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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아버지 전기 --성원작품
2012년 07월 18일 11시 04분  조회:5601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현구(1914년~1975년)


 
머리말:
자고로 효도에는 세가지 내용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며, 세째는 자식을 낳아서 잘 키우는 것이다.
시작을 알수없는 유구한 세월속에서, 조상들은 수없이 많은 조대를 이어 내려 오면서, 생명의 유전자를 나에게까지 전달하였으며, 부모님께서는 자연의 도리에 순응하시여, 세대의 사명을 받드시고 나를 낳아서 전부의 심혈을 쏟으며 키워 주셨다.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나를 낳아 어였한 사람으로 키워 주셨기 때문에 더욱 감사한 것이다.
 
나의 祖父의 명함은 대종(台宗18751916)이라고 하였는데, 延州玄氏 判尹公派 제廿九代 后孙으로서 세 항렬의 맏이였다. 그 아래에 둘째 문종(1878?)이 있었고, 제일밑에 세째 정종(1880~?)이 있었으며, 그 외에 문중장손인 從兄 시종(始宗1875?) 이 있었다.
나의 祖父는 1912壬子年에 조선 惠山에서 가속을 이끌고 중국에 들어왔다가 牡丹江 주변의 어느 한 작으마한 조선인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어렸을 적에 惠山에서 이미 선생을 모시고 《千字文》과 《訓民正音》을 조금 읽었으므로 《家禮》와 같은 책을 볼수 있었으며, 동네에서 상사가 나면 의례 집사를 맡았으므로 사람들은 평시에도 그를 《현집사》라고 불렀다.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온 훌륭한 대목(건축목수)기술이 있었으니, 가세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으며, 후기에는 牡丹江에서 주요하게 한 일본인 회사의 관사건축 공사장에서 목수로 일하였다.
나의 祖母의 명함은 옥택(1878~1916)이라고 하였는데, 조선 惠山 安东权氏 가문의 둘째 딸이였다. 역시 조상으로부터 물려 내려온 훌륭한 재봉 기술이 있었으니, 손에서는 일감이 떨어질 사이가 없었다. 스므네살 되던 해에 귀중한 일본 손마선(손으로 돌리는 재봉기)을 혼수품으로 해가지고 나의 祖父한테 시집왔는데, 선후하여 二男三女에 모두 다섯 자식을 낳았다.
그 첫째는 아들로서 이름은 공흡(公洽1902~1924)이라고 하였고, 둘째는 딸로서 이름을 갑순(甲順1905~)이라고 하였고, 셋째도 딸로서 이름은 을순(乙順1908~?)이라고 하였으며, 넷째도 역시 딸로서 이름은 삼순(1910~1978)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들어와서 낳은 마지막 다섯째가 바로 나의 아버지였는데, 1914甲寅年五月廿五日생으로 이름은 진흡(珍洽)이라고 하였다.
나의 세째고모()는 1978年에 돌아 가시기 전까지 연길시 대성촌에 계셨는데, 나는 그를 습관적으로 《연길고모》라고 불렀다. 연길고모는 생전에 나한테, 나의 아버지의 유년에 관한 많은 옛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 옛이야기에 이어서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나의 아버지의 인상은 인생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면서 성실하게 살아오신 평범하기로 더 평범할수 없는 순박한 농민이셨다.
그런데 오늘, 나도 인젠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였고, 나이도 60을 넘기면서 당년의 그 아버지가 너무나 몹시 그리워 난다. 아마, 나도 인젠 늙었다는 표징이리라. 아버지가 그리워 날때마다 아버지의 그 키큰 형상이 마치도 신령인양 우렸하게 머리속에 나타난다. 아버지는 원래 이렇듯 우아하신 분이셨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덕분으로 오늘의 제가 있게 되였으며, 앞으로 우리가문의 모든것이 가능하게 되였습니다. 열심히 할께요! 힘 자랄 때까지 이 가문을 열심히 이끌어 가겠으니, 고 아버지 영령께서도 우리들을 가상히 여기시사, 많이 보우하여 주십시요!
