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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다 만 그림 (처녀작 중편소설)
2011년 12월 04일 07시 23분  조회:4772  추천:0  작성자: 견이

 그리다 만 그림
김견



승현이는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렸던탓으로 겨우 쌍엽장신세를 면한 장애인이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거의7cm 정도 짧았고 바지를 입은 겉모습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알몸상태에서 보면 건실한 오르쪽 다리에 비해 왼쪽 다리는 마치 말리운 개구리 다리처럼 바짝 말라붙어 아주 흉상이였다. 하여 그는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에도 종래로 반바지같은걸 입는법이 없었다.
그러나 승현이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신체가 정상인 사람들보다도 더 떳떳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 삶의 의욕에 자신을 불태우고있었다.
승현이는 고독한 인간이 아니였다. 그의 남아다운 호방한 성격과 듬직한 사람됨됨이에 끌려 많은 친구들이 진심으로 도와나섰고 항상 그의 주위에 뭉쳐있었다. 승현이가 친구를 다방면으로 사귀였기에 별의별 친구들이 다 있었다. 북경대학에서 석사연구생 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양고기산적점을 경영하는 친구도 있었다.
삼형제중 둘째로 태여난 그가 불행하게 어릴 때부터 불구가 되여 마음고생을 한다고 자연히 집에서는 외자식 맞잡이로 부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여왔다. 부모님들은 승현이를 위해 악착스레 돈을 벌었다. 그들은 한국에 가서3∼4년간 고생한 덕에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벌어가지고 돌아왔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승현이가 부모님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것이다. 워낙 타고난 락천적인 성격과도 관계되겠지만 승현이는 자기의 불행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련 승현이에게 고충이 하나 있다면 나이 스물여덟이 되도록 녀자친구 없는것이다. 물론 여기저기에서 중매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가운데 승현이의 마음에 드는 녀자애들이 없은건 아니였다. 승현이가 첫눈에 홀딱 반해버려 부지런히 쫓아다닌 녀자애들도 두세명 있긴 하였는데 하나는 처음에는 승현이를 그처럼 살갑게 대하던것이 어느날엔가 승현이네 집에 문득 왔다가 미처 바지를 주어입지 못한, 의학원 해부실에서나 볼수 있는 해괴한 왼쪽 다리를 보고는 기겁하여 달아나버렸다. 또 하나는 무척 승현이를 따르던 녀자애였는데 그녀 어머니가 쥐약을 먹는다고 야단치며 결사적으로 반대하는바람에 또 실패했다. 하여 승현이도 그 녀자때문에 철이 들어서 처음 병신된 다리를 쥐여뜯으며 눈물을 흘려봤고 또 술을 잔뜩 마시고 광기를 부려 파출소놀음까지 한적이 있었다.
그뒤로 승현이는 중매란 말만 나오면 아예 개 벼룩 씹듯 낯을 찡그리며 도리질했다. 그런데 친구들중에 소학교때부터 중학교까지 쭉 한반에 다니다가 후에 한국인가 싸이판인가에 가서 벌어온 돈으로 양고기산적점을 경영하는 경호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승현이의 중매를 서느라고 자기일도 다 제쳐놓고 뛰여다녔다.
승현이는 친구의 호의를 너무 무시할수는 없어 마지못해 몇몇을 만나보았다. 경호가 소개해준 녀자애들은 거개가 다 미끈하고 아련하게 생긴처녀애들이였다. 그런데 말을 두어마디 해보면 머리가 텅빈 애들이였다.
그러나 경호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녀자애들을 부지런히 소개했다. 승현이는 이러한 경호의 열정에 정말 감지덕지했다. 마음같아서는 웬간하면 하나 골라잡고 경호의 시름을 덜어주고싶었지만 마음대로 안되는게 사람일인가부다.
경호는 어릴 때부터 싸움질을 잘했다. 같은 또래 두셋은 히죽 웃으며 재껴버린다. 하여 애들이 승현이를 《삐꾸(절음발이)》라고 놀려주면 경호는 그때마다 자기 일처럼 격분해하며 승현이앞에서 그 애들을 보기 좋게 때려주군 하였다.
그 보상으로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한 승현이는 성적이 차한 경호를 진심으로 차근차근 가르쳐주어 중학교까지 무난히 졸업하게 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후 서로의 지향이 달라 헤여진후7∼8년후에야 우연한 상봉을 하였지만 승현이에 대한 경호이 그 지극한 관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승현이는 이런 친구가 있음으로 하여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가졌고 언젠가는 꼭 친구의 우정에 보답하리라 마음먹었다.
때는8월중순이였다. 승현이가 집부근에30평방쯤 되는 집을 얻어놓고 화실을 꾸리느라고 바삐 돌아치는데 경호한테서 오랜만에 술이나 마시자는 전화가 왔다. 약속한 장소에 가니 경호가 한 쳐녀를 자기 녀자친구라고 인사시켰다.
최옥련이라 부르는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였다. 날씬한 키에 어울리는 긴 목, 생기있는 두눈에 버들잎처럼 휘여진 눈섭이며 얼굴가운데 곧은 선을 긋고 내려오다 상큼하게 일어선 깜직한 코날이며 작고 도톰한 입술, 말하거나 웃을 때면 량볼에 쏙쏙 패이는 보조개…
(자식, 또 하나 가로챘구나.)
경호는 흘끔 건너보며 인사수작 마치고 식탁에 마주앉은 승현이는 자기 눈길이 자꾸 옥련이한테 쏠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자식, 이런 미인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소개할거지.》
승현이는 롱담이 지나친것 같아 옥련이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그저 새물새물 웃으며 쥬스를 마시고있었다. 보면 볼수록 미칠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경호가 실눈을 하며 말했다.
《야, 정 소원이라면 내가 자리를 피해줄까?》
경호는 고추라루 묻은 이발을 드러내놓고 낄낄 웃었다. 그 말에 옥련이도 곱게 눈을 흘키며 경호의 어깨를 콕 쥐여박았다.
《자식, 롱담두 분수 있어야지…》
승현이는 제법 성난척 맥주고뿌를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경호는 씨물씨물 웃더니 한참만에 정색하여 말했다.
《아― 그건 그렇구, 정말 옥련이네 유치원에 친구 한분이 있는데 정말 미인이란다. 키는1메터60, 사범학교 졸업하고 호구는 연길시야, 어때? 근사하지? 옥련이가 한번 자리를 마련할테니 시간내서 한번 좀 만나보렴.》
경호는 턱짓으로 자기옆에 앉은 옥련이를 가리켰다. 옥련이도 승현이의 의사가 궁금한듯 쳐다봤다.
《시간이야 뭐. 하여튼 말만 들어도 감사하다.》
승현이는 맥주고뿌 만지락거리며 뜨직하게 대꾸했다.
《야 임마, 네 나이 래일모레면 서른이야! 서른! 너 자신만 생각말구 부모님두 생각하란말이다. 우리 친구들가운데서도 녀자친구 없는 놈이 너밖에 없어. 정신차려. 눈이 잔뜩 높아가지구!》
경호는 성난듯 울대뼈까지 들먹이며 격하게 나왔다. 승현이도 경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사실 승현이가 눈이 높은건 아니였다. 그저 서로 호흡이 통하고 용모는 그저 밉상이 아니면 되고 제일 중요한건 자기같은 병신을 한평생 떠받들어 섬길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글쎄 나야 뭐, 만나봐서 손해될거야 없지.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조건이라면 총각들 이마를 톡톡 튕기며 실컷 고를수 있겠는데 하물며 나같은 병신을 왼눈으로나 쳐다볼가?》
《아 글쎄,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구. 그럼 만나보는거지 응? 시간은 너희들이 알아서 정하구 장소는 〈만남다방〉으로 해라. 난 거기 커피맛이 최고더라.》
《자식, 알았다.》
그들은 목요일오후 한시에 《만남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날은 시름없이 술을 마시였다. 헤여질 때 경호가 승현이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가서 시무룩이 웃으며 지껼이였다.
《야, 너 오늘 보니까 옥련이한테 자꾸 눈길이 가는것 같은데 어때? 내가 밑지는셈치구 양보해줄까? 낄낄…》
승현이는 대답대신 경호의 가슴을 콱 쥐여박고는 돌아섰다. 승현이는 몇발자국 걷다가 다시 되돌아서서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련인을 점도록이 눈바램했다. 맞춤하게 짜른 스카트에 연두색 브라우스를 입은 옥련이가 사뿐사뿐 걸어가는 모습은 그처럼 황홀할수가 없었다.
(후― 또 아까운 녀자 하나 망치겠군.)
승현이는 저도 모르게 마비된 왼쪽다리를 꼬집었다. 전혀 감각이 없었다.

목요일날 승현이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가 약속시간이 되자 부랴부랴 《만남다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약속시간은 아직1∼2분 남아있었다. 점심시간이여서 다방에는 손님이 없었다. 복무원이 안내해주는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 한잔 정해놓고 기다렸다. 커피 한잔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걸까? 약속을 잊었나? 아니 그럴리는 없구,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한참 속궁리하고있는데 출입문이 삐꺽 열리더니 눈에 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옥련이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선 승현이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도 승현이를 알아보곤 머리를 까딱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급히 뛰여왔는지 얼굴은 발가우리하게 상기되여있었고 엷은 연두색 브라우스에 가리워진 높이 솟은 젖가슴은 당금 뛰여나올듯 가쁘게 드놀고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친구가 불시로 일이 좀 있어서…》
그녀는 선생님에게 야단맞는 학생처럼 고개를 푹 떨군채 송구스러워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 거동에 오히려 난처해진건 승현이쪽이였다. 자기일때문에 걱정해주는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약속시간이 좀 늦었다고 이렇게 죄스러워할것까지 있나.
《천만에 말씀. 공연히 내가 심려를 끼쳐서 미안한데 자, 어서 앉소.》
그녀는 그냥 죄송한 마음이 드는지 감히 승현이를 정시하지 못하고 어줍게 권하는대로 앉았다. 커피와 쥬스를 더 청해놓고나서 승현이는 말없이 입가에 느슨한 웃음을 머금은채 담배 붙여물고 눈앞의 살아있는 초상화를 마음놓고 감상했다. 직업적인 습관에서인지 스스럼없이 남의 얼굴을 말없이 점도록 쳐다보고있는 승현이의 눈길엔 주저심같은건 꼬물만치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깜찍한 손으로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쥬스고뿌안을 휘젓던 그녀가 얼굴을 들어 승현이를 힐끔 훔쳐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듯 입술을 옴쫄거리였다. 이윽고 승현이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그런데 같이 온다던 친구는?》
《사실은 그 친구가 오늘 좀 일이 생겨서 늦게 온다하길래 지금까지 기다리다가 늦어졌습니다.》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조금씩 떨리고있었다.
