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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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검은빛
2019년 07월 09일 21시 31분  조회:882  추천:0  작성자: jinhua

검은빛

김철호

 

1.

외가마을에 이상한 녀인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녀를 ‘영자아지미’라고 불렀다. 영자아지미는 철길 너머(사람들은 철길 너머 마을을 ‘철북’이라 불렀고 이쪽을 ‘철남’이라 불렀다.) 강이네 륙간초가집 외양간을 수리해 온돌을 놓은 곁칸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방학이 되여 놀러 갈 때마다 우린 그녀를 가끔 만나군 했는데 외할머니가 ‘영자아지미’라고 부르라 해서 그냥 그렇게 불렀다. 

영자아지미는 어쩌다 외할머니네 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다. 인기척도 없이 문을 밀고 들어와서는 아래목에 꼬부리고 누워있는 외할머니 곁에 우두커니 앉아있다가는 들어올 때처럼 그렇게 살그머니 일어나서 가버리는 것이 고작이였다. 그래서 우린 그녀가 언제 들어왔는지 또 언제 돌아갔는지 모를 때도 있었다. 외할머니도 그녀가 들어올 때에도 그랬거니와 나갈 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오면 오고 가면 가고 그저 맘대로 하라는 눈치였다. 

그녀의 거동을 조금 더 자세하게 묘사하면 이렇다. 

그녀가 집(외할머니네 집)에 들어설 때면 우에서 말했듯이 소리없이 문이 열린다. 빠끔 열린 문으로 먼저 커다란 검은 수건뭉치가 쑤욱 들어온다. 검은 수건뭉치는 신발 벗는 곳을 살핀다. 신발들 속에 외할머니 신발이 있기만 하면(외할머니 신발이 없으면 검은 수건뭉치는 도로 밖으로 나가버리고 문이 소리없이 닫긴다.) 어깨가 들어오고 한손이 따라 들어온다. 거의 동시에 한쪽 발이 들어오는데 그 손과 발은 마치 뒤따라 들어오는 다른 손과 발을 이끌어들이는듯해보인다. 두 손, 두 발이 다 들어서면 꺼부정한 작은 몸집이 끌려들어와 더듬더듬 기여서 외할머니 곁에 간다. 신발은 너무 컸기에 벗을 필요 없이 저절로 벗겨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검은색의 커다란 헝겊수건(할머니는 그 수건을 ‘숄’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무슬람 녀성들이 머리를 가리기 위해 쓰는 ‘히잡’이라고 부르는 머리수건 같았다.)을 푹 쓰고 있었는데 얼굴 전체를 수건으로 완전히 가리고 있어 얼굴은 말 그대로 수건뭉치였다. 말할 때면 수건이 겹쳐진 곳을 빠끔 열고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우린 그 말을 통 알아듣지 못했다. 외할머니만은 그래도 항상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중얼거림이 끝나면 수건은 감옥문처럼 다시 철커덕 닫혀버렸다.

수건이 겹쳐진 곳을 좀 트인 것은 말이 새나오라고 그러는 것이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거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닌 것 같았다. 때문에 수건 속에 감춰진 입, 코, 눈, 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냘픈 목은 그 무거운 머리통을 지탱해줄 힘을 잃은 모양이였다. 어깨 중간에 겨우겨우 붙어있는 머리통은 늘 바닥을 향해 꺾여있었다. 

그래서 우린 그녀가 없을 때에는 그녀가 곰보여서 그런다는 둥,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어서 그런다는 둥, 코가 삐뚤어졌거나 외눈박이거나 아니면 귀가 떨어져서 그런다는 둥 하면서 킬킬거렸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 못쓴다고 핀잔주었다. 외할머니의 두둔이래야 기껏 ‘불쌍한 녀자’라는 한마디 뿐이였다. 

우린 그 ‘불쌍한 녀자’가 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몇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인상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란리’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우린 별의별 추측을 다해보았지만 끝끝내 그녀의 얼굴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축 처져보이는 치마저고리는 몹시 낡은 것이였는데 몇군데 기운 자리가 있었다. 흰바탕이였을 치마저고리는 꺼무룩한 색갈로 변해있었고 신고 있는 것은 남자용 검은 고무신이였다. 그녀는 커다란 검정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

더욱 이상한 것은 빛에 대한 그녀의 강력한 민감성이였다. 그녀는 그 어떤 빛에도 기겁을 했다. 빛은 그녀에게 공포의 대상인 것이 분명했던 것 같다.

동생 태식이가 금방 소학교 1학년 두번째 학기 공부를 마친 뒤였으니 아마 1960년 아니면 1961년 쯤일 것이다. 여름방학이였다. 친척이 없었던 우리는 방학이 되자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살던 시내에서 8리 남짓 떨어져있는 절골의 외가집으로 뛰여갔다. 