내가 오늘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위하여 전기를 쓰려는것은 아버지한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영웅적 사적이 있어서가 아니며, 아버지가 천추에 길이 빛낼 위대한 공덕을 쌓으셨기 때문도 아니다. 아쉽지만,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한테는 모두 그런 사치한것들이 없더라!
나는 이제 2014년의 아버지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비록 서투른 솜씨이지만, 나의 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부활시켜, 나의 생애 마지막까지 모시고 싶은 물리칠수 없는 욕심에서 이 글을 쓰게 되였다.
력사가 가치가 있게 되는것은 그것이 기록되여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거창했던 사건이나, 아무리 위대했던 인물일지라도, 기록되지 않아서 후세사람들이 그 누구도 모른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수 있겠는가?
부모를 위하여 전기를 씀으로써, 가혼을 다시 살릴수 있고, 조상들과의 감정 뉴대를 다시 이어 놓을수 있다. 나의 후대들이 세세대대로 조상을 공경하고, 부모에 효성하며, 자식들을 사랑하면서, 그로부터 조상음덕의 혜택과 보우를 특별히 받아 영원히 번영창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사적인 욕심에서, 나도 이 세상에 와서 이런저런 일들을 조금이나마 해 놓고 갔다고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이제 후에 시간이 나는대로 다시 잘 다듬어서, 우리가문의 족보와 함께 건사하련다. 
 
제一회: 아버지의 유년시절
1914甲寅年五月廿五日, 나의 祖母가 임신이 되여 만삭이 된 몸으로 닭모이를 주다가, 손에 들고 있는 모이그릇에 닭들이 날아 덮치는 바람에 그만 놀라 넘어지면서, 그 자리에서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다고 한다.
1914年十月의 어느날, 나의 아버지가 탄생하여 백날잔치를 마치고, 祖父는 딸랑북을 울리며 떠돌아 다니는 소경 점쟁이를 불려들여, 동전 몇잎을 놓으며 나의 아버지의 운수를 물었다. 그런데 점쟁이는 나의 아버지의 사주팔자를 물어 본 다음, 손으로 동전을 만져 보더니 불시에 하!하!하! 웃으며 《오늘 괜히 재수없어 찬밥두 못 얻어 먹겠구만!》 하면서 그만 일어나 가려 하였다. 조부가 급히 그를 붙들어 않이고, 동전을 더 첨가하면서 재삼 청구하니, 그 소경 점쟁이는 짐짓 못 이기는척 하면서 다시 앉더니, 조부의 손을 잡으면서 신비스럽게 말을 시작하였다:
《빈생 이래뵈두 하늘 대신해 말 하는 거오니, 종래루 에둘지 않소이다. 주인장께서 내말 믿으시면 액을 피할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삼년내 이집에서 두번이나 복을 입을것 같소이다.》
완전히 으름장 놓는 말이니, 점쟁이들의 상투수법이다.
《<甲寅庚午乙亥庚辰> 했으니 바로 이집 아기 사주로다. 어허! 그런데 이런 몹쓸 사주도 있나? 명년에 태세 범하는구나. 크게 놀라기는 하겠지만, 다행히 거기에 그치겠고. 후년에 가서는 태세 대운 같이 가니, 부모중 누가 싫은 대루 서천에 잠깐 가야겠수다, 저 아이 운성 제왕에 이르러서, 꺼꾸로 점점 왕성하는 추세이니, 그 힘이 곧바루 부모 궁 충돌이라. 에구! 답답하이, 이잘난 사주는 당초에 틀리게나 댈 것이지! 이 아기 분명 전생에서 큰죄 범하구서, 후생에 도망을 온 아이 올시다. … …》
소경 점쟁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소리를 조금 낮춘다:  
《그런대로 이 아이를 빈생한데 맡기시면, 아이를 불문에 귀화 시킬수 있소이다. 그러면 액은 액대로 보내고, 복은 복대로 오게 할수 있소이다. 그렇게 하기 싫으시면, 새벽별을 보시면서 부자집 뒤주우에 버리시는 것이 상책이라, 언젠가는 찾아와서 가계는 이을 것 같소이다.》
이 말을 들은 조모는 몹시 성내신다, 《아니! 이거 너무 하는구만. 돈이 떨어지믄 내가 보태 주구, 옷이 파이나믄 내가 깁어 주지. 우리 종래로 남을 해꾼적 없소. 전생에서 무슨 죄를 졌다우? 살아있는 아이를 던지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소리우?》
조모는 동전 몇잎을 더 꺼내 점쟁이 보따리에 넣어 주면서 정식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일어나 가 보소! 돈이 떨어지믄 다시 와서 허튼소리 치던가.》
 소경 점쟁이는 재빨리 동전들을 주어서 보따리에 넣고는 아무말 없이 일어나 표연히 떠나가 버렸다.
