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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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고운행 100만킬로메터
2012년 11월 27일 16시 19분  조회:2350  추천:0  작성자: 김명록
무사고운행 100만킬로메터
- 연길시려객운수공사 뻐스운전수 김청금에 대한 이야기


100만킬로메터 무사고운행! 이것은 연길시려객운수공사의 련결뻐스 운전수 김청금동무가 29년간 조국과 인민에게 충성을 고스란히 몰부어 온 자랑찬 기록이다.

1
1950년부터 자동차핸들을 잡은 김청금동무는 가렬처절한 조선전쟁터에서,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우는 청장고원에서, 연변의 변강산촌에서 시간과 경주하며 급행차를 몰아왔다. 그가 달린 길은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낮설었고 그가 다룬 자동차는 쏘련제, 미국제, 일본제, 국산제로 무려 10여형종으로 바뀌웠다. 그러나 청금이에게 있어 “안전운행!” 이 네글자만은 언제 어데서 어떤 급선무를 집행하든지를 물론하고 변함없이 심장에 새겨졌고 뇌리의 판박이로 되였다. 그는 안전운행을 위하여 오관의 감각을 강구었고 안전운행을 위하여 심혈을 쏟아부었다.

“다이야가 구을기 시작하면 교통사고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운전수는 자신의 일거일동이 인민의 생명안전 및 나라의 물질재부창조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여 있다는것을 한시각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말은 청금이가 운전실에 처음 오르면서 다진 맹세인데 청춘시절부터 운전실에서 머리가 세도록 이 맹세를 점점 더 굳혀 왔다.

그가 연길시운수공사에 온지 2년이 되던 1960년 섣달 어느날이였다. 그는 왕청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뒤바퀴스프링천장이 끊어진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조심히 차를 몰고 오다나니 밤 여덟시가 넘었었다. 공사에 돌아오니 수리공들은 이미 다 퇴근하고 없었다. 뒤바퀴스프링을 혼자서 바꿔넣기는 너무 힘겨웠고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튿날 삼도만으로 목재실으러 제때에 갈수 없었다. 이튿날의 운수임무와 안전운행을 위하여 혼자서라도 수리해야겠다고 작심한 그는 자기가 여벌로 두었던 낡은 스프링을 가져다 바꿔넣기 시작하였다. 이때 청금의 집에서는 저녁밥상이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시정기를 쫒으며 청금이는 수리를 다그치고있었다. 이때 당직원이 다가와 늦었는데 래일 아침에 수리하라고 권하자 청금이는 웃으면서 “이미 고장난 곳을 발견한 이상 손질하지 않고서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별들은 졸고있고 민가의 등불은 꺼진지도 이슥하건만 청금이는 차밑에다 헌 마대를 깔고 반듯이 누워 손전지를 입에다 물고 나사를 조이였다. 뼈를 에이는듯한 설한풍도 심장속을 속속 들이파고드는 랭기도 안전운행을 위하여 고생도 피로도 두려워하지 않는 청금의 피끓는 심장만은 식힐수 없었다. 이와 같이 그는 검사가 끝나지않고서는 손을 떼지 않고 수리가 끝나지 않고서는 차에서 물러서지 않는 자아규정을 세우고 이 규정을 신조처럼 지켜왔다.

조직에서는 원래 화물차를 몰던 그에게 뻐스를 맡겼다. 이때 그는 미국놈들의 폭격에 다섯발가락을 잃은 오른발이 걱정되였고 또한 다른 사심잡념도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조직의 수요이고 당의 부름이라고 생각했을 때 두말없이 복종했다.

뻐스를 몰면서부터 그의 책임성은 한결 더 강해졌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차를 세심히 검사했으며 시험해보고서야 발차하군 하였다. 퇴근하여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는 래일 지나야 할 로정을 그려보았다. 고개는 몇이나 되고 굽이돌이는 몇곳이나 되며 위험한 구간은 몇곳이나 되는가를!

