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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일본어 번역본에 오류가 있다???
2019년 01월 22일 00시 59분  조회:4067  추천:1  작성자: 죽림
윤동주 ‘서시’ 일본어 번역본 오류있다
재일동포 서경식교수 지적 이부키 1984년 번역때
정반대 해석 진실 훼손뒤 일본어역 정본으로 사용
 
 
한겨레  
 
 
 
» 윤동주 서시
 
 
 

‘죽어가는 것들→살아있는 것들’로 왜곡일본에 저항, 의도적으로 은폐

 

윤동주 서시는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신편 현대문>에 실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에 전문 번역본이 인용돼 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도시샤대 구내에 1995년 세워진 그의 시비에도 이 번역본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번역본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구절로 바꿔버린 것이 논란의 초점이 됐다. 윤동주 연구가 이부키 고가 서시를 그렇게 번역해 84년에 출간했으며, 그 번역본은 지금 거의 일본어역 정본처럼 자리잡고 있다.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있는 일본 도쿄경제대학의 재일동포 2세 서경식 교수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논란에는 억압자와 피억압자, 머조리티(다수자/주류)와 마이너리티(소수자/비주류) 간의 왜곡되고 불평등한 ‘식민주의적 권력관계’가 짙게 반영돼 있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17일 한일민족문제학회 주최로 숙명여대에서 열릴 강연회에서 발표할 ‘디아스포라와 언어-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를 자세히 다룬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는 일찍이 서시의 번역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당시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고, 조선인의 말과 민족 옷, 생활풍습, 이름 등 민족문화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외친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당연히 심히 증오했을 것이다. 이부키의 번역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도 꼭같이 사랑한다는 꼴이 돼버리지 않을까?”

그러자 이부키는 자신의 2002년판 책에 이에 대한 반박문을 실었다. 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기에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며 “모든 죽어가는 것, 모든 살아가는 것 모두 다 동의이어(同義異語)”라고 주장했고, 아울러 “(윤동주의) 실존응시적 사랑의 표출에는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미움 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서경식 교수는 이부키가 번역하기 전에 이미 김소운, 김학현 등의 번역본이 출간됐고 김학현은 문제의 구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부키는 자신의 번역시집에 붙인 문헌목록에 김학현의 책을 실어 그런 번역이 이미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해,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당 구절을 굳이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서 교수는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가한 죄악에 대해 무지하며, 게다가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도 그것을 되도록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실존적인 사랑의 표출’로 읽으려는 경향을 지닌다”고 비판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윤동주 <서시> 일본어 번역본 오류있다 ’를 읽고

의도된 오류와 의도하지 않은 양보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지난 17일치 <한겨레>에서 ‘윤동주 <서시> 일본어 번역본 오류 있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연세대 윤동주 기념사업회 일을 6년간 보아오면서 윤동주에 대한 여러 해석을 눈여겨보곤 하였다. 윤동주 시들을 항일 의도로 읽지 않고 빼어난 서정시로 읽으면 그가 더 보편적인 시인으로 자리잡지 않겠느냐 하는 논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작가나 시인은 그가 태어난 시대에 포위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가해자 집단이 설치는 시대에 피해자였던 작가 의식을 어떻게 그 시대감각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나는 그 의도가 옳지 않다고 읽는 쪽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바뀐 내역, 그야말로 숨겨진 두 차원의 슬픈 이야기를 윤동주 장조카 윤인석 교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 착한 가족사는 내 마음을 슬픔에 젖게 한다. 일본인이 윤동주 시를 번역할 당시 그의 친동생인 윤일주 선생은 일본에 있었고 일본인 이부키 고는 자주 윤일주 선생을 찾아와 번역한 시들을 보여주면서 자문을 청하곤 하여, 이 시 ‘서시’에 대한 번역도 고민, 고민 끝에 그대로 용인한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봐라 바로 그 시인의 아우가 용인한 번역이니 틀림이 없지 않으냐? 이 번역에 왜 시비냐?’ 정도의 느긋한 배포가 이 번역자에게는 있다고 내겐 읽혔다. 내가 이 사실 이야기를 놓고 슬퍼하는 이유는 이렇다.

