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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환시인-이솔 시의 사물, 그 선명한 물빛
2022년 09월 25일 17시 11분  조회:379  추천:0  작성자: 강려
이솔 시의 사물, 그 선명한 물빛


안 수 환


1
사물은 정제된 질서의 전면일까. 이솔의 「첼리스트를 위한 기도」를 읽어보면, 사물 (ʻ첼로ʼ)로부터 오는 응분의 진동이 길고긴 포물선 도면을 그려낸다. 이는, 시를 쓰는 자의 몽상이 어떤 사물의 문턱과 어떻게 겹치고 있는지를 비교적 소상히 알려주는 부분이랄 수 있다. 그것은, 사물은 제자리에 있어도 가만있지 않고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시인의 경우, 사물은 부지불식 중 실재에 대한 어형語形의 곡용曲用 (즉, 체언의 꼬리에 붙는 격조사)이라는 것이 극명히 드러난다.
 
첼로의 현을 훑어 내리는 활
 
시인의 사유는 사물운동의 표면을 따라간다. 시인의 문맥은 정관靜觀 속에 파묻히지 않고 혹은 불가지론의 묵시적 잠언과 제휴하지 않고 사물 하나하나의 풍모를 묘사해가며 사물로서의 보선補繕 그쪽을 잠깐잠깐 넘겨다본다. 「첼리스트를 위한 기도」의 전문을 읽어보자.



첼리스트는 가장 큰 포옹을 할 수 있다
비스듬히 앉아 발끝을 세우고 포옹의 자세를 만든다
 
여인의 팔에 안긴 피에타
예수의 주검을 받쳐 안은 성모마리아
무릎에 안겨 늘어뜨린 손등의 그 못자국을
비탄과 슬픔을
긴 활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활이 미끄러지며
끓어오르는 소용돌이를 달랜다
-아가야, 염려마라-
자세를 다잡고 두 팔에 힘을 조여온다
-너를 낳았다-
모두 내어주고 한아름으로 받아 터질 듯
너를 낳았다
 
첼로의 현을 훑어 내리는 활
울림통을 흔드는 노래
달려 가 포옹으로 안기는 황홀한 기도
 
보자. 음악을 듣는 자로서의 시인의 청각은 지금 몰각의 지점에 가 있다. 시인은, 첼리스트가 첼로를 끌어안은 ʻ가장 큰 포옹ʼ을 본다. 시종일관 시인의 몰입은 첼로의 벽화壁畵를 바라본다. 첼로의 선율이 아닌 ʻ첼로의 현을 훑어 내리는 활ʼ을 본다. 시인은, 첼리스트가 첼로를 끌어안은 포옹 그 자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는, 사물의 보선 어떤 곳을 들여다보더라도 그 자리엔 어떤 음률이든 음악이 들어앉을 공간이 없다. 시인은 벌써 첼로의 음률을 사물의 곡용으로 고쳐 듣고 있었던 것. 그것은 첼리스트의 비탄과 슬픔이었다. 어느 순간 그러나 첼리스트의 비탄과 슬픔은 첼로를 끌어안은 ʻ가장 큰 포옹ʻ으로 바뀌면서 사물의 공허를 뛰어넘는다. 첼리스트가 첼로를 끌어안은 자세를 보고난 다음 시인은 이곳에서 ʻ여인의 팔에 안긴 피에타ʼ를 보며, ʻ예수의 주검을 받쳐 안은 성모마리아ʼ를 보며, 또 성모마리아의 무릎에 안긴 예수 손등의 ʻ못자국ʼ을 본다. 여기서부터는 시인의 몽상 곁가지에 돋아난 배아胚芽의 눈빛이 활짝 열려버린다. 이때 시인은 공허하기 때문에 ʻ가장 큰 포옹ʻ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러나 시인이 바라본 세계는 시인 자신의 공허보다도 더 큰 사물의 공허를 보고 있었던 것. 사물의 공허라니. 이리 놓아도 흔들리고 저리 놓아도 흔들리는 사물들의 편산遍散. 시인은 비로소 사물의 공허를 보고 있었던 것.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시인은 그와 같은 공허의 반대쪽에 서있는 ʻ가장 큰 포옹ʼ의 대대待對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첼로의 울림통을 흔드는 노래, 그 노래 곁으로 ʻ달려 가 포옹으로 안기는 황홀한 기도ʼ로서의 독창력이었던 것.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사물 (ʻ첼로ʼ)의 형상 혹은 ʻ포옹ʼ의 사실성이 정신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바로 그 파동이었던 것. 그러기에 이솔 시인은 시간의 궁극 뒤편에 머물러 있던 자신의 시선을 끌어당겨 사물 본색의 앞자락에 매놓고, 그런 다음 그 조형물로부터 달려오는 물체의 계기성繼起性에 대하여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며 화답한다. 그것은 사물로 인한, 사물의 가득찬 시간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살뜰한 감회를 숨기지 못하는 조바심일 것이다.
 
