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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조선인민군행진곡 작곡가 - 정률성
2018년 06월 08일 00시 24분  조회:4478  추천:0  작성자: 죽림
시대 근대
출생 1918년
사망 1976년
경력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인민군협주단 단장
유형 인물- 정률성
직업 독립운동가, 음악가
대표작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연안송가, 팔로군행진곡(군가)
성별
분야 역사/근대사

요약 1918∼1976. 독립운동가, 음악가.

개설

아명(兒名)은 정부은. 별명은 유대진(劉大振). 광주 출신. 숭일학교와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첫째형 정남근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933년 봄 셋째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봉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하였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남경에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에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延安)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여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가 1976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품활동

연안에 있을 때 작곡한, 「연안송가(延安頌歌)」와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이후 「중국인민해방군(中國人民解放軍)」 군가로 바뀌어 불렸다) 외에,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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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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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중국어 간체자郑律成정체자鄭律成병음Zhèng Lǜchéng 정뤼청[*]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출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곡가로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다.

목차

 [숨기기

생애[편집]

 
정율성 선생 탄생지비(광주 동구 불로동)

1914년에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 (현 불로동 163번지)에서 태어났다.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신흥학교에 입학을 했다.[1] [2]

1933년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에 머물던 시기에 피아노바이올린성악등을 공부했다.

1936년에 그는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1939년에 중국 공산당의 가입과 동시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194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등을 작곡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저우언라이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률성을 중국으로 파견했고, 중국에 입국한 그는 음악 활동에 몰두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1976년 12월 7일에 베이징에서 사망하였고 바바오산 혁명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편집]


  • 옌안송
  • 팔로군행진곡
  • 연수요
  • 싱안링에 눈이 내리네
  • 십륙자령 3곡
  • 오페라 <망부운>
  • 벌목요
  • 생산요
  • 강대한 함대 바다에서 행진한다
  • 우리는 행복해요
  • 초록빛 조국
  • 소산에 이르러
  • 매화를 읊노라
  • 장정
  • 진아를 기다리며
  • 청평악-육반산
  • 물길에 내 마음 싣고
  • 심원춘-장사
  • 포정함대 출동했다
  • 광창길에서
  • 매령3장
  • 우리는 행복해요
  • 중조우의 <中朝友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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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의 숙명의 동반자정설송
 
 

 
“중국 3대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민족의 걸출한 작곡가 정률성 선생의 부인 정설송 녀사가 지난 5월29일 로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2세.
 
정률성 선생은1914년 한국 전남 광주에서 출생, 1933년 일제의 압박을 피해 친지들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조선 의렬단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벌렸다. 그 기간 로씨야의 유명 음악가 크리노와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했다.
1937년 상해를 거쳐 연안으로 간 정률성은 로신예술학원에 입학해 음악적 재능을 갈고 닦았다. 2년후 중국 공산당에 가입, 그후 “팔로군행진곡”을 작곡 발표했다. “앞으로(向前),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 나간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힘찬 곡조와 가사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항일의 의지를 북돋우어 주었다.
정률성이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새 중국이 성립된후 “인민해방군가”로 불렸으며 1988년에는 당시 중앙군사위 등소평주석에 의해 정식 군가로 지정됐다. 정률성은 이곡 외에도 “연안송(延安頌)” 등 360여곡을 남겼다.
중국은 정률성을 “3대 혁명음악가” 겸 “건국 100대 영웅”으로 선정해 지금도 추앙하고 있다. 2002년 그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중국에서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정률성의 부인 정설송(丁雪松) 녀사는 한족으로서 1919년 사천성 중경에서 꽤 떨어진 시골 파현(巴縣)에서 유복자로 태여났다. 초ㆍ중학교를 기독교계통의 미션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18세에 공산당에 가입, 연안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녀전사로 새 중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국무원 외사판공실 비서장,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거쳐 중국 녀성으로는 최초로 화란과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79년 주 화란 중국대사로 국제 외교무대에 나선 정설송 녀사  
 
그녀가 조선인 남편 정률성을 만난 것은 연안에서였다.
당시 정률성은 연안의 스타였다. 입으로는 하모니카를 불고, 손으로 만돌린을 타며 발로는 타악기를 치는 정률성의 넘치는 끼와 재주는 단번에 연안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준하고 지적인 용모와 서정적인 목소리는 항일군정대학 녀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미 항일군정대학 녀들 사이에서는 률성 을 둘러싸고 사랑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정률성을 남몰래 지켜보는 한 녀성혁명가가 있었다. 바로 정설송이였다. 정률성도 자신과 동갑인 이 녀성혁명가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통통한 얼굴에 늘 군복 차림의의 정설송은 빼여난 미모에 더구나  “항대” 녀전사들의 리더로 당 지도부의 총애까지 받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정설송
 
