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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교사, 번역가, 유대계 시인 - 파울 첼란
2017년 11월 19일 23시 15분  조회:4884  추천:0  작성자: 죽림

파울 첼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파울 첼란(Paul Celan, 1920년~1970년)은 루마니아 출생의 독일어 시인이다.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하고 소련군 점령 후에는 으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최초의 시집을 발표하였다(1947). 1948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러시아어(語) 어학교사 겸 번역가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시는 시선(視線)이 포착(捕捉)한 사물을 금욕적이라 할 만큼 응축된 시어에 정착케 하는 투명함과 순수함을 갖는 것으로 독일 현대시 가운데 이채를 발하는 존재이다. 주저(主著)로는 시집 <기이함과 기억>(1952),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1955), <말의 울타리>(1959) 등이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 프랑스 시인 에드몽 자베스와 더불어 가장 돋보인 유대계 시인으로 손꼽힌다.




 
출생 1920. 11. 23, 루마니아 체르너우치
사망 1970. 5. 1, 프랑스 파리
국적 독일

요약 루마니아 태생 독일의 시인.
본명은 Paul Antschel.

 

독일에 거주한 적은 없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문학의 매우 강력한 혁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문체상으로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대인으로서의 비통함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가 실질적으로 나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첼란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의 부모는 살해되었다.

1945~47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 및 교정 일을 했고, 이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납골함의 모래 Der Sand aus den Urnen〉(1948)를 발표했다. 그의 시는 초기부터 현실의 공포와 상해에 대한 주마등 같은 지각방식, 확실한 심상과 작시법이 그 특징이었다. 1948년 전쟁 전 잠시 의학공부를 했던 파리에 정착하여 사범학교에서 어학을 강의하는 한편 셰익스피어와 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2번째 시집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1952)으로 독일에서 명성을 굳혔고, 1958년 브레멘 시(市) 문학상을, 1960년 모더니즘의 원조인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그후 〈빛의 강박 Lichtzwang〉(1970)을 비롯하여 7권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가장 충실한 영역본은 〈Speech-Grille and Selected Poems〉(197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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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파울 첼란

 

 

이방 여인의 눈에다 이렇게 말하라. 물이 있으라!

이방 여인의 눈 속에 네가 아는 물속의 여인들을 찾으라.

룻! 노에미! 미르얌! 그녀들을 물 밖으로 불러내라.

네가 이방 여인 곁에 누울 때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의 구름머리카락으로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룻, 미르얌, 노에미에게 이렇게 말하라.

보라, 내가 이방 여인과 동침하노라!

네 곁의 이방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 주라.

룻, 미르암, 노에미로 인한 고통으로 그녀를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에게 말하라.

보라, 내가 그녀들과 동침했노라고!

 

* 동침: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아홉 문장이
모두 마치 십계명처럼 나란히 '-하라'로 시작하고 있다.
룻, 미르암, 노에미는 
유대 여인의 전형적인 이름들이다. 

'동침'이라는 가장 밀착된 인관관계에 동족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이방 여인: 첼란은 1948년 '정월 스무날' 빈에서 잉에보르크 바하만을 만났다.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했는데, 

최근 연구와 시간집 출간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밝혀졌다. 

첼란의 시 <코로나>, <애급에서>와 바하만의 소설 <말리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전영애

 

코로나

 

가을이 내 손에서 이파리를 받아먹는다. 가을과 나는 친구.

우리는 시간을 호두에서 까 내어 걸음마를 가르친다.

시간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거울 속은 일요일이고,

꿈속에서는 잠을 자고,

입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내 눈은 연인의 음부로 내려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어두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 양귀비와 기억처럼 사랑한다.

우리는 잠을 잔다, 조개에 담긴 포도주처럼,

달의 핏빛 빛줄기에 잠긴 바다처럼.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창가에 서 있고, 사람들은 길에서 우리를 본다.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돌이 꽃피어 줄 때,

그침 없는 불안으로 가슴이 뛸 때가.

때가 되었다, 때가 될 때가.

 

때가 되었다.

 

*코로나: 태양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
그 주위로 먼저 나오는 빛의 환(環).
한순간 태양 빛이 꺼지듯

시간의 어두운 원점에 선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연가이다.

 

무적(霧笛) 속으로

 

 

감춰진 거울 속의 입,

자부심의 기둥 앞에 꿇은 무릎,

창살을 거머쥔 손이여.