그러나 신나던 방학, 동년의 꿈을 익혀주던 그 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우린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여름방학에 발단이 된 일이 겨울방학에 터져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리고 그 후 다시는 외가마을로 놀러 가지 않았다. 아니 놀러 가지 못했다. 

 

2.

그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였다. 그 우연 때문에 우리는 그녀가 더 신비해보였고 우스워보였고 멍청해보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우리는 그녀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 부렸고 결국엔 그녀를 기로에로 밀어넣고야 말았다. 

그 때 민가에서 사용하던 전등스위치는 거의 다 끈으로 당겨 켰다 껐다 하는 것이였다. 외가집 정주와 웃방 문틀 모서리에 끈을 드리운 감자알 만큼한 까만 스위치가 달려있었다. 끈은 벽을 따라 구들 언저리까지 내려와있었다. 잠잘 때 손으로 그것을 잡아당기면 전등이 꺼지게 되는데 쓰기가 아주 편리했다. 잡아당기면 ‘딸깍!’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아주 재밌고 귀여웠다. 그 소리와 함께 방안이 환해지고 그 소리와 함께 방안이 캄캄해진다. 그래서 장난꾸러기였던 태식이는 쩍하면 그 끈을 ‘딸깍! 딸깍!’ 잡아당기군 했다. 태식이의 그 같은 소행을 미리 대처하기 위해 외할아버지는 낮이면 스위치 끈을 아예 옷걸이로 박아놓은 못에 높이 걸어놓군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의 첫 사건이 생기게 된 바로 그 날이였다. 

우리 형제는 밖에 나가 실컷 놀다가 해거름 때가 되여 돌아왔다. 

영자아지미가 와있었다. 외할머니는 아래목에 꼬부리고 누워있었다. 솥에서 뭔가 끓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냉이가 솥에서 한창 삶기고 있었던 것이다.  

태식이와 나는 맥없이 벽에 기대여 앉아 강냉이 익기만을 고대 기다렸다. 묵직한 엉뎅이가 벽에 의탁되여있는 몸뚱이를 아래로 자꾸 잡아당겼다. 

일은 그 스위치끈 때문이였다. 무슨 영문인지 그 날 스위치끈이 못에 걸려있지 않고 벽에 축 드리워있었다. 적중히 말하면 스위치끈이 태식이의 등에 눌려있는 상태가 되여있었다. 태식이와 나는 가지런히 벽에 기대여 앉아있었다. 태식이가 맥없이 벽에 기대일수록 엉뎅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몸뚱이는 자꾸 아래로 흘러 등뒤에 눌리우고 있는 스위치끈을 고도로 팽팽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고 영자아지미는 돌아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자아지미를 할머니가 만류하고 있었다. 아마 강냉이가 익으면 먹고 가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영자아지미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얼굴을 푹 가리운 수건을 조금 드티면서 할머니와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장난기가 도진 나는 발로 태식이를 툭 건드려버렸다. 아래로 흘러버리려고 엉뎅이에 몰려있던 태식이의 몸이 나의 발길질에 쭉 미끄러져 구들 우에 벌렁 쓰러졌다. 결과적으로 벽에 붙어있던 태식의 잔등이 스위치끈을 잡아당기는 역할을 해주었다. 

딸깍! 

야무진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어둑어둑하던 집안이 대뜸 환해졌다. 

갑자기 새된 비명소리가 집안의 공기를 마구 찢었다. 그 비명은 괴물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고 멱 따이는 짐승의 발악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머리가 곤두서는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태식이는 어느새 일어났는지 구들 중간에 장대처럼 서서 가느다란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비명의 주인은 영자아지미였다. 뒹굴듯이 구들에 쓰러지면서 푹 눌러쓰고 있는 수건 우에다 저고리까지 마구 뒤집어쓴다. 

너무도 순간적이고 돌발적이였다. 

-불(전등)을 죽여라! 불을 죽여라! 

외할머니가 소리쳤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던 우리 형제는 마구 뒤척이면서 욱욱거리는 영자아지미를 놀란 눈길로 바라볼 뿐이였다. 그 모습에 처음에는 두려웠고 다음에는 당황했다. 그러나 몇초 사이에 우리의 감정은 대뜸 변해버렸다. 영자아지미가 하는 꼬락서니가 너무 재미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영자아지미가 왜 저런다니 하는 의구심으로 똘똘 뭉친 눈길을 주고 받으면서 그 해괴한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맥없이 아래목에 꼬부리고 누워 까딱하기를 싫어하던 외할머니가 잽싸게 일어나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스위치끈을 잡아당겼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집안은 대뜸 캄캄해져버렸고 신비하게도 구들 우에서 욱욱거리며 죽는 시늉을 하던 영자아지미가 허리를 쭉 펴면서 아무 일 없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에 내려섰다. 손더듬이로 신발을 찾아 신은 영자아지미는 문을 열고 구렁이처럼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3.

