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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2021년 09월 10일 11시 42분  조회:992  추천:0  작성자: 고구려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발해는 동방의 강국으로 위력을 떨치던 《해동성국》이였다.

발해가 초기부터 정치군사적위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지위를 높이면서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칠수 있게 된것은 건국직후 실시된 주요정책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치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입니다.》

정치는 계급 또는 사회공동의 리익에 맞게 사람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적기능으로서 여기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정치를 한다는것은 일정한 계급이 자기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맞게 정책을 작성하고 정치조직, 정치제도에 의거하여 그것을 집행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권을 쥔 계급이 어떤 정책을 작성하고 실시하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계급적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르는것으로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 발해국에서 중무정책의 실시

발해는 건국초기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무정책을 실시하였다.

발해가 건국직후 실시한 중무정책은 무관을 중시하고 무예를 인재등용의 기본징표로 삼던 고구려의 상무적인 정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써 이 시기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할수 있게 한 긍정적인 정책이였다.

발해가 중무정책을 실시한 시기는 건국직후부터 8세기 전반기경까지였다.

발해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문관보다 무관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으로 간 발해의 첫 사신단은 조선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의 에조족(오늘의 아이누족의 조상)거주지역에 도착하였는데 24명가운데서 고인의이하 16명이 죽고 두령 고재덕 등 8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이데와에 도착하였다. 이 사신단의 사두는 무관인 녕원장군 랑장 고인의였으며 그밖에 우장군 과의도위 덕주와 별장 사항 등이 사신단성원으로 되여있었다.

 

 

 

그후 발해국은 759년까지 5차례에 걸쳐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사두, 사사 등 주요인물들은 모두 무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일본뿐아니라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도 대부분 무관벼슬을 가진 관리들이였다.

 

 

 

발해는 당나라에도 많은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사신 장행급과 최혼이 705년, 713년에 각각 발해를 방문한 후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어느정도 완화되면서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세기 중엽까지 여러가지 사명을 띤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는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관직명을 정확히 전하는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사신들가운데서 당나라의 명예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무관의 벼슬이였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으로서 매개 나라의 대외관계에는 그 나라가 실시하고있는 대내정책이 그대로 반영된다. 해당 나라들의 대외관계는 사신들의 호상 래왕을 통하여 맺어지며 발전한다. 사신들은 봉건국가의 권력을 틀어쥐고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국가의 공식적인 인물들인것만큼 사신단성원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여있는가 하는것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틀어쥔 정치세력에 대하여 알수 있다.

사신단성원들이 대부분 무관들로 구성되여있다는것은 당시 발해에서 무관들이 국가정치의 주역을 담당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발해에서 군사를 중시하는 중무정책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에서 중무정책은 8세기 50년대경까지 실시되였다.

그러면 발해가 건국 초기부터 중무정책을 실시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 목적은 갓 창건된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발전의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으며 옛 고구려의 령토를 완전히 되찾고 강력한 봉건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구려의 장수출신인 대조영이 발해건국을 위한 오랜 기간의 항전을 통하여 단련된 고구려군사들에 의거하여 국가정사를 운영하는것이 건국초기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권력지반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기때문이였다.

 

 

 

이처럼 건국후 8세기 전반기경까지 실시된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는 나라의 자주권과 안정을 지키고 강한 국력을 마련할수 있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출현할수 있었던 토대는 모두 중무정책에 의하여 마련되고 공고화되였으며 바로 여기에 발해정치사에서 중무정책의 실시가 가지는 의의가 있다.

 

중무정책에서 중문정책에로의 전환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고 대외적지위가 높아진 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발해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제3대왕 대흠무(문왕)집권시기(737년~793년)이다.

 

 

 

제2대왕(대무예)의 둘째 아들이였던 대흠무는 737년에 왕위에 올라 집권초기에 고왕(대조영)과 무왕(대무예)시기의 정책들을 계승하여 그것을 완수하는데 기본힘을 돌렸다. 특히 문왕은 무왕통치시기의 령토확장정책을 완수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문왕집권초기에 추진된 령토확장의 결과 8세기 40년대에 북부의 여러 말갈족들이 종속되고 그 지역들에 지방행정단위들을 설치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그리하여 발해건국직후부터 기본힘을 돌려온 발해변방의 여러 말갈족들에 대한 정복과 포섭이 기본적으로 일단락지어지고 나라의 령토는 훨씬 넓어지게 되였다.

당시 대외정세도 발해에 유리하게 변하고있었다.

 

 

 

732~733년 발해의 반침략전쟁이후에 발해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실패와 저들에게 불리하게 변화된 대외적환경을 인정한 이웃나라들은 관계정상화를 지향하였으며 《안사의 란》을 전후하여 국내정세가 복잡하게 번져지자 발해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여 정치, 군사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발해주변 나라들가운데는 발해에 대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위험을 조성하는 종족이나 나라가 없었으며 이것은 발해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대외적환경으로 되였다.

 

 

 

발해는 중무정책에 의하여 유리하게 조성된 대내외적환경과 조건에 맞게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8세기 50년대 말부터 정치방향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에서 실시된 기본정책은 종전의 중무정책과는 다른 중문정책이였다.

문왕통치시기의 정치를 중문이라고 하는것은 고왕과 무왕시기와 같이 주로 군사력에 의거하여 대내외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것이 아니라 국가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고 그에 의거하여 경제, 문화발전에 힘을 넣으면서 정사를 운영하였기때문이다. 대흠무통치시기의 정치의 특징은 문왕이라는 왕의 시호에 명백히 나타나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왕통치중기이후 구체적으로 8세기 후반기를 발해정치에서 중문정책이 실시된 시기로 규정할수 있는것이다.

이처럼 발해에서 변화된 조건에 맞게 중무정책이 중문정책으로 이행되면서 중앙집권적봉건통치체제가 더욱 확대발전되였으며 국력도 더욱 강화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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