 

너희에게 어둠이 다다르거든,

내 이름을 불러라,

나를 내 이름 앞으로 끌어가라.

 

 

화인(火印)

 

 

 더는 잠들지 못했다. 우울의 시계 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 우리,

 시계바늘은 채찍처럼 휘었고,

 도로 다시 튕겨져 피 맺히도록 시간을 후려쳤고,

 너는 짙어 가는 어스름을 이야기했고,

 열 두번 나는 네말의 밤에 대고 너를 불렀고,

 하여 밤이 열렸고, 그대로 열린 채로 있었고,

 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또 하나는 네 머리카락에 넣어

땋아 주었고,

 두 눈을 도화선으로, 열린 정맥으로 읽었고-

 갓 번뜩인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고.

 

 

누군가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는 이, 장미를 향

해 손을 뻗는다.

 그 잎과 가시는 그의 것이니,

 장미는 그의 접시에 빛을 놓고,

 그의 유리잔을 숨결로 채우니,

 그에게서는 사랑의 그림자가 술렁인다.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며 울리는 이,

 그는 헛맞추지 않고,

 돌을 돌로 치며,

 그의 시계에서는 피가 울리고,

 그의 시계에서는 그의 시각이 시간을 친다.

 그이, 보다 아름다운 공을 가지고 놀아도 좋다.

 너에 대해, 나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다.

 

 

 

출처 :시강(詩江) 원문보기   글쓴이 : 심우기
 

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

ㅡ파울 첼란.

 

 

망각의 집은 곰팡이 슨 초록빛.

 

나부끼는 문마다 너의 머리 없는 악사가 푸르러진다.

 

그는 너를 위해 이끼와 쓰라린 치모恥毛로 만든 북을 울려 주고

 

곪은 발가락으로 모래에다 너의 눈썹을 그린다.

 

그것이 달려 있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린다. 또 네 입술의 붉음도.

 

너는 여기서 유골 항아리를 채우고 네 심장을 먹는다.

 

/파울 첼란시집 ‘죽음의 푸가’ / 민음사

 

 

 

♣ 아무리 읽어도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시를 먹는다.
아프다는 것으로는, 인간의 통점으로는 느낄 수 없는 저 너머를 읽는다.
디디 위베르만이 아우슈비츠를 다룬 영화 ‘사울의 아들’을
왜 괴물이라 했는지 끔찍하게 느끼는 새벽이다.
우리는 분단이 되어있고 지구 최후의 휴전 중인 나라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쟁까지 겪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학살당하고
이 아픔을 깨트리려 몸부림치고 고문당하고 죽어갔는가.
시인은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누구인가 나이고 또 우리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저 광화문의 촛불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왜 시인은 센 강에 몸을 던져야했을까 나도 먹어야 한다.
죽어간 수백만의 동족들을 그 심장을,
그런 시를 써야하는데 왜 못 쓰는가 부끄러운 새벽이다. 
/조길성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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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감상평)

세상이 따뜻해지리

파울 첼란‘죽음의 푸가를 읽고

 

윤선미

 

 

   빗살문학아카데미 상반기 주제는 5.18정신에 대해 깊이 있게 책을 읽고 글쓰기이다그중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파울 첼란의죽음의 푸가'시선집도 있었다.파울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첼란의 부모는 수용소에서 죽었고첼란 자신은  처형 직전 우연히 가스실행을 피하였다. 1970년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활동을 해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시 문학상을,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그의 시는 읽어도 읽어도 난독증이 있는 것처럼 난해하다그나마 내 감성을 자극한 시 몇 편을 감상해 본다.

 

 “이건 시간의 눈/일곱 빛깔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시간의 눈」 전문

 

 *시가 마치 꽃의 전설처럼 슬프고 가슴이 뜨거워진다시간의 눈은 억압과 암울한 시간을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세상이 따뜻하다'라고 말하고 있으며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그 시간의 먹먹함이 극에 달해 속울음을 울게 만든다.