그 무렵 정설송은 자신의 동굴집에서 일고있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책상이 말끔하게 정리돼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들꽃 몇송이가 방안에 놓여 있었다. 어느날  책상우에는 또 소설책 2권이 놓여 있었다. 명작 “안나 까레리나”와 “동백꽃 처녀”였다. 책갈피에는 “꼬마 녀군관에게 드림, 정률성”이라고 씌여있었다.  며칠후 정률성이 정설송을 찾아 말했다. "회의때면 나무나 엄숙하고 말수도 적어 가까이 접할수 없어 생화와 책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천생의 배필이자 동지로 중국 대륙에 항일의 혼을 뿌린 정률성과 정설송은 그렇게 만났다.
정률성 과 설송은 항일 전선의 화약 냄새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키워갔다. 백설이 연안을 감싸던 1941년 년말, 률성과 설송은 드디여 결합하였다.
결혼식이 열린 로신예술학원에는 연안으로 집결한 조선의용대원들의 힘찬 축하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두사람 사이에서 곧 딸이 태여났으나 경제형편이 넉넉하지 못한지라 정률성은 가장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았다. 딸 이름을 “소제(小提)”로 지은 것은 이 일을 잊지않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딸 소제씨도 아버지를 이어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정소제는 음악가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한뒤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작곡가, 중국 관광출판사 음악편집인을 거쳐 현재 북경바로크합창단 단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패망후 정설송은 남편 정률성과 함께 조선에서 “북조선 로동당 중앙화교 사무위원회” 비서장(1947년), 북조선 화교연합총회 위원장(1948년), 중국 동북행정위원회 상업대표단 대표(1949년), 신화통신사 평양분사 사장 등을 지냈다.
 

평양에서의 정률성과 정설송
 
조선전쟁을 전후해 중국으로 돌아 온 정 녀사 는 중국 최초의 녀성대사로 화란과 덴마크대사를 력임하며 국제 외교무대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후 전국정치협회 위원, 대외우호협회 리사 겸 중남미 우호협회 부주석을 지냈다.
 

로신의 부인 허광평과 함께 한 정설송
 
정률성은 58세 때인 1976년 12월7일 친구와 사냥을 하던 도중 뇌혈관 파렬로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외교업무에 바빴던 부인 정설송 녀사 는 "추운 날씨에 사냥 나가는 남편을 말리지 못했다"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정설송 녀사는 남편 정률성이 묻혀있는 북경 팔보산 혁명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김혁 
 
종합신문” 201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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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스크린에 오르는 정률성
 
김혁
 
 
1
 
베이징 “해안화청”텔레비드라마유한회사와 한국 동성제작사(사)가 지난 1월 16일 베이징에서 제작인과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 “청년 정률성” 제작사인회를 가졌다.
영화는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든 정률성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주선으로 다루게 된다.
영화에 한국과 중국의 젊은 배우들을 대거 기용, 이미 정률성 역과 부인 정설송 역을 분할 주요 배우들이선정되였다. 영화는 3월 한국의 광주와 중국의 연안등지에서 곧 크랭크인 하게 된다.

영화의 제작측인 “해안화청” 회사는 지난해 1월 “파이판(派饭)”이라는 음식과 생활 소재의 코미디 영화로 한국에 진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얻은바 있다.
 
2
 
정률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해를거쳐 중국 남경에 이르렀다.
남경에서 “의렬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열아홉 살의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연안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루쉰예술학원을 나왔고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그의 노래는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널리 유전되였다. 그후 그의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9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바로 정률성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후날 중국 최초의 녀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다.
연안시기 정률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률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가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과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이로서 정률성은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1952년 정률성은 중국에 돌아와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중국의 운남, 대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률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1978년 북경음악출판사에서 “정률성가곡선”이 출판되었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한 사람으로 당선되였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있다.

3
 
지난해7월 초 방한한 습근평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률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률성의 위상은 높다.

정률성의 일대기는 일찍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1992년 조선의 “2.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음악가 정률성”을 전, 후편 긴 편폭으로 제작했다. 영화는1950년대 북한으로 간 정률성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첫 단장으로 되여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려냈다.

2002년 중국에서도 정률성 관련 영화 “태양을 향하여”를 출품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였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률성과 부인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연안에서 뿐만 아니라 북경, 천진, 장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였다.
 
한국등지에서는 아직도 겨레의 걸출한 음악가 정률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률성의 활동한 주무대가 중국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률성선생이 한국에서 태여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롭게 제작되는 또 한 부의 정률성 관련 영화가 중국 나아가 남북이 모두 애대하는 음악가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영화로 스크린을 수놓기를 바라며, 그이의 생애 그리고 그이의 음악이 하루 빨리 한국 나아가 만방에 알려 졌으면 하는 바램을가져 본다.
 
2015년 1월 28일
“청우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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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谊路233号   관람시간 :9 :00-11:00/13:30-16:30 

정률성(1914-1976)

