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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 보들레르
2018년 04월 19일 01시 10분  조회:6493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821. 4. 9, 파리
사망 1867. 8. 31,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보들레르, 프랑스의 시인.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 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Charles(-Pierre) Baudelaire)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Charles(-Pierre) Baudelaire)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의 저자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1855년)

에드거 앨런 포의 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했고, 죽은 지 오래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 속에서 타락과 악덕의 존재로 동일시되는 보들레르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듯 여겨질 만큼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현대 문명에 가까이 접근한 시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 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생명의 모든 징후(한 송이 꽃의 빛깔, 창녀의 찡그린 얼굴)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현대 세계의 인간 조건에 호소하고 있으며, 주제 선택의 제약을 거부하고 상징의 시적 힘을 강력히 주장한 점에서도 역시 현대적이다.

보들레르의 초기생애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 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 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 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 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 소령(général Aupick)
오피크 소령(général Aupick)

샤를 보들레르의 의붓 아버지

오피크는 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 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 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 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 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 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 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 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 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 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 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 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 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 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 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 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악의 꽃(Les Fleurs du mal) 초판과 작가의 메모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 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 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 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 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 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 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 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 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들레르의 중기생애

보들레르의 원숙기는 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 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

미국의 작가·시인·편집자·문학평론가

〈기담(奇談)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 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é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 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 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 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 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 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 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르뷔 데 되 몽드지 (Revue des Deux Mondes)
르뷔 데 되 몽드지 (Revue des Deux Mondes)

프랑스 월간 잡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정기 간행물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이미지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 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 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검열).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 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 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Épaves〉이라는 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 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 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보들레르의 후기생애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 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 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äuser à 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éene〉(1861)에,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 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 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 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 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 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 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 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 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 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 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 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 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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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1년 04월 09일
사망 1867년 08월 31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 《악의 꽃》, 《파리의 우울》 등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퇴폐적이고 우울한 정서와 날카로운 필치가 특징이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시인으로, 그로부터 프랑스 현대시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악덕과 죄악감, 육체적 욕망을 외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우울과 실존적 권태 등을 표현한 그는 당대 프랑스 문화계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도 '퇴폐의 시인'으로 불리지만, 한편으로 19세기 파리 및 모더니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낭만주의 미술과 현대성을 새롭게 정립한 미술 비평가이기도 하며, 당대 시와 소설 비평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문학의 현대성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1821년 4월 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제프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환속한 사제로, 그가 태어났을 때 62세의 고령이었다. 어머니 카롤린느 뒤파이스는 조제프의 두 번째 부인으로 당시 28세였다.

아버지 조제프 프랑스는 신부 출신이었음에도 자유주의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할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조제프는 보들레르가 6세 때 죽었으나 그의 이런 기질과 취향은 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보들레르는 후일 몇몇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 할아버지처럼 온화했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사제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미술 평론을 하게 된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샤를 보들레르
샤를 보들레르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다른 방향에서 보들레르의 성격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1828년에 어머니는 직업군인인 오픽 소령과 재혼하는데, 그는 엄격하고 권위적인 인물로 반항기 많고 예민했던 사춘기의 보들레르와는 잘 맞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고통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지독한 중학 시절'을 보내게 했다고 표현하면서 의붓아버지를 증오했으며, 패배감과 상실, 우울함에 젖어 자라났다.

1832년에는 오픽이 리옹으로 부임함에 따라 가족이 모두 이주했다. 보들레르는 리옹 왕립 중등학교에서 공부한 뒤 파리로 올라가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에 진학했으나 18세 때 품행 문제로 퇴학당했다.

중등학교 시절부터 보들레르는 시인이 되고자 마음먹고 계속 시를 썼다. 그럼에도 성적은 좋았지만, 우등생은 아니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보들레르는 규율에 복종하기를 싫어하는 반항심 많은 학생이던 것이다. 퇴학당한 해 8월, 보들레르는 대학 입학자격고사에 합격했으며, 의붓아버지 오픽의 의견에 따라 파리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고 문학가들과 어울리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매춘부에게 다니면서 성병에 걸리고, 빚까지 지게 된다. 결국 이복형 알퐁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족들은 그를 파리의 퇴폐적인 생활에서 떨어뜨려 놓고자 인도행 배에 태워 여행을 보냈다. 그는 모리스 섬을 거쳐 레위니옹 섬에 몇 달간 머무르면서 이국적 정취를 느끼고 시를 지으면서 보냈으나 나머지 여정을 거부하고 7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1842년, 21세가 된 보들레르는 성년에 이르자마자 후견인인 의붓아버지가 관리하던 친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돌려받았다. 그는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2년도 지나지 않아 유산의 약 절반을 써 버렸는데, 결국 놀란 가족들이 금치산 선고를 신청하여 이후부터 법정 후견인의 관리 아래 매월 돈을 타 쓰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큰 굴욕감과 패배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매달 받는 돈을 항상 며칠 만에 다 써 버리고 돈 문제로 후견인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가족, 특히 의붓아버지 오픽에 대한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1846년에는 자신의 재산 전부를 애인인 잔느 뒤발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 소동을 벌였고, 1848년 2월 혁명 당시에는 소총을 손에 들고 "오픽 장군을 총살하러 가자!"라고 외치며 돌아다니기까지 했다고 한다.