 

 “꽃을 뿌리라낯선 이여마음 놓고 뿌리라./그대 저 아래 깊은 곳에 /정원들에 꽃을 건넨다.//여기 누웠어야 할 사람은그 어디에도누워 있지 않다그렇지만 세계가 그의 곁에 누워 있다./세계그것이 갖가지 꽃들 앞에서/눈을 떴다.//그러나 그는 붙들었다많은 것을 보았기에,/ 눈먼 사람들과 함께,/그는 갔다그리고 너무 많이 꺾었다./향기를 꺾었다-/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이제 그는 갔다낯선 물 한 방울을 마셨다,/바다를,/물고기들-/물고기들이 그 몸에 와 부딪힐까?” -가묘-전문

 

" 바람의 장례는 엄숙했다/평생 바다 내음 맡으며 살아간죽기 직전 눈물 한 방울 남기고 간 그녀/삼베적삼 고이 입혀 돌을 비잉 둘러줬다얽매이지 말라고/바다 바람이 무덤이다/바다가 웅웅 울었다/바람이 휭휭 떨었다/까마귀 바람 타고 찔레 곁 맴돈다/땅을 파서 묻어주고 싶었다/돌멩이 하나 더 둘러주고/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까옥깍 소리에 잠을 자지 못했다/몇 년 후뼈마디만 나뒹굴었다/한창 찔레꽃 향기 쫓게하고/사랑세월 지나 바람에 삭아" -졸시풍장 전문

 

 *‘가묘'를 읽는 동안 내가 쓴풍장'이 자꾸 떠올랐다가묘는 1연에서 보듯 꽃으로 묘를 장식하고풍장에서는 섬의 장례가 돌을 비잉 돌려주고 바람에 맡긴다. 죽음의 세계가 펼쳐진 슬프고도 참혹한 시다.'세계가 눈을 뜨고 향기를 꺾어버린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그는 누구인가죽음이란 무엇인가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하는 시다.

 

 “저 많은 성좌들우리 앞에내밀어져 있는나는,/언제였던가너를 보았을 때/저 바깥또 다른 세계들 곁에 있었다.//은하계의이 길들./우리들에게로/우리들 이름의 짐 안으로/밤들을 흔들어 보내오는/이 시각,/나 이제 알겠네우리가 살았다는 건/틀린 말,/숨결 하나가 '저기와 '거기 없음과 '이따금씩사이를/눈먼 채 지나갔을 뿐./혜성처럼 눈 하나가/불 꺼져 버린 것을 향하여 휘익 날았을 뿐골짜기들 속에서,/거기그 작열이 스러진 곳/유두(乳頭)처럼 화사하게 시간이 멈추어 있다./거기서 이미 위로아래로/그 너머로 자랐다./있는 것있었던 것있을 것이-/나 알겠네./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우리가 알았네,/알지 못했네우리는/있었지만거기에는 없었지그리고 이따금씩/오직 무()가 우리 사이에 서 있을 때라야/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였지.”-‘저 많은 성좌들전문

 

 *마지막 두 행이 맘에 들어 이 시를 골랐다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을 때 온전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하였다.'알고 알지 못함이 무엇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숨결 하나가 눈먼 채 지나갔을 뿐 알지 못했네 우리는 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

 

 

 “당신의저 건너에 있음오늘 밤 /로써 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여기 당신이 있다/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우리 창(앞을/콩 넝쿨이 기어 오른다생각하라/누가 우리 곁에서 자라며/그것을 바라보는가를.//()우리는 그리 읽었다,/하나의 조각이며 또 하나의흩어진 조각이라고./모든 베어진 이들의/죽음 가운데서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그곳으로/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반쪽과/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당신의 저 건너에 있음 전문

 

 * '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 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세월호의 진실이 생각나는 시다하루 빨리 진실이 밝혀지기를 소원한다.‘신이 죽음 가운데서 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한 것처럼 세월호 희생자 모두 좋은 곳으로 가서 잘 지내길 바란다.'그곳으로 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 반쪽과 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남은 유가족들도 힘을 내 '한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 생각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밝혀지는 그 날까지 모두 건강하길 바래본다파울 첼란 시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가슴을 울리는 시임에 분명하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수 없다'라고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했다하지만 파울 첼란은 인간의 역사속 극한에 이른 서사를 상징적,초현실적 언어로 서정시를 쓰는데 성공했다.‘음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라고 말한 첼란은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시대를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했다그리고 가장 진실을 말하는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 지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더 공부를 해야겠다파울 첼란 시선집을 읽는 동안 어려웠지만 부족한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촛불집회 때처럼 국민들의 참여와 힘으로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혔으면 한다.‘세상이 따뜻해지리/죽은 이들이/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덤으로 더...
 