1937년 중화 대지가 일본 침략자의 철제에 짓밟혔다. 산하가 부서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였다. 중화민족은 최대의 위험에 빠졌다. 적군의 무차별한 진공에 맞서기 위해 중국공농홍군주력부대는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재편되여 저항전을 펼치면서 감격의 서사시를 써내려갔다. 그 후로 2년이 흐른 한겨울의 연안 보탑산을 진동시킨 우렁찬 노래소리ㅡ순박한 노래말에 간결하면서도 박진감있는 곡조와 격정넘치는 선률로 이뤄진 이 노래는 우리나라의 명시인인 송목 시인과 천재 작곡가로 불리는 정률성이 함께 지은 “팔로군행진곡”이다. 이 곡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 무장력량의 희생을 두려워않는 영용함과 불굴의 정신력, 호기로운 기세를 재현했다. 1939년 인민의 음악가로 불리는 선성해 동지의 “황하대합창” 영향에 힘입어 정률성과 송목은 “팔로군대합창”이라는 모음곡을 창작했다. “팔로군행진곡”은 모음곡중 여덜번째 곡이다. 정률성과 송목은 인민군대의 무한한 열성과 기개를 가사에 담아 행진곡을 완성했다. 작곡을 담당한 정률성은 악보 첫 페이지 웃쪽에 큼지막한 여덜글자를 적었다.
 “팔로군 영웅들에게”​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해......”, 당시의 “팔로군행진곡”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불려지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이 노래를 부르며 일본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고 이 노래를 부르며 천안문 광장에서 모주석의 검열을 받았다. 오랜시간 진정으로 군인을 위한 선률을 불러오면서도 군가의 영향력에 비해 군가를 창작한 작곡가 정률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올해는 중국인민행방군 건군 90주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탄생 8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불굴의 음악가 정률성을 회억하며 “군가에 깃든 옛이야기”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사명일 것이다.정률성은 1914년 7월 7일 조선반도 남부의 전라남도 광주 양림정(현재의 한국 광주광역시 양림동”에서 태여났다. 태여날 당시 이름은 정부은이었다. 그가 태여나기 4년전인 1910년 조선은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 애국주의자였던 정률성의 부친 정해업은 아들이 항일 구국투쟁 참가를 기껍게 여겨 아들에게 항상 힘을 실어주었다. 정률성의 세 형들도 모두 조선과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했었고 그중 맏형과 둘째형은 중국 공산당원으로 혁명투쟁에서 희생되였다. 정률성은 19세에 세 형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 남경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했다. 남경에 도착한 후 그는 조선혁명 간부학교에 다니면서 로씨야인 스승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당시 그의 음악 잠재력을 알아본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률성(律成) 이란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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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 정률성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가 발전장대되여 남장촌으로 이주한 력사적 선로를 따라 우리 탐방팀일행은 남장촌으로 향발하였다.

남장촌은 4000여명의 인구가 살고있는 비교적 큰 마을이였는데 마을입구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고 거기에는 로천무대가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무대를 《희대(戱臺)》라고 불렀다. 무대 맨우에는 모주석초상이 걸려있고 그 량옆에 《남장》(南庄)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중조한우의기념대》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는데 지금은 남장촌문화중심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이 지방에서도 문화관광차원으로 력사문화자원을 발굴하여 보존하면서 활용하고있었던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무대는 1943년 조선혁명군사학교설립을 위해 지은 무대라고 한다. 이 무대우에서 조선의용군전사들은 항일선전사업을 벌리고 당지군중들에게 항일내용의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그 무대뒤에는 조선독립동맹본부가 자리잡고있었고 공터에서는 의용군전사들이 군사훈련을 진행하였으며 동쪽에 위치한 현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있는 옛 절간자리는 조선혁명군사학교로 사용되였다고 한다.

 《조선의용군주둔옛터》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그 옛 절터에는 1943년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혁명간부와 핵심인물들을 그곳에서 양성하였다는 내용을 새긴 기념비가 서있었는데 정률성이 교육장으로 사업했다고 분명히 새겨져있었다.

이 남장촌의 옛 절터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정률성의 체취라도 느낄것처럼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수건중으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워놓은 공칸에서 깊숙이 심호흡을 하였다. 항일의 전장에 나선 조선혁명가들의 발자취가 중국의 어디엔들 찍히지 않았을가? 그 옛터를 마주하고 우리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와 《조선인민군군가》를 모두 작곡한 정률성이 혹시 또 이 자리에서 《조선의용군행진곡》을 창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자리에 한동안 못박힌듯 서있었다.

정률성은 1933년 15세 어린나이에 혁명투쟁의 길에 나선 형제들의 뒤를 따라 중국 남경에 도착하였다. 워낙 민족절개가 강한 그의 부친 정해당은 극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식들을 일제와 싸우는 항쟁의 길로 하나하나 떠나보냈던것이다. 정률성의 맏형과 둘째형은 조선의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에 들어와 항일혁명활동을 계속하였다. 맏형 정남근은 비밀리에 조선에 들어가 혁명운동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였고 끝내 병사하였다.

둘째형 정인제는 운남강무당에서 군사를 배웠고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주덕동지와 동창생이였는데 대혁명시기에 국민혁명군 제24군 중좌참모로 있으면서 무한 등지에서 싸우다가 희생되였다. 셋째형 정의은은 조선공산당 당원이였으며 중국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학생들을 모집하는 사업을 담당하고있었다. 그때 정률성은 셋째형을 따라 조선의 열혈청년들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던것이다.

정률성은 남경에서 의렬단이 꾸리는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 3민주의, 조선력사, 맑스-레닌주의를 배웠으며 졸업후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 자신이 열애하던 음악공부에 정진하게 된다. 친구의 소개로 상해에서 국립음악전과학교에서 쏘련의 유명한 가수 끄릴노와교수한테서 성악공부를 하면서 천재적 음악재능을 인정받아 《동방의 카루소》라 찬양받는다. 1936년 봄 그는 남경문예계청년들의 항일구국조직인 《5월문예사》에 가입하며 또 《7.7》사변후 라청을 통해 《인민음악가》 선성해를 만나게 된다. 다시 상해에서 조선혁명가 김규광의 안해이며 상해부녀구국회 지도자인 두군혜를 통하여 연안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다.

