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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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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의 이성그림자
2013년 10월 23일 15시 30분  조회:706  추천:0  작성자: 김운일
[수필]

동년의 이성그림자

김운일



한국텔레비프로를 감상하노라면 간혹 어른들이 애들과 “얘, 너 녀자(남자)친구 있어?” 라고 물으면 당찬 어조로 “있지 않구요.” 하고 대답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천진란만하면서도 진솔한 동심의 해맑고 유치한 마음을 기특하게 생각하군 한다. 물론 속으로 “저것들이 무엇을 안다고?”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하다면 그 “무엇”이란 대체 무엇인가? 따지고보면 아마 이성일것이다. 즉 어린것들이 “이성”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하는 뜻일것이다.

당돌하고 가식없이 자기의 진심을 솔직하게 드러내보이는 그애들의 얼굴을 보면서 지난날 우리의 삶에는 아쉬운 일들이 너무 많았다는 서글픈 생각이 갈마든다. 우리가 어릴 때는 “남녀 7세 부동석” 이라는 고루한 유교사상의 음영이 인심을 흐리운 시대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 애들만할 때 녀자친구가 하나 있었다. 소학교 3학년까지 우리 둘은 한책상에 앉아 공부하였는데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면 그 녀자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 꺼내 다른 애들 몰래 내 입에 넣어주군 하였다. 바싹바싹하고 고소한 감자누룽지였다. 그러면 나도 웃으면서 호주머니에서 볶은 콩을 한줌 꺼내 그 녀자애에게 주었다.

휴식날이 되면 마을앞에 흐르는 내가에서 조약돌집을 지어놓고 엄마, 아빠 흉내를 내며 소꿉놀이를 하였다. 둘이 아기자기하게 “여보, 당신”하며 노는 그 유희가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웠는지 모른다. 간혹 마을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장난으로 그 녀자애에게 “너 저 애한테 시집 가겠니?” 하고 물으면 물론 나도 펄쩍 뛰였지만 그녀자애는 더욱 울상이 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들은 그러는 우리의 거동이 재미 있었던지 더 지꿎게 골려주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아이들이 지금 애들보다 더 위선적이였던것이 아닐가싶다. 가깝다는 말만 내비치면 지금 애들처럼 솔직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면서 모르쇠를 놓았으니 말이다. 사실 그 녀자애와 나는 앞뒤집에 사는 동갑내기친구였을뿐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낀것은 아니였다. 어린시절의 녀자친구란 순수한 우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물론 이런 우정이 성장하면서 사랑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사이의 우정은 사랑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소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이 시골을 떠나 시내로 이사 오는 바람에 나는 할수없이 그 녀자애와 갈라지게 되였다. 허지만 별로 리별의 아쉬움이나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우둔하고 유치한 소시적 우정이였을뿐 애틋한 마음은 없었던것 같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와서 나는 그 녀자애의 조카와 한반에 다니게 되였다. 조카를 통해 안 일이지만 그 녀자애는 어려서부터 참 불쌍하게 자랐다고 한다. 세상에 태여나서 석달만에 량친부모가 모진 병으로 돌아가는바람에 큰오빠네 집에 맡겨졌단다. 그 큰오빠가 바로 내 동창생의 아버지였다. 큰오빠는 자기 녀동생을 아들과 함께 중학교에 보내려 했으나 그 녀자애가 오빠네 가정에 부담이 될가봐 스스로 단념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녀자애와 또다시 한반에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것이 못내 서운하였다. 그때 이미 열대여섯살이 된 나는 어렸을 때 늘 생글거리던 그 녀자애의 모습이 눈앞에 알른거리며 더없이 가긍스럽게 느껴졌다.

아마 우리가 중학교 2학년 때였을것이다. 어느날 나는 그 녀자애의 조카가 하숙하고있는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거기서 쌀을 이고 온 그 녀자애를 만났다. 내가 시골을 떠난후 5~6년만의 상봉이였다. 원래 괄괄한 성미인 그 녀자애는 나를 보자 먼저 “야—! 이게 누구냐?”하고 반기며 아무런 가식도 없이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어릴 때 내 입에 감자누룽지를 넣어주던 그 성미 그대로 화끈하였다. 나도 뜻밖의 만남에 기뻐서 그녀자애의 손을 잡고 흔들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굴색이 좀 감실감실해지고 외태머리가 쌍태머리로 변하였을뿐 억실억실한 눈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정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그 녀자애가 어릴 때보다 더 예쁘게 변한것 같아 은근히 호감까지 생겼다. 그날 우리 셋은 그 녀자애가 동고리속에 넣어가지고 온 달콤한 엿을 먹으며 날이 저무는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헤여질무렵 아쉬운 생각이 들면서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후 나는 룡정고중에 입학하였고 그 녀자애의 조카는 시골집에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듣는바에 의하면 그 녀자애는 열여덟살이 되자마자 하루가 멀다 하게 정부기관을 찾아가서 군대에 가겠다고 신청하여 기어이 군대에서 모집하는 간호사학교에 합격되였는데 나중에 지원군으로 항미원조전선에 나갔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그 녀자애가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키워온 소중한 꿈이 실현된것을 진심으로 축복하였다. 아울러 꽃나이의 녀자애가 가렬처절한 전쟁터에서 어떻게 견뎌낼것인가 은근히 근심하며 무사히 살아돌아오기를 기원하였다.

조선전쟁이 끝난 어느날, 나는 외가집 친척한테서 우연히 그 녀자애의 소식을 들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시골계집애가 군대에 갔다오더니 출세했다며 칭찬이 자자하단다. 특히 부대에서 름름한 신랑까지 데리고 와서 둘이 함께 향위생소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그후에은 그 녀자애의 기별을 전혀 듣지 못했다. 사실 더는 그 녀자애에게 관심이 없었다. 또 서로 소식을 알수 있는 형편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잠재의식속에 모름지기 배신당했다는 야속함이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는 법이다. 친척집잔치에 갔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였다. 어릴 때의 소꿉친구, 더구나 전쟁포화의 시련까지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옛친구를 10여년만에 만나면 의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건만 웬 일인지 그녀도 나도 서로 서먹서먹해하면서 거리감을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서 사춘기때 생겼던 호감을 조금도 느낄수 없었다. 그녀도 역시 나를 외면하는것 같았다. 파마머리를 하고 몸이 실팍해진 그녀는 어랜애를 등에 업고있었는데 옛날의 매력을 꼬물만치도 찾아볼수 없었다. 가령 그녀가 이성친구가 아니고 동성친구였다면 이런 감정변화가 생길수 있었을가? 소년기의 첫 이성친구이자 또 사춘기에 호감을 가졌던 그녀가 훌쩍 변한것에 대한 아쉬움과 야속함이 심리적거리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좌우할수 없는 자연섭리였기에 어느 누구를 탓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무정한 세월을 원망할수 밖에.

이제는 모든것이 세월 따라 인생 따라 다 지나가버린 과거지사로 되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아름답게 자리 잡았던 동년시절의 이성그림자는 그냥 사라질줄 모른다. 그녀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아마 나처럼 파파로인이 되였을것이다. 파파로인이면 뭐라나. 어디에 살고있는지? 이제 다시 만난다면 더는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것이다.

감자누룽지를 입에 넣어주며 순수하고 소중한 우정을 키웠던 그 시절이 그립다. 언젠가 그녀와 그녀의 남편과 함께 동년의 추억을 더듬으며 축배의 잔을 기울이고싶다. “동년의 이성친구 만세!”를 웨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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