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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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감미로운 추억
2013년 10월 24일 18시 30분  조회:5156  추천:1  작성자: 김송죽
 

수필 감미로운 추억

 

올년초의 일이다. 흑룡강성 밀산시의 전임시장 맹고군((孟高君)씨가 손수 싸인까지 해서 두툼한 책 두권을 내한테 보내왔다. <<밀산조선족백년사>>와 <<흥개호반에 피여난 진달래>>였다. 전혀 면목도 모르는 분이 그같이 보낸게 뜻밖이거니와 고맙기가 그지없다. 그가 보낸 책 두권중 첫권 <<밀산조선족백년사>>는 이제 아무때건 체계적으로 정비된 우리 중국조선족의 력사총서가 다시금만들어질 때면 빼놓지 말고 꼭 올려야 할 귀중한 사료들이고 두 번째권인 <<흥개호반에 피여난 진달래>>는 밀산시와 직접적으로 인연을 가진이들이 쓴 여러편의 글들을 한데묶은 문집이였다. 

그 책의 수필편에서 맨우에 수록된 수필 “은사님(외3편)”과 시편 첫머리의  “목릉강반은 내고향(외3수)”을 쓴 리상각은 나의 스승인것이다.

 

나는 벌리조선중학(초중)을 나왔는데 내가 중학에 붙던 해인 1954년도여름에 리상각선생님도 18세살나이에 상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사업배치를 받아 벌리중학교로 왔던것이다. 그해 그렇게 온 젊은선생이 여럿이다. 내가 1학년때 4반의 반주임이였던 안영곤과 다른 과목을 가르쳣던 최명숙선생이 그와 동창이고 내가 졸업때 반주임을 맡았던 황동철선생님과 물리교원 김천유선생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벌리학교로 분배되여 오신건데 그들다가 그때는 리상각선생처럼 생기있는 팔팔한 젊은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초중에 입학해서 졸업할때까지 옹근 3년간을 나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면서 친부모같이 지극히 보살펴준 홍기종교장선생님도 상지사범학교에서 교도주임을 지내다가 리상각선생과 같은시기에 벌리학교에 오셨던 것이다. 그는 내가 렬사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어느날 교장실로 불러다놓고 국가는 혁명렬사의 후대들은 각별히 관심하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나라의 동량지재가 되라고 해놓고는 나더러 할빈에 있는 조일만학원과 평양에 있는 만경대학원은 전문 렬사자식들만 받아서 공부시키는 좋은 곳이니 생각해보고 가고싶으면 가라면서 추천은 교장인 자기가 한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 생각을 더깊이 하지 않고 아무리좋아도 나는 여기를 떠나 다른데는 가지 않겠노라고했던 것이다. 원인은 희생된 아버지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벌리를 보면 저 남쪽 두만강가의 도문으로부터 북쪽의 송화강남안의 가목사까지 일직선이 되게 곧게 뻗은 도가선(圖佳線)에 놓여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현정부소재지다. 역전동쪽에 위치한 단층집 조선중학교는 교실이 열몇칸에 이르었는데 널다란 운동장을 가운데다 놓고 ㄱ자모양으로 길다랗게 새로지은 흰벽돌집였다. 그리고 학교동쪽으로 1리도 못가서 남북으로 뻗은 널다란 연자하가 흐르고있는데 다리를 건너 더들어가면 인가가 모여 붐비고 복대기치는 번잡스러운 시가지였다. 연자하를 건너는 큰다리가까이 이쪽 큰길북켠에 바로 사문동토비를 숙청하다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한, 동철부대의 17명렬사의 시체가 묻힌 렬사릉원이 있었던 것이다. (“문혁”직후 서산으로 옮겨짐) 17렬사기념탑바로 뒤쪽 맨앞줄중간에 참모장 김해정묘와 나란히해서 나의 부친의 묘가있은 것이다.

