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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문) 玄氏姓의 渊源에 대한 초보적 탐구--성원작성
2012년 07월 14일 19시 03분  조회:3458  추천:1  작성자: 성원
연주玄氏 유래

高麗大将军-門下侍郞平章事-侍郞公 玄覃胤
朝鲜(韩)系 玄氏는 侍郞公 玄覃胤(기원12세기중엽)을 시조로 모신다.
朝鲜(韩)系 玄氏는 연주(延州)를 통일本貫으로 한다. 연주(延州)는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옛 이름이며 영변은 영주(迎州)와 무주(撫州)의 합쳐진 지명이다. 970년(고려 광종 21) 연주(延州)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으며, 995년(성종 14)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공민왕 때 연산부(延山府)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개편되었다. 무주는 고려의 운남군(雲南郡)인데 995년 무주방어사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태주(泰州)로 이속되었고, 1391년(공양왕 3) 감무(監務)를 두면서 태종 때 무산현(撫山縣)이 되었다. 1419년(세종 11) 연산과 무산을 합하여 영변(寧邊)으로 개칭하고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세조 때 다시 연주(延州)를 나누어 운산군(雲山郡)에 속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영변군으로 개칭되었다.
侍郞公 玄覃胤은 원래 平安道 延州 출신으로서 조실 부모하고 가세가 넉넉치 못하였다. 八、九세 때부터 몸집이 웅장하고 지혜와 용맹이 출중하였으며 성장 하면서 경서를 널리 보고 춘추좌전과 손자, 오자병서를 즐기여 다 읽은후에 탄식하며 하는 말이 《나라가 다사다난한 이때에 남아 대장부가 어찌 집에서 글만 읽고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그때부터 분연히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부지런히 익히였다.
延州 剑阁山 깊은 골짜기는 나무숲이 우겨져서 밤에는 사람들이 다니기를 꺼려하는 곳이였다. 侍郞公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玄覃胤이 어렸을때 하루는 혼자서 이 剑阁山에 들어 가게 되였는데 산속에서 날이 저물어 그만 캄캄한 밤이 되였다. 이때 시커멓게 생긴 산귀신이 나타나 《현장군님께서 오셨다》하고 놀라면서 저절로 횃불을 들고 公의 앞길을 인도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때에 이미 장차 高麗大将军으로 될 玄覃胤의 담략과 기백은 귀신도 겁을 낼 정도로 대단하였다는 뜻이이리라.
玄覃胤이 19세가 되도록 아직 장가 드지 못했는데 북방의 羯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소란을 피워댔다. 이에 격분한 玄覃胤은 자체로 의병을 일으키여 시끄러운 외적을 멀리 쫓아버리고 국경을 평정하였다. 高麗毅宗은 이를 가상히 여기여 특별히 상을 내리고 玄覃胤을 延山府使로 제수하였으며 친히 명문거족의 규수를 택하여 결혼하게 주선하였으니 그때로부터 玄覃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玄氏姓이 처음으로 高麗관적에 오르게 된것이다.
中国 송나라에서는 女真의 란이 일어나 高麗에 지원병을 청구하게 되였다. 玄覃胤은 援兵大将军으로 임명되여 지원병을 이끄고 中国에 출전하여 大功을 세우고 개선하였다. 그리하여 송나라 황제는 玄覃胤에게 큰상을 내렸으며 또 특별히 사신을 高麗에 보내와서 玄覃胤의 공덕을 치하하였고 벼슬을 크게 올려줄것을 高麗임금에게 극구 권유하였다. 그후 玄覃胤의 벼슬은 여러번 올랐다.
(公의 이상의 사적은 《高麗名臣录》에도 기록되여 있다.)