 

모든 가해자는 그가 행한 가해 사실을 숨기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거 뭐 대단일 일이라고 자꾸 과거를 들추느냐? 앞으로 올 미래만이 더욱 중요하지 않으냐?’ 따위의 추악한 궤변이 우리 주변에는 횡행한다. 시인 이상이 ‘하루치씩만 잔뜩 산다’고 썼을 때 이 하루란 언제인가? 어제와 오늘, 담날, 모레, 이 시간개념은 따지고 보면 편의상 붙인 날짜일 뿐이다. 윤동주가 ‘내일은 없다’라는 시에서 썼듯 누구나 내일, 내일 하지만 실은 내일이란 없고 언제나 오늘만 있다. 이 오늘은 또한 놀랍게도 순식간에 어제, 그제, 과거로 바뀐다. 감추려는 가해자의 악행과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지 않으려는 피해자의 선량한 다짐(경우에 따라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겠지!)은 인간 존재가 쥐고 있는 양날의 칼이자 슬픔이고 설움이다.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말에 나는 중견작가 정찬의 두 작품 ‘슬픔의 노래’와 ‘완전한 영혼’ 그리고 이것을 <한국방송>에서 각색 방영한 ‘팩션 드라마-오월의 두 초상’ 강의로 끝을 마쳤다. 5·18 광주, 군부 독재자들이 탱크로 밀고 들어가 민간인들을 살해한 이 사건 당시, 한 피해자 장인하와 가해자인 계엄군 출신 박운형의 삶을 놓고 작가는 피를 흘리듯 정신의 기운을 모아 마무리짓고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슬픔의 강물로 흐른다는 이 소설적 가설은 가해자가 그 스스로 가해자였다는 자의식이 전제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결코 그런 자의식을 갖거나 그것을 슬픔으로 품어 안지 않는다. 그게 악의 본질이니까.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랑 또한 그 너비와 폭은 아예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한마디 적어 둔다. 악당은 언제나 악당일 뿐이고 천박한 것이다.

 

///정현기/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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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1. 伊吹郷(이부키 고우) 번역ㅡ 

1984년 윤동주의 시집을 번역 출간. 
일본 현대문 교과서에 실려 있는 번역.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はじ》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2. 曹紗玉 번역ㅡ 

『明洞のキリスト  韓国キリスト者三十九人詩集』에 실린 번역.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なき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歌う心で 
すべ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与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3. 上野潤 번역ㅡ 

* 199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번역 출간. 
역자가 서울에서 유학했고, 번역 당시 윤동주의 대학 동기인 柳玲교수 및
여러 한국인들에게 시어에 대해 물어보고 번역 했다고 함. 

序詩 

息絶える日まで天《そら》を仰ぎ 
一点の恥の無きことを、 
木の葉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痛めた。 
星を詠う心で 
全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み行かねばならない。 

今夜も星が風に擦れている。 
  
                      1941.11.20. 






4. 上野都 (우에노 미야코) 번역ㅡ 

* 최근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번역 출판. 

序詩 

召される日まで天を仰ぎ 
いかなる恥もなさぬことを、 
一葉(ひとは)に立つ風にも 
わたし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滅びゆくものを慈(いつく)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与えられた道を 
歩いてゆかねばならない。 

今夜も風が星にかすれて光る。 





#
문제 삼는 부분은 

하늘 -> 空 
부끄럼 -> 恥辱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보면 알겠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空 대신 天을, 恥辱 대신 恥로 쓰고 있어. 


그런데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당장 네이버 일본어 사전에서 生きとし生けるもの를 검색하면 '살아 있는 온갖 것'이라고 나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결국 살아있다는 의미이고,(살아있어야 죽을 수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들이라고 의역한거 같은데, 
이건 솔직히 시어를 훼손한거라고 보거든. 


참고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3375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41145.html 
http://www.eonet.ne.jp/~koreanya/02shi1/shiron1-YoonDongJyunoJyoshi.htm





チャン・ウニョン 선생님이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처음으로 이 시의 진실된 반짝임을 알았다. 
이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어지간히 나쁜 번역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진 이 시가 진부하다고 느껴진걸까? 하고 생각해서 다른 번역을 찾아보았다. 
문제는 6행이었다. 