합강성정부에서 수립한 그 비석에 참모장 김해정이하 16명렬사라 씌였는데 그 16명중에서 1명은 영평강전투에서 희생된 전사가 아니라 마침 그때 병으로 사망한 녀병사였던 것이다. 영평강전투에서 전사한 그들은 동철부대의 두 개 정찰반이였는데 제1반의 반장이 바로 나의 부친이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데든 가지 않고 거기서 중학을 졸업하리라 맘먹었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나의 이름을 松竹이라 지은분이자 항일간부였던, 아버지와 함께 열평강전투에서 희생된 참모장 김해정의 딸 대분이도 벌리에 와서 학교를 같이다니게되였는데 청명절이 돌아오면 우리는 커다란 꽃다발을 받쳐들고 전교생대렬앞에서 렬사묘참배를 갓던 것이다.

 

나는 벌리중학에서 3년간 공부면서 조학금특급을 받았거니와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전체선생님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그야말로 남달리 행복스레  자랏다. 부친의 생전소속부대에서 자란 3년과 초중을 3년간다닌 그때가 내 평생에 제일뜻깊고 행복한 시절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그때는 내가 자기 종생의 리상이였던 문학의 싹을 키우고 그것을 보듬어 자래웟으니 비유하면 글농군의 시절이기도했던 것이다. 한반에서 공부하는 학생 박억만역시 나처럼 문학을 즐기였다. 그리고 내가 소학때의 친구였던 조용환이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는 가정형편이 여의치않아 중학을 다니지 못하고 훗날 조선으로 나가버렸는데 그가 조선으로 가기전, 내가 초중을 다니는 기간 함께 문학쿠르쇼크를 조직하고는 마치도 지하혁명자가 활동하듯이 “붉은띄”라이름지은 편지로 서로련계하면서 문학공부에 열중했던 것이다.

 

솔직히말해 나는 그 기간에 저지른 한가지ㅡ 남이 알면 불민스러운 일이라 할수도있는 한가지 일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오르면서 추억을 뚜지기에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 그건 내가 리상각선생한테서 책을 빌려다보고서는 그것을 돌려주지 않은 일이였다. 선생님은 아마 그일을 언녕 가맣게 잊었을수도있다. 내가 그한테서 빌린 책은 <<마야꼽스끼時抄>>였다. 초중에 붙은지 얼마안되여 나는 교도처일을 보는 리상각선생님이 문학을 하거니와 학교도서실도 관리한다는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문학서적이라고는 한권도 없었다. 그러니까 학교에 도서실이 있는게 내같은 빈털터리 애숭이문학도에게는 그야말로 행운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날 책빌러 도서실에 갓다. 마침 리상각선생이 거기서 책을 보고있었다. 대체 무슨책이길래 학생이 들어온것도 모르고 저리도 열심일가하면서 내가 눈주어 여겨보니 거울이 누름하고 얍다란 책이였는데 <<마야꼽쓰끼時抄>>였다.

“선생님 책빌러왔습니다.”

나는 그가 책을 다볼때까지 기다릴수는 없어서 온리유를 말했다. 선생님은 그제야 머리를 치키고 나를 보면서 동무는 무슨책을 보자하는가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서슴치않고 시들을 한데묶어놓은 시집을 빌리련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나보고 “동무도 시를 즐기오?”하고 묻는 것이였다. 나는 쑥스러워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나를 다시한번 눈주어 훝어보고는 자기손에 쥐여있는 그 책을 주면서 이건 마야꼽쓰끼의 시들을 묶은건데 시들이 박력이 강해서 독자에게 격동을 충분히 주니 좋다면서 보라고했던 것이다. 나는 얼른받아쥐고 기뻐하면서 거기를 나왔다.

“다보고는 가져와야해.”

그가 당부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에 미처응답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다보고서는 의례돌려줘야지했다. 