그러나 玄覃胤은 왕실정국의 혼란함을 혐오하여 모든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玄覃胤은 옥녀봉 밑에 별장을 한채 축조하고 그대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高麗明宗四年(기원1174년)에 서경류수 趙位寵이 역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키여 巴岭이북을 누리떼처럼 휩쓸어 나가니 40여개성의 성주들이 모두 임금을 배반하고 분분히 반역군에게 투항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玄覃胤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결연히 대의를 선택하여 延州성을 지키는 장군을 설득하여 얼마 안되는 군대를 점검하여 가지고 두 아들과 함께 선뜻이 반역군 토벌에 나섰다. 이에 趙位寵은 크게 겁을 먹고 유혹과 위협수단을 써 가면서 玄覃胤을 매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玄覃胤은 단연히 거절하고 반역군과 완강히 싸워서 4전4승함으로써 趙位寵의 기세를 여지없이 꺾어 놓았다. 玄覃胤의 높은 덕망과 출중한 智勇에 탄복한 이웃의 금나라 임금은 스스로 자기의 장수와 지원병을 파견하여 玄覃胤을 도와주게 하였다. 玄覃胤은 두 아들과 함께 금나라 지원병과 협동작전하여 끝내는 반역군 괴수 趙位寵을 잡아 참살함으로써 나라를 구해내고 또 한번 大功을 세웠다. 그리하여 玄覃胤의 벼슬은  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延山君에 봉해졌으며 두 아들도 모두 높은 벼슬을 제수받았다.
(玄覃胤의 이 사적은 《高麗史》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 이후 현씨가 크게 성장하는 것은 玄覃胤의 세 아들이 중앙정부에 진출하면서 부터이다. 장남 현덕수(玄德秀)는 연주분도장군(延州分道將軍) 김치규(金稚圭)가 그의 총명함을 눈여겨 보고 개경(開京)에 데리고 올라와 공부를 시켰으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병으로 귀향하였다가 1174년(명종 4)에 서경(西京)에서 조위총(趙位寵)의 난 때 아버지 玄覃胤과 함께 연주성(延州城)을 굳게 지켜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내시지후(內侍祗候)가 되었고, 이후 안남도호부부사(安南都護府副使), 도관낭중(都官郎中), 병부낭중(兵部郎中), 사재소경(司宰少卿), 전중소감(殿中少監)을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러 팔거군(八莒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이봉(移封)되었다.
차남 현이후(玄利厚)는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고, 삼남 현덕유(玄德裕)는 1186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한후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을 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후 대사공(大司空)에 이르러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졌다. 이로써 현씨가문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玄覃胤이 세상을 떠나 장례때의 일이다. 상여가 五里亭이라는 곳에 이르니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 나오기에 상여를 멈추고 영령앞에 간단히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례를 올리게 되였다. 례식이 끝난후 상여를 다시 들려고 하였는데 상여는 땅에 뿌리 내린듯 움직이지 않는다. 《이 곳에 묻히시고 싶은 뜻이 있으신가?》하고 누가 말한즉 그때에야 비로서 상여가 움직이니 결국 그곳에 묘소를 쓰게 되였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玄覃胤의 묘쇼는 한때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현충사 고승이 제공한 선색에 의하여 玄氏의 후손들은 끈질긴 노력과 신기한 우여곡절을 거쳐 끝내는 玄覃胤의 묘소를 찾아 내였으며 玄覃胤을 始祖로 받들고, 시조의 封君地名인 延州를 本貫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 내려왔다.
玄氏는 高麗때에 주로 무훈으로 특출하였고 李朝때에는 2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玄氏의 本貫은 연주를 비롯하여 星州、昌原、順天등 무려 106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현존하는 본관은 30여 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侍郞公 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世倨地名에 불과하므로 1747년(영조 23) 丁卯譜를 編修 할때 처음으로 延州玄氏로 단일화 하기 시작 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壬戌譜 때에 여러 문중의 합의에 따라 촤종으로 本貫을 延州로 통일하였다.
1985년 한국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씨(玄氏)는 남한(南漢)에 총 17,297가구, 72,1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체 남한인구의 약 0.2%를 차지한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연주현씨는 18,686가구 총 59,09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玄氏姓 대한 초보적 탐구
朝鲜(韩)系 玄氏에서는 기원1174년에 高麗明宗으로부터 門下侍郞 平章事 벼슬을 제수받고 延山君에 봉해진 玄覃胤 大将军을 시조로 모신다.
