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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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장편소설 《진허》(5)
2013년 09월 17일 13시 55분  조회:1250  추천:1  작성자: 김극민
5
고개에 올라서니 읍내의 정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고층빌딩도 공장단지도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시가지였다. 남쪽으로 잔잔한 구릉들이 줄쳐오다가 시가지 북쪽켠에 이르러서는 제법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있었다. 여기는 강원도 경내라고 하니까 저 중중첩첩한 산마루를 넘고넘으면 드디여 천하명산 금강산이 나타나리라. 아무때든 금강산이야 한번 가보아야지. 중국의 옛 문인도 “고려국에 태여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것이 소원이다.(愿生高丽国, 一見金刚山.)”라고 했다는데 백의민족으로 태여나 금강산구경도 못하고 죽는다면 그보다 더 큰 유감이 어디 있으랴. 다행히 연변에서 살아온 덕분에 유람차로 장백산구경은 해보았다. 비록 한번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정상에서 느꼈던 그 신비함과 성스러움은 죽어서도 잊혀질것 같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 그림과 사진으로만 보았던 금강산, 내 눈으로 직접 본다면 그 감동은 더구나 어떠할것인가. 구름속에 잠긴 만이천봉, 옥가루 흩날리듯 층암절벽에서 내리꽂히는 무수한 폭포… 준이는 진짜로 금강산절경에 몸을 담고있는듯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신명까지 났다. 녀석이 판넬의 고역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뛰쳐나온 주제에 흥타령은 무슨 흥타령이야. 금강산구경은 남북이 통일된후에나 고려할 일이고 여기 반쪽 강산이라도 구경하러 다니려면 먼저 착실하게 용돈이나 벌어두어라. 아무때든 돈이 있어야 금수강산이지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이다.

지갑에 들어있는 현금 50여만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깨여나 오늘도 장장 열두시간 고역을 치를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뜩했다. 곽씨마저 가버렸으므로 더구나 있고싶지 않았다. 박사장이 출근하자 그는 몸이 아파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박사장은 차라리 잘됐다는듯이 부인한테 로임을 결산해주라고 분부했다. 부인은 결산을 마치고 그에게 돈을 넘겨주면서 언짢게 말했다.

“아저씨가 한달을 채우지 못하면 우리가 소개소에 돈을 지불해야 해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준이는 돈을 받아넣고 그 자리로 판넬을 떠났던것이다.

읍으로 내려가야 할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산으로 들어가는 오솔길로 빠져들었다. 서두를 필요야 있는가? 한번 가면 다시 올 일도 없는 고장인데 두루 산천경개나 구경하고 내려가도 늦지 않다. 나중에 재래시장에 가서 두부찌개나 순대안주 일인분 청해놓고 유유히 술잔을 기울이다가 오후 네시쯤 되면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의정부까지 가서 다시 지하철 갈아타고 인천으로 죽―

길섶에 노랗게 핀 맨드라미꽃들이 미풍에 하느적거리며 고적함을 하소연하는듯했다. 준이는 손 가는대로 한송이 두송이 꺾어들었다. 작은 꽃, 수수한 꽃, 보는이 하나 없어도 철따라 어김없이 피고지는, 그래서 더욱 처연해보이는 들꽃이다. 아무리 하찮은 들꽃이라도 다시금 여겨보면 나름대로의 운치가 깃들어있는데 세상인심은 오로지 이름 높은것만 붙좇고있으니…

소나무숲을 지나 고개 하나를 넘으니 자그마한 공지가 나타났다. 이랑을 지은 흔적으로 보아 작년까지 참외농사나 짓다가 페농한것 같았다. 공지 한켠에 거의 씰그러지는 다락 한채가 서있었다. 준이는 풀숲을 헤치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가름대 두어개밖에 남아있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다락우에 올라가니 구멍 뚫린 함석지붕이 네 기둥에 받쳐있고 뒤면에만 판자벽이 남아있을뿐이였다. 준이는 풀 한웅큼을 뜯어다가 먼지를 대수간 털어내고는 바닥에 털썩 앉았다. 산속이여서 시야를 멀리 펼칠수는 없었지만 주위의 산과 나무 그리고 두둥실 떠가는 흰구름만 보아도 마음이 상쾌했다. 저 구름들은 어디서 오는것일가? 서북방향에서 몰려오니 분명 바다건너 중국에서 오겠지. 땅덩어리를 비기면 한국은 중국보다 턱없이 작은 나라. 그래도 국호만은 클 대(大)자를 붙여 대한이라 자칭하니 소국이라 하여 력대로부터 받아온 온갖 릉멸을 떨쳐버리려는 뜻이였을가? 아무튼 땅은 네것내것이 있어도 구름만은 임자가 없어 허공에서 자유로이 떠다니는구나…