며칠 후였다. 우리 형제는 일밭에 간 할머니를 기다리면서 돌담 밑에서 유리알 치기를 놀고 있었다. 

-영자아지미다! 

태식이가 낮게 부르짖었다. 머리를 쳐드는 순간 나는 그저께의 흥분이 살아나면서 검은 그림자에 눈길을 박았다. 어슬녘인지라 작은 몸뚱이에 매달린 그녀의 길고 검은 그림자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얼굴 전체를 수건으로 둘둘 감싸고 어적어적 걷는 모습이 병든 닭 같아보였다. 몹시 꾸부정한 허리는 거의 곱사등이였다. 그래서 더욱 움푹해보이는 가슴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검은 고무신이 난쟁이 작은 키를 만드는 다리와 다리를 움직여주는 발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은 마치 그 고무신이 끌어주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누가 신던 고무신인지는 몰라도 허우대 큰 사나이의 신이였음은 틀림없어보인다. 움직일 때마다 헐렁한 속에 담겨져있는 맨발이 금방 밖으로 빠져나올 것 같았지만 용케도 발끝을 고무신 앞코숭이에 갖다 넣었다. 

신 끌리는 소리가 질질 나는 가운데서 그녀는 어디론지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그녀의 뒤모습을 우리 둘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량손에 유리알을 그득그득 쥔 채 얼이 빠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담모퉁이에서 사라지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이 쪼르르 달려가서 그녀의 그림자를 뒤쫓았다. 그녀의 그림자는 마을 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발볌발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낮은 돌각담으로 경계를 해놓은 뙉밭이 펼쳐진 산기슭에까지 간 그녀는 우리가 한눈 팔 새에 어디론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하얀 꽃이 한창 피여있는 감자밭과 그 뒤로 펼쳐진 강냉이밭이며 콩밭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보았다. 거뭇한 산그림자에 덮인 밭들은 무시무시해보였다. 

금방 앞에서 서럭서럭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키를 살짝 낮추었다. 검은 그림자가 감자밭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앉은 채 그림자 가까이에 가려고 오리걸음을 했다. 

감자밭에서 검은 그림자가 계속하여 움직이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서럭서럭하는 흙 긁는 소리가 계속하여 들렸다. 

이젠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코앞에서 났다. 우리는 앉은 걸음으로 살살 감자포기새로 스며들었다. 우리가 머리를 빠금히 내밀면서 그녀의 짓거리를 바라보려고 하는 찰나 우쭐 하고 검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태식이와 나는 죽은듯이 감자밭 속에 잠겨버렸다. 겁에 질린 태식이는 쌕쌕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딱 감고 있었다. 

그녀가 끙 하고 움직이자 뭔가가 담긴 검은 자루가 가냘픈 어깨 우에 얹어졌다. 감자포기를 헤치면서 그녀가 밭에서 나갔다. 우리는 몸을 옹송그리고 죽은듯이 가만있었다. 

그녀가 지나쳐갔다. 머리를 감싼 검은 수건 속에서 할할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마을 쪽 깊숙이 걸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우리 둘은 간신히 허리를 펴면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찰병처럼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그녀의 뒤를 쫓아 다시 마을을 향해 반달음쳤다. 

그녀는 우리 집(외가집) 문 앞에서 꾸물거리다가 다시 허리를 펴면서 검은 주머니를 어깨에 멨다. 

담모퉁이에 몸을 숨긴 우리는 그녀의 짓거리를 계속하여 추적해볼 마음으로 숨 죽이고 있었다. 집마당에서 나온 그녀는 반대방향인 좁은 마을길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철길이 있었다. 외가집 동네는 철길로 두동강 나있었는데 앞에서 이미 말했다 싶이 그녀의 집은 철북에 있었다. 사람들은 저쪽으로 굽이돌아있는 달구지길로 다니지 않고 금을 그어놓은 것 같은 오붓한 오솔길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녀도 지금 그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철북은 철남보다 조금 둔덕진 곳에 있기에 올리막길이였다. 하얀 올리막 오솔길이 동서로 뻗은 철길을 뚝 끊어놓으면서 철남과 철북을 이어놓는다. 낮이면 그 길로 기차를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말을 무시한 조무래기들이 정신없이 건너가고 건너오고 한다. 

그 올리막 오솔길에서 그녀는 지금 네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기다 싶이 걷고 있는 것이였다. 낡을 대로 낡아버린 꺼무룩한 저고리에 꺼무룩한 치마, 거기에다 검은 수건으로 머리까지 온통 감싸고 있었기에 그녀는 하나의 자그마한 검은 괴물로 보일 뿐이였다. 

