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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무얼 먹고 사나
2018년 08월 02일 13시 05분  조회:2686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어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어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카톨릭 소년 1937년 3월호>

 

이 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따라서
그 곳에서 생산하는 물건들을 먹고 사는데
별나라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궁금해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 잡아 먹고 살고
산골에 사는 사람은 산골 밭에서 기른 감자를 구어 먹고 사는데
별나라에 사는 사람은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해 하는 내용이다.
별나라 사람은 별을 먹고 사나 아니면?
유추의 방식으로 답을 생각하게 하는 동요이다.///전한성

=================

 

 

윤동주 /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드니

천 우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걸.

 

 

이 시는 누나와 내가 버린 습자지와 몽당연필을 어머니는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내 버선 만드는 버선본을 만들고 버선 만드는데 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어머니가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버리지 않고 두는 것에 의문을 품고
무엇에 쓰려고 습자지를 버리지 않나 궁금해 한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습자지를 가지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습자지를 버선의 모양과 크기에 맞게 오려 버선본 만드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누나가 버린 습자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뭣에 쓰는 줄도 알게 된다.
천 위에 버선본 놓고 몽당연필에 침 발라 버선의 모양을 천에 다가 점을 찍어서 내 버선을 만드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알뜰한 절약정신과 이를 알아간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전한성

 

윤동주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이 시는 그믐밤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부서진 달조각로 생각하고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러 반딧불을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믐밤 반딧불은 / 부서진 달조각’이라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믐달은 하늘에 남아있는 달조각이고
그 나머지 달조각은 부서져서 땅에 내려와서 반딧불의 모습으로 있다는 말이다.///전한성

 

 

======================

 

소설가 송우혜가 전하는 '마음의 별로 남은 민족시인'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27년여의 짧은 삶. 그러나 울림은 컸다. 뭉클한 여운이 100년(2017년도)이라는 시간 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 살아생전에 별을 헤던 그는 세상을 떠나 마음의 별로 남았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송우혜(70) 씨가 그의 삶과 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윤동주 시비 앞에 선 송우혜 소설가 [사진/전수영 기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7월 18일 한낮.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있는 윤동주기념관 주변의 숲이 매미 소리로 요란했다. 기념관은 윤동주 시인이 대학 1학년 때 생활하고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를 했던 기숙사였다. 바로 앞뜰에는 시인의 삶과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가 단아하게 서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무나 잘 알려진 '서시(序詩)'다. 소설가이자 사학자인 송우혜 씨는 시비에서 기념관 쪽을 바라보며 사뭇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시'는 '참회록'과 더불어 가장 애송하는 시라고 했다.

"석조건물인 저 옛 기숙사의 지붕밑방에서 시인은 운명적 절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연희전문학교 생활을 시작하며 꿈을 키웠어요. 거목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이 숲을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곤 해요. 수십 년 전에 시인이 걸었던 그 길을 오늘날 내가 이렇게 걷는구나 싶어서입니다."

대표작 '서시'를 비롯해 주옥같은 시를 다수 남겼던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 민족 최대의 경축일인 광복절을 앞두고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감회가 새롭다.

송 씨는 "올해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라는 게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면서 "남기신 시와 함께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계신 듯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윤동주 시인은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200여 편의 시와 산문으로 깊은 울림을 남겼다.

송 씨는 "'명예롭게 유지될 수 없는 평화는 이미 평화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멸망한 때가 그랬다"며 "어두운 재앙의 시기에 신은 우리에게 한 시인을 보냈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역저 '윤동주 평전'(서정시학)은 시인의 삶과 예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현대사의 한 줄기를 새롭게 재정리해 또 다른 울림을 안겨준다.

◇ 우연한 만남이 낳은 '윤동주 평전'

송 씨와 윤동주의 '만남'은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운명적 인연이랄까. 아버지의 삼종형인 송몽규(1917~1945)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와 친구 사이인 윤동주에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서는 이른바 '윤동주 폄훼 현상'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평생 공부만 했던 윤동주가 무슨 독립운동을 했겠느냐. 그의 시 또한 저항시가 아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제의 과잉단속에 걸쳐 불우하게 옥사한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요. 역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자의적 해석으로 시인에 대한 평가를 오도한 것입니다."

