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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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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40
2015년 02월 11일 12시 14분  조회:2536  추천:1  작성자: 죽림

 

391□뿔□신경림, 창비시선 215, 창작과비평사, 2002

  기량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신경림 시 세계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모든 언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곳을 향해 집중하고 있고, 그 언어들이 싣고 가는 생각이 분명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무엇을 노래해야 할지 분명히 알고 쓴 시들이다. 그러나 체험의 과거세계는 꿈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회고조의 시가 갖는 한계는 미래의 세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전망을 잃기 쉽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 값하고 맞물리면 더더욱 그렇다.

  이 시집에서는 그 전 시집과 다른 것이 두 가지가 보인다. 문장부호와 한자가 그것이다. 그 전의 시집들을 보면 거의가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사용하더라도 극히 제한된 시들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는 첫 부분부터 아주 분명하게 마침표와 쉼표를 사용하고 있다. 앞부분의 시들은 도치법을 많이 쓰고 있는데, 그 때문에 의미의 맥락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뒤로 가면서 어떤 시에서는 마침표가 있고 또 없기도 하다. 다른 시집에 비해 문장부호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나마 일정하지도 않다. 이것은 시인이 문장부호에 대해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신경림 같은 대가급 시인이 문장부호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문장부호 역시 닿소리나 홀소리와도 같이 엄연히 우리 말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될수록 정확히 써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말 체계에서 문장부호를 굳이 빼야 할 만큼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많은 시인들이 이 점을 소홀히 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한자이다. 이 시집에서는 한자가 액면 그대로 나타난다. 괄호로 처리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한자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이 점 역시 앞의 문장부호와 마찬가지로 신경림 같은 대가급 시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자는 현재 우리말의 체계에서 외국어에 속한다. 아무리 우리가 오랜 세월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 없이 살기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국가에서 공인하는 어법체계가 있는 것이고 굳이 그 체계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 원칙대로 써주는 것이 글을 갈고 다듬어야 하는 시인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이다. 한자는 우리말 체계에서 외국어이다. 그것도 제2 외국어이다. 그러므로 굳이 써야 할 상황이 온다면 괄호로 처리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게다가 한자는 지배층의 논리를 강화하는데 기여해왔고 지금도 지배층의 배를 불리는 역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런 문자를 시인들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 참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4337. 2. 1.]

 

392□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고운기, 창비시선 208, 창작과비평사, 2001

  시에 꿈이 사라졌다. 비단 이 시집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4년으로 접어드는 현재 시점에서 400권 가까운 시집을 읽었지만, 그 많은 시집 속에는 꿈이 없고, 안타까운 과거에 대한 회상과 한 개인의 무력감이 난무한다. 이 시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허무감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신경림의 시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이가 들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그런 시들이다. 그러나 시는 나이하고는 상관없는 양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10대의 예민한 감수성을 담는 것이 시이다. 10대는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 몸부림은 꿈 때문에 오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요즘 시집들에서는 그런 꿈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시가 벌써 겉늙었다는 얘기다. 이 시집은 늙은이가 쓴 시집이다. 꿈이 없으면 늙은이이다. 많은 시집이 늙어버렸고, 그 늙음이 현재 한국 시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버리지 못한 한자에서는 학력의 냄새가 난다.★★☆☆☆[4337. 2. 2.]

 

393□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강신애, 창비시선 217, 창작과비평사, 2002

  이미지들끼리 엮어 가는 구조의 튼튼함이 돋보인다. 이미지에 대한 오랜 수련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쓰기 어려운 그런 시들이다. 그런 튼튼한 구조를 만드는 시작법은 규모가 큰 작품에 어울리는데, 지금 여기서 노래하는 세계는 극히 사사로운 공간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좀 아쉽다. 시를 쓸 때 이미지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주제가 흐릿해지는 수가 많다. 생활에서 얻은 선명한 이미지들을 사용하려고 하고, 애써 얻은 이미지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생각을 그것으로 대치하려는 욕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제에 비해 표현이 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비율의 균형을 맞추기 쉽지 않다. 그래서 할 말을 직접 말해버리는 과감한 태도도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시가 건조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한자도 눈에 거슬리는 부호다.★★☆☆☆[4337. 2. 2.]

 

394□붉은 밭□최정례, 창비시선 210, 창작과비평사, 2001

  하고자 하는 말을 묘사로 대신하는 방법은 시 창작법의 고전에 해당하고, 이 시들은 그런 방법에 아주 충실하다. 그리고 대신하는 그 거리를 멀리 띄워서 독자들이 긴장하게 만드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방법들이 독자를 끌어들이려면 문명과 계층의 동일한 지층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건드려야 한다. 단순히 그런 기법을 배워서 자신의 사사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애써 터득한 그 기술로 파헤친 성과에 대한 보람을 얻기 힘들뿐더러, 적절치 못한 그 방향이 만드는 방법상의 난해성 때문에 결국 독자들이 시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표현의 수법이 어려운 만큼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성과에 만족하는 성취감을 탓할 필요는 없겠으나, 태산명동에 서일필의 운명을 벗어나기 힘든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시키는 능력이나 작은 것을 잡아서 큰 것을 말하는 능력은 감탄할 만하나 그렇게 해서 표현한 내용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눈을 조금만 더 바깥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귀족으로 사는 것을 말릴 일은 아니나 귀족 티를 내는 것은 남들 눈에 역겨워 보이는 법이다. 한자는 불필요한 치레이다.★★☆☆☆[4337. 2. 3.]

