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http://www.zoglo.net/blog/kokuryeo 블로그홈 | 로그인

카테고리

<< 9월 2021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 -> 력사/민속 -> 조선(한국)력사민속

나의카테고리 : 고구려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 사료史料 모음
2021년 07월 14일 01시 15분  조회:117  추천:0  작성자: 고구려
동이전東夷傳
 
고구려 자료 모음
 
 
<후한서>後漢書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 '예맥'이 있고, 북으로 부여에 접한다. 지방이 이천리이다. 큰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사람들이 따라 거한다. 작은 밭일이라 힘써 지어도 족하지 않으니 스스로를 헤아렸다. 고로 그 풍습이 절약하여 밥을 먹고, 집을 크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다른 종류라 한다. 고로 언어와 법등 많은 것이 같아 한쪽 다리를 끌며 꿇어 앉아 절하고 걸음걸이는 모두 달리는 것과 같다. 무릇 다섯종족이 있는데,
 
 
'소노부'[혜동에 말하길 '消'는 위지에 '涓(연)'으로 되어 있다.],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로[고려오부는 하나 '내부'로 일명 '황부' 즉 '계루부'이며 둘은 '북부' 일명 '후부' 즉 '절노부'이고 삼은 '동부' 일명 '좌부'로 즉 '순노부'이고 사는 '남부' 일명 '전부' 즉 '관노부'이며 오는 '서부' 일명 '우부' 즉 '소노부'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이를 이었다. 그 벼슬을 세워 '상가', '대노', '패자', '고추대가',[위지에는 '고추가'이다. 고려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관직명)'와 같다.] '주부', '우태', '사자',[위지에 '사자' 위에 '승'이 있다.] '백의', '선인'이 있다.[위지는 '帛'는 ' (조)'자로 서로 비슷하여 혼란되어 바뀌었다. 조일청의 삼국지주보의 환우기에 '조의'의 우두머리는 '대형'이다. '동이'가 서로 전하길 '조의','선인'이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이로써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다. [전서에 '원봉'중에 '조선'을 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으로 하였다.] '현도'에 속하게 하고, 북과 피리와 광대를 주었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모두 깨끗한 옷을 두르기를 즐겨 밤이 오면 쉽게 남녀가 모여 가무와 음악을 즐겼다. 귀신과 토지신, 영성 [전서 음의에 '용성'의 좌각을 말하여 '천전'이라하니 즉 농사에 상서로운 것이다 진일에 우성에 제사지내니 불러 '영성'이라 한다. 풍속지에 진의 신을 '영성'이라 한다. 고로 진일에 동남에 제사한다.]에게 제사하길 좋아하여 시월에 큰 모일을 가져 하늘에 제사시내니 일명 '동맹'이라 한다. 기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어 불러 수신이라 한다[위지 통지에 ' '이 '隧'로 적혀있다.]. 또한 시월을 맞이하여 이에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의복이 모두 비단으로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였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머리띠를 하는데 관과 같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감옥이 없어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심의하여 이를 살인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혼인은 모두 부인의 집에서 치루고 자식을 낳아 다 크면 그런 연후에 마땅히 돌아온다. 사람을 보낼때가 되면 그 도구를 갖추었다. 금 은 재물 비단이 다될때까지 후하게 장사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씨를 뿌렸다.  그 백성의 성품이 흉하고 급하고 기력이 있어 전투를 익히고 노략질을 좋아하였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구려'는 일명 '맥'이다. 그 갈라짐이 있으니,[심흠한이 말하길 구려에는 종류가 있으니 일명 '맥이'이다. 통지에 '맥'이라 하고 '이'자가 없다. 이 '이'자는 첨언한것이다.] 작은 물에 의지하여 거하면, 이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온다. 이를 소위 '맥궁'이라 한다.[위씨춘추에 말하길 '요동군''서안평현'북쪽이다. 작은 물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다른 종류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왕망'초에 '구려'의 병사를 보내어 '흉노'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가고자 하지 않았다. 강제로 이에 파견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에서 노략질 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쫓아 공격했으나 전사하였다. '망'이 장수 '암우'에게 이를 공격하라고 명했으나, 구려후 '추'를 꾀어 변방으로 들어가[위지에는 '騶(추)'가 ' (도)'로 되어 있고 전한서 왕망전에는 '騶'로 되어 있다.] 이를 베어 '장안'에 머리를 전했다. 망이 크게 말하길, '고구려왕'의 명을 고쳐 낮추어 '구려후'라 하였다. '맥인'의 변방 약탈이 더욱 심하였다. '건무' 팔년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광무' 다시 왕호를 회복했다. 이십삼년 겨울 '구려' '만우락'대가 '대승'등 만여호가 '낙랑'의 안에 이르러 속했다. 이십오년 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침입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믿음으로 이에 구하니 모두 변방으로 돌아갔다.
 
 
 
후에 구려왕 '궁'이 태어나자 눈을 뜨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꺼려하였다. [위지에 '懷'는 '惡(미워하다)'오 기록되어 있다. '懷'는 마땅히 '괴(괴이하다)'가 잘못된 것이다. 옛부터 '懷'자는 많이 ' (두려워하다)'와 섞어 썼다. 고로 잘못되어 바뀐 것이다.] 이에 자라 용맹한 장사가 되니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원흥'원년 봄 요동에 다시 들어와 육현을 빼앗아 노략질 하니 태수 '경기'가 나아가 이를 격파하여 그 큰 장수를 베었다. '안제' '영초' 오년 '궁'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며 '현도'에 속하길 구했다. '원초' 오년 다시 '예맥'이 '현도'를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화려는 현이고 '낙랑군'에 속한다.] '건원'원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위지 북사에 '諷'이 '風'으로 기록되어 있고 안제기에 '諷'으로 되어있다. 통감도 이와 같다.] 병사로 변방에 나아가 이를 공격했다. '예맥'의 큰 장수들을 베고 포로로 삼으니 병마와 재물을 얻었다. '궁'이 이에 아들 '수성'과 장병 이천여명을 '광'등에게 보내며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자 '광'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에 험하고 좁은 지형으로 대군을 막고 삼천명으로 몰래 들어가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이천여명을 죽이고 상처입혔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여국'이 삼천여 기병으로 동시에 이를 구하고자 파견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가버렸다. 여름 '요동''선비'의 팔천여명으로 '요수'를[현의 이름이다. 요동군에 속한다.] 공격하여 빼앗아 사령과 백성을 죽였다. '채풍'등이 뒤쫓아 '신창'으로 나아갔으나 전몰 하였다. 공조'경모', 병조연'용서' 병마연'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죽은자가 백여명이다. 가을 '궁'이 '마한''예맥'의 수천여기병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와['台'는 또한 '治'이다.] 장병 이만여명을 파견하고, 주군의 병력을 합하여 이를 깨뜨리고 정벌하니 그 머리를 오백여개나 베었다.
 
 
 
이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올랐다. '요광'이 위에 말하길 '이 상으로 인하여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자' 하니 의논한자들이 모두 이를 가히 허락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길 궁은 전의 '걸'과 같고 교활하니, '광'은 능히 깨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이를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니니 조문의 파견해야 한다. 인하여 전의 죄를 책망하고 용서하여 가히 처벌하지 않아 후에 친선을 취해야 한다. 하니 '안제'가 이를 쫓았다.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에 살아있는 백성들을 돌려 보내기 위해 '현도'에 항복하니 고하기를 '수성'등이 포악하고 배반함이 형용할수 없어 마땅히 베어 절단하여 절임으로써 백성에게 보여야 하나, 다행히 용서를 받아 죄를 청하여 항복하길 빈다. '선비' '예맥'은 해마다 노략질 하고 백성을 빼앗아 핍박하니, 수천이요, 마름질하여 보내는 자는 수십에 백명이니, 이는 교화될 마음이 아니다. 이 후로 현과 관은 전쟁하지 말것이며 친하고 따르며 살아있는 자를 보내니 모두 바로 그 세를 바쳐야 한다. 사람당 비단 사십필이고 어린이는 그 반이다.
 
 
 
'수성'이 죽자 아들 '백고'가 올랐다. 그후에 '예맥' 복속하여 따랐다. 동쪽으로 작은일들만이 있었다. '순제''양가' 원년 '현토군'에 둔전 육부를 두었다. '질'과 '항'사이에 요동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니 '대방'의 령을 죽이고,[군국지에 '서안평' '대방'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한다.] 낙랑태수의 처자을 잡았다. '건녕'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이를 쳤다. 수백의 머리를 베니 '백고'가 다시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길 구걸했다.
 
 
 
<삼국지>三國志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한나라때에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하사하였는데, 항상 '현토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 '고구려'를 영주로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후에 점점 교만해지고 방자해 지더니. 군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동쪽 경계에 작을 성을 쌓았다.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두면, 해마다 이를 가질러 왔다. 이제 '호'들 조차도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라 한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관을 두고 '대로'을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족으로 '대가'는 모두 '고추가'로 칭하는데, '연노부'가 본래 나라의 주인으로 이제는 비록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혈통을 잇는 대인으로 '고추가'가 칭한다. 역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을 하는여, '고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은 역시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어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알리는데, '대부' 벼슬하는 집의 신하들은 모임에 앉거가 일어서는데 있어,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반열을 얻지는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함께 묻는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어 전한다.
 