-뿡!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괴함이 울렸다. 대가리가 시커먼 기차가 구불구불한 검은 연기를 토해내면서 박두하고 있었다. 그녀가 철길에 금방 들어서고 있는 때였다. 

우리는 저쪽으로 달려오는 기차와 이쪽의 영자아지미를 번갈아보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우람찬 동음을 울리면서 기차가 휙휙 지나쳤다. 쿵쿵 하는 기차바퀴소리가 우리들의 가슴을 밟으면서 정신을 태쳐놓고 있었다. 기차는 철북과 철남을 사정없이 절단해버리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지나가는 기차이고 그럴 때마다 기차를 향해 환성을 올리군 했지만 지금은 속이 한줌 만해서 지축을 울리는 육중한 괴물을 눈이 휘둥그래 바라볼 뿐이였다. 

드디여 기차는 괴함소리를 싣고 서쪽으로 멀리 사라져버렸다. 맥이 끊겼던 하얀 오솔길이 이어졌다. 

-영자아지미는? 

-글쎄, 어디 갔지? 

우리는 오솔길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둘의 눈길은 허둥대면서 그녀의 그림자를 찾아 헤매였다. 기차길을 건너간 오솔길, 그 오솔길로 사라진 그녀의 그림자가 끝내 우리들의 시야에 잡혀왔다. 자루를 멘 그녀는 기차길에서 2메터 쯤 떨어진 길가에 처박혀있는 바위 우에 댕그랗게 앉아있었다. 짐처럼 놓여져있었다. 

사람들이 그 곳에 짐을 놓고 잠시 쉬곤 하는 것을 여러번 본 일이 있는 자그마한 바위였다. 

 

4. 

외할머니가 소리치고 있었다. 동네가 떠나라고 소리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금이 선 놋그릇을 잡아두드리는 것 같았다. 

아마 저녁 먹을 시간이 된 모양이였다. 

-이 강개(감자) 어데서 난 거냐? 다리갱이 분질러놓기 전에 제대로 대라! 

외할머니는 아까 영자아지미가 갖다놓고 간 대여섯알 되는 감자를 손가락질하면서 얼굴이 감자가 되여 소리쳤다. 

우리의 사정얘기를 듣고서야 후- 한숨을 몰아쉬더니 

-흑, 주제에… 

하면서 감자를 키에 와락와락 담는다. 

-영자아지미가 남의 밭에 것을 훔친 거 아니예요? 

-아니다! 

밥상에 마주앉은 후에도 외할머니의 금이 선 놋그릇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밥에 정신이 팔린 우리는 외할머니의 말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영자아지미가 전등불빛이거나 강한 해볕 같은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전등불빛 같은 데에 관심이 없고 주린 배를 채울 일이 급하기만 한지라 우리는 머리를 수굿하고 우적우적 씹기만 할 뿐이였다. 

그 후 꽤 오래동안 영자아지미가 외할머니를 찾아오지 않은 것 같다. 

개학이 되여 래일이면 집에 돌아가야 했다. 그 날 영자아지미가 외할머니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 장소에 우리는 없었다. 외삼촌과 함께 꼴 베러 앞산에 갔던 것이다. 꼴단을 소잔등에 싣고 돌아오는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저렇게 우리를 지나쳐가는 것을 보았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 수건, 질질 끌리는 검은 고무신… 비루먹은 같은 그녀의 모습은 더럽고 불쌍하기만 했다. 

-빛을 겁나하는 아지미다! 

태식이가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뒤모습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히히 웃었다. 

-그럼 못써! 

외삼촌이 태식이의 입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핀잔을 줬다.

-아지미는 아픈 사람이다. 그래서 빛을 싫어한단다. 

-아픈데 왜 해빛을 싫어하나? 

-그건 니들 알 것 없고…

-그럼 해빛도 싫어하나? 

-응, 그래서 흐린 날이거나 새벽 아니면 저녁때에만 밖에 나오는 거란다. 

-야, 우습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해가 저렇게 밝은데…

-글쎄 말이다. 이런 날이면 얼굴을 마구 감싸! 봐, 저렇게! 

-와, 그런데 용케 걷네. 

-길을 어떻게 알가? 

집에 도착해서야 그녀가 해가 바짝 난 날인데도 왜 밖에 나왔는지를 알게 되였다. 우리가 래일 돌아간다고 복숭아 한바구니를 갖다놓고 간 것이였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 뒤울안에 류달리 크고 달콤한 복숭아가 달리는 복숭아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나와 태식이는 달려들어 정신없이 복숭아를 먹어댔다. 복숭아털에 찔려 볼타구니가 얼얼해났지만 시원하고 새콤한 맛에 취해 바구니를 놓을 생각을 안했다. 

 

5.

앞에서 말한 큰일은 그 해 겨울방학에 생겼다. 