파울 첼란에 대하여 / 전영애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1945년 이후 독일의 시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구절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치 시대를 지난 독일 지식인들의 참담한 자의식이 밴 이 말은 이제 쉽사리 글을, 더구나 소박하거나 감상적인 미문을 쓸 수 없게 된 문학의 상황을 집약한다. 예리한 진단인 동시에 깨어 있는 의식을 촉발하는 도화선 같은 말마디였고, 실제로 문인들에게는 변명이자 합리화의 수단이 되었지만, 또한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수정 또한 유명하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첼란의 시를 두고 해석학자 스촌디가 한 말이다. 첼란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말해도 되겠지요. 한 편 한 편의 시에는 그것이 '정월 스무날'이 적혀 있다고. 어쩌면 오늘날 쓰이는 시들에서 새로운 점은 바로 이것 아닐까요. 여기서 가장 뚜렷하게, 그런 날짜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기억하려 한다는 것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그런 날짜로부터 쓰고 있지 않습니까?

                            -뷔히너 상 수상 연설<자오선> 중에서

 

 

 '정월 스무날'이란 뷔히너의 작품 <렌츠>의 첫 구절인데, 이 작품은 주인공 렌츠의 정신병 발병 기록이다. 뷔히너 상 수상 연설이므로 표면적으로 뷔히너와 연관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첼란이 말하는 '정월 스무날'은 소위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의 날(1942. 1. 13.)'이다.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기로 한 결정이 최종적으로 내려졌던 날이다. 첼란이 남긴 시들에는 모두 이 화인(火印)이 찍혀 있다. 그의 문학 자체가 이 쓰라림의 '기억'이다.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회한이 배어 있다. 그러나 자료는 아니다. 역사는 단어 하나하나에 배어 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깊고 오랜 내면화(Erinnerung)의 침전을 거친 기억(Erinerung), 정화(淨化)된 고통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학이다.

 1945년 이후 활동한 독일 시인들 중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첼란은 모국어가 독일어일 뿐, 한 번도 독일에서 산 적이 없다. 그가 독일을 처음 지나쳐 본 것은 바로 모든 유대교 사원과 가게 들이 일시에 파괴당한 유대인 습격의 밤, 소위 수정의 밤(1938. 11. 9.)'이 지난 아침이었으며, 후년에 낭독회 때문에 몇 차례 잠깐 다녀갔을 뿐이다. 첼란의 고향은 체르노비츠가 있는 부코비나('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 지방은 현재 루마니아 북부 소련 접경 지역으로,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변방이었던 이곳에서는 독일어가 쓰였다.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특히 신비적인 유대 사상 하시딤의 전통이 깃든 이 유서 깊은 동구 지역은 첼란의 청년기에 근세사의 격동에 혹독하게 휘말린 곳이다.(1940년 나치의 프랑스 진군과 발맞춘 소련의 부코비나 침공, 1941년 독일 루마니아 연합군의 재점령, 나치 친위대의 진군, 소련군 협력자 살해, 유대인 소탕, 1944년 소련군의 재진군, 독일 및 루마니아 협력자 소탕 등등의 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북부 부코비나에서만도 유대인 10만 명 중 8분의 7이 죽었다.) 첼란의 부모는 수용소에서 죽었고 첼란 자신은 그저 우연히 가스실행을 모면하였다. 첼란은 복잡한 배경으로 인해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독일어는 모국어였고 히브리어는 집에서 배웠으며 루마니아어는 열 살부터 다닌 김나지움에서 배웠다.  프랑스 투르 대학의 의예과를 다닐 때는 프랑스인으로 오해받을 만큼 프랑스어를 잘했고, 소련군이 고향을 침공하여 배울 수 밖에 없었던 러시아어는 <전쟁과 평화>를 원서로 읽을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의학 공부를 중단한 첼란은 고향에서 잠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시절에는 물분학을, 나중에 부쿠레슈티에서는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심취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48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번역으로 생계를 이었는데 발레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미쇼, 웅가레트, 만델슈탐, 예프투센코 등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툭히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번역은 명역으로 유명하다. 1958년부터는 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우울증에 시달리다 1970년 센 강에 투신하였다.