《음― 그랬구만.》 승현은 대수롭지 않은듯 아니, 오히려 잘되였다는듯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 안됐습니다. 약속 지켜드리지 못해서…》
《워낙 인연이라는게 억지로는 맞춰지지 않는법이요. 허허, 사실 나도 만나볼 생각은 별로 없었고…》
승현이는 여유있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건 그렇구, 식사는 했소? 난 지금 점심두 못먹었는데 여기서 의견이 굴뚝같구만 허허…》
승현이는 식지로 자기 배를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세요? 그럼 마침 잘됐습니다. 저두 아직 점심전인데 사과도 할겸 제가 점심 사겠습니다.》
《누가 점심을 사든지 우선 일어나 볼가?》
승현이는 카운터에 가서 경호한테 전화를 걸었다.
《응, 경호니? 나 지금 너 애인하구 밥먹으로 가는 길인데 어때? 괜찮겠냐? 시간이 되면 너두 나오라.》
《나 지금 바빠. 친구들이 불시에 한무리 들이닥쳤단말이야. 근데 걱정마.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까. 그리구 밥먹구 나서 다시 전화해. 우리 저녁에 따로 앉자. 그럼 둘이서 재미있게 먹어. 혹시 반해버리면 휘딱낚아버리고말야. 야, 아직 못다쳤다. 새거야 새거 응? 하하하― 그럼 있다 다시 봐, 끊는다.》
승현이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일방적으로 뚝 끊겨버렸다. 승현이는 수화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피씩 웃어버리고는 출입문을 나섰다.
옥련이는 문밖에 오도커니 서서 기다리고있었다.
《자 이젠 갑시다. 근데 옥련이는 뭘 좋아하오?》
《전 뭐 아무거나 다 괜찮습니다.》
옥련이는 승현이를 따라서며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아무거나 다? 그거 좋구만. 자 그럼 오늘은 불고기추렴이나 해볼까?》
옥련이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해보였다. 아릿다운 처녀와 함께 길을 걷는다는게 얼마나 가슴뿌듯한 일인가? 모든 행인들의 눈길이 모두 자기한테 쏠리고있는것 같았다. 그녀를 힐깃 돌아보았다. 그녀는 항상 그러하듯이 한점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고개를 다소곳하고 걷기만하였다.
음식점에 도착한 그들은 아담하게 꾸며진 단간방으로 안내되였다. 이더운 날씨에 다행히 에어콘이 장치되여있어 제격이였다. 음식을 주문한후 그들은 음식이 다 차려지고 또 불고기를 구우면서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허, 이렇게 할 말이 없을까?) 승현이는 벙어리가 되여버린 자신을 탓하며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슨 말을 할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유치원선생이라고 했지? 오후에 출근 안해도 괜찮소?》
《오늘은 말미를 말았습니다.》
그녀의 말소리는 시내물처럼 도란도란 귀맛좋게 들려왔다. 승현이를 마주보는 두눈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고 티없이 맑았다.
《오 그랬구만. 거 하는 일이 참 재미있겠는데? 온종일 어린애들과 어울려 놀다보면…》
《글쎄 재미라구 생각하면 하는 일이 훨씬 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단조롭고 유치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좀 지겨워날 때도 있고…》
《유치한 직업이라니, 나라의 꽃봉오리들을 양성한다는게 얼마나 보람차고 또 중요한 일이라구. 나두 지금 유치원선생이 되여 옥련이네 유치원에 다니구싶은걸 하하하…》
승현이의 익살에 옥련이도 호호― 시름없이 웃었다.
《저, 그림을 몇해나 그리셨습니까?》
《그러니까 한8년정도 되겠는걸.》
《어머, 8년이나요? 그럼 상당한 수준이겠습니다.》
《허, 재준지 뭔지 그것도 늘어야 재주라겠는데 이거라구야 머리가 뻐꾸기같아서 될수만 있다면 나두 아예 직업을 바꿔서 유치원선생질이나 했으면 좋겠구만.》
《호호, 참. 롱담도 잘하시네. 그럼 직업을 바꿔보지 않겠습니까? 저도 어릴 때 그림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댔습니다. 운이 닿지 않아서 그런지 더 배우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얼굴엔 천진한 미소가 배여있었다. 턱을 고인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승현이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와 자리를 같이 할 구실이 하나 생겼던것이다. 승현이는 저도 모르게 왼쪽 무릎을 탁 찼다. 감각이 있는것 같았다.
《참. 그림을 좋아한다니 마침 잘됐군. 별로 볼건 없지만 오후에 다른 일 없으면 내 화실에 가보지 않겠소? 구경도 할겸. 내가 얼마전부터 구상해놓은 주제가 하나 있는데 옥련이를 보는 순간 나는 이미 그 그림을 다 완성해놓은것 같은 기분이 드오. 옥련이가 싫지 않으면 내 작품의 주인공으로 정하고싶은데 될수 있겠소? 모델비는 섭섭하지 않게 줄테니까.》
승현이는 거의 구걸에 가까운 눈길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더러 모델 서달라는 얘깁니까?》 승현이를 힐끗 쳐다보며 묻던 그녀는 잠간 생각에 잠기는듯 눈을 살풋이 내리깔고있더니 인츰 흥미있게 물었다.
《모델비는 별문제구요. 그런데 시간은 얼마 걸립니까?》
《한 열흘, 빠르면 한 닷새정도 걸리겠는걸.》
그 말에 그녀는 기겁한듯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열흘씩이나요? 아니 그림 한장 그리는게 그리두 품이 든단 얘깁니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요. 외국의 대가들은 그림 한점 완성하는데 몇달 지어는 몇년씩 걸리는게 다반사지.》
《정말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그렇다면 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시간도 그렇고, 그런데 오후에 할 일도 없고한데 화실구경은 가보고싶습니다.》
《옥련선생이 저의 화실에 왕림하는건 더없는 영광입니다. 모나리자가 저의 화실에 왕림한들 어찌 아보다 더 기쁘겠습니까? 어서 가시지요.》
승현이는 깍듯이 존대말을 개여올랐다. 화실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승현이는 나오자마자 택시를 불러세웠다.
《화실이 여기서 멉니까?》
옥련이가 차에 오르며 묻는 말에 승현이는 변명처럼 얼버무렸다.
《엎디면 코닿을 거린데 옥련선생을 모시는데야…》
불과 이삼분만에 차는 화실밑층에 닿았다. 화실은5층에 있었다. 승현이는 의식적으로 뒤에 떨어져 계단을 올라갔다. 비청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흉한 꼴을 그녀에게 보이고싶지 않았다. 화실문을 열고 들어선 승현이는 아차 하고 뒤통수를 쳤다. 바삐 나가다보니 미처 청소를 못했던것이다. 창문까지 활짝 열어놓아 바람에 휴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아무렇게나 내버린 붓대들이 땅바닥에 덕지덕지 어지러운 색들을 게발라놓았다. 말그대로 수라장이였다. 다행히도 그녀는 이마살을 찡그리지 않았다. 아마 화실이라는게 워낙 아니 당연히 이래야 되는줄로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아하, 우리 그림쟁이들이라는게 워낙 좀 이렇게 성미가 거칠어서 청소같은걸 별로하지 않다보니. 허허…》
그녀는 그저 말없이 화실안을 흥미있는 눈길로 살피고있었다. 승현이는 담배를 피워물고 취한듯이 옥련이를 점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종이를 찾는다 이젤에 화판을 고정한다 하며 분주히 돌아쳤다. 옥련이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승현이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준비가 다 끝난 다음에야 승현이는 옥련이에게 말했다.
《지금 앉아있는 그 모습이 참 멋지단말이요. 엎딘김에 절이라구 좀 수고해주오.》
《네? 지금 절 그리겠다는 말씀입니까?》
《괜찮소. 연필속사니까 한시간 반정도만 수고해주오. 해가 넘어가면 못그린다니까.》
승현이는 제쪽에서 재촉하며 연필까지 쥐고 제법 그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럼, 이대로 이렇게 앉아있으랍니까?》
《음, 몸은 약간 왼쪽으로 틀고 얼굴은 나를 향하고 두손은 이렇게 맞잡고 자연스럽게, 옳지! 자 그럼 시작하겠소.》
승현이는 손짓발짓해가며 포즈를 취하게 하고는 남이야 편하든말든 물어볼념도 않고 화폭에 좍좍 긴 선들을 그어댔다.
옥련이는 그러는 승현이가 그저 당돌하고 우습게만 느껴졌던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샐쭉 웃고는 다시 원자세로 돌아가 얌전히 앉아있었다. 실내는 스걱스걱 연필 긋는 소리만 들렸다. 평소에는 온갖 우스개와 잡담을 누구보다도 잘하다가도 그림앞에서만은 자못 엄숙한 승현이였다. 일단 그림만 그리기 시작하면 온갖 세상과 절교라도 한듯 시종 말 한마디 없이 그림에마나 열중하는 성미였다. 시작한지 꼬박 한시간이 넘도록 승현이는 말한마디 없었다. 상례대로 하면 한 이삼십분에 한번씩 모델에게 휴식시간을 주는게 도리였다. 그러나 승현이는 그리기에 너무 열중해서인지 아니면 시간을 아끼려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인지 휴식시같은건 전혀 념두에도 없는것 같았다. 상대가 산 모델이 아니라 석고상으로 착각하였던 모양이다.
한편 옥련이는 허리가 시큰시큰해나고 뒤덜미가 뻣뻣해나서 뒤잔등에 땀까지 흠뻑 배였지만 모델서는것이 워낙 그런법인줄로 알았는지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러는 동안 선을 위주로 한 그림화면에는 인물모색과 큰 층차들이 거의 나와있었다. 습관처럼 몇걸음 물러서서 담배를 붙여물고 미간을 찌프린채 화판을 들여다보던 승현이는 무심결에 팔뚝시계를 흘깃 들여다보더니 눈이 떼꾼해졌다.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흘렀기때문이였다.
《시간이 너무 갔구만. 일어나 좀 활동하오.》
옥련이는 기다렸다는듯 고개를 까딱해보이고는 홀짝 일어나 경직되였던 허리와 뒤덜미를 살살 주무르며 승현이의 곁으로 다가와 화판을 들여다보았다.
