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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윤동주 동시와 그 세계를 론하다...
2018년 08월 08일 01시 05분  조회:2021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 동시와 그 세계

 

 

 

토론자 : 박 일(이하 ‘박’) 박혜자(이하 ‘혜’) 김춘남(이하 ‘김’) 남은우(이하 ‘남’)

김자미(이하 ‘미’) 강기화(이하 ‘강’) 하 빈(이하 ‘하’) 이서영(이하 ‘이’)

 

 

 

*윤동주(1917~1945)에 대해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 화룡면 명촌동에서 윤영석(파평 윤씨)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조부가 기독교 장로인 집안으로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세례를 받았다. 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는 해환이었다. 그의 형제는 누이 윤해원, 동생 윤일주, 윤광주가 있다.

1925년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고, 급우는 함께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 외사촌 김정우 그리고 문익환 등.

1929년 송몽규 등과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했으며, 아동시를 발표.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

1932년 4월에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였고, 축구선수로도 활약.

1934년「삶과 죽음」 「초 한 대」 그리고 「내일은 없다」 등 시를 발표하였다. 이후 그의 자작시에는 시를 쓴 날짜를 기록하였다.

1935년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그 때 시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와 동시 「조개껍질」을 발표.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이유로 폐교되어,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카톨릭 소년』 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등을 발표.

1938년 2월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였고,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시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발표하였고, 12월 27일 졸업하였다.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행.

1942년 도쿄 릿교(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0월에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편입학.

1943년 7월,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송몽규(교토대학 재학)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7월 14일).

1944년 2월 22일 기소되었고, 3월 31일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월 26일 옥사하였다. 송몽규는 3월 10일 옥사.

1955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정음사)를 간행.

 

 

 

박- 애송시 한 편을 들라하면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구절이 내 교만과 자만을 다스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름다운 동시교실’은 주로 창작 위주의 활동을 했습니다만, 유명한 분의 작품세계도 건드리면서 토론도 해보면 우리들의 창작 세계도 한층 확대되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토론의 주제는 윤동주의 동시세계입니다. 윤동주는 이미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삶과 고뇌, 그리고 시세계는 많은 평론가들이 거론했기 때문에 그의 동시세계에 대한 접근은 또 다른 맛을 줄 것입니다.

윤동주의 동시는 약 35편입니다. 처음으로 시를 발표한 것은 1934년 18세 때입니다. 동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것은 1935년 「조개껍질」입니다. 1938년까지는 주로 동시를 발표하지요. 아마 윤동주 시의 원형은 동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토론의 범위를 좁히기 위하여 그의 동시에서 동심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지, 자연친화 또는 생명사상은 어떠했는지, 또한 애국 애족과 민족의식 등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리고 윤동주를 공부하면서 얻은 것이나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토론해볼까 합니다.

 

 

하- 윤동주 하면 저 역시 「서시」가 떠오릅니다. 「서시」란 말 그대로 책머리에 쓰는 시입니다. 따라서 서시에는 그 시인의 철학, 인생관, 가치관이 집약되어 있고, 윤동주의 「서시」에서 그 전범을 봅니다. 나아가 그 의미를 공감하는 자에게 가장 유효한 인용시가 되기도 합니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시」와 문익환 목사에 얽힌 사연이 있습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는 평양 순안 공항에 내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부허가 없이 입북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쇼킹한 사건은 연일 매스컴을 달구었고 한동안 온 나라가 술렁거렸지요. 그때 문목사가 북한땅을 밟고 제일 먼저 입을 열어 한 일이 「서시」 낭송이었습니다. 그는 서시가 갖는 상징성을 인용하여 자신이 북한에 온 이유와 할 말을 대신 했을 것입니다.

이기심과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 찬 남과 북의 위정자와 그 추종자들에게 나아가 온 겨레에게 그는 이 한 편의 시로 자신의 속내를 전하고 그들의 민족적 양심에 호소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남, 북 모두 일체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문익환의 고고하고, 지순하고, 처연한 절규도 그들에게는 한낱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을지 모르니까요. 문익환과 윤동주는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 다시 용정 광명학원까지 같이 했습니다. 윤동주는 본래 동시인이 되어야할 성정이지 싶습니다. 그가 좋아한 별, 사슴, 토끼, 참새, 병아리 등은 모두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니까요. 정이 많고 따뜻하고 순정한 영혼을 가진 것도 동시인의 기본입니다.

윤동주가 동시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1935년 10월에 발간된 『정지용 시집』을 읽고부터였습니다. 정지용의 동시를 보고 동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그때부터 동시를 썼지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짧은 기간(20세 전후의 약 2년여)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써냈지요. 어린이들은 언제나 동시를 쓸 수 있습니다. 구태여 글로 쓰지 않아도 그들의 웃음, 행동, 말, 눈짓들이 바로 동시라 해도 좋을 것이지요. 그러나 어른은 다릅니다. 나의 경험으로는 어른은 행복할 때에만 동시를 쓸 수 있습니다. 행복한 때에만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윤동주는 적어도 이 동시들을 쓸 때까지는 행복했을지 모릅니다. 다만 그의 동시세계는 행, 불행을 초월한 그리움의 원형을 노래한 것 같지만요. 그 그리움의 원형은 고향과 유년입니다.

