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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 있는 인생
2020년 12월 29일 09시 31분  조회:627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보람 있는 인생


김인섭


어제저녁 녘, 먹빛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우뢰를 동반한 소나기가 퍼붓더니 야밤에는 장대비로 홀변하여 쏟아져내렸다. 그런데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시꺼멓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듯 해맑게 뒤바뀌고 창공은 푸르다 못해 감청색을 토하며 쨍쨍한 초가을의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끌리기라도 한듯 부랴부랴 뒤산으로 산책을 떠났다. 수림 속에 들어서니 나무잎새 사이로 불어드는 시원한 바람과 땅에서 풍겨나는 부식토 냄새가 풀향기, 꽃향기, 솔향기와 한데 어우러져 야릇하게 후각을 건드려왔다. 무성하게 우거진 각가지 활엽수와 침엽수들은 이름 모를 관목, 화목들과 키재기를 해가며 수풀을 이루었고 빽빽한 진록색 잎사귀들은 바야흐로 다가오는 세찬 대사순환을 예고하고 있었다. 가을의 이 신기한 연출이야말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며 인간에게 하사하는 대자연의 선물더미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인간세상에 태여나 한살, 두살 나이를 먹다보니 어느새 내 인생에도 가을빛이 짙어지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는 건 본시 피치 못할 생명법칙이거늘 그래도 무병장수를 기대하게 되는 게 사람의 본능인가 보다. 요즘 사람들이 100세 시대란 말을 끼니 때 밑반찬처럼 입에 올리고 있는 세태도 이런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유하여 적지 않은 친구들이 60대는 새로운 황금기인 만큼 나만의 꽃을 다시 피워야 한다고 소리높이 웨친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요즘 들어 육신이 자꾸 무거워지고 운신이 시원치 않은가 하면 아련해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혼신을 버둥거려야 할 상황에 처해버린 것 같다.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고 리유없이 우울해지는 날들이 늘어만 가고 따라서 희로애락이 점철된 세상을 애타게 살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오가는 차수도 많아진다. 어쩌면 인생의 가을은 대자연의 가을과 좀 다른 이색 풍경을 연출하는듯 싶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소속된 집단을 사랑하였고 남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리치로 자신을 채찍질했다고 자부한다. 나름 대로 목표를 만들고 모범생처럼 살아보려는 료량으로, 부모님과 우수한 인물들을 귀감으로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며 살았다고 자식들과 자랑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아, 빈곤, 고독, 질병, 슬픔, 리별, 유혹 등 구곡간장을 녹이는 구간을 수없이 넘나들었지만 때로는 환희로 넘치는 넓은 평야를 지난 기쁨도 있었다. 이젠 사회활동이 대폭으로 줄어들고 어깨에 놓인 부담도 그만큼 적어지자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머리에 자주 떠오르면서 나이가 들면 추억에 산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아침해살이 대지를 비추고 더위가 몰려오니 부랴부랴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시장에서 때거리와 찬거리를 마련해오는 이웃집 할머니를 만나 짐을 들어주고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타지에 출장 갔다 2개월 만에 돌아와 만나는데 무척 반가워하면서 오늘은 돌아간 남편의 소상 준비로 제물을 사오는 참이라며 이야기보따리를 열어제꼈다. 듣고 보니 할머니의 남편은 작년 이맘때에 별세하셨고 그 때 역시 해외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와서야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뒤로부터 나는 홀로 계시는 할머니의 신변사에 관심을 갖게 되였으며 만날 때마다 가담항설로 환담을 나누었는가 하면 부탁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으라고 호언장담까지 했다. 최근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아침시장에 나가는 할머니를 도와 물건을 들어드리는 수호천사로 나섰다. 간단한 배려라도 하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났다.
할머니와 이같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 내가 이 동네로 이사 온 바로 그 때부터였다. 이사 온 지 딱 2주 만에 나는 3년 남짓한 기간을 외지에 가 근무하게 되다보니 집에는 여든을 넘긴 로모가 손자를 보살피며 남아있게 되였다. 로모가 일가 살림을 떠메고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야채를 비롯한 식재료나 소비품 등 생필품들을 사들이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지나지 않았다. 로모에게는 하루중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가장 유쾌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정도 외출이면 건강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일 수 있더라도 로모에게는 상당한 고역이 동반되였다. 