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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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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뒷모습 / 주자청
2018년 04월 16일 00시 21분  조회:4990  추천:0  작성자: 죽림



 

我与父亲不相见已有二年余了,我最不能忘记的是他的背影。

 

那年冬天,祖母死了,父亲的差使也交卸了,正是祸不单行的日子,我从北京到徐州,打算跟着父亲奔丧回家。到徐州见着父亲,看见满院狼籍的东西,又想起祖母,不禁簌簌地流下眼泪。父亲说,“事已如此,不必难过,好在天无绝人之路!”

 

回家变卖典质,父亲还了亏空;又借钱办了丧事。这些日子,家中光景很是惨淡, 一半为了丧事,一半为了父亲赋闲。丧事完毕,父亲要到南京谋事,我也要回到北京念书,我们便同行。

 

到南京时,有朋友约去游逛,勾留了一日;第二日上午便须渡江到浦口,下午上车北去。父亲因为事忙,本已说定不送我,叫旅馆里一个熟识的茶房陪我同去。他再三嘱咐茶房,甚是仔细。但他终于不放心,怕茶房不妥贴;颇踌躇了一会。其实我那 年已二十岁,北京已来往过两三次,是没有甚么要紧的了。他踌躇了一会,终于决定 还是自己送我去。我两三回劝他不必去;他只说,“不要紧,他们去不好!”

 

我们过了江,进了车站。我买票,他忙着照看行李。行李太多了,得向脚夫行些小费,才可过去。他便又忙着和他们讲价钱。我那时真是聪明过分,总觉他说话不大漂亮,非自己插嘴不可。但他终于讲定了价钱;就送我上车。他给我拣定了靠车门的 一张椅子;我将他给我做的紫毛大衣铺好坐位。他嘱我路上小心,夜里要警醒些,不要受凉。又嘱托茶房好好照应我。我心里暗笑他的迂;他们只认得钱,托他们直是白托!而且我这样大年纪的人,难道还不能料理自己么?唉,我现在想想,那时真是太聪明了。

 

我说道,“爸爸,你走吧。”他往车外看了看,说,“我买几个桔子去。你就在 此地,不要走动。”我看那边月台的栅栏外有几个卖东西的等着顾客。走到那边月台, 须穿过铁道,须跳下去又爬上去。父亲是一个胖子,走过去自然要费事些。我本来要去的,他不肯,只好让他去。我看见他戴着黑布小帽,穿着黑布大马褂,深青布棉袍, 蹒跚地走到铁道边,慢慢探身下去,尚不大难。可是他穿过铁道,要爬上那边月台,就不容易了。他用两手攀着上面,两脚再向上缩;他肥胖的身子向左微倾,显出努力 的样子。这时我看见他的背影,我的泪很快地流下来了。

 

我赶紧拭干了泪,怕他看见,也怕别人看见。我再向外看时,他已抱了朱红的桔子往回走了。过铁道时,他先将桔 子散放在地上,自己慢慢爬下,再抱起桔子走。到这边时,我赶紧去搀他。他和我走到车上,将桔子一股脑儿放在我的皮大衣上。于是扑扑衣上的泥土,心里很轻松似的, 过一会说,“我走了,到那边来信!”我望着他走出去。他走了几步,回过头看见我,说,“进去吧,里边没人。”等他的背影混入来来往往的人里,再找不着了,我便进来坐下,我的眼泪又来了。

 

近几年来,父亲和我都是东奔西走,家中光景是一日不如一日。他少年出外谋生,独立支持,做了许多大事。哪知老境却如此颓唐!他触目伤怀,自然情不能自已。情郁于中,自然要发之于外;家庭琐屑便往往触他之怒。他待我渐渐不同往日。但最近两年不见,他终于忘却我的不好,只是惦记着我,惦记着我的儿子。

我北来后,他写了一封信给我,信中说道,“我身体平安,惟膀子疼痛利害,举箸提笔,诸多不便,大约大去之期不远矣。”

我读到此处,在晶莹的泪光中,又看见那肥胖的,青布棉袍,黑布马褂的北影。
唉!我不知何时再能与他相见!