 

 

미- 윤동주의 동심은 그리움이고, 그 원형은 고향이고, 유년이라는 말씀에 공감해요. 그의 전집에 실린 125편 중에 동시가 28편이고, 동요가 6편이 들어있는데, 작품 성격을 보면 1939년에 쓴 「자화상」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전기부분에는 동시, 동요를 비롯해서 일반 서정시가 많았고요. 후기에는 시대인식이 스며든 자제의 시를 섰다고 하죠. 동시를 쓴 시기를 하빈 선생님께서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셨는데,  물론 동시를 쓰는 순간은 행복했을 거예요.  그러나  동시를 쓸 그 당시에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리려 행복을 동경하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동시를 쓸 당시 의도적으로 동시 형태를 선택했다고 하니까요. 숭실중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고향 광명중학교로 돌아오게 되고, 이종사촌 송몽규가 만주에서 붙잡히게 되면서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를 윤동주도 겪었을 거라 생각해요. 젊은이로서 자신을 자유롭게 성장 발전시키고, 자유롭게 표현하기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정지용 시집을 읽게 되었고, 강소천을 만나면서 서정적이고 동심적인 시를 쓰지 않았나 해요.

윤동주의 동시에는 동물에 관한 것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조개껍질, 병아리, 비둘기, 닭, 고양이, 참새, 개, 반딧불, 귀뚜라미….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가릉가릉, 아저씨, 해님, 애기바람, 엄마 닭 이런 것도 많이 썼어요. 이런 동시를 쓴 것은 김유정의 해학적소설과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오줌싸개 지도」나 「할아버지」 「고향집」 「거짓부리」등등의 동시들에서는 결코 동심만으로 쓰지 않았다고 봐요. 하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그리움의 원형이 어쩌면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될 수도 있겠고, 나라를 뺏기지 않은 백성들의 행복한 모습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유년이고 고향이 아닐까 싶어요. 재미있는 것은 윤동주가 동시를 쓸 동안에는 윤동주의 동(東) 자를 아이 동(童) 자로 계속 썼다고 합니다. 이게 동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 있고, 아니면 아직 자신이 어리다하는 겸손의 자세에서 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 윤동주의 시와 함께 동시를 훑어봤습니다. 그러면서 시인 윤동주에게서는 고뇌와 쉼 없는 성찰을, 동시인 윤동주에게서는 동심으로 일관된 그의 동시 세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윤동주의 동시 중 「귀뚜라미와 나와」는 동심을 논할 때면 제가 으뜸으로 꼽는 애송시이기도 합니다. 시 속의 어린 화자(話者)가 ‘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귀뜰귀뜰/귀뜰귀뜰’이라고 하지요.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는 것, ‘귀뜰귀뜰’ 우는 귀뚜라미와의, 오직 둘만의 비밀스런 공간 ‘잔디밭에서’와 은밀한 시간 ‘달 밝은 밤에’를 등장시키며 최고조의 동심을 이끌어 내지요. 윤동주에게 이 공간은 고향 북간도 동주의 집 앞마당일 수도 있고, 중학시절 얼마간을 보낸 평양 숭실중학 기숙사의 한 뜰일 수도 있겠지요. 「산울림」이라는 동시도 시적형상화며 동심을 아련하게 끌어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냐, 시냐를 논하는 게 무색하리만치 시로서도 손색이 없지요. 시인의 외로움을 대역하는 까치와 그 까치를 관조적 입장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능청스러움이 울림을 더하고 있지요.

  윤동주의 동시 대부분이 1936년에 창작되었던데, 앞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소천(강소천)의 영향(둘의 만남이 이뤄졌다면)도 한 몫을 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에 걸려 용정으로 중학교를 옮겨 다녔을 당시 소천도 1년 여 그의 외가가 있는 용정에 머물렀다고 하는 기록이 있더라고요. 1915년생 동요시를 쓰던 소천과 1917년생 동시를 쓰던 동주가 그것도 간도에서 만났다면 무엇을 논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짐작컨대 둘은 ‘동심’에 끊임없이 고심했을 것이고, 소천이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닭」을  부를 때, 동주는 ‘—닭은 나래가 커도/ 왜 날 잖나요//—아마 두엄 파기에/ 홀, 잊었나봐.’(「닭」)라면서, 응대하지 않았을까요.(웃음)