《어머! 어쩌면 이리도 신통할가…》
겨우 반성품이나 된 그림을 들여다보던 옥련이가 손벽까지 짝짝 치며 조금은 과장된듯싶게 깡충깡충 뛰기까지 하는 모습에는 티없이 맑은 어린애같은 천진함이 다분히 드러나있었다. 승현이는 느슨한 웃응을 입가에 머금은채 물끄러미 옥련이를 지켜보고있다가 제법 겸허한 투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처럼 잘 안되는구만. 훌륭한 모델을 모셔놓구 추태를 보인것 같은데…》
《참 선생님두 너무 겸손하십니다. 전 이 그림이 꼭 사진같아보이는데요.》
《허, 옥련이가 면바루 봤소. 이 그림이 부족한 점이 바로 그거요. 사진같기때문이란말이요. 그림이란건 대상의 미묘하고 섬세한 개성과 특징을 면바로 파악하고 그것을 잡아내야 하는건데 지금 이 그림은 그런게 전혀 없이 모호하단말이요. 말하자면 입가에 어린 미소같은건 내 재간으로는 아직 그 미묘한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겠단말이요. 그래서 이 그림은 지금 생기가 없이 그저 사진처럼 뻣뻣한 감이 들지 않소. 옥련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알겠지? 그 그림이 왜 그렇게 이름났는지 아오? 그건 뭐 모나리자가 특별한 미인이 되여서가 아니오. 사실 뜯어보면 모나리자는 아주 평범하게 생긴 녀인이란말이요. 그럼에도 그 그림이 그렇게 이름난것은 그 그림의 가치가 바로 그 입가에 어린 미묘한 미소에 있기때문이란말이요. 후, 난 언제 가서나 그만한 그림을 그려낼수 있을는지…》
승현이는 제 말도 도취된듯 허구프게 웃어버렸다. 옥련이의 두눈엔 어느새 경모의 빛이 잔잔히 흘러넘쳤다.
《저두 모나리자에 대해서 얼마간 들어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도 그렇게 미묘하고 깊은 경지가 있는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구 그런 경지를 열심히 도전해나가는 선생님이 한결 돋보이는데요. 뭔가 선생님을 도와드리고싶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이 말에 승현이의 두눈은 화등잔만큼이나 커졌다. 승현이는 옥련이의 눈을 정시하며 뚜걱뚜걱 다가갔다. 두사람이 거리가 사람 하나 겨우 나들만큼 좁아졌다.
《옥련이 난…》
그러나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더 나가주질 않았다. 엄연한 다른한 존재― 경호가 떠올랐던것이다.
《고맙소, 옥련이의 말만 들어도 고맙소.》
승현이는 머리를 숙이며 김빠진 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승현이를 바라보는 옥련이의 눈망울은 당금 눈물을 떨어뜨릴듯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있었다. 숨막히는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이윽고 승현이가 어줍은 웃음을 입귀에 실으며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옥련이는 기다란 눈초리를 살짝 내리깔고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없이 쏘파에 가 앉았다. 원자세를 취하고는 맞느냐고 묻듯 승현이에게 눈길을 보낸다. 승현이도 말없이 머리를 끄덕해보이고는 화필을 집어들었다. 약 반시간가량 애를 써봤으나 그림은 생각대로 되여주질 않고 기분만 잡쳤다. 승현이는 마음에 썩 들지 않는 그 속사를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그 무슨 보배라도 얻은듯 기뻐하며 그림을 돌돌 말아서 신문지로 정히 감쌌다. 그리고는 선물의 대가로 이후 휴식일마다 와서 모델을 서주겠다고 했다. 승현이는 입이 함박만해졌다. 그들은 후날 다시 전화로 련락하기로 하고 헤여졌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가 넘어있었다. 승현이는 약속대로 경호한테 전화하고 곧장 그리로 갔다. 경호가 사람좋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야, 어때? 오늘 기분이 몹시 잡쳤지?》
《뭘, 괜찮아.》 승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히죽 웃어보였다.
《어쨌든 내가 미안하구나. 공연히 숫총각의 가슴에 불을 질러놓구선 하하… 그런데 그 계집애가 전번까지 뭐 제법 만나볼 소릴하더니만 어저께 뭐 중매가 따로 들어왔다나. 그래서 약속을 못지켜 미안하다고 전화가 왔더라.》
《언녕 그럴줄 알았어.》
《참, 지금 계집애들은 저마다 눈이 이마에 붙었단말이야. 그런 애들은 아예 만나보지 않는것도 좋아. 그건 그렇구. 어쨌든 내 불찰도 있으니 내가 대신 사과하는셈치구 술이나 마시자.》
경호는 승현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복무원을 시켜 맥주와 안주를 가져오게 하였다. 경호가 새로 온 복무원이라며 덜밉게 생긴 어려보이는 녀자애를 불러 술을 붓게 하고는 승현이옆에 눌러앉히는바람에 술상은 그런대로 기분이 제법 무르익어갔다. 술이 거나해지자 경호는 또 음담해설에 열을 오렸다. 내용이라면 어느 녀자히프는 어떻구 가슴은 어떻구 하는 추잡한 소리들뿐이였다. 승현이는 옆에 앉아 얼굴을 붉히며 마지못해 술시중을 드는 아가씨를 물러가게 하고 문득 한마디 던졌다.
《야, 너 이번에 그 옥련이와는 정식이야? 장난은 아니겠지.》
경호는 처음에는 그저 어리둥절해서 무슨 말인가 음미해보는것 같더니 마침내 핫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승현이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정색하여 또박또박 다시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옥련일 진짜 사랑하는거야?》
《뭐? 사랑이 어쩌구 어째? 자식이 벌써 취했냐? 사랑 좋아하네. 야, 나 좀 물어보자 사랑이란게 도대체 뭐야? 히프냐? 아니면 젖가슴이냐? 응? 아니면 이런게야? 어 허허허…》
경호는 승현이의 찌르는듯한 눈길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어이없다는듯 웃기만하였다.
《솔직한 물음엔 진지하게 대답하는법이야.》
승현이는 맥주고뿌를 탁 소리나게 놓으며 경호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경호도 어지간히 정신이 들었는지 멀뚱한 눈으로 승현이를 마주보며 웃음을 거두고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거 있잖아. 내 볼바엔 옥련인 아주 순진하구 착해보이더라. 전에 네가 데리구 다니던 애들은 발뒤축에두 못가. 지금 세월에 그만한 애들보기 힘들단말이야. 너 이번에 그애하구 장난치지 마 응? 네가 아무리 녀자후리는 재간이 비상하다지만 이후에는 그만큼 훌륭한 애는 못만나. 이번만은 좀 진지하게 나와.》
승현이는 퍼그나 차분한 어조로 말을 맺으며 경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승현이의 말을 잠자코 듣고있는 경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한참 승현이를 가늠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너 옥련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응, 그래 좋아하구있어. 그러길래 빨리 서둘러 결혼하란말이야. 장난으로 대했다간 후회막급이니 정신차려 자식.》
승현이는 짐짓 느물느물 웃으며 경호를 약올렸다. 그러나 경호는 약이 오르기는커녕 고개를 젖히고 한참 낄낄 웃어대더니 이윽고 두손으로 턱을 받치며 실눈을 해가지고 입가에 야유비슷한 웃음을 띠웠다.
《어허, 재미있는걸, 너 그 말 정말이지? 내가 전번에 뭐라 하던? 자리를 피해주겠다니까 제쪽에서 화를 내가지구는 능청스럽게 쳇, 이제 와서 후회되냐?》
승현이는 대답대신 어금이를 지그시 물며 경호를 노려보았다.
《뭐, 그렇게 골났니? 분명히 말해줄게. 그 앤 나하구 아무 관계도 없어. 전에도 그랬구 지금도 마찬가지야. 딴 애들 경우같으면 언녕 해버릴수 있었지만 고아라서 그런지 좀 측은해지기두 하구… 그러니까 너 나 때문에 부담가질것 하나도 없어. 자신있으면 한번 멋지게 해봐. 성공여부는 너한테 달렸지…》
경호의 표정은 아까와는 달리 진지해보였다. 크지 않지만 서글서글한 두눈이 그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승현이는 마음속 깊이로부터 도전심같은것이 욱 올리밀며 묘한 흥분에 몸을 떨었다. 그는 경호한테 눈길을 떼지않은채 또박또박 내뱉았다.
《너 지금 그 말 네 입으로 했어?》
경호는 피씩 웃더니 이번에는 승현이를 눈박아보며 목젖에 힘주어 말했다.
《그래 절대 후회 안한다. 그런데… 난 아무래도 미심하단말이야.》
《뭐가?》
승현이가 공연히 눈섭을 치켜올리며 경호의 말에 그루를 박았다.
《글쎄 해내리라구는 믿는다만은…》
《그럼 좋다. 우리 한번 내기 하는게 어때? 내가 한달사이에 아니 열흘사이에 옥련일 내 사람으로 만들테니까. 너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
《어허, 그렇게 자신 있어? 오늘 너 완전히 딴사람이 돼보이는데. 그럼 어디 한번 열심히 해봐. 자, 너의 성공을 위하여 건배!》
경호가 맥주고뿌를 들어 승현이앞에 내밀었다. 승현이는 고뿌를 맞부딪치고는 벌컥벌컥 다 마신 다음 고뿌를 거꾸로 들어보였다. 경호도 인츰 빈 고뿌를 거꾸로 들어보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아침8시좌우. 종전처럼 승현이가 화실로 나갈 준비를 하고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아, 전화 받아라.》
《예. 누굽니까?》
《글쎄 처음 듣는 녀자 목소린데.》
승현이의 어머니는 수화기를 넘겨주며 궁금한 표정으로 살펴본다. 승현이의 목소리를 대번에 알아차린듯 상대방은 《선생님이시죠?》하고 확인해왔다. 《김승현입니다. 누구신지…》 엉겁결에 대답하여놓고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바로 알수 있었다.
《아! 옥련이구만. 어쩌다 이렇게 전화까지…》
승현이는 어느덧 흥분이되여있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까르르 웃어대는 소리가 귀맛좋게 울려왔다.
《호호, 제 목소리를 기억하시나보죠?》
《암, 날 선생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옥련이를 내놓구는 또 누가 있다구 허허… 나 이 김승현이 머리에 털나서 선생님소리를 들어보기는 옥련이한테서 처음이라니까. 근사한 직업도 없는 놈이 그런 존칭을 들을 자격이 없지만 옥련이가 그렇게 부르니까 어물쩍 수염 싹 씻고 들어주는거지 허허…》
《롱담 잘하시네요. 저 그런데 오늘도 그림 그리러 나갑니까?》
《당연히. 지금 바로 나가려던참인데…》
《오늘 휴식인데요. 제가 약속대로 그리로 갈가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마침 잘됐구만. 그러찮아도 요즘 한번 찾아보려던참이였는데 그럼 지금 인츰 올수 있겠소? 내가 마중 나갈게.》
《아니요. 어린애두 아닌데 마중은 무슨 마중. 제가 바로 갈게요. 그럼 잠시후 만나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기분이 좋아 입도 못다무는 승현이를 어머니가 지켜보시다가 끝내는 궁금한듯 묻는다.