부지중 중국의 옛 시 한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고인은 황학을 타고 날아갔으니
이곳엔 텅 빈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번 가고 다시 올줄 모르니
흰구름만 천년토록 헛되이 흐르도다
 
어느때 누가 지은 시였던가. 리백? 두보? 백거이? 맹호연? 아니, 그렇게 이름난 시인은 아닌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지은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가 되였나? 치매가 왔나? 머리가 이렇게 무디여지다니… 제길, 판넬탓이야. 스무이틀이나 역축처럼 일만 했지 머리를 쓸 여가가 있었던가. 그곳에 필요한건 뚝심이였지 예술적감성따위가 아니였다. 감성이 눌려있다보니 오늘 대수롭지 않은 경물에도 이렇듯 감동을 느끼는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편안한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건마는…

문득 시꺼먼것이 배속에서 치밀었다. 이놈아, 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그따위 랑만에 빠져드는거야. 이 허술한 다락이 황학루란 말이냐? 구름이야 천년 흐르든 만년 흐르든 너하구 무슨 상관이야. 딸이 한국에 시집와서 그닥 행복하게 사는것두 아니구 안해도 이태째 한국에 와서 갖은 고생 다하는데 무슨 신바람이 나서 시를 다 읊조리는거야. 그토록 현실감각도 무디고 분별력도 없으니까 불법체류자란 모자를 쓰고 막로동판으로 굴러다니지… 한바탕 자신을 꾸짖고나니 속이 어느 정도 후련해졌다. 들뜬 감정이 가라앉자 랭정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예술적감수력이란 과연 한푼의 가치도 없는것일가? 아니, 예술 자체가 저 뜬 구름처럼 허망한것이 아닐가? 한평생 예술을 숭상해왔다. 비록 예술가로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예술교육자로서 나름대로 사명감을 안고 살아왔다.

90년대 중반, 장춘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중학교 미술교육의 질을 제고할데 관한 론문을 한편 썼는데 자치주교육학회에서 그 론문이 방향성문제를 제출했다면서 성에 추천하였다. 덕분에 성교육학원에 가서 론문을 발표할 기회를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회의에 참가한 이튿날 저녁, 웬 한족젊은이가 그의 숙소로 찾아왔다. 연변에서 온 김준선생을 찾는다는것이였다. 준이가 나서서 무슨 일인가고 물었더니 그저 자기를 따라오라는것이였다. 밖에 나서니 호화승용차 한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젊은이는 그를 뒤좌석에 안내하고 차를 몰았다. 차는 남호기슭을 에돌아 시내중심에 들어섰다. 누가 자기를 찾는가고 물었더니 “쓰이거료부치더따콴”이라는것이였다. 대단한 부자라구? 부자들과는 추호의 인연도 없는데 누가 나를 찾아? 젊은이는 한바탕 시국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뿌싼뿌쓰(어중이떠중이)”들이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권력층과 그들의 자녀들이 떼돈을 번다. 로백성들이 가장 증오하는것이 그따위 부패분자들이다. “개잡종” 같은 새끼들! 좋은 끝장이 있는가 봐라…

준이는 자기를 찾는 “따콴”도 “개잡종”인가고 물었다. 젊은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분은 부패분자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능력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라는것, 학교때 자기한테 영어를 가르쳐준 영어교원이기도 하고… 지금은 외자유치사업을 하는데 자기는 그분의 개인운전사라는것이였다.

차는 으리으리한 고층호텔앞에 멈춰섰다. 밖에 고급승용차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젊은이를 따라 들어서니 아가씨들이 량켠에 마주서서 인사를 올렸다. 젊은이는 한 아가씨에게 준이를 안내하라고 부탁하고는 되돌아나갔다. 아가씨가 그를 엘레베터로 안내했다. 그는 슬그머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거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없는 사람이야? 나를 찾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불려오다니… 부자가 나 같은 가난뱅이교원을 찾을 리유가 뭐란 말인가? 혹시 론문때문에 교육국 지도간부가 나를 만나보려는것일가. 쳇, 무슨 대단한 론문이라구 상급에서 개별접견을 다하겠어… 아무튼 무슨 곡절인지 두고보자.