  덧붙여 문익환 목사(莫逆之友)가 쓴 「동주형의 추억」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일월서각 펴냄, 문병란 엮음,『詩가 있는 명상 노우트』(윤동주편)에서 발췌를 해봤습니다. ‘동주 형은 참으로 멋진 사내였다. 그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은 모두 자연스러웠고 서로 어울려서 동주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지성은 모던이었다. 그러나, 그가 베적삼 베고의에 고무신을 끌고 저녁 산책을 하는 것은 수수한 아저씨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촌스러우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동주형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양복은 언제나 구김살이 없었고 머리가 헝클어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래도 다 동주다웠다. 그렇다. 동주다운 것— 그것이 그리 좋았고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멋”이 한국 민족의 자연스러운 풍모인지 나는 모른다. 아무튼 동주형은 소위 멋을 낸다는 청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멋! 그의 성품에서 풍겨나오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했지요.

 

 

이- 물론 시대상황을 봐서도 그렇겠지만 동시가 너무 재미있다든가, 너무 유쾌하다든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늘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동시들이 많은 거예요. 그 사람을 느낄 수 있다는 거죠. 그 사람이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고 명랑 쾌활한 분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늘 시대를 고민하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는 것이 동시에서 많이 나오고, 가끔 재미있는 말들이 들어 있어 아 이렇게도 썼구나하지만 시와 동시가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순수한 마음들이 동시에도 녹아있어서 그런 것들이 참 좋았습니다.

 

 

강- 저도 넓은 의미에서 윤동주의 시와 동시 사이에 큰 경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시의 뿌리에도 동심이 녹아있기 때문이겠지요. 최근 많은 시인들이 동시에 관심을 갖고 동시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이와 정 반대예요. 18세부터 20대 초반까지 열정적으로 동시를 쓰다가 자연스럽게 시로 옮아갑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시를 먼저 썼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동시를 그리 일찍 만난 편은 아닌데 요즘도 동시 한 편 쓰기 위해 메말라가는 동심을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애 쓸 때가 많거든요. 저와는 다르게 윤동주는 마치 저절로 우러나오는 동심으로 동시를 받아 모신 것 같았어요. 쉽지만 가볍지 않고 삶과 시가 동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후배 시인으로서 부럽기도 하고 크게 다가왔습니다.

  앞에서 윤동주 동시를 너무 재미있거나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굉장히 세련되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어요. 아, 윤동주는 천재구나! 혼자 탄복하기도 하고. 「거짓부리」라든지, 「만돌이」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잖아요. 이런 작품들은 지금 공모전에 응모해도 손색이 없지요. 한마디로 전혀 올드하지 않다는 겁니다. 암울한 시대에 자신이 다니던 숭실 중학이 폐교되는 힘든 시간을 겪고도 동시가 이렇게 맑은 건 동심으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도 시대를 뛰어넘는 동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동심의 승리라고 생각했어요. 윤동주가 동시에 열중한 것은 『정지용 시집』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데 실제로 제3부에 수록된 동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빗자루」처럼 익살스러운 동시나 「눈」처럼 감칠맛 나는 동시가 탄생한 데는 이런 좋은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미치지 않았을까요. 언젠가 윤동주가 정지용의 시에다 연필로 몇 줄 감상을 적었는데, 아마 정지용의 「말」이란 시였을 거예요. ‘꿈이 아닌 생활이 표현되었기에 좋은 작품’이라는 평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윤동주가 말한 꿈이란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망상 같은 것. 실제로 윤동주의 동시를 보면 대상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오랜 시간 관찰하고 글을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는 만큼 쓸 수 있다는 걸 윤동주의 동시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어요. 한 줄 시를 대하는 모든 행위가 그의 동심에서 발로된 것이란 생각을 하면 윤동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김- 윤동주의 동심세계는 올곧고 천진난만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윤동주의 동심 양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윤동주가 동시에서 시로 나아간 것처럼, 박목월도 동시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성인시만 썼습니다. 동시를 쓸 때는 본명인 박영종을 썼답니다.『보랏빛소묘』라는 그의 자작시 해설서에 보면, 동시로서는 현실이 주는 시대적 억압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낼 수 없어서 성인시를 택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동시가 주는 제한된 요소, 이른바 동심천사 같은 그런 아름다운 요소들만 가지고는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어려웠나봅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도 거의 비슷한 심경으로 동시에서 시로 시련을 극복하려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 그의 동심세계를 이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순수, 순진무구, 올곧음 그리고 천진난만 등. 저도 언젠가 윤동주 동시론을 쓴 바 있는데, ‘윤동주가 동시를 통하여 동심과 휴머니즘 지향의 순백한 시 세계를 확보’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아세례를 받았을 만큼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으며, 주일학교 선생님도 했다고 합니다. 성서에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 진리를 중히 여긴 것 같지요. 그의 동시 「눈」에서도 ‘지붕이랑/길이랑 밭이랑/추워한다고/덮어주는 이불’이라고 표현했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동심은 이상과 동경을 지향하는 관념성보다는 생활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순수의 밀도가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자연친화 또는 생명사상 등에 대해 짚어볼까 합니다.