1937년 10월 19세나는 정률성은 적들의 첩첩한 봉쇄망을 뚫고 오매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에 도착하였다. 가렬처절한 전쟁년대였지만 연안은 그에게 배움의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는 섬북공학 제1기 7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가창활동을 적극 벌렸는바 늘 수천명되는 군중들 앞에서 노래지휘를 하군 하였다. 1938년 5월 로신예술학원이 창립되자 그는 음악학부에 들어가 불타는 구지욕으로 부지런히 배우면서 음악창작을 하였다.

당시 연안은 비록 움집에서 생활하면서 몹시 간고하였지만 가는 곳마다 생기가 넘치고 명랑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정률성은 동무들과 함께 연안북문밖의 산비탈에 올라가 생기있고 장엄한 연안성을 굽어보며 막야와 함께 벅찬 감격으로 《연안송가》를 창작하였다. 연안강당에서 있은 한차례 야회에서 정률성은 손수 만돌린을 타면서 한 녀가수와 함께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이 야회에는 모택동주석께서도 참가하시여 만족스럽게 웃으시면서 군중들과 함께 박수를 쳐주시였다.

어느 하루 모주석께서는 왕진동지를 불러 물으셨다. 《로신예술학원에는 정률성이라는 나젊은 재간둥이 작곡가가 있는데 그 동무를 압니까?》《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이름은 알고있습니다.》

왕진동지가 대답하자 모주석께서는 건의삼마 귀띔하였다. 《그럼 그를 한번 찾아보고 그더러 새로 온 조선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조직하는것이 어떻습니까?》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왕진동지는 정률성을 찾아 담화하고 그를 쏘련으로부터 연안에 와 359려에 배치받은 조선동지들과 대면시키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였으며 주덕총사령의 집에 함께 가서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왕진동지는 정률성의 음악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솔직하고 성실하며 의지가 강한 정률성을 무척 좋아하고 사랑해주면서 그의 음악창작활동에 지극한 관심과 배려를 돌려주었다.

정률성의 연안송가는 연하강반으로부터 재빨리 섬감녕변구로, 가렬처절한 전선과 국민당통지구, 먼 후방까지 전해져 억만 인민들의 마음속에 연안에 대한 경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전국인민들의 항일의 열정을 격발시켰다. 혁명의 뜻을 품은 수많은 청년들이 《연안송가》를 부르며 험난을 무릅쓰고 연안으로 모여들었고 전사들은 이 노래에서 용기와 힘을 얻고 원쑤들과 용감히 싸웠다.

1939년 1월 10일, 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로신예술학원에서 학습하고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받아 사업하면서 피타는 노력을 경주하여 또 공목동지와 함께 《팔로군대합창》을 완성하였다. 인민자제병들의 영웅적형상과 전투적기백을 생동하게 반영한 이 노래는 근거지와 유격구, 가렬처절한 전투마당에서 전사들과 청년학생들에게 널리 불리우게 되였다.

《팔로군대합창》의 1, 2 장절(팔로군의미에 따라 총 8장절로 되여있음)로 되여있는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은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초연탄우속에서 일본침략자와 국민당반동파를 타도하는 승리의 한길로 우리 전사들을 고무한 진군의 나팔소리로 되였다. 해방전쟁시기《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명칭이 바뀌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하는 장엄한 력사적의의를 띤 개국대전에서 여러차례 연주되면서 전파를 타고 세계각국에 널리 울려퍼졌다. 그후 이 노래는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명명된다. 정률성이 이 노래를 창작할 때는 겨우 21세였다.

1942년 5월 정률성은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을 듣고 신심과 용기를 가졌다. 그해 8월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였지만 전방에 나가 싸우겠다며 무정동지를 따라 태항산으로 떠났다. 무정동지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겸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학교 교장을 담임하고 정률성은 교무주임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원들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국민당군대에 대한 무장선전활동을 진행하고 때로는 무공대원들을 거느리고 특무망을 타진하는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943년봄부터 태항산에서는 《자력갱생 풍의족식》 대생산운동을 벌렸다. 정률성은 연안에서의 대생산운동경험을 전사들에게 소개해주고 직접 괭이를 메고 황무지를 일구는 일에 앞장서 나섰다. 한편 그는 생산현장에서 자신이 창작한 노래를 전사들에게 가르쳐주는외에 가사를 지어 옛곡에 붙이는 《군중창작운동》을 적극 창도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충청도 지방의 어느 민요에 맞춰 승리의 새봄을 그리는 조선의용군의 심정을 반영한 노래가 널리 애창되기도 하였다. 특히 녀전사들이 《도라지곡》에다 가사를 창작하여 지은 《미나리타령》은 산나물을 캐고 황무지를 일구는 《전투》에 대한 내부의 정서를 가시고 생산열조를 일으키는 면에서 큰 영향을 일으켰다.