엘레베터를 나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마지막 객실에 이르자 아가씨가 노크를 하고 그를 들여보냈다. 객실 역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신사차림을 한 사나이가 쏘파에서 일어서더니 그한테로 다가왔다.

“니 넝 런스워마?(너 나를 알만하니?)”

뚫어지게 바라봐도 누군지 알수 없었다. 사나이가 갑자기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모들눈을 만들었다. 준이는 그제야 놀란 소리를 쳤다.

“아차! 너 ‘뚜이얜’이 아니야? 야―, 이거 어떻게 된 판이야?”

“뚜이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너 내 별명을 잊지 않았구나.”

“따콴이 찾는다구 해서 누군지두 모르구 왔는데… 혹시 네가 ‘따콴’이란 말이냐?”

“꼬맹이가 아무 소리나 줴친 모양이구나. ‘따콴’은 무슨 놈의 ‘따콴’이야. 교육국의 보잘것 없는 직원인데…”

“넌 내가 장춘에 온걸 어떻게 알았니?”

“일이 있어 교육학원에 갔다가 너희들이 회의실에서 나오는걸 봤다. 네가 암만 늙어두 내 눈이야 못 속이지.”

“옛날에는 네 눈이 ‘뚜이얜’이였는데 지금은 정상이구나, 교정수술을 했니?”

“하하하, 녀석이 내가 그 당시 바보처럼 보이지 않았더라면 진작 잘못됐을거다.”

아무튼 반가왔다. 거의 20년전, 농촌에 있을 때 무랍없이 사귄 한족친구였던것이다.

“뚜이얜”이 물었다.

“너 지금 뭘 하니?”

“미술교원이다.”

“그 나이에 지금두 미술교원이야? 왜 연변에서 살면서 하다못해 교장자리 하나 못 건졌니?”

“교장자리와 술 한잔, 어느걸 가지겠는가구 물으면 난 술 한잔 선택하겠다.”

“녀석이 농촌에 있을 때와 똑같구나.”

“벼슬할 생각이 없을뿐이다.”

이윽고 요염하게 치장한 아가씨 둘이 술과 료리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차탁우에 모태주 한병과 료리 여섯가지를 올려놓았다.

“뚜이얜”이 말했다.

“연회청이 따로 있지만 안목이 시끄러워서… 괜찮지? 여기서 한잔 하는것도…”

“아무렴, 나두 번거로운걸 싫어하니까.”

아가씨들이 두 사람 곁에 앉아서 술을 부었다. “뚜이얜”의 곁에 앉은 아가씨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어찌도 살갑게 구는지 보기에 민망했다.

준이가 말했다.

“너 이거 너무 하는게 아니야? 지금 모태주 한병에 얼마라구… 나 이런 술은 중앙령도동지들이나 마시는줄 아는데…”

아가씨들이 굉장한 시골뜨기나 만난듯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준이가 불편해하는것을 보고 “뚜이얜”이 아가씨들에게 눈짓을 했다. 아가씨들은 객방에서 나가버렸다. “뚜이얜”이 저가락으로 료리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상에서 제일 눅거리가 모태주야. 이 료리 한 접시 얼만지 아니? 천이백원이야.”

준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료리 한 접시가 내 두달치 월급과 맞먹는다니… 녀석이 껄껄 웃었다.

“걱정말아. 내 돈은 한푼도 안 쓰니까.”

자기 말 한마디에 외상들이 어느 호텔을 선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달려있으므로 호텔에서 이만큼한 대접을 받는것은 당연하다는것이였다.

중국의 최고명주(名酒)인데도 그 맛이 특별한줄을 모르겠고 사슴의 주둥이니 상어지느러미니 하는 료리 역시 먹어보기는커녕 구경조차 한 일이 없었다. 슬그머니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네놈이 농촌에 있을 때는 몸이 원숭이처럼 여윈데다가 눈마저 모들뜨기여서 한족동네에서도 조선족동네에서도 병신, 바보 취급을 받았지… 너도 나도 그때는 똑같은 빈털터리신세였지만 오늘에 와서 네놈은 뜨고 나는 가라앉았구나… 명예, 지위, 금전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정신생활에만 몰두해온 내가 옳았는가?

