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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보상
2018년 11월 09일 11시 26분  조회:685  추천:1  작성자: 현백

1

“어머니, 언제까지 혼자 사시렵니까? 50년 가까이 혼자 고생만 하셨는데 누가 보상해주겠습니까! 이제라도 반려자를 만나 여생을 행복하게 살면 좋잖아요!”

“…그래!50년을 기다렸으면 됐다. 그분을 만나보자!”

“네?! 정말입니까?”

“휴-그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분 참 좋은 분이십니다. 정말 아버지로 모시고 싶은 분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일제가 패망하기 바로 전해에 일찍 생계를 위해 동네 장정 몇몇과 함께 조선으로 품팔이를 떠났다가 조선반도가 광복을 맞고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련락이 끊겼다. 아버지가 몇몇 아저씨랑 함께 길을 떠나던 날의 정경은 어린 내 뇌리에도 깊이 새겨져 5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9살배기, 6살배기 아들 둘을 품에 안고 어머니는 기약없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안고 굳건히 견디던 어머니였다. 그 후 조선전쟁이 발발했고 3년 재해를 겪었으며 문화대혁명도 지나갔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아버지에 대한 기약없는 기다림은 명멸하는 불씨처럼 어머니 마음속에서 차츰 사그라들었다. 때이른 나이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는 아버지를 가슴에 묻은 채 이를 악물고 나와 어린 동생을 홀로 수십년을 악착같이 키우셨다. 우리가 장성하여 좋은 대학을 나오고 가족을 이루기까지 어머니는 량부모 가족 부럽지 않게 우리를 잘 키우셨다. 그리하여 나는 사법국 국장으로, 동생은 문화국 국장으로 승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고희를 훌쩍 넘길 때까지 어머니는 홀로 지내셨다. 마침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스승님이며 선배님이신 김국장님께서 상처하신 지 일년이 넘어서 아버지로 모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를 설득하려 하였는데 이렇게 쉽게 동의할 줄은 정말 뜻밖이였다. 그동안 숱한 중매가 들어왔지만 번번이 거절하던 어머니였으니 말이다.

“정말이지요? 말하면 말한 대로 해야 합니다?!”

“정말이라니까. 나도 김국장이 사람 좋은 건 잘 알아. 비록 저세상 문턱이 멀지 않았지만 남은 세월 동안 내 지난 인생을 보상받고 싶구나!”

“참, 기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만 이렇게 쉽게 동의할 줄은 정말 생각 밖입니다.”

“차차 알려주마. 그 원인을…”

나는 리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이 생기고 또 어머니가 홀로가 아닌 여생을 살 수 있다는 데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2

몇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께서 우리 형제를 불렀다.

“너희들에게 할 말이있다.”

“왜 이렇게 진지하십니까?”

자못 진지한 어머니의 안색에 우리 형제는 어머니 앞에 다소곳이 모여앉았다.

어머니는 서랍에서 편지봉투 같은 것을 꺼내더니 우리 앞에 밀면서 말씀하셨다. “사실은 말이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있다.”

“네?!” 우리 형제는 이구동성으로 놀라서 되물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니요?”

“그래, 그런 줄만 알고 50년 세월을 견뎌냈지. 그런데 몇년 전에, 그러니까 너희가 김국장을 아버지로 모시기로 한 한달 전에 남조선 리산가족찾기 본부에서 편지가 왔었어. 너희 아버지가 거기서 새 가정을 이루고 잘살고 있다고 하더구나.”

“네? 그런데 왜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그때는 중한 수교도 맺지 않았고, 너희들이 당원이며 또 단위에서 중임을 떠메고 있어서 여러모로 고려가 많았다. 그래서 말을 못했지. 그리고 50년을 생과부로 살아온 내 인생이 억울하고 우리를 버리고 잘살고 있는 너의 아버지가 괘씸해서 늙은 나이에도 재가를 간 것이였다.”

“그러면 지금 알려주시는 리유는 뭡니까?”

“이제는 수교도 이루어져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고, 또 너희들에게 아버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싶어서 더 늦기 전에 알려주는 것이다.”