 

 

김- 이사도라 던컨이 쓴 자서전에, 자기가 바닷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용가가 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술가에게는 출생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자연친화적 면에서, 윤동주가 태어난 ‘만주’라는 공간, 자라난 ‘용정’ 분위기 등이 마련해준 창작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거기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동시며 시의 밑거름이었을 거고요. 윤동주 동시의 시공간도 자연친화와 생명사상과 관련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윤동주가「조개껍질」이라는 시부터 출발했다는 것도 좀 의미심장해보입니다. 윤동주의 아명(兒名)이 ‘바다’가 들어 있는 해환(海煥)이었고 두 동생은 달환, 별환이었다지요. 해와 달과 별...이처럼 이름 속에서도 어떤 운명적인 요소가 담겨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혜- 나도 윤동주처럼 오래오래 남는 동시를 쓰고 싶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가 동시도 썼나?” 하십니다. 윤동주하면 「서시」가 떠오르고, 「서시」하면 윤동주가 떠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윤동주는 시보다도 동시를 먼저 썼고, 윤동주의 시의 기본 바탕은 동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입니다. 2010년 연변에 윤동주의 동시비가 세워졌을 때에 저는 참 기뻤습니다. 시에 묻혀 있던 윤동주의 동시가 기지개를 켤 수 있겠구나 싶어서였습니다. 동시비에 적힌 「참새」를 보는데 우리 민족의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시대적인 아픔을 견디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도 느껴졌습니다. 윤동주의 시 세계는 밝고 맑은 동심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착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으로 갑니다.

글은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동시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순하고 여리고 착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내성적인 성품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암울과 아픔은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그것을 글로 풀어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희망도 주지만 우선 자기 자신에게 희망을 주고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윤동주의 동시를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그 시대의 생활상까지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시는 「호주머니」인데요. 「호주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겨울만 되면/주먹 두 개 갑북갑북

  -「호주머니」 전문

 

입으로 동시를 읽는데 제 손이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제 온 몸이 반응을 했거든요. 그는 시를 통해서 외로움을 이겨내는 강인함과 일제치하의 고통과 아픔도 이겨내고자 하고 희망을 노래했지요. 이 토론을 좀 더 확장하는 의미에서 그의 동시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힘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강- 박혜자 선생님 말씀처럼 시대적 아픔과 윤동주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자연과 윤동주 동시를 따로 떼서 생각할 수도 없을 거예요.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저는 윤동주 동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겨울이란 계절적 배경과 하얀 눈이 떠오릅니다. 「눈」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눈이 새하얗게 와서/눈이 새물새물 하오. -「눈」 전문

 

‘새물새물’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입술을 한쪽으로 약간 비틀며 소리 없이 자꾸 웃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나옵니다. 하얗게 내린 눈을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눈이 감길 듯 말 듯 하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지잖아요. 이 동시를 읽으면 누구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듯이 또렷한 풍경이 떠오를 거예요. 「개」라는 동시도 역시 눈 내린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개」 전문

 

시인은 개가 눈 위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꽃을 그리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자연과 자연이 만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이 장면은 바로 그림이 되어 떠오를 만큼 시각적 이미지가 돋보입니다. 두 작품 모두 계절적 배경이 겨울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연결시키면 춥고 암울한 일제치하인데 중요한 건 그냥 겨울이 아니라 눈 내린 겨울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겨울이 춥기만 하고 눈이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윤동주에게 「눈」은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하지 말라고 덮어주는 이불일 수 있고, 개가 꽃을 그리는 도화지일 수 있고, 또 누군가를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겁고 어두운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연을 통해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작품들을 읽으며 이것이야말로 동심 세계가 지향하는 따뜻하고 긍정적인 문학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흔히 시의 출발은 말장난에 있다고 합니다. ‘겨울’하면 저는 어감이 비슷한 ‘거울’을 연상합니다. 윤동주 동시에 나타난 겨울 이미지는 겨울(거울)처럼 차고 맑고 깨끗한 세상을 꿈꾸던 그의 염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미- 윤동주 시를 보면 하늘, 별, 바람, 구름, 나무, 햇빛, 등의 단어가 많이 등장을 하잖아요. 이런 자연적 현상들이 그의 동시에서 현실과는 좀 동떨어졌다고 생각지 않나요? 불안하고 고단한 시대에 산 윤동주의 마음과 눈이 가 닿는 곳은 하늘이나 별이나, 뿌리 깊은 나무나, 시원하게 해 주는 바람 같은 거였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도 때로 너무 힘들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아무 생각 없이 가만 쉬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눈을 감고 간다」를 보면 시대현실을 ‘밤’으로 그려내기도 했지요. 어쩌면 어두운 시대현실에도 불구하고 삶의 밝은 국면을 뜨겁게 동경하는 것이 자연친화적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것은 곧 생명사상과도 결부 시킬 수 있지 않겠어요?