친척이 별로 없는 우리는 방학만 되면 외할머니네 집으로 출동했다. 우리가 도착하기만 하면 외할머니는 깨진 놋그릇 두드리는 소리로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욕설을 퍼부으면서 닦아세우기도 하는 외할머니를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외할머니는 겉으로 그랬지만 속으론 우리를 무척 사랑했다.) 태식이는 그 깨진 놋그릇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기만 하면 기가 죽어 나의 등뒤에 몸을 숨기곤 했다. 

외할아버지는 겨울만 되면 집에만 박혀있었다. 여름방학 때에는 솔직히 외할아버지를 몇번 보지 못했다. 우리가 잠에서 깨여나면 벌써 밭에 나가고 없었으며 우리가 잠든 뒤에야 들어오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높은 목침을 베고 누워 항상 무슨 책을 느긋이 읽고 계셨다. 

외삼촌은 겨울에도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가 어디에 가있다가 한해 겨울이 다 지난 다음에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지를 몰랐다. 우린 그것이 더 좋았다. 쩍하면 벌을 세우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외삼촌의 부재는 우리에게 넘치는 해방감을 안겨줬다.

빛을 싫어하는 영자아지미의 일을 우린 잊은 지 오래다. 하얀 눈과 얼음, 메주콩얼군 것과 이따금 어디에서 꺼내다가 녹여주는 얼군 과일이 겨울 간식거리로 우리의 마음을 다 빼앗았을 뿐이였다. 

우리는 마당의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커다란 눈무지 속을 파 ‘집’을 만들기도 했다. 그 ‘집’은 너무도 아늑했다. ‘집’ 안에 제법 깔개까지 펴놓고 살림을 꾸리기까지 했다. 우리 또래로는 철북에 강이, 철남에 순이가 있었다. 이들은 가끔 우리 눈집에 마실 와 한가정이 되여 놀다 가군 했다. 순이가 제 집 바둑이까지 끼여주어 그 재미가 알콩달콩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집’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빛을 겁나하는 아지미다! 

태식이가 지난 여름방학 때 일을 기억해낸 모양이였다. 

영자아지미는 검은 솜옷을 입고 있었다. 발등까지 덮고 있는 큰 솜옷이였다. 신은 검은 ‘왕바신’(검은 천 밑에 솜을 넣어 지은 솜신)을 신고 있었다. 역시 누가 신던 것을 물려받은 같은 커다란 신이였다. 붕대처럼 머리를 감싼 검은 수건의 끝자락이 왼손에 감싸쥐여있었고 꾸부렁한 나무지팽이가 오른손에 쥐여져있었다. 그녀가 우리들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눈 밟는 소리가 뿌드득뿌드득 났다. 

순이네 바둑이가 달려나가면서 콩콩 짖어대더니 그녀의 솜옷을 물어뜯었다. 그녀는 끙끙 소리를 내면서 나무지팽이로 바둑이를 쿡쿡 찔렀다. 

-개새끼, 이리 와! 

순이의 목소리에 바둑이는 ‘집’ 안으로 뛰여들어오고 그녀는 간신히 ‘집’ 앞을 지나 외가집 문고리를 잡았다. 

-나 알거든. 저 아지미 빛을 무서워하는걸. 

-알어. 누구나 다 아는데 뭐. 

-그래? 그런데 왜 빛을 무서워한대? 

-몰라! 

-이상하지 않니? 

-이상하긴 뭐? 

순이와 태식이가 재밌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놀고 있었다. 

걸음 빠른 겨울해는 어느새 서산에 잠겨버리고 집집의 창가에 반디불 같은 전등불이 반짝거렸다. 허지만 외할머니네 창문만은 거무죽죽했다. 영자아지미가 아직도 집안에 있는 모양이다. 

강이가 눈집에서 나와 영자아지미를 불렀다. 함께 철길을 넘어가려고 그러는 것 같다. 강이의 부름소리에 대답은 없고 이윽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검은 그림자가 집안에서 새여나왔다. 순이는 바둑이가 콩콩대면서 뛰쳐나가려고 하는 것을 소리쳐서 저지시켰다. 영자아지미만 보면 바둑이가 저렇게 란리라는 것이다. 

강이가 앞에서 걷고 영자아지미가 강이의 발자국소리를 쫓으면서 뒤를 따랐다. 

철북과 철남 사이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바로 오솔길 옆에 파여있다. 그 골짜기에 샘줄기가 있는지 봄가을이면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어른들은 그 물을 ‘쇠오줌물’이라고 했다.) 겨울에는 건물이 얼어붙어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어준다. 이제 강이는 영자아지미와 함께 그 얼음판 우를 지나 철길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강이가 영자아지미와 함께 가려고 한 것이다. 

 

6.