청금동무는 교통경찰이 없는 산골에서도 교통지휘패말을 교통경찰로 간주하고 그 패말의 “지휘”대로 고스란히 복종하였다.

1971년 겨울에 툰전으로 갈 때의 일이다. 탄광을 지나면 가파롭고 좁은 올리막길인데 그날따라 눈이 와서 대단히 미끄러웠다. (행여나 굽인돌이로 내려오는 차가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오른쪽으로 비켜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하였다. 과연 의심골에 범이 있다고 해방패자동차 한대가 쏜살같이 내려오는것이였다. 그 차는 청금의 차앞에서 제동하였지만 길이 미끄러워 차는 멈춰서지 못하고 그냥 내리밀리웠다. 차가 금시 부딪칠 아슬한 찰나에 청금이는 제꺽 오른발로 제동기를 디디고 오른손으로 날래게 단을 꺾어 뒤걸음쳤다. 약 2-3메터의 간격을 두고 얼마 내려오면 청금이도 그만큼 후퇴했고 빨리 미끌면 청금이도 빨리 뒤걸음 쳤다. 뻐스에 않은 손님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였다. 그런데 자동차는 멈추어설줄 모르고 계속 미끌어 내려오기만 했다. 청금이는 평생에 배웠던 재간을 다 피워 계속 후퇴하였다. 청금이의 차가 이제 조금만 더 뒤걸음질하면 벼랑에 떨어질 위기에 다행히도 미끄러져 내려오던 자동차가 청금의 뻐스앞에서 드디어 멈추어섰다. 해방패자동차운전수는 땀을 훔치면서 청금의 손을 뜨겁게 잡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렇게 청금동무는 늘 안전을 념두에 두고 경각성을 높였으며 항상 자신의 몸에서 불안전인소를 찾아 그렇게 즐기던 술과 담배마저도 떼버렸다.

2
“자동차는 운전수에게 있어서 병사의 무기와도 같다. 하기에 운전수는 차를 자기의 눈동자처럼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이는 청금동무가 늘 하는 말이다.

그는 출근해서 절대 한가히 보내지 않는다. 철판도 두드려보고 손잡이도 흔들어보며 나사도 조이고 유리도 닦으며 손이 쉴새 없다. 그는 운전수로서 차를 잘 보양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때 기계사고를 빚어낼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3-4일에 한번씩 각 부위에 기름을 치고 주기적으로 꼭꼭 휘발유통에서 물을 뽑아내군 하였다. 만약 운행도중이라도 차에 이상한 기미가 있기만 하면 즉시 멈춰세워 검사를 하고 손질했으며 차가 내리막길에 들어설 때는 우선 제동기를 밟아 시험해보고서야 내려가군 했다.
한번은 룡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아산에서 제동기를 습관적으로 밟아보니 기압계기가 3킬로그람 아래로 내려갔었다. 그는 즉시 차를 세운 다음 차밑에 기여들어가서 흙과 먼지를 닦아내고 자세히 검사해보니 총뽐프의 이은 곳이 동강났던것이다. 그는 제꺽 손질하여 순리롭게 내려왔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 조금만 류의하지 않으면 차에 않은 손님들을 들볶아 놓게 되고 조금만 빨리 몰면 키질하듯 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청금동무는 손님들의 고통을 먼저 생각했고 차가 손상되는것을 가슴아파 하였다.