《뉘집 색시길래 그렇게 입도 못다무냐? 누구니 응? 너 혹시…》
승현이는 어머니에게 익살스레 한쪽 눈을 찔끔 감아보이고는 신발을 꿰신고 허둥지둥 문을 밀고나갔다. 어머니는 시무룩이 웃으면서도 어딘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말없이 승현이를 눈바램했다.
화실에 도착하자 승현이는 소매를 걷어부치고 청소부터 하기 시작하였다. 쓸고 밀고 닦고 한참 분주히 뛰여다니다보니 얼굴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흘러떨어졌다. 승현이는 옷자락으로 땀을 훔치며 열려진 창문으로 옥련이가 나타날 곳을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길 저편에 눈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옥련이가 어지럽게 지나다니는 차량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승현이는 소리쳐 부르려다말고 돌아서서 땀배인 손바닥을 바지에다 문지르며 화실안을 휘― 둘러보았다. 별로 탐탁치 않은데가 없었다. 그는 다시 들뜨는 가슴을 가까스로 눅잦히며 의자에 앉아서 화구들을 챙기였다.
(이젠2층까진 올라왔겠지. 하나, 둘, 셋, 넷…) 어림짐작으로 거의 다 올라왔겠다고 생각하는데 때마침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이는 점잖게 목소리를 뽑았다.
《예, 들어오십시오.》
의식적으로 문쪽에 등을 돌리고 앉은 승현이는 청각으로 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에 잇달아 가벼운 인기척소리를 느꼈다. 그제야 승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누구?) 하다가 깜짝 놀란듯 몸을 일으켰다.
《어, 이거 벌써…》
《안녕하세요?》
옥련이가 허리를 갑삭해보였다. 승현이는 자리를 권한다 콜라병마개를 따준다 하며 한참 법석을 떨고나서야 제자리에 가앉아서 담배 한대를 피워물며 말을 건늬였다.
《휴식일에 편히 쉬게도 못하구…》
《뭘요…》
옥련이는 담담히 웃으며 화실벽에 란잡하게 걸려있는 그림들을 흥미있게 들러보았다.
승현이가 무슨 말을 할까 궁리하는데 옥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정식 그리겠습니까?》
《암. 이것 보우. 난 지금 만단의 준비가 다돼있잖소.》
승현이는 전날에 반듯하게 메워놓은 인물15호 캠퍼스를 손가락으로 탱탱 튀기며 말했다.
《이 옷맵시대로 괜찮습니까?》
옥련이가 옷매무시를 바로잡으며 조심히 물어왔다. 그녀는 오늘 새하얀 투피스에 깜장스커트를 받쳐입고있었다.
《미안하지만 덥기두 하거니와 또 그리기에두 그렇구 되도록 그 겉옷은 벗었으면 좋겠는걸.》
《예? 이걸요?》
그녀는 올롱한 눈길로 승현이를 쳐다보다말고 인츰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어서 쏘파에 걸쳐놓았다. 겉옷을 벗어서 로출된건 기껏해야 시원하게 드러난 목부위와 살짝 패운 앞가슴 그리고 희고 날씬한 두팔뿐이였다.
《그 옷 이리 주오. 내가 걸어놓을게.》
승현이는 다가가서 그녀가 넘겨주는 옷을 받았다. 물씬 풍겨오는 야릇한 체취에 승현이는 취한듯 주춤하다가 인차 옷을 옷걸이에 조심스레 걸어놓았다. 말없이 앉아서 콜라를 홀짝홀짝 마시는 그녀의 모습은 수줍음을 타는 첫날 색시 같았고 또 어찌 보면 철모르는 애된 소녀 같기도 하였다.
(어떡하나 이번엔 좀 그럴듯한 작품이 나와야겠는데.)
승현이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붓쥔 손을 화폭에로 가져갔다.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소음과 드문드문 빨각빨각하는 봇이 닿는 소리외에 화실안은 말그대로 물뿌린듯 조용했다. 반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승현이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참, 시간이 너무 갔구만 좀 휴식하오.》
겨우 자유를 얻은 옥련이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승현이곁으로 다가왔다.
《어떻소. 앉아있기가, 쉽지 않지?》
《다른건 괜찮은데 어쩐지 자꾸 졸립니다. 호호…》
《아하, 이거 벌써부터 졸리면 곤난한데. 미소짓는 미인을 그리려다 잠자는 미인을 그리겠는걸》
승현이의 익살에 옥련이는 시름없이 웃었다. 말그대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나는 녀인이였다. 승현이의 지꿎은 눈길에 쑥스러웠던지 옥련이는 여린 손으로 가볍게 얼굴에 부채질하며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지겨운 여름이 언제면 끝날가요?》탄식같은 말이였다.
승현이도 할 말이 궁했던지라 한마디 끼여들었다.
《글쎄, 옥련이도 여름을 싫어하는 모양이군.》
《저요? 예, 저는 무더운 여름보다는 차라리 차디찬 겨울이 더 좋습니다. 김선생은?》
《나? 난 어쩐지 가을이 제일 좋소. 황금의 계절이라서 그런지… 그런데 듣자니 나이 지긋한 분들은 보통 가을을 좋아한다더구만. 나두 이젠 반환갑을 맞아 그런지도 모르지.》
《아이, 또 웃기시네. 호호…》
옥련이는 허리를 잡고 까르르 웃어댔다. 승현이는 시무룩이 웃으며 한술 더 떴다.
《보통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뜨겁다던데 옥련이는 보나마나 마음도 인물처럼 고운 모양이군.》
《어머, 그렇게 보입니까? 헌데 전 그러지 못한걸요. 어떤 사람들은 절 보고 지독한 녀자라 한답니다. 호호…》
《뭐요? 아니 그건 어느 덜돼먹은 놈이 줴친 소리요? 양? 사람보는 안광이 그렇게 무디고서야 내 그 놈을 보면 그냥 콱…》
승현이는 자기가 모욕당한것마냥 격분해하며 주먹을 불끈 쥐였다. 그런데 옥련이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또 배를 잡고 까르르 웃었다. 눈에는 눈물까지 핑 돌고있었다. 한참만에야 겨우 한마디 주었다.
《호호호, 저의 아버지가 그랬답니다.》
《뭐? 아버지가?》
승현이는 그만 머쓱해져서 뒤더수기를 긁적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드디여 옥련이가 웃기를 그만두고 손등으로 눈굽을 찍으며 말했다.
《이젠 그만 시작해보자요.》
《좋소. 시작하기오.》
밑색을 한번 올리고나니 어느덧 점심때가 다되였다. 점심은 옥련이의 고집으로 그녀가 손수 라면을 끓여 에때웠다.
난생처음 예쁜 처녀가 끓여주는 음식을 먹어보는 승현이는 하나에 겨우1원정도 하는 라면이지만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맛갈스러웠다. 국물한방울 남기지 않고 게걸스레 말끔히 먹어버렸다. 오후 작업은5시가 훨씬 지나서야 끝났다. 승현이는 너무 빨리 흐르는 시간을 새삼스레 한탄하며 아쉬운대로 바레트를 정리하였다. 옥련이는 승현이의 뒤에 서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색을 게발라놓은것 같은 화면은 들여다보며 아무래도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승현이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서 옥련이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온 하루 까딱 않구 앉아있느라니 감옥살이하는 느낌이지? 허허, 자 배도 촐촐하겠는데 어데 가 저녁식사나 함께 하지.》
《아니, 전 집에 가서…》
《아하, 그러지 말구. 자 어서.》
승현이는 잡아끌고서라도 꼭 데리고 갈 잡도리였다. 옥련이는 못이기는척 따라나서면서도 나직이 말했다.
《자꾸 돈팔게 해서…》
승현이는 의식적으로 장소를 큰길에서 많이 떨어진 장사가 잘 안되는 음식점으로 잡았다. 저녁먹는것보다 조용한 자리에서 속심말이나 실컷하려는 심산이였다. 자리잡고 마주앉긴 했으나 할 말이 궁한지라 승현이는 그저 한숨만 풀풀 내쉬며 부지런히 담배만 피워댔다. 오도카니 앉아있던 옥련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담배를 너무 피우시네요. 담배가 건강에 제일 해롭다는데.》
그제야 승현이는 거의 다 피운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끄며 헤식은 웃음을 떠올렸다.
《글쎄 나쁘다는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두 내게는 이 담배가 제일 훌륭한 친구란말이요. 속상할 때는 같이 속태워주구 또 그림이 잘 안될 때면 기발한 생각두 떠오르게 하구 어쨌든 이 놈이 없이는 이제 아무 일도 못할것 같단말이요. 그리고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고싶은 일도 못하고 살겠소. 살아서 지랄 빼놓고 하고싶은 일이야 다해보구 죽어야지, 안그렇소?》
승현이의 한탄섞인 말에 옥련이는 아미를 숙인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듯하였다. 맥주와 안주 몇가지도 올랐다. 맥주를 두어잔 마시고난 승현이가 다시 침묵을 깨뜨렸다.
《저, 좀 궁금한게 있는데 아무렇게나 물어봐두 괜찮겠소?》
옥련이는 쥬스잔을 내려놓으며 승현이를 바라보았다.
《별게 아니구 경호를 어떻게 알게 되였소?》
《네, 그거요. 지난번에 제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남자생빈으로 온 그 분을 알게 됐습니다. 그날 저녁에 신랑집에서 오락을 놀 때 함께 춤을 추면서 통성명도 하고 그후부터…》
《아, 그랬구먼. 그래 지내보니까 경호 그 친구 어떻소? 괜찮은 친구지?》
《예? 글쎄요. 아직은 뭐 어떻다고 말하기는…》
그녀는 수줍은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입귀를 샐쭉거렸다.
《허허, 글쎄 이제 안지 얼마 안된다니까 그럴법두 하지. 그런데 그 친구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요. 그저 좀 배운게 없어서 드문드문 울뚝불뚝 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서 그렇지, 사람은 좋은 사람이요.》
승현이는 별 목적없이 경호에 대해 한바탕 자랑을 늘여놓았다. 경호와 한반에 다닐 때 재미있었던 일들이며 후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갈라진 일 지어는 둘이서 술먹구 취해서 무고한 행인을 붙들고 행패부리다 파출소에 같혔던 일까지 낱낱이 말해주었다.
옥련이는 그저 조용히 승현이를 마주보며 겨우 입가에 알릭락말락한 웃음을 지어내기도 하고 가끔은 고개를 까딱까딱해보일뿐 승현이의 말에 별로 흥미를 갖고있는것 같지를 않았다. 장황하게 말을 늘여놓은 승현이는 그만 멋적어졌다. 괜한 말을 하지 않았나싶었다. 방안에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드디여 옥련이가 담담한 어조로 침묵을 깨뜨렸다.