일은 그 얼음강판 우에서 벌어졌다. 

외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가 얼음판 우에서 은을 냈다. 나무토막 밑에 쇠줄을 둘러만든 썰매는 나와 태식을 태우고 쏜살같이 질주한다. 귀뿌리를 때리는 바람결은 아찔하기만 했고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던 썰매가 꼰지면서 눈 속에 뒹구는 재미 또한 짜릿하기만 했다. 

우리는 썰매를 끌고 철길 밑까지 올라간다. 거기서부터 얼음강판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얀 얼음판이 마을어구까지 쭉 뻗었다. 애들은 철길가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한 애가 타고 내려가면 잠간 뜸을 들였다가 다음 애가 뒤따른다. 

우리 둘은 썰매가 하나이기에 내가 탄 후 끌고 올라오면 태식이가 타고 태식이가 끌고 오면 내가 타고 그랬다. 

그 날은 겨울해가 차겁게 반짝거리는 오전이였다. 

쏜살같이 아래까지 내려온 후 우를 바라보니 아까부터 나무꼬챙이를 갖고 놀고 있던 태식이가 그 꼬챙이로 순이의 엉뎅이를 찔러대면서 장난치고 있었다. 순이는(순이는 썰매가 없었기에 태식이와 내가 양보하여 태워보이군 했다.) 강아지를 안고 돌면서 태식이를 피하고 있었다. 때론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들렸다. 꼬챙이에 이상한 곳을 또 찔린 모양이다. 

내가 썰매를 끌고 중간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철길 우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영자아지미였다. 쨍한 대낮에 영자아지미가 나타난 것이 이상했다. (그가 그 시각에 왜 나타났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영자아지미는 태식이와 순이가 쫓거니 쫓기거니 하면서 장난치고 있는 곳에 다가서고 있었다. 얼굴을 둘둘 감싼 검은 수건과 발등까지 덮은 검은 솜옷, 영자아지미는 한눈에 검은 표가 난 사람이였다. 

오솔길은 태식이와 순이가 장난치는 바로 옆으로 뻗어있었다. 얼음판이 오솔길을 범하고 있는지라 누군가 재를 퍼다가 오솔길에 펴놓아 다니기 편하게 했다. 재가 덮인 그 길 우로 영자아지미의 커다란 ‘왕바신’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 아지미, 빛을 두려워해! 

태식의 놀림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마! 

순이가 옆에서 못마땅한 소리로 태식이를 저지시키고 있었다. 

-저 아지미, 빛을 두려워해! 겁쟁이야! 

태식이는 신나는 모양이였다. 나무꼬챙이를 높이 치켜들고 차겁게 떠있는 태양을 가리키면서 캘캘 웃는다. 

-겁쟁이야, 겁쟁이야! 빛을 두려워한대, 겁쟁이야! 

순이가 말릴수록 태식이는 더 우쭐해서 야단이였다. 나무꼬챙이는 흔들흔들 춤췄다. 

그녀가 순이와 태식의 옆을 스쳐지나갈 때였다. 하늘하늘 춤춰대던 태식이의 나무꼬챙이가 그녀의 머리수건에 걸려버렸다. 거의 동시에 재를 펴놓은 길에 있던 그녀의 한쪽 ‘왕바신’이 얼음판을 밟고 있었다. 그녀는 휘청했다. 머리를 감싼 수건자락을 쥐고 있던 두 손이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렸다. 

태식이는 나무꼬챙이를 힘껏 잡아챘다. 길고 더러운 검은 수건이 나무꼬챙이에 걸려 그녀의 얼굴에서 벗겨져버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 비명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금수의 비명보다 더 싫은 비명소리였다. 아마 빛을 막으려는 발악이였을 것이다. 그녀의 절망에 젖은 울부짖음은 순간 커다란 공포가 되여 나의 가슴을 긁었다.

나는 솜옷 속의 피부가 토돌토돌 닭살이 되는 것을 느끼면서 목을 잔뜩 움츠렸다.

태식이의 나무꼬챙이에 걸려버린 그녀의 검은 수건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기발처럼 펄럭거리고 있는데 검은 기발을 추켜든 태식이 역시 그녀의 비명에 놀라 멍해있었다. 놀라움에 크게 확장된 태식의 눈은 금방 툭 튕겨나올 것만 같아보였다. 공포의 그림자가 꺼멓게 물든 태식이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비명보다도 백일하에 드러난 그녀의 흉상에 아마 더 놀랐을 것이다.

태식이의 나무꼬챙이에 의해 말끔히 벗겨져버린 그녀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였다. 머리카락 한올 없는 그녀의 머리통은 회칠한 것 같은 호박대가리였다.

