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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투르게네프
2018년 08월 22일 00시 45분  조회:3641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818. 11. 9(구력 10. 28), 러시아 오룔
사망 1883. 9. 3(구력 8. 22), 파리 근처 부지발
국적 러시아

요약 투르게네프는 당시 유럽적 시각과 정서를 가진 유일한 러시아 작가였다. 대표작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아버지와 아들>을 남겼다.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완전히 다른 정치적·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을 다루었고, 사랑 이야기와 인물에 대한 예리한 심리묘사를 통해 보편적인 호소력을 부여했다.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1874년 투르게네프의 초상화

ⓒ Ilya Repin/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개요

대표작으로 〈사냥꾼의 수기 Zapiski okhotnika〉(1852)·〈루딘 Rudin〉(1856)·〈귀족의 보금자리 Home of the Gentry〉(1859)·〈전야 Nakanune〉(1860)·〈아버지와 아들 Otsi i deti〉(1862) 등을 남겼다.

1856년부터는 주로 독일과 프랑스에 살았다.

초기생애와 작품

투르게네프는 퇴역 기병장교인 아버지 세르게이 투르게네프와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에 방대한 영지를 소유한 어머니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34년에 죽어 어머니만큼 그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애틋하게 되새기기도 했는데, 그의 유명한 단편소설 〈첫사랑 Pervaya lyubor〉(1860)에 나오는 아버지의 초상에서 가장 힘있게 구현되어 있다. 그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배했던 위압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그의 주요소설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여주인공의 원형은 아니지만 하나의 보기를 제시했다.

전제적 기질을 지닌 어머니는 아들의 삶과 스파스코예 영지를 똑같이 마음내키는 대로 지배했다. 스파스코예는 어린 투르게네프에게 러시아의 시골 한가운데 떠 있는 젠트리 계층의 문명의 섬이자 노예나 다름 없는 농민들의 상황에 내재하는 불의의 상징이라는 2가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 스파스코예는 전원성의 원천으로서 훗날 그의 주요작품의 맥락을 이루었으며 문명이란 인간의 정신과 같이 근본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면서 외부의 암흑으로부터 영원히 위협받는 어떤 것이라는 그의 문명관의 틀을 이루었다.

그는 사회제도에 대해 끊임 없는 적의를 품었는데, 이것이 그의 자유주의의 원천이었으며 민중성원으로서 인텔리겐치아가 조국의 사회적·정치적 개선을 위해 헌신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투르게네프는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유럽적 시각과 정서를 가진 유일한 러시아 작가로 성장했다. 비록 그는 가정과 모스크바의 학교들, 그리고 모스크바대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교육은 1838~41년 베를린대학교에 다니며 '독일의 바다'에 빠져 있던 시기에 주로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또한 베를린에서 반(反)마르크스주의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을 비롯한 동시대의 지도적 인물을 만났다. 이들을 통해 혁명 사상의 발판인 G. W. F. 헤겔의 철학에 관심이 싹텄으며, 그 역시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과 재능을 바치리라는 이상에 불타게 되었다. 그는 서유럽의 우월성을 굳게 믿고 러시아는 서구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며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문체를 본뜬 시극(詩劇) 〈스테노 Steno〉(1834)와 파생적 운문을 썼으나 처음으로 비평가들의 관심을 끈 작품은 1843년 출판된 장시 〈파라샤 Parasha〉였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에서 사랑 이야기가 가장 흔하게 등장하고, 1843년 처음 만난 유명한 여가수 폴린 비아르도를 향한 사랑이 그의 전생애를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한 열정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비아르도 부인과의 관계는 유럽에 대한 그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대개는 정신적 사랑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몇몇 그의 편지는 종종 그의 여느 작품 못지않은 뛰어난 관찰력과 교묘한 표현으로 그 이상의 친밀함이 있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럼에도 이 편지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투르게네프는 상냥하고 헌신적인 숭배자였으며 이 역할에 만족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스파스코예 영지의 한 농부 아낙네와의 사이에서 1842년에 태어난 딸이 있었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나중에 비아르도 부인에게 이 아이의 양육을 맡겼다.

1840년대에 투르게네프는 〈대화 Razgover〉·〈안드레이 Andrey〉·〈지주 Pomeshchik〉 등 좀더 긴 시와 몇 편의 비평을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 교수 자리를 얻는 데 실패하고 관직도 포기한 뒤 짤막한 산문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이 그 세대의 전형인 '의지가 박약한 지식인'에 관한 연구이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잉여인간의 수기 The Diary of a Superfluous Man〉(1850)이다.