 
 
<송서>宋書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선조는 '주몽'이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왕'이 궁실안에 잠그었으나 태양이 이곳을 밝게 비추어, 몸을 끌었으나 이를 피하였지만, 태양의 그림자가 또한 쫒아 왔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를 베니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이를 버려 개에게 주었지만, 개는 먹지 않고, 다시 버려 돼지에게 주었지만, 역시 먹지 않았다. 이를 길가에 버렸지만, 소와 말이 이를 피했다. 후에 이를 들에 버렸는데, 새의 무리가 털로써 이를 길렀다. '부여왕'이 이를 쪼개어 나눌려고 했지만, 능히 깰수 없었다. 그 어미에게 돌려 주자,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미 자라 있으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이다. 부여사람이 '주몽'이 사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장차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여 주몽을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그를 말지기에 명하였다. '주몽'이 매양 사사로이 실험하여, 좋은말과 나쁜말이 있음을 알고, 좋은 말은 음식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길러 살찌우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스스로 타고, 여윈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쏘아 하나의 화살을 쏠 시간동안에 적은 화살로 많은 짐승을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한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조몽의 어미가 은밀히 이를 알고, '주몽'에게 말하길,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는 재주로써, 마땅히 먼 곳에 가야한다."  '주몽'이 이에, '오인','오위' 두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큰물가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인들이 이들을 급히 쫓았다.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길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병사가 쫓아와 이에 이르렀다. 어찌 건널수 있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이에 흩어저, 쫓아온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사람은 납의를 입고, 한사람은 수한의를 입었다.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고, '고구려'라 불렀다. 이런 연후로 성씨를 고씨(?)라 하였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도망한후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시여해'라 하였다. 자라, 주몽이 나라의 주인임을 알고, 곧 어미와 함께 도망하여, 이에 돌아오니,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대를 이어 섰다. '여달'이 죽고, 아들 '여율'이 섰고,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가 섰다. 이에 '부여'를 침공하여 '부여'가 크게 패하니, 속하였다. '막래'의 자손이 서로 전하여 '궁'에 이르렀다. 나면서부터 눈을 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미워하였다. 자라 흉폭하고, 사나우니, 나라가 깨어졌다. '궁'의 증손 '위궁'이 또한 나면서부터 보았다. 사람들이 증조 '궁'과 같다하여,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같음을 '위'라 하였다. '위궁'역시 용력이 있고, 활과 말타기를 잘하였다. '위'나라 '정치' 중에 '요서' '안평'을 침입하였는데,[삼국위지 동이전과 수서 고려전에 '요서안평'은 '서안평'으로 적혀있다. 후한서 군국지에 '안평'은 '기주'에 속하며, 삼국지에 '서안평'은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 '요서군'은 '안평' 혹은 '서안평현'에 있다. 이중에 '요'자가 남았거나, 혹은 '요'자 밑에 '동'자가 빠졌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깨뜨렸다. 그 현손 '을불리'와 '리'의 아들 '쇠'가 '열제'때에 함께 '모용씨'와 서로 공격하였다. '건국' 사년 '모용원진'이 무릴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고 '남섬'에 스스로 들어와서 '목저'에서 싸워 '쇠'군을 크게 깨뜨렸다. 승승장구 하더니, '환도'에 이르르자 '쇠'가 달아나 숨었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 묘를 파해치고, 그 주검을 싣고, 그 어미와 처와, 보물과 남녀오만여명을 함께 노략질 하고, 그 궁실을 불살라, '환도성'이 패허가 되자 돌아 왔다. 그 후로 '쇠'는 사신을 보내 알현함이 멀어지고, 서로 막혀 원수처럼 지냈는데, 뒤에 가서 '쇠'는 '백제'에게 죽었다.
 
 
 
'세조'때에 '쇠'의 증손 '련'이 사자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받으러 방물을 받치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받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아름다이 여기어, 조서를 내리어 그 나라의 이름을 내리니 '원외산기시랑''이오'를 보내어 '련'에게 내리길 '도독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였다. '오'가 거하는 '평양성'에 이르러 여러 가지 일을 물었다. 말하길, '요'는 동남으로 일천여리이고, 동쪽은 '책성'에 이르고, 남쪽은 '소해'에 이르고 북쪽은 옛날 '부여'에 이른다. 백성은 전의 '위'날 때보다 3배이다. 그 땅은 동서로 이천리이고 남북이 일천여리 이다. 백성은 모두 땅에 정주하며, 산과 골짜기에 근거하여 거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흙과 밭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사가 족하지 않아 사람들이 음식을 절약한다. 그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밤이 되면 곧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즐기니, 귀한과 천함의 절도가 없다. 그러하여,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니, 왕도 그 궁실을 다스리길 좋아한다. 관명에는 '알사''태사''대형''소형'이라 불리우는게 있다. 머리에는 절풍을 하는데 그 형태가 고깔과 같고, 두루 새의 깃털을 꽂아 귀천의 차이를 두고, 서 있을 때는 팔짱을 끼고 꿇어엎드려 절을 할 때엔 한 쪽 다리를 뻗는다. 걸음은 달리는 것과 같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하니 나라에서 큰 모임이다. 그들이 공회에서 입는 옷은 모두 비단에 금이나 은으로 수를 놓아서 장식을 한다. 그들은 또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음식에는 그릇을 이용한다. 삼척마가 나는데, 원래 주몽이 타던 것이라고 한다. 말의 종류가 즉 과하마이다. 그 뒤로부터는 사신을 보내서 서로 찾았고, 해마다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을 바쳤다.
 
 
 
이때 '풍문통'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니, '세조'가 산기상기'봉발'을 파견하여 '련'에게 고하길 '문통'을 보내라 하니, '련'이 상서와 '문통'을 함께 갖추어 왕화를 받들겠다 하나, 끝내 보내기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가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낙평왕''비'등이 의논하여 나중에 일어나자고 하니, '세조'가 이네 중지하였다. '문통'은 또한 '련'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현조'가 육궁이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다 하여, '련'에게 칙서를 내려 그 여식을 받치라 하니, '련'이 칙서를 받들어, 말하길 여식은 이미 출가 하여, 구하여 동생의 여식으로 응하니, 조정에서 응하였다. 이에 '안락왕''진과 상서 '이부'를 파견하여, 그 곳에 이르러 비단을 보내었다. 그 좌우에서 말하자, '련'이 미혹되니, 말하길 조정에서 옛날에 '풍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낌새도 없이 나라가 멸망당하였다. '은'나라의 본보기가 멀지 않습니다. 마땅히 방편으로써 사양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를 올려 계집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칭하니, 조정에서 그 교사를 의심하여 또한 가산기상시'정준'을 파견하여 이를 꾸짓고, 만일 여식이 죽었으면, 다시 일가 친척에서 가려뽑아 청해야 한다. 하니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전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마땅히 받들겠다."하였다. 때마침 '현조'가 붕하니, 이내 그치었다.
 
 
 
'고조'때에 이르러 '련'이 2배의 공물을 받쳤다. 그 하사품도 또한 점점 더하였다. 이 때에 '광주'가 바다 가운데에서 '련'이 '소도성'에 파견하는 사자 '여노'등을 궁궐에 보내왔다. '고조'가 조서를 내려 '련'을 책망하여 말하길, " '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왕의 이름을 도둑질해서 '강'의 왼쪽에 있으니, 짐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그 나라를 멸하고, 끊어졌던 대를 '유씨'에게 이어 주려 했는데, 경은 국경을 넘어 외교를 해서 멀리 찬역하는 적들과 통하니 이 어찌 번신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이 한가지 과실로 해서 경의 지난날의 정성을 가려 버리고 싶지 않기로 곧 돌려 보내 주는 것이니, 경은 여기에 감동하여 그 허물을 뉘우치고 다만 조정의 밝은 법에 순종하여 편안히 맡은 바 땅을 다스리고 그 곳의 형편을 알려 주기 바란다] 했다.
 
 
 
'태화'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였다. '고조'가 동쪽 성밖에서 슬피 울고, 알자복사 '이안상'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더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한 '대홍려'를 파견하여 '련'의 손자 '운'에게 '사시절도독 발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통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리고, 의관과 복물, 거기 등의 장식을 하사했다. 또한 조서를 내려 '운'에게 세자를 입조하는데 보내어, 교구의예를 치루라고 하였다. '운'이 상서하여 병을 핑계되고, 그 종숙 '승우'를 사신과 함께하여 보내어, 궁궐에 이르자, 엄하게 이를 꾸짓었다. 스스로 이해부터 늘상 조공을 하였다. '정치'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그 사신 '예실불'을 불로 보았다.[다른 여러본에는 '종'이 '조'로 적혀 있다. 북사에는 '선무'라고 적혀 있으나 '정치'란 호는 '세종'이 지은 것이니 북사는 그 제호를 바꾸어야 한다.] '실불'이 나아가 말하길 " '고려'는 멀리 하늘 끝에 걸리어 있어 해마다 순수한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나는 물건들은 바칠 것이 없아옵고, 다만 황금이 '부여'에서 나고, 옥이 '섭라'에서 나옵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을 섬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니, 나라의 왕이며 신하인 '운'이 끊어진 의를 이를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모두 국경 안으로 옮겼아오니, 두 물건이 왕부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실상 이 두 적들 때문입니다." 했다. '세종'이 말하길, " '고려'는 대대로 상장직을 떠 맡아,바다밖을 제도 하고, 구이를 사로잡고, 실로 이를 정벌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모든 부끄러움을 끼치고 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옛날에 공물을 바치지 않은 허물도 그 책임이 그대들에게 있는 것이니 경은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짐의 생각하는 바의 대략을 알도록 힘써, 무리를 해치는 자들을 잘라 없애고 동쪽 백성들을 편안히 하여 두 고을로 하여금 옛터를 회복하도록 하고 토산물도 빠짐없이 바쳐 오도록 하라] 했다.
 
 
 
'신귀'주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하사하고, 또한 세자 '안'에게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렸다. '정광' 초에 '광주'가 또한 '소연'이 '안'에게 '영동장군의 옷, 관, 검, 패를 하사하는 것을 바다 가운데에서 얻었다. 또한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내었다. '안'이 죽고 아들 '연'이 섰다. '출제' 초에 '연'에게 조서를 내려 더하길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고 의관과 복물과 거기를 하사하였다. '태평'중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서고, '무정'말에 이르기 까지 공물과 사신이 끝이는 해가 없었다.
 
 
 
<남제서>南
 
 
 
高麗國(고려국 :고구려)
 
 
 
'동이'의 '고려국'은 서쪽으로 '위노'와 경계하고 있다. '송'말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 평이주 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태조''건원' 원년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삼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고,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역참을 통하여 항시 통하였다. 역시 '위노'에 사신을 통하니, 강성해져서 제도를 받지 않았다.
 
 
 
'노'에서는 여러나라의 사신을 집에 두었는데, '제'가 첫째이고, '고려'가 다음이었다. '영명'칠년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를 '위노'에 보냈는데, '위노'도 '원회'를 보내와 '고려'와 서로 엇갈렸다. '유명'이 위주객랑 '배숙명'에게 이르기를 나와 다른 사람이 중국의 명을 받들어 경의 나라에 온 것은 적을 막고자 함이니, '위'가 여기에 있음이다. 스스로 나머지 바깥의 이들은 먼지가 일어나듯이 얻을 려고 바라지 않아도 다스리니, 하물며 동이의 소맥이야 신하로 조정에 속하게 되니, 오늘에서야 감히 내가 이른것입니다. 하였다. '사효'가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말하길 나의 성조가 '위'의 사산에게 일찍이 소국처럼 대하지 않음은 경도 역시 알 것이다. 하였다. '사충'이 말하길 실로 그러하다. 다만 주와 부가 임금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그  앉고 일어섬의 차이가 심히 높으니 서로 아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하니 '사효'가 말하길 '이도고'가 옛날 사신이었을 때 의관을 바로하고 갔는데, '위국'에서는 반드시 갓끈을 늘여뜨리니, 어찌 얼굴을 보는데 물리치지 않겠는가? '유명'이 또 '노주'에게 말하길 두나라는 서로 비슷하니 오직 '제'와 '위'와 친하다. 변방의 작은 오랑캐로 감히 이르러 신하로써 따른다. 하였다.
 