 

395□팽이는 서고 싶다□박영희, 창비시선 209, 창작과비평사, 2001

  회색분자들이 다 전향서를 쓰고 떠난 자리에서 아직도 존재의 팽이를 돌리고 있는 낡은 사람이 있어, 오히려 그 낡음이 광채를 내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창비에서 이런 시집을 내다니! 이게 어쩐 일인가? 전향하지 않는 것은 똑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람임을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눈물겨운 절규를 이 시대의 한 역설로 만든 창비 편집자들의 오만과 오판을 물어야 할 시집이다. 장난쳐 보니 재미들 있으신가?★★☆☆☆[4337. 2. 3.]

 

396□물 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박형준, 창비시선 216, 창작과비평사, 2002

  자신의 수사가 먹혀들면 자신감을 얻고서 상상력에 기대어 시를 쓴다. 그러면 시에는 이미지가 논리를 갖추게 되고 깨끗하게 복원되지만 상상력만 남고 느낌이 사라진다. 논리가 돌출된 시. 내가 지금 도달한 자리에서 보니 남들이 가고 있는 길이 엉뚱한 곳이라고 해서, 그들이 잘못 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나중에 그들이 도달한 자리가 내가 지금 그들을 보듯이 그들이 나를 볼 날이 곧 오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잘못 가고 있다고 해도 때로는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 아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면 안 된다. 스스로에게 좀더 겸손할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겸손은 천품이어서 갈 데까지 가게 된다. 끝내 버리지 못하는 한자처럼.★★☆☆☆[4337. 2. 3.]

 

397□거미□박성우, 창비시선 219, 창작과비평사, 2002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다. 사물을 보는 눈도 독특하지만, 그런 인식을 일정한 생각의 질서에 담아서 배열할 줄을 아는 시인이다. 대개는 말장난에 빠져들거나 그것을 그럴듯한 의미 속에 집어넣는 것이 대부분의 시인들이 하는 일인데, 자신의 체험과 인식을 어떻게 짜면 그것이 읽는 이의 세계에 깊은 울림을 주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시인이다. 그리고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긴장과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이 시인의 재목이 큼을 보여준다. 대단하다.

  다만 그런 표현과 발상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어떤 방향인지 좀 불분명한 것이 흠인데, 그 방향을 잘 설정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자신의 달팽이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 지금, 이 시집의 세계만 가지고는 큰 나무가 되기 어렵다. 좀 더 넓은 세계를 볼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시만 가지고는 안 되는 구석이 있다.★★★☆☆[4337. 2. 4.]

 

398□저 꽃이 불편하다□박영근, 창비시선 221, 창작과비평사, 2002

  좌절감이 너무 깊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하게 한다. 시대가 그러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몸부림쳐야 겨우 목숨을 보존하는 세상에서는 몸부림 자체가 희망이 될 수 있다. 그 몸부림의 자국이 열어주는 희망이 시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면 시대는 정말 깊은 골짜기까지 쑤셔 박힌 것이다. 이 시집에 의하면 세상은 그렇다. 자신의 생각 밖에 존재하는 그 어떤 세계를 좀 더 깊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생각이 시집을 덮으며 떠오른다. 몇 개 안 되는 한자는 끝내 청산할 수 없는 유산일까?★★☆☆☆[4337. 2. 4.]

 

399□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강형철, 창비시선 220, 창작과비평사, 2002

  생각이 좀 안이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 시집이다. 절실해서 쓴 것들이 별로 없다. 의무감 비슷한 태도로 쓴 것들이기에 기교도 그럴 듯하고 주제도 나름대로 다 담겨있지만 가슴을 후려치는 울림이 없다. 분노도 아니고 자성도 아니고 회고도 아니고 그냥 관찰이다. 주제의 범위와 발상의 긴장을 좀 더 팽팽하게 조여야 좋은 시가 나올 것이다. 한자는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구시대의 찌꺼기 아닌가?★★☆☆☆[4337. 2. 4.]

 

400□중독된 사랑□박서진, 문학아카데미 시선 128, 문학아카데미, 2000

  시가 지극히 단순한 양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시집이다. 일상의 아주 자잘한 감정과 발견들을 놓치지 않고 잘 엮어놓았다. 부담가지 않는 주제를 가벼운 터치로 건드려서 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가 단순한 양식이라고 해서 인식까지 단순해서는 안 된다. 삶의 배후에 도사린 어떤 손길들이나 정서를 깊이 천착하는 고민은 단순한 양식일수록 더욱 치열해야 한다. 그리고 주제가 사랑과 일상 두 가지로 갈라진 것도 이 시집의 약점이다.★★☆☆☆[4337.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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