때문에 움푹 들어간 눈확이 더 검어보였는지 모르겠다.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유리알 만큼한 검은 구멍이 펑 뚫려있었고 코는 뭉그러져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입이였다. 비명이 흘러나오는 입에는 입술이 없었다. 휘딱 뒤번져진 살 사이에 먹이에 달려드는 짐승 것 같은 이발이 이몸과 함께 로출되여있었다. 틀림없는 마귀의 얼굴이였다. 

태식이는 그 무서운 얼굴 앞에서 기가 죽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면서 평형을 잡으려고 애쓰던 그녀의 ‘왕바신’ 두짝은 그만 얼음판을 밟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얼음판 우에 나동그라졌다. 우리가 썰매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던 그 얼음판 우에 쓰러진 그녀는 썰매처럼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발에 신겨져있던 ‘왕바신’은 어느새 벗겨졌는지 그녀는 맨발바람이 되여있었다. 다리부터 미끄러져 내려오던 몸뚱이가 휘익 돌면서 머리가 앞서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거꾸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는 판이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머리를 감싸려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불쌍하고 가련하게도 그녀는 머리를 도무지 감싸지 못하고 있었다. 

썰매를 안고 있는 나의 옆을 쏜살처럼 미끄러져 지나치는 그녀는 계속하여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아래까지 미끄러져간 그녀는 그래도 간신히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녀는 얼음판의 미끈거림에 애써 저항하다가 휘청거리면서 허공을 향해 얼마간 허우적거리더니 끝내 얼음판 우로 사지를 뻗었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비명이던 그녀도 강판 우에 쓰러진 채 잠잠해졌고 소란을 피우던 애들도 고정된듯 제자리에 못박혀버렸다. 

 

7. 

-죽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던 강이가 고함을 쳤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태식이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순이는 쏜살같이 마을로 뛰여갔다. 

애들은 슬몃슬몃 쓰러져있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자취만 있어도 대뜸 도망쳐버릴 준비를 잔뜩 한 채 목을 쑥 빼들고 그녀한테로 다가섰다.

난생처음 보는 그녀의 얼굴이다. 무드러지고 이그러진 그녀의 얼굴은 지옥문을 열고 간신히 기여나온 악귀의 얼굴이였다. 그 얼굴을 누구도 감히 찬찬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그 얼굴을 누가 감히 바라볼 수 있겠는가. 

태식이는 아까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 앉은 채 계속하여 흐느꼈다. 겁에 잔뜩 질린 울음소리였다.

마을로부터 어른 몇이 뛰여왔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그 속에 끼여있었다. 

순이는 약삭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수건을 찾아왔다. 

외할아버지가 그녀을 둘쳐업자 외할머니가 순이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쥐더니 그녀의 얼굴에 마구 휘감았다. 순식간에 그녀는 다시 지옥문 안에 갇혔다.

어른들은 그녀를 업고 부축하면서 철길을 넘어갔다. 

애들은 얼음강판에 남아서 저렇게 멀어져가는 어른들의 무리를 바라보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점이 되여 서있었다.

태식이는 계속하여 왕왕 울고 있었다.

 

8. 

그 날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태식이가 자주 악몽에 놀라 깨여서는 킥킥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조른 원인도 있었지만 눈만 감으면 그 악마 같은 얼굴이 덮쳐와서 도무지 잠을 청할 엄두를 못 냈다. 

아직 하늘에 별이 총총한 새벽인 데도 태식이는 책가방을 챙겨 갖고는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챘다. 

그 때까지도 외할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신문종이에 담배를 굵직이 말아서 뻑뻑 피웠다. 독한 담배연기가 코를 찔렀으나 집에 가야 한다는 급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겨울바람에 외양칸 문이 삐꺽해도 회칠한 듯한 영자아지미의 호박대가리의 롱간이 아닌가 싶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밖에서 자박자박 눈 밟히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문이 삐꺽 열렸다. 

이슬이 도롱도롱 맺힌 태식이의 까만 눈동자가 겁에 질려 문을 쏘아보았다. 

태식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도 겁에 질린 채 열리는 문에 살며시 눈길을 박았다. 

기운을 너무 많이 소진한 탓에 허리가 더 꾸부정해진 외할머니가 들어서면서 캑캑하고 잔기침을 한다.

태식이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고 나도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외할머니는 눈이 파릿파릿해있는 우리들을 한번 눈빗질하고는 그대로 부엌에 내려앉는다.  

나무가지 꺾는 소리가 뚝뚝 났다. 아침밥 지을 모양이다. 

-어찌됐는가?

하는 외할아버지의 물음에 외할머니는 강이 에미가 지키고 있다고 외마디 대답을할 뿐 다시 말이 없다. 

아침밥을 대충 먹은 우리는(태식이는 아예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모는 달구지를 타고 외가마을을 떠났다. 태식이는 솜뭉치 같은 외삼촌의 ‘따창’(북방의 한족들이 입는 긴 솜외투)과 개털모자 속에 파묻혀 달구지에 실려있었다. 