 

1925年10月在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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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뒷모습   /  주자청  

 

 아버님을 뵙지 못한 지 벌써 2년 남짓이다. 지금도 내 가슴을 후비는 것은 아버님의 그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아버님께선 직장마저 그만두셨을 땐데 별안간 할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북경에서 부음을 받고 아버님 계신 서주로 내려가 아버님을 모시고 분상하려 했다. 서주에서 아버님을 뵈었을 때엔 온 집안이 낭자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생전의 할머님이 생각나서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는 정황에도 아버님은 “어쩔 수 없는 일이군. 울어서 될 일이 있담? 설마 산 입에 풀칠 못하겠나?”

 

 집에 돌아가자 이리저리 팔 것은 팔고 잡힐 것은 잡히고 나니 살림은 쓸어간 듯 비어 버렸고, 거기다 장사 빚만 소복이 남아 있었다. 집안 꼴이 이쯤 되면 말이 아니었다. 할머님 장사 때문도 그렇지만, 아버님 실직 때문이었다. 이럭저럭 장사를 끝내고 그대로 헛간 같은 집에 붙어 있을 수도 없었다.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남경으로 가서 일자리나 구하려고 했고, 나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동행키로 했다.

 

 남경에 가자 친구의 만류로 하루를 놀고 이튿날 오전 포구로 건너가 오후엔 북경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버님은 볼일 때문에 내가 떠나는 것을 보지 못할 거라시면서 잘 아는 여관 머슴애를 시켜 나를 돌보게 했다. 그것도 서너 번이나 귀찮을 정도로 신신당부하고 가셨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사실 말이지 그때만 해도 내 나이 스물에 북경만도 벌써 두세 차례나 나들이했는지라 그렇게까지 할 거야 없었다. 아버님은 끝내 그래도 자기가 나를 전송해야 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몇 번이나 그럴 것 없다고 말씀드려도 “쓸데없는 소리, 여관 보이가 무엇 한담?”하면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우린 강을 건너고 역으로 바삐 걸었다. 내가 차표를 사는 동안 아버님은 짐을 지키고 계셨다. 짐이 많아서 역부에게 팁이라도 쥐어 주어야 옮길 수 있었다. 아버님은 역부들과 또 흥정을 하시는 거다. 서투르게 말씀하는 폼이 내가 보기엔 너무 매끈하지 못해서 오히려 내가 참견해야만 했다. 내 소견에 내가 똑똑한 거로 생각되었다. 아버님 고집대로 흘정이 떨어지자 돈 몇 푼을 쥐어주고 짐을 찻간에 실어 올렸다. 아버님은 찻간에까지 따라 오르시더니 차창 쪽으로 자리를 잡아 주셨다. 아버님이 주신 자색 오버를 자리에 깔고 나는 우선 앉았다. 나더러 밤중에 짐 조심하고 감기 안 들게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그런가 했더니 또 판매원을 붙들고 나를 좀 보살펴주라고 허리를 연신 굽히며 당부했다. 나는 속으로 아버님의 어두운 물정을 비웃고 있었다. 돈 보고 돈이나 빼앗아 먹는 그네들에게 왜 저리 헛짓을 하는가고, 그런가 하면 나도 이젠 나이깨나 주워먹은 주제에 설마 자기 코앞의 일도 치러내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 생각하면 정말 우쭐대던 소년이었다.

 

 “아버지 이젠 들어가세요.”

 돌아가시라는 청을 들은 척도 않으면서 창 밖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아버지는 “얘 귤이나 몇 개 사올게 여기 앉았거라” 하셨다. 아버지가 걸어나가는 플렛폼 저쪽 울타리 밖으로 장수 서넛이 어정거리고 있었다.