평전이 출간되기까지 내적 우여곡절도 거쳐야 했다. 윤동주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시사잡지에 글을 발표하자 한 출판사의 주간이 제대로 된 '윤동주 평전'을 하나 써달라고 간곡히 주문했다. 하지만 송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평전을 집필한다는 건 무리다 싶어서였다. 당시 그는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어요. 낮잠에 깜박 빠져들었는데 윤동주의 친구이자 인척인 문익환(1918~1994) 목사님의 모친(김신묵)이 금방 돌아가실 것처럼 자리에 누워 계시는 꿈을 꿨어요. 순간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지요. 소설은 언제라도 쓸 수 있지만 저분이 돌아가시면 북간도 이야기 역시 영영 사라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송 씨는 곧바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고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1984년 무렵. 당시 90세였던 문 목사의 모친은 북간도의 역사와 윤동주 시인의 삶을 돌이켜주는 최대의 증언자가 됐고, 시인의 누이동생 윤혜원과 남동생 윤일주도 큰 도움을 줬다. 모두 560여 쪽 분량의 '윤동주 평전'은 집필 4년 만인 1988년에 처음 출간됐다. 그리고 1998년 제1차 개정판에 이어 2004년 2차 개정판, 2014년 3차 개정판이 차례로 나왔다.

"평전을 쓰는 동안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걸 목표로 정진했지요. 그 결과 '윤동주'라는 시인을 좀 더 정확하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내년이면 어느덧 출간 30주년이 되네요."

이와 함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준다. 윤동주 평전을 쓰겠노라고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문익환 목사가 송 씨의 평전을 읽고서는 "윤동주 평전은 송우혜가 쓴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잘 썼다. 나는 안 쓰겠다"며 대견해 하더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 2월 전화를 걸어와 "내가 곧 북간도에 가려는데 평전 두 권만 다오. 그 책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문 목사가 평전을 들고 그해 3월 25일 도착한 곳은 중국 북간도가 아닌 북한의 평양이었다. 순안공항에 내린 그가 도착 일성으로 남북한 온 겨레 앞에 바쳐 낭송한 게 시인의 '서시'. 송 씨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이 내 마음을 후려쳤다"며 당시의 심경을 털어놨다.

◇ 비운의 짧은 삶, 깊은 울림의 시

세계가 1차 대전의 아수라장에 빠져 있던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의 명동 학교촌에 있는 기와집에서는 준수하고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첫울음을 터뜨렸다. 결혼 8년 만에 아이를 얻은 부모로서는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민족시인 윤동주다.

특기할 사실은 윤동주가 태어나기 석 달 앞서 동갑내기 고종사촌이자 평생 운명을 함께한 송몽규가 탄생했다는 점. 윤동주의 할아버지 댁에서 잇달아 태어난 두 아기는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뒤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고, 동일한 죄목으로 체포돼 복역하다가 같은 해에 옥사한 운명적 동반자였다.

"다섯 살 되던 해에 송몽규가 새로 장만한 부모의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두 아이는 한 지붕 밑에서 살았는데 일생을 두고 참으로 특이한 관계였지요.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무척 온순하고 재주 있는 아이였다. 송 씨는 "윤동주에게 명동은 맑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유년기 체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면서 "하지만 횡행하는 마르크시즘에 환멸을 느낀 민족주의자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났고 윤동주 집안도 1931년 용정으로 이사했다"고 들려준다. 윤동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내면에는 이 같은 명동마을의 시대상이 있다는 것.

용정의 은진중학교 생활도 시대적 격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35년 송몽규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중국으로 잠입했고, 윤동주는 생애 처음으로 집을 떠나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때의 송몽규 독립운동 경력이 훗날 윤동주의 체포와 옥사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윤동주가 인간이 지닌 불완전성을 체감하고 이를 '부끄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계기는 바로 숭실중학교 시절이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시기인 이때 윤동주는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이 바로 '부끄럼'임을 깨달은 것. '서시'는 이 같은 부끄럼 미학의 결정판으로, 수치 앞의 정직함과 성실함은 신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축복이었다.