玄覃胤의 先系에 대하여서는 지금 확실하게 고증할수 있는 문헌자료를 찾지 못했지만 그 어느때엔가 中国계의 민족으로부터 朝鲜(韩)系의 민족에 귀화된 家系임은 의심할바 없다. 왜냐하면 朝鲜(韩)민족의 력사에서는 高麗文宗(기원1047년) 때에 와서야 백성들도 비로서 姓氏를 쓸수있게 되였는데 玄氏姓은 高麗에서 기원한 姓氏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찍이 중국 東漢때부터 중국 북방에서는 鲜卑라는 민족이 흥기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고대의 《万姓統譜》에는 “俟玄:代北复姓,后改玄氏。”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代”라는 것은 선비족의 수령 拓跋氏가 중국 북방에 세웠던 나라를 가리키며 “北” 이라는 것은 그들이 후에 중국 북방을 통일하고 국호를 고친 중국 력사상의 남북조 시기에 가장 강대했던 北魏王朝(386~534)를 가리킨다. 그후 선비족의 대부분은 신속히 한족과 동화 되였다. 중국 고대의 《氏族略》에서도 “俟玄氏改为玄氏。” 라는 기록을 찾아볼수 있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魏书.文成五王列传》에는 “玄夫人生韩哀王安平” 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玄夫人이란 사람은 北魏의 文成皇帝의 부인으로서 바로 俟玄氏 가문의 후손이였다.
이상의 기록들로 부터 알수 있는바 일찍이 기원3,4세기때부터 중국 북방의 선비족 가운데에는 俟玄氏성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이 중국의 鲜卑계 玄氏의 선조가 되는 것이다. 또 선비족은 당시에 몽골족, 부여족, 돌궐족, 거란족, 고구려족 등 주변 민족들과도 관계가 밀접하였던 만큼 선비족의 俟玄氏가 역시 朝鲜(韩)系 玄氏의 선조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런데 혹시 朝鲜(韩)系玄氏의 선조가 西漢때에 汉武帝가 高句麗에 설치했던 玄菟郡과도 그 어떤 관계가 있는듯 하나 아직까지 이 방면에서는 아무런 유관 단서도 발견된것이 없다. 한국에서는 玄氏를 外来姓으로 취급하지 않는 현실로 부터 볼때 일찍 기원 668년에 高句麗가 망하면서 일부 유민들이 조선반도에 들어올때 그 속에는 이미 高句麗족에 귀화된 玄氏 가족이 있었을수 있다. 혹은 기원 926년에 발해가 망하면서 일부 유민들이 조선반도에 들어 올때 그 속에 이미 귀화된 玄氏 가족이 있었을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의 玄氏宗亲会에서 최근에 편찬한 《延州玄氏八修大同谱》 补逸부분 제일 첫줄에는 다음과 같은 옛구가 한구절 수록되여 있다: “玄都,古诸侯国,子孙以国为氏”. 이 구절은 력대의  《玄氏大同谱》들에서 한기 한기 베껴 내려온 것이다. 이것은 朝鲜(韩)民族 玄氏家族 先人들이 자기들의 玄氏姓은 最初에 가능하게 “玄都”라고 부르는 古诸侯国에서 기원했을 것이라고 줄곧 인정하여 왔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좀 달라진다. 왜냐하면 선비족의 俟玄氏의 유래에 대하여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력사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볼때 선비족의 俟玄氏는 소위의 玄都에서 기원한 姓氏가 아니기 때문이다.
“玄都”에 관한 위의 옛구는 기실 중국 고대의 《风俗通》에 기록되여 있는 한구절이다. “玄都”에 관하여 현재 중국 고등학교들에서 통용되고 있는 《中国古代史》 에서도 그 선색을 찾아 볼수 있다: “古有玄国, 公元前 651年楚灭玄。” 력사지명 자료를 찾아본데 의하면 그 古玄国이 바로 오늘의 河南省 光山县 西北쪽에 있었다. 그러니 中国 汉族 玄氏姓 가운데서 적어서 일맥은 바로 오늘의 河南省 光山县 西北쪽에 있었던 公元前 651年전의 “玄都”라고 부르는 古诸侯国, 즉 “玄国”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朝鲜(韩)系 玄氏의 시조 玄覃胤의 탄생 년도는 대략 기원1130년 좌우로 추정된다. 만약 그의 선조가 중국 “玄都”계의 玄氏라면 그의 선조가 中国으로부터 高麗땅에 건너가 정착하게된 시간을 늦어서 기원 1130년 전으로 추정해야 한다.