 

 저쪽 홈으로 가려면 철도를 건너야 하고, 이쪽 홈을 뛰어내려서 또 저쪽 홈을 기어올라야 한다. 뚱뚱하신 아버지에겐 힘든 일이었다. 내가 가야 마땅할 걸 한사코 당신이 가신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까만 베로 지어 만든 작은 모자를 쓰신 데다 까만 마꽐에 진한 쪽빛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기우뚱거리며 철도를 건너느라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는 폼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철도를 건너고 난 뒤 저쪽 홈을 오르려고 온몸을 비비적거리면서 기는 모습은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두 손을 흙 바닥에 밀착시키고 두 발 끝을 위쪽으로 오므리다가 그 뚱뚱한 궁둥이가 왼쪽으로 기우뚱할 때는 아차하게 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여기서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처음으로 확연히 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뜨겁게 뺨을 적시는 게 있었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내 눈물이 아버지께 들킬까 두려웠고 또 남들이 볼까 두려웠다. 내가 다시 바깥쪽으로 눈길을 멍하니 돌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빨간 귤을 보듬고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도를 다시 건널 때 이번에는 귤을 땅에다 놓더니만 먼저 서서히 기어내려서는 다시 그 귤을 보듬고 뚱그적거리고 오는 것이다. 이쪽으로 겨우 기어 오르셨을 때 나는 얼른 부축해 드렸다. 같이 찻간에 올라 귤을 내 오버 위로 와르르 쏟았다. 아버지는 흙 묻은 옷을 털더니만 한숨 놓는 말소리로 “나 간다. 도착하는 즉시 편지하렴” 하셨다. 승강구를 뛰어내려 몇 발을 옮기더니만 또 뒤돌아보며, “들어가라, 네 자리 살피렴!” 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고가는 인파 속에 파묻히자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내 자리로 돌아와 앉자 눈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내렸다.

 

 우리 부자가 몇 해를 두고 동분서주해 봤지만 집안 꼴은 갈수록 기울어갔다. 젊었을 적엔 살림을 늘리시느라 혼자서 타관 하늘을 떠돌며 많은 일도 저질러 보셨지만, 노경에 들어 이렇게 참담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버님 심경이야 어디를 보나 어디를 가나 스스로를 결정할 수 없는 실의 그것뿐이었다. 가슴에 맺힌 울분이 더러는 화가 되어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나를 대하는 것도 옛날과는 달라지셨다. 그러나 뵙지 못한 2년 동안 내 잘못은 잊어버리시고 나를 걱정하고 그리고 내 아들을 걱정하는 그런 노파심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어느 날 북경으로 보내온 편지는 이러했다.

 

 ‘늙은 몸이지만 그런대로 편안하게 지낸다. 다만 어깨쪽이 무겁고 아파서 견딜 수 없구나. 젓가락을 들거나 붓을 잡기에도 제대로 말을 안 들으니 말이야. 아마 갈 날이 멀지 않은 모양이지---.’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내 치렁한 눈망울엔 또 한 번 그 쪽빛 무명 두루마기와 까만 마꽐의 뒷모습이 뜨겁게 덤벼오고 있었다. 아아! 다시 뵈올 날은?

 

---1925년 10월 북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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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뒷모습 】주쯔칭(朱自淸) / 허세욱 옮김

 

 벌써 2년이 넘도록 아버지를 뵙지 못했다. 지금도 가슴을 허비는 것은 내 아버지의 그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별안간 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데다가 내 아버지마저 실직하셨으니, 우리 집의 불행은 겹으로 닥친 셈이었다. 나는 북경(北京)에서 부음1)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 가려고 그 때 아버지가 계시던 서주(西州)로 갔다. 서주 집은 살림이 엉망인 채 지저분했다. 생전에 단정하셨던 할머니 생각이 왈칵 덤벼 와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상고2)(喪故)와 실직을 함께 당하신 아버지께선 그런 경황 중에서도 침착하게 말씀을 하셨다.

“기왕 당한 일을 어찌하겠니? 또, 산 입에 설마 풀칠이야 못 할랴고?”

우리 부자가 집에 돌아가, 팔 것은 팔고 잡힐 것은 잡혀서 빚을 갚았지만, 할머니 장례로 진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

할머니와의 사별과 아버지의 실직은 참으로 우리의 앞길을 참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헛간 같은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선 남경(南京)으로 가 직업을 구하셔야 했고, 나는 북경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는 친구의 만류3)로 하루를 쉬었고, 이튿날 오전에 포구(浦口)로 건너가 오후에 북경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 때 아버지께선 볼일로 해서 역에 나오지 않기로 하셨다. 그 대신 여관에 있는 잘 아는 심부름꾼더러 나를 배웅하도록 당부하셨다. 그것도 서너 번이나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막상 내가 떠날 무렵이 되자 도저히 안심이 안 되시는지 자꾸만 머뭇거리셨다. 사실 그 때 내 나이 스물이나 되었고, 또 북경에도 벌써 두어 차례나 왕래했던 터이라, 아버지께서 그토록 염려하실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볼일을 제쳐놓으시고 친히 나를 배웅하기로 결정하셨다. 몇 번이나, 그러실 것 없다고 사뢰어도

“아니야, 그까짓 놈들이 무얼 해!”

