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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국민시인 - 푸슈킨
2017년 05월 05일 00시 05분  조회:3953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799. 6. 6(구력 5. 26), 모스크바
사망 1837. 2. 10(구력 1. 29),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며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1814년 <베스트니크 예브로피>에 운문편지를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푸가초프 반란을 다룬 역사소설 <대위의 딸>과 그 반란을 역사적으로 검토한 <푸가초프 이야기> 등도 써냈다.

푸슈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푸슈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 이다.

개요

흔히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초기생애

푸슈킨의 아버지는 유서 깊은 대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아브람 하니발의 손녀였다.

집안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푸슈킨의 외증조부는 아비시니아의 어린 군주로 콘스탄티노플에 노예로 팔렸다가 표트르 대제의 양자가 되어 그의 전투 동료로 활약했다고 한다. 푸슈킨은 외증조부의 이야기를 미완의 역사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 Arap Petra Velikogo〉(1837 출판)으로 옮겼다. 19세기초의 러시아 귀족가문에서 으레 그랬듯이 그의 부모도 프랑스 문화를 받아들여 푸슈킨과 그의 형제자매들은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기를 배웠다. 그들은 주로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외할머니는 어린 푸슈킨에게 러시아어로 선조들의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한편 푸슈킨은 자유농노였던 늙은 유모 아리나 로디오노브나 야코블레바(〈예브게니 오네긴 Yevgeny Onegin〉에 타티야나의 유모로 형상화됨)로부터 러시아 민화를 들었으며, 여름이면 모스크바 근처의 할머니 영지에서 농부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홀로 시간을 보내는 조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였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종류의 책을 두루 섭렵했고 집으로 찾아오는 문필가들에게서 자극을 얻었다.

1811년 푸슈킨은 차르스코예셀로(나중에 푸슈킨으로 개칭됨)에 새로 생긴 귀족학교에 들어갔고, 재학중인 1814년 〈베스트니크 예브로피 Vestnik Evropy〉('유럽 통보')에 운문편지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초기에는 선배 낭만주의 시인인 K. N. 바튜슈코프와 V. A.주코프스키, 그리고 파르니 자작을 비롯한 17, 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귀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최초의 원숙한 걸작으로 꼽히는 낭만주의 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yudmila〉(1820 출판)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시풍은 아리오스토와 볼테르의 설화시 형식을 빌린 것이지만, 러시아 민화를 사용해 고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삼았다.

러시아 전통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을 모델로 한 인물 루슬란이 결혼한 날 밤에 사악한 마법사 체르노모르에게 납치당한 신부인 키예프 대공의 딸 류드밀라를 구하기까지 겪는 온갖 모험을 들려주는 내용이다. 이 시는 기존의 작법과 장르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의 주류이던 고전주의와 감상주의 작가들에게 모두 공격받았다. 그러나 푸슈킨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시인 주코프스키는 '패배한 스승으로부터 승리한 제자에게'라는 헌사를 적은 자신의 초상화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817년 푸슈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외무부의 한 관리직을 맡았다.

또한 친척 아저씨의 친구들이 설립한 배타적인 문학단체인 '아르자마스회' 회원으로 뽑혔으며 '녹색등협회'에도 가담했다. 이 협회는 문학과 역사 토론을 목적으로 1818년에 설립되었으나 데카브리스트 비밀결사 '복지동맹'의 비밀지부로 발전했다. 여기서 그는 필사본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된 정치시와 풍자시를 통해 훗날 초기에 진압된 러시아 혁명운동인 1825년 데카브리스트 봉기의 주역이 될 사람들의 이상과 염원을 대변했다.

남러시아 유배

이 정치시가 화근이 되어 그는 1820년 5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멀리 남러시아로 추방당했다.

가족들 및 1812년 전쟁의 영웅인 라예프스키 장군과 함께 처음에는 예카테리노슬라프(지금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보내졌으나 병에 걸렸다가 서서히 회복되자 북카프카스를 여행한 뒤 크림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서 받은 인상을 토대로 '남부 작품군'에 속하는 일련의 낭만적 이야기체 시 〈카프카스의 포로 Kavkazski plennik〉(1822)와 〈도적 형제 Bratya razboiniki〉(1821~22, 출판 1827),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ysky fontan〉(1821~23, 출판 1824) 등의 소재를 얻었다.

