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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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3. 反컴퓨터론
2012년 12월 22일 08시 38분  조회:6977  추천:25  작성자: 김문학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3. 反컴퓨터론

 

안경을 쓴 버마재비를 아시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가로 막으려고 언감생심 나섰다” 라는 그 버마재비(사마귀)ㆍ당치도 않은 그런 버마재비를 우리는 一策로 부하고 냉소한다.

나는 오늘 큰맘 먹고 그 버마재비가 되어보려고 덤빈다. “컴퓨터時代”라 칭해지는 오늘의 시대에 가로막는 담론을 하려고 한다. 컴퓨터시대의 수레바퀴를 “잠깐!”하고 내 길고도 가는 손을 내밀고 세워 보련다.

물론 “反 컴퓨터론”이라 하여 이 시대를 부정, 反動으로 거부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컴퓨터시대라고 구가 하는 최첨단정보시대, “정보화 사회”를 相 化시켜 반추와 성찰을 하자는 소박한 異見일 뿐이다.

 

오늘 컴퓨터, 통신정보기술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하루가 멀다하게 발전을 하고 있다. 누가 상상을 할 수 있었던가? 컴퓨터가 인간의 삶의 필수품으로서 사회의 모든 분야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되고 있는 오늘 같은 시대를.

근무시간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인터넷, 컴퓨터 작업으로 처리되고 있다. 회사 서류작성, 발신, 수신, 대학생들의 리포트, 논문작성이나 작가의 글쓰기, 일반사무의 처리와 연락사항, 연애편지와 친구에 전하는 소식, 시골의 양돈장에서 돼지새끼가 한꺼번에 10마리를 낳았다든가, 오늘은 저녁메뉴를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든가 하는 것까지도, 우리들이 컴퓨터의 딧,플레이 화면에 등장한다.

친구와 금방 헤어졌는데 이메일이 우선 먼저 상대방의 귀가보다 빨리 도착한다. 말하자면 21세기 우리의 일상의 식사처럼 중요한 일과로 되었으며 휴대폰까지 가세하며 일상의 거의 초단위로 컴퓨터化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매개인의 “컴퓨터가 있는 풍경” 그자체이다.

보다시피 인터넷기술은 우리의 정보를 물(物)에서 이탈시키는 큰 역할을 한다. 15세기 구텐베르쿠가 금속 활판인쇄를 발명이후 계속 되 온 인쇄술, 활자와 종이에 의한 정보의 시스템(즉 물질에 의한 정보전달방식)을 일거에 쇄신시키는 革命이라 할 수 있다.

보브 메트가표의 법칙에 의하면, 인터넷의 효용은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를 2승(二乘)에 비례된다고 한다. 즉 100명이 참가하는 네트워크에서는 이 네트워크를 통하여 남은 99명과 접속, 교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간단한 원리이다. 200명이라면 199명이 되며, (100명의 네트워크의 약 2배로 증폭됨) 결국 2배의 2배 즉 4배 (2승)이 된다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전 세계의 인간을 한꺼번에 연결시키는 기세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생활기반으로서 자리 잡는다고 한다.

즉 일, 공부, 오락, 쇼핑. 인간사이의 연락, 통신, 정보수집, 발신과 수신... 이 모든 것에 인터넷이 사용되며 인간의 생활은 지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바. 이는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다.

피터ㆍ드럭커거교수는 “20세기는 체력노동자의 생산성이 50배 향상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21세기는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이 50배 향상되는 기간이다.

컴퓨터에 의존하여 그 향상이 달성한다는 것이다. 금후 기술이 발달되면 인간의 두뇌의 사고를 이길 수 있는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한다.

현재 상태의 컴퓨터는 아직 미완성의 기술제품인바, 지금의 컴퓨터는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컴퓨터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컴퓨터가 사용하기 어려운 결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나 같은 컴맹에게 이 말은 반가운 말이다. 앞으로 성능이 고도로 정비된 쓰기 쉬운 컴퓨터가 등장하면 나처럼 손재간이 없는 멍청이도 자유자재로 컴퓨터를 부릴 수 있을 것일까.

그때가면 우리의 주위에 어디나 존재하는 컴퓨터는, 컴퓨터로서의 흔적이 안 보인다고 한다. 지어 “컴퓨터를 쓰고 있다”는 의식마저도 없어진다고 한다.

참 아름다운 장밋빛의 미래이다. 그 미래에 가면 현재의 형태의 컴퓨터가 아닌 수백배 발전된 것으로서, 아무튼 책상위에 놓여 우리가 쉬운 장난감 다루도록 다룰 수 있는 “컴퓨터”라 칭하지 않는 첨단의 도구가 나타난다고 예측하고 있다.

유토피아 같은 미묘한 “정보사회”라고 한다.

이 같은 “정보화사회”를 꿈꾸는 우리들은 누구나 “기술이 인간 사회를 바꾼다” 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보기술과 사회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나는 이 미묘한 앞날에 대해 전부 믿기 보다는 왜서인지 회의적이다.