하시며 따라나오셨던 것이다.

우리는 강을 건너서 역으로 들어갔다. 내가 차표를 사는 동안, 아버지께선 짐을 지키고 계셨다. 짐을 옮길 때에는, 짐이 많아서 역부에게 돈푼이라도 쥐어 줘야 했다. 역부들과 한바탕 흥정을 벌이셨다. 그런데 닳아빠진 그네들과 흥정을 하시는 아버지 말씀이 시원스럽지 못해 내가 참견을 했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대로 흥정이 떨어지자 역부들은 짐을 실었고, 나는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찻간까지 따라 오르시더니 차창 쪽으로 자리를 잡고 나는 그 위에다 아버지께서 사 주신 자주색 외투를 깔았다. 아버지는 나더러 도중에 짐을 조심하고 감기 안 들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판매원을 붙들고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연신4) 허리를 굽히며 당부하셨다.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우신 아버지의 순박하심을 비웃었다. 그들은 겨우 돈이나 아는 사람들, 왜 그렇게 쓸데없는 부탁을 하실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나이 스물인데 설마 내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 인제 들어가셔요.”

아버지는 창 밖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에 잠기더니,

“얘! 귤이나 몇 개 사 올 테니 여기 가만히 앉아 있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플랫폼 저쪽 울타리 밖으로 장수 서넛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저 쪽 플랫폼으로 가려면 철로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그리로 가려면, 이 쪽 플랫폼을 뛰어내려서 저 쪽 플랫폼의 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그것은 뚱뚱하신 아버지로선 여간 힘드시는 일이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가야 할 걸 한사코 당신이 가시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었다.

까만 천으로 된 둥근 모자를 쓰시고, 까만 괘자에 진한 쪽빛 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께선, 좀 기우뚱하셨지만,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플랫폼을 내려가셨다. 그러나 철로를 건너고 저 쪽 플랫폼의 벽을 기어오르실 때의 모습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두 손을 플랫폼 위 시멘트 바닥에 붙이고, 두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위쪽으로 발버둥쳐 올라가시다가 순간적으로 왼편으로 기우뚱하실 때, 아 이 아들의 손엔 땀이 흥건5)했다.

나는 그 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뺨을 적시는 뜨거운 것이 있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닦았다. 아버지께 들킬까 봐, 그리고 남이 볼까 봐 두려웠다.

내가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아버지께선 빨간 귤을 한아름 안고 이 쪽으로 오고 계셨다. 이번에는 먼저 귤을 홈 위에 놓고, 조심조심 플랫폼을 기어 내려와서, 다시 그 귤을 안고 철로를 건너오셨다. 이만큼 오셨을 때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곧 밖으로 나가시면서,

“나, 이만 간다. 도착하면 편지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승강구를 내려 몇 걸음 옮기시더니만 한 번 뒤를 돌아보시며,

“들어가라, 아무도 없는데…….”

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인파에 묻히자,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눈물은 또 한 번 쏟아졌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부자는 각각 타향에서 동분서주해 봤지만, 집안은 갈수록 기울어 갔다. 젊었을 적에는 살림을 일으키려고 혼자 타관6) 하늘을 떠돌며 일도 많이 저지르셨지만, 노경7)에 들어 이렇게 참담하게 되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또, 당신은 쓸쓸한 만년이 주는 괴로움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그래서 사소한 집안일에 지나친 분노를 토하시기도 하였다. 물론, 나에게도 지나친 분노를 토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에게도 지난날처럼 인자하기만 하진 않으셨다. 그러나 뵙지 못한 2년 동안, 아버지께선 나의 잘못을 모두 잊어 주시고 오히려 나와 내 아이들 걱정만 하셨다. 어느 날인가, 나는 북경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늙은 몸이지만, 그런대로 지낸다. 다만 어깻죽지가 무거워 젓가락을 들거나 붓을 잡기에 불편하구나. 아마 갈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왈칵 솟은 나의 눈물 방울엔 마괘자에 그 쪽빛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굴절되고 있었다. 아, 다시 뵐 날은…….