2
이솔이 본 사물의 범주는 그러나 시간의 실재 ʻ안ʼ에 혹은 ʻ위ʼ에 흘러넘치는 동태적 태몽胎夢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공간보다도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따라서 가령 비현실의 경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사물은 수많은 일상의 의당宜當 (그것이 혹여 불운의 더께로 얼룩진 옷감일지라도)과 손을 잡은 뒤 차곡차곡 질서의 중심권으로 들어온다. 「히말라야 독수리와 날다」를 읽어보자.
 
사나이는 페러글라이더로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다
상승기류를 타고 꽃으로 핀 날개
앙다문 빙하협곡의 준엄한 설산들의 침묵 속으로
 
줄을 당겼다 풀어놓으며 기류를 타는 사나이
상승기류 속에서 함께 날고 있는 히말라야 독수리
페러글라이더와 설산 독수리를 따라
날지 못하는 옷을 벗고 날개를 펴는 또 하나의 나도
히말라야 독수리의 묵언을 들으며
나는 자유롭고 행복해 지는데
별이 마구 빛을 쏟아내는 하늘을 날며
계단식 밭이나 추수를 끝낸 집들
떼로 몰려다니는 양떼들이 까마득한데
사나이는 페러글라이더의 줄을 다시 잡아당긴다
설산이, 히말라야 능선이 눈 아래 있다
히말라야를 넘고 있다
 
바람이 분다 이상기류가 흐른다
소용돌이 너머 히말라야가 무슨 소리로 말하고 있다
독수리가 솟아오르고 사나이가 따라 솟아오르고
새로 날기 시작하는 나도 무어라 웅웅거리는 하늘 속으로
솟구친다 먼저 떠난 나를 찾아
이미 그곳으로 날고 있는 독수리와 함께
 
시에서는, ʻ독수리ʼ와 페러글라이더로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는 ʻ사나이ʼ와 그리고 ʻ나ʼ는 하나로 박제剝製된 몸통을 세우며 하늘로 함께 날아오르는 비상의 몸짓을 체현한다. 이들 비상은 히말라야의 ʻ앙다문 빙하협곡의 준엄한 설산들의 침묵ʼ 앞으로 달려가 일순 서로서로 옷깃을 잡아준다. ʻ히말라야 독수리의 묵언ʼ을 그대로 쏙 빼닮은 설산의 백白 앞에서 ʻ나ʼ는 마침내 ʻ새로 날기ʼ 시작한다.
 
히말라야 독수리의 묵언을 들으며
나는 자유롭고 행복해 지는데
 
ʻ내ʼ 자신의 은익을 그렇게 드러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은익의 시론적試論的인 노출은, 시인이 이곳에서 추구하고 있는바 물체의 표정으로 드러나는 그 형상의 가시적 인영印影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물은 그것이 어떤 언어와 연결된 표상을 내보일지라도 자신의 몸에 맞는 기표가 있는 이상 그 사물이 그 사물일 수밖에 없는 기의記意를 따로 숨겨두는 법이 없다. 즉 시인의 입 밖으로 새나오지 않은 언표는 그것이 폐물이라면 모르되, 시인의 입술에 묻은 기물器物은 한사코 시인의 입 밖으로 달려 나오기 마련이다. 아직은 몽상의 조응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단계. 시는, 이 시간의 곡면 위로 고개를 들고 비유와 상징과 함축과 집합의 현상학적인 울림을 몸에 붙인 채 불현듯 달려온다. 시인이 어떤 물체를 보게 되면, 물체는 즉시 시인의 앞가슴을 짓누른 뒤 곤충의 비모飛貌처럼 날개를 펼치고 사뿐히 그 물체 정강이 앞으로 내려앉는다. 물체의 복사는 없다. 「빨간 꽈리를 담은 바구니가 있는 정물」을 읽어보자.
 