당연히 컴퓨터가 몰고 올 정보기술의 내일은 무상의 매력을 발하고 있다. 인간의 이날까지의 기술 도구로서는 상상을 절하는 편리함과 기계문명의 낙(樂 )을 구가하고 있다. 그 매력 앞에 누구나가 무력한듯하다.

그러나 이 매력에 눈이 어두워 진짜 보아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느낌을 나는 떨칠 수 없다.

19세기 말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지본주의를 사회를 대체 한다는 인류의 유토피아 공산주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일종의 이상적 유토피아로 종식되지 않았던가! 과학철학자 칼ㆍ보퍼(1902-94)의 말을 빌리면 “공산주의는 과학이 아닌 것”이다.

실체로서의 공산주의는 아직 멀고 먼 미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미래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같이 좀처럼 잡혀 질 조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는 “정보기술이 인간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장밋빛 꿈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회의적이며, 오히려 반대로 인간사회의 구조가 기술 양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인간사회의 발전을 자연사회-농업사회-공업사회-그리고 오늘의 정보사회로 파악하고 그것을 그대로 종교 신앙처럼 믿어 의심치 않는 작금, 나는 이런 “신앙”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이유가 있다.

인간의 만든 컴퓨터, 정보기술은 레토릭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만든 옷과 비슷하다. 인간의 복장은 이 날까지 여러 가지로 변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어떤 시내든 옷을 걸친 인간 주체가 변했는가 하면,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이다. 변한 것은 인간의 사고, 발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복장을 개발하고 창조해 온 복장 그 자체일 뿐이다.

내가 금방 인간은 안변한다고 했는데, 인간이 변한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컴퓨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일종 병태로 되어 기계와 기술의 노예로 전락되는 현실이다.

마치 “신(神)”을 만들어 놓고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에 예속되는 것 같이, 또는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침몰하는 격이 되고 만다.

인간사회, 인간의 위험이라면 컴퓨터 자체가 아니라, 컴퓨터 기술에 의존 증에 걸린 인간의 의존 병이다.

인간들이 “정보화 사회”를 소리높이 구가하는 언행에는 벌써 “기술결정론”이란 “인공낙원”을 찾아 거기로 도피하는 도피주의가 보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인간의 취약한 도피행위 심리가 보인다.

술과 같이, 마약과 같이 인간들은 인터넷, 휴대폰에 마비되어 가고 있다.

하루라도, 아니 한시각이라도 컴퓨터, 휴대폰을 못 떠나서 못 살 것 같은 도취, 그 강박감으로 충만 된 자신의 행위를 억제 못하는 그 자체가 기묘한 원숭이처럼 보인다. 기계를 쓰는 원숭이들의 세계다. 실제로 앳 마크인 @를 독일인들은 ‘원숭이 꼬리’라고 부르고 폴란드인들은 ‘원숭이 새끼’라고 부른다.

사실 @에서 발신하여 @로 수신되는 정보는 컴퓨터의 조작으로 인해 허위 情報와 허위 사실이 ‘진실’로 위장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인터넷 자료 인류학, 문화론 정보를 검색해 보아도 눈에 띄게 현저한 거짓정보와 신빙성이 낮은 정보들이 난무했다. 이런 것이 규제 없이, 여과 없이 용이하게 전파되니 거짓을 진실로 믿는 폐해는 지대하다. 그러니 웨브, 인터넷 정보는 말 그대로 玉石混淆(옥석혼효)의 세상이다.

또 한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수신하는 메일 중 80% 이상이 스팸메일이라 한다. 그것을 지우는데도 많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된다. 메일 발신 법을 모르는 나의 메일에도 하루에 수십 통이 들어온다. 어디서 내 메일주소를 알았는지 수상할 정도로 정체불명의 잡다한 내용이 침범해온다. 이는 개인 주택으로 말하면 “불법침입” 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불법 침입 죄가 아무런 법적수속도 없이 당당하게 행해지니 함구 할 수밖에. 인터넷에 통효한 친구를 불러다 방법을 댔는데도 잠시 일뿐 또 다시 침입해 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보시대는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라기보다 쓰레기의 홍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이 “가짜”로 되고, 가짜가 쉽게 “진실”로 둔갑하는, 지구규모로 그것이 급속히 가능한 것이 또 컴퓨터 인터넷의 造化가 아닌가.

그러니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이론”를 플러스시점으로 보는 것과 함께, 마이너스 시각으로도 보아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마크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시각적으로 영어의 첫 번째 기호인 이 a를 둥근 원으로 둘러싼 로고가 신비스럽게 느끼고 보기도 좋다. 이유는 딱히 모르겠다. 디자인 감각으로 해석 할 수 있을런지?

