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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에로의 회귀/ 자서(自序)
2018년 06월 07일 13시 17분  조회:924  추천:0  작성자: 견이
 그 어떤 유혹에도 쉬 흔들리지 않는다 해서 불혹이라 했을 것이지만, 불혹의 나이에 내가 겨우 동시 따위에 혹해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따지고 보면 동시가 아닌 동심에 혹한 것이었지만.
​ 마흔두 살에 예기치 못한 '사고'를 쳐놓고 책임을 진답시고 팔자에도 없는 결혼을 서둘러 하고, 결혼 3개월 만에 떡돌 같은 아들놈까지 태어나면서 급작스레 가중해진 심신의 부담을 떨어버리려고 술에 절어 살던 무렵이었다. ​
 핏덩이 같던 녀석이 옹알이하며 발발 기어 다니는가 싶더니 어느덧 걸음마 타기 시작하고, 내가 만취해 들어가면 아빠! 하고 되똥되똥 달려와 안기며 의사표현을 하느라 종알거리고, 날이 갈수록 징그럽다 할 만큼 흑백사진 속 내 몰골을 쏙 빼닮아가는 양이 하 신기해서 자꾸 들여다보게 되고, 내게 야단맞으면 서럽게 울며 지어미 품속을 파고들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아빠, 아빠 하며 해죽거리고, 운신이 불편한 나를 전혀 꺼리는 기색 없이 지어미 보고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 하며 엄지를 내들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물겹도록 고맙고 미안해지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저토록 티 없이 맑은 동심이 내게도 분명 있었을 텐데, 언제 사라져버렸지?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내 안을 슬며시 들여다보았더니 보였다. 갖은 잡념과 망상들 사이로 세파에 찌들고 주눅 든 창백한 얼굴의 아이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 아직… 있었구나….”
  느닷없는 나의 출현에 뜨악한 표정으로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두 눈에 생기를 띄며 해맑게 웃어주는 아이… 조만간 내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눈빛이었다.
  장장 30여 년만의 해후였다. 어린 시절엔 느닷없이 찾아온 병마와의 항쟁에 시달려 미처 들여다볼 경황이 없었고, 장성해서는 생업을 영위한답시고 까맣게 잊고 살다가 그렇게 불쑥 나타난 나를 싫은 소리 한 번 않고 순순히 받아주어서 얼마나 고맙던지….
  그날부터였다. 내 안의 그놈과 아들녀석이 시도 때도 없이 속살거리는 소리들에 '시달려' 나는 즐거운 고민에 쌓였고, 원망스럽고 추한 것들만 보이던 세상 구석구석에서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짓궂게 흩날리는 눈송이가 하얀 별로, 비 온 뒤 총총 돋아난 버섯들이 철모 쓴 장병들로, 백두산 천지가 냉면 한 그릇으로, 국화꽃 피어나는 차 주전자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심이란 거짓 없고 순수한 인간 태초의 참된 마음이라고 들었다. 그 말대로라면 동심을 잃는다는 것은 곧 참된 마음을 잃는다는 얘기가 되는데, 한 인간에게 동심, 즉 참된 마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상실이 뭐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그 소중한 것을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른 채 덤덤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아니던가…. ​
  인생이란 어쩌면 동심에서 출발하여 긴 여행 끝에 동심에로 회귀하는 여정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애가 된다”는 설도 노쇠(老衰)현상이라기보다는 살면서 단맛 쓴맛 다 보고 난 뒤에 비로소 동심의 소중함을 터득하고, 남들이야 뭐라 하든 뒤늦게나마 마음 편히 살다 가려는 노회(老獪)함 또는 만사휴의(萬事休矣)의 심태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노인성치매질환의 경우도 그렇다. 방관자 입장에선 글쎄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일 수밖에 없겠지만, 환자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하늘의 은총을 입은 게 아닐까 싶다. 사는 동안의 온갖 잡다한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노라니 좀 힘들겠는가? 그 숱한 기억들을 짊어진 채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그 기억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백지상태 - 순수한 인간 태초의 상태 - 동심으로 되돌려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 ​
  동심을 빙자하여 망령이니, 치매니 하며 너무 장황해졌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뒤늦게나마 동심을 찾아서 거기에 푹 빠져 사는 나는 분명 축복 받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세상을 좀 더 단순하게, 쉽게 살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
  어른들이야 시시비비로 아웅다웅하거나 말거나 한쪽 구석에서 세상모르고 지 장난에만 몰두해있는 개구쟁이 아들놈처럼, 그러다 간혹 근사해 보이는 “작품”이다 싶으면 쫑드르르 들고 가서 어른들께 “자랑”도 하면서 그렇게 살련다. 2017.8.27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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