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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익모초
2020년 12월 29일 09시 28분  조회:608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아버지는 익모초


방금숙


셋째딸의 병을 치료해주느라 생전에 정성을 다한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도 딸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했는지 양지바른 묘지 우에 익모초로 피여났다.
70년대 중반, 내가 집체호에 나갔을 때의 일로 기억된다.
“공업에서는 대경을 따라배우고 농업에서는 대채를 따라배우며 전국에서는 해방군을 따라배워야 한다.”는 모택동동지의 지시에 좇아 전국 농촌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고조가 기세 드높게 일어났다. 우리 공사에서도 그 지시를 높이 받들고 ‘자력갱생, 간고분투’라는 대채정신에 따라 제1생산력인 청년돌격대를 조직하여 대채전을 만드는 농토 기본건설이 궐기하였다.
나는 공사의 요구에 좇아 공정지휘부의 방송사업을 맡게 되였다. 낮에는 여러 대대 로동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취재를 하고 밤이면 원고를 써서 이튿날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을 리용하여 방송을 했다. 취재와 방송의 편리를 위하여 나는 공정지휘부와 가까이에 있는 한 집체호에 거처를 정하게 되였다.
십평방메터가 되나마나한 작은 방에서 글을 쓰면서 잠을 자군 했는데 내가 자는 잠자리는 온돌이 아닌, 랭기가 심한 차디찬 세멘트바닥이였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내왔지만 한달이 지나니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쑤셔났다. 더군다나 매달 월경이 올 때면 일을 할 수 없으리만치 생리통이 극심했다. 그래도 일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던지라 신경을 쓰지 않고 요행을 바랐다. 헌데 날이 갈수록 증상이 점점 심해져 아예 꼼짝을 못하게 될 줄이야!
마지못해 병원에 갔더니 몸이 몹시 랭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나중에 결혼을 해도 잉태를 못한다나? 녀자로서 임신을 못한다는 게 얼마다 끔찍한 일인지 어린 나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였지만 부모님 립장에서는 딸의 혼사가 달린 문제인지라 소식을 전해듣고는 란리도 아니였다.
셋째딸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아버지가 손 놓고 가만히 앉아있을 리 만무했다. 여기저기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대증을 하고 약을 지어오는가 하면 수소문하여 랭증에 좋다는 토방법을 알아보고 약을 만들어준다면서 동분서주하였다.
어느 날, 내가 취재를 끝내고 점심 때가 다되여서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집체호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뜻밖의 상봉이였던지라 반가운 나머지 나는 어린애마냥 달려가 아버지 품에 폴싹 안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초조하고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얼굴이 적잖게 축이 갔구나. 익모초를 달여 만든 거다. 잊지 말고 하루에 세번씩, 한번에 대여섯알씩 챙겨먹어라. 그리고 이건 토끼 가죽으로 만든 방석이다. 토끼가죽이 습기를 막아주는 데 그저그만이라고 하더라. 잘 때는 허리 밑에, 앉아있을 때는 엉덩이 밑에 깔고 있거라.”
약과 방석을 받아안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아버지가 그동안 새벽 이슬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익모초 한아름을 등에 지고 구불구불한 산비탈길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화면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익모초 잎과 줄기를 깨끗하게 다듬은 후 해볕에 살짝 말리워서 엿처럼 끈적끈적하게 달인 다음 귀한 피나무꿀을 얻어다 넣고 찹쌀가루를 뿌려 반죽하고 나서 동그랗게 환을 지으면 익모초환약이 된다. 익모초가 환약으로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이 깃들었을지 나름 짐작이 가기에 가슴이 더 알짝지근해났다.
하루중 토끼가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가장 즐겁다던 아버지였다. 닭 모가지 한번 비틀어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이 딸을 위해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를 손수 잡아 가죽방석을 만들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조용히 머리를 돌렸다.