종이찰흙으로 은빛 바구니를 만들었다
종이를 잘게 찢어 물을 부어 삭히고
풀반죽으로 크게 타원형의 둘레를 올려 빚으며
돌아가며 조약돌 조개껍질을 파도결로 박아
빨간 똬리 한 움큼 담아 TV 옆에 놓았다
 
동이 트면서 왁자한 소리에 깨어났다

용도폐기된, 시로 그려내지 못한 낙서
90% 할인 등산복 컬러광고지
10년도 한참 전의 가계부 몇 장
미사일 시험발사 신문기사 조각조각
 
바구니를 돌아나와 안개빛 파도로 밀려오는
태어나지 못한 시어를 부르는 소리
가난한 장바구니 이야기가 걸어나오고
미사일 전문가의 어려운 해설이 우주궤도에서 어지럽다
국민유니폼이 된 등산복 상표들 “야호!” 소리
온갖 소리의 꽈리를 불고 있다
 
해안을 따라 조개를 줍고 조약돌을 바다에 던지며
바다 저쪽 미소를 향해 부르는 소리는 목이 멘다
꽈리 소리 화음을 넣어 그린 정물화
TV속 오늘의 소리까지 가득 담겼다
 
이솔 시의 문맥에는 개념 (즉, 주장)이 없다. 개념이란 명사가 일반화되고 (즉, 집합의 내포적 방법), 관계가 추상화되는 (즉, 집합의 외연적 방법) 문맥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한다면, 명사는 질화質化qualification와 양화量化quantification의 단계를 거쳐 일반화되는바 그 단계를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관계가 추상화될 때 개념concept이 나타나는바 그 개념을 데려오는 눈빛 그것들이 없다는 말이다. 이솔 시에는, 집합이 있을 뿐이다. 집합을 만드는 경우, 예컨대 이솔 시의 문맥에 등장하는 낱말 (즉, 요원要員individual) 하나하나가 모여 어떤 개념을 만들었다고 치자. 이때는, 시의 문맥 속에서는 내포와 외연이 논리적으로는 서로 대칭적 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실제로는 이 대칭적 관계가 제대로 삽입되는 경우는 희박하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수數라는 개념에서는 무한의 요원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외연은 나타나지 않고 내포만 드러날 따름이다. 보자. 이솔 시인이 ʻ빨간 꽈리ʼ를 호출할 땐 그 자리엔 즉시 ʻ빨간 꽈리ʼ가 달려 나오고, ʻ은빛 바구니ʼ를 호출할 땐 그 자리엔 또 ʻ은빛 바구니ʼ가 달려 나온다. ʻ 꽈리ʼ와 ʻ바구니ʼ에 붙어있는 내포의 면적도 그리 넓지는 않다. 물체들은 물체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물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빛의 아들들이다. 그것들은 하늘의 존재가 신성하듯이 시인의 안목과 나란히 겹치면서 대지의 자리 아무데나 떠돌아다니며 인간의 삶과 섞이다가는 이따금 천국의 지평으로 솟아오른다. 이솔의 정물은 그런데 그렇더라도 결코 경배의 대상으로는 몸을 바꾸지 않는다. 생생한 정물의 안뜰. 본래, 형태와 색채와 감정과 영혼 그리고 시적 표현으로서의 모든 감수성은 그것이 지상의 풍경이든 천국을 향한 의미심장한 어느 협화음이든 또 무의식의 근원에 빠진 심원한 심층심리일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공중에 떠있는 공간으로서의 발호跋扈에 불과한 것들이다. 이는, 실재하는 것의 덧없음일 것이다. 시인이 더욱더 물체의 단단함, 물체의 즉각적인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은 저와 같은 요설饒舌로서의 몽환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의 보폭은 짧다. 특히 이솔 시의 물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눈팔지 않은 (가령, 부차적인 이미지), 시인의 유비들 속엔 ʻ순간ʼ을 이야기하는 관점 이외에 다른 어떤 ʻ낯선ʼ 낱말들도 끼어들지 않는다. 시인의 ʼ꽈리ʻ와 ʼ바구니ʼ가 이야기하는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바구니를 돌아나와 안개빛 파도로 밀려오는
태어나지 못한 시어를 부르는 소리
가난한 장바구니 이야기가 걸어나오고
 
시인이 붙잡고 있는 ʻ순간ʼ이 일러주는 삶의 유비는 또 이렇게 드러난다.
 