나와 동생은 편지를 읽으면서 묘한 감정에 휩싸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마침 퇴직할 나이도 되였으니 이 참에 아버지를 만나뵈러 한국에 다녀올가 합니다.”

“나도! 나도 한국에 가 보렵니다. 마침 한국과의 문화교류박람회가 있는데 겸사겸사 아버지를 뵙고 올게요.” 동생도 덩달아 들떴다.

그러자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쉬면서 말씀하셨다.

“얘들 봐라, 언제 아버지 얼굴을 봤다고 이러는 거냐? 섭섭하다. 50년을 키워준 엄마를 버리고 정도 없는 아버지한테로 간다고? 갈 테면 어서 가거라!”

동생과 나는 당황하며 어머니를 달래였다.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생전에 아버지 얼굴을 한번이라도 뵈는 것이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낳은 정도 정이잖아요.”

그러자 어머니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보이며 말씀하셨다.

“그래, 나는 김국장과 만년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걱정 말고 가보아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 않았더냐. 미우나 고우나 너희들을 낳아준 아버지가 아니냐!”

 

3

몇달 후 나와 동생은 들뜬 마음을 안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나이 환갑이였지만 기억 속 희미한 아버지를 처음 만난다는 기쁨에 아이처럼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동생도 그러했을 것이다.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마치고 대기실에 들어서니 우리 형제 이름을 적은 패쪽을 든 중년 남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가서 인사를 했더니 “형님, 오빠” 하면서 반갑게 악수를 청한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이복동생들이였다.

동생들의 얘기를 들으니 아버지는 조선 광복 전야 남까지 내려왔다가 전쟁통, 란리통에 그만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버려서 하는 수 없이 거기에 눌러앉았다는 것이다. 조만간 길이 열리려니 하고 기다리기를 십여년,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아버지도 지금의 착한 새어머니를 만나서 가정을 꾸렸다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얘기를 자주 하셨다고 한다. 우리 형제 얘기도 자주 하셔서 참 보고 싶었고, 이렇게 형님, 오빠가 생겨서 참 좋다고 하였다. 그동안 아버지가 왜 우리를 찾지 않았냐고 서운한 말을 했더니 아버지는 늘 우리를 찾고 싶어했지만 중한수교 전까지는 찾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리산가족찾기 본부에 행여나 어머니와 우리 형제를 찾는 글을 보냈는데 몇년 전에 어머니와 련락이 닿았다는 것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덧 강남의 화려한 아빠트단지에 자리잡은 이복동생네 집에 도착하였다. 처음 보는 동생네 가족들이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하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내가 물었다.

녀동생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아버지께서 로환으로 지난달에 돌아가셨습니다.”

“뭐, 뭐라고?!”

아버지를 찾아 들뜬 마음으로 먼 길을 달려온 우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아버지는 중병은 없었지만 년세가 많으셔서 기력이 쇠약해지셨어요. 지난달에 외출하셨다가 층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척추를 다치셨는데 운신을 못하시니까…”

녀동생의 말에 우리 형제는 넋을 잃고 말았다. 50년을 애타게 그리던 아버지였는데 멀리 이국타향에 찾아와서도 뵙지 못하고 령정과 마주하게 되다니…

넋놓고 있는 우리 형제를 다독이며 남동생이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형님들을 찾은 건 천만다행입니다. 큰어머니와 형님들은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자, 이걸 받으십시오. 아버지께서 남기신 유산입니다.”

남동생은 아버지의 유서와 통장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아버지의 유서를 읽어보며 눈물을 흘리던 나는 통장을 펼쳐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액수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아…”

나와 동생은 입을 딱 벌리고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아버지께서 평생 모으신 유산입니다. 저희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지만 형님들은 아버지 없이 얼마나 힘들게 사셨습니까? 50년 세월의 보상으로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모든 유산을 형님들에게 드리고자 우리 오누이는 뜻을 모은 지 오래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장도 있고 아직 젊었으니 유산 없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 말에 나와 동생은 이복동생들을 번갈아보다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연변일보 2018년 11월 9일 제6면 해란강문학에 발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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