암소가 끄는 달구지는 소리만 덜컹덜컹 클 뿐 너무 느리고 더디여서 빨리 집에 돌아가려는 우리들의 마음을 도무지 알아주지 않았다. 

철길을 건넌 후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달구지는 느릿느릿 재에 올랐다. 

-태식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였어요.  

-알고 있다. 

-영자아지민 너무 무서웠어요. 

-무섭다, 무섭다! 

태식이는 또 무엇을 떠올렸는지 기겁을 하며 무섭다를 련발했다.

-나도 처음 봤다. 

-안 무서웠어요?

-허허… 

마침 일요일이여서 집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 있었다. 

태식이가 달구지에서 놀란 토끼처럼 뛰여내려 어머니 품에 안기면서 와- 운다. 따창과 개털모자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태식이와 나의 책가방을 들고 죄진 놈처럼 머리를 푹 떨군 채 달구지에서 내렸다. 

무슨 못된 짓을 하고 외할머니께 쫓겨난 게 틀림없다고 하면서 사나운 눈길로 쏘아보는 아버지에게 외할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녀자 얼굴 왜 그렇게 망가졌답니까?

-글쎄 난들 어떻게 알겠나. 

-애들 무척 놀랐겠어요. 그 녀자 마을에 온 지도 10년 넘었다면서요?

-원자탄이 터져서 숱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난 해에 왔으니까 45년 광복되는 해일 거다. 

-그럼 15년 쯤 됐겠습니다. 그런데 여태 그런 몰골인 걸 다들 몰랐단 말입니까?

-자네 가시에민(장모) 안 것 같네만…

-엄마는 알고 있었단 말이예요. 

-그 녀자 참 이상합니다. 어데서 온 녀자랍니까? 

-글쎄, 알 턱 있나. 마을에 와서 장일민이라는 사람을 찾기만 하다가 없으니 어데 갈 데 없다면서 눌러앉은 게 여태…

-장일민이라고 누굴가요? 

-그 마을에 장씨 성 많잖습니까? 

-많지. 그런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혹시 부대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장일룡이 아닐가요. 그 렬사증이 내려온 장철순의 큰아버지… 

-그 사람은 43년도에 죽었다고 그러더라. 소부대가 연변에 들어올 때 따라들어왔다가 저 매지허리(산이름)에서 일본놈들과 싸우다가 총에 맞아… 

-옛날 혁명자들이야 가명을 많이 썼다고 그러던데… 

-그 녀자가 찾는 사람이 장일룡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합니다. 그 녀자가 하필 혁명자를 왜 찾을가요. 

-혹, 그 영화에서 나오는 지하당… 가명으로만 련락이 가능했던 지하당이 아니였을가요? 

-단선련락이 끊기자 더는 자신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게 되여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안타까운 그런 사람 말이요? 

-글쎄 말임다. 그러다가 포로되여 731부대에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했거나 일본에 끌려갔다가 불행하게도 원자탄이 쾅 하는 바람에…

-니들 소설을 쓰는구나. 소설을… 

이것은 그 날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외할아버지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얘기들이다. 

 

9.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후론 우린 다시는 외가집으로 가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서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 해 겨울방학 외가집에서 일을 저지르고 온 며칠 후 영자아지미가 죽었다고 한다. 그 소식도 퍽 후에야 알았다. 그런데 그 죽음 역시 신비하기만 했다. 영자아지미의 시신이 마을 밖에 세워져있는 혁명렬사비 앞에서 발견된 것이다. 쓰러져서 육신을 까딱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그녀가 어떻게 그 먼 렬사비 있는 데까지 갔댔는지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였다. 그 렬사비는 외가마을의 혁명렬사들을 기념하여 세운 것인데 비문에는 장일룡을 비롯한 몇몇 장씨 성의 렬사들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찾으려고 하는 장일민을 발견하고저 한 것이였을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나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흉물스러운 얼굴, 그 악마의 부르짖음, 그 귀신의 허우적거림… 꿈결에도 소스라쳐 깨여나게 하는 그 무섭고 흉한 꼴, 그것은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되여 여태껏 나를 따라왔다. 그 검은 그림자는 또 갈퀴 같은 물음표가 되여 나의 상상력을 불러주기도 했다. 

그녀가 찾는 장일민은 누구일가? 그녀는 과연 누구일가? 외가마을 공동묘지의 잡초 속에 파묻혀있는 그녀는 내 가슴 속에 이상한 빛이 되여 지금도 새하얀 공간에서 까맣게 반짝이고 있다. 

그건 검은빛이다. 

등불과 해빛을 질색해하는, 아니 그것에 공포를 느끼는 검은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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