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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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황성옛터 성자산산성(김철호)
2008년 09월 01일 15시 55분  조회:2637  추천:40  작성자: 김철호
사진설명
1) 성자산산성원경
2) 서쪽 해발 390메터 봉우리의 성자산 성벽앞에서의 필자.
3) 산성리촌 김흥룡로인이 밭에서 주었다는 옛날 동전을 구경하고있는 답사팀.
3) 깅흥룡로인이 산성안에서 파왔다는 방아확이 바자굽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 있다.

-2천년 문명 묻힌 력사의 현장

연길에서 동으로 10킬로메터쯤 가면 연길시기름창고(油庫)가 있는데 그 뒤산이 유명한 성자산(城子山)이다. 맞은켠의 하룡촌 높은 산정에서 바라보면 성자산을 둘러싸고있는 성터자리가 한눈에 뚜렷이 안겨온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성자산은 말발굽처럼 생긴 하나의 커다란 옹성(瓮城)이다. 어찌보면 예쁜 연꽃같기도 하다. 아무튼 중간이 움푹 패이고 주위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이 산은 그 옛날 천연적인 군사요새였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거기에다 둘레의 길이가 4454메터나 되는 높직한 성벽까지 쌓아겠으니 철옹성이 아닐수 없다. 들쑹날쑹한 산등성이를 타고 뻗어간 성터자리를 따라 한바퀴 돌자면 좋이 반나절은 걸릴것이다. 동쪽과 북쪽에는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에는 개울이 있다. 두 줄기의 개울은 산성을 3개의 덕땅으로 갈라놓았다. 산성의 동쪽, 북쪽, 서쪽, 동남쪽에는 각기 성문자리가 하나씩 있고 동쪽, 북쪽, 서쪽의 성문자리에는 옹성(瓮城)이 수축되였으며 동쪽과 북쪽의 성문은 골짜기어구에 나있어 주요한 통로였을것이다. 북문내 근처에는 망대가 있는데 성밖을 살피는 군사시설이였을것이다.

선조들의 체온 담긴 성벽

서쪽의 해발 390메터의 봉우리가 성자산의 주봉이다. 여기에서 서쪽을 바라고 보면 연길분지를 가르면서 유유히 굽이쳐흐르는 부르하통하가 한눈에 안겨온다. 남쪽으로는 하룡촌이 굽어보이는데 해란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부르하통하와 손자고 곧바로 성자산을 감돌아흐른다. 모아산, 마반산도 한눈에 안겨든다. 모아산이나 마반산에에는 발해시기 봉화대유적지가 있다. 빤히 내려다보이는 남쪽에는 연성고성, 하룡고성이 있고 서쪽에는 소영고성, 북대고성 같은 발해시기의 옛성터들이 성자산을 에워싸고있다.
얼마전 성자산 맞은켠의 하룡산을 탑사한적 있다. 봉우리마다에 봉화대가 구축되여 있었으며 봉화대와 봉화대사이에 군사도로가 뻗어있었다. 성자산북쪽에 홀로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있는데 산봉우리 정상에 오르면 20평방메터 남짓한 자그마한 늪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늪은 왕이 목욕하던곳이라 한다. 늪 한쪽을 막은 둔덕같은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인공적으로 만든 늪으로 보였다.
성자산산성 서문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곳에 비교적 완벽히 남아있는 성벽유적이 있다. 수공으로 다듬은 네모반듯한 장방형석재로 쌓은 성벽은 아직도 견고하게 다져져있는데 어떤 곳은 손을 뻗쳐도 우가 닿지 않을 정도로 높다. 성벽을 만지노라면 선조들의 체온이 금방 느껴지는것 같아 저도모르게 감개무량해 진다.
기원 3세기때의 중국의 학자 진수가 지은 <<3국지>>에 따르면 두만강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북옥저라는 민족이 살았는데 그들은 일찍부터 고구려세족의 통치하에 있었고 기원 98년에는 고구려 태조왕이 성자산성을 시찰, 성자산성은 고구려의 책성부(柵城部, 지금의 성급이상 행정소재지)였다고 한다. 기원 224년에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에 쫓겨 북옥저로 도망쳐왔고 285년에는 부여왕실까지 옮겨왔다고 한다. 성자산산성은 668년 고구려멸망까지 고구려동북부의 중요한 진(鎭)이였다. 고구려멸망후 30년이 지난 기원 698년 발해가 고구려 동북쪽의 고토를 회복하면서 성자산산성은 자연스럽게 발해의 판도에 들게 되었다. 성자산산성은 발해시기에도 계속하여 책성으로 불리웠는데 <<책성의 메주(柵城之 )>>는 중원에까지 알려졌다.