정률성은 탄우가 비발치는 나날에도 악곡구상과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태항산에서 쓴 《조선의용군행진곡》(리득산 작사) 등 가요는 화북과 동북의 조선의용군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다. 전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군사훈련을 하였고 이 노래를 부르며 적진에 돌진하였다. 전투적 기백과 격정이 넘치는 이 노래는 《팔로군행진곡》과 더불어 조선인 항일전사들을 투쟁과 승리에로 나아가도록 고무해주었다. 무정장군도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불렀다고 한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 맞춰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둔 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속에

의용군기발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쑤의 철조망

양자강 황하를 뛰여넘어

피 묻은 만주벌 결전에

원쑤를 동해로 내여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앞길로

 

출처 :☞ 도로 찾은 나    글쓴이 :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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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구 (사)정율성선생기념사업회 본부장과 최창근 감사, 이을용 이사는 23일 오후 3시30분 시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구청 생가확인소송 검토 관련에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2일 남구 최영호 청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현재 생가 논란이 해결되지 않아 양림동과 불로동 양쪽에 생가가 조성되는 식으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해 법원에서 확인하는 방법을 검토 중이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정찬구 본부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광주시 정율성선생 생가 고증위원회에서는 불로동과 양림동을 ‘출생지’로 본 이유는 “현재의 행정구역인 불로동과 양림동을 포함하는 부동방면(不動坊面)에 있었다.”라고 발표한바 있다”며 “1914년 3월까지 불로동과 양림동은 부동방면(不動坊面)에 속하였지만, 정율성 선생이 태어나기 3개월 전 양림동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방림리·원지리·신사리의 일부를 합하여 양림리라 하고 효천면에 편입하였다.”고 말했다.


 


정찬구 (사)정율성선생기념사업회 본부장과 최창근 감사는 "남구청이 주장하는 친필이력서는 중국 중앙악단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짜이력서로 2009년 남구청에서 기념사업회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3월 7일 동부경찰서 최모 수사관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덧붙여 정찬구 본부장은 “현재 남구청이 주장하는 양림동 79번지는 정율성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30살 때 위 형 정의은이 1944년에 소유권을 취득하여, 살았던 곳을 ‘성장지’라고 발표한 것이다.”며,

“광주시 정율성선생 생가고증위원회에서는 2010년 8월 23일 당시 발표에서 문서기록상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이 단행되어 양림동이 ‘출생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고증위원회에서는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정율성 선생의 생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어 본인이 오늘 오전 남구청 최영호 청장에게 위 모든 내용을 설명한 바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정율성 선생의 가짜친필 이력서(동부경찰서 조사과정 가짜 이력서임이 밝혀짐)를 남구청장은 진짜 친필이력서로 잘 못 알고 있어 그 부분도 명확히 설명했다.”며, “앞으로 남구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된 해석과 소송관련 운운하면 강력히 대응하여 고발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22일 최영호 남구청장은 지난 2010년 양림동과 불로동 모두를 생가로 인정한 생가고증위원회의 결정을 재검토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밝힌바 있다.

남구는 당시 고증위원회를 결성한 주체인 광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구는 양림동이 정율성 선생의 생가로 결정되면 기념관, 문화관 건립을 추진할 계획이다.

남구는 지난 2004년 정율성 선생 기념사업을 시작하면서 양림동 79번지를 생가터로 지목하고 복원에 나섰으나 정씨 종친회가 불로동이 생가라고 맞서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율성 생가’ 갈등 지자체 ‘정율성 위해’ 손 잡다
광주 동구·남구·화순군 선양사업 등 공동 추진 합의
‘생가’ 대신 ‘유적지’ 사용 … ‘정율성 벨트’ 공감
광주 ‘중국과 친해지기’ 사업 탄력 받을 듯

2015년 10월 28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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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출신 중국 혁명음악가 정율성(1914∼1976) 선생의 생가 논란으로 갈등을 빚었던 자치단체들이 정율성 선생의 정신계승 및 선양사업을 공동 추진키로 전격 합의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진척되지 못했던 정율성 관련 사업과 광주시가 추진중인 ‘중국과 친해지기’ 사업이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시, 광주 동구·남구, 전남 화순군은 27일 광주시청에서 ‘정율성 선생 항일투쟁 및 예술정신 계승을 위한 지방자치 단체장 공동 합의문’을 발표했다. 윤장현 시장, 노희용 동구청장, 최영호 남구청장, 구충곤 화순군수는 1시간가량 간담회를 하고 합의문에 서명했다.

최영호 남구청장은 “(남구는)11년간 정율성 선생 사업을 해왔지만, 3개 지자체를 연결하는 정율성 벨트를 조성하자는 데 공감한다”면서 “더 이상 소모적 논쟁이 재발돼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노희용 동구청장은 “그동안 논란의 핵심은 ‘생가’였다. 위대한 인물을 기리고 한중교류의 핵심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앞으로는 ‘생가’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말고, 동구 유적지, 남구 유적지, 화순 유적지 등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구충곤 화순군수는 “광주시가 나서 합의를 이룬 것이 천만다행이다”면서 “늦은 감이 있지만, 지자체 간 뜻을 모으면 정부 공모사업 등을 통해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단체장들은 내달 16∼19일 중국에서 열리는 정율성 음악회에 함께 참석하기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단체장들은 소모적인 생가논란을 극복하고 지역 인적 자산인 정 선생을 기리는 정신계승과 선양사업을 협력해 추진하기로 했다.

또한, 동구 불로동과 남구 양림동,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정 선생 삶의 흔적을 찾아 보존하고 그의 음악 세계를 조명하는 국내외 문화교류 행사도 함께 주최하기로 합의했다.