이 일련의 작품으로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작가로서 그의 명성을 확인받았고, 당시 러시아의 주도적인 시인으로서, 또 1820년대의 낭만적인 자유 애호 세대의 기수로서 갈채를 받았음에도 그 자신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823년 5월 그는 중요한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1833 출판)에 착수해 쉬엄쉬엄 작업한 끝에 1831년 완성했다.

여기에서 그는 당대의 전형적인 인물을 제시했으며, 더욱 광범위한 배경에 새로운 예술적 방법과 기교를 사용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의 삶을 파노라마식으로 펼쳐보인다. 삶에 환멸을 느끼는 회의론자 오네긴, 자유를 사랑하는 낭만주의자 렌스키, 애정이 넘쳐흐르는 러시아 여성의 이상형인 여주인공 타티야나 등 여기에 등장하는 불멸의 인물들은 모두 전형적인 러시아인으로, 그들을 빚어낸 사회 및 환경의 영향과의 관계 속에 그려진다. 작품 형식은 바이런의 〈돈 주안 Don Juan〉과 비슷하지만, 푸슈킨은 바이런의 주관적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객관적 서술방식을 채택해 자신의 주인공을 이국적인 환경이 아닌 러시아적 생활양식 한가운데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황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되어 한 시골 영지를 배경으로 계속되다가 모스크바를 거쳐 마지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가 전개된다.

한편 푸슈킨은 키시뇨프(1820~23)를 거쳐 오데사(1823~24)로 이송되었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계속되는 유형생활의 고통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 서한들을 모아 엮은 첫번째 출판물은 빼어난 러시아 산문을 보여주는 영원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몰도바의 변경인 키시뇨프에서 그는 사교계에 나가 애정행각·폭음·도박·싸움 등의 생활에 탐닉하면서도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오데사에서는 자신의 상관이자 그 지방의 현지사인 보론초프 백작의 아내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는 몇 번이나 결투를 치렀고 결국 보론초프 백작은 푸슈킨의 사면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친구에게 보낸 그의 편지 1통이 경찰의 손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순수한 무신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고 씌어 있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는 다시 프스코프 근처 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예로 유배되었다.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보낸 2년은 불행한 기간이었지만 가장 왕성한 창작 시기였다.

고립되고 외로운 생활 속에서 그는 러시아 역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영지 내의 농부들과 사귀고 민화와 민요 채록에 흥미를 가졌다. 이 시기 그의 시에서는 러시아다운 특성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발라드 〈신랑 Zhenikh〉(1825)은 러시아 민화에 모티프를 둔 것으로, 간결하고 빠르게 흐르는 시풍은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화려함, 사치스러움이나 황량한 비극을 강조한 '남부시'의 낭만성, 음악적 선율과는 확연히 다르다.

1824년 그는 '남부시'의 초기에 착수했던 〈집시 Tsygany〉(1827 출판)를 완성했다. 역시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중 시골을 배경으로 한 장과 시골 지주의 생활을 다룬 〈눌린 백작 Count Nulin〉(1825, 출판 1827), 그리고 주요작품인 역사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4~25, 출판 1831)를 썼다.

프랑스 고전주의 드라마와의 결별을 뜻하는 〈보리스 고두노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원칙', 특히 사극과 비극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민중을 위해' 씌어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녀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 작품이다.

데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에 쓴 이 작품은 차르를 수뇌로 하는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관계라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푸슈킨이 강조하는 것은 '민중의 심판'이 내포한 정치적·윤리적 의의이다. 17세기에 임박한 러시아의 사회적·정치적인 대혼란기를 배경으로 이반 뇌제(雷帝)의 총신 말류타 스쿠라토프의 사위인 위대한 영웅 보리스 고두노프의 비극적 죄과와 피할 길 없는 운명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아울러 이반 뇌제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의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제시한다. 정치적·역사적 측면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행위들이 파란만장한 사건과 잔인한 야망을 배경으로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희곡은 푸슈킨도 말했듯이 대담하고 자유롭게 등장인물을 다루고 있고, 박진감 넘치는 묘사와 간결함을 추구한 셰익스피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옛날에 읽었던 러시아 연대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비록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같은 고양된 시적 정열이 모자라긴 하지만 이 작품은 대화체 산문과 5음보 약강격 운문을 매우 유연하게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푸슈킨이 목표한 대로 '상황의 개연성과 대화의 자연스러움'이 뛰어나다.