 

 

김- 윤동주 산문이 몇 편 있는데, 그 중에는 ‘나는 인생관 세계관 이런 것 보다는 해, 달, 별 이런 식으로 자연과 노는 게 더 좋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의 시어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기보다는 고단한 현실을 감내하기 위한 반어적 수단이 아니었을까요?

 

 

하- 35편 중에 21편이 자연을 소재로 해서 쓴 시라 합니다. 쭉 읽으면서 한 마디로 나이 들수록 유년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동시를 썼음에도 만년에야 느낄 수 있는 짙은 유년에의 향수가 배어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그것은 짧은 생의 대부분을 고향을 떠나 유랑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골짝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 「굴뚝」전문

 

선명한 묘사 속에 고향과 유년에의 그리움이 알알이 맺혀있습니다. 그리움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움은 사랑하는 것들의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가족, 연인, 친구, 자연, 고향 등 자신의 시간 속에 같이 했던 모든 것들은 잃고 나면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요. 사랑하는 것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짙어지고요.

「굴뚝」 외 「귀뚜라미와 나와」「해바라기 얼굴」「겨울」「반딧불」「햇빛, 바람,」 「편지」「고향집」 등에서도 그리움의 속살을 만납니다. 하여 윤동주의 동시세계를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그것은 ‘그리움의 그림창’이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묘사는 선명한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그 풍경 속에는 그리움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연하면 위의 시들에서 유년의 그리움에 대한 직접적인 얘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를 읽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에겐 작품 속에 묘사된 풍경들은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로 다가옵니다. 덧붙여 ‘달 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알고 보니 달조각은 반딧불이었습니다. ‘달조각 = 반딧불이’ 이만하면 훌륭한 낯설게하기였고요. 그의 동시는 현대적 잣대로 평가해도 아주 훌륭하다고 하겠습니다.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친화적이라는 말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 동시전반에 자연의 냄새가 훅 풍겨요. 기왓장을 등장시켰고 햇빛, 바람, 눈, 문풍지, 문풍지 자체도 닥나무라는 자연에서 데려온 소재지요. 굴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시대가 자연과 함께 하는 시대였기에 자연, 그의 동시들이 더 빛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성향 자체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거예요.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니까 성품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톡톡 튀는 재미있는 것은 없지만 자신이 조용히 관찰한 것, 즉 하늘에 침뱉고, 바다에 돌던지는 이런 대목에서 아이가 그렇게 해도 바다나 하늘이 다 받아준다는 것처럼요. 윤동주의 성향이 동시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김- 사람의 성향을 더러는 식물성과 동물성 인간으로 표현하잖아요. 아마도 윤동주는 정적인 심성으로 봐서 식물성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박- 자연을 숭상하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은 삶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동시인들도 동심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자연친화적 기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윤동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기 하기 위하여 대구법과 반복법을 많이 이용했고요. 특히 식물적 이미지보다는 하늘, 바다, 달, 별, 그리고 봄과 같이 우주적이거나 계절적 이미지를 즐겨한 것 같습니다. 또한 「서시」에서처럼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생명사상도 그의 동시에 상당히 깔려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애국애족과 민족의식이 배어있는 작품에 대하여 토론하겠습니다.

 

 

이- 윤동주는 자기 자신이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런 부분들이 동시에 많이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기왓장 내외」를 봤을 때에도 대궐이 아름답던 옛날을 생각하듯 일제강점기 이전에 존재하던 국가의 모습을 그리워하였고, 마지막 행에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본다 했는데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묻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에서는 ‘왜떡이 쓴 데도 달다’ 했는데 처음 봤을 때는 ‘왜떡’을 단순히 떡의 종류로만 봤거든요. 근데 이게 왜(倭) 떡인 거예요. 떡이 밀가루나 쌀가루가지고 만든 떡이니까 이렇게 쓴 맛이 날 이유가 없는데 쓰다고 한 것은 왜떡은 일본떡이니까 그렇죠. 맛은 단데 우리 민족에게 쓴 맛을 줄 거라는 그런 것을 모르고, 입에 달다고 자꾸 일본 것을 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비애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 동시는 두 줄의 짧은 시인데도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민족의식이나 애국심 이런 것들이 비록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작품에 깔려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김-  이경교 교수는 시 창작서 『즐거운 식사』에서 ‘시적인 인식의 조건이라는 게 시련과 절제에서 나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련에도 내적인 시련과 외부적인 시련이 있는데, 식물적인 천성은 외부보다는 내부적인 시련이 더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동시에서 향일성(向日性)이며, 자연과 천체에 대한 그리움이 담겼을 것입니다. 또한 내적인 시련은 존재의 성찰, 자기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대로 시련이 외부적으로 나타났을 때는 시에서 역사적 상황으로 표출됩니다. 민족의식, 애국심도 내적·외적인 요소로 나눠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하- ‘애국애족과 민족의식을 고취한 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이 주제에 대하여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동주하면 민족시인, 저항정신 등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후반기에 집중된 몇몇 시들 때문입니다. 물론 동시를 쓸 시기나 그 이전의 시기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윤동주가 동시를 쓰기 전 남긴 시들에는 장래에 대한 불안, 자기성찰 등이지 본격적인 저항시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나도 처음엔 윤동주의 동시 속에서 앞의 주제에 맞춰 의미를 천착해 볼까도 생각했습니다. 굳이 작정하면 애국애족, 민족의식을 유출해 낼 수 있음직한 시편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시를 두고 민족이니 저항이니 하는 전제를 설정해 놓고 유추해석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제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이를테면 윤동주의 충만한 동심을 느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 똑 똑/ 문 좀 열어 주셔요./ 하룻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 주고 보니/ 검동이 꼬리가/ 거짓부리 한걸.//