《저, 오해하고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전 경호씨에 대해서 뭐 별로 달리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그저 알고 지내는 친구로 례사롭게 편하게 생각할뿐입니다.》
《오, 그랬구만. 그런걸 난 또 괜히…》
승현이는 환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다가 그만 아래말을 까먹고말았다. 또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저, 아줌마, 여기 맥주 한병 더 줘요.》
이미 맥주 두병을 혼자서 다 비웠건만 승현이는 분위기가 어색하던차에 주방켠에 대고 소리쳤다. 알콜의 힘을 빌어 한번 용기내여 뭔가 말해보려는 심산이였다. 옥련이가 괜찮겠느냐는듯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있었다. 승현이는 히쭉 웃어보이고는 부질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는듯 지껄이였다.
《괜찮소. 이래 보여두 서너병쯤은 간단하게 재낀다니까.》
옥련이가 눈치빠르게 날라온 맥주병을 두손으로 곱게 받들어 고뿌에 그득이 부어주었다. 승현이는 아닌보살을 하고 맥주고뿌를 덥석 받아쥐고 들이켰다. 술맛이 과연 달랐다. 꿀맛같았다. 카― 이젠 용기가 날듯하였다.
《저, 옥련이 나한테 시집와주오…》
이야말로 중세기 구라파문학소설에서나 볼수 있는 기상천외의 청혼이였다. 옥련이는 그 말에 저으기 놀랐던지 두눈을 동그라니 뜨고 승현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타는듯한 눈빛에 질려서 그만 시선을 떨구며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씹고있었다. 승현이는 그렇게 한참 지켜보다가 긴 한숨을 내뱉았다.
《나두 주책없는 소린줄 알고있소. 하지만 나 이 김승현이 이렇게 보여두 무골충은 아니오. 다리 하나 못쓰는 병신이라도 아직 기가 죽지 않았단말이요.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기고만장에서 펄펄 뛰는 놈이란말이요. 철없을 땐 애들이 나를 병신이라고 멀리하거나 손가락질하며 놀려대면 난 서러워서 눈물도 흘리구 또 죄없는 부모님들에게 나를 왜 병신으로 만들었냐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소. 그러나 이젠 다 지나간 일이요. 이젠 난 남들이 병신이라고 코끝에 삿대질을 해도 그저 피씩 웃어버리고마오. 그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때마다 나는 거기서 힘을 얻소. 그들은 날 채찍질해주었소. 나로 하여금 더더욱 이를 악물고 분발하게 하였소. 그래서 난 종종 그 사람들에게 고마운 생각도 가져보오. 어느날엔가 그 사람들의 은혜에 보답하고야말리라 결심하였소.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나에게 이 세상을 이악스레 살아가려는 욕망을 심어주었기때문에 난 꼭 성공해내고야말거요. 아니 성공 못한다 해도 좋소. 실패도 달갑게 받아들일거요. 어느 성인이 한 말도 있소. 누구나 다 성공하는건 아니다. 그리고 성공했다 해서 꼭 행복한것도 아니다. 성공을 향해 걸어가는 그 과정이 바로 행복이고 참된 인생인것이다. 난 이 말을 믿고 있소. 하여 난 성공여부는 어떻든간에 내 인생의 종점까지 이악스레 걸어가고말거요. 그리고 그때에 가서 난 내가 걸어온 외다리인생을 돌아보며 행복을 느끼리라 믿소. 무엇보다도 나는 그 누구 못지 않게 일생을 떳떳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거요. 어떻소? 옥련이, 내 인생의 길동무가 되여주지 않겠소?》
마침내 말을 마친 승현이는 퍼그나 흥분되여있었다. 그는 다시 불처럼 이글거리는 두눈으로 옥련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옥련이는 물기 그득한 두눈으로 승현이를 마주보며 듣고있다가 눈을 살풋이 내리깔았다. 작은 입술을 옴쫄거리기만할뿐 쉽게 열지 않았다. 승현이는 너무 서두른것 같은 생각이 들어 게면쩍은 웃음을 띠우며 변명하듯 말했다.
《허, 이거 워낙 급한 성미라서, 이 자리에서 대답 안해도 괜찮소. 그저 편한대루…》
옥련이는 그제야 가벼운 한숨과 함께 눈길을 들어 승현이를 마주보았다. 얼굴은 어느새 능금알처럼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꽤나 곤욕을 치른모양이였다.
한편 승현이는 이번에도 영낙없는 실패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말없이 맥주 한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완전한 패잔병 꼴이였다. 방금까지도 의기양양하던 그 모습은 오간데 없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빨아대며 발끝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저, 그럼 이만 일어나봐야겠습니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지 옥련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일어섰다.
《어? 그래, 일어나야지.》
승현이는 불에 덴 사람처럼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며 반사적으로 시계를 본다.
《집에 가 좀 생각해보고 다음 수요일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승현이의 두눈은 반짝 빛났다.
승현이는 집이 시교에 있다는 옥련이를 기어이 택시에 앉힌 다음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바램하고나서 자리를 떴다.
요즘 승현이는 마음이 착잡하여 무슨 일을 하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일여삼추같은 시간이 너무 지겨웠다.
드디여 바라던 수요일이 왔다. 승현이는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객실에 가서 전화기만 지켰다. 그러나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해가 빠알간 노울을 지피며 서산으로 기울도록 싱거운 전화 몇통 내놓고는 고대하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승현이는 끝내 맥을 버리고 맹랑한듯 자기 방에 들어가 벌렁 드러누웠다.
(쳇, 두꺼비가 고니고기를 먹겠다고 날뛰였으니…) 승현이는 중얼거리며 입을 쩝쩝 다셨다.
이때 전화벨소리가 울려왔다. 승현이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듯 귀를 틀어막고 몸을 돌려누웠다. 한참만에 방문이 빠끔히 열리더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승현아. 전화 받어라.》
《제 전화요? 누굽니까?》
승현이는 속이 떨리면서도 별로 시답지 않은듯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글쎄다. 녀자목소리인데. 전번에 전화 왔던…》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바쁘게 승현이는 화들짝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객실로 뛰쳐나갔다. 그러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도 놀랐는지 혀를 끌끌 차며 타이르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애두, 웬 성미가 저렇게 급한지. 다칠라 조심하잖구 쯧쯧…》
《여보세요?》
승현이는 수화기를 잡기 바쁘게 목청이 높아짐을 인식하고는 진정을 하려는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쪽에서 주춤하는것 같더니 한참만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려왔다.
《아이참. 목청도 높네요. 고막이 터지겠습니다. 호호…》
《그래, 지금 거기가 어디오?》
《여기요? 공중전환데, 한신아빠트 압니까? 그 부근…》
《그래? 좋소. 까딱말구 거기 있소. 곧 갈테니까.》
《네? 지금 오시겠다구요? 저, 시간도 늦었는데 그러지 말구 래일 만나는게…》
《아, 글쎄 꼼짝말구 그 자리에 있으라니까. 내 지금 바로 갈게.》
승현이는 상대방의 대답은 기다릴념도 않고 일방적으로 송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주섬주섬 옷들을 챙겨입었다.
택시를 잡아탄 승현이는 공연히 마음이 들떠있었다. 어쩐지 직감적으로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있는것 같았다. 옥련이가 꼭 대답하리라고 믿어졌다. 그래서 승현이는 몇번이고 택시기사를 독촉하며 한신아빠트에 도착하였다. 낮게 드리운 밤장막속에 옥련이가 공용전화박스옆에 몸을 기대고 서있있다. 승현이가 도착한줄도 모르고 오가는 차량들을 살피고있었다. 승현이는 장난기가 피끗 들어 공용전화박스뒤로 에돌아가서 슬그머니 옥련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란 옥련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려 곱절이나 커진 두눈으로 승현임을 확인하자 가슴을 내리쓸며 눈을 곱게 흘킨다.
《어머나, 사람 놀래워 죽이겠습니다. 아이, 심장이야.》
그리고는 봉창이라도 하려는듯 종주먹을 쥐고 승현이의 어깨를 콕콕 쥐여박아주었다. 승현이는 피할념도 하지 않고 능그러운 웃음을 띤채 가만히 들이대고있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 나란히 발길을 옮겼다. 딱히 어디로 간다는것도 없었다. 말없이 무작정 걷기만하였다. 어느덧 슬며시 기여든 땅거미가 두사람의 그림자를 삼켜버렸다. 한참 걷다보니 강뚝으로 뻗은 오솔길에 접어들고있었다.
《허, 달이 밝구만.》
허두를 떼며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에는 달은커녕 별빛 하나 찾아볼수 없었다. 빛이라면 저앞 강뚝길에서 가물거리는 가로등이 희미한 빛이나마 은근히 뿌려주고있을뿐이였다. 승현이는 머쓱하여 옥련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승현이가 난처해할가봐서인지 가볍게 웃는듯하더니 잠자코 걸었다.
《어험, 저 전번에 내가 묻던가 생각이 정리되였소?》
승현이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물음을 내뱉았다. 옥련이는 멈칫하는듯싶더니 머리를 다소곳한채 걷기만하였다. 승현이는 그 자리에 떡 버티고섰다. 확실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옥련이, 속시원히 말 좀 해주오.》
마침내 옥련이가 살며시 돌아섰다. 두사람의 거리가2―3메터정도. 어둠이 깃들었어도 대방의 표정을 어림짐작으로나마 느끼기에는 충분하였다. 옥련이의 눈길이 승현이를 응시하고있었다. 두눈에서는 작은 불꽃 한쌍이 밤하늘의 별찌마냥 반짝 빛나고있었다. 승현이에게는 이 짧디짧은 순간이 정말 숨막히게 답답한 순간이였다. 담배를 찾아물었다.
《호호호…》
갑자기 옥련이가 웃어댔다.
(참, 남은 속이 타서 재가 되는데 웃기만하다니.)
승현이는 옥련이를 마주보다말고 라이타를 담배문 입가에 갖다댔다.
《어쩌면 그렇게도 눈치 무딥니까?》
《뭐, 뭐라고?》
승현이의 입에 문 담배가 떨어졌다.
《방금 뭐라고 했소? 눈치 무뎌? 아니, 그럼…》
승현이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꿈이 아니지, 꿈이면 제발 깨지 말아다오.)
두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엎어질듯 두팔을 쩍 벌리고 옥련이를 향해 덮쳤다. 추호의 주저도 없이 용맹하게 덮쳤다. 그리고는 꼭 끌어안았다. 으스러지게―
《어머나! 누가 보면…》
옥련이는 속삭이듯 말하며 승현이의 품안에서 바둥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뿐 나중에는 아예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이게 정말이요? 응, 옥련이가 나한테 시집오겠단말이지?》
승현이는 옥련이의 얼굴을 꿰뚫어보며 확인하려는듯 다시 물었다. 그녀는 수줍은듯 머리만 살짝 끄덕이였다. 맑은 물줄기가 승현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절절한 환희의 눈물이였다. 옥련이도 어느새 돌아서며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고있었다.