마침 점심 무렵이라 나는 아버지를 잡아끌고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졸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페를 끼치기 싫다면서 기어코 내 손을 뿌리치고 둘째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보노라니 마음이 더없이 아련해났다. 그 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뒤모습이 그렇게 쓸쓸해보였다.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왼손에 쥐여있는 손수건으로 가끔씩 땀을 훔쳤다. 직업병으로 인해 약간 올라간 오른쪽 어깨, 훌쩍 걷어올린 바지가랭이, 색 바랜 국방색 운동화… 아버지는 이따금씩 뒤돌아보며 나 보고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여덟 식솔의 생계를 짊어진 아버지는 아픈 몸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가족을 위해 한몸을 바쳤다. 재단사로 일하면서 낮에는 무거운 가위를 들고 하루종일 힘들었을 법도 한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닭을 치고 돼지먹이를 만들어주느라 밤중까지 쉬지 못하면서 나와 오빠의 대학공부 뒤바라지까지 해주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의 손바닥은 온통 장알투성이였다.
얼마 뒤 나는 집체호를 떠나 대학에 가게 되였는데 숙사생활을 하면서 다시한번 랭증이 도졌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제철이 되면 익모초를 뜯어다 약을 만드는 일이 아버지의 일상이 되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때가 되면 미리 만들어두었던 약을 나에게 보내주군 하였다.
그 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여 떡두꺼비같은 아들까지 보게 되자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손주까지 보았으니 아버지도 이젠 천륜지락을 누릴 일만 남았으려니 했는데 아이를 낳으면서 제왕절개 수술을 했던 수술자리에 염증이 생긴 데다 산후풍까지 겪으면서 신음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다시한번 수심에 잠겼다. 산후 후유증으로 허리통증이 심하여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고 심지어 아이를 안지도 업지도 못하였다. 나의 산후병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여기저기에 부탁하여 곰열을 얻어왔고 또다시 딸을 위해 익모초환약을 만들어주었다.
1984년 4월 30일, 이 날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겨 약보따리를 이고 새벽차로 룡정에 있는 우리 집으로 왔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선 지 얼마 안되여 갑자기 우리 교연실 조장선생님이 찾아왔다.
“방선생 어머님, 금방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방선생 부친이 갑자기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나는 와들짝 놀라 조장선생의 팔을 잡고 다시한번 물었다.
“예? 뭐라구요?”
“방선생 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셨답니다.”
“아니, 새벽까지도 멀쩡하던 분이 이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어머니도 믿을 수 없다는듯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를 바래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나는 조장선생님의 손을 잡고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고 여러번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터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뻐스 정류소로 달려갔다.
거동이 불편하여 아버지 장례식에마저 참가할 수 없었던 나는 집에 홀로 남아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가 몇해전부터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머니가 곁에 계셨더라면 이렇게 돌아가지 않았을 거야… 그래, 다 내 탓이야. 내가 이렇게 드러눕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을 거고 어머니가 오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도 돌아가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 때문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 내 삶이 힘들다는 핑게로 아버지가 그토록 즐겨 마시는 술 한번 사드린 적 없고 반반한 옷 한견지 해드리지 못한 채 아버지를 이렇게 떠나보내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여름이였다.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갔던 어머니는 눈앞의 광경에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묘지가 온통 익모초로 덮여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딸의 아픔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가 라는 생각에 어머니는 그 익모초를 베여다 달여서 약을 만들어 나에게 보내주었다.
어느 해 추석, 나는 오래간만에 동생네 내외와 함께 고향의 앞산 양지바른 언덕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의 묘는 온통 익모초로 덮여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달려가 묘 앞에 꿇어앉았다. 흘러간 세월 동안 가슴에 맺힌 한과 아픔이 눈물비가 되여 볼을 타고 쏟아져내렸다.
우리는 익모초꽃을 조심스레 베여 아버지 묘지 주위에 둥그렇게 둘러놓았다. 이윽고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 드시던 음식과 과일들을 제사상에 올려놓고 삼배를 올리였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나도 어느덧 60 고개를 흘쩍 넘겼지만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골수에 사무친다. 올해도 아픈 딸이 걱정되여 어김없이 묘지에 익모초를 피워주신 아버지, 아버지의 산소가 자리한 동남쪽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하해같은 그 사랑에 다시한번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멘다. 그 사랑 이름하여 익모초라 부르고 싶다.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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