꼬끼요 꼬끼요/ 달걀 나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 한걸.

-「거짓부리」 전문

 

단순함 속에서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머금게 하는 평화의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 같지요. 대부분의 동시들이 이런 패턴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20세 전후, 문득문득 현실의 참담함이 엄습했을지 몰라도 그의 동시는 천진하고 평화롭습니다. 어떤 전제를 가지고 그에 맞춰 뭔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순일 수도 있으니까요. 민족시인으로서의 면모는 그 동안 충분히 조명되어 왔으니 그의 동시 속에서는 상처받지 않고 얼룩지지 않은 그의 순수한 영혼만을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민족의식이 있다고 누구나 체 게바라가 되어 혁명의 최전선에 설 순 없습니다. 하지만 민족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는 현실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못자는 밤」이라든지 「내일은 없다」이런 동시들은 짧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동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못자는 밤」에서 ‘하나, 둘, 셋, 넷…… 밤은 많기도 하다’고 노래합니다. 말줄임표 속에 얼마나 많은 밤들이 담겨 있겠습니까? 「내일은 없다」에서 ‘밤을 자고 동틀 때’가 내일이라는데 아무리 잠을 자고 일어나도 내일이 오지 않습니다. 동이 트지 않으니 밤을 자도 또 밤을 맞을 수밖에 없는 기막힌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윤동주가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 하면서 민족시인이다 저항시인이다, 평가를 받지만 윤동주는 송몽규와도 다르고 의열단에 가입해서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이육사와도 다릅니다. 윤동주의 삶과 동시는 눈처럼 하얀 순수와 순결을 지향하고 있고, 저는 순수하고 고결한 정신 자체를 혁명이자 민족정신이라고 봤습니다. 좋은 동시는 생명력을 가지고 오래 살아남는데 윤동주의 동시는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 삶이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로 달라졌다고 하지요. 세월호 이전에 「못자는 밤」이나 「내일은 없다」를 읽었을 때와 세월호 이후에 이 동시들을 읽었을 때 느낌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선장이 없는 배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람들과 주권을 빼앗긴 백성들이 벼랑 끝에 서 있는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참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시에 비해서 그의 동시는 훨씬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에서도 충분히 민족의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 윤동주 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푸른 책들) 후반부에 「서시」「자화상」「별 헤는 밤」등과 함께 「슬픈 족속」이 실려 있는데요. 이중섭의 ‘흰소’가 그림으로 우리의 민족혼을 대변했듯이, 「슬픈 족속」 이 한 편의 단시(短詩)만으로도 우리 한민족 전체의 혼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미- 앞서 「거짓부리」를 동심만으로 쓴 작품이 아니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동시를 읽으면서 하빈 선생님처럼 ‘단순함 속에서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머금게 하는 평화의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 같’지만은 않네요. ‘거짓부리’하는 검둥이나 암탉이 일제의 거짓부리로 읽히는 것은 아마도 윤동주가 살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 그런 걸까요? 저는 작가가 살던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이 분명히 수용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간도로 간 우리 조상들이 민족의식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교육열만 봐도 그래요.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배우는 것만이 남의 나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거죠. 몸에 베인 민족의식이 시에 나타날 수밖에 없고, 또 그게 현실이었으니까요. 「오줌싸개 지도」가 단순히 동생이 싸 놓은 오줌을 보고 별나라 지돈가? 만주 땅 지돈가? 했을까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고, 집을 떠나 돈벌러 온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우의 인상화」에서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사람이 되지/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사람다운 사람이 얼마나 없었으면 아이의 꿈이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강기화 선생님 말에 공감을 해요. 사람보다는 돈이 먼저인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 놓은 것 같아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고 했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본래 예정 제목이 『병원』이었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 이유가 병원을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으로 썼다하니, 그가 꿈꾸는 세상은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을 나누고 아픔을 함께 할 수 그런 세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혜- 시대를 무시하고는 시를 읽을 수 없습니다. 요즘 상영중인 영화 <국제시장>도 시대의 아픔이나 동질감이 있었기에 히트작이 되지 않았을까요? 윤동주의 시도 시대상을 배제하고 본다면 그만큼의 느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윤동주가 시 속에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그 정신을 지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 속에는 다른 계절보다도 겨울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용정이라는 추운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춥고 힘든 겨울이 지나면 새로운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당시의 슬픈 현실을 겨울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김- 평론가 유종호 선생이 쓴 책에 보면 ‘분명히 경험 했지만 자기만의 못난 경험이 아닌가 해서 멋쩍어 말도 안했던 것이 고스란히 재생되어 있음을 알고 반가움과 놀라움을 아울러 느끼게 된다. 그러한 것이 바로 공감의 공유라 경험의 교환이고, 이러한 것들이 정서로 충전되어 있는 게 하나의 작품이다’라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오줌싸개 지도」에는 못난 경험이 주는 공감의 공유가 있습니다.