 
'고려'는 풍속에 옷은 궁고를 입고, 관은 절풍하나를 쓴는데, 이를 책이라 한다. '오경'을 알고 있다. 사신이 서울에 있어 중서랑 '왕융'이 이를 놀리며 말하길 옷입는데 정성스러움이 없으면, 몸에 재앙이 온다. 머리위에 있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하니 답하여 말하길 이것은 곧 옛부터 내려 오는 고깔이 남은 것입니다. 하였다.
 
 
 
'고련'이 백여세에 죽었다. '융창'원년에 '고려왕 낙랑공 고운'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 이주 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건무' 삼년 (이 밑의 글자는 파본으로 알수 없다.)
 
 
 
<주서>周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시조는 '주몽'이라 한다. '하백'의 여자가 태양의 그림자를 느끼어 그곳에서 아이를 배었다. '주몽'이 자라나 다스림의 재주가 있어, '부여'사람들이 미워하니 이에 쫓겨났다. 땅을 '흘두골성'에 잡고, 스스로 '고구려'라 불렀다. 이에 '고'로 씨를 삼았다. 그 손자 '막래'때에 점점 성하더니, '부여'를 공격하여 이에 신하로 삼았다. '막래'의 후손중에 '련'이 있는데, 처음으로 '후위'에 사신을 보내어 통하였다.
 
 
 
그 땅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이천리이며, 남쪽으로 '백제'에 접하며, 북쪽으로 천여리에 '말갈'과 이웃한다. '평양성'에서 다스린다. 그 성은 동서로 육리이고,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는 오직 창고에 그릇을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도적이 이르르면, 사방에서 들어와 오로지 수비한다. 왕은 그 곁에 집을 나누어 짓는데, 항상 이에 거처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다. 즉 다른 도읍이다. 다시 '요동', '현토'등 수십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고, 이로써 서로 관리한다.
 
 
 
큰 관리로 '대대로'가 있고, 다음으로 '태대형', '대형', '소형', '의사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그리고 '욕살'이 아우르는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삼등급으로 내외사를 나눈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의 법칙으로써 뺏았아 스스로 오르는 것이로 왕이 관리로써 두는 것이 아니다. 그 형법에 모반한자는 먼저 불살라 죽인고, 그 후에 목을 베며. 그 집안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한 자는 십여배로 갑고, 만약 가난하여 준비하지 못하면, 빗을 지개 하여 잘잘못을 살피여 그 아들 딸 모두 노비로 삼아 이에 갚도록 한다.
 
 
 
장부의 옷은 동수삼(소매와 윗도리가 통자)과 대구고(허리품이 넓은 바지)이고, 흰색 가죽으로 허리띠를 메고, 황색 가죽으로 신을 신는다. 그 관은 '골소'라고 하는데, 붉은 비단을 포개어 이를 만들고, 금은으로 이를 꾸민다. 벼슬이 있는 자는 또한 새의 깃털을 위쪽에 두 개를 꽂고, 이에 다름을 표시한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데, 옷고리와 소매에 모두 선을 두른다. 서적으로는 '오경'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다. 병기로는 갑옷, 노, 활, 화살, 창이 있다. 조세는 명주나 화폐 곡식으로 하는데, 그 있는 곳까지 쫓아가 빈부의 차이를 두어 이에 걷는다. 땅은 척박하고, 거처는 검소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거짓이 많고, 말하는 것은 거칠고 더럽다. 친하거나 소원하거나 가리지 않고 한 내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풍속이 음란한 것을 좋아하며 이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 유녀(기생)가 있으며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결혼하는 예는 재물이나 비단이 없고 만일 재물을 얻는자는 노비로 판다고 이르로, 풍속에서 매우 부끄러워 한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그 옷은 중국과 한가지 이다. 형제일때는 삼개월을 한계로 한다. 불법을 공경하고 믿으며, 더욱이 음사를 좋아한다. 또한 신을 모시는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으로 나무를 깍아 여인네의 모양이고, 하나는 '등고신'으로 말하길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관사에 함께 두고, 사람을 보내어 지키고 간수한다. 대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 말한다.
 
 
 
'련'의 오세손은 '성'이다. '대통' 십이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성'이 죽자 아들 '탕'이 섰다. '건덕' 육년 '탕'이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조'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 개국공 요동왕으로 삼았다.
 
 
 
<남사>南史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어, 그들이 나온 것은 '북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땅은 가히 이천리이고 가운데에 '요산'이 있고, '요수'가 나온다. '한'과 '위'때에 남으로는 '조선', '예맥' 동으로는 '옥저'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그 왕의 도읍은 '환도산'아래에 있는데, 땅은 큰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깊은 연못은 없으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사는데, 계곡물을 먹는다. 비록 토착하여 살지만 좋은 밭이 없어서 풍속에 식량을 절약하며, 궁실을 짓기를 좋아한다. 거하는 곳의 좌우측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 제사를 지내며, 또한 별과, 땅의 신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은 흉폭하고, 급하며, 노략질 하길 좋아한다. 관식은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높고 낮음에 각각 등급이 있다. 언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두 '부여'와 같은 것은 것으로 성질과 기후 의복등은 다름이 있다. 본래 다섯부족으로 '소노부'·'절노부'·'신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관직을 두는데 있어,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풍속에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 남녀가 매양 밤에 무리를 이루어 노래하며 즐긴다. 사람들은 깨끗함을 좋아하고, 몰래 술을 담구어 먹으며, 다리를 뻗어 절을 하며, 걸을때는 달음질을 한다. 시월에는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스스로 꾸미는데, 대가와 주부의 머리에는 건과 같은 것을 머리에 쓰는데, 뒤가 없다. 소가들은 절풍을 쓰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는데, 죄를 지은자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중죄인은 죽이고, 그 처자도 죽인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꼬시어 예를 갖추지 않고, 결혼함이 많다. 이미 결혼하면, 나중에 잘살게 되면 결국에는 옷을 보내온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데 있어서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후이 장사지냄을 좋아하여 금은과 재물과 비단을 모두 죽은자를 위해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위에 심어 놓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고 말은 모두 작은데 산을 오르기에는 편하다. 나라사람들은 기력을 숭상하여, 활과 화설 칼과 창을 잘 다루고, 갑옷이 있으며, 전쟁을 익힌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속해 있다.
 
 
 
'진' '안제''의희' 구년 '고려왕 고련'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를 받치며, 붉은빛나는 백마를 받치자, '진'이 '련'을 사지절 도독 영주 제국사 정동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송''무제'가 보위에 오르자, '정동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이 하였다. 삼년 '련'에게 산기상시를 더하고, 독평주제군사를 보태었다. '소제''경평'이년 '련'이 장사 '마루'등을 보내어 방물을 받치자 '주소백'과 '왕소자'를 보내어 이에 위로하였다.
 
 
 
'원가' 십오년 '풍홍'이 '위'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고려''북풍성'으로 도망하였는데, 표를 올려  맞이하여 접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왕백구'와 '조차흥'을 보내어 맞도록 하고, 아울러 '고려'에 재물을 보내었다. '련'이 '홍'을 남쪽에 두고자 하지 않아, 이에 장수 '손수'와 '고구'를 보내어 엄습하여 이를 죽였다. '백구'등이 칠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수'를 사로잡고, '구'등 두사람을 죽였다. 이에 '련'이 '백구'등이 마음데로 죽였다고, 사신을 보내어 잡아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먼나라의 뜻을 어기고자 하지 않아, '백구'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 주었다.
 
 
'련'이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다. 육십년 '문제'가 '위'를 침략하고 하여 '련'에게 말을 보내 달라고 하니, 팔백필을 받쳤다.
 
 
 
'효무' '건녕' 이년 '련'이 장사 '동승'을 보내어 표를 받들며, 나라의 슬픈 일을 두루 위로하며 함께 방물을 받쳤다. '대명'이년 또 '숙신씨'가 고시와 돌화살촉을 받쳤다. 칠년 '련'을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로 삼고 나머지 관직은 옛날과 같이 하였다. '명제''태시' '후발제''원미'중에 공물을 받치기를 끊이질 않았다. '제'에서도 작위를 내렸는데 백여세에 죽었다. 아들 '운'이 섰다. '제''융창' 중에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이주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을 삼았다.
 
 
 
'양''무제'즉위년에 '운'에게 차기대장군을 더하였다. '천감'칠년 무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삼고 지절 상시 도독 왕은 전과 같았다. 십일년 십오년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다. 십칠년 '운'이 죽고 아들 '안'이 섰다. '보통' 원년 '안'에게 봉작을 내리고, 지절 독 영평이주제군사 영동장군으로 삼았다. 칠년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서고,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받쳤다. '연'에게 작위를 내렸다. '중대통' 사년 육년 '대동'원년 칠년 더불어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쳤다. '태청' 이년 '연'이 죽자 그 아들 '성'에게 '연'을 잇는 작위를 내렸다.
 
 
 
<북사>北史
 
 
 
高句麗 (고구려) -이하 고려란 고구려를 가르킨다-
 
 
 
'고구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왕이 일찍이 '하백'의 여자를 얻어, 인하여 집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태양이 비추자, 몸을 피하였으나, 태양이 또 몸은 따라다녔다. 이미 아이를 베고 있었는데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리자 소나 말이 이를 피하고,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무리지어 털로써 보호하였다. 왕이 이를 쪼갤려고 하였으나 능히 깨뜨릴 수 없어, 다시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가 깨뜨리고 나왔다. 장성하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 라는 것이다. '부여'사람들이 '주몽'이 사람이 태어난 것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기지에 명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좋은 말은 밥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말을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밭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를 주었다. '주몽'이 화살 하나로 짐승을 많이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그 어미가 '주몽'에게 고하자, '주몽'이 이에 '언' '위'등 두명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길을 다는 중에 우연히 큰 물을 만나, 건너고자 하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급히 뒤쫓아 오는데,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병사들이 쫓아 오니 어찌하면 건널수 있겠는가? 이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여기에 거하였다. '고구려'라 부르는 것이다. 인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부여'에 남아있던 처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을 낳으니 '시여해'라 하여, 장성하여 '주몽'을 알자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미 어미는 돌가가신 뒤였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니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
 
 
 
한 무제 원봉 사년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두었다.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이를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때에 옷과 두건 조복과 북과 피리를 하사하니, 항상 '현토군'에 나와 이를 받았다. 후에 점점 교만해 지더니 군에 나와 복속하지 않고, 다만 동쪽경계에 작을 성을 쌓고, 이를 받았다. 그 성을 '책구루'라 부렀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 이름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의 병사를 일으켜 호를 쳤는데, 가고자 하지 않아, '망'이 강제로 다그치어 이를 보냈는데, 모두, 요새에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에서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암우'가 꾀어 이를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이름을 '고구려', '고구려후'라 하였다. '광무' '건원' 팔년 '고구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상'과 '안' 사이에 이르러, '막래'의 후손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적질 하였다. '현토' 태수 '제풍'이 이를 벌하였는데, 능히 금할 수 없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섰다. '순'과 '화' 사이에 다시 여러번 '요동'을 범하여, 노략질 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이를 벌하고, 포로 수백을 베었다.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일어나자 '백고'가 통하여 좋아하였다.
 