 대체로 장르 구분 없이 여러 종류의 글을 쓰는 독일의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첼란은 거의 시집만 남겼다. 산문으로는 수상 연설문 두 편, 짧은 산문 한 편만 알려져 있다. <양귀비와 기억>(1952), <문턱에서 문턱으로>(1955년) <언어창살>(1959)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1963), <숨결돌림>(1967), <실낱태양들>(1968) <빛의 장막>(1970) (500부 한정으로 냈다가 오자가 많아 시인이 회수한 초기 시집 <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1948)에 담겼던 중요한 시들은 <양귀비와 기억>에 재수록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두 권의 유고 시집(눈(雪)파트>(1971), <시간의 뜨락>(1976)이 발간되었다.

 '양귀비'로 표현되는 망각과 기억이 교차하는 첫시집 <양귀비와 기억>은 시집 제목처럼 은유성이 짙은 언어와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들로, 다음 시집 <문턱에서 문턱으로>는 모색의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언어창살>에서는 소통과 차단이 동시에 일어나는 언어처럼 굳어 벌닌 세계가 '굳어진' 목소리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에서는 '그 누구도 아닌 이'라는 이름으로 여렴풋이 신(神)의 존재가 다시 찾아진다. 시들이 몹씨 짧아지는 후기 시집 <숨결돌림>에서 압축되기 시작하는 시어는 <실낱태양들>,<빛의 강박>등에 이르면 거의 소통 불가능한 암호로 응축된다. 언어는 침묵의 경계까지 가 있다.

 존재의 '경사각'에서 쓰인 글들, 그러나 실어(失語)에 다다르고 착란과 자살에 이른 치열함이 첼란의 시어에, 거기에 담긴 존재에 전례없는 깊이와 높이를 부여하고 있다.

 

 

 


 

 

(18세 당시 찍은 여권사진. /출처; 독어 위키)

 

- 당시 루마니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1920년 11월 23일 출생.

  파리에서 1970년 4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

 

- 독일어 서정시인, 원래 이름은 Paul Antschel이었지만 훗날 루마니아어인 Ancel로 이름을 바꿨고, 여기서 철자를 바꿔 Celan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 삶

파울 첼란은 북부 루마니아의 부코비나(Bucovina)지역의 수도였던 체르니우치(독일어로는 Czernowitz : 체르노비츠)출생으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오 안첼 타이틀러(Leo Antschel Teitler)와 그의 부인 프레데리케(Frederike)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가족의 집은 체르니우치 사다고라 구역의 바실코거리에 있는 첫번째 집이었다.

 

첼란은 우선 독일어 학교와 헤브라이어 학교를 다녔고, 5년을 루마니아어 공립김나지움(한국으로 치면 공립고등학교)을, 그리고 1938년 6월 3일 대입자격시험(Abitur: 아비투어)을 볼 때까지 우크라이나어 공립김나지움을 다녔다. 1938년 프랑스 투르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나, 1년 후에 로망스어학(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어 등 로망스어권의 어학과 문학에 대한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1940년 북부 부코비나지역과 첼란의 고향인 체르니우치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첼란은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1941년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체르니우치를 점령했고 유대인들은 해당 지역의 게토에 수용되었다. 1942년 첼란의 부모는 게토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현 루마니아 동-남부와 몰도바지역에 걸쳐있는 지역)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에서 아버지는 발진티푸스로 사망하고 어머니는 사살되었다. 부모의 수용소행과 죽음은 첼란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살아있는 내내 부모를 고통 속에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의 시들 속에서 이런 트라우마의 흔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942년부터 43년까지 첼란은 루마니아지역 곳곳의 강제노동수용소들에 수용되었고, 몰도바지역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체르니우치는 1944년 8월 적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첼란은 1944년 12월 체르니우치로 돌아와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1945년 그는 부쿠레슈티(현 루마니아의 수도)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 했다. 이곳에서 첼란은 번역가와 대학 강사로 일했다. 1947년 그는 헝가리를 거쳐 빈으로 도피했고 1948년 파리로 이주했다. 빈에 있던 1948년에 첫번째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Der Sand aus den Urnen)를 발표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1948년 5월 빈, 첼란은 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까지 연인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을 만난다.(둘은 1957년 10월부터 1958년 5월까지 파리에서 다시 연인관계를 맺는다.) 둘의 관계는 첼란의 일기와 유고로 출판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편지는 독일현대문학박물관(Deutsches Literaturarchiv)과 오스트리아국립도서관(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에 보관되어있다. 2008년 8월 주어캄프 출판사(Suhrkamp Verlag)는 'Herzzeit'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출간했다. 파울 첼란의 시 '코로나'(Corona)와 시집 '양귀비와 기억'(Mohn und Gedächtnis)에 나오는 많은 시들은 그녀를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다.

