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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금빛 화가 - 구스타프 클림트
2018년 03월 07일 23시 28분  조회:3458  추천:0  작성자: 죽림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빛이 쏫아지는 듯한 그림들...
 


구스타브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1883년까지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왕실에서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부르크 극장
부르크 극장 장식화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부르크 극장 장식화

1892년 아버지가 사망하는 몇 달 후에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사랑>,1895년

1895년 클림트가 위기를 극복하고 제작한 <사랑>은 그의 최초의 걸작이다. 
장식적인 배경과 인물의 사실적 표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랑의 형태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뒤로 질투의 얼굴들이 보이는 것으로 니는 행복속에 숨어있는 불안을 의미한다. 클림트의 작품중 현실적인 내용과 추상적인 내용이 그림 화면속에 동시에 등장하는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유겐트>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을 창간했다.
 

<베르 사크룸> 창간호.1898년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빈분리파 제1회 전시회 포스타 왼쪽(수정전), 오른쪽(수정후)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 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요제프 마리아 얼브리히, <분리파 전시관>, 1898년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였다.
 

베토벤 프리즈1 <연약한 인류와 용사>,1902년
베토벤 프리즈2 <적의 무리들>, 1902년
베토벤 프리즈, <환희의 송가>, 1902년
베토벤 동상과 <환희의 송가> 확대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철학(왼쪽)>, <의학(오른쪽)>, 1900-1907년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철학>, <의학>, <법학>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법학(왼쪽)>, <신학(오른쪽)> ,1907년

1903년 <법학>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물뱀II>,1904년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 II>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키스>,1907-1908년


<키스>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지는 않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볼에 키스하고 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두 사람은 몸을 잘못 놀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다. 
결국 <키스>는 클림트가 꿈속에서 그려본 이상적인 여인인 플뢰게와의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직도 <키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키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키스>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다.  

 
클림트가 에밀리 플뢰게에게 보낸 엽서(왼쪽),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클림트의 임종 모습>, 에곤실레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에곤 실레 자화상(왼쪽)>, 오스카 코코슈카 자화상(오른쪽)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클림트의 주요 그림 몇 점를 더 감상!!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 1898년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1898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은 후 남은 조카의 후견인이 된 클림트는 36세에 이 초상화를 완성.
흰색과 크림색이 섞여서 순수한 느낌과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단발머리를 한 채 앞으로 똑 바로 직시하고 있느 눈은 세상을 향해 당당한 주인공의 태도를 형상화했다.
   

 
<유디트 1(왼쪽>), 1901 유디트 2(오른쪽), 1909년

황금을 사용해 ‘황금 스타일’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유디트1>1901년이 있다.
구양성서에 나오는 유디트는 아름다운 미망인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다.
그러나 클림트의 작품속의 유디트는 어떠한 숭고한 의지도 기상도 없다. 
그저 죽은 장군의 머리를 든채 황홀경에 빠져 있을 뿐이다. 클림트는 유디트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애국심보다는 남자를 유혹함으로써 파멸에 빠뜨릴 수 있는 여성의 성적인 파워, 
‘위대한 마력’에 주목하고 있다.
유디트 얼굴의 부드러운 표현이 작품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우리는 잠시 얼굴표정을 취한 후에야 비로소 작품의 오른쪽 아래 여주인공이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발견하게 된다.
     
<유디트II, 1909년>에서는 그림의 형태를 바꾸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보다 선명하게 나타냈다. 
꼭 다문 입술과 가차없이 드러낸 젓가슴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민하고 긴장된 유디트의 구부러진 손 모양은 여인의 잔혹한 마력과 복수욕을 보여준다.
  

<희망I>,1903년



<희망I, 1903년>은 배가 부른 젊은 임산부를 표현한 것으로 
화가를 베일 한 장 없이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 그림속 여인인 짐머만 역시 클림트의 아이를 낳은 여성이다. 
여성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생명 잉태의 힘으로 파악하여 
어머니의 모습에 요부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켰음을 알 수 있다.
   