 

 

박- 앞에서 거론한 「슬픈 족속」그리고 그의 시 「참회록」이나 「또 다른 고향」 등에서는 고난과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빈 선생은 윤동주의 동시를 순수한 동심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만 문학이 시대의 반영이라면 민족의 아픔도 암시나 은유를 통하여 표현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문학평론가 최명표는 윤동주가 동시를 쓴 이유를 네 가지 들었습니다. 객지 생활이 주는 허전한 고독감, 숭실중학교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폐교되면서 용정으로 귀향하는데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 관헌의 요시찰 인물이 되는 그런 일신상의 위험으로부터의 탈출, 1935년에 발간한 『숭실활천』에 시 「공상」 등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시론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동시 창작을 후원하였고, 마지막으로 1935년에 간행된 『정지용 시집』은 편제상 시와 동시를 동렬로 묶었는데, 이 시집이 윤동주에게 많은 시사를 주었으리라 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일제 관헌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동시를 쓰면서 근신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대신에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진하게 표현하면서 시대의 고통을 감췄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 동시를 쓰던 그가 어느 순간 절필하듯 동시에서 손을 떼고 일반시로 돌아섭니다. 짐작컨대 그것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적 배경이 그를 동시에 안주하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가 쓴 시의 주제는 죄, 부끄러움, 참회 따위입니다. 자기를 둘러 싼, 아니 온 겨레와 민족에 씌워진 거대한 굴욕을 보고만 있어야하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자신에 절망하며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쏟아 놓을 수 있기에는 동시로는 그 표현의 그릇이 작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동시인의 한사람으로서 이점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만약 그가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계속 동시만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주옥같은 동시 작품들을 탄생 시켰을까요. 그러나 그에게 그러한 시련과 절망과 분노가 있었기에 오늘 날 우리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도록 아름답게 하는 불후의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심정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김- 윤동주 작품도 처음에 썼던 제목이나 내용이 다른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지난 밤에 소복이 내린 눈이 이불이 되어 덮어준다는 동시「눈」은 본래 제목이 「니불」인데 「눈」으로 바뀌었답니다. 틀린 부분도 나타납니다. 「빗자루」에도 보면 엉덩이를 때려서가 아니고, 원문은 볼기짝을 때려서로 되어 있습니다. 윤동주 사후에 시집을 펴냈는데 수록 과정에서 원본과 달라졌습니다. 독자들이 시를 읽고 평론가들이 평론을 하지만, 과연 제대로 된 원전을 읽고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도 많이 남습니다.

흔히 ‘시보다 시작메모가 좋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움이 있다는 거지요. 윤동주 자신이 한 낙서가 있는데 그 속에 자신의 인생관, 문학관이 다 들어있어요. 낙서에 보면 ‘문학이란 뭐냐’ 해놓고 ‘나는 알지 못 한다’ 이렇게 되어 있죠. 또 ‘문학’을 ‘생활, 생존’으로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것도 극복해내야 한다는 것이 낙서 ‘비애(悲哀) 금물(禁物)’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이 ‘힘’이라고도 적혀 있습니다. 아마 문학이 그 힘이었을 겁니다.

 

 

강- 윤동주가 식물적 인간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식물은 겉으로는 수동적이고 나약해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고. 『식물의 사생활』 같은 책을 보면 식물이야말로 투사 같지요. 그러면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자태는 윤동주와 꼭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토론에서 윤동주를 선택한 것은 결국 온고지신하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만큼 「길」이라는 시를 좋아하는데, 특히 마지막 구절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어버린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는 이 부분에서 늘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윤동주 자신에게 쓴 글이기도 하지만 후배 시인들, 좀 더 거리를 좁혀서 저에게 주는 선물이란 느낌이 들거든요. 제가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것들, 그 속에는 동심의 여러 조각들도 포함 되겠지요. 그걸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고, 결국 그게 바로 좋은 동시를 쓰는 일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동시라는 그릇이 이것저것 담기에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랑말랑한 동심으로 빚은 그릇이라면 무한대로 커질 수 있으니까요. 새해에는 좀 더 넓고 깊은 동심의 그릇을 빚어서 좋은 동시를 담고 싶습니다.