금년 3월초, 그는 룡정으로 통하는 신작로의 한 곳이 패여 차들이 그곳에 와서는 속도를 늦추는것을 발견했다. 이런 정황을 목격한 그는 여러가지 생각에 휩싸이게 되였다. (본체만체하겠는가? 그것은 안된다.) 자기가 수리하자고 보니 또 남들이 어떻게 볼지 주저심도 들었다. 이때 그는 자기가 당기앞에서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종신토록 분투하겠다고 장엄히 선서하던 정경이 선히 떠올랐다. 그래 남들이 비웃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공산당원이라 할수 있겠는가? 이 길로 하루에도 몇백대의 차들이 오가는데 다이야가 닳고 휘발유가 소모되고 또 저마다 시간을 지체하게 되니 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예까지 생각한 그는 자기가 직접 파손된 길을 수리하리라 결심하였다. 하여 그는 퇴근후 석탄재를 싣고 패인 곳을 찾아 달렸다. 그곳에 이르자 그는 웃옷을 벗어던지고 부지런히 삽질하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자 봄철의 날씨는 싸늘했다. 하루의 운행으로도 피로한데 이런 로동까지 겸하니 허기증이 났다. 그의 몸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그의 붉은 마음과 함께 석탄재에 스며들었다.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녹초가 되여 밥술을 쥘 생각조차 없었다. 이윽고 영문을 알게 된 그의 안해는 “차나 몰면 됐지요. 공연히 고생을 찾아할게 뭐얘요? 혁명을 당신혼자 하나요?”라고 핀잔하였다. 하기야 그러했다. 운전수가 차만 몬들 누가 뭐라하랴? 더우기 양로단도 있는데. 허지만 안전운행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생도 달갑게 여기는 김청금이라 안해의 말이 떨어지자 대뜸 정색해 하면서 “자동차가 공로를 떠난다면 고기가 물을 떠난것과 같소. 그래 자기가 늘 다니는 길이 파손된걸 보고도 못본체 하고 내버려둔다는게 말이나 되오?”라고 엄숙히 말했다. 김청금은 그후 서너축이나 퇴근후 시간을 타서 석탄재를 싣고 가서는 파손된 길에다 펴놓았다. 하여 마침내 길은 평탄하여졌다. 이곳에서 더는 지체되지 않고 줄달음칠수 있게 된 운전수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청금의 수리도”라고 우스개를 피웠다.

3
두살에 아버지를 잃고 네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손에 끌리여 동냥살이로 커온 청금동무는 항상 행인들의 처지에서, 농민들의 립장에 서서 운행규률을 힘써 모색하였으며 장악하였다. 정신병자와 술취한 사람을 만났을 때, 겨울에 방한모를 눌러쓴 사람이거나 비오는 날에 우산을 받쳐든 사람을 만났을 때 그 경우의 여하를 물론하고 항상 경적을 울리며 저속으로 달리는 한편 수시로 제동자세를 갖추며 차나 사람을 만났을 때 지날수 있다고 짐작되여도 명심해서 경적을 울려야 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을 만났을 때 우선 그 사람이 재간이 어떠한가를 헤아리며 속도를 조절하였다.

청금동무의 조심성은 결코 여기에만 그친것이 아니다. 마을 부근에 이르면 닭과 오리가 자주 나타난다. 처음에 닭무리를 만났을 때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때 청금동무는 일반적으로 닭을 쫒을 때 “쉬,쉬”하므로 제동할 때 나는 “쉭-”소리를 내였더니 닭들이 분분히 달아나는것이였다. 그로부터 그는 가축가금의 생활습성을 눈박아 관찰하여 행동규률까지 포착하였다. 돼지는 뒤걸음질하기 싫어하는 짐승이기에 돼지가 길을 건너갈 때 앞쪽길이 넓어도 뒤쪽길을 택하여 지나가야 하며 길가에 누운 개의 옆을 지날 때는 무턱대고 넓은 쪽을 택할것이 아니라 궁둥이쪽으로 몰아야 하며 소나 말처럼 눈이 량쪽으로 두드러져 나온 짐승이 길복판에서 뛸 때는 절때 복판에서 쫒을것이 아니라 한쪽옆에서 쫒아야 비켜선다는것도 알아내였다.

김청금동무가 해마다 국가운수임무를 넘쳐 완수하고 해마다 선진생산자로 평의받으면서 100만길로메터의 무사고운행을 담보해온 빛나는 로정에는 일편단심 조국과 인민을 위한 그의 붉은 마음과 안전제일을 위하여 분투해온 신근한 노력이 깃들어 있는것이다.
이처럼 청금동무는 마침내 전 주 교통전선의 무사고운행표병, 길림성 교통안전표병이란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연변일보≫ 1978.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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