광주시장의 선도적인 노력과 자치단체 간 협력으로 항일투쟁 역사 계승을 위한 기념관 건립 등 현안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출생지 관련 소모적인 갈등을 끝내고 행정 경계를 넘어 선생의 뜨거운 항일 투쟁의 역사와 예술의 향기를 공유·계승하고, 기념관 건립 등 현안사업에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정 선생은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투신했으며 ‘오월의 노래(1936년)’, ‘팔로군 행진곡(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 1939년)’ 등을 작곡하면서 혁명음악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2009년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으로 선정되고 2014년 시진핑 주석 한국 방문 시 한중 우호인물로 언급되는 등 근·현대 중국 3대 음악가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동구와 남구는 정 선생의 출생지를 각각 불로동, 양림동이라고 주장하면서 정 선생의 부인 등이 광주시를 상대로 출생지 확인 소송을 내는 등 논란이 이어졌다.

/최권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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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건립 등 현안 사업 함께 추진키로

【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광주시와 동·남구, 전남 화순군이 정율성 선생의 생가(生家)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을 중단하고 '정율성 기념관 건립' 등의 사업을 공동 추진키로 합의했다.

윤장현 광주시장과 노희용 광주 동구청장, 최영호 광주 남구청장, 구충곤 전남 화순군수는 27일 오후 광주시장실에서 '정율성 선생 항일투쟁 및 예술정신 계승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장 공동합의문'에 서명했다.

단체장들은 이날 생가 복원 논쟁을 중단하고, 정 선생을 소중한 공동의 자산으로 인정하고 선생의 항일정신 계승 및 선양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해 나갈 것을 합의했다.

기록과 증언 등에 따르면 정 선생은 광주 동구 불로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화순군 능주로 이사한 뒤 보통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

이후 아홉 살에 다시 광주 동구 금계리로 이사해 숭일학교를 다녔으며 광주 남구 양림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추억을 쌓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주 남구와 동구, 화순군은 이 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사실상 고증이 어려운 출생지 생가 논쟁을 벌이며 10여년간 갈등을 빚어왔다.

앞으로 이들 지자체는 이 같은 논쟁 대신 광주 동구 불로동과 남구 양림동, 화순군 능주면 일원에 남아있는 정 선생의 삶의 흔적들을 찾아내 보존하고, 국내외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장소로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불로동의 생가표지석, 양림동의 정율성 거리 시설물, 화순 능주초등학교의 정율성 교실 등의 시설을 보수하고 정비할 계획이다. 

또한 정 선생의 음악 세계를 기리는 '국내외 문화교류행사'를 공동으로 주최하고 소통과 협력을 통해 더욱 의미 있는 사업이 되도록 노력하는데 의견을 모았다.

특히 광주시가 중심이 돼 지자체와 정 선생의 가족·종친·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정율성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기념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

이와 함께 정 선생의 뜨거운 항일투쟁의 역사와 예술의 향기를 공유하고 계승하기 위한 '기념관 건립' 등 현안 사업을 적극 추진한다. '정율성 기념관'을 넘어 '한·중 우호교류기념관'을 짓는 방향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그 동안 논란이 됐던 생가 문제에 대해서는 각 지자체의 입장을 전달했다.

최영호 남구청장은 "광주시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동구와 남구, 화순군을 연계하는 정율성 선생의 기념사업 벨트를 구축하는데 동의한다"며 "다만 특정 집단의 사업적인 측면 때문에 또 다시 소모적인 논쟁이 일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을 해결한다면 남구만을 고집하지 않고 광주시의 업무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생가' 대신 '화순 유적지' '불로동 유적지' '양림동 유적지'라는 표현을 공동으로 사용, 해묵은 논쟁을 끝내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노희용 광주 동구청장은 "포괄적인 의미의 '유적지'라는 용어를 사용해 생가 논란을 끝냈으면 좋겠다"며 "위대한 인물을 기리고 그 분을 통해 중국과의 가까운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광주시가 유적지 복원과 기반시설 마련에 지원을 아끼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협약식이 일회성 전시 행정으로 끝나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구충곤 화순군수는 "정율성 선생이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사실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며 "이 같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협약식이 이벤트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세부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의지를 다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윤장현 광주시장은 "출생지 관련 소모적인 갈등을 끝내고 행정 경계를 넘어 정 선생의 뜨거운 항일 투쟁의 역사와 예술의 향기를 공유·계승하고 기념관 건립 등 현안 사업에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

또 "오늘 간담회를 통해 가족과 종친, 지자체가 참여하는 추진체계를 구축해 공동 노력하고 선생의 전체 인생 역정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는 균형 있는 인식 정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장들은 이 같은 합의를 앞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키 위해 오는 11월17일 중국 호남성 장사시에서 열리는 '정율성 동요제'에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한편 정율성 선생은 '오월의 노래'(1936년),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군행진곡·1939년) 등을 작곡한 음악가로 2009년께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에서 건국에 공헌한 영웅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그러나 동구와 남구의 출생지 관련 주장이 대립하며 갈등이 발생했고 선생의 후손이 광주시를 대상으로 출생지 확인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항일 운동가이자 근현대 중국의 3대 음악가로 칭송받는 정율성 선생의 기념사업은 해묵은 논란으로 인해 사업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표류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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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생가 논란 종지부… 탄력받는 기념사업회
광주시ㆍ동구ㆍ남구ㆍ화순군 이달중 추진위 발족
올해부터 분야별 사업 '브랜드 프로젝트' 본격화
입력시간 : 2016. 03.08. 00:00


광주시가 정율성 선생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7일 한 시민이 광주 남구 양림동에 세워진 정율성 선생 흉상앞을 지나가고 있다. 배현태 기자 htbae@jnilbo.com
'정율성 선생 기념 사업'이 이달 기념사업회 발족에 이어 유적지 1차 기본 정비가 마무리될 예정이어서 지지부진했던 '정율성 브랜드 프로젝트'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율성 선생은 중국 정부가 선정한 '신 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추앙받는 광주 태생 항일음악전사로 올해 서거 40주년 맞는다.