 
 
'백고'가 죽자 아들 '이이모'가 섰다. '이이모'는 스스로 '백고'때에 이미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한 망한 호인 오백호를 얻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군사로 공격하여 그 나라를 깨뜨리고, 수도를 불사르자, 항복한 호가 역시 모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토'를 공격하였는데,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이이모'가 죽자 아들 '위궁'이 섰다. '위궁'은 증조부 '궁'에서 시작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폭해지고 사나워져, 나라를 해치고, 깨어졌다. '위궁' 역시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보아 '고려'에서 서로 비슷하다를 '위'라 하는데, 증조부 '궁'과 비슷하니 고로 이름이 '위궁'이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사냥에 능하였다. '위나라' '경초' 이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쳤는데, '위궁'이 주부, 대가의 장수 수천을 보내어 군사를 도왔다. '정시' 삼년 '위궁'이 '요'의 '서안평'을 도적질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여명으로 '현토'에서 나와 '위궁'을 쳤다.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하여 달아나니 '검'이  ??고개에 이르기까지 쫓아가서 '환도선'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위궁'이 단지 아내와 멀리 숨었다. 육년 '검'이 다시 이를 쳤는데, '위궁'이 재빨리 여러 가들과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어 쫓았지만, '옥저' 천여리에서 그만 두었다.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기었다. 또한 '환도산'을 깍아 '불함성'이라 새기고 돌아 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진나라' '영가'의 난리때 '선비'의 '모용귀'가  '창려' '대극성'에서 일어났는데, '원제'가 '평주 자사'를 내렸다. '위궁'의 손자 '을불리'가 빈번히 '요동'을 노략질 하니 '귀'가 능히 제도하지 못하였다.
 
 
 
'불리'가 죽자 아들 '쇠'가 섰다. '위 건국' 사년에 '모용귀'가 아들 '황'으로 이를 치니, 스스로 '남합'에 들어와 '목저'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쇠'의 군사를 크게 깨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숨으니, '황'이 '쇠'의 아비의 묘를 파해치고, 그 어미와 처 보물과 남녀 오만여명을 노략질 하고 그 궁궐을 불살르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 왔다. '쇠'는 후에 '백제'에 의해 살해 당했다.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쳤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태무'때에 '쇠'의 증손 '련'이 처음 사자를 보내어 '안동'에 이르러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치며, 나라의 휘를 함께 하길 청하였다. 사신 원외산기시랑 '이오'가 '련'에게 절하며 연을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오'가 그 처소에 이르렀는데, '평양성'에 거하고 있었다. 찾아가 여러 가지일을 물었는데, 말하길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를 가면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작은 바다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옛날 '부여'이고 호수는 '전위'때의 세배이다. 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는데 해마다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쳤다. 이때 '풍홍'이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어 '련'에게 고하기를 '홍'을 보내달라 하였다. '련'이 상서하여 '홍'이 왕화됨을 받들었다고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태무'가 노하여 장군을 보내어 이를 쳤다. '낙평왕 비'등이 의논하여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라고 하니 '태무'가 이에 그치었다. '홍'은 역시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헌문'이 육궁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련'이 여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말하길, 여자가 없어, 아우의 여자를 구하여 응합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허락하니 '안락왕 진'을 보내었다. 상서에는 '이오'등이 그 곳에 비단을 보냈다 하였다. '련'이 그 좌우의 말에 의심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옛날 '풍씨'와 혼인하였는데 얼마있지 않아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은'의 때가 멀지 안음을 생각하십시오. 마땅히 방편을 말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하여 거짓으로 여자가 죽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거짓이라 의심하고, 또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어 끊고 이를 책하여, 만약 여자가 죽었으면 다시 여자를 가려 뽑아 청하라. 하였다.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앞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헌문'이 죽자 이내 그치었다. '효문'때에 이르러 '련'이 앞서의 두배의 공물을 받치니 그 하사품 역시 점점 더하였다. 이때 '광주'의 바다에서 '련'이 '제에 보내는 사신 '여노'등을 얻어 대궐에 보내었다. '효문'이 책하여 고하길, '도성'이 그 임금을 죽이고 '강'의 왼쪽에서 몰래 일어나, 짐이 그 나라를 없애고 옛나라를 세워 '유씨'의 대를 끊고자 한다. 이에 경이 바깥으로 그 경계를 넘어 적들과 통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로써 지켜야할 의라 할 것인가? 이제 하나의 잘못으로 옛날의 정성을 가리지 말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허물을 생각하여 용서함을 감사히 여기고 밝은 법을 받들어 공경하여 거느리는 바를 화목하고 편하게 하니 동정으로 삼가 받들라. 하였다.
 
 
 
'태화' 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 였다. '효문'이 동쪽 성밖에서 슬퍼하고, 아뢰는 자로 복사 '이안상'을 보내어, 책을 '거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여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어 '련'의 손자 '운'에게 절하며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옷과 관 복과 물건 수례와 기를 꾸미는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운'에게 고하길 세자를 입조하라 하여 성밖에서 예를 차리는 것을 명하였다. '운'이 상서에 병을 핑계삼아 숙부 '승우'를 보내고 사신으로 대궐까지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엄히 책하니 스스로 이에 세마다 항시 공물을 받쳤다. '정시'중에 '선무'가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 보니, 나아가 말하길, '고려'는 정성으로 하늘을 잇어 그 정성이 쌓여 땅에는 토모가 산출되어 왕의 공물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옥이 '섭라'에서 나와, 이제 '부여'가 '물길'을 내 쫓고, '섭라'가 백제와 어울립니다. 나라의 왕인 신하 '운'이 의의 계통을 이어 모두다 경내에 옮기었습니다. 두 물건을 왕의 곳간에 채우지 않고, 양적의 제물을 베풉니다. '선무'가 말하길 '고려'를 어찌 천자를 책망하는가? 오로지 해외를 제도하고 영리한 오랑캐를 벌하여 재물을 얻었다. 지난달 방물을 받친 허물은 꾸짓어서 복종하게 되니, 마땅히 짐이 경에게 말하길, 힘써 위엄으로 다스리고, 두 읍은 옛날로 돌려 보내라. 토모가 잘못된 공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신귀'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령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였다. 또 절하여 그 세자 '안'에게 '진동장군 령오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에 또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양나라'가 '안'에게 내리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검 노리게를 얻었다. 이에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냈다.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섰다. '효무제' 초에 고하길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였다. '천평' 중에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섰다. '무정'에 이르러 왔었는데, 해마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대통' 십이년 사신이 '서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를 합병한 해에 사신을 '제'에 보냈다. '제'의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옛날과 같다. '천보' 삼년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사신'박릉'과 '최유'를 '고려'에 보내어 '위'의 유민을 구하라 하니. 조서에서 '유'가 말하길 만일 좇지 안는다면, 의당 일을 좇아야 한다 하였다.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유'가 눈을 크게 뜨고 꾸짓고, 주먹질을 하자, '성'이 마루아래로 떨어졌다. '성'이 숨을 몰아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사죄를 하자 '유'가 오천여호를 되돌렸다.
 
 
 
'성'이 죽고 아들 '탕'이 섰다. '건명' 원년에 '제'의 '폐제'가 탕을 '사지절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 건덕' 육년 '탕이 사신을 보내어 '주'에 이르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 받자 '탕'이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나아가 대장군을 받고 고쳐 '고려왕'을 봉함 받고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나라는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은 '요'를 넘어 이천리이다. 남쪽은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일천여리이다. 사람들은 토착하고,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쳐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땅이 척박하여 양잠하고 농사지어도 족하지 않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좋은 궁실을 닦아 도읍을 '평양성'이라 하고 또 말하길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의 굴곡에 있어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 오직 창고에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적이 이르르면 들어와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집을 짓는데 항상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다른 도읍지이다. 그 나라에서 삼경이라 부른다. 다시 '요동' '현토'등 십여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신라'가 매양 침범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경후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이등급이 있다. 나누어 내외의 일을 맡는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에 따라 빼앗아 스스로 오르는데, 왕이 두는 것이 아닌다. 다시 내평과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절풍건을 머리에 쓰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고, 선비는새의 깃털을 양쪽에 꽂는다. 귀한 자는 관을 소골이라고 하는데, 자줏빛비단을 사용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넓고, 큰 바지에 가죽혁대 황색 가죽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책은 '오경'과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고, 병기는 중국과 같다. 봄 가을로는 사냥을 하는데 왕이 친히 이를 주제하고, 세는 포 오필과 곡 오석이고 유랑인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고, 열명이 세포일필을 낸다. 조는 호당 일석, 다음은 칠두, 아래는 오두,이다. 형법에 배반하거나 모반하는 자는 기둥에 묶어 불사른 후에 베고, 집안도 몰살한다. 도적은 열배로 갚고, 만일 가난해서 갚지 못하면 빚을 지는데, 모두 청해 듣고 자녀를 노비로 삼아 갚는다.
 