그날 승현이는 처음으로 옥련이의 집안래력과 그의 현상황을 다소 알게 되였다. 그녀의 집은 워낙 화룡의 어느 진에 있었는데 한때는 그 지방에서도 뜨르르하게 잘산다고 소문난 집안이였다. 그런데 한번은 오빠가 무슨 큰 장사를 한답시고 헤덤비다가 크게 사기당하여 졸지에 망해버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뇌익혈로 병원에서 돌아가시고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도 한달만에 아버지를 따라 북망산으로 떠나셨다 한다. 오빠는 그뒤로 행방이 묘연하고 그때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는 연변대학에서 공부하는 남동생을 뒤바라지 해주느라 연길에 남아 어느 개인이 꾸리는 유치원에서 림시로 밥벌이를 했단다.
며칠후 승현이는 옥련이를 집으로 데려가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인사시켰다. 이번에는 정말 며느리 될 사람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승현이의 부모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더니만 옥련이의 가정상황을 들어보고는 혀까지 끌끌 차며 동정하였고 그녀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고생하며 자란 사람이 먼저 셈이 든다고 하시며 승현이의 어머니는 그녀를 친딸처럼 극진하게 대하였다. 그날 저녁 시간도 늦었고 또 승현이의 지꿎은 청구와 부모님들의 만류에 옥련이는 승현이의 집에 하루밤 묵게 되였다.
승현이의 방에 들어간 그녀는 수줍은듯 침대 한모퉁이에 오도카니 앉아서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승현이는 침대머리에 있는 탁상등빛을 약간 어둡게 조절하여놓고는 그녀의 옆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그녀가 살며시 눈길을 들어올렸다. 두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불꽃이 튕겼다. 승현이는 그녀의 여린 어깨를 두손으로 잡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 이젠 쉬지…》
옥련이는 머리를 숙인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뭔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이윽고 결심한듯 상큼 일어서서 웃옷만 달랑 벗어놓고는 도로 앉아버렸다. 승현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허, 이대로 잘거요? 걱정마오. 나 옥련이가 허락하기전에는 손끝하나 다치지 않을거요.》
그제야 그녀는 좀 안심된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돌차게 말하는것이였다.
《그럼 좀 뒤로 돌아서시겠습니까?》
승현이는 어이가 없다는듯 팔짱을 낀채 돌아섰다. 돌아선 순간 승현이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그가 돌아선 곳은 바로 옷장문에 달려있는 커다란 거울앞이였던것이다. 뒤에서 들려오는 사르락사르락하는 옷벗는 소리와 함께 거울속에 그녀의 일거일동이 낱낱이 비껴있었던것이다. 마침내 브래지어와 팬티만 달랑 남은 몸이 쫓기우듯 이불안으로 숨어버리자 승현이는 끝내 참았던 웃음을 터쳐버리고말았다. 침대에 벌렁 나자빠지며 박장대소하는 승현이를 보며 그녀는 어리둥절해하였다. 승현이는 키득거리며 손가락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그제야 영문을 알아차린 그녀는 발끈하고 상체를 일으키며 승현이의 뒤잔등에 종주먹질을 해댔다.
《아이, 나쁜 사람. 음특하기도 하여라. 미워요.》
승현이는 재미있다는듯 껄껄 웃으며 고스란히 맞아주다가 몸을 홱 돌려 그녀의 두손을 잡고 마주보았다.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엷은 브래지어속에서 투명한 두 봉오리가 관능적으로 흔들리고있었다. 승현이의 눈빛에서 뒤늦게야 로출된 상체를 의식한 그녀는 당황한 얼굴빛이였다. 드디여 승현이가 그녀의 두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옥련이, 뭐 이럴게 있소. 우린 이제 어차피 같이 살 사람이요. 날 믿지 못하겠소. 내 눈을 똑바로 보오. 그래도 믿지 못하겠으면 난 객실에 나가 자겠소.》
그녀는 마침내 아래입술을 꼭 깨문채 승현이의 눈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은 승현이를 빨아들이고있었다.
《옥련이. 사랑하오.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하여 기다린 눈초리를 파르르 떨더니 눈귀로 맑은 구슬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야들야들한 뺨을 적시며 입귀로 스며들었다. 빼내려던 두손의 힘이 스르르 풀린다. 승현이는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난생처음 녀자의 몸을 다루어보는 승현이의 행위는 거칠고 서툴기만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은 폭풍이 휩쓰는 순간, 뢰성이 울부짖는 순간이였다.
삶의 희열이라는게 아마도 이런 느낌이리라. 생사를 뛰여넘는 순간이 바로 이런것이리라. 몸부림을 치며 생과 사를 넘나드는 용사마냥 승현이는 그대로 함몰하여 들어갔다. 자신의 온몸이 그녀의 몸속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였다.
가벼운 흐느낌소리에 함몰했던 승현이는 다시 자신을 찾았다. 옥련이가 고개를 외로 젖힌채 어깨를 가볍게 들먹이고있었다.
《왜 그래? 내가 너무 괴롭혔어?》
승현이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는 고개만 흔들어보였다.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이날 이때까지 고스란히 지켜오던 녀자의 제일 소중한것을 잠간새에 몽땅 빼앗겼으니 충분히 리해가 갔다.
《바보같이 울긴, 다 알아. 그리고 고마워. 나같은 병신도 인간으로 대해줘서. 그러나 너무 슬퍼하진 마. 나 이 김승현이가 이래봐두 한번 맘먹으면 끝까지 해내고마는 성미야. 내 이제 전업을 더 악착스레 해서 돈 많이 벌어가지구 옥련이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녀자로 만들어줄게 응? 내 말 믿지?》
승현이는 그녀의 두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어린애 얼리듯 익살까지 부렸다. 이슬이 가랑가랑 맺힌 두눈으로 승현이를 이윽히 바라보던 옥련이는 울먹이는 소리로 《행복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간신히 말하고는 승현이의 가슴에 파고들며 더 세차게 흐느껴 울었다.
《어허, 아직두 선생님이라니 참, 옥련이 이제부터 우린 한몸이요. 그러니 이젠 선생님이요 뭐요 하는 소린 싹 집어치우고 차라리 여보라든가 아니면 당신이라든가 하는게 좋지 않을가? 더 친절해보이게 응? 자, 어디 한번 불러보지 응? 어서.》
승현이는 옥련이의 등을 다독여주며 말했다. 한참만에 울음을 겨우 그친 그녀는 승현이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나지막하게 《여보》하고는 쑥스러운듯 다시 승현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승현이는 만족한 웃음을 띠고 옥련이를 꼭 껴안은채 행복에 취하여 꿈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이튿날아침 뒤늦게 승현이가 객실에 나가보니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시다말고 승현이를를 보고 말없이 시무룩이 웃어주었다. 그리고 주방에서는 어느새 그렇게 끔찍해졌는지 옥련이가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며 뭐라고 쉴새없이 도란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이는 히죽 웃으며 아버지와 의미있는 눈길을 마주치고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청신한 아침공기가 확― 하고 다가왔다.
(아!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구나.)
그날부터 옥련이는 승현이의 집에서 아예 함께 살다싶이하였다. 집이라고 돌아가봤자 텅 비여있고 또 동생은 학교기숙사에 있었기때문에 집에가도 별로 할 일이 없었던것이다. 게다가 승현이와 그의 부모님들의 청구도 그렇고 해서 옥련이는 그냥 못이기는척 눌러있게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그녀는 다니던 유치원의 경기가 그닥 좋지 않아 무기한 방학을 했다면서 출근도 하지 않았다. 그에 더없이 좋아한건 물론 승현이였다. 그것은 매일 옥련이와 같이 있는것도 있지만 또 그녀가 아예 자기의 직업모델이 되여줄수 있다는 기쁨에서였다.
옥련이와 동거하는 사이 승현이의 신체에는 미묘한 변화들이 모름지기 일어났다. 그녀가 온 사나흘부터인가 승현이는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나고 몸이 자꾸 가라앉는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들었다. 이상했다. 잠자리에 너무 관심이 지나쳐서 그런가보다― 좀 적응되면 괜찮겠지 하고 자신을 위안하면서 증상이 나타날 때면 랭동한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곤 하였다. 그러고나면 좀 괜찮아진듯싶었다. 아닌게아니라 한 일주일후부터는 그 증상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역시 그랬구나 하며 승현이는 더한층 무한한 행복에 도취되였다. 온 세상을 다 얻은것 같은 느낌이였다. 그리고 그는 옥련이를 데리고 외할머니네 집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모집까지 친구들한테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라는듯이 자랑하고싶어서였다.
그녀의 유일한 친척이란곤 고모네 집에도 갔었다. 그날, 한쪽 다리를 삐걱거리며 들어서는 승현이를 보고 옥련이의 고모와 고모부는 그저 멍하니 그녀만 쳐다보고있었다. 맹랑한 모습들이였다. 승현이는 별로 개의치 않고 그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꾸벅 절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인사 늦었습니다. 옥련이의 일생을 책임질 사람입니다.》
그 거동에 옥련이의 고모와 고모부는 더구나 당황해서 서로를 마주보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마침내 간소한 술상이 차려졌다. 차려온것이란 거의 전부가 옥련이와 승현이가 사들고 온것들이였다.
《자, 한잔 받으십시오. 그냥 고모부라 부르겠습니다.》
고모부란 사람도 성품은 어진 모양 그저 사람좋게 빙긋 웃더니 잔을 받아 단숨에 굽냈다.
《감사합니다. 고모부.》
승현이는 진심으로 사례하고는 술병과 빈잔을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고모가 술을 못한다고 마구 손을 내저었다.
《고모님, 이 술을 꼭 받아야 합니다. 못난 놈이지만 곱게 봐주십시오.》
옥련이의 고모는 마지못해 술잔을 입에 댔다 떼였다. 그리고 잔을 도로 넘겨주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생원두 성격 하나 통쾌해 좋구만.》
《예, 그저 다리 하나 병신일뿐이지 다른건 나무랄게 없습니다.》
승현이는 옥련이의 고모에게 벙긋 웃어보이고는 웃방으로 올라가앉았다. 고모부도 그의 소탈한 성격이 마음드는지 벙글벙글 웃으며 승현이에게 맥주를 그들먹이 부어주며 말했다.
《몸이 좀 그러면 뭐라우. 서로 떠받들구 잘살면 되지. 자― 우리 한잔 할가?》
《예, 말씀 고맙습니다. 저― 우리 한잔 합시다.》
《허허, 그래그래. 우리야 뭐 별게 있소. 어쨌든 둘이서 맘맞춰 잘살길 바라오.》
그리고는 부엌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조카사위될 사람이 왔는데 거 닭이라도 하나 잡아야지.》
《예― 그러찮아도 지금 나가려던참인데요.》
옥련이의 고모부 내외의 간곡한 만류에 못이겨 승현이는 시골의 정취를 한껏 즐기며 이틀간 묵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날 저녁무렵 경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경호의 목소리임을 알아채는 순간 승현이는 아차하는 생각에 미처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경호와는 보름이 넘도록 련락을 못했던것이다.