집과 시장의 왕복 거리가 대략 1,000메터인데 그 사이에 150메터 정도의 완만한 경사로가 있다는 게 골치거리였다. 늙으신 몸으로 이 구간을 지나가려면 적어도 두번 이상은 쉬여야 했으니 로모로 말하면 고난의 행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할머니의 남편이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는 시간만 되면 늘 그 언덕길에서 짐을 받아서는 집까지 모셔다 드리군 했는데 내가 부재한 몇년간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르신의 은혜로운 처신에 더없이 감동을 받고 내가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려고 몇번이고 말을 건넸는데도 아는 체하고는 낯선 사람 피하듯 옆걸음 치며 가버리군 하는 것이였다. 그래도 락심하지 않고 인사라도 할가 해서 로모한테 슬쩍 물었더니 술은 마시는 걸 못 봤는데 담배를 그렇게 자주 피운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권연 몇갑 챙겼다가 피우라고 드렸더니 담배라곤 입에 대지도 않는다며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였다. 그렇게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 전해주지 못한 채 존경스러운 어르신과 영영 리별을 하고 말았다. 어르신도 즐거운 만남이 나쁘진 않았을 텐데 아둔한 내가 다가가는 방법에 서툴러서 이런 애석함을 남긴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젠 나의 진정을 전할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이름 못할 회한이 감돌군 한다. 그래서 그 보귀한 인연을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 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어둠이 내리면 홀로 계시는 할머니의 집 창문을 멀리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겨난 것도 그후부터였다. 창문에 불빛이 어른거리면 안심이 되고 어둠에 싸여있으면 이름 모를 걱정에 휩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작은 수고로움이 어쩌면 할머니의 외로움이나 어려움을 얼마간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어르신이 하던 방식 대로 할머니가 아침시장에 갈 때마다 물건을 들어서 집까지 바래주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였다. 그렇게라도 할머니한테 나의 온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어르신이 생전에 베푼 진정에 얼마간이라도 보답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뿌듯했다.
물질의 대소가 인간 뉴대관계의 강약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는 세월이다. 심지어 친척,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도 친정과 애정을 전달하는 방식에 실리적 수단이 따르지 못하면 연분이 희박해지는 시대가 되였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금전만능의 시대라도 순수한 마음 하나만은 절대 잃지 말기를 바란다. 떠나는 친구를 위해 준비한 물 한병, 빵 한조각 그리고 손수건 한장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이란 게 녹아있다. 아무리 간단한 배려일지라도 진정만 담겨있다면 받는 사람의 감동도 배로 늘어나게 되여있다. 요즘 우리는 물질적으로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그로부터 즐거움과 안위를 느끼는 사람들 앞에서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눈이 어두웠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난다.
이젠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날을 량적으로 계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을 확실히 헤아려야 한다는 의식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다. 포부를 높이 웨치면서 무엇을 시도하기보다 자기의 분수에 알맞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갈수록 명확해진다. 특히 육신의 부분품들이 하나둘 신음을 하는 상황에 몰리고 보니 자기의 처신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의 후반전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열어가야 할 것인가? 물론 매개인이 처한 상황과 삶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에 그 감수도 천태만상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재부, 정감, 건강의 완미한 결합이라는 일반론도 있지만 이런 존재들이 행복과 절대적인 등호를 이루는 건 아니다. 지난날 남겨진 후회나 앙금을 최소화시키고 세세한 삶의 현장에서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가?
인생의 가을은 만화(晚花)를 피우는 귀중한 시간이다. 고마운 이들을 잊지 말고 이미 맺은 인연을 잘 지켜나가며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어가는 것, 이러는 과정에서 나만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으려 한다.

《로년세계》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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