 
 
형벌은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는 오현, 금, 쟁, 필률, 횡취, 소, 고지속이 있고, 피리는 굽어 있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서 모여 즐기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이를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 두 개로 나누어 돌로싸 던진다. 떠들며 달리고 쫓기를 다시 세 번한 후 그친다. 풍속에 깨끗함을 좋아하고, 절제함을 숭상하고, 달리는 것을 공경한다. 절은 한쪽 다리를 끌고,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맞 잡고 있고, 걸을때는 반드는 손을 낀다. 성격은 속임이 많고, 언사는 더럽고 추악하며,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공실에서 같이 잠을 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항시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공적인 모임으로 의복을 입고,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한다. 걸터 않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을 할 때 도마를 쓰고, 삼척마가 나온다. 이르기를 본래 '주몽'이 타던 말의 종류라 하는데, 즉 과하라 한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풍속으로 유녀가 많아, 지아비로 아무나 삼는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있지 않았다. 결혼을 할 때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남자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어 마친다. 재물이 없이 가는 것이 예로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러이 여기어, 여자종으로 파는 것으로 여기었다.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만에 길일을 탹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자가 태어났을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자들이 다투어 취한후 가지고 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신묘는 두곳이 있는데, 하나를 '부여신'이라 부르고 나무를 부인모양으로 깍은 사람의 형상이다. 나머지 하나는 '高登神'으로 이르기를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함께 관사에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보호하니, 대개 '하백녀'와 '주몽'을 일컷는 것이다.
 
 
 
'수'가 '진'을 평정한 후에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진치고, 곡식을 쌓아 수비의 책을 만들었다. '개황' 십칠년 임금이 새서를 보내어 책하기를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더니 비록 변방에 붙어 산다고 하더라도 정성이 부족하다. '말갈'은 핍박해 오고, '거란'은 굳게 방비한다. 지난해 재화를 가지고 가는데, 작은 무리들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서, 귀국으로 숨었다. 어찌 거두지 않고자 함이 아니면 고로 도둑이 아닌가? 객사에만 앉아 있지 말고, 더욱 수비를 증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인을 죽이고, 항상 의심이 있어 숨을 죽이고 있다. 점차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하더니 표를 올려 사죄하였다. 병으로 죽으니,
 
 
 
아들 '원'이 이었다.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공'의 작위를 이으니,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감사하고, 상서에 하례하며 '왕'을 봉하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칙서를 내려 왕으로 삼았다. 다음해, '말갈'을 거느리고 만여기병으로 '요서'를 도둑질 하자 '영주' 총관 '위세충'이 공격하자 달아났다. 제가 크게 노하여, 명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아, 수륙양군으로 이에 토벌하고, 그 작위를 물렸다. 때를 맞추어 운송하는 길이 이어지지 않자 여섯 군대가 굶주리고, '임유관'까지 갔다 질병을 만나 돌아오니, 왕사가 구할수 없었다. 다음으로 '요수'에 미치어,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표를 올리며 칭하기를 '요동의 하찮은 신하 원'이라 운운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물리고, 처음과 같이 하였다. '원' 역시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서니 천하의 전성기이다.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궐에 와서 공물을 받쳤는데, 이때 '원'을 입조하라 불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오랑캐의 예의로 대궐에 무례하였다.(?) '대업' 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를 타고 '요수'를 건너 '요동'의 땅에 멈추어 영을 세웠다. 길을 나누어 나아가 각각 그 성의 아래에 당도 하였다. '고려'는 나아가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여기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공격하라 명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리니, '고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며 얻어야 하고, 병사들이 들어가 불을 놓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도적들이 문득 항복하려는 말을 하고, 교지를 받들고자 하나 감히 나아가질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아가 아뢰고 이를 보고하자, 적이 또 갖추오 방비 하고 다시 나와 방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음을 세 번을 하였는데, 제가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로말이암아 식량이 다 되고, 병사들이 지치자, 보급도 잇지 못하니 여러 군사들이 많이 패하여, 반이 되었다. 이 행함에 오직 '요수'의 서쪽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통정진'으로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칙서를 여러 군사들에 내려 따르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우어 성을 공격하는데, 적의 기세가 그 날로 사그라졌다. '양현감'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곧 그날로 여섯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망하여 '고려'에 들어갔는데,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정예군으로 뒤쫓으니 많은 군사가 패하였다. 십년 다시 천하의 병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고 일어났는데 그 있는곳이 험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다.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역시 약해져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보내며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자, '회원진'에서 항복을 받고, 이어 사로 잡힌 병사들을 돌려 받았다. 도성에 도착하자 '고려'가 시신을 보내어 친히 사당에 고하자 이를 사로잡았다. 이에 '원'을 입조하라 하였으나, '원'이 오지 않았다. 제가 다시 후에 일어나길 꾀하였으나, 천하가 어지러워 다시 가질 못하였다.
 
 
 
<수서>隋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일찍이 '하백'의 딸을 얻어 실내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이 따라와 이를 비추니, 감화되어 아이를 배었다.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이를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장성하여 사냥을 따라 갔는데, 많은 짐승을 잡았다. 또 죽이고자 청하니 그 어미가 '주몽'에게 알리어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으로 달아났다. 한 큰 물을 만나 깊어 가히 건널수가 없었다. '주몽'이 말하길 나는 하백의 외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이제 어려움이 있어 병사들이 장차 이르려고 하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포개어 다리를 만드니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기병이 가까이 왔으나 건널 수가 없어 돌아갔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고구려'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대를 잇고, 그 손자 '막래'에 이르러 병사를 일으켜 '부여'를 아울렀다. 그 후손 '위궁'대에 이르러 '위''정시'중에 '서안평'을 침략하니, '관구검'이 이를 깨뜨렸다. '위궁'의 현손(손자의 손자)의 아들은 '소열제'인데 '모용씨'에게 깨졌다. '환도'에 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크게 노략질 한 후에 돌아 갔다. '소열제'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증손 '련'은 '후위'에 사신을 보내었다. '련'의 육세손 '탕'은 '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무제'가 '탕'에게 상개부 요동군공 요동왕을 내렸다. '고조'가 즉위하자 '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러 대장군을 수여 받고 '고려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해마다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 나라의 동서는 이천리이고 남북은 천여리 이며, 도읍은 '평양성'으로 또한 '장안성'이라 부른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을 따라 굽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접한다.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이 두 도읍은 번화한 곳으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신라'와 매양 서로 침략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태대형, 대형, 소형, 대로, 의후사, 오절,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등 십이등급이다. 다시 내평, 외평,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관을 쓰고, 벼슬아치들은 새 깃털을 꽂는다. 귀한자는 관을 자줏빛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큰 윗도리에 구멍이 큰 바지를 입고, 흰색으로 허리띠를 매고, 황색 가죽으로 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병기는 중국과 같으며 매양 봄 가을로 사냥을 가르치는데, 왕이 친히 이를 내려 본다. 인세로는 베 오필, 곡물 오석이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는데, 열사람이 모아서 세포 한필이다. 조세는 호당 일석이고 다음은 칠두, 다음은 오두이다. 반역한 자는 기둥에 묶어서 불살은 후에 목을 베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하면, 열배로 갚고, 형벌이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에는 오현·금·쟁·필률·횡취·소·고가 있고 노를 불어서 화답한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 모여서 왕이 수레위에서  대열을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로 두부로 나누어, 물에서 돌을 던지면서  떠들썩하게 고함치며 쫓고 쫓기기를 세 번한 후에 그친다. 풍속에 걸터 앉는 것을 좋아하고 깨끗함을 즐기며, 달음질 치는 것을 공격하며, 다리하나를 뻗어 절을 하고, 서있을 때는 두팔을 깍지끼고, 움질일때는 반드시 팔을 흔든다. 성품에 거짓으로 복속함이 많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부인은 음란하여 풍속에 노는 여자들이 많다. 결혼은 남녀가 서로 좋아해야 하고 그런후에야 결혼을 한다.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내고, 재물없이 찾아가는 것이 예이다. 혹 재물을 받는 자는 사람들이 함께 이를 부끄러워 한다.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삼년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사를 지내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자가 살아있을때의 옷이나 수레 말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후에 간다.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개황'초에 빈번히 사신이 입조하였다. '진'의 평정이후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와 곡식을 준비하여 수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십칠년 임금이 '탕'에서 서를 내려 말하길
 
 
 
짐은 천명을 받들어 기르기를 좋아하고 선비를 이끌었다. 왕을 바다 한쪽에 위임하니 베풀어 조정에 화되어 천지의 도를 쫓는 마음을 얻고자 한다. 왕은 매양 사신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니 비록 변방이라 칭한다 하더라도 정성에는 다함이 없다. 왕은 이미 남의 신하로, 모름지기 짐의 덕과 한가지로 하여, 이에 '말갈'을 내몰고, '거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여러 변방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의 신하가 되는데, 선한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분히 여기니 어찌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은가? 태부의 공인이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은 반드시 아뢰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비밀히 재화를 가지고, 소인이 이를 따라 움직여 사사로이 활쏘는 자가 하국으로 숨게 하니 어찌 병기를 고치어 올바르지 못한 뜻을 품고 밖의 소문을 두려워하니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사자에게 명을 내리어, 왕과 신하를 위무하고, 본래 사람의 뜻을 묻고자 하고, 정치와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공허한 객사에 앉아 엄히 방비하고, 눈과 귀를 막고, 영원히 듣고, 보려 하지 않으니, 가히 악함이 있어 사람들이 아는 것을 막고, 관리를 제도함을 막아 살피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또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을 약탈하고, 모략을 꾀하고 간사한 말을 퍼트리며, 마음이 온당치 못하다.
 
 
 
짐은 모든 생명에 적자처럼 대하고, 왕에게 땅과 집을 주고, 관직과 작위를 주어 깊은 은혜로 윤택하게 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분명하게 들어났다. 왕은 오로지 믿음을 품지 못하여 항상 시샘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몰래 보내어 관찰하니, 순수한 신하의 뜻이 이와 같은 것인가? 이는 대개 짐의 가르침이 밝지 않아 왕이 죄를 어긴 것이니 한번 용서를 한다. 금일 이후로는 반드시 개혁하여 번신의 절도를 지키고, 조정의 법을 받들며, 스스로 신하가 되어 다른 나라를 거스리지 말면 곧 오래도록 부귀를 누릴 것이니 실로 짐의 마음이니라. 다른 나라들은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널리 하늘아래에 있는 짐의 신하이니, 이제 만약 왕이 물리친다면, 가히 버려 둘수가 없어 끝내는 다시 관속을 뽑아 이들을 편안히 위무해야 한다. 왕이 맘을 씻고 바꾸어 법에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아니 어찌 좋은 선비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옛 제왕들이 법을 일으킬 때 어짐과 믿음을 먼저 하고 선함에는 받드시 상을 주고 악함에는 필히 벌을 주니 사해의 안쪽이 짐의 뜻을 듣고자 한다. 만약 왕이 죄가 없는데도 짐이 홀연 병사를 낸다면 나머지 번국들이 짐을 어찌 여기겠는가? 왕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의심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옛날에 "진숙보"란 자가 대를 이어 "강음"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죽이니 놀라 움직이니 내가 경계하자 내 변방을 노략질 하였다. 짐이 앞서 경계하고 뒤에서 위로하니 십년에 이르러 저들이 "장강"의 바깥임을 믿고 무리들을 모아 교만해져 미쳐 날뛰어 짐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장수들에게 명하여 저들을 베니 가고 오는데 달이 차지 않았고 병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도둑들이 번갈아 달아나고 하루 아침에 깨끗이 쓸어 멀고 가까운곳을 베어 편안히 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제 왕이 한함을 탄식하고 홀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들으니 내쫓고 올려 서는 것은 관리가 맡아 할 일이다. 왕을 죄 준대도 "진"처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왕을 상 준대도 "진"처럼 두지는 못할 일이다. 그런데 화를 즐겨하고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왕이 일컷길 "요수"의 넓음이 "장강"만 한가? "고려" 사람의 많고 적음이 "진국"만 한가? 짐이 만일 백성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왕의 전날 잘못만 책한다면 한 장군에 명하면 될 것인데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이렇듯 은근하게 타일러서 왕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왕은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했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 하여,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병이 들어 죽었다. 아들 "원"이 이어 섰다. "고조"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 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군공을 봉하고,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은혜에 감사하고, 이 일을 치하하고, 아울러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고조"가 이에 "원'을 왕으로 봉하였다.
 