용도폐기된, 시로 그려내지 못한 낙서
90% 할인 등산복 컬러광고지
10년도 한참 전의 가계부 몇 장
미사일 시험발사 신문기사 조각조각
 
시인은 꿈을 외면했다. 적어도 꿈의 내용에 상응하는 공기와도 같은 혹은 호수와도 같은 찬연한 불빛 따위를 외면한 채 (즉, 물체의 활성화로부터 등을 돌린 채) 그 물체의 감각질 아래 좀더 낮은 비탈길로 내려선다. 시인의 손에 잡힌 신비가 있다면, 더욱이 시인의 폐부로 파고들어온 회한이 있다면 그것은 낯선 낱말 대신 방안 가득 아무렇게나 눈에 띄는 일상의 난마亂麻들 (즉, ʻ신문기사 조각조각ʼ)일 것이다. 그것은 또 고독감일 것이다. 정신현상학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시인의 우울일 것이다. 시인의 비탈길은 그런데 「트럼펫 소리는 쇳소리가 난다」에 이르러 더욱 가파르게 진행된다.
 
습관처럼 모래사장에 손가락 그림을 그린다
비행운이 하늘에 그린 오선지가 길게 떠 다닌다

아이가 좋아하는 동요는 부르다 쓸쓸해 진다

제각각 제 소리만 고집하는
불협화음으로 매달리는 음표들의 반란
현대음악은 날것을 먹던 그때를 추억한다
 
귀를 찌르는 트럼펫 소리가 달려온다
둥글고 긴 코를 틀어올려 트럼펫을 부는
象牙가 아름다운 그는
식어가는 작은 생명 앞에서 긴코로 흙바람을 일으킨다
몇 마리의 코끼리들도 떠나지 못하고
한 옥타브 올려 쇳소리를 뽑아낸다
목이 메일 때는 쇳소리가 난다
트럼펫으로 소리지르거나 까치가 갑자기 날아오를 때
아프리카는 쇳소리를 낸다
먼 초원을 향한 무거운 발걸음까지
 
전동차가 레일을 깎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쇳소리의 긴 꼬리
긴코로 부는 트럼펫 소리를 속으로 듣고 있다
 
코끼리의 긴 코로 부는 트럼펫 소리는 ʻ쇳소리ʼ를 낸다. ʻ쇳소리ʼ는 ʻ제각각 제 소리만 고집하는ʼ, ʻ현대음악의 날것ʼ과 같은, 이 땅 위의 ʻ불협화음ʼ 즉 아무것도 제자리에 서있지 못하는 혹은 아무것에도 발붙일 수 없는 미궁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는 비탄의 알레고리이다. 이솔은 분명 ʻ견고한ʼ 물질의 시인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바람은 휘어져 있고, 시인이 바라보는 도시 아이와 아파트는 휘청거리며 (「휘청거리는 새」), 시인이 바라보는 화살은 방향이 없다 (「팽팽함이 좋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물체는 더 무거워져 있고, 물체의 박동은 더 팽팽해져간다. 물체의 박동이 그렇게 팽팽해져간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그 물체의 박동을 시인의 체온 혹은 책임으로 연결되는 층계 위에 놓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저것들 객관의 사물들이 데리고 오는 물질적인 강도强度로서가 아닌 시인 자신의 체질로서의 융점融點으로. 코끼리의 긴 코로 부는 트럼펫 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는 쇳소리를 낸다 / 먼 초원을 향한 무거운 발걸음까지”. 아프리카 먼 초원을 향한 코끼리 트럼펫의 쇳소리. 아프리카의 쇳소리. 무슨 뜻인가. 아프리카 코끼리의 무거운 발걸음 그것은 그 땅 위에 누군가가 살아있고 또 누군가가 죽어가는 침울한 삶, 침울한 슬픔으로 더할 수 없이 허물어져가는 그들 여정에 대한 유추일 것이다. 그러기에 코끼리는 또 “식어가는 작은 생명 앞에서 긴 코로 흙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물론 코끼리의 쇳소리를 바라보는 이솔의 생각은, 사물을 사물로만 응시하던 시인의 냉정과는 달리 비합리의 수사적 조호調號까지도 때로는 기꺼이 꾸어오겠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바야흐로 지금 이솔 시는 아득한 산정 그 능선을 지나 사물의 모진 형태를 깎으며 깎으며 홀연 몸을 바꾸어가는 중이다. 이 점, 마른 장작을 보면 불꽃 솟구치는 아궁이를 보게 된다는 연기적緣起的 감응으로서의 기법 문제가 아닌, 그와는 전혀 다른 인식론적 발상으로서의 사유형식에 새삼 손을 뻗치고 있는 장면이랄 수 있다. 물체 속으로 파고들어간 존재의 익명성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시인과 사물의 안과 밖이 옥수수처럼 아직도 자웅동체雌雄同體의 홀몸으로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존재론적인 철학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시인과 사물 사이 내재와 외재,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극명하게 나뉘어있지 않다는 점. 그런 점에서는 이솔 시의 문맥을 통틀어 사물은 사라지지 않고 사라지기는커녕 그 사물의 형상 하나하나가 어둠 속에서 더욱더욱 찬연한 빛을 발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시인은 사물의 면전 앞에서 그쪽 통지문을 받아 쥔 이상 섣불리 잘 알아들은 체 할 수는 없다. 사물은 빈 공간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사물은 어둠으로 가득찬 공간도 아니다. 사물의 변용은, 가령 『주역』의 십익十翼 육효六爻의 구조적인 해석에서 말하듯 어떤 경우로든 그것들에겐 제자리에 고착된 법칙이 없으며 멸하고 생하며 강약이 서로 바뀌는 이른바 변역變易의 상황을 줄기차게 내보일 뿐이다. 사물은 그러므로 상황인 것. 시인은 이때 어둠 속에 사로잡힌바 자아를 상실하며, 자아를 상실한 찰나, 이때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주장할 명분을 얻게 된다. 상황에 대한 대응. 시인은 한사코 만방으로 에워싸인 사물들로부터, 저러한 사물들과는 달리 내가 잠들지 않고 ʻ깨어 있다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시인 것이다.
 