그 당시 中国대륙은 南宋(1127~1279)초기가 되며 高麗와 린접해있는 북방 지구에서는 辽(907~1125)와 金(1115~1234)이 한창 교체되는 시기가 되므로 中国 사처에서 전란이 그칠사이 없는 아주 혼란한 시기였다.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中国 山东 泰安지구에 유구한 세대를 내려오며 생활하여 온 汉族 玄氏마을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통적인 한족으로서 鲜卑계의 玄氏는 아니였다. 그런데 北宋(960~1127) 후기부터 끊임없는 전란 가운데서 점점 우심해지는 北方胡人들의 략탈을 피하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할수없이 륙속 정든 고향을 뜨게 되였다. 그 시기에 한 汉族 玄氏의 가족이 혼란한 泰安지구를 떠나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상대적으로 안정되여 있는 북방의 高麗에로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기에 몽골란이 일어나면서 中国 山东 汉族의 玄氏는 대규모적인 이동이 있었다. 마을을 떠난 대부분 사람들이 새로 정착한곳은 지금의 河北省 唐山地区의 迁安市 서북쪽으로 약 10여리 떨어진 곳이였는데 마을 이름을 “大伭庄”이라고 하였다. 그후 大伭庄은 전반 迁安지구는 물론하고 전반 冀东一带의 玄氏 宗源地로 되였다. 지금도 河北省 迁安市 大伭庄村 西北쪽에 가면 玄氏祖坟遗址이 있다. 1887년에 大伭庄村의 일부 汉族 玄氏들은 迁安市 城东 20여리 되는 곳에 이주 하였는데 새 마을 이름을 “伭新庄”이라고 하였다. 伭新庄村의 汉族 玄氏들은 지금 五十余代의 《玄氏宗谱》를 보관하고 있다.
朝鲜(韩)系 玄氏가 시조 玄覃胤으로부터 이제 겨우 三十余代 밖에 안되는데 비추어 보아 기본 종원지를 확인 하자면 그래도 먼저 이 河北省 迁安市 伭新庄村의 五十余代 《玄氏宗谱》를 한번 찾아 보는것도 바람직 한것 같다.
伭新庄村의 五十代 《玄氏宗谱》의 世代名序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国佐维继世   肇黎齐达义  青云高明贵   家业永绪德   炼浚桂耀在
铮沭柏熙增   锦汶森煜城  锐润椿熹塘   钧洲植琨基   钟源茂涛坚
위의 世代名序에서 이 玄氏의 시조가 원래는 玄国이 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이로부터 이 玄氏가 바로 “玄都”계의 玄氏라고 추정된다. 유감스러운것은 위의 名序에서 玄覃胤의 “覃”자나 “胤”자는 찾아볼수 없다. 중국의 여러갈래의 汉族 玄氏들중에 또 다른 《宗谱》가 반드시 있겠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朝鲜(韩)系 玄氏의 同祖同根이 구체적으로 중국 어느계의 玄氏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中国에서 汉族 玄氏姓의 由来에 대하여 또 몇가지 설이 있기는 한데 그 중에서도 비교적 대표성적인 세가지 설만 더 살펴 보자.
첫번째는 《史记》에 기록된 黄帝의 아들 玄嚣설이다. 중국의 중원 지방과 서북 일대의 汉族 玄氏들은 玄嚣를 자기들의 시조로 모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朝鲜(韩)系玄氏와 련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
두번째는 《世本》에 기록된 黄帝의 신하 玄寿설이다. 중국의 서남 일대의 汉族 玄氏들은 玄寿를 자기들의 시조로 모신다고 한다. 그들도 朝鲜(韩)系玄氏와 그 어떤 련관이 있을 가능성이 극히 적다.