보들레르가 사랑한 잔느 뒤발
보들레르가 사랑한 잔느 뒤발

1845년, 보들레르는 친하게 지내던 문인들의 격려 속에 미술 비평을 시작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음을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곤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던 듯하다. 그해 미술전에 출품된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실은 《1845년 미전평》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듬해 《1846년 미전평》에서 낭만주의, 색채 등에 대한 그만의 시학과 미론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 비평과 영어 소설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작업도 했다. 무기력과 권태를 다룬 중편소설 〈라 팡파를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유일한 소설이다. 한편 사람의 감각을 고양시키는 방편을 여럿 연구했는데, 그러면서 술에 빠져들고 마리화나를 접하기도 했던 듯하다. 후일 신경흥분제로서의 포도주와 마리화나의 효능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한다.

1847년, 보들레르는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접한다. 그는 〈검은 고양이〉를 읽고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고, 포를 '자신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 칭할 정도로 완전히 매료되었다. 보들레르는 이듬해부터 약 13년간에 걸쳐 포의 단편 대부분을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한다. 미국에서 다소 낮은 평가를 받던 포는 보들레르의 번역과 비평으로 프랑스에서 높게 평가되었고, 이후 낭만주의 및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1857년, 근대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게 될 문제작 《악의 꽃》을 출간했다. 이 책은 보들레르가 남긴 유일한 시집으로, 그는 이 시집으로 후일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1851년경부터 다양한 제명으로 몇 편씩 발표했던 것으로, 대부분 그 무렵에 쓴 것이다. 서시 〈독자〉 및 〈우울과 이상〉, 〈악의 꽃〉, 〈반항〉, 〈술〉, 〈죽음〉의 5부 100여 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19세기 현대 도시화된 파리의 우울, 인간 소외, 권태와 환멸, 혼란 등을 분열적인 시각으로 그려 내고 있다. 보들레르는 그 어떤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며, 당대 유행하던 낭만주의의 지나친 감상성과 무절제, 비이성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한편, 미(美)를 극도로 찬양했다. 그의 시들은 낭만주의의 정신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가 비판했던 낭만주의의 결함을 뛰어넘으면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독일의 문예학자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라는 말은 보들레르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라고 표현했으며,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보들레르는 '새로운 전율'을 만들어 냈다."라고 극찬했다.

보들레르의 메모가 담겨 있는 《악의 꽃》 속표지
보들레르의 메모가 담겨 있는 《악의 꽃》 속표지

그러나 몇몇 문학가의 극찬을 받았음에도 그는 당대인 대부분에게 외설적인 필화 사건을 일으킨 시인 정도로 여겨졌다. 《악의 꽃》은 출간 즉시 풍기문란하고 비도덕적이라며 비난받았고, 결국 보들레르는 경범재판소에 기소되어 벌금형 및 6편의 시를 삭제 출간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1861년에 32편의 신작 시를 증보하여 《악의 꽃》 재판을 간행하고, 1866년에는 삭제된 6편을 비롯해 새로운 시들을 추가한 재판을 간행했다.

보들레르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파리 생활에 환멸을 느꼈으며, 경제적 궁핍과 매독 재발로 고통을 겪었다. 1864년, 그는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원하던 문학적 명성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고 아편에 빠져들었다. 벨기에로 간 지 2년 만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생 루 성당에 갔다가 뇌연화증으로 쓰러졌다. 이후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채로 파리의 요양원에서 지내다 이듬해인 1867년 8월 31일 사망했다.

보들레르의 또 다른 대표 시집 《파리의 우울》은 보들레르가 여러 잡지에 발표한 산문시를 사후에 묶어 출간한 것이다. 작가 본인이 일관된 구성에 맞추어 고르고 재구성한 시집이 아닌 탓에 각 시들은 독립적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이 발표한 산문시를 '리듬과 각운이 없어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서정적인 영혼의 움직임, 물결치는 상념, 의식의 경련이 유연하면서도 거칠게 표현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후일 베를렌, 말라르메 등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에 그 문학적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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