1915年五月, 나의 아버지의 한돐 생일을 며칠 앞두고 조선 惠山에서 동흡(东洽1896?始宗의 맏아들)이란 오촌조카가 祖父를 찾아왔다. 그는 惠山에서 부모가 모두 돌아 가시자, 선산을 지키며 복상기를 지내는데, 한 일본경찰이 까닭없이 무례하게 굴기에, 분김에 그놈을 실컷 때려주고는, 그길로 도망하여 중국에 건너 와서 나의 祖父를 찾아 왔던 것이다.
며칠후 祖父네는 나의 아버지 첫돐 생일잔치를 성대히 차려놓고 동네 사람들을 청하여 모여앉아 한창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이 셋이 들이 닥치며 동흡이를 체포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격투가 벌어졌는데, 동흡이가 골받이로 련속 둘을 쓸어 뜨렸다. 그런데 그 남은 사나이가 갑자기 祖母의 품에서 생일둥이인 나의 아버지를 와락 나꾸어 채서 높이 추켜들고는 땅에 메여칠 태세를 취하며 동흡이를 핍박하였다. 동흡이가 어쩡쩡해 있는 순간, 그 쓸어졌던 두 사나이가 재빨리 일어나 동흡이를 쳐 쓸어 뜨리고 포승줄로 묶어 버렸다.
조부와 조모가 아이를 뺏어 안고 무릎을 꿇고 백방으로 용서를 빌었다.그러나 그들은 《당신네 저 잘난 조카 때문에 지금 우리 세집 아이들이 모두 경찰서 신세를 지고 있소. 저놈을 못잡아 가는 날엔 오호련좌로 우리가 대신 죽어 줘야 한단 말이요.》하면서 동흡이를 무작정 잡아 끌었다. 동흡이는 급히 자기 보따리를 내오게 하여 풀어서, 부모의 유물이라고 하면서 은팔찌 한쌍을 꺼내여 조부한테 맡기면서 깊이 허리굽혀 인사하고는 태연하게 잡혀 갔다.
이것이 아마 그 소경 점쟁이가 말한, 나의 아버지 신상에 한번 크게 놀라기는 하겠지만, 다행이 거기에 그친다는 것이였으리라.
그후에 다시는 동흡의 소식을 못 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종보를 찾아 보아도 그의 아래에는 다른 흔적이 없다.
1916年 설이 금방 지난 며칠후, 조선에서 祖母의 친정집 오랍이 되는 사람이 찾아와 하루밤 묵었다. 그는 인삼 장사군이 였는데, 수중에 상등 인삼 여나문 뿌리 있었다.
조모가 장차 아이들을 위하여 한뿌리 사 두었으면 하니, 그 사람은 아이처럼 생긴 제일 큰걸로 한 뿌리 골라 내놓으며,  《누님! 이건 백년 령삼이요. 사람과 다를배 없소. 중국 사람들도 알아주는 상등품이요. 누님이 장차 조카들 한테 쓰겠다고 하니 은화 몇잎만 주오.》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모는 은화 열잎으로 백년묵은 귀중한 령삼을 얻게 되였다. 조모는 그 보물을 소중히 싸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숙히 건사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나어린 큰고모(甲順)가 동네에 나가 아이들 앞에서 자랑하는 바람에 온 동네가 알게 되였다.