세번째는 泫氏城설이다. 중국 고대의 《竹书纪年》에서 찾아보면 “晋烈公元年,赵献子城泫氏。” 라는 기록이 있는데 晋烈公 元年이면 公元前419年이 된다. 泫氏城과  관련하여 《元和郡县志》 泽州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高平县은 “南至州八十里, 本汉泫氏县, 属上党郡, 在泫水之上, 故以为名, 后魏改为玄氏。” 력사지명 자료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고대의 高平县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의 山西省 高平市 구역에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泫氏” 혹은 “玄氏”는 한 고장의 地名으로 기록되여 있을뿐 사람들의 姓氏로 동일시 하기에는 무엇인가 좀 모자란다. 이 고장 사람들이 자기들의 姓氏도 泫氏 혹은 玄氏로 하였는가 하는데 대하여서는 이 기록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中国에서 汉族의 玄氏는 극히 희소한 姓氏이다. 그렇게 된 원인은 주요하게 中国 历史상 두번이나 크게 避讳를 당했기 때문이다. 소위의 避讳란 皇帝名号에 있는 글자를 일반 老百姓으로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옛 규정이다.
첫번째는 기원 960년에 宋朝가 건립되면서 宋太祖 赵匡胤의 부친의 이름이 赵玄朗이라는 리유 때문에 온 나라에 통고를 내여 老百姓의 姓氏와 名字에서 일률로 “玄”자를 피하라고 엄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 당시 많은 玄氏들은 핍박에 의하여 할수없이 자기성을 元氏로 바꾸게 되였다. 중국 元氏의 상당 부분은 이렇게 온 것이다.
두번째는 기원1662년 清朝 康熙皇帝가 등극하면서 그의 이름이 玄烨라는 리유 때문에 전국의 玄氏姓들은 또 재앙을 당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첫번째 避讳에서 요행으로 보존되였던 玄氏姓들 중에서 절대다수 부분은 할수없이 또 元氏로 바꾸게 되였으며 일부분은 玄자의 마지막 획인 점이 없는 잔페 “玄氏”가 되였으며 또 일부분은 玄자앞에 새변을 달아 “伭氏、泫氏、眩氏、弦氏、舷氏…”가 되였다.

그후 1723년 康熙가 끝나고 雍正皇帝가 등극하면서 잔페 “玄氏”는 다시 원래의 玄氏로 회복할수 있었고 “伭氏、泫氏、眩氏、弦氏、舷氏...”도 다시 원래의 玄氏로 돌아올수 있었지만 이미 元氏로 바꿔진 절대부분의 玄氏들은 영원히 다시 玄氏로 돌아올수 없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중국의 玄氏성은 인구가 대폭 감소 되였던 것이다. 
 
(后记):이 글을 통하여 우리 朝鲜(韩)系玄氏의 뿌리가 원래는 중국에 있었다는 것만 명확하여 졌다면 구체적으로 중국의 어느갈래의 玄氏가 우리 玄氏의 同祖同根이 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 玄氏는 이미 자기 특색과 체계를 굳힌 독자적인 朝鲜(韩)民族의 玄氏 종족으로 발전 하였으며 우리 玄氏 종족들의 피에는 中华民族과 朝鲜(韩) 民族의 우량한 유전인자가 모두 섞이여 있다.   
정확한 종족관념이 있어야만 민족에 충성할수 있고 정확한 민족관념이 있어야만 나라에 충성할수 있다. 종족관념을 극단화 하거나 혹은 무시하는 관념은 기실 모두 민족과 나라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는 관념이며 이런 관념을 가지고서는 건강한 사회의 세포로 될수 없으며 합격된 나라의 동량으로는 더욱 될수 없다. 우리 玄氏의 후손들 중에서 앞으로 더욱 많은 합격된 나라의 동량이 배출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 玄氏의 후손들한테 정확한 종족관념을 심어 주려는 것이 이 글의 기본 목적이다.
 
編寫者:
延州玄氏判尹公派卅一世孫;(八修大同譜127p/第五倦)
延邊朝鮮族禮儀研究會理事長—玄盛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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