 
 
다음해 "원'이 "말갈" 만여기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하자, "영주"총관 "위충"이 맞서니 도망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사로 명하여 수군과 육군으로 정벌하고 그 작위를 취소하였다. 이때에 흉년이 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여 여섯군이 밥을 굶고, "임해관"에 이르렀을 때 질병이 돌아 왕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 "요수"에 이르자,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며, 표를 보내기를 "요동"의 똥같은 신 "원"이라 말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그치고, 처음과 같이 하니, "원"이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즉위하자 천하의 전성기다. "고창왕",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대궐에 이르러 공물을 받쳤다. 이에 "원"도 입조하라 하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대궐의 예를 어기었다. "대업"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에 올라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서 길을 나누어 나아가자 각각 병사들이 그 성아래에 모였다. "고려"도 병사를 이끌고 방어 하였는데, 전쟁에 불리하자,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에 공격하길 명하고, 장수들에게 말하길 "고려"가 만약 항복하려고 하면, 곧 어루만져 병사를 이끌고 얻으려 하지 말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적은 거짓 항복을 청하고, 장수들은 표를 받들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아뢰었다. 이 보고가 이르르자. 적은 다시 준비하여 수비하였다. 이와 같음을 여러번 했으나, 제가 깨닫지 못하였다. 식량이 다되고, 병사들이 쇠하여 지고, 보급이 이어지지 못하며, 군사들이 많이 손상되어, 반밖에 안 남았다. 이렇게 하여 요수의 서쪽인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 "통영진"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군사들에게 명하니 마땅히 따랗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기세가 사그라진 듯 했다. "양현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이르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그날 여섯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모든 군대로 뒤 쫓으니, 제의 군대가 많이 패하였다. 십년 또 병사를 일으켰으나 도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흩어지고 길이 끊어져 군사들을 많이 잃어 버렸다. "요수"에 이르렀는데 "고려" 또한 곤궁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죄인 "곡사정"을 보내면서 죄를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여, "회원진"에서 그 항복을 받았다. 인하여 포로를 돌려 보내었다. 서울에 이르러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고하니 이에 잡아두어 머물게 하고, "원"을 입조하라 불렀지만, "원"은 끝내 가지 않았다. 제께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엄히 다시 일어날 것을 꾀하자 천하에 큰 난이 일어가 다시 가지 못하였다.
 
 
 
<구당서>唐書
 
 
 
고려(高麗)
 
고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나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가 3천 1백 리요 남북이 2천 리이다.
 
그 관직에는 큰 것을 대대로1)(大對盧)라 부르니 1품에 비견되며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는데 3년에 한 차례씩 교체함에 만약 그 직위에 적합한 자면 햇수의 제한에 거리끼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는 혹은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를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된다. 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호위할 뿐 제어하지 못한다.
 
다음을 태대형(太大兄)이라고 하는데 정 2품에 비견된다. 대로(對盧) 이하의 관직은 모두 12등급이다. 지방에는 주(州)와 현(縣)에 60남짓의 성을 둔다. 큰 성에는 녹살( 薩) 한 명을 두니 도독(都督)에 비견된다. 모든 성에는 도사(道使)를 두니 자사(刺史)에 비견된다. 그 아래에는 각기 요좌(僚佐)가 있어서 관청의 일을 나누어 관장한다.
의상과 복식은 단지 왕만이 다섯 가지의 채색을 사용하며 흰 비단으로 머리관을 만들고 흰 가죽으로 작은 허리띠를 두르는데 그 관과 띠에는 모두 금으로 장식을 한다. 관직의 지위가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그에 버금가는 자는 붉은 비단으로 하고는 새의 깃털 두 개를 꽂고 더불어 금, 은으로 장식을 하며, 적삼에 대통소매를 하고 바지는 입구가 크며, 무두질한 흰 가죽으로 띠를 하고 무두질한 누런 가죽으로 신발 만든다. 나라 사람들은 거친 털옷을 입고 고깔(弁)을 쓰며 부인들은 머리에 머릿수건(巾 )을 쓴다.
 
바둑과 투호의 놀이를 좋아하며 발로 공을 차는 유희에 능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와 보궤(  ) 및 준조( 俎)와 뇌세( 洗) 등을 사용하니 자못 기자(箕子)가 후세에 남겨준 풍습이 남아 있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두 띠 풀로 집의 지붕을 이는데 단지 절과 신의 사당 및 왕궁과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한다. 민간에는 빈곤하여 초췌한 자가 많으며 겨울이면 모두 긴 아궁이를 만들고 아래로 숯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한다. 밭에 식물을 심고 누에를 치는 것 등은 대략 중국과 같다.
그들의 법에는 모반이나 반역을 한 자가 있으면 곧 군중을 모아 횃불을 가지고 다투어 불사른 뒤 온몸이 모두 불에 데어 살이 문드러진 연후에 머리를 베고 집안은 모두 관가에서 몰수하면 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을 하거나 싸움에 임해서 패하여 달아나거나 또는 살인이나 강도를 한 자는 참수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갚게 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그를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엄격하게 하기에 범하는 자가 적으며 또한 길에는 떨어져 있는 물건도 줍지 않는다.
 
그 풍속에 함부로 지은 사당이 많으니 영성(靈星)의 신과 해의 신 그리고 가한신(可汗神)과 기자신(箕子神) 등을 섬긴다. 도읍 동쪽에 신수(神隧)라 이름하는 큰 동굴이 있는데 10월이면 언제나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다. 습속에 서적을 좋아하는데 누추한 문에 땔나무를 해서 사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큰 거리에 커다란 집을 짓고 이를 일컬어 경당( 堂)이라 하여 자제들이 혼인하기 전에 밤낮으로 여기에서 글을 읽고 활을 익히게 한다. 서책으로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손성(孫盛)의 진춘추(晉春秋)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등이 있으며 또한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것을 매우 좋아하여 중히 여긴다.
 
 
 
그들의 왕 고건무(高建武)는 바로 앞선 왕 고원(高元)의 배다른 아우이다.
무덕(武德618-626) 2년에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였다.
4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가 수(隋) 말기에 사졸들이 그 땅에 많이 묻힌 것을 생각하여 5년에 고건무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은 보배로운 명을 삼가 받들어 임금으로 온 세상에 임하였으니 천지인(天地人)의 신령에게 공경으로 따르며 만국을 평안히 할 것이오. 하늘 아래로 두루 사랑을 고르게 하여 어루만져 기르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는 모두 잘 다르셔져 편안한 것이요. 왕은 이미 요수(遼水)의 왼편을 도맡아 다스리고 대대로 번복의 땅에 거처하며 정삭(正朔)을 사모하여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좇아왔소. 그런 까닭에 사자를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펼치니 짐이 매우 기쁘구료. 바야흐로 이제 천하가 편안히 화락하고 온 세상이 잘 다르셔 지니 패옥과 비단이 한껏 왕래를 하고 도로는 막히는 곳이 없소. 이제 한창 화목함을 펼쳐 초빙의 호의를 영원히 도탑게 하고 각자의 강역을 보존하니 어찌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겠소? 단지 수나라 말년에 군사가 이어지고 환난이 얽어졌으니 전투로 공방을 치르던 곳에는 각자 자신의 백성들을 잃게 되었었소 마침내 골육들이 어그러져 멀어지고 가족들이 나뉘어 갈라지니 해가 많이 지났다지만 홀아비와 홀어미들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소. 이제 두 나라가 평화롭게 왕래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고려인 등은 이미 영을 내려 찾아 모아 놓았기에 얼마지 않아 곧 보낼 것이니, 그곳에 있는 이 나라의 사람들은 왕이 놓아 돌려보내 줌으로써 어루만져 기르는 방안을 힘써 다해 인의로써 용서해 주는 도리를 함께 널리 펴야 할 것이오]
하였다. 그리하여 고건무는 중화 사람들을 모두 수색하여 모으고 예의로 인도하여 보내니 속속 이르는
 
자가 1만의 숫자가 되므로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7년에 전 형부상서 심숙안(沈淑安)을 파견하여 가서 고건무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천존상(天尊像)과 도사(道士)를 데리고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하여 노자(老子)를 강의하니 그 왕 및 도인과 속인 등 보고 듣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명분과 실리 사이의 이치는 모름지기 서로 적합해야 한다. 고려가 수나라에 신하라 칭하였지만 끝내는 양제에게 저항하였는데 이 또한 어찌 신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짐이 만물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교만하거나 귀하게 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에 자리하며 힘써 베풂으로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짐의 이 마음을 서술하도록 하라]
하니 시중 배구(裴矩)와 중서시랑 온언박(溫彦博)이 이르기를
[요동의 땅은 주(周)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나라였으며 한나라 때는 현도군(玄 郡)일 뿐입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전에는 피봉된 강역(彊域) 안쪽으로 가까이 있었으니 신하라고 칭하지 않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중국이 이적(夷狄)에 대해서는 마치 늘어선 별들에 대한 태양과도 같으니 존귀함을 낮추실 이유가 없으며, 머리를 숙이는 것은 번신의 강역과 같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고조가 이에 그만 두었다.
9년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건무를 송사하여 이르기를 길을 폐쇄하여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서로 더불어 틈이 있으면 누차 서로를 침략하였다. 조서를 내려 원외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가 가서 그들을 화해시켰다. 건무가 표를 올리고 사죄하며 신라와 더불어 사신을 마주하고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정관(貞觀677-649) 2년에 돌궐의 힐리가한( 利可汗)을 격파하니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하례하였으며 아울러 피봉받은 강역의 지도를 올렸다.
5년에 조서를 내려 광주도독부사마 장손사(長孫師)를 파견하여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해골을 거두어 매장하고 고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건무는 그 나라가 정벌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의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니 1천여 리가 되었다.
14년에 그들의 태자 환권(桓權)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치니 태종이 후하게 대접하고 노고를 위로함에 있어 매우 지극하였다.
 