한국에서는 “골뱅이”라고 하는데 독일에서는 ‘원숭이꼬리’라 하며 폴란드나 동유럽국가에서는 “꼬마 원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달팽이”라 하고 터키에서는 동물의 “키”라고 한다. 그런데 핀란드는 “고양이 꼬리”로 보이고, 중국은 “쥐”라고 비유한다. 러시아에서는 “개”로 변한다. 한편 스웨덴은 “코끼리의 몸”이다.

참 흥미로운 것은 골뱅이에서, 쥐로 그리고 코끼리로 크게 달라지니, 이 자체를 곰곰이 생각하면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문화, 사고방식에 따라 같은 사상(事象)도 달리 보이고 달리 해석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글러벌(세계화)의 홍수에 휘말리는 시대에, 아무리 정보화 디지털 시대라 해도 그의 역방향으로 쏠리는 로컬화(지역화), 자기스스로의 문화를 가지고 전자 文明에 대항하려는 골계이다.

이 모순을 컴퓨터 전자문명의 희극으로 볼까, 비극으로 볼까? 차라리 나는 두 가지가 다 겸했다고 보고 싶다.

인터넷 문명의 천만까지 편리와 하이테크놀로지의 승리를 구가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강조해도 과도 하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치명적인 결함과 약점을 본다.

정보의 잡다성, 허위성, 옥석혼효성, 그리고 인간을 같은 사고나 행동으로 매어놓는 획일성, 따라서 가상성(假想性)에 침혹되어 상상력을 말살당하는 우(愚), 과다한 도상(圖像)과 가상적 이미지 표상에 포로 되어 思考가 정지 되는 아이들....

편리성만큼이나 위구성도 증폭될 것이다. 이 편리성과 위구성의 양가성 모순, 대립(代立)을 구경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스무드하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상상하면 장미꽃 미래 속에 뜨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다시 장미꽃을 피운 가지의 가시에 찔려 피 흘리는 모습이다.

이어령선생은 나와의 대담 중 이런 재미난 말씀을 했다. “정보(情報)의 특징은 정(情)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여 정(情)을 알리는 것 (報)이 정보(情報)가 된다” 라고 결국 아무리 기술이 변하고 외부 환경이 바뀐다 해도 우리 인간이 주체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정보가 발달해도 인간은 밥을 먹어야 하고 배설을 해야 하고 잠을 자야하며 서로 만나고, 만나서 식사도 하고 횡설수설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다.

아무리 인터넷에서 정보를 전달, 수신한다 해도 역시 “만나서 얘기하자”로 얼굴을 봐야한다. 정을 나누고 정을 알리는 정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부터 反時流的 회의적인 성질이 있어서 “通說과 通念은 꼭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라고 항상 생각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지극히 상식, 통념으로 백 프로 믿는 곳에는 기필코 反 이 있는 법일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왔다. 지어 세계와 인간이 “99,9%는 일종의 가설 일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 한다

”인터넷의 정보는 방대한 좋은 정보가 있다“ ”인터넷의 커뮤니케이션을 멋있다.“ “인터넷의 집합적인 지(知)” “인터넷은 인간의 인생을 바뀐다” 등등...

“인터넷 찬미론”이 신종플루처럼 무진장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이 얼마나 인생을 바꾸는 가는 대저 믿지 못하겠다. 그리고 인간이 변한다는 통념에서 오히려 “기술결정론”의 맹점을 읽게 된다.

기술이라면 인터넷보다도 나는 알랙산더ㆍ 그러함ㆍ벨리 1876년에 발명한 전화가 정보혁명의 획기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터넷은 전화이후의 제2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인터넷이 편리한 것은 백만 번 언급해도 되지만 정보 혁명에서 이미 전화가 인터넷의 기능을 구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일테면 무슨 동창모임이 있어 전화로 알리는 것이나 인터넷으로 송신하는 것이나 그것은 육성과 文化의 차이 일뿐이다. 인터넷을 열지 않으면 오히려 전화보다도 못하다.

인터넷의 기술을 맹신하듯, 그의 편리를 예찬하듯이, 인터넷을 사용한다 하여 인간이 능력이 하루아침 비약적인 향상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이 있든 없든, 쓰든 안쓰든 인간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인터넷을 왕좌로 모시고 그 기능과 편리함이 노예가 되기보다는, 그것을 전화나 FAX와 같이 편리한 도구, 방법으로서 이용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컴퓨터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他者”이다. 이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이 창조한 망치나 낫과 같이, 펜과 검과 같이 우리 인간의 능력의 보조선, 대체로서 사용되고 있으나 도구를 사용하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 자신들이다.

컴퓨터라는 첨단의 “他者”를 통해 굴절된 우리 자신의 욕망을 기탁하려는 近代的기술은 매력으로 충만 되어 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자신이 만든 도구에 유혹되어 의존중 같은 노예로 된다면 본말전도의 아이러니에 빠져 버리고 말게 된다.

진실하고 생동한 인간, 인간의 삶은 컴퓨터에 있지 않고 인간자체에 있다. 우리인간의 사회에 있다.

자, 컴퓨터를 일단 버려라. 그리고 거리에 나서라. 살아있는 인간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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