<희망II>


육체적 사랑을 뛰어 넘아 평생을 정신적 사랑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리 플로게.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에른스트 아내의 여동생 이다. 
 

 
<17세의 에밀리 플뢰게>, 1891년, <에밀리 플레게의 초상>, 1893년

<에밀리 플로게의 초상, 1902년>은 평생동안 에밀리 플로게의 초상을 4번 그렸던 초상화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에밀리 플로게의 초상, 1902년>


장식적인 요소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드레스의 우아함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모델에게는 
무관심한 척하면서 심리적 거리를 둔 흔적이 나타난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년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업스타일인 금박을 사용한 그림<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907년>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나치 정권시에는 히틀러의 소장품이기도 했던 작품. 
히틀러가 그의 작품 몇점을 강제로 소유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 당시 화가로서의 클림트의 명성과 인지도를 말해준다. 클림트는 살아생전에 작품을 통해 부유한 삶을 누렸으며, 상류층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고 한다. 상류층과 교류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여인 블로흐바우였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는 클림트가 가장 선호했던 모델이자 후원가였으며 클림트와의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던 엄청난 재벌집 안주인이었다.
   

<다나에>, 1907-1908년


클림트는 자신의 성적 환상을 감추기 위해 신화의 주제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의 이야기는 클림트의 성적인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다나에,1907-1908>에 등장하는 다나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를 통치하던 아크리오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오스 왕은 딸이 낳은 아들한테 살해당한다는 예언을 듣고 남자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위해 딸을 탑속에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다나에한테 반한 제우스는 부인인 헤라의 질투를 피해 황금빛 빗물로 병하여 그녀의 다리 사이로 스며들어 사랑을 나눈다. 
그 결과 페르세우스가 태어났다. 
클림트는 밀실 속에서 감금된 다나에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 정사작형 화면 전체에 다나에를 그려 넣었다. 
다나에는 성적 황홀감에 빠져 있으며 눈을 감고 있다. 왼쪽 아래부분에는 금색 윈형들 사이에 남성성을 상징하는 검은 사각형이 있다.      

<스토클레스 저택>, 1905년-1911년, 벨기에 브뤼셀
클림트의 프리즈가 있는 대식당

1903년에 벨기에의 실업가 아돌프 스토클레가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에게 저택 건축을 의뢰하자 
요제프 호프만은 클림트에세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장식 벽화를 의뢰한다. 
클림트는 후원자의 풍부한 재정 덕분에 유리, 산호, 자개, 준보석 등 값비싼 재료를 이용하여 벽화를 완성했는데 그 거대한 작품이 생명의 나무이다. 
저택의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상적 표현이 전혀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대>, <생명의 나무>, <성취>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 긴 벽을 장식하고 있는 패널화는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중앙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다. 
맨 왼쪽의 여인은 <기대, 1905-1909>인데 그림속 유일하게 얼굴과 손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생명의 나무에 휘감겨있는 왼쪽 여인은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고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풍의 인물과 추상화적인 배경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다.
오른쪽 패널은 <성취,1905-1909>이다. 주인공들이 입고있는 동양풍의 의상은 클림트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잔틴 미술 양식의 취향을 짙게 나타내고 있다.
   

<죽음과 삶>, 1911

<죽음과 삶,1911>
1911년 즈음 유럽에는 여러 흉조로 인해 세기말적 비관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1908년에는 8만면 이상이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뒤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갔다. 
그리고 1912년 호화 여객석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클림트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 작품에서 죽음의 신과 직면하는 인간 군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18년 1월 11일(56세) 클림트는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는 후, 같은 해 2월 6일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화가라면 한 두장 남긴다는 자화상을 단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클림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자화상은 없다.
나는 회화의 대상으로서 나 자신에 전혀 관심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 관심이 있고
그보다 더 다름 형태에 관심이 더 많다.
나는 스스로를 특별히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며 인물과 풍경 그리고 가끔 초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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