 

1951년 11월 첼란은 파리에서 화가 기젤 레스트랑주(Gisèle Lestrange)를 알게 되고, 일년 후 그녀와 결혼한다. 두 사람은 때때로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대표적인 예가 1965년 시 "Atemkristall"의 부식동판화 작업). 1952년 슈튜트가르트의 도이췌 페어락스 안슈탈트(Deutsche Verlags-Anstalt) 출판사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나치로 인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죽음을 주제로 삼은 시)와 함께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출판했다. 1955년 첼란은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리고 아들 에릭(Eric)이 태어났다.(Eric은 프랑스어로 '써라!''écris!'의 철자를 바꿔쓴 이름이다. 또 그의 아내는 2년 전 유산한 적이 있다.)

 

1960년, 첼란은 표절의혹에 휩싸인다. 첼란과 친하게 지냈으며 첼란이 시를 번역까지도 했던 유대인 시인 이반 골(Yvan Goll)의 미망인인 클레르 골(Claire Goll)이 표절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골 사건"(Goll-Affäre)으로 잘 알려진 표절의혹은 첼란이 죽을 때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첼란은 수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그중 한번은 착란상태에서 아내를 칼로 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1967년 두 사람은 별거하기로 결정했지만, 계속해서 부부로 남았다.

(파울 첼란과 기젤 레스트랑주, 출처)

 

그가 죽기 몇달 전인 1969년 10월, 첼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외에도 낭송회에서 부코비나 출신의 옛친구들과 예후다 아미차이(Jehuda Amichai)와 다비드 로케아(David Rokeah) 같은 이스라엘 시인들을 만났다. 첼란과 고향이 같았던 소꿉친구 일라나 시뮤엘리(Ilana Shmueli)와의 재회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시적 전통 속에서 써진 그의 당시 시들에는 수많은 성경의 암시들이 사용되었는데, 그의 예루살렘행이 애인에 대한 성적인 찬사로 그려진다.

* 원문 : (Getragen von zahlreichen biblischen Anspielungen, verbindet sich in den dabei in der Tradition jüdischer Jerusalemdichtungen entstandenen Gedichten das Werben um Jerusalem mit erotischen Elogen auf seine Geliebte.) -> 뜻이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서 의역한 부분.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 시뮤엘리의 회상록 "예루살렘이 있다고 말해."(Sag, dass Jerusalem ist), 첼란의 유고시집 "시간의 뜨락"(Zeitgehöft)의 시들이 이런 만남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료들은 첼란이 유대교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까다로운 논쟁에서 증거자료로 여겨진다.

 

첼란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가는 밝혀진 바가 없다. 1970년 4월 20일, 첼란이 미라보 다리에서 세느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1970년 5월 1일 세느강을 따라 파리에서 10km 떨어진 꾸흐브부와에서 발견되었다. 1970년 5월 12일 그의 시신은 발드마른 주의 띠에에 있는 파리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날은 그와 친했던 넬리 작스(Nelly Sachs, 독일 출신 유대인 여성작가로, 스웨덴에서 주로 독일어로 시와 극을 썼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문학작품의 번역을 장려하기위해, 독일문학기금은 1988년부터 뛰어난 문학번역가에게 파울첼란상을 수여하고 있다.

 

- 첼란과 47그룹(Die Gruppe 47)

 

47그룹이 니엔도르프에서 1952년 5월 모임을 가질 때, 당시 유명하지 않았던 첼란은 공식적으로 첫낭송을 하게 되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밀로 도르(Milo Dor), 라인하르트 페더만(Reinhard Federmann)의 중개로 낭송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당신이 그의 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 사람 만큼의 음악성과 짜임새를 갖춘 시인은 정말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1951년 밀로 도르가 한스 베르너 리히터에게 '첼란이 꼭 참석해야한다'며 이와 같이 보낸 편지에서 그룹 창립멤버들과 확고한 사실주의자 리히터의 부정적인 태도를 알 수 있다.