밭엔 아직도 기와쪼각들이

발해가 926년 거란족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성자산산성은 발해시기의 중요한 진이였을것이다. 거란인이 세운 료를 앞지르고 녀진인들의 금나라가 동북과 중원을 석권하던 말기에 금나라의 료동선무사로 있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1214년 금나라를 배반하고 동하국(東夏國)을 세웠다. 포선만노는 1916년 수도를 성자산산성에 옳기고 16년간 동하국을 영위하다가 1233년 몽골군에 의해 멸망되였다. 그러니 성자산은 명실공히 황성옛터임이 틀림없다.
성안에 있는 거주지의 유적은 이미 넓다란 밭으로 변해버렸으나 여기저기에 기초돌들이 널려있다. 무시로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있는 고구려와 발해시기의 기와며 질그릇쪼각들이 발길에 채여 손쉽게 그런것들을 주을수도 있다.
성내의 중부 덕땅우에는 궁전자리가 있는데 궁전의 기초는 계단식으로 되었고 모두 9개 계단가운데서 6개 계단이 비교적 잘 알리며 그곳에는 초석이 줄지어있다. 토기쪼각들도 더 많이 널려있다. 밭이며 숲에 널려있는 토기파편만 보아도 당년의 위용과 호화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성내 주변의 언덕과 3개의 덕땅우에도 기와쪼각과 질그릇쪼각이 널려있는데 주로 고구려, 발해, 료, 금 시기에 속하는 유물이다.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량으로 보면 료, 금 시기의 것이 비교적 많다고 한다.
발해시기 기와들의 안쪽에는 거의 모두 삼베무늬가 나있는데 이긴 흙을 기와모형에 쳐넣기전에 모형밑바닥에 삼베를 한겹씩 폈기때문이란다. 이러한 삼베무늬를 통해서도 당시 발해의 수공업의 일단을 가늠할수 있을것 같았다.
토기파편외에도 산성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중국화페사에서 제일 일찍한 돈의 하나인 당나라 개원통보를 비롯한 송나라, 금나라, 조선의 숙종대왕때의 송편통보 등 10여종의 동전과 구리거울, 금가락지, 목걸이, 고려솥, 활촉, 말등자 그리고 <<남경로구당공사지인(南京路勾當公事之印)>>, <<병마안무사지인(兵馬按撫事之印)>>, <<구당공사지인(勾當公事之印)>> 같은 동하국시기의 귀중한 구리도장도 발견되였다. 이런것들은 지금 연변력사박물관에 보관되여있다.

고풍스러운 기와집

작은 실개천이 돌돌 흐르는 동남쪽골짜기의 두 산사이의 트인곳이 옹성(瓮城)자리였고 그 어구에 성자산산성석패가 세워져있는데 정면에 이렇게 새겨져있다.

길림성문화유물단위
성자산산성
길림성인민정부 1961년 4월 13일 공포
도문시인민정부세움


기념석패가 세워진 곳에서 조금 내려오면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의 산성리(山城里)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유달리 고풍스럽게 보이는 기와집 한채가 있다. 몇십년전 리봉학이라는 로인이 산성안의 궁전터에서 밭을 일구다가 기와무지를 발견하였다. 일밭에서 돌아올 때마다 한번에 열댓장씩 3년동안 부지런히 지게로 지어날랐더니 륙간기와집에 얹을 기와가 모여졌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지은 기와집이 이 고풍스러운 기와집이였다.
나무토막을 놓고 기와 한 장을 뽑아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기와장 안쪽에 찍혀져있는 삼베무늬가 똑똑히 알렸다. 틀림없이 발해시기 기와였다. 지금부터 천년가까운 발해국시절의 기와를 몇천장씩이나 이고 서있는 기와집은 귀중한 문화재가 아닐수 없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아는것 같지가 않았다.
김흥룡이라고 부르는 농민의 집에 산성안에서 파온 방아확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보니 과연 바자굽에 방아확이 놓여있었다. 이런 방아확은 마을에 여러개 있다고 한다. 모두다 옛날 유물들인데 아무렇게 방치되여 있었다.
김로인은 옛것에 흥미를 느끼는 우리들을 보고 옛동전 몇잎을 내놓았다. 모두가 산성안의 밭에서 일하다 주은것들이라고 했다. 이전에는 이런 동전을 달라고 하면 공으로 주거나 5, 6원 주면 몇잎 살수 있었다고 하는데 김로인은 한잎에 50원 아니면 안판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의 아무개는 작년에 금귀걸이 한짝을 주은 것을 팔았고 또 누구는 금비녀, 금가락지를 주었댔다고 자랑삼아 말하는것이였다.
우리가 걸터앉아있는 주춧돌이 산성돌같아보여서 물었더니 바로 그렇다고 떳떳이 대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이 마을의 적잖은 집들의 집기초는 산성의 성벽을 허물어다 다진거라고 로인은 슴슴히 말하는것이였다. 과연 가까운 몇집을 돌아보니 산성돌이 틀림없어보였다. 집기초뿐만아니라 토성이거나 돼지우리, 변소기초까지 산성돌로 쌓은것이 있었다.
잘 개발하기만 하면 연변의 관광명소로 될수도 있을 력사가 숨쉬는 옛성터가 이렇게 방치되여 있는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서 2천년되는 문명을 쌓고 지키고 하면서 력사의 사연을 품은채 침묵하고있는 성자산유적지를 떠나는 발걸음은 하냥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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