왕위 요구자 가짜 드미트리는 예민하며 동정을 자아낼 만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결과적으로 이 등장인물을 왕위에 오르게 한 민중들의 힘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이 희곡은 검열에 걸려 출판이 지체되었다. 일화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심리적·극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푸슈킨의 능력과 절제된 언어, 세부 형상화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재능은 이 훌륭한 희곡을 러시아 드라마 역사에서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

유배지에서의 귀환

1825년 12월 14일(구력)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진압한 뒤 새로운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푸슈킨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데카브리스트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1826년 가을 그의 모스크바 귀환을 허락했다.

차르는 푸슈킨과 오래도록 얘기를 나눈 끝에 검열에 관한 시인의 불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푸슈킨의 검열관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위로부터의 몇 가지 출판개혁과 특히 농노해방을 준비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다. 심정적으로는 전적으로 '유죄'이며 데카브리스트에 동조하고 있던 푸슈킨에게는 봉기의 참패가 매우 쓰라린 경험이었다. 데카브리스트들 가운데 5명은 처형당했고 나머지 당원들은 시베리아 강제노동에 보내졌다. 그러나 푸슈킨은 민중의 지지 없이 전제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시골 Derevnya〉에서도 표현했다시피 '차르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여겼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18세기초 개혁의 시기에 끊임없는 관심을 쏟고 '교육자 황제'로 알려진 표트르 대제에 흥미를 가졌다. 〈시절(詩節) Stansy〉(1826), 〈표트르 대제의 흑인〉과 역사시 〈폴타바 Poltava〉(1828, 출판 1829)·〈청동기사 Medny vsadnik〉(1833, 출판 1837) 등을 통해 당시의 차르에게 모범을 제시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푸슈킨의 입장은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었다.

차르의 검열은 검열관들보다 더 혹독했고 그는 개인적 자유까지 제약받았다. 경찰로부터 비밀리에 감시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공공연히 경찰총감 벤켄도르프 백작의 관찰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이 시기 그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인정을 거의 받지 못했고, 몇몇 친구는 그의 변절을 비난하기까지 해 그는 〈벗에게 Druzyam〉(1828)라는 시를 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정당화해야 했다.

이 시절에 그가 체험한 정신적 소외의 고통은 시인과 군중에 관한 일련의 시(1827~30)와 미완성으로 남은 〈이집트의 밤 Egipetskiye nochi〉(1837 출판)에 반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푸슈킨의 천재성은 완전히 꽃을 피웠다. 그의 예술은 새로운 차원을 더했고 1829~36년에 씌어진 작품 하나하나는 러시아 문학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나갔다.

그는 1830년 가을을 가족 영지인 니주니노브고로트(지금의 고리키)의 볼디노에서 보냈는데, 이 몇 개월은 그의 작품활동기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이다. 이때 그는 4편의 '단막 비극' 〈인색한 기사 Skupoy rytsar〉(1836)·〈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zart i Salieri〉(1831)·〈목석 같은 손님 Kamenny gost〉(1839)·〈역병이 돌 때의 향연 Pir vo vremya chumy〉(1832)과 〈고(故) I. P. 벨킨의 이야기 Povesti pokoynogo I. P. Belkina〉(1831)로 엮어진 5편의 단편,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그린 익살맞은 시 〈콜롬나의 작은 집 Domik v Kolomne〉(1833)을 썼으며, 그외에도 비평적인 논쟁조의 논문 몇 편과 거친 초고, 소품, 그리고 여러 가지 다양한 분위기의 서정시를 남겼다.