여기에서 그는 러시아 문학 전반과 또 그의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의지가 약한 지식인 주인공들에게 '잉여인간'이라는 통칭을 붙여주었다.

동시에 그는 희곡 집필도 시작했는데 러시아의 대가인 니콜라이 고골리를 모방한 것이 분명한 〈가난한 신사 Bedny Dzhentlmen〉(1848) 등의 작품을 썼다. 이 가운데 〈독신 남자 Kholostoy〉(1849)만 당시에 상연된 단 1편의 작품이며 다른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은 실을 훌륭히 뽑아낼 수 있다 One May Spin a Thread Too Finely〉(1848) 같은 작품에서는 더욱 가까이에서 등장인물을 통찰하는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결국 걸작 드라마 〈시골에서의 1개월 Mesyats v derevne〉(1855)에서 섬세한 심리적 통찰력을 과시했다. 이 작품은 1872년에 직업배우들에 의해 공연되었다.

1898년 안톤 체호프의 희곡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이후 러시아 극단에서는 전례 없이, 비평가와 관객들이 투르게네프의 이 작품이 더 큰 성공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1909년에 위대한 연출자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지휘로 바로 이 극장에서 공연됨으로써 러시아 희곡의 대표작 중 하나임이 증명되었다.

전원생활 스케치

투르게네프는 1847년 외국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문학잡지 〈소브레멘니크 Sovremennik〉 편집실에 단편 습작 〈호르와 칼리니치 Khor i Kalinych〉 원고를 두고 떠났다.

오룔 지방에 사냥여행을 떠났다가 만난 두 농부의 이야기를 다룬 이 글은 〈사냥꾼의 수기 중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사냥꾼의 수기〉 연작이 탄생했고 1852년 출판되었다. 작품의 대부분은 작가의 체험을 기반으로 시골 영지 생활의 단편들, 농노를 소유한 러시아 젠트리 계층이 펼치는 일화와 다양한 지주의 초상을 묘사한다.

〈소브레멘니크〉에 여러 가지 제목으로 따로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사냥꾼의 수기〉로 한데 묶여 처음 출판되자 투르게네프는 체포당했고 1개월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억류되어 있다가 스파스코예로 강제 이송되어 18개월간 칩거했다. 이러한 조처의 명목상 이유는 그가 검열 규정을 어기고 고골리의 사망기사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냥꾼의 수기〉에 나타난 농노제에 관한 그의 비판적 견해, 그것도 어떤 도덕적 규범에 의해 어조가 약화되어 단지 농민들에 대한 지주의 잔혹함을 다룰 때만 드러낸 견해만으로도 그의 예술이 이와 같이 일시적으로 고난받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초기소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억류당한 기간동안 농노제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무무 Mumu〉 등의 작품을 썼으나 점차로 〈야코프 파신코프 Yakov Pasynkov〉(1855)처럼 집중적으로 등장인물을 분석하고 〈파우스트 Faust〉나 〈편지 A Correspondence〉(1856) 등에서처럼 비뚤어진 사랑을 섬세하게 또는 염세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시대적·민족적인 문제가 그를 짓눌렀다. 크림 전쟁(1854~56)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투르게네프의 세대, 즉 '40년대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다. 1850년대에 발표한 2편의 장편소설 〈루딘〉과 〈귀족의 보금자리〉는 이 10년 전 세대의 특징인 나약함과 무력함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향수에 젖어 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를 다룬 연대기 작가로서 그의 객관성은 이 초기 소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크림 전쟁 후 대두한 급진적인 젊은 세대 사상의 일부 경향에 동조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들 신세대 남녀의 긍정적인 열망을 신중하고 솔직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를 이끈 급진적 비평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등은 그에 대해 대체로 냉담한 태도를 보였으며 때로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어느 정도 방종한 기질을 지닌 그는 이 젊은 동시대인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가 공격했던 유형의 주인공들의 잘못을 강조하는 대신 단편소설 〈아샤 Asya〉(1858)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들의 젊은 혈기와 윤리의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들 속성은 투르게네프가 공감할 수 없는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의 자유주의는 점진적 변화를 수용할 수 있었으나 그보다 급진적인 어떤 것도 반대했으며 특히 농민봉기 사상을 거부했다.

