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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선생님들 (김재현)
2018년 09월 16일 11시 04분  조회:1119  추천:0  작성자: 김재현

나의 선생님들

김재현

 

봄비는 몸을 부셔
만물을 소생시키고
조용히 땅속에 스며들고
초불은 몸을 태워
주위를 밝혀주고
눈물만 남기고 떠납니다.

    
인간의 아둔한 머리속 흰피에 령혼을 심어주는 선생님들
정성을 봄비라, 초불이라 하겠습니다.

  
   화룡현 룡수평 시골에서 태여난 저는 유치원에  다닌 기억이 없습니다.딱 한번 누나와 함께 한마을 다른 소대(촌민소조)유치원에 놀러갔었는데 선생님이 누나와 저한테 옥씨튀개(옥수수 튀김)한줌 씩 주었습니다. 간식이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선생님이 주신 한줌의 옥수수튀김은 그렇게 맛있을 수 가 없었습니다.그맛은 지금의 그 어떤 산해진미로도 바꿀수 없는 별미였다고 기억됩니다.과언이 아닐것입니다.그때 다른 소대 어린이였던  저의 작은 손에 옥수수튀김 한줌을 쥐여주었던 유치원선생님의 그 손은 틀림없는 천사의 손이였습니다.

     소학교에 입학하던 해 대대(촌민위원회)에서 벽돌로 교사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때 촌에 벽돌집이란 학교,집체호(지식청년들 숙소)가 전부였습니다.소학교와 초중을 함께 지었는데 그때는 소학교 5년제,초중2년제였습니다.소학교 1학년 반주임 선생님은 향소재지에서 우리촌으로 걸어서 출퇴근 하신 남순복선생님이셨는데  저의 어머니와 년세가 비슷한 분이셨습니다.

한번은 조선어문시험에서 100점을 맞았습니다.헌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오리"를 "우리"로 잘못썼기에 선생님을 찿아가 성적을 잘못 매겼다고 보고하였습니다.선생님은 성적을 95점으로 고쳐주시고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성실한 학생이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스스로 찿아갔지만 100점이 95점으로 떨어지니 코마루가 시큰해났습니다. 착하다고 칭찬해주시기에  이를 악물고 기어이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습니다.얼마 안지나 선생님은 반장직을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소학교 4학년 때 한책상에 함께 앉았던 동창생의 아버지가 선생님이셨습니다.한번은 상학종이 울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는데 "기립"을 불러야 할 제가 옆에 앉은 동창과 옴니암니 다투고있었습니다.노하신 선생님은 우리 둘을 교탁앞에 불러 세웠습니다.

"이놈들, 반급간부란 자식들 상학시간이 됐는데도 싸워...".

"찰싹" 선생님의 큰 손바닥이 저하고 싸운 동창의 작은 얼굴에 떨어졌습니다.  눈을 딱 감고 내 얼굴에 떨어질 선생님의 손바닥을 기다렸습니다.헌데 선생님은 당신 아들만 때리시고 나는 때리지 않았습니다.나도 때릴것이지...왜 당신 아들만 때리고 아들과 싸운 나는 때리지 않으셨을까???얼굴은 변을 면했지만 가슴속에는 큰 의문부호와 작은 멍이 새겨졌습니다.



     그때 마을앞에 룡정에서 화룡으로 가는 철길이 있었습니다.봄이면 철길옆에 자라는 풀을 뽑는 "호로중대"가 있었습니다.한번은  호로중대 활동일에 풀 뽑으로 갔어야 했는데 호미를 들고 과수대 살구밭에 갔습니다.호미자루로 살구나무 가지를 후려쳐 익지도 않은 살구를 싹쓸이하다 함께간 개구장이들 태반히 잡혔습니다.

과수대 대장은 우리가 가져간 호미를  전부 빼았고 담임선생님을  부르셨습니다.선생님은 과수대  대장 앞에서 우리를 호되게 꾸짖으시며  호미를 찿아주고  학교에 까지 우릴 줄지워 데리고 갔습니다.뒤지게 혼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의외로  "살구가 아직 안 익어서 못먹어.그리고 호미로 살구나무를 치면 살구가 다 떨어져...임마들아"하시면서 우리를 쉽게 풀어 주었습니다. 그후로   "호로중대" 는 취소되고 우리는 그 과수대밭엔 과일 훔치러 가지 않았습니다.

     3년제 초중을 세개학교에 거쳐 5년을 다녔습니다.룡수1중에서 초중에 입학하여 투도2중을 거쳐 투도1중에서 초중을 졸업했습니다.