신사참배의 격랑 속에 문익환과 함께 숭실중을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두 해 동안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중 매우 감칠 맛 나는 작품으로 송 씨가 꼽은 게 동시 '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 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졸업 앨범 사진

 

◇ 유순하나 지조 높은 '외유내강' 시인

1938년 광명학원을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와 나란히 자신의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시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활짝 열게 된다.

민족의식이 시편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도 이때였다. 그는 '슬픈 족속'이라는 시에서 '흰 수건을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라며 식민치하의 우리 민족을 의인화해냈다. '한민족'은 곧 '슬픈 족속'이라는 것이다.

송 씨는 "외유내강형이던 시인이 대인관계에서는 매우 유순하고 다정했지만 지조는 누구보다 굳고 강했다"고 들려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요 힘에 겨운 아들이며 따뜻한 오라버니요 형이었고 성실한 학생이자 다정한 동료였고 자상한 선배였던 그의 외형을 벗겨놓고 보면 광야에서 수도하는 고행승처럼 엄격하게 노력하는 시인이요, 동족의 고난 앞에서 신과 그 약속에 대해 감연히 반발한 당당한 반항가였다는 것이다.

연희전문 시절이 낳은 명시 중 하나가 바로 '별 헤는 밤'. 맑은 별빛 충만한 가을의 서정을 청신하게 묘사한 이 시에는 시인의 고운 심성과 기품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중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연전 졸업 후 윤동주는 송몽규와 일본에 유학해 대학과정을 밟는다. 당시 가장 큰 장애는 '창씨개명'. 창씨개명이 되지 않으면 일본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도항증명서'부터 뗄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연전 졸업 직후 북간도로 귀향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학교에 창씨개명계를 제출한다. 그의 새 이름은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참회록'은 창씨개명의 뼈아픔을 통회하는 일종의 저항시였다. 일제에 망한 '대한민국'이란 왕조의 후예로서, 바로 자신의 '얼굴'이 그 '왕조의 유물'임을 절감하면서 '이다지도 욕됨'을 절절하게 참회했다. 송 씨는 "그것은 동시에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을 기약하는 자기 다짐을 동반한 참회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중략)…밤마다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거러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

일본으로 건너간 지 1년여 뒤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성하려던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돼 전격 체포·수감된다. 요시찰 인물 송몽규는 이보다 나흘 앞서 사상범으로 체포됐다. 이듬해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은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과 3월 7일 각각 비극적으로 옥사하고 만다.

"윤동주가 민족시인의 영예를 누리게 된 데는 연전 시절에 종로구 누상동에서 같이 하숙했던 후배 정병욱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강처중이 있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다섯 살 차이의 선후배였지만 흉금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긴밀한 사이였죠. 윤동주에게서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받은 정병욱은 이를 보관했다가 해방 후 월남한 유족들에게 전함으로써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지요. 해방 후 경향신문 기자를 지낸 강처중도 일본 유학을 떠나는 윤동주가 서울에 두고 간 '참회록' 등의 원고를 보관했다가 동생 윤일주에게 전했구요. 현존하는 윤동주 유품 중에서 중학교 때의 시와 동시, 습작을 빼고는 모두 강처중에 의해 세상에 남아 있어요."

윤동주가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정지용(1902~1950)이었다. 그가 관념적이고 어려운 시가 아닌,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게 된 데는 정지용의 영향이 컸다. 정지용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뒤인 1947년에 '동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며 윤동주를 극찬한다.

송 씨는 "평전이 나오기 전까진 송몽규의 사망 시기와 무덤 소재지에 대해 중대한 착오들이 있었는데 책의 내용을 토대로 무덤을 찾아내고 사망 날짜도 바로잡혀 큰 보람을 느꼈다"면서 "이와 함께 '좌익 인사'였다는 이유로 유족조차 쉬쉬하던 강처중의 행적과 사상을 개정판에서 새롭게 정리할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1968년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뒤 1978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해 신학을 공부한 송 씨는 다시 이화여대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문단에 오른 송 씨는 장편소설 '저울과 칼' '하얀 새' 등을 발표했고 '스페인춤을 추는 남자' 등의 소설집과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라는 산문집도 펴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8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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