 
 
16년 서부대인 개소문(蓋蘇文)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을 범하려 하자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더불어 논의하여 그를 주살하고자 하였다. 일이 누설되자 소문이 이에 통솔하고 있던 병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사열을 펼친다고 말하고 아울러 성의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놓으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와서 사찰하였는데 개소문이 병사들을 부려 모두 살해하지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창고를 불사르며 왕궁으로 달려들어가 건무를 살해하고 건무의 아우인 대양(大陽)의 아들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스스로 자리에 올라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중국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은 것이니 그로부터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
개소문의 성씨는 천씨(泉氏)인데 수염이 많은 얼굴에 매우 장대하고 형체가 걸출하며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기에 좌우에서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였다. 항상 그의 부하에게 땅에 부복하게 하고는 그를 밟고 말에 오르며, 말에서 내릴 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길을 나설 때는 먼저 호위대를 풀어놓고 길을 인도하는 자가 길게 호령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는데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며 모두 스스로 구덩이나 골짜기로 뛰어든다.
 
 
 
태종이 고건무의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에게 부절을 주어 조문하게 하였다.
17년에 자리를 이은 왕인 장(藏)을 봉하여 요동군왕고려왕으로 삼았다. 또 사농승 상리현장(相里玄奬)을 파견하여 새서를 지니고 가서 고려를 말로 타일러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개소문이 상리현장에게 말하기를
[고려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진 지 이미 오래오. 예전 수(隋)나라 왕실에서 침략해 올 때 신라가 기회를 타고 고려 5백 리의 땅을 약탈하고 그 성읍들을 신라가 모두 차지하고 있소. 스스로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싸움은 아마도 그칠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상리현장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 뒤쫓아 논할 것인가?]
하였으나 개소문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태종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막리지는 그의 주인을 해치고 대신들을 모두 살해하였으며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구덩이에 파묻고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같을 뿐이니 백성들은 더욱이 자칫하면 번번이 죽임을 당하기에 원한과 고통을 마음에 담아두고 길거리에서는 눈짓만 하고 있다. 무릇 군사를 출정시켜 백성을 위로하고 반역자를 문죄하여 토벌하면 모름지기 그 명분이 있을 것이요,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였기에 패퇴시키기는 매우 쉬울 것이다.]
하였다.
 
 
 
19년 명을 내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大總官)을 삼아 장군 상하를 거느리고 강(江), 회(淮), 영(嶺), 협( ) 등지의 굳센 병사 4만명과 전선 5백 척을 통솔하여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또 특진영국공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官)을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부관으로 삼아 장군 장사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6만 명을 통솔하여 요동(遼東)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양군이 세력을 합하여 태종이 친히 거느린 천자의 군대와 모이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적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나아가서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포로 2만명을 노획하였으며 그 성에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5월에 장량의 부장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의 남녀 8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이날 이적은 요동성으로 군대를 나아가게 하였다.
제께서 요택(遼澤)에 머무르며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날 수나라 군대가 요수(遼水)를 건넜으나 그때는 하늘이 돕지 않아 종군하던 사졸들은 해골이 된 채 서로를 바라보며 드넓은 들녘에 두루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애석하고 탄식할 일이다. 백골을 덮어 주는 도의는 참으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니 명령으로 모두 거두어들여 매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국내성(國內城)과 신성(新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와서 요동을 도왔으나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되받아쳐서 크게 격파하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제께서 요수를 건넌 뒤 조서를 내려 교량을 치움으로써 사졸들의 의지를 굳게 하였다. 제께서 요동성(遼東城)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매우는 것을 보고 제께서 그 중 제일 무거운 것을 나누어 친히 말 위에 실었다. 시종하던 관리들이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투어 흙을 지고 성 아래로 옮겼다.
이때 이적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우리에게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리는 투석수레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성 위에 나무를 쌓아 전투누각을 만들어 그것으로 날아오는 돌을 막게 하였다. 이적이 수레를 열 지어 놓고 돌을 쏘아 그 성을 공격하니 맞는 곳은 모두 무너졌다. 또 충차(衝車)를 밀어 그 누각에 부딪치니 기울어져 넘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께서 친히 기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적과 더불어 회맹하여 그 성을 에워쌌다. 급작스레 남
 
풍이 매우 맹렬하기에 그 서남쪽의 누각에 불을 놓을 것을 명하니 연이어 성 가운데로 연소되어 가옥들이 모두 타버렸다. 전사들이 성에 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지고 불타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으며, 그들의 날랜 군사 1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처음에 제께서 정주로부터 매 수십 리마다 봉화대 하나씩 설치를 명하여 요동성까지 이어지게 하고 태자와 약조하기를 요동을 극복하면 봉화불을 올릴 것이라 하였다. 이날 제께서 봉화를 올릴 것을 명하니 그 불길이 전달되어 변방의 요새로 들어갔다.
 
 
군대를 백애성(白崖城-백암성)에 자리하고 공격을 명하니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쇠뇌의 화살에 맞았기에 제께서 친히 피를 빨아 주었더니 장군과 사졸들이 이를 듣고 감동하여 격려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성은 산에 의자하고 물에 임하여 사면이 험난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이적이 충차로 부딪치고 돌을 날리며 화살을 성 가운데로 빗발같이 집중시켜 쏘았다.
6월에 제께서 그 서북쪽에 이르자 성주 손벌음이 몰래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며 이르기를
[신이 이미 항복을 원하였으나 그 중에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있습니다.]
하므로 조서로서 기치(旗幟)를 하사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할 것이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
하였다. 손벌음이 성 위에 기치(旗幟)를 세우니 고려는 당의 군사가 성에 오른 것이라 여기고 이에 모두 항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요동이 함락되자 손벌음이 항복을 구걸하였다가 중도에 후회하여서 제께서 그가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노여워하여 성 안의 사람과 물건들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허락하였었다. 항복을 받기에 이르자 이적이 제에게 여쭙기를
[전사들이 분발하여 앞을 다투며 화살과 돌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대문일 뿐입니다. 이제 성을 거의 빼앗았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들의 항복을 허락하여 까닭 없이 장군과 사졸의 마음들 저버리십니까?]
하였으니 제께서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사를 풀어놓아 살육하게 하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포로로 삼게 하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는 짐이 곳간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바라건대 장군은 이 한 성의 죄를 면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들이니 남녀 1만 명과 날랜 병사 2천 4백 명을 노획하고 그 성에 암주를 설치하였으며 손벌음을 암주자사에 제수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자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했는데 이적이 그들을 몽땅 사로잡으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군대를 따르며 스스로 공적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그 누가 너희들의 힘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마는 너희들의 가족들은 모두 가시성(加尸城)에 있으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저들은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 집안의 처자를 파산시키면서 한 사람의 힘이 사용되기 바라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하며 모두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천자의 수레가 나아가서 안시성(安市城)의 북쪽에 머무르며 영을 펼쳐놓고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고려의 북부녹살(北部 薩) 고연수와 남부누살(南部 薩) 고혜정이 고려와 말갈의 무리 15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도왔다.
적중에 대로(對盧)가 있어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하였는데 고연수에게 이르기를
[내 듣기로 중국이 크게 어지럽자 영웅들이 함께 일어났다고 합니다. 진왕(秦王)은 뛰어난 무예로 향하는 곳에는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니 북쪽 오랑캐는 항복을 청하고 서쪽 오랑캐는 정성을 바쳤습니다. 지금은 국력을 기울여 이곳에 도착하였기에 용맹한 장수와 날랜 병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는 가히 막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계략이 될 만한 것은 만약 군사를 조아려 싸우지 않고 오래도록 지켜 버티며 날래고 굳센 군사를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로를 끊으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군량이 반드시 다할 것이니 싸우고자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여도 길이 없을 것인즉 이는 싸우지 않고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바로 나아갔다.
태종이 밤중에 모든 장수를 불러 몸소 친히 지휘하였다. 이적(李勣)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였으며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우진달(牛進達) 등 정병 1만 1천명을 거느리고 기습군이 되어 산의 북쪽으로부터 좁은 계곡에서 나와서 그들의 후미를 들이치게 하였으며 태종은 직접 보병과 기병 4천을 데리고 북과 뿔피리를 숨기고 깃발과 표지를 가로누이고서 적 병영 북쪽의 높은 봉우리 위로 향하고는 모든 군대에 명령하여 북과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군사를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해당관리에게 명을 내려 조당(朝堂)의 곁에 항복 받을 막사를 차리게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午時)에 여기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다음날 고연수가 단지 이적(李勣)의 군사만을 보고 더불어 싸우려 하였다. 태종이 무기(無忌)의 군대에서 먼지가 이는 것을 머리서 바라보고 영을 내려 북과 뿔피리를 함께 불게 하며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가 크게 두려워하며 창을 지닌 보병 1만 명으로 그들을 공격하니 고연수의 무리가 패하였다. 무기가 군사를 풀어놓아 그들의 후미로 타고 오르게 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다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졌으며 1만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연수 등이 그 나머지 도적들을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다. 그리하여 무기와 이적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애워싸고는 동쪽 하천의 교량을 치워 돌아갈 길을 끊었다.
태종이 고삐를 당기고 서서히 나아가며 적의 진영을 바라보고는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고려는 국력을 기울여 왔기에 존망이 달여있는데 한번 패하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
하며 말에서 내려 두 번 절을 올리고 하늘에 감사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 등이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태종은 원문(轅門)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 등이 무릎으로 기며 앞으로 나와 깊이 절하고 명을 청하였다. 태종이 녹살( 薩) 이하 추장 3천5백 명을 가려내어 군대의 벼슬을 수여하고 내지(內地)로 옮겼다. 말갈 천3백 명은 거두어들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놓아 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3만 필과 소 5만 두 및 명광갑(明光甲) 5천 벌을 노획하였으며 다른 장비들도 그만큼은 되었다.
고려국이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더니 후황성(后黃城)과 은성(殷盛) 등은 모두 스스로 발을 빼고 도망하여 수백 리에 사람과 인가의 기척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자가 행차하였던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 山)이라 하고 장작(將作)에게 영을 내려 파진도(波陣圖)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중
 
서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고 돌에 새겨 그 공로를 기록하였다. 고연수에게 홍려경(鴻 卿)을 그리고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을 제수하였다. 장량(張亮)이 또 고려와 더불어 건안성(建安城) 아래에서 다시 싸워 모두 격파하니 길게 늘어서서 에워싸고 공격하게 되었다.
 