장편소설 〈전야〉는 크림 전쟁 전야에 젊은 인텔리겐치아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1861년 농노해방이 선포되기 이전 러시아에 닥칠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그의 염세주의가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비아르도 부인과 그 남편과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듯하나 그의 자신감의 결여로 더욱 심해진 것이 확실하다. 1859년 체르니셰프스키가 런던을 방문해 자유주의적 지도자이며 투르게네프의 친구인 알렉산드르 게르첸을 만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립은 노골화되었다.

투르게네프 세대의 자유주의와 젊은 인텔리겐치아들의 혁명적 열망 사이에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투르게네프는 이러한 불화에 자신도 개인적으로 연루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러한 연루 의식에서 나온 소설이 탁월한 균형감각과 깊이를 가지고 두 세대를 분열시킨 쟁점들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그의 최대 걸작 〈아버지와 아들〉이다. 주인공 바자로프는 투르게네프가 창조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연과학의 법칙을 제외한 모든 법칙을 부정하고 투박하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허무주의자이지만 사랑에 쉽게 흔들리고 이때문에 불행해진다. 사회적·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주인공은 평민 출신의 혁명적 인텔리겐치아가 투르게네프가 속한 젠트리 계층 인텔리겐치아에 대해 거두게 될 승리를 상징한다. 예술적 관점에서 바자로프는 객관적 인물묘사의 성공적인 보기인 동시에 강렬한 죽음을 통해 비극적 인물상에 접근했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의 기적은 투르게네프가 개인적으로 바자로프의 반(反)유미주의를 혐오했음에도 매우 능숙하게 주제를 다루었으며, 모든 등장인물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부여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되자 급진적인 젊은 세대는 자신들에 대한 중상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했고 보수적인 세대들은 허무주의를 폭로하는 데 관대하다고 비난했다.

고립과 명성

자신의 문학적 명성에 대해 민감했던 투르게네프는 거의 한 목소리로 터져나오는 비판의 소리에 상심하고 러시아를 떠났다.

그는 은퇴한 비아르도 부인이 휴양중인 남부 독일의 바덴바덴에 정착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와의 언쟁과 러시아 문단과의 전면적인 결별로 그는 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거부한 러시아에 대한 심정은 〈망령 Prizraki〉(1864)·〈이제 그만 Dovolno〉(1865) 같은 단편소설에서 엿볼 수 있다. 바덴바덴을 배경으로 이 시기에 쓴 유일한 장편소설 〈연기 Dym〉(1867)는 적의를 띤 어조로 좌익과 우익 인텔리겐치아들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하고 있다.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비아르도 부부는 바덴바덴을 떠나야 했고 투르게네프도 그들을 따라 런던을 거쳐 파리로 갔다.

이와 함께 그의 관점에도 새로운 방향전환이 일어났다. 한때 열렬한 독일 예찬자였던 그가 한층 냉정해지고 비탄에 잠긴 것이다. 이제 그는 1870년대 파리에서 러시아의 명예 외교사절 몫을 하게 되었다. 조르주 상드, 귀스타브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그리고 젊은 에밀 졸라, 헨리 제임스 등 많은 문인들과 편지를 나누고 친목을 도모했다. 그는 1878년 파리 국제문인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879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 명예학위를 받았다. 러시아에서도 연례 방문중에 환대를 받았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모은 이 마지막 시기의 작품들 중 〈광야의 리어 왕 Stepnoy Korol Lir〉(1870)·〈봄의 급류 Veshnie Vody〉(1872)·〈푸닌과 바부린 Punin i Baburin〉(1874) 등의 아름다운 단편에는 이 향수가 잘 나타나 있으며, 그뒤에 발표한 〈승리한 사랑의 노래 Pesn torzhestbuyroshchey lyubvi〉(1881)·〈클라라 밀리치 Klara Milich〉(1883)는 환상에 가까운 등장인물을 내세운 단편이다.

마지막 장편소설 〈처녀지 Nov〉(1877)는 자신의 문학적 명성을 되찾기 위해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은 러시아 농민이라는 처녀지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기를 바라는 희생적인 젊은 나로드니키의 헌신을 그리고자 한 것으로, 전쟁의 시사성을 다루려고 노력한 사실주의적 작품이지만 그의 장편소설 중 가장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최후의 주요작품 〈산문시 Poems in Prose〉는 명상적 감성과 러시아어에 대한 유명한 송가가 주목할 만하다.