“뚜이얜”의 술버릇은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떠들썩하며 준이한테만 술을 권하고 자기는 그저 마시는 흉내만 냈다.

“니디노우퍼(너의 안해)는 뭘 하니?”

“하긴 뭘 하겠어, 장마당에서 채소장수질이나 하구있지.”

“니디로우퍼 쟝무리탕 잘 끓였지, 두부 넣고… 지금두 그때 쟝무리탕생각이 날 때가 있어.”

“쟝무리탕이구 떡대가리구 걷어치우구 좀 들어보자. 네놈이 어떻게 ‘따콴’이 됐니?”

자기에 대해서는 좀체로 말하지 않는 녀석이지만 그날은 자기 경력을 대수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장춘 모 중학교 영어교사로 들어가서 불과 이삼년만에 교원연수학교로 전근했고 거기서 입당하고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성교육국의 재직간부이지만 실제상 해외와의 “경제교류”사업에 참여하고있다는것이였다. 대만, 싱가포르, 미국 등지에 친척방문도 자주 간다고 했다. 준이는 외자유치에 성공하면 거간군이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수익을 챙긴다는 사실을 어슴푸레 알고있었으나 “뚜이얜”은 거기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뚜이얜”이 말했다.

“너두 그렇지만 나두 벼슬을 탐내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성급이구 중앙급이구 내가 앉을 자리 하나 못 구할것 같으냐? 하지만 관리질하면서 돈까지 많으면 부정부패혐의에 걸리기 쉬워, 낮은 급이라두 실속만 챙기면 돼, 내가 교육국의 하찮은 자리를 뜨지 않는것두 그때문이야.”

녀석은 금융사회에서 돈의 위력을 무시한다면 설자리가 없다면서 준이더러 론문따위나 써가지고 다니지 말고 그림을 그려 돈을 벌라고 충고까지 했다.

그날 준이는 또 술에 취했다. 되지도 않는 한어로 녀석과 무슨 쟁론까지 벌인듯하지만 그후의 일은 생각나지 않는다.

한국에 오기전까지 “뚜이얜”을 잊고있었다. 한국에 와서 막벌이까지 하고나니 “뚜이얜”의 충고가 다시 생각난다. 그 녀석은 확실히 머리가 총명하다.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너는? 눅거리감정과 부질없는 환상밖에 없어가지고 뭘 어쩌겠다는거야?

그가 한창 실의에 빠져있는데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는가 하여 도로 누우려는데 허공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를 불렀느니라.”

아하, 진허법사님이 아니신가. 우울한 생각들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법사님, 법사님은 꿈에만 나타나시는줄 알았더니 생시에두 나타나십니다그려?”

“넌 지금을 생시로 알고있느냐? 넌 지금도 꿈을 꾸고있다.”

준이는 혹시나 하여 머리도 좌우로 흔들고 눈도 슴벅거려보았으나 애당초 꿈은 아닌것 같았다.

“법사님, 인젠 저를 그만 괴롭히는게 어떻습니까? 꿈에 법사님을 만난후부터 저의 정신상태가 통 말이 아닙니다. 현실이 꿈같고 꿈이 현실 같고…”

“본연으로 돌아가는것이 뭐가 나쁘냐?”

“본연이라구요? 이렇게 흐리마리한 상태가 본연이란 말씀입니까?”

“네가 깨여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깨지 못한 상태이니라.”

“쳇, 당치않은 말씀을. 그나저나 법사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렇게 숨어계시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는것이 어떻습니까?”

“……”

“불법에 정통하여 해탈을 구하신분이 아닐가 짐작은 합니다만…”

“나는 불법을 모르느니라.”

“너무 겸손하십니다. 아까 우곡스님한테 들려서 법사님의 정체를 물었더니 웬 기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데다. 법사님은 혹시 그 기인이 아니신지요?”

법사님께서는 어지간히 성가신 모양이였다.

“나를 알기전에 너 자신을 알으렷다.”

