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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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호태왕비(김철호)
2008년 09월 25일 10시 14분  조회:1848  추천:24  작성자: 김철호

                                       


                                        (사진은 1998년에 찍은 호태왕비이다.)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5

 

ㅡ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6.39메터의 거대석

 

우뚝 솟은 웅장한 기세와 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호태왕비을 바라보노라면 우선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집안시 태왕향 태왕촌에 세워져있는 호태왕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부왕 담덤(淡德) 즉 호태왕의 공로와 수묘인의 관리제도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호태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인데 호는 령락태왕, 시호는 국강상관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작고하기까지 22년간 64개의 성과 14백개의 촌락을 정복하면서 서북으로 료하를 넘어 료서지방을 공략하고 북으로 잔존촌락을 모두다 통합하였다. 남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한강계선의 백제령토를 점령하였다. 한편 동남으로 신라를 위압하여 또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락동강하루지방의 가야족에 침입해온 왜족을 격퇴시키면서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떨친 고구려에서의 가장 걸출한 국왕이다.

비석은 높이 6.39메터, 각면의 너비 1.32메터 사이이고 중량이 37톤이나 되는 하나의 방추체자연형모양의 회색 응회암(凝灰岩)의 화산석을 조금 다듬어서 만든것이다. 석좌(石座) 역시 거대한 화강석으로 다져졌는데 보매 원래는 한덩이였댔으나 어떤 원인으로 깨여져 지금은 세쪽으로 되였지만 의연히 땅에 단단히 배겨있으면서 비석을 굳게 받들고있었다.

호태왕비의 석재는 모래구성이 있는 응회암으로서 이런 종류의 석재는 오직 화산구부근에서만 발견되는 돌이다. 집안경내에서는 이와 같은 돌이 나는곳이 없다. 그러니 가능하게 백두산천지주위에서 채굴하여 옮겨온것으로 사료된다. 머리속에 거대석재를 운반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보아도 저절로 혀가 차진다. 애급의 금자탑을 세우는 그 장면과 뭐가 다를바가 있겠는가. 37톤이나 되는 거석을 들어 올릴수 있는 설비도 없었던 그 시기에 이 돌을 어떻게 세웠으며 무슨 수로 1580여년의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끄떡 않게끔 고정해놓았을가. 그리고 사면 석면에는 어떻게 글을 새겼고

비석은 1면에 11, 2면에 10, 3면에 14, 4면에 9줄 이렇게 모두 44줄의 글자를 새겨넣었는데 한줄에 41자가 새겨져 1804자가 되겠으나 결자가 생겨 실제로는 1775자이다. 줄과 줄사이에는 세로로 칸을 나누어 선을 그었으며 좌로부터 우의 순서에 따라 정방형으로 조각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손만큼 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울 때 북부여에서 왔노라. 그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였노라. 알을 깨고 출생하매 원래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노라…(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子有聖德…) 이렇게 고구려의 건국신화로터 서술되여있는 비석에는 왕위의 계승과 전쟁업적, 조상의 묘를 지키고 생계를 유지하는 당시의 당부까지 까근히 기록되여있어 그야말로 고구려력사를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가 아닐수 없다.

15세기 좌우, 조선의 사람들은 압록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면서 거대석을 금나라 황제의 묘비가 아닐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0년에 와서야 당지 채벌농민들에 의해 이끼가 차고 넝쿨이 덮인 선돌로 발견되여 소문이 났는데 청나라 화인현 현지사 아래에서 일하는 관원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사람에 의해 깊이가 파지게 된다. 관월산은 돌에 이끼를 뜯다가 뜻밖에도 글이 새겨져있는것을 발견하고 미칠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탁본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끼가 덮여 도무지 되지 않아 겨우 뜯어낸곳에서부터 몇글자를 탁본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탁본한것을 친구들께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우분, 마분을 바르고 마른후 불을 달아 이끼를 없애고 탁본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불에 달구어지면서 돌이 튀는 바람에 귀중한 몇글자를 손상받게 되였다. 찬찬히 바라보니 불에 튄것 같은 자리와 금이 선곳이 보였다.

우리의 안내를 맡은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는 호태왕비의 서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호태왕비의 서법은 소박하고 무게가 있으며 웅위롭고 대범하며 안정된 산과 같이 드맄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호방하다.

호태왕비건립년대는 기원 414, 바로 중국의 동진시대로서 진나라 황실이 남하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로인해 중원지구가 계속 전화를 겪고 황실이 흔들리자 혼란한 틈을

구려가
지역에서 신흥력량을 이루었다. 고구려정권이 형성된후  무력이 끊임없이 증강되고 령토 역시 부단히 확대되여 직접 황실까지 위협하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에 많은 군사를 파하여 토벌과 진압을 단행했으나 이러한 전쟁은 오히려 고구려로 하여금 더욱더 정치경제의 높은 봉우리로 밀어올려주었을뿐이였다. 전쟁은 중원의 서법예술을 북방에 전달하는 역활을 하여 고구려민족의 기질과 상호 융합되게 한것이다.

호태왕비는 고구려의 형성과 발전의 력사를 탐색하는데 극히 중대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자료보고(寶庫)이며 고구려민족의 지혜가 슴배인 건축예술의 명주이다. 호태왕비는 압록강 푸른물을 바라보면서 고구려의 유풍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념비로 솟아 세인들을 불러들일것이다.

우리들은 경탄의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호태왕비를 우러러 크게 머리를 숙였다.

 

연변일보 1999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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