푸슈킨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셰익스피어, 바이런, 월터 스콧과 일단의 호반 시인 등 영국의 작가에게 보인 관심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과 '보편적인 감수성', 그리고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시대, 다양한 민족의 기질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악마적 정열'을 분석한 '단막 비극'과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의 주제와 기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년

1831년 푸슈킨은 격렬한 구애 끝에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와 결혼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표트르 대제 치세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받았다. 3년 뒤에는 황제의 시종보로 임명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나탈리야가 궁정행사에 참석하기를 바란 황제의 속셈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영위해야 하는 궁정의 사교생활은 아내에게는 즐거움을 주었지만 창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작품활동을 계속해나갔다. 간간이 시작활동을 하면서도 점차 산문에 치중했다. 그는 이제 표트르 대제에 관한 주제 외에도 대중적인 농민봉기라는 모티프를 중요하게 다루어 풍자적인 미완성작 〈고류히노 마을의 역사 Istoriya sela Goryukhina〉(1830, 출판 1837)와 장편소설 〈두브로프스키 Dubrovsky〉(1832~33, 출판 1841)·〈기사도 시대의 장면 Stseny iz rytsarskikh vremen〉(1835, 출판 1837),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그의 산문 작품이자 푸가초프 반란을 다룬 역사소설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3~36)과 그에 앞서 그 반란을 역사적으로 검토한 〈푸가초프 이야기 Istoriya Pugachova〉(1833, 출판 1834) 등을 써냈다.

한편 가정문제와 공적인 업무 때문에 그의 삶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궁정에서는 의심과 적의의 눈길이 쏠렸으며,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 창작에만 몰두하고 싶다는 탄원서는 번번이 거부당했다. 마침내 1837년 그를 미워하는 세력가들이 꾸민 음모에 말려든 그는,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에 나섰다가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평가

푸슈킨은 이미 생전에 그의 후계자이며 제자인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에 의해 러시아의 위대한 국민시인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다음 세대의 위대한 러시아 비평가이자 민주주의자이며 혁명론자인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는 푸슈킨의 작품에 대해 심도 있는 비평적 연구를 했는데, 그의 글은 오늘날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러시아 문어의 창시자이며 러시아 문학의 표본이 될 작품을 쓰고 '현실을 노래한 시인'이었던 그는 19세기의 후기 고전주의 작가들의 눈에 러시아 문학의 초석으로 비쳤으며,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민족뿐 아니라 그의 작품이 전해졌던 제정 러시아 치하 다른 민족의 문화적·정신적 세계와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고, 오페라를 비롯한 러시아 문화의 여러 영역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결한 관념을 내포하고 시민적 책임의식을 강조하며(그는 '언어로써 인간의 가슴에 불을 당기는' 예언자적 시인을 요구했음), 삶을 긍정하는 활력이 넘치고, 이성이 편견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이기며, 인간애가 노예근성과 압제를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는 푸슈킨의 작품은 전세계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주요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러시아 민족의식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면서도 민족성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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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보기@@=

요약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의 총칭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영미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이 있다.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은 첫 번째 시기의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자각하게 되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온정주의와는 달리 파운드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를테면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더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19세기의 유물론적 경향과 관련이 깊은데 모더니즘은 그러한 세계관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로 해석하고 배격했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서양 어디에서나 널리 쓰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영미 비평계에 치우친 명칭이다.

유사한 문예사조가 독일에서는 흔히 '전위주의'(Avantgardismus)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영어로 '모더니즘'이라 번역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기원에 해당하는 상징주의 예술이 일찍이 19세기부터 자리잡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명칭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영미계통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을 들 수 있다.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 중심무대의 하나가 런던이었고 그 주도적인 인물이 에즈라 파운드였다. 인류학·심리학·철학·정치이론과 정신분석의 새로운 사상들에 자극을 받은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모더니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들이 주도했다.

낡은 시적 전통에 대항하여 이미지스트들은 목가적인 정감이나 제국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니라 정확한 기술(description)과 심상(心像)의 환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언어를 정련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시와 비정형시를 사용했으며,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화가이자 작가인 W. 루이스의 '소용돌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입체파의 추상기법과 그들의 그림·조각·문학에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현대적 산물들의 새로운 감각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들의 기법을 결합시켰다.