【 읽기 후 활동 】


1. 위 수필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서, 위의 상황을 한편의 수필로 다시 써 보자.

 

2. 다음 작품들을 찾아 읽고, 부모님의 사랑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이 글 의 내용과 비교해 보자.

 

- 김동명, ‘어머니’

- 유달영, ‘슬픔에 관하여’

 

 

【 참고 자료 】

 

  이 작품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수필이다. 자식에 대해 짐짓 무관심한 척하려는 아버지이지만,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정(父情)은 무척 인상적이다. 지은이가 다 큰 청년임에도 역까지 배웅 나오는 것이나, 특히 귤을 사려 뒤뚱거리는 몸으로 철길을 가로질러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랴?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작품이지만, 우리는 정서적 공감(共感)으로 인해 가슴이 따뜻해져 옴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여느 수필과 달리 사건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잘 짜인 구조 속에 몇 개의 짧은 장면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마치 영화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한 장면 속에 따뜻한 서정과 아름다운 주제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훨씬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고 우리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때 그 모습이 부모님의 깊은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든가, 남들의 눈에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싫어 부모님을 외면했던 일을 떠올리며 죄송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독자로 하여금 자신과 부모님의 관계를 떠올리며 반성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이 작품이 지닌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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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背影 : 아버지의 뒷모습] 
 
-주자청(朱自淸)-
 
 
내가 아버지을 뵙지 못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아버지 마저 실직되어 정말이지 불행이 겹쳐서 온 날들이었다.
내가 북경에서 서주에 온 것은 아버지를 도와 서둘러 장례를 치를 생각에서였다.
서주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뵈며 마당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보니 할머니 생각에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버지는 애써 태연한 듯이 말씀하셨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느냐.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느냐?"

집에 돌아와서 급한 대로 저당을 잡혀 돈을 변통하고 아버지는 빚을 갚았다.
그리고 또 돈을 빌려 장례를 치렀으니 당시의 집안 형편은 매우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빌린 돈의 반은 장례를 치렀고, 또 반은 아버지의 실직으로 그럭저럭 써 버렸다.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는 남경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셔야 했고,
나도 북경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는 동행하게 되었다.

남경에 도착해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거기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는 포구로 가서 강을 건너 오후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가야 했다.
아버지는 바쁘셔서 나를 전송 하지 못 하겠다고 하셨다.
대신 아버지는 여관의 잘아는 심부름꾼에게 같이 가도록 부탁을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심부름꾼에게 자질구레한 하나 하나까지 자상하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지 자못 한참 동안 망설이시는 것이었다.
 
그 해 나는 이미 스무 살이 넘었으며 북경도 벌써 두 세 차례 왕래한 적이 있었으므로,
사실 아버지가 걱정할 것은 못 되는 일이었다.
한동안 머뭇거리시던 아버지는 끝내 당신이 나를 전송하기로 결정 하셨다.
나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몇 번을 만류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만 말씀하셨다. 
"괜찮아, 남에게 너를 맡기는 것은 좋지 않아!"

우리는 강을 건너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나는 표를 샀고 아버지는 짐을 살피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짐이 너무 많아서 돈을 주어 짐꾼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도 아버지는 그들과 짐 값을 깎느라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때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귀에 거슬리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어코 짐 값을 깎으시고는 나를 태워 주셨다.
 
아버지는 차창가로 내 자리를 잡아 주셨고,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자줏빛 털 외투를 자리에 깔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길 조심 할 것을 말씀하셨고,
밤에는 때로 정신을 차려 감기에 들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심부름꾼에게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계신다고 아버지를 비웃었다.
돈만 받으면 그뿐인 그들에게 부탁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이만한 나이에 내 일 하나 처신 못할까봐서....?
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내가 지나칠 정도도 너무 총명하였다.