《야, 너 듣자니 요즘 재미 좋다면서 자식. 아무리 녀자에게 미쳤기로 전화 한통 없어?》
경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엔 노기가 어지간히 배여있었다.
《어, 경호구나. 그게 아니구 사실은…》
《아니긴 뭐가 아니야. 긴 말 할것 없구 지금 바로 이리와. 기다릴게.》
승현이가 뭐라고 주어댈 사이도 없이 수화기에서는 뚜―뚜 하는 신호소리만 우려나왔다. 승현이는 서둘러 나갈 차비를 했다. 옥련이가 누군가고 묻는 말에 경호라고 말하자 그녀는 흠칫하는것 같더니 불안한 표정으로 승현이를 바라보다가 인차 안방으로 들어갔다. 부랴부랴 경호네 뀀점에 도착해보니 경호는 이미 술상을 차려놓고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있었다. 승현이가 들어서는걸 보고 경호는 그저 입귀를 실쭉하며 턱짓으로 맞은켠자리를 가리켰다. 승현이는 자리에 앉으며 경호의 기색만 살폈다. 기색이 썩 좋지 않았다.
《어때? 녀자 재미 괜찮지? 이젠 너두 숫총각의 때를 다 벗었겠구나. 응? 흐흠. 어쨌든 난 이번에 너한테 두손 바짝 들고말았어. 정말이야. 그저 장난칠려니 하고 우습게 생각했더니 너 수단 한번 대단하더라 응? 하하하…》
《!》
승현이는 한대 얻어맞은것처럼 뗑해났다.
《뭐? 장난칠려니 했다구? 아니, 이건…》
승현이는 혀끝까지 나온 말을 도로 삼키며 잠자코 경호를 노려보았다. 둘은 소리없이 대방을 노려보기만하다가 드디어 경호쪽에서 피씩 웃으며 승현이에게 맥주를 부어주었다.
《자식, 됐어. 정색하긴. 롱담 좀 해봤다. 허, 어쨌든 잘됐다. 축하한다. 그리구 이 술은 내가 내는거야. 너의 용기 한번 봐주는 의미에서. 첫잔은 깐베이!》
그제야 승현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뿌를 맞들었다. 경호가 시물시물 웃으며 지껄여댔다.
《야, 근데 너 참 보기하구 다르더라. 녀자하군 아예 담쌓구 사는줄알았더니 언제 그런 수단을 배웠니? 응? 궁금한데. 그래 그 애보구 도대체 뭐라구 하니까 네 품에 착 안기던? 재미 있었겠는데. 허허, 어디 한수 가르쳐주지 않을래?》
승현이는 시무룩이 웃고나서 어물어물 말했다.
《뭐, 수라는게 따로 있나. 그저 각자의 마음에 맡겼을뿐이지.》
《핫하하, 자식. 거짓말 해두 눈 한번 깜박하지 않네. 임마 지금이 어느때라구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니? 마음 흥, 량심도 개떠주는 세상에…》
술이 꽤나 잘된듯 경호는 이미 어지간히 취한듯했다. 경호를 보고있노라니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머리를 쳐드는 죄의식을 끝내는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보니 옥련이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 승현이를 기다리고있었다.
《왜 여직 안자구있었소?》
《예, 저 잠이 안와서요.》
《왜 내가 보구싶어서? 허허…》
승현이가 지껄이는 소리에 옥련이는 말없이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걱정스레 물어본다.
《저, 식사는 제대로 하셨습니까? 제가 뭘 갖춰올가요?》
《아 됐어, 늦었는데 그럴것 없구 자, 이리 와 앉소.》
승현이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앉아서 승현이의 취기오른 얼굴을 내려다본다. 승현이는 마주보다말고 그녀의 어깨를 한팔로 감싸서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스르르 무너지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왔다. 배냇머리같이 보드라운 머리칼이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코끝을 간지럽혔다. 승현이는 한껏 숨을 들이그었다 내뿜으며 속삭이였다.
《옥련이, 우리 이번 국경절에 결혼해.》
옥련이가 흠칫하며 머리를 든다. 두눈은 놀란 사슴마냥 말똥해졌다. 이윽고 옥련이가 고개를 외로 틀었다. 한참만에는 어깨를 들먹이였다. 울고있었다.
그바람에 승현이는 당황해났다.
《갑자기 왜 이래?》
옥련이는 몸을 돌려누우며 승현이의 품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울먹이며 간신히 말했다.
《흑― 흑. 미안합니다. 전 너무 행복해서 그럽니다.》
승현이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그녀의 뒤잔등을 다독여주며 달랬다.
《바보같이 울긴. 행복하다면 웃어야지. 옥련이 지금 마음 나두 알아. 후, 글쎄 뭐가 모자라서 나같은 병신에게 시집오겠느냐만은 걱정하지마. 난 앞으로 꼭 옥련이에게 그 손해를 보상해주고야말거야. 부실한 다리대신 뭔가를 꼭 보상해주고야말겠어.》
《아니, 그게 아닙니다. 그저…》
옥련이가 변명하듯 인차 울음을 그치고 이슬이 가랑가랑 맺힌 두눈으로 승현이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니면 됐어. 이제 우린 행복할거야. 음, 노래 하나 해줄까?》
승현이는 목청을 가다듬고나서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낮게 곡을 떼였다.
《내 가슴에 묻혀 꿈을 꾸는 그대여
야위여진 그댈 바라보니 눈물이 솟네
고왔던…》
승현이는 노래를 못다 부르고 꿈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이튿날오전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난 옥련이는 시골 고모네 집에 가서 며칠간 일손을 돕고 오겠다며 떠났다. 그렇게 떠난지 일주일후에야 돌아왔다.
그동안 그녀의 몸은 퍽 축해져있었다. 어머니는 옥련이의 축간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연신 《괜찮냐? 어디 아픈데는 없니?》하며 걱정스레 물었고 아버지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옥련이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걱정스러움이 력력히 찍혀있었다.
저녁상은 어머니가 무척 신경써서 갖춘 모양. 여느 설날 못지 않게 푸짐히 차려졌다. 어느결에 사왔는지 찰떡도 있었고 큼직한 잉어도 올라있었다. 어머니는 연신 색다른 음식들을 부지런히 옥련이의 접시에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옥련이는 마지못해 몇술 뜨는척하더니 좀 일찍이 쉬고싶다며 곱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승현이도 뒤미처 밥술 놓고 일어나 방으로 따라들어갔다. 방문을 떼고 들어서던 승현이는 흠칫했다. 그녀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채 가볍게 어깨를 들먹이고있었던것이다. 승현이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옥련이, 어떻게 된거야?》
옥련이는 더 세차게 흐느끼기만할뿐. 승현이는 그저 잠시 지켜보고만있었다. 한식경이 지나 옥련이의 오열이 멈춰졌다. 이윽고 옥련이는 엎드린채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나서 몸을 돌려왔다. 그녀의 속눈섭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있고 눈은 충혈되여 빨개져있었다. 흐느낌이 꼬리를 끌고있는 입술은 옴쭐옴쭐 움직이고있었다.
《이젠 다 울었어? 대체 무슨 일이야?》
승현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
《죄송합니다. 눈물 보여드려서…》
그녀의 말에는 울음끝의 여운인지 또다시 흐느끼는것 같았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옥련이가 뭘 잘못했길래 그냥 죄진놈처럼 맨날 죄송해요 감사해요 따위의 말을 입에 달구있는가말이야 엉? 옥련이는 이제 내 녀자야. 그리구 난 옥련이의 남자구. 우린 서로를 돌봐주구 보살펴줄 의무가 있어. 식을 안올렸을뿐이지 우리 이제 엄연한 부부야, 부부. 알겠어? 이제부터 내앞에서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 따위의 말은 다시 입밖에 내지 마 알겠어?》 승현이는 어지간히 화가 나있었다. 처음 한두번은 의례 그렇겠지 하고 스쳐지났지만 차수가 늘어감에 따라 공연히 이상한 기분이 머리를 어지럽히군 했다. 그것도 평소에는 깔깔거리며 시름없이 뛰놀다가도 승현이가 조용히 가슴에 닿는 속심말을 해주거나 정성스레 애무해주거나 할 때면 꼭꼭 한번씩 눈물을 보였고 심하면 오열을 터치며 통곡까지 해대군 했다. 그래서 번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행복해서요》 혹은 《감사해요》, 《미안해요》따위의 대답뿐이였다. 아무리 눈물 흔한 녀자라지만 옥련이의 경우는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옥련이는 겨우 모기소리만하게 《예, 다시는 안그럴게요.》하고 대답하고는 승현이한테로 몸을 돌렸다. 가느다란 손길로 승현이이 마비된 다리를 어루쓸며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만일 제가 언젠가 당신을 떠난다면 어떡할렵니까?》
《뭐? 롱담이라도 그런 소린 하지마. 떠나긴 어딜 떠난다구 그래? 내가 이렇게 꼭 붙잡고 놓지 않는데. 우린 영원히 이렇게 꼭 붙어서 함께 살거야. 그 누구도 내옆에서 옥련일 앗아가지 못해. 알겠어?》
창문밖 검푸른 하늘에서 낫날같은 쪼각달이 미약한 빛이나마 은근히 뿌려주고있었다.

이튿날 옥련이는 동생보러 갔다오겠다며 아침 일찍 나갔다. 그런데 저녁때가 다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였다. 원래 있던 세집에도 가보고 다니던 유치원에도 가보았으나 아무데도 없었다. 온 집식구가 한창 애를 바질바질 태우고 있을 무렵 승현이의 화실이 있는 그 건물접수실에서 편지가 왔다는 전화가 왔다.
(웬 편지가 그리로 올까?)
부랴부랴 달려가보니 접수실령감이 겉봉에 그저 《김승현》이라고 이름만 달랑 쓰인 편지를 건네주면서 어제점심쯤에 한 처녀가 놓고 갔다는것이였다. 두툼한 속지를 뽑아보니 정성들여 박아쓴 글씨체가 두눈을 파고들었다.
《그날 밤, 제가 한 약속을 어기고 또다시 죄송하단말부터 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없이 조용히 떠나가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로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습니다. 우리는 시작부터가 전부 거짓이였습니다. 처음부터가 경호라고 하는 그 짐승보다 더 추악한 인간이 조작해낸 음험한 연극이였습니다.