 
 
8월에 진영을 안시성(安市城) 동쪽으로 옮기자 이적이 마침내 안시성을 공격하며 고연수 등 항복한 무리들의 진영을 그 성 아래로 끼워 놓고 그들을 불러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은 견고하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며 매번 태종의 지휘 깃발이 보이면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고 시끄럽게 굴며 저항하였다. 제께서 매우 노여워하자 이적이 이르기를
[적을 격파하는 날 남자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합니다.]
하니 성 안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이에 강하왕 도종에게 영을 내려 흙산을 쌓게 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를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 역시 성가퀴(치-雉)와 성벽의 담을 더욱 올려 저항하였다. 이적이 그들의 서쪽을 공격하여 발석거와 충차로 그들의 망루와 성가퀴(雉)를 허물어 버리자 성 안에서 담이 붕괴됨에 따라 즉각 나무를 세워 목책(木柵)을 만들었다.
도종이 나뭇가지에 흙을 싸서 땅을 만들고 이를 언덕에 쌓아 올려 산을 이루고는 그 중간에 다섯 길을 내어 나무를 대로 흙으로 그 위를 덮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점차 성에 가까이 다다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 부복애(傅伏愛)를 보내 군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꼭대기에서 적을 막게 하며 흙산을 점차 높이 올려 그 성을 밀치니 성이 붕괴되었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통솔하던 곳을 떠나 있었더니 고려인 1백 명이 스스로 성을 무너뜨리고 싸웠으며 마침내 흙산을 점거하여 구덩이를 끊고 불을 쌓아 방패를 둘러 스스로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고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두루 돌려보게 하였다. 모든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사흘이 되도록 극복할 수 없었다.
 
 
 
태종이 요동의 곳간에 쌓여 있는 것이 얼마 없고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얼어죽으니 이에 조서를 내려 군대를 돌렸다. 그 성을 지나치자 성 안에서 모두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가로뉘었으며 성주가 성에 올라 손으로 절을 하며 받들어 배웅하였다. 태종이 그들의 견고한 수비를 가상히 여겨 명주 1백 필을 하사하고 이로써 임금을 섬기는 충절을 격려하였다.
처음에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몰시킨 뒤 그 성이 천자의 군대에 항거한 까닭에 응당 노비로 몰수된 자가 1만 4천 명이었는데 모두 앞서 모아 유주(幽州)로 보냈다가 장차 장수와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태종은 그들이 부모와 처자가 하루 아침에 흩어질 것을 가엾게 여겨, 벼슬아치에게 영을 내려 그들의 값어치에 준하여 베와 비단으로 속 값을 치르게 하고 사면하여 백성으로 삼았다. 그 무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3일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뒤 항상 탄식을 거듭하다 얼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20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태종이 그들의 사신에게 일러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군주에게 이르라. 미색이라는 것은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너희가 바친 것은 실로 아름답고 곱다. 그러나 본국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온 것을 가련하게 여기기에 그들을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그들의 친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요, 그들의 미색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는 것이기에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22년에 또 우무위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파견하여 청구도로 가서 그들을 정벌하니 설만철은 바다를 건너 압록수로 들어가 진격하여 박작성(泊灼城)을 격파하고 노획한 포로가 매우 많았다. 태종이 또 강남에 명하여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섬주자사 손복가(孫伏伽)를 보내 용감한 사졸들을 불러 모집하게 하였으며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군량과 장비를 운송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는 장차 크게 거사하여 이로서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제께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제위를 잇고 또 병부상서 임아상(任雅相)과 좌 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및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속속 그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 없이 돌아왔다.
 
 
 
건봉(乾封-666~668)원년에 고장(高藏)이 그의 아들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태산 아래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해 개소문(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대를 이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그 아우 남건(男建) 및 남산(男産)과 화목하지 못하고 각기 붕당을 수립하여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이 둘째 아우에 의해 축출되자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자리잡고 죽음으로 지켰으며 그의 아들 헌성(獻誠)은 궁궐로 찾아들어 구원하여 줄 것을 애원하였다. 조서를 내려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남생이 몸을 탈출해 도망하니 조서를 내려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에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11월에 사공, 영국공 이적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비장 곽대봉등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2년 2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고 신성에 이르러 모든 장수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려의 서쪽 경계에 진영을 둔 성으로 가장 요해지이니 만약 먼저 도모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성 역시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신성의 서남쪽에서 산에 의지하여 목책을 쌓아 놓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니 성 안에서는 곤궁하고 급박하여 몇 차례 항복하는 자가 있었으며 이로부터 향하는 곳마다 극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고장과 남건이 태대형(太大兄)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데리고 흰 깃발을 가지고 나와 항복하며 또한 들어가 알현할 것을 청하니 이적이 예의를 갖추고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총장(總長-668~670)원년 9월에 이적이 또 진영을 평양성의 남쪽으로 옮기니 남건이 번번히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하였다. 남건 휘하의 착병총관승 신성(信誠)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군중을 찾아들고 성
 
문을 열어 안에서 호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문을 열게 하여 이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성에 올라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하며 성문의 누각을 불사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남건이 곤궁하고 급박해지자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을 쳐서 빼앗고 고장과 남건 등을 포로로 하였다.
12월에 경사에 이르러 함원궁(含元宮)에 포로를 바치고 승리를 알리는 의식을 치렀다. 조서를 내려 고장은 그 정치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을 제수하고 남산(男産)을 선봉으로 섰기에 사재소경에 제수하고 남건(男建)은 검주(黔州)에 유배시켰으며 남생(男生)은 길을 인도한 공이 있기에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에 봉하였으며 특진 등의 관직은 예전처럼 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은 예전에 다섯 부로 나뉘어져 성이 1백76개, 호구가 69만 7천이었으니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개 도독부(都督部)와 42개 주(州) 그리고 1백여 개의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 우두머리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제수하고 중화인과 더불어 백성들을 가지런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좌무위장군 설인귀를 파견하여 군사를 총괄하고 진정시키게 하였으나 그 후에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제법 있었다.
 
 
 
의봉(儀鳳-678~679)연간에 고종이 고장(高藏)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에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 거처하게 하며 본지의 오랑캐들을 진압하여 군주가 되게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자 몰래 말갈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반역을 꾀하였다. 일이 드러나자 불러 소환하고 공주(恐州)에 유배하였으며, 아울러 그의 사람들을 나누어 옮겨 하남(河南)과 농우( 右) 등 여러 주로 흩어지게 하고 빈약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무르게 하였다.
영순(永淳-682~683)초 고장이 죽자 위위경에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운구하여 경사에 이르게 한 뒤 힐리( 利)의 묘 좌측으로 매장지를 하사하고 겸하여 비석을 세워 주었다.
수공(垂拱-685~688)2년에 또 고장의 손자 보원(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聖曆-698~700)원년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가구들을 통솔하여 다스리도록 위임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행되지 않았다.
2년에 또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를 제수하여 안동도독으로 삼고 본지의 오랑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옛 가구로서 안동에 있는 것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나뉘어져 돌궐과 말갈 등에 의지하여 머무르니 고씨 임금은 마침내 단절되었다.
 
 
 
의봉(儀鳳-676~679)초에 남생(男生)이 장안에서 죽으니 병주대도독에 추증하였다. 아들 헌성(獻誠)은 우위대장군 겸 영우림위상하에 제수하였다.
천수(天授-690~692)연간에 즉천(則天)이 일찍이 안 대궐로부터 금은 보물을 내어 재상 및 남북 관청의 문무관으로 하여금 은밀히 활을 잘 쏘는자 다섯 명을 가려 뽑게 하여 함께 내기를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제일의 자리를 사양하자 헌성이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토마지(薛土摩支)에게 사양하였으며 설토마지가 또 헌성에게 사양하니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에 능한 자 다섯 명을 가려뽑을 것을 명하셨는데 간택되는 자가 대부분 한나라의 관리가 아닙니다. 신은 이후로부터 한나라의 관리가 활 쏘는 기술에 뛰어나다는 명성이 없을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데 명궁을 가려뽑는 일을 중도에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하니 즉천이 가상히 여기고 그의 말을 따랐다. 이때 혹독한 내준신이 항상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고 답하지 않으니 마침내 준신이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거짓을 꾸며 목을 옭아 죽였다. 즉천이 후에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우대장군에 추증하고 예절로서 장례를 다시 치러 주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2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82 발해 대조영 후손들이 경북 경산에 모여사는 이유는… 2021-09-17 0 27
81 연대객원교수가 본 조선족과조선족사회의 현실과 미래 2021-09-13 0 49
80 조선/ 한국 역대 국가원수 및 정부수반 2021-09-12 0 39
79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2021-09-10 0 28
78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2021-09-10 0 22
77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2021-09-10 0 21
76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2021-09-10 0 24
75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2021-09-10 0 22
74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2021-09-10 0 21
7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국보國寶 2021-09-01 0 58
72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는 한글일까? 조선글일까? 2021-08-29 0 57
71 신단실기 족통원류 2021-08-24 0 56
70 중국조선족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전망 (삭제금지) 2021-08-08 0 113
69 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 ABC (삭제금지) 2021-08-08 1 85
68 조화로운 중한,한중관계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역할 (삭제금지) 2021-08-08 0 76
67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 사료史料 모음 2021-07-14 0 117
66 朝鲜族 2021-05-21 0 255
65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2021-05-21 0 185
64 북방(중국 동북 지방연변등 지역과 북한지역) 고구려高句麗족과 한강이남(대한민국)의 삼한韓족 2021-05-21 0 201
63 고구려어 2021-03-29 0 504
‹처음  이전 1 2 3 4 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칼럼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潮歌网) • 연변두만강국제정보항(延边图们江地区国际信息港) •아리랑주간(阿里郎周刊)
地址: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A座9001室 电子邮件: postmaster@zoglo.net 电话号码: 0433) 251-7898 251-8178
吉林省互联网出版备案登记证 [吉新出网备字61号] | 增值电信业务经营许可证 [吉B-2-4-20080054] [吉ICP备20003111号]
Copyright C 2005-201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