チャン・ウニョン의 번역에는 '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を愛さねば' 라고 한 부분이 
伊吹郷의 번역에는 '生きとしい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라고, 
마치, 장래 일본에서 수감되어 옥사한 자신의 운명과, 
일본의 조선지배로 살해당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조선에게서 모든것을 빼앗았다는 의미마저도, 아주 훌륭하게 은폐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단어를 써서, 자기들의 시꺼먼 죄를 거대한 생명의 일부 속으로 녹여 섞고있다. 
茨木のり子는 伊吹郷의 번역을 절찬하고 있지만, 이건 사기가 아닌가? 
본래의 시는 한글을 좀 알고있다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평범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죄를 얼버무리려는 일에, 시와 관련된 사람들,
그것도 조선에 마음을 주고 있다과 여겨지는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이 사람의 반응이 결코 주류는 아닐거야. 
그럼에도 일본인이라도 이 번역은 아니다, 라고 진실은 안다면 저렇게 말 하는 걸 보면, 
정말 이부키 고우의 번역은 심한 문제라고 생각해. 
그게 교과서에서 학생들이 배우는거라면 더더욱. 



4번 역자의 번역은 독특해. 
2, 3번 역자는 모두 6행을 全ての死に行くものを愛さねば라고 번역했는데 
이 사람은 すべての滅びゆくものを慈しまねば라고 번역했거든. 

그 뉘앙스 차이... 
http://m.jabo.co.kr/a.html?uid=35665§ion=s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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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문학>>

 

 

윤동주 서시의 일본 시비詩碑

오역으로 윤동주를 두 번 죽여서야

 

이 해 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동주가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써서, 18편의 시를 담은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든 후, 그 머릿부분에 갖다 놓은 무제無題의 시가 오늘날 우리들이 애송하고 있는 이른바 윤동주의 서시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용정 교외의 명동에서 출생,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 일본에 도항, 도시샤대학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 우리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고종사촌 송몽규(당시 교토대학 재학생)와 함께 사상범으로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재판 결과, 두 사람 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이 선고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처럼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죽은 그의 유고집은 친구 정병욱 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보관되다가 해방 후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져서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출간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선배요 사장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은 윤동주 시집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 이외에 윤동주와 그의 시인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우리 나이 - 필자 )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가 수학했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에는 그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는 1995년 2월 16일 동 대학 코리아 클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또 최근엔 그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시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의 서시는 우리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 땅에도 시비가 세워지다니 참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일본어로 번역된 비문을 읽어보면 여기엔 치명적인 오역이 있어 이래서야 윤동주를 두 번 죽이는 게 아닌가 하는 분노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 시비에 새겨진 서시 옆에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ハジ)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あた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伊吹郷)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을 살펴보면, 먼저 첫 연의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하늘’을 ‘空ソラ’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윤동주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박애정신과 민족 사랑이 그 정신세계의 뿌리였기에 그의 하늘은 공허한 하늘(空ソラ)이 아니라 신앙으로서의 하늘 혹은 천지신명을 뜻하는 하늘(天テン)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도 '덴(天)'이며,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옳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다음 두 번째 오역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하고 다짐한 것을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박해나 고난을 당하더라도 자기의 신앙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다짐한 것인데 ‘한 점 치욕이 없기를’하고 번역했으니 이 또한 그의 시 정신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했다. 부끄러울 恥 자만 써도 될 것을 굳이 욕 당하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비는 듯한 욕辱 자를 덧붙여서 의미를 왜곡시킬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세 번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의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로 번역하여 작자의 시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켜 놓았다.

'죽어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과 어떻게 의미가 같을 수 있겠는가. 암울한 일제의 압제 아래서 사람만이 아니라 민족의 언어도 풍속도 문화도 죽어가는 시대에 이렇게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까지 사랑하겠다는 시인의 결연한 의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이부키 씨가 아무리 이어동의異語同義라고 우긴다 할지라도 치명적 오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씨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 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를 반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한 바 있다.

序詩死ぬ日まで天を仰ぎ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私は心を痛めた。星をうたう心で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そして私にあたえられた道を歩んでいかねば。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일본 기독교 출판국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저명한 윤동주 연구자인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전 와세다대 교수(문학평론가)도''서시'의 일본어역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일본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는 '서시'의 일본어 번역에 일부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부분을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서시’ 2007. 가을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던 연고지(교토조형예술대학)에 세워진 새 시비에 여전히 이부키 씨의 번역문이 버젓이 새겨져 있다니, 비록 그가 일본에서 처음 윤동주 시집을 완역한 공功의 부분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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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윤동주의 서시 그 대목은 맹자의 군자삼락에서 따온 것입니다. 