"아버지 그만 돌아가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창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내 가서 귤을 몇 개 사 가지고 올 테니 너는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나는 저쪽 플랫폼의 울타리 밖에 몇몇 상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으로 가자면 반드시 철로를 건너야 했고,
그러려면 반드시 철로를 건너 저쪽 플랫폼으로 기어올라가서는 다시 내려와야만 했다.
 
아버지는 몸이 뚱뚱하셔서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당신이 가시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까만 천의 작은 모자를 쓰고,
검고 큰 마고자와 검푸른 색의 솜 저고리를 입고 뒤뚱거리며 철길을 건너가셨다.
거기까지는 그런 대로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저쪽 플랫폼을 오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손으로 위쪽을 잡고 힘들 다해 두 다리를 끌어당기시는 아버지는
그런 상태에서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계셨다.
 
이 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남들이 볼까 봐, 그리고 아버지가 볼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다시 창 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아버지는 주홍빛 귤을 안고 걸어오고 계셨다.
아버지는 다시 철길로 내려와야 했으므로 귤을 다시 땅에 내려놓으시고
천천히 내려서는 다시 귤을 끌어안고 오셨다.
내 곁으로 오셨을 때 나는 얼른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와 나는 다시 기차 안으로 들어와 사 가지고 온 귤을 외투에다 쏟아 부었다.
 
그때서야 아버지는 할 일을 다 해서 홀가분하다는 듯이 옷을 털고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 이제 간다. 가서 편지하렴."
아버지는 다시 몇 걸음 옮기시더니 그래도 안심이 안 되시는지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들어가거라, 안에 아무도 없잖니!"
아버지의 뒷모습이 사람들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는 들어와 앉았고 또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또 나대로 너무나 바빴고,
그런 와중에 집안 형편은 나날이 기울어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밖으로 나가 일을 하며 자립하신 분인데,
늙어서까지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침울함 속에서 나날을 보내셨다.
그러니 이따금 그 울분을 토해 내시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나를 대하는 것도 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근 2년 동안을 찾아 뵙지도 못했는데, 그런 당신의 아들을 보고 싶어하셨다.
 
북경으로 돌아오고 나서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제 늙었나 보다. 어깨가 무겁고 너무 아파서 젓가락을 들기도, 연필을 쥐기도 힘겹구나.
 이제 죽을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까만 천의 큰 마고자와 검푸른 색의 솜 저고리를 입고뒤뚱거리며 철길을 건너시던
그때의 아버지 뒷모습이 눈물 속에서 또 다시 떠오른 때문이었다.
 
아! 이제 언제쯤 아버님을 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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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2년이 넘도록 아버지를 뵙지 못했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의  뒷모습이다.

 

  그해 겨울, 별안간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데다가 아버지의 사업도 남에게 넘어가서, 불행이 엎친데 겹친 격이었다.  나는 북경(北京)에서 부음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 가려고, 그때 아버지가 계시던 서주(徐州)로 갔다. 서주 집은 살림이 엉망인 채 지저분했다. 생전에 단정하셨던 할머니 생각이 왈칵 몰려와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경황 중에서도 침착하게 말씀을 하셨다.

 "기왕 당한 일을 어찌하겠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어."

 

   우리 부자(父子)가 집에 돌아가, 팔 것은 팔고 잡힐 것은 잡혀서 빚을 갚았지만, 할머니 장례로 진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

 할머니와의 사별과 아버지의 실직은 참으로 우리 집안 형편을 참담하게 했다. 그러나 그 헛간 같은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남경(南京)으로 가서 일자리를 찾으셔야 했고, 나는 북경으로 가 학업을 계속해야 했기에 우리는 함께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 친구의 만류로 하루를 쉬고, 이튿날 오전에 포구(浦口)로 건너가 오후에 북경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버지는 일이 바쁘셔서 역에 나오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여관에 있는 잘 아는 심부름꾼더러 나를 배웅하도록 당부하셨다. 그것도 서너 번씩이나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막상 내가 떠날 무렵이 되자, 도저히 안심이 안 되는지 자꾸만 머뭇거리셨다. 사실 그때 내 나이 스물이나 되었고, 또 북경에도 벌써 두어 차례나 왕래했던 터라, 아버지께서 그토록 염려하실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볼일을 제쳐놓으시고 친히 나를 배웅하기로 결정하셨다. 몇 번이나, 그러실 것 없다고 말렸지만 "아니야, 그까짓 놈들이 무얼 해!" 하시며 따라 나오셨다.