그런데 숙사에 돌아와 다시보니 책표지에도 속지에도 그것이 누구해라는 것을 밝혀놓지 않은 책이였다. 도서실도장을 찍지 않았으니 학교것이 아닐거고  리상각이라는 이름도 도장도 찍지 않았으니 그의것도 아니라생각했다. 마치도 임자없는 사과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 같서 나는 짝짜꿍을 쳣던 것이다.

“찾으면 돌려주고 안찾으면 내거다. 책도적은 도적이 아니라더라!”

이렇게 되여 책의 임자는 바뀌우고 만 것이다. 

 

그 책을 편집은 延邊文聯籌委會가 하고 출판은 延邊人民出版社에서 한것인데 속지첫면에 <<마야꼽쓰끼는 우리 쏘베트시대의 우수한 천재시인이였으며 또 그런 시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쓴 쓰딸린의 제사가 있고 후면에는 << <마야꼽쓰끼時抄>를 낸다. <동북조선인민보>에서 허일동무의 역고와 <로동신문>에서 심영섭 전동혁 조기천동무의 역고와 <조쏘친선>에서 정률동무의 역고 등을 실어 쏘련의 천재시인의 면모를 아뢴다>>라고 쓴 편자의 글이 있는데 그 책에는 마야꼽쓰끼의 “당은”, “소베트 공민증”을 비롯하여 7수의 장시가 수록된 것이다. 

 

그 <<마야꼽쓰끼時抄>>는 초중때는 물론 졸업해서 농촌에 돌아와서도 역시 내가 조직한 문학쿠르쇼크성원 셋이 다 즐겨보는 애독물(愛讀物)이였다. 나는 촌에서 소학훈장을 지내면서 월급을 받아서는 거의 책사는데다 밀어넣으면서 독서를 걸탐스레했다. 그러느라니 도서가 근 1200여권에 이른건데 “문화혁명”이 오니 생전 낯도 코도도 모르는 중학교홍위병들이 들이닥쳐 나의 목에다 “반당분자”라 쓴 패쪽을 걸어 투쟁하고는 거침없이 우리집을 들이쳐 닥치는대로 들부시고 욕심나는 물건은 도둑질해갓던 것이다. 그날은 비가 약간내렸는데 그래도 사람이라 량심쪼박이 있었던지 그들은 까래를 펴놓고는 이불과 옷견지들을 창밖에 내던졌거니와 책들을 말끔히 내버리고는 책장을 뚜드려 마사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작란을 하고서도 그 애들은 재미가 모자랐던지 아니면 그놈의 대담무쌍한 본때를 보이느라그랬는지 천정을 말끔히 뜨어버리고 구들장을 뒤번지고 부뚜막을 마스고 물단지를 깨버리고 감자굴까지 헤쳐놓고는 나중에는 뒷출입문에다 판자로 x 표를 쳐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못까지 쳐놓고 가버렷던 것이다.