      투도2중에 다닐 때 학교운동대회날이였습니다.저는 철봉에서 떨어져 팔목이 부러졌습니다.오기선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다짜고짜 저를 둘쳐업고 한창 경기중인 축구장을 가로지나  병원으로 달려가셨습니다.해란강제방공지에 나가신 의사선생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려 썩 후에야 진료를 시작했는데 아주 재래식이였습니다.팔목 상처부위가 이미 퉁퉁부었는데 뒤에서 선생님과 의사선생님이 저의 몸과 팔을 잡고 앞에서 다른 한 의사선생님 저의 손을 잡고 힘으로 당겨 엇갈린 뼈를 제위치에 잡아넣었습니다.아팠습니다.뼈를 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아픔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움을 알지 못합니다.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뼈가 제대로 잇기지 않아 불구가 될 것같은 두려움에 혼신이 후들후들 떨림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절로 흐리기 시작했습니다.선생님은 저의 몸을 꼭 끌어안아 주시며 울고싶으면 울라고 하셨습니다.선생님앞이라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내여 울었더면 혹시 덜 아팠을지도 몰랐을텐데...

   병원에서는 베니야판으로 손목 상처부위를 고정하고 붕대로 싸서 목에 매여주었습니다.선생님은 저를 집까지 자전거에 태워다 주었습니다.아버지는 선생님이 수고하셨다고 하시면서 어머니한테  술상을 챙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그날후로 선생님과 아버지는 절친이 되시고  투도에서 가끔 만나시면 약주도 함께 하시곤 하셨습니다.


      초중을 투도1중에서 졸업했습니다.그때 학교마다 초중에서 고중에 가지않고 중등전문학교에 직접 가는 수험생 지표가 있었습니다 .중등전문학교에 가려고 1년 더 재학했습니다.헌데 결국 이듬해에도 겨우 연변사범학교 녀학생지표가 달랑 한장  왔습니다. 화룡2중(화룡고중)에서는 입학통지서가 왔는데 고중에 가야할지 중등전문학교 지표를 1년 더 기다려 봐야할지...술두병 사들고 손윤식담임선생님을 찿아갔습니다.

   그때 흑백텔레비가 금방 나왔었는데 텔레비프로가 끝날 때까지 선생님과 사들고간 술두병 다 마시고 선생님집 술도 꽤나 마시였습니다.선생님은 1년 더 기다려도 남학생지표가 올지 알길이 없으니 화룡고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하고싶은 얘기가 정말로 많았습니다.선생님과 하루밤새 나눈 얘기가 아버지와 1년간  나눈 얘기보다도 많았을것입니다.

   그때 지표를 기다리는 녀동창들도 몇명 있었는데 학교 일어선생님 녀동생이 결국 지표를 받아 연변사범에 갔습니다.재학생이라 성적도 줄곧 1위이고  학교단위 조직위원을 하였기에  선생님과 동창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나의 눈에도 들어오는 녀동창이 있었습니다.그 녀동창생도 공부를 잘했었는데 저와 부부가 된 후날 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조선에서 가져온 오지독을 이시고 우리집에  찿아오셨습니다.그날도 저희 좁은 세집방에서 텔레비프가 끝날 때까지 마시었는데 거나하게 되신 선생님은  자네들이 부부가 될 줄 진작 아셨다고 하시면서 꼭 잘 살라고 덕담을 남기셨습니다.

     화룡2중 담임선생님은 키가 훤칠한 곱슬머리 미남 최수남선생님이였습니다.물론 선생님이시기에 어려운 면도 있었지만 매형과 년세가 비슷하였기에 은근히 큰형님같은 친근감도 있었습니다.화룡고중 운동대회때마다  담임선생님과 반급간부중 3명을 추려 남성 2명 녀성2명해서 네사람 이어 달리기 전통항목이 있었는데 매학기 운동회마다 우리반급에서 1등을 했습니다.선생님이 마지막 주자였었는데 두팔을 휘저으며  뒤걸음으로 골인하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반급 단지부서기를 하면서 활동도 조직하였습니다.한번은 야외 나들이에 나갔는데 제가 반급 동창들 앞에서 어망결에 발길로 선생님 소퇴를 걷어찼습니다.많이 아프셨
을겁니다.속으로 어찌 마무리 할까 많이 우려했었는데 선생님은 웃고 넘기셨습니다.

   고중3학년 때 대학시험이 다가오는 시점에 학교를 그만두고 토끼를 키워 일찍 돈 좀 벌어보려고 자원퇴학을 결심했습니다.그냥 도망갈수는 없는 일이라  선생님집에 찿아가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시며 "왜 너까지 이러냐?" 한마디 하셨습니다.그때 학교에 정교처라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싸우거나 련애하거나 담배피우다 정교처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중처벌 지어 퇴학까지 당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우리반에서도  몇몇 동창들 이런저런 사안으로 처벌을 면하려고 퇴학맞지 않으려고 선생님을 찿아다니기 빠쁜데  탄서기를 한다는 놈은 자원퇴학 한답시고 선생님을 찿아갔으니 기가 막힐수도 있었을 것입니다.설득하다 힘이 빠지신 선생님은 "갈테면 가되 늦었으니 저녁이나 먹고가라"하시며 저녁을 준비해줬습니다.거기에 맥주한잔 까지...