광주시는 7일 동구, 남구, 화순군 등 유관 자치단체와 협의를 거쳐 이달 말까지 '정율성 선생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추진위원회는 정율성 선생의 가족ㆍ친족 2명, 학계 4명, 연구기관 3명, 지자체(광주시, 동구, 남구, 화순) 4명, 언론인 2명 등 모두 15명으로 구성된다.

시는 지난달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구성 및 운영 방침을 결정한데 이어 이달 추진위원을 위촉하고 1차 회의에서 기념사업 발굴에 나설 예정이다. 추진위원회가 추진할 분야별 사업은 크게 △정율성 선생 항일독립운동 유공표창 청원 △자치단체별 생장지 매입 및 복원 △정율성 스토리텔링 연계 유적지 정비 △한중 우호인물 기념관 조성 △정율성 관광 삼각벨트 트레일 코스 개발 △정율성 문화관광해설사 육성 및 배치 △중국 관광객 유치 인프라(사후면세점) 구축 등 19개 분야다. 이 사업은 대부분 올해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시는 이에 앞서 지난 1월부터 4억4천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정율성 노래길'을 조성하고 있다. '정율성 노래길'은 동구의 경우 문화전당 앞 민주광장, 히딩크호텔 입구와 남구는 학강교위, 휴먼시아 아파트 푸른길공원 입구에, 전남에서는 무안공항 1층 대합실에 각각 디지털 TV 6대(75인치 4대, 46인치 2대)를 설치해 정율성 선생의 대표곡을 소개한다. 정율성의 대표곡은 '옌안(延安)송'과 '팔로군 행진곡' 등 이다. 정율성 선생은 중국 3대 혁명음악가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화순 능주는 초등학교 졸업학교이고, 광주 동구와 남구는 학창시절 성장지로서 연관이 있다. 

또 광주천변 좌우로 서석교~학강교, 양림로~정율성로 두 지역에도 스피커 88대를 설치해 일정 시간에 맞춰 정율성 선생의 노래를 틀 예정이다. 스피커는 가로등에 부착되는 형식이다. 이 사업의 완공날짜는 오는 24일로 현재 공정률 80%를 기록하고 있다.

광주 히딩크 호텔 앞에는 중국 유커들을 유치하기 위해 포토존을 설치했다. 또 동구 불로동에서 남구 양림동 유적지 주변도로를 대상으로 총 8개의 표지판이 설치됐다. 시는 지난해 12월 광주 동구 불로동 히딩크 호텔 주변 도로 환경정비와 함께 정율성 선생 관련 패널을 설치하고 노후벽 정비 요구 민원도 처리했다.

김일융 광주시 문화관광체육실장은 "지난해까지 생가 등 소모적 논란으로 구체적 사업이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면서 "이에 지난해 12월부터 정율성 기념사업 추진을 위해 토대를 닦는 사업을 적극 펼쳐왔으며, 올해부터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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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율성 생가 中 관광객 답사 명소 ‘각광’ 

매년 2만여명 넘게 방문…다음달에도 수천명 예약 
기념사업회, 내년 정율성 탄생 100주년 음악제 추진 
중국 7인 상무위원 참석 예정…낙후 생가 복원 시급 

  
  13억 중국인들이 추앙하는 천재 작곡가 정율성 선생의 생가가 중국 관광객들의 필수 답사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율성 선생은 지난 1914년 광주 동구 불로동 163번지(당시 부동정 54번지)에서 태어났다. 28일 (사)정율성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만여명이 넘는 중국 관광객들이 정율성 생가를 방문할 예정이다. 

  최근 중국문화촉진회(상임부주석 왕석)일행 10명이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산업·문화·관광 등에 대한 이해와 투자타당성 조사를 위해 광주를 방문해 정율성 생가를 둘러보고 돌아갔다.  앞서 19일에는 중국 노인교류협회 128명이 생가를 방문해 정율성 선생의 생전 흔적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다음달에도 수천여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히딩크, 프라도, 무등파크호텔 등 숙박시설에 예약을 마친 상태라 지역경제활성화에 큰 기여를 할 전망이다. 