 

발터 옌스(Walter Jens)는 1976년 하인츠 루드비히 아놀드(Heinz Ludwig Arnold)와의 인터뷰에서 첼란의 낭송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첼란이 처음 무대에 설 때,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정말 들어줄 수가 없어!' 첼란은 너무 격정적으로 읊었어요. 우린 그걸 비웃었고, 누군가는 "괴벨스처럼 읊는구만.' 하더군요.... '죽음의 푸가'는 그룹에서 완전 실패작이었죠! 신사실주의 시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정말 다른 세계였어요." 한스 바이겔(Hans Weigel)이 덧붙여 말했다. "나중에 몇몇 동료들은 비웃으면서 앞에서 읊더군요. 'Schwarze Milch der Fruehe...' 그리고 한스 베르너 리히터는 그가 유대교 회당에서 읊는 것처럼 낭송한다고 생각했어요." 첼란 자신은 아내 기젤에게 편지에서 다음처럼 언급했다.

 

"시를 싫어한 사람이 다수였는데, 반발하더라고."

 

토니 리히터(Toni Richter)는 이때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파울 첼란의 낭송이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의 낭송 기법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그룹에서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 누구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파울 첼란의 운명을 몰랐다. 또 그룹사람들은 높은 톤의 리듬으로 시를 낭송하는 유대-루마니아의 전통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 하는 스타일상의 문제도 거기선 의미가 없었다. 첼란은 랭보(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여기서는 알려지지 않았냐고, 음악적인 율동으로 느슨해진 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도이체 페어락스 안슈탈트사의 편집장은 이 낭송에서 첼란을 주목했고, 출판사는 그해 12월에 '양귀비와 기억'을 출판했다. 에른스트 슈나벨(Ernst Schnabel)은 그룹의 모임 후에 NWDR(Nordwestdeutscher Rundfunk)에서 '죽음의 푸가' 낭송을 방송하기도 했다. 훗날 수차례 초대를 받았음에도, 첼란은 47 그룹의 모임에는 더이상 참석하지 않았다.

 

* 파울 첼란과 마틴 하이데거의 만남, 그리고 하이데거와의 만남 후 쓰여진 시 "Todtnauberg"에 대한 부분은 영문 위키에만 있다. 파울 첼란의 애인이었던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빈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시인 첼란 - 전쟁 후 독일에서 새로운 시인으로 주목받은 바하만 - 나치 옹호로 비판받던 하이데거. 세 사람이 책과 시를 통해 어떤 생각들을 주고받았을지가 참 흥미로운 주제다.

///출처: [Sprachgi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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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Paul Celan)은 누구인가?


첼란의 본명은 파울 안첼(Paul Antschel)이다.

유태인이란 이름을 숨기기 위해 첼란이라고 이름을 거꾸로 바꾼 것이다.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부코니아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체르노비츠의 유태인 부모에게서 독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대적 전통을 중시하며  엄격한 유대 정통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강한 시오니즘은 첼란에게 오히려 반감을 갖게 하고, 어린 첼란은 아버지의 높은 요구와 기대로 인해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부자간의 거리감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속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그의 고향은 한 때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양 있는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첼란은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를, 학교에서는 루마니아어를 말하며 자랐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통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코비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표준 독일어, 슈바벤 사투리어 그리고 히브리어, 이외에도 여러 언어와 사투리들을 사용하였다. 첼란은 독일어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가 유대교육을 중시한 반면, 어머니는 독일어를 더 중요시하였으며, 첼란이 정확한 표준 독일어를 쓰도록 하였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난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지만 시는 모국어로 써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아픔과 시대적 고통을 그의 모국어이며 동시에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간다. 그는  여러 언어들을 능숙히 말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적 소질이 있음에도 모국어 외의 어떤 언어로도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룻 Ruth에게 늘 말하고는 하였다.

체르노비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첼란은 프랑스의 뚜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지만 한 학기 후인 1939년 체르노비츠로 귀향하여 그곳 대학에서 로만스 어문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은 유럽에서 영, 불, 독, 소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의 반유태주의가 그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니바의 북부가 1940년 소련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일년 후 독일과 루마니아군에 점령되어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Ghetto)가 되었다.

1942년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그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코스트라는 사람이 첼란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는 1952년에 출간된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chtnis』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에서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하며,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된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과 기억이다. 이 시에서는 죽음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사용이 창살처럼 교차" 배열되어 있다.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푸가(fuge)는 라틴어 fuga에서 나온 말로 '도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한 가락으로부터 다른 가락으로 달아나듯 음이 조정되는 데서 생겨났다. 푸가의 다양성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조바꿈하거나 변조시키면서 생겨나는 대위법상의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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