     집에 내려온후 본격적으로 토끼양식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우선 룡정에 있는 연변농학원에가 토끼사양기술을 배우는 한편 종자토끼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하루는 연변농학원 축산학과 선생님집에서 종자토끼를 사서 자전거에 정히 모시고 30리길을 달려 집에 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했습니다.선생님이 몸소 집에 찿아오시여 학생을 당장 학교에 돌려보내라고 최후통첩을 내리고 가셨던것이였습니다.

   "다른일엔 아버지말을 안들어도 괜찮으니 이번만은 내 말을 따르거라.래일 학교로 돌려보낸다고 선생님한테 답복했으니 학교로 돌아가거라"하시고 돌아 앉으시는 아버지 등뒤에서 저는 할 말을 찿지못했습니다.가냘퍼 보이는 아버지 등모습을 바라보며 그 어깨에 힘이 돼보고저 했던 계획은 뒤로 미루는걸로하고  이틑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그때 선생님이 찿아오시지 않았다면 저희 인생궤적은 지금과 확연히 달라졌을것입니다.

     천진에가 대학교를 다니게 되였습니다.졸업을 앞두고 하북성 부녕현 (抚宁县)당교에 가 실습하였습니다.실습 인솔자였던 계(학부)당총지 서기선생님께서 저를 단독으로 불러 "북대하옆 남대하부근에  서하남 조선족촌이 있는데  북대하 참관교학후 경제법학과 두개반  60 여명 학생주숙을 련계하러 갈 수 없겠느냐?"고 문의하셨습니다.물론 기꺼이  답복했습니다.

   역시 피줄이 가르키는대로 술 두병 사가지고 촌장을 찿아가 주숙을 련계했습니다.일정 변화로 북대하참관이 취소되여 학교로 복귀되였습니다만 학교에서 왜 학생이였던  저를 몇십명 실습생 주숙을 련결하라고 파견했었는지? 학생이였던 내가 왜 그 임무를 달게 받고 자비로 뻐스표 끊어 길을  떠났던지 ...지금 생각해봐도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를 믿었었기에  저에 대한 고험으로 숙제를 주셨을 것이라 좋게 생각해봅니다.덕분에 이틀간에 북대하 그리고 진황도부근 4대명승지 老龙头,天下第一关,燕塞湖,孟姜女庙를 돌아보았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주정부 법률관련기관에 분배되여 근무하다 집 한채 분배받고 사직하고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지구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20년만에 본업에 복귀하였습니다.헌데 여기에도 선생님이 계시네요.전국 유일의 성인민대표대회 대표로 활약하는 조선족 녀성변호사 리은희 주임변호사입니다.선생님은 평소에는 저희를 김변호사나 "老金"으로 불러주며 가끔은 우스개도 하지만 별로 개별소통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룡정에 있는 선생님이 법률고문을 맡아보는 모정부기관에 함께 다녀오게 되였습니다.간질거리는 입을 용케도 붙들어 매고 있다 회의가 거의 끝날무렵 제대로 단속못하고 몇마디 발설했습니다.긑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만점 시험지였었는데 ...회의가  끝나고 단둘이 차에 오르자 선생님은 본색을 들어냈습니다.  저는 물론 한마디 대꾸 못하고 착실히 교육을 받았습니다.사제간에 언젠가는 꼭 치르고 지나가야 할 장이였습니다.오히려 가슴이 후련하였습니다.

     한번은 법률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선생님은 요기조기 때끔때끔 지적하여 주었습니다.헌데 얼마 안지나 전사무소 회식 자리에서 그 법률문서가 잘 작성되였다고 칭찬하여 주셨습니다.나이든 제자에 대한 "안면공사"였을 것입니다.얼굴이 뜨거웠습니다.저희가 한국영화 "두사부 일체"를 엮어가며 "한번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라고하면 반대로 저희한테서 배울 것이 많다며 웃겨넘기십니다.늦게 만난 비슷한 나이의 선생님이지만 명실상부한  존경스러운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나는 아마 좋은 선생님들을 모실 운을 지니고 태여났나 봅니다.

    인간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군체입니다."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중에 꼭 나의 선생님이 계신다"고 하였습니다.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만 선생님이 아닙니다.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든 마을귀퉁이 대포술집에서든...어디에서든 누구든 내가 모르는것을 가르쳐주고  내가 깨닫지 못하는 리치를 일깨워 준다면 남녀로소 따질것 없이 그분은 바로 나의 선생님입니다. 많고 많은 선생님속에 끼워 살아가기에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언제든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배움의 길이란 끝이 없는 길일것입니다.
      그 길에서 만났고 또 만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교사절 축하합니다

      2018년 9월 9일
     장춘---연길행 렬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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