3
보자. 이솔 시를 읽는 독법은 이렇게 열리고 있었던 것. 사물이 있어야 할 처소는, 그러니까 그 사물의 입지는 이곳에 있지 않고 저곳에 있었던 것. 시인과 사물 그 비분립의 간격은 비로소 이렇게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첼리스트를 위한 기도」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첼리스트의 첼로 연주를 들으면서 이솔은 어느새 로마 바티간 시국으로 휠훨 날아가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조각품을 면대하고 있었던 것. 산피에트로대성당 입구에 있는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피에타와의 만남. 시인의 작품을 통해, 일순간 음악과 조각의 만남이 그토록 비장한 개오開悟의 체험으로 그렇게 성취되었다. 이는, 이솔이 사물을 읽는 또 다른 독법이었다.
 
활이 미끄러지며
끓어오르는 소용돌이를 달랜다
-아가야, 염려마라-
자세를 다잡고 두 팔에 힘을 조여온다
-너를 낳았다-
모두 내어주고 한아름으로 받아 터질 듯
너를 낳았다

첼로의 현을 훑어 내리는 활
울림통을 흔드는 노래
달려 가 포옹으로 안기는 황홀한 기도
 
첼로를 끌어안은 첼리스트의 포옹. 첼리스트의 첼로 연주. 첼로의 절규. 음악으로서의 극지의 절정. ʻ황홀한 기도ʼ. 첼로 (즉, 음악)를 끌어안은 이솔의 포옹은, 말하거니와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무릎 위에 얹어 놓고 [ʻ-아가야, 염려마라-ʼ], 그 아들을 어깨로 받치면서 [ʻ-너를 낳았다-ʼ], 가슴 속에 꼭 껴안은 비탄을 그대로 옮겨온 사영寫影이었다. 사물과의 피할 수 없는 접촉. 저쪽에 있는 사물의 정황을 마주보며 이른바 ʻ깨어 있음ʼ을 자각할 때 그때 비로소 한 편의 좋은 시는 시인의 몸통 [ʻ첼로의 현을 훑어 내리는 활ʼ 혹은 ʻ울림통ʼ ]으로 흘러들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었다. ʻ없는ʼ 것은 ʻ없다ʼ. 다시 말하자면, 시인은 물체를 경험할 때 그때 비로소 ʻ없는ʼ 것과 ʻ있는ʼ 것을 함께 경험한다. 사물의 형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그때쯤 사물은 시인의 동공으로 돌아와 캄캄한 밤의 입성을 벗어버린 후 환한 대낮의 기강으로 다시 몸을 세운다. 그때쯤 사물의 섭정은 끝이 나고, 사물의 현존은 변증법적인 대립을 풀고, 시인 앞으로 달려나와 내분비內分泌 정신의 자유로운 익명성과 마주앉는다. 물론 시인의 정신은 저쪽에 있는 사물의 외재적 사안과는 무관한 입장에 놓여 있다. 외재와 내재의 연관은 구만리장천의 아득한 거리에 존재한다. 시인의 자아는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흔들리기 때문에 밤과 같이 어둡고 낮과 같이 환한 궤도를 맴돈다. 엄격히 말해서 시인의 자아는 주체가 없는 존재로서의 탈脫자아와 자주 접촉한다는 말이다. 의식은 현존하지만, 그 의식은 사물의 익명성 앞에서 몸을 곧추세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상실의 자아와 홀연 만나게 될 때 그때 내가 ʻ깨어 있다ʼ 는 자기발견을 하게 된다 [ʻ황홀ʼ이 아니다]. 이른바 사물의 출현이 주체의 성립을 재촉했던 것이다. 사물과 정신의 교호작용交互作用. 시인의 자아와 물체의 진동 사이를 오고가는 교호작용. 이 (순환의 이치)를 두고 『주역』 「계사하전」 제4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음이 극에 달하면 양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양괘다음 음괘다양 陽卦多陰 陰卦多陽). 