거기에 "仰不愧於天, 埠俯작於人"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내용입니다.
윤동주가 이 구절의 내용을 평소에 좋아하여 서시에 변형하여 담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어로 번역한다면 원문 그대로 마땅히 하늘은 天이라 해야 맞습니다.
그걸 空으로 변역했다면 그 사람은 맹자도 안 읽어본 무식장이 아니면 일부러 誤譯을 한 것일 것입니다.
아마도 홍이표 기자의 말대로 일부러 誤譯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번역깨나 한다는 일본인이 맹자도 안 읽었을 리는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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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연구자 김응교 교수
ㅡ"'역사성' 지우고 '착한 사람'으로 박제화"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올해로 탄생 100주년(2017년)을 맞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작품이 일본에서 왜곡 번역됨에 따라, 그가 '역사성'을 잃은 채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비판이 나온다.

오는 12일부터 9월 19일까지 서울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열리는 '세계가 취(醉)한 우리문학' 기획특별전 프로그램 가운데, 시인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의 번역문학을 전시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전 세계 42개 언어로 번역된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위원단 측은 "정지용과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말의 육체와 정신을 세계적 수준까지 고양시킨 작가"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전시에서는 윤동주 시의 일어 번역을 둘러싸고 제국주의적 관점을 고수한 이부키 고(伊吹郷)와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의 번역을 소개하고 이들 번역가의 시선을 곱씹어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동주 연구자인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10일 CBS노컷뉴스에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에 적힌 '하늘'(天)을 '빌 공'(空)으로 번역했다"며 "이러한 번역으로 인해 윤동주가 지닌 역사성이 지워졌다"고 지적했다. 
 

"윤동주의 '하늘'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맹자'에 나오는 하늘의 의미다.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보았을 때 '天'으로 번역돼야만 의미를 지닌다.”

'맹자' '주역' '추구' 등을 윤동주는 시에 풀어 인용했는데, 이 책들에서 '하늘'은 공(空)이 아니라, 천(天)으로 쓰여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둘째 자아성찰의 대상으로 하늘을 생각할 수 있다.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징할 수도 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늘'도 '텐'(天)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하늘을 '空'으로 번역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이부키 고의 얘기로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번역'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라는 영향력 있는 인기 작가는 이부키 고의 번역본을 보고 감화를 받아 윤동주 관련 수필을 썼는데, 그것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다"며 "그 글에 '서시' 등 윤동주의 시가 몇 편 인용돼 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윤동주의 '역사성'보다는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결국 인류애를 저버린, 참혹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살며 꿈을 접어야 했던 한 청년 지식인의 현실적이고 치열한 고뇌가 지워진 자리에는, 관념에 기댄 낭만적인 모호성만 남게 됐다는 지적이다.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을 '빌 공'으로 번역하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이부키 고의 번역을 비판하는 움직임은 일본에서도 있어 왔다. 

김 교수는 "더욱이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서시' 가운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로 번역했다"며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윤동주 연구를 위해 가장 실증적인 연구를 해 온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이러한 번역에 대해 '결국 당시 살아있는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가 됐다'는 비판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앞서 재일동포 2세인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지난 2006년 한겨레신문 기고를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단지 번역어의 적절성 수준을 넘는 심각한 문제가 내포돼 있다. 오오무라는 윤동주의 '저항'정신을 강조하고, 이부키는 보편적인 '실존응시의 사랑'을 보려 한다. 이것은 윤동주의 생애나 작품에 관한 해석의 어긋남(차이)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감성의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걸 시사하고 있다. 원문을 그대로 읽으면 굳이 '살아있는 모든 것' 따위로 거드름 피는 번역어를 고를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이부키 고 번역이 정역본으로 보급돼 있다. 일본의 많은 독자들은 (결코 모든 독자는 아니지만)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민족에게 해를 가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강조했다.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다. 이부키 고의 번역에 숨어 있는 문제를 비판한 서경식·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와 같이 저 역시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지적해 왔지만, 일본의 윤동주 시 번역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에도 이부키 고의 번역이 새겨져 있다. 이후 새로운 일본어 번역 시집이 5종 나왔지만, 이부키 고 번역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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