“저 자신을 알라구요? 허 참, 자기를 모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일본이 투항하던 해,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연길시에서 태여났고 성별은 남자, 민족은 조선족, 직업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 내가 지금 너하구 롱담하구있느냐?”

준이는 움찔했다.
“아따, 소리를 지르지 마십시오. 간담이 서늘해납니다.”

“령계에 올라왔을 때 어딘가 오성이 있음직하여 도로 내려보냈더니… 내가 잘못 보았구나, 일개 하잘것없는 필부에 지나지 않는것을…”

준이는 그제야 자기가 너무 경박했음을 깨달았다.

“법사님!”

“……”
“진허법사님!”

“……”
“허 참, 고만한 일에 뭘 어린애처럼 토라져가지구. 법사님!”

여전히 묵묵부답이였다. 다락앞 풀밭에서는 나비 한마리가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주위의 울창한 나무숲은 명상에라도 잠긴듯 숙연한 모습이였다. 인적도, 차소리도 없는 야산의 정적이 싫어졌다. 문득 진허법사님이야말로 자기의 여생에 삶의 의미를 부여해줄수 있는 존재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법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돌아와주십시오. 법사님께서는 실존인물이 아니실테고 그렇다고 저의 환상이 빚어낸 인물이라고 단정하기두 싫구, 하여튼 법사님의 정체를 모르니까 언사가 공손치 못했습니다.”

“……”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준이는 저으기 실망했다.

허 참, 진허는 무슨 진허야? 분명 내 머리속에서 꾸며진 가상적인 존재일거야. 하긴 잘한다. 저절로 꾸미고 저절로 속고… 에라, 망탕 소리나 줴쳐보자.

“법사님, 자기가 누구인지 굳이 알 필요가 뭡니까? 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어떻습니까? 아무것두 모르구 두루두루 살아가면 안됩니까?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물이 흐르면 흐르는대로 제멋에 흥청거리며 살다가 어느날 죽게 되면 오,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구 개탄하면서 눈을 감으면 되는거지 뭘 길지도 않은 인생에 풀지도 못할 숙제를 가지구 고민할게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두루두루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행복해보입데다…”

“두루두루 살바엔 낯설은 야산에는 왜 왔으며 스스로 번뇌에 시달리고있음은 웬 까닭이냐?”

앗, 깜짝이야! 법사님께서 그냥 계셨구나.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다시는 실없는 소리를 줴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법사님, 저는 금방까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하던 참이였습니다. 아무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지만 늘그막에 정작 빈털터리가 되고보니…”

“너는 령계에 올라왔을 때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의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떤 삶이 사람다운 삶이냐?”

“글쎄요. 그것이 지금 저의 고민거립니다. 저는 여태까지 육체적인 삶보다 정신적인 삶이 더 의의가 있구 가치가 있다구 생각해왔습니다. 물질적향락만 추구하는 사람을 가장 천하게 보았지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겪어보니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더라구요.”

“네가 만약 육체적인 삶에만 탐닉했더라면 나를 만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법사님때문에 더욱 허망한 환상세계에 빠져들지나 않는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

“법사님, 무엄함을 무릅쓰고 한마디 여쭤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법사님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혹시 저의 환상이 빚어낸 가상적인 존재가 아니십니까?”

“꼭 나의 존재를 증험해보여야 믿겠느냐? 그렇다면 좋다. 내가 시간을 역전시켜 너를 과거로 돌려보낼테다. 인생을 다시한번 살아오면서 자기 실존을 깨닫도록 하라.”

“네? 과거로 돌아가다니요? 이거 뭐 동화세계에나 있을법한 얘기를…”

“어서 눈을 감으라!”

준이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짐짓 눈을 감는척했다. 문득 우뢰와 같은 굉음이 터졌다. 그 소리는 바깥에서 터진것인지 자기 몸속에서 터진것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사지가 물러나고 오장륙부가 되번져지고 피가 꺼꾸로 흐르는듯했다. 법사님을 부르려 했으나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눈을 떠보니 바깥에서도 천지개벽이 일어나고있었다. 산들이 우줄우줄 춤을 추고 나무잎도 푸르렀다 누르렀다 부산을 피웠으며 구름장들은 뒤쪽으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다락기둥에서 메뚜기 한마리가 뛰여내리려고 날개를 펼치는 순간 준이는 자기 몸에서 무엇인가 회오리바람처럼 빠져나간다는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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