정신과 물체의 파동. 창조 (즉, 양陽)와 정적 (즉, 음陰)의 관계. 양상陽象, 즉 밝은 대낮은 하늘과 연결되었고, 그와는 반대로 음상陰象, 즉 어둔 밤중은 땅으로 연결되었다. 하늘은 ʻ위ʼ에 있어 움직임의 표상으로 존재하며 (양의 존재, 즉 정신), 땅은 ʻ아래ʼ에 있어 움직임을 받아들이는 휴지부로 존재한다 (음의 존재, 즉 물체).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의식은 요컨대 그렇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기 홀로 선 몸이 아니다. 엉뚱하게도 나의 자아는 ʻ밖에ʼ 있었던 것. 하이데거의 생각이 그랬듯이, 시인으로서의 홀로 서기의 굴대는 내 안에 내가 있는 인품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자기 ʻ밖에ʼ 서있는 현존으로서의 존재라는 것. 나는 나 자신을 떠나 ʻ밖으로ʼ 열린, 밖에 있는 세계 저곳 초월로 열려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마주보는 물체의 면적은 어느새 등불이 되어 이 존재실현의 비인칭까지 관할한다. 이 글의 결론을 말해보자. 이솔 문학의 공적은 이 존재실현의 물체들을 더욱 생생한 색채의 물빛으로 물들여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솔은 ʻ나ʼ를 말하지 않고, ʻ나ʼ를 말하는 대신 저쪽 바깥에 존재하는 물체의 위상에 대하여 애써 논변한다. 이는, 이와 같은 시의 인지구조는 ʻ나ʼ를 지켜내는 감성 혹은 내가 나 자신에게 매몰된 관념 그것을 내버린 자로서의, 천지간 물빛을 바라보는 자의 자유로움일 것이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를 읽는 즐거움 하나는 시의 문맥 안에 깃든 물체들의 여러 풍모에게 눈길을 주는 대신 시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누구이며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판독해내는 기쁨에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시인의 관념을 따라잡기도 어려운 판에 물체들의 뜀박질을 따라가기는 더욱 숨찬 노릇이다. 이솔 시의 탈脫관념이 붙잡고 있는 문체 앞쪽에는, 바라건대 물체들 그것까지도 또 얼마나 큰 혹은 복잡다단한 변덕이 숨어 있는가를 거듭 되물어야 한다는 과업이 가로놓여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물의 틈은 관념의 틈보다도 더 멀다는 것. 사물은 즉물卽物 (사르트르)의 단층을 훨훨 뛰어넘는 사건이라는 점. 그래서 『대학』에서는, 사물에는 근본적인 것과 말단적인 것이 따로 있고, 끝과 처음이 따로 있고,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 따로 있으니 그것을 알게 되면 도에 가까워진다고 말했던 것이다 (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 즉근도의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그랬다. 극極이 없는 물체들. 지금까지 그 사물들의 간격을 응시해온 이솔 시의 까슬까슬한 인식이 독자의 심금을 새롭게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문학  2014. 5>
[출처] 안수환시인-이솔 시의 사물, 그 선명한 물빛|작성자 나무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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