평가

투르게네프의 작품은 정밀하게 계산된 과장의 억제, 균형,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고려 등으로 동시대 가장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과 뚜렷이 구분된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모두 시사적이며 의식이 있는 작품으로서 고상한 사랑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예리한 심리묘사 등으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다. 그 자신 역시 아주 매력적이고 재치있으며 정직한 문인이었다. 그의 명성은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에 가려 덜 빛났을지는 모르지만 명석하고 도시적 세련미가 넘치는 인품, 그리고 삶 속의 아름다움을 매우 소중히 다루는 의식은 그의 작품에 변함 없는 호소력을 지닌 마력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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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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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이반 투르게네프의 초상화 (1874년 제작)
이반 투르게네프의 초상화 (1874년 제작)
출생 1818년 10월 28일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오룔
사망 1883년 9월 3일 (64세)
프랑스 파리
직업 소설가
장르 사실주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러시아어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문화어: 이완 쎄르게예비치 뚜르게네브, 1818년 11월 9일(율리우스력10월 28일) ~ 1883년 9월 3일(율리우스력8월 22일))는 러시아 소설가, 시인이다.

그는 러시아 중부 오룔 시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1818년 10월 2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군 대령으로 퇴직하고 스파스코예 마을로 이주함에 따라서 투르게네프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이 시골 마을에서 보냈다. 그 후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와 페테르부르크 대학 철학부,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러시아 고전 작가들 가운데 가장 서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인생의 많은 세월을 서유럽에서 보냈고 서구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사상적 기반도 서구주의적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러시아의 대자연과 시골 풍경이 섬세하고 수려한 필치로 묘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휴머니즘이 조화롭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1852년에 25편의 중단편 모음집으로 출간된 《사냥꾼의 수기》로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상을 섬세한 서정적 필치로 심층 묘사하여 그에게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연대기 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해준 장편소설들 《루딘》(1856년), 《귀족의 둥지》(1859년), 《아버지와 아들》(1862년), 《연기》(1869년), 《처녀지》(1877년) 등이 출판되었다. 그는 1883년 8월 22일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러시아로 옮겨져 그 해 9월 27일에 페테르부르크에 안장되었다.

일생[편집]

방탕과 도박으로 타락한 아버지와 수많은 농노를 거느린 전제 군주적 성격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6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838년 베를린 대학에 유학하여 스탄케비치·바쿠닌 등 진보적 러시아 지식인과 사귀며, 헤겔 철학·역사·고전어를 연구하였다. 1841년 서유럽 자유 사상의 동경자가 되어 귀국하였다. 그 후 '서구파'에 출입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하고, 벨린스키·게르첸 등을 사귀었다.

1843년 내무성에 근무하면서 처녀작인 서사시 〈파라샤〉를 발표하였다. 계속하여 희곡과 중편 소설을 썼으며, 1847년 잡지 《동시대인》에 단편 스케치 〈호리와 카리누치〉를 발표하여 독자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1852년 당시의 가장 큰 사회 문제인 농노 제도를 공격한 소설 《사냥꾼의 일기》를 발표하여 정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사냥꾼의 일기에서는 농노제를 지적한 소설 '비류크'도 담겨 있다. 그 후 고골리에 대한 추도문이 말썽을 일으켜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고 감금당하였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그의 위치는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루딘》, 《귀족의 집》, 《전날 밤》, 《첫사랑》을 발표하여 환영을 받았으나, 1862년 발표한 《아버지와 아들》은 구·신세대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 후 장편 소설 《연기》와 1876년 대표작 《처녀지》를 발표하였으며, 《사랑의 개가》, 《산문시》, 《죽음 뒤에 오는 것》 등을 계속 발표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서유럽까지 열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는데, 프랑스에 있을 때에는 플로베르·졸라·모파상 등 프랑스 작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서구적 색채가 짙은 작가로서, 1840-1870년대의 모든 사회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다. 특히, 서정미에 넘친 아름답고 맑은 문체, 아름다운 자연 묘사, 정확한 작품 구성, 줄거리와 인물 배치상의 균형, 높은 양식과 교양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만년에는 명상적인 사색을 계속하다가, 1883년 파리 교외에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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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늙은 거지 한 사람이 나의 발 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

아아, 가난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잔인하게 이 불쌍한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요!

그는 빨갛게 부풀은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습니다... ...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고 손수건 마저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어쩌나... ...`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내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진게 없구려".

거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서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1818. 11.9 ~1883. 9. 3)

      러시아의 중부 오률시의 부유한 대지주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기병장교, 어머니는 6살연상의 대지주의 딸사이에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문학을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했다.

      64세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중요작품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첫사랑>  등이 있다.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

ⓒ Tucker Collection / wikipedia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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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 하이퍼시 명언 10 / 최흔 2021-05-25 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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