그 잡지명부터 눈길을 끄는 〈돌풍 : 위대한 영국의 소용돌이 평론 Blast : Review of the Great English Vortex〉은 소용돌이파의 대변지였으며 그 편집자인 루이스가 가장 적극적인 선전자이자 대표자였다. 1914년 〈돌풍〉에 게재된 그의 실험희곡 〈별들의 적 Enemy of the Stars〉과 실험소설 〈타 Tarr〉는 넘쳐 흐르는 충일감으로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생생히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의 첫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너무도 명백히 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들이 볼 때 전쟁의 엄청난 참화와 공포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전래의 형식과 문체를 패러디화하게 되었는데, D.H. 로렌스와 T.S. 엘리엇이 그 대표자들이다.

혁신적인 소설 〈무지개 The Rainbow〉(1915)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에서 D.H.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질병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 있다.

전래의 소설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은 그의 매우 혁명적인 시 〈프루프록과 그밖의 묘사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황무지 The Waste Land〉 등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함과 현대적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D.H.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T.S. 엘리엇은 종래의 시 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포기와 자기극기에 의해서만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판이한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 및 온정주의와는 달리 E. 파운드(1920년 영국을 떠나 1925년 이탈리아에 영구적으로 정착함)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영미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반민주적 관점이 모더니즘 운동의 초기부터 내재해 있었던 반동적 성향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다른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야기된 비극적인 균형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E.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난해한 심상서사시 〈칸토스 The Cantos〉(1917~70)와 루이스의 정치·신학 소설 〈인간의 시대 The Human Age〉의 문학적 공로에 대한 평가와 그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모더니즘

전통적인 권위와 도덕을 반대하고 현대 기계문명과 도시감각을 중시하는 사상적·예술적 사조로서, 한국에서는 모더니즘을 주지주의라는 개념으로 한정시키기도 한다(→ 한국문학).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1930년대초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쇠퇴하고 일제의 군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등장하면서 김기림·이양하·최재서 등이 영미 모더니즘 이론을 도입했다. 먼저 김기림은 시의 낭만주의적 성격을 배제하고 시의 음률과 의식성을 강조했다. 그는 평론 〈시의 기술·인식·현실 등 제문제〉(조선일보, 1931. 2. 11~14)·〈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주의적 태도〉(신동아, 1933. 4)·〈오전의 시론〉(조선일보, 1935. 4. 20~5. 2) 등을 발표해 영미 주지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과거의 한국시를 자연발생적인 센티멘털리즘이라고 비판하고 시에 있어서 현대문명의 비판과 시각적 회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이양하는 〈조선현대시 연구〉(조선일보, 1935. 10. 4~17)에서 리처즈의 주지주의 이론을 소개했고, 리처즈의 저서 〈시와 과학〉(1946)을 번역해 단행본으로 펴냈다.

김기림과 이양하가 시론을 전개한 반면, 최재서는 산문 분야에서 모더니즘 이론을 펼쳤다. 그는 〈현대 주지주의 문학이론의 건설〉(조선일보, 1934. 8. 7~12)·〈비평과 과학〉(조선일보, 1934. 8. 31~9. 5)에서 T.E. 흄의 불연속적 실재관을 바탕으로 낭만주의의 극복과 신고전주의 이론을 내세웠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시인 김기림·정지용·김광균·장만영 등과 소설가 이상(李箱) 등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어 1949년을 전후해 모더니즘 운동이 다시 일어났는데, 김경린·김수영·박인환 등의 '후반기 동인'들이 모더니즘 시이론에 입각한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펴냈다. 이들은 당시 한국문단에 유행하던 주정적인 시풍을 반대하고 제재를 현대도시와 기계문명에서 택했으며 이미지와 관념의 조화를 중시했다.

1950년대 후반에 와서는 1920년대의 영미 모더니즘 이론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모더니즘이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다. 송욱의 비순수와 문명의 표정, 김춘수의 현실의식과 존재론적 이미지, 전봉건의 초현실적 발상과 전쟁 이미지, 김종삼의 음악적 이미지, 김광림의 주지적 서정 등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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