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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강처중 "발문"
2018년 08월 09일 23시 55분  조회:2045  추천:0  작성자: 죽림

跋  文

 

 

東柱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房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東柱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앉아 주는 것이었다.

“東柱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散策을 請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散이든 들이든 江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黙黙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沈鬱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悲痛한 高喊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鬱憤을 주었다.

“東柱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外套든 時計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外套나 時計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典當鋪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東柱도 친구들에게 굳이 拒否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東柱 자네 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應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詩를 誕生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詩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玉이다. 지나치게 그는 謙虛 溫順하였건만, 自己의 詩만은 讓步하지를 않았다.

또 하나 그는 한 女性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女性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告白하지 않았다. 그 女性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回答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苦憫도 하면서 希望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女性에 對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故鄕”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間島에서 나고 日本 福岡에서 죽었다. 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祖國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宋夢奎와 함께 “獨立運動”의 罪名으로 二年刑을 받아 監獄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惡刑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夢奎와 東柱가 延專을 마치고 京都에 가서 大學生 노릇하던 中途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東柱의 最後를 監視하던 日本人 看守가 그의 屍體를 찾으러 福岡 갔던 그 遺族에게 傳하여 준 말이다. 그 悲痛한 외마디 소리! 日本 看守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東柱 監獄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解放되던 해다. 夢奎도 그 며칠 뒤 따라 獄死하니 그도 才士였느니라. 그들의 遺骨은 지금 間島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東柱의 詩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傳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東柱 夢奎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東柱! 夢奎!

                                                                      (강 처 중) 

 

 
 
========================///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모두 내 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 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묵하였다가금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 하고 나오는 외마디소리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하나는 동주 자네 시(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조용히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이미 보여 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지만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그 여성도 모르는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후쿠오카)에서 죽었다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연희전문)을 마치고 경도(쿄오토)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그고 운명했지요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드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후쿠오카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그 비통한 외마디소리일본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바 있었나 보다동주 감옥에서 외마디소리로서 아조 가 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바로 해방되던 해다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부르고 싶은 동주몽규!

(1948년 1월 30일 발행)

 

===========================

 

바람과 구름과 별과 시 <발문>

 

                        강 처중 (당시 경향신문 기자)

 

동주(東柱)는 별로 발주변도 사귐성도 없었지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있나" 하고 찾으면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 앉아주는 것이 었다.

"동주있나 좀 걸어보자구"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을 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을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렸다.

그는 있고서 안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였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에 나들이를 부지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對>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 주었을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지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츤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체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 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ㅡ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 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으로 들어간체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延專)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데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이 없을 동주(東柱) 몽규(夢奎)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東柱) 몽규(夢奎)!

 

                                                                       (강 처중<姜處重>)

 

///윤동주 평전 (송우혜)



========================

 

윤동주 시인이 옥중에서 작고(1945년)한 후 시인의 가족과 친구들은 고인의 작품을 모아 

출판사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함(1948년)

 

 

유고시집의 서문은 윤동주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 시인이 작성하였고 발문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동료였던 강처중이 작성하였어.

 

 

▲ 정지용 시인의 서문

 

 

 

강처중은 해방 후 경향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윤동주의 시집 출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함

고인과 크게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닌 정지용 시인의 서문을 실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당시 경향신문의 주필이었던 정지용 시인과 강처중 기자의 인연 덕이 크다고 함

 

 

영화 <동주>에도 강처중이 등장함

 

이 분!

 

 

 

다음은 강처중의 글인데 마음이 너무 아파. 꼮!꼭 읽어봐!

몽규와 동주 두 친구를 한번에 잃게 된 강처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어

 

 

강처중의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영화를 보고, 또 글을 읽고 나서 강처중이라는 인물이 넘나 궁금했어.

그런데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했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더라고..

그러다가 1998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발견했는데, 왜 그런지 알게됐어

 

 

 

"(...) 강처중은 50년대 좌익활동 혐의로 총살당한 인물."

 

 

"(...) 강처중은 윤동주가 직접 묶었던 필사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포함되지 않은 대표작들을 보관해 유족에게 전했고 48년 초간본 출판의 산파역을 했지만 그간 좌익이라는 이유로 시집에서는 '윤동주가 동경에서 편지를 보냈던 서울의 한 벗' 정도로 익명화 되고 말았다. 42년 일본유학 길에 오르며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맡긴 시는 '참회록' '팔복' '간' '위로' 등. 또 유학시절 윤동주의 시작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쉽게 쓰여진 시' 등 다섯편의 작품은 모두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수록된 것이다.

 

강처중은 48년 윤동주의 연전후배 고 정병욱 교수가 보관했던 필사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고들에서 추린 시 31편으로 정음사에서 초간본을 발간하며 생전에 윤동주가 존경했던 정지용에게서 서문을 받아냈고 직접 발문을 썼다. 그러나 전쟁 와중에 정지용이 납북되고 강처중마저 좌익으로 총살당해 이들의 글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증간본 이후 아예 삭제돼 버렸다. (...)"

 

 

.....

 

강처중은 경향신문의 창간 멤버로, 기자로 활동하다가 50년대에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알려져있으나

사실 여부와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등은 밝혀지지 않음..

 

이러한 정치적 이념적 배경 속에서 유고시집 발간의 주역 강처중은 그간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어..

 

윤동주의 연전 후배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 역시 강처중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한편, 정지용에게 윤동주를 알리고, 연전 동창생들과 후배 정병욱, 그리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를 독려하면서 유고시집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 강처중이다.

정병욱과 윤일주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두 사람의 공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윤동주 서거 10주기를 맞아 누이 혜원이 가지고 온 윤동주의 다른 시 원고를 보충해 새롭게 선보이는 증보판 시집에서 두 사람의 글을 삭제하고 함께 입을 다물기로 묵계하고 있었다.

대시인 정지용은 이때, 6·25때 남침한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가 행방불명된 시인이었다. 강처중은, 그때껏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좌익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로 지목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인물이었다.

윤동주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은 이렇듯 한국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131741141&code=960205, 경향신문)

 

 

 

▲ 강처중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 강처중.

강처중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거야

그럼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일케 글을 쪘음..

 

영화 동주에서 강처중이 참 매력적인 인물로 나와서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여시들이 한번쯤 '강처중'을 초록창에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싶운데

그러한 점에서 영화 <동주>는 잊혀진 인물들과 그들의 공적을 재발견한 고마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음!!

참 귀한 인물을 알게되어서 마음이 벅참 ☺

 

 

 

++수정

 

방금 윤동주 평전을 찾아봤는데 강처중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더 자세히 적혀있어서 추가함

 

 

윤일주(현 성균관대 교수, 윤동주 동생)는 <윤동주 평전>이 출간될 당시 강처중에 대해 기술하지 말아달 것을 요청했다고 함.  단순히 그가 좌익인사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이었음.

 

이후 개정판에서 강처중이 좌익으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라고 기술하였고

이를 본 강처중의 가족(부인,자녀)이 나타났음

가족들이 증언하길 "사형수로 수감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맞지만 총살형으로 처형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6.25가 발발한 지 사흘 만에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했을 때 형무소에서 나왔고 두달 남짓 집에서 요양하다가 9월 4일에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월북했다"는 것..

 

 

처형을 당했다고 알려져있으나, 가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처형 직전에 형무소에서 나와 월북하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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