 

 

남- 시인이란 이름을 달고 나는,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의 현실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했는가? 윤동주의 동심이 뚝뚝 묻어나는 동시들을 접하면서, 제대로 된 동심을 담고는 있는가?  ‘시보다 동시가 쉽다’란 교만의 잣대로, 너무 안일한 동시창작을 해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시가 삶이요, 삶이 시인, 윤동주 시인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숭고한 삶, 십자가를 향한 그의 삶을 대하면서 같은 기독 시인으로서  부끄럽기만 합니다. 어렵겠지만 삶과 동시가 하나 되는 참시를 쓰도록 끊임없이 저를 단련해야겠습니다.

 

 

이- 시와 동시의 경계에 대해 차이가 난다고 생각 않거든요. 시를 읽든, 동시를 읽든, 그의 성품과 인격도 읽혀지니까요. 앞으로 저도 제 글에서 저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글을 써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동시는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시를 쓰면서 좀 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혜- 윤동주는 온순한 성격이라 행동으로 나서는 투쟁가는 아니었지만, 글로써 민족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지켰습니다. 저도 멋진 말로 남을 감동시키거나 행동으로 감동시키지는 못합니다. 성찰적 지향으로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시를 써야겠습니다.

 

 

미- 시든 동시든 억지스러우면 재미가 없잖아요. 현실을 바탕에 둔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요. 이오덕이나 임길택, 권정생 같은 분의 시가 윤동주 동시와 닮은꼴이잖아요. 미사여구나 어려운 말이 없고 쉬우면서 재미있고 감동을 줘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우리말에 대한 공부를 한 덕도 있겠지만 그것은 쉽지만 결코 쉽게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임을 동시공부를 하면 할수록 느끼게 되는 부분입니다. 독자가 쉽게 읽고,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오랜 습작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을 끼적거리는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은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 두뇌로서가 아니라 내 몸으로서 일일이 헤아려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이랄 수는 없습니다. 봄밤에 고민에 찌들고, 녹음에, 권태에 시들고, 가을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에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일 년은 이루어집니다.’라고 합니다. 시 한편을 완성하기 위해 글자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이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동시를 너무 쉽게 쓰는 제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단순함 속에 깊이가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박- 현대 아동문학의 출발은 1920년대부터입니다. 1923년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아동지 『어린이』가 창간되고, 색동회의 창립 등으로 아동문화운동이 전개됩니다. 그 때는 동요문학이 주를 이룹니다. 주요작가로는 방정환, 한정동, 윤석중, 이원수, 강소천 그리고 서덕출 등입니다. 1933년에 간행된 윤석중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는 동시시대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1937년 2월부터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은 우리 문학에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육사가 「절정」에서 표현한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를 ‘가혹한 시대의 순결한 영혼’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시는 널리 애송되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의 원형은 동시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시세계를 올곧게 이해하려면 그의 동시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으로 현대 동시문학의 멋과 참 매력도 보여주는 기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토론 참여자(‘아름다운 동시교실’ 회원)

 

박 일: 1979년 『아동문예』 동시 등단. 동시집 『주름살 웃음』외

박혜자: 1999년 부산아동문학신인상 동화 당선. 2014년 제6회 목포문학상 동시 당선

김춘남: 200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2004년 <부산일보> 시 당선. 동시집 『앗, 앗, 앗』

남은우: 200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3년 제11회 푸른문학상 수상.

김자미: 2007년 부산아동문학신인상 동시 당선.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강기화: 2010년 제38회 창주문학상 동시 당선

하 빈: 2011년 『아동문예』 동시 등단. 동시집 『수업 끝』 외

이서영: 2013년 제5회 천강문학상 동시 당선

 

                                                          -<한국동서문학> 201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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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 하이퍼시 명언 18 / 최흔 2021-05-25 0 1275
1562 하이퍼시 명언 17 / 최흔 2021-05-25 0 1199
1561 하이퍼시 명언 16 / 최흔 2021-05-25 0 1177
1560 하이퍼시 명언 15 / 최흔 2021-05-25 0 1223
1559 하이퍼시 명언 14 / 최흔 2021-05-25 0 1142
1558 하이퍼시 명언 13 / 최흔 2021-05-25 0 1228
1557 하이퍼시 명언 12 / 최흔 2021-05-25 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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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 하이퍼시 명언 10 / 최흔 2021-05-25 0 1268
1554 하이퍼시 명언 9 / 최흔 2021-05-25 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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