선생님이 외국에 가서 돈을 벌고 돌아왔다는 그자와 우연히 만난 그때부터 일은 꾸며진것 같습니다. 그들은 선생님네 부모님들이 한국에서 돈 많이 벌어왔다는걸 넘겨보고 그때부터 계획적으로 선생님께 접근했던것입니다. 경호란 자가 어릴 때부터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는게 그들에겐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였겠지요. 그래서 경호는 더 한층 선생님과 친근해진겁니다. 그리고 녀자애들을 부지런히 소개해댄것도 또 저를 우연히 만나게 한것도 다 그들이 꾸며낸 일장 악몽같은 연극이였습니다.
저의 집안래력은 전에 말씀드린것과 거의 같습니다. 전 확실히 동생을 데리고 있는 고아입니다. 다만 우리 집안이 몰락하게 된 리유는 단순히 오빠가 장사를 하다가 망해버려서 그렇게 된게 아닐따름입니다. 저의 오빠도 워낙은 그들과 친구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빠는 당초에 그들이 한개 무시무시한 마약밀수집단이란걸 몰랐습니다. 오빠는 그들의 유혹에 못이겨 차츰 마약에 손을 대더니 얼마 안지나 인이 배이고말았습니다. 그때 집에서는 전혀 그런줄 모르고있었습니다. 차츰 집에서 돈달라는 성화가 늘어가고 그 액수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약 일년간 지나니까 오빠는 어느새 집안의 저금통장 같은건 몽땅 털어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문서까지 훔쳐다 놈들에게 전당잡히고 마약을 피웠습니다. 드디여 우리 집은 오빠손에 꼼짝 못하고 망해버렸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저에게 여린 동새을 떠맡긴채…
제 동생도 연변대학 다니는게 아니고 금방 열살난 철부지로서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저도 모르고있습니다. 그저 이따금 전화로 살아있다는 소식만 듣고있을뿐입니다.
집안이 몰락하자 저는 이를 악물고 어린 동생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게된겁니다. 그때 금방 사범학교를 나온 저는 낮에는 유치원에 나가고 저녁에는 노래방에 다니며 손님의 술시중을 드는 아가씨노릇을 했습니다. 모든 굴욕을 무릅쓰고 악착스레 돈을 벌었습니다. 오직 집안 유일한 희망으로 남은 남동생을 공부시켜 출세시키려구요.
그러나 악마의 손길은 끝내 저희 오누이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8월중순의 어느날, 자정이 넘어 경호란 자가 패거리 셋을 데리고 저희 세집에 뛰여들었습니다. 언제 빚졌는지 오빠의 손도장이 박힌3만원 되는 빚문서를 내놓으며 빚을 갚으라고 을러메였습니다. 제가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우리 집을 그렇게 망하게 하고도 무엇이 성차지 않아서 이러는가고 악을 쓰고 발악했으나 그들은 듣는척도 않고 집안을 두루 살펴보더니 잠에서 놀라깬 제 동생을 보더니 동생을 살리고싶으면 시키는대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다짜고짜 동생을 끌고나갔습니다. 저느 그만 무릎꿇고 빌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동생을 잃는다는건 제가 죽어서도 황천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님께 용서받지 못할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키는대로 뭐든지 다할테니 제발 동생만을 살려달라고 애걸했습니다. 경호란 자는 저를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고거 인물 한번 써먹게 생겼구나〉하면서 다짜고짜 덮쳐들어…
저는 그렇게20여년간 고이 지켜오던것을 그런 짐승같은 놈에게 빼앗기고말았습니다. 놈은 수욕을 채우고나서 래일 어디로 나오면 사람 하나 알게 하겠으니 모든 방법을 다해서 접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자기와 련락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성사되면 빚을 면해주고 동생도 돌려보내겠지만 저때문에 잘못되면 동생은 자취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거라고 위협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튿날 만난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저의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한건 선생님과 후에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수있는 장소를 마련하기 위한 핑게였구요. 선생님의 불구라는것때문에 좀 측은한 생각도 들고 주저심도 들었지만 오직 동생을 살리려는 의욕에서 저는 갖은 방법을 다해 선생님을 접근했습니다. 선생님은 너무 쉽게 저를 믿고 받아주었습니다.
제가 선생님 집에 머물게 되자 경호는 저에게 마약을 주었습니다. 매일 정량으로 선생님 마시는 물에 타넣으라고 했습니다. 처음 며칠 속이 떨렸지만 시키는대로 하고말았습니다. 며칠후에 선생님이 약반응을 보이자 저는 스스로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진지한 사랑과 지극한 관심, 그리고 부모님들의 극진한 보살핌에 저는 주저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동정으로부터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였습니다. 저는 나머지 마약을 몽땅 하수도에 처넣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품에 안겨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너무나 짧디짧은 나날이였지만 저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나날들이였습니다. 저는 그런대로 그 시간과 공간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것이 한스러웠습니다.
드디여 제일 무서워하던 시각이 닥쳐왔습니다. 경호가 전화온 날이였지요. 그 전화는 오래동안 련락없는 저보고 련락을 취하라는 암시였습니다. 그리고 또 선생님이 마약인이 배였는지 알아보려는 심산도 있었겠구요. 제가 그날 밤 잠못이루고 고민하고있을 때 선생님이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내심으로 크나큰 갈등과 그리고 동생을 잃을 고통에 모대기며 장밤 소리 못내고 눈물로 지세웠습니다. 선생님을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기때문입니다.
이튿날 경호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경호는 추잡한 말로 지껄여대더니 〈너 그냥 그러구있다간 네 동생도 오라지 않으면 마약중독자가 되고말것이다〉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경호한테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경호앞에 무릎꿇고 빌었습니다. 제발 불쌍한 승현씨만은 놓아달라고, 그가 당신하고 무슨 원쑤를 졌길래 그렇게 해야만 하느냐고. 다른 상대로 바꾼다면 서슴없이 할수 있다고. 승현씨만은 내 손으로 그런 구렁텅이에 밀어넣지 못하겠다고. 손이 발이 되게 빌었습니다. 경호는 말없이 듣고있다가 발길로 저를 걷어차며 말했습니다.
〈그래, 승현이는 내 친구야. 네 말대로 걔한테 죄가 없다. 그러나 죄라면 그 애네 집에 돈많은것이 죄가 되겠지. 너 볼라니까 동생을 살릴생각이 없는것 같은데 좋다. 너 마음대로 해봐. 그 병신하구 살겠으면 마음대루 살아봐.〉
저는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잠시나마 감정에 집착하는 자신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무사하다는것만 알게 해달라. 그러면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경호는 차거운 웃음을 지으며 어디론가 전화했습니다. 삐삐를 호출하는것 같았습니다. 잠시후 걸려온 전화에서 저는 동생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전화에서〈누나, 나 무서워. 빨리 날 데려가줘. 빨리〉하고 울먹이였습니다. 동생전화를 받고나서 경호는 저에게 특제한 담배를 몇갑 주면서 그걸 선생이 피우는 담배와 바꿔놓으라고 했습니다. 쉽게 인이 배일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걸 받아들고 곧추 시골고모네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선생님네 집에서 나올 때 시골로 간다고 한 말도 있고 또 혼자서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싶어서였습니다. 시골에 내려가 있는 일주일동안 저는 실성한 사람처럼 매일 강가에 쭈크리고앉아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느님은 왜 이리 불공평한지? 동생과 선생님 둘중에 저는 한가지밖에 선택할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동생을 구하자면 선생님은 물론이고 선생님네 온 집안까지 몰락할것이고 선생님을 택하자니 저희 가족의 유일한 기둥인 동생을 잃어야 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문인지 저는 끝내 마음을 모질게 먹었습니다. 동생을 구하는 길을 택한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만에 선생님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저녁상에 마주앉는 순간 저는 또 약해지는 마음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저를 친딸보다 더 지극히 대해주시는 부모님들의 은혜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크나큰 사랑에 저는 끝내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저에게 모조리 터득케 해준 선생님과 부모님들의 은혜에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한 인간으로서 어찌 배은망덕하게 그들을 해칠수가 있겠습니까?
하여 오랜 생각끝에 선생님과 동생 둘중에서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될 저의 립장으로서는 이 길을 선택할수밖에 없었던것입니다. 이 험악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떠나는것이 제가 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인것입니다. 선생님과 부모님들의 크나큰 사랑을 가슴가득이 간직한채 떠나갑니다. 선생님이 크나큰 사랑을 가슴가득이 간직한채 떠나갑니다.
선생님의 크나큰 사랑에 미처 보답도 못한채 이렇게 총망히 떠나가야만하는 저의 처지를 리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은 불구가 아니였습니다. 이 세상 어느 건전한 사람보다 더 건강한 삶의 강자였습니다. 선생님은 꼭 성공하실겁니다. 선생님이 성공을 빌고빕니다.
만일 래세가 있다면 꼭 다시 선생님과 부모님들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가서 못다한 정성 끝까지 다하겠습니다.
그럼 기약없는 래세를 기대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아버님 어머님께 삼가 큰절 올립니다.
사랑했어요. 여보…
옥련 절필.》

온통 눈물로 얼룩진 편지가 승현이의 손에서 맥없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초점잃은 두눈길은 멍하니 하늘로 향한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드디여 몸중심이 휘청하더니 털썩 꿇어앉았다.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은채 《으으윽》하는 신음소리를 뿜어내더니 이윽고 머릴 젖히고 피터지는 괴성을 내지르고말았다.
《안돼! 아니야! 옥련아 이 바보야, 그럴수가 없어! 흑, 거기가 어떤 길이라구. 나같은 병신때문에 죄없는 네가 그런 길을 가다니 안돼! 어허헉― 나같은 병신이나 일찌감치 죽을 일이지 아무 죄없는 네가 어찌 그런 길을 간단말이냐? 으― 흐흐흑…》
그의 히스테리적인 거동에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호기심어린 눈길로, 측은하고 동정어린 눈길로 지켜보고있었다.
주위의 시선과 수군대는 소리를 의식해서인지 한참만에 승현이는 팔소매로 얼룩진 얼굴을 쓱 문지르며 우뚝 일어섰다. 굳어진 얼굴은 험상스레 일그러져있었다. 두주먹은 불끈 쥐여져있었고 두눈은 보기에도 섬찍할만큼 차디찬 섬광을 내뿜고있었다. 그것은 마치도 이리의 번뜩이는 살기찬 눈빛과도 같은것이였다. 뿌드득하고 소리나게 이를 악물며 승현이는 비틀거렸다. 무거운 걸음걸음마다에는 그 어떤 비아한 결의가 찍혀있었다.

그뒤로 얼마후 승현이는 도시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경호도 사라져버렸다. 승현이가 어디서 무얼 하고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일년에 한두번정도 그의 부모님앞으로 주소도 없이 《김승현》이란 이름만 달랑 쓰인 엽서가 가끔 보내진다고 한다.

99년11월 북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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