그런판에 그래도 조선에서 출판된 <<세계문학선집>> 10권에 <<조선말사전>> 6권, <<이 쓰딸린저작집>> 8권, <<모택동선집>> 4권만은 재난을 용케면했다. 그전에 1964년도 “4청”때 나보고 “시를 써 발표하고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료를 받아 학교에 들여놓지 않고 혼자쓰는건 자본주의사상행위다.”하면서 우습게 놀았다가 내한테서 “그렇게 공산을 부르짓겠거든 어디 네녀편네를 내놓아 공산으로 만들어보라”는 힐난을 들어 도루망신을 당했던자가 공사의 “교원쪼판퇀”을 조직하더니 다른 한 심보나쁜자와 같이 내가 써놓은 첫장편의 원고와 일기책들을 보고는 돌려주리라면서 걷어갔던 것이다. 꼴을 보니 나를 잡자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들이닥칠 재난에 대비해 몇년간수집해둔 각가지 소설자료들은 길건너 이붓자식과 같이있는 어머니보고 건사해달라 맡기고는 <<세계문학선집>> 10권은 바로 뒷출입문턱밑을 파고 거기다 파묻어 감추었다. 그 외의 다른책들은 어쩔 수 없어 그대로나둿던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책들이 거의 다 화형당하고 도적질해가서 잃어졌다. 그런판에 <<세계문학선집>>들은 발각되지 않은거고 <<조선말사전>> 6권은 너무두터우니 어쩔 수 없어서 내쳐버린것 같고 <<모택동선집>>이나 <<이 쓰딸린저작집>>들은 까딱잘못건드렸다나는 도루잘못될게 빤한지라 그들이 어쩌지 못하고 남긴것 같았다. 그런데 <<레닌전집>> 20권은 어느 개명치않은 빈하중농사원이 제집에 갖고가서 색솔대로 오래동안 뒤지로 잘 사용했다. 나는 그들의 너그럽고도 불필요한 감시하에 사상개조를 하느라 몇해간 마을의 뒷간을 돌아가며 치다보니 그일을 알게되였던 거다. 진짜무산계급혁명자가 알면 볼기짝을 맞을 짓이 아니겠는가! 나의 책들이 그같이 액운을 면하기어려었던 그 분주하고도 험악한 란시속에서도 리상각선생이 빌려준 <<마야꼽쓰끼時抄>>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건 내가 잘 건사해서가 아니였다. 문학쿠르쇼크의 한 성원인 김인세가 “쏘베트공민증”을 외우느라 내한테서 빌려가고는 돌려주지 않고있다가 “문혁”이 다 끝나서야 안심하고 내놓았던 것이다. 그 수호자에게 응당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다.

 

어느핸가 리상각선생이 탕원에 회의를 같다가 지나는 길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허광일총편과 함께 우리집에 들리였다. 그때 나는 내가 초중때 빌려온 <<마야꼽쓰끼時抄>>를 제때에 돌려드리지 못하게 된 연유를 말하고 아깝지만 고스란히 내놓려했다. 그런데 리상각선생이나 허총편이나 두분다가 나를 만나자 먼저 나보고 연변에 가지를 말거라 거기서는 가짜 김송죽이 나타나 제가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쓴 작가라면서 후라이를 치면서 나돌아 민분을 일으키고있다는 얘기를 해서 듣고 웃다나니 내가 먹엇던 생각은 그만 가맣게 잊고말았던 것이다. 그날저녁 리상각선생님은 록음기를 틀어놓으라 해서는 춤곡이 나오니 우리집의 노랗고 반들서리는 기다란 캉들우에서 오가며 딴스를 쳤다. 참으로 즐거원던 밤이다. 우리집 사람은 요즘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 선생님은 참으로 유쾌한 분이야!”  하고 뇌인다.

내가 김학철옹을 두 번째만나러갓을적이다. 선생님이 나보고 그래 아침식사는 어디서 치럿는가고 묻길래 내가 리상각선생댁에서 먹고 오는 길이라했더니 선생님은 “그랫어? 사람이야 맑고 바르지!”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세영이 거 과연 참한 여자야!”하고 리상각선생의 부인을 칭찬했던것이다. 김학철옹은 나와 자기가 알건대는 그 험악한 세월(문화혁명)에도 제민족의 복장차림으로 거리에 의젓이 나다닌 녀성은 온 연길시내바닥에 세영이밖에 없었을거라면서 그는 우리 조선민족녀성들은 다가 따라배워야 할 좋은 본보기라고 말했다. 

리상각선생은 그러한 녀인이 타계하여 곁에 없은지 오래니 어찌 정막하지 않으랴. 나는 원지에서 전화로나 어쩌다 안부를 알뿐이다. 그저 동창더러 자주가보라한다. 내가 연길에 갈 기회가 생기겠는지?....이제만난다해도 책을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것을 기념으로 그냥갖고있으련다. 아마 그러는게 더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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