 

  우리는 강을 건너서 역으로 들어갔다. 내가 차표를 사는 동안, 아버지께선 짐을 지키고 계셨다. 짐이 많아서 역부에게 돈푼이라도 주면서 옮겨야 했다. 역부들과 한바탕 흥정을 벌이셨다. 나는 그때 지나치게 똑똑했던 것인지 아버지 말씀이 촌스럽다고 생각해서 직접 말참견을 했다. 결국, 아버지가 흥정을 끝내자 역부들은 짐을 실었고, 나는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찻간까지 따라 오르시더니 차창 쪽으로 자리를 잡고 나는 그 위에다 아버지게서 사주신 자주색 외투를 깔았다. 아버지는 나더러 도중에 짐을 조심하고 감기 안 들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판매원을 붙들고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연신 허리를 굽히며 당부하셨다.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버지의 어수룩함을 비웃었다. 그들은 돈만 밝히는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쓸데없는 부탁을 하실까? 게다가 나도 이만한 나이에 설마 자신도 챙기지 못할까봐?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나는 너무 똑똑한 척 했다.

 "아버지, 이제 돌아가세요."

 

  아버지는 창 밖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에 잠기시더니, "얘! 귤이나 몇 개 사올 테니, 여기 가만히 앉아 있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플랫폼 저쪽 울타리 밖으로 장사꾼 서넛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 플랫폼으로 가려면 철로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그리로 가려면, 이쪽 플랫폼을 뛰어내려서 저쪽 플랫폼을 기어올라야 했다. 그것은 뚱뚱하신 아버지로선 여간 힘드신 일이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가야 할 걸 한사코 당신이 가시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까만 천으로 된 둥근 모자를 쓰시고, 까만 마고자에 진한 쪽빛 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는 뒤뚱거리며,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고 플랫폼을 내려가셨다. 그러나 철로를 건너 저쪽 플랫폼을 기어오르실 때의 모습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두 손을 플랫폼 위 시멘트 바닥에 붙이고,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위쪽으로 발버둥쳐 올라가다가 순간적으로 왼편으로 기우뚱하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 역력했다.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가 볼까봐, 그리고 남이 볼까봐 두려웠다.

 

  내가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아버지께선 주홍빛 귤을 한아름 안고 이쪽으로 오고 계셨다. 이번에는 먼저 귤을 홈 위에 놓고, 조심조심 플랫폼을 기어 내려와서, 다시 그 귤을 안고 철로를 건너오셨다. 이쪽에 이르렀을 때 나는 얼른 가서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지는 나와 기차에 올라 귤을 모두 내 가죽외투에 놓으셨다. 그리고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터는데 ,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신 것 같았다. 곧 밖으로 나가시면서, "나, 이만 간다. 도착하면 곧 편지해라!" 하고 말씀하셨다. 승강구를 내려 몇 걸음 옮기더니, 다시 뒤를 돌아보시며, "들어가라. 안에 아무도 없는데......" 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인파에 묻히자,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부자는 각각 타향에서 동분서주해봤지만, 집안은 갈수록 기울어갔다. 젊었을 적에는 살림을 일으키려고 혼자 타관 하늘을 떠돌며 일도 많이 하셨지만, 노경에 들어 이렇게 참담하게 되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아버지는 쉽게 마음이 상하셔서, 자연히 감정을 억제하실 수가 없었다. 감정이 마음에 쌓이게 되자, 자질구레한 집안 일이 왕왕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게 했다. 나를 대하는 것도 점차 예전과 달라졌다. 그러나, 최근 2년간 만나지 못하자, 아버지께선 나의 지난 잘못은 모두 잊으시고 오히려 나와 내 아이들 걱정만 하셨다.

 

   어느 날인가 내가 북경에 있을 때, 받은 아버지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늙은 몸이지만, 그런 대로 잘 지낸다. 다만, 어깻죽지 통증이 심해, 젓가락을 들거나 붓을 잡기에 불편하구나. 아마 갈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왈칵 솟은 나의 눈물 속에, 마괘자에 그 쪽빛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렸다.
아,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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