  이처럼 해마다 수만여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정율성 선생 생가를 다녀감에 따라 이 곳을 관광 자원화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 (사)정율성기념사업회 강원구 회장은 “중국에서 영웅대접을 받았던 정율성 선생의 생가에 매년 수만여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하지만 이 곳에는 제대로 된 기념관 하나도 없고 좁은 주차시설 등으로 낙후돼 있는 실정이다”며 “광주시와 문광부가 주도해 이 지역을 관광자원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 회장은 이어 “내년이면 정율성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 이에 8-9월께 정율성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제를 개최할 예정인 가운데 중국 7인 상무위원 중 장고려를 비롯해 시진핑 주석까지 참석하도록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율성 선생은 중국 인민 해방군가인 팔로군가와 대중가요 연안송 등을 제작해 중국 3대 음악가로 추앙받았으며, 지난 2009년에는 신 중국창건 영웅 100인으로 선정돼 중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中國 문화부 차관 정율성 생가 방문 
동구 불로동 히딩크호텔 방문


입력날짜 : 2016. 06.23. 19:36

 

정위 부부장이 23일 오후 광주 동구 불로동 정율성 선생 생가를 방문, 김성환 동구청장과 함께 고인의 업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제7회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 문화장관회의 참석을 위해 광주를 찾은 중국 문화부 정위(丁偉) 부부장(차관급)이 중국 3대 음악가로 칭송받고 있는 정율성 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23일 정율성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정 부부장을 비롯한 문화부 관계자 9명은 이날 오후 동구 불로동 정율성 선생의 생가와 남구 양림동 정율성 선생 거리전시관을 잇따라 방문,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정 부부장은 2005년 광주에서 열린 ‘제1회 광주 정율성 음악제’에 중국 문화부 손가정(孫家正) 부장(장관급)과 함께 참석해 유적지를 탐방하는 등 정 선생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방문에서 정 부부장은 김성환 동구청장을 비롯, 손현우 주광주중국총영사, 정찬구 정율성 기념사업회 본부장 등 관계자 30여명과 만나 “정율성 선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소감을 밝혔다.

정 부부장 일행은 김 청장 등과 함께 정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며 중국문화원분원 유치에 대해 논의했다.

김 청장은 “동구에 정율성 선생의 생가가 있는 만큼 이곳을 중심으로 중국문화원 분원이 유치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며 “정율성 선생 생가 복원에 적극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정 부부장은 “동구가 앞으로도 정율성 선생의 생가 복원에 힘 써주시길 바란다”며 “이곳을 중심으로 중국문화원 분원이 유치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다.

불로동을 둘러본 정 부부장 일행은 이어 남구 양림동 ‘정율성 선생 거리 전시관’으로 이동해 다시 한번 고인의 삶을 되짚었다.

한편, 중국 산동 출신인 정위 부부장은 1981년 중국 문화부 대외문화연락국부처장으로 공직에 몸담은 뒤 주중 뉴욕총영상관 문화영사와 주영대사관 문화참사, 문화부 부장조리(차관보)를 거쳐 2013년부터 중국 문화부 부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윤이상과 정율성의 '음악 교류' 시작된다오는 16일 통영 첫 공연…7월 13일 광주서 협연
통영국제음악재단-광주문화재단 정례 교류 협의
  • 김영화 기자
  • 2018.06.01 
2018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에서 윤이상 작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 큰 박수를 받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음악으로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던 통영 출신 윤이상 선생과 광주 출신 항일음악가 정율성 선생의 작품을 협연하는 음악교류가 올해부터 시작된다.

통영국제음악재단는 광주문화재단과 협의, 오는 16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정율성과 윤이상의 만남'을 주제로 공연을 펼친다고 밝혔다.

공연은 실내악 작품을 협연하는 형식으로 두 지역의 연주자들이 한 자리에서 두 음악가의 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이어 7월 13일에는 광주유스퀘어문화관에서 같은 자리를 마련하는 등 광주와 통영은 시대의 아픔을 음악으로 표현한 두 작곡가의 음악적인 만남을 지속시켜 나갈 예정이다.

1917년생 윤이상과 1914년생 정율성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공통점이 있는 작곡가다.

윤이상은 194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했고, 석방 후에도 경찰을 피해 항일활동을 도모하다 결핵으로 투병 중 해방을 맞이했다.

정율성은 중국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이때 의열단에 가입했다. 정율성의 본명은 정부은으로 예명 정율성은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을 담아 의열단장 김원봉이 지었고, 이후 중국식 발음인 '정뤼청'으로 널리 알려졌다.

윤이상이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독일에서 얻은 명성은 1967년 간첩 혐의로 한국 정부에 의해 납치 및 기소된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 알려졌다.

1995년 타계 후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진실규명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중국 3대 혁명음악가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던 정율성은 1988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가 정율성 작곡 '팔로군 행진곡'을 중국 인민 해방군 군가로 공식 지정하고 덩샤오핑 주석이 직접 서명했다는 소식으로 한국에 알려졌다.

정율성은 문화혁명 기간에 홍위병의 박해를 받았다가 1976년 타계 후 1988년에 명예를 회복했다.

윤이상은 5.18 광주민중항쟁 소식을 독일에서 전해 듣고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를 작곡했으며 1981년 5월 8일 쾰른 방송교향악단이 초연했다.

2018년에는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던 윤이상의 유해가 통영국제음악제와 때를 맞추어 통영으로 이장됐고, 개막공연에서 스티븐슬론이 지휘하는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통영국제음악재단과 광주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이번 교류 음악회에서는 윤이상과 정율성, 그리고 광주문화재단 위촉으로 성용원·김선철 등이 정율성 작품을 개작한 실내악곡들을 TIMF앙상블과 광주시향 단원들이 연주한다...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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