에는
잠의 시간에서 추방된 사람이 서 있고
지나간 시간이 몽롱한 안개를 피우는 거리엔
한 여인이
죽은 개를 가슴에 품고 걸어가고 있다
그 시간 You Tube의 인문학 특강
“존재의 세계에는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선이 없다“는 강사의 목소리가 귀를 울리고
발굴을 끝낸 인골이
굵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카자흐스탄 박물관 유리관 속에서
2500년 전 유목민의 시간이
전등불빛 아래서 반짝이고 있다
 
 
 사진 한 장
   
 
 
  그는 눈 덮인 광야의 사진 한 장 남겨놓고
  아시의 시간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밤이 되면 히힝 히힝 광야의
   말울음 소리가 집안을 흔들었다.
   알타이 산맥 눈 녹은 초원지대 허공에서
   검독수리 한 마리 빙빙 돌고 있는 한낮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남미의 정글 속
   거대한 마야의 탑 돌계단에서 잠자던 곰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집을 떠난 한 사내가 몽골말을 타고
   바이칼 푸른 호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3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36 위상진시인의 시모음 및 시평 2022-10-14 0 542
135 김현승 시모음 2022-10-10 0 645
134 기형도 시 모음 2022-10-10 0 1386
133 에이츠시 모음 2022-10-10 0 619
132 박진환 현대시모음 2022-10-10 0 530
131 김지하 시모음 2022-10-10 0 542
130 하이네 시 모음 2022-10-10 0 1244
129 괴테 시모음 2022-10-10 0 566
128 헤르만 햇세 시 모음 2022-10-10 0 931
127 황지우 시 모음 2022-10-10 0 1954
126 김지향 시 모음 2 2022-10-10 0 490
125 김지향 시 모음 60편 2022-10-10 0 472
124 다시 읽는 세계의 명시 2022-09-12 0 938
123 황지우 시모음 2022-09-11 0 517
122 루이스 글릭Louise Gluck 시모음 2022-09-11 0 697
121 이상 전집 1. 시 2022-08-31 0 592
120 이상 전집 2. 단편소설 2022-08-31 0 528
119 이상 전집 4. 수필 외,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2022-08-31 0 576
118 말테의 수기 -릴케 2022-08-31 0 593
117 릴게 시모음 2022-08-31 0 710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