말은 번지고 번지여 마지막에는 신비한 소문으로 되였다:
현집사네 집에는 그집 막둥이 만큼이나 큰 천년묵은 령삼이 있는데, 밤이면 나와서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새벽이 되여 돌아 갈때는 은전 한잎씩 남기고 간다고 한다.
옛말에 보물은 재화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점점 커지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에 조모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그러던 1916丙辰年三月廿○日 저녁, 곡우가 이미 지났으므로 밖에서는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부는 공사장에 야근을 나가셨고, 조모는 아이들을 재워놓고, 웃방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손질하고 있었다. 불시에 음산한 바람이 불어치기에 무심결에 정지칸을 내다 봤더니, 어득시그레한 그속에서 각기 소머리, 돼지머리, 개머리를 한 도깨비가 셋이나 앉아 있었다. 조모는 너무 놀라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데, 그 도깨비들은 불시에 괴상한 소리로 웃어대더니, 사람처럼 말을 하였다;
《오호호! 우리는 하늘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내려온 야행차사 이시다. 오늘은 주로 인삼 아이를 잡으려 왔다. 그는 원래 왕모마마 옆에서 시중들던 아이인데, 하계로 도망와서 인삼 아이로 변해가지고 사람들을 속인다고 들었다. 이집에 숨어 있는줄 우리가 알고 왔으니 얼른 내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기서 자고있는 그 아이라도 잡아가야 한단다.》
그 당시 웃방의 조모옆에서 자고있는 아이가 바로 아직 두돐이 채 되지 않은 나의 아버지였는데, 조모는 그가 전생에서 무슨 죄를 범하고 도망온 아이라던 그 소경 점쟁이 말이 언뜻 생각나서, 그에게 무슨 변이라도 생길가봐 당황한 김에, 그 인삼 감추어 둔 곳을 알려 주고 말았다.
도깨비들이 인삼을 찾아 가지고 도망가 버린후, 조모는 그 자리에 기절해 쓰러졌는데, 그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사람 생명이 천명에 진하면 이렇게 등잔불보다도 더 쉽게 꺼져 버린다.
그해 조모의 년세가 39세였으니, 인생의 네번째 아홉고개를 끝내는 못 넘기시고, 서천으로 떠나 가시고 말았다.
조모의 출빈을 앞둔 자정 무렵, 조부는 령전에 초불을 달아 놓고 혼자서 조용히 앉아 조모의 령구를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바깥쪽으로 검은 기운이 휙- 불어 들어 오더니, 초불이 모두 훅-하고 꺼진다. 아마도 저승사자가 조모 데리려 오는것 같았다. 조부는 너무 놀라서 온몸에 식은땀이 쫙- 났다. 병풍 뒤에서 무엇이 얼른 거리는것 같아 자세히 보니 바로 조모였다. 조모는 새하얀 소복차림에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쪽진 모습으로 병풍 뒤에서 바람처럼 나와 조부 앞에 살풋이 앉으며 입을 여는데, 말소리는 아주 먼곳에서 들려 온다;
《애들 아부지! 나는 가옵구마. 삼삼양춘 애들이요, 오오단오 처녀총각, 칠칠칠석 신혼부부, 구구중양 우리들이오니, 그 날만은 만사 놓으시고, 꼭, 저 한테로 오셔 주시옵서!》 … ….
《덜컥!》하는 문소리에 조부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가 일몽인데, 새벽제 보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 ….
조모의 장례를 치르고 몇달이 지난 1916丙辰年九月九日, 이날이 바로 중양절이다. 몇달전 안해 장례날의 몽사도 있었고 하니, 조부는 나의 큰고모(甲順)에게 일러서 기름떡을 몇개 굽게 하고 소물들을 좀 준비하여 가지고 모두들 함께 조모의 산소에 제사 지내려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살인도망 하여도, 사주도망 못한다》더니, 공사장에서 재목이 급히 수요된다고 기별이 왔으므로, 조부는 아이들을 집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하고는, 마차를 삯내 가지고, 일군을 두사람 데리고, 목재회사로 급히 가게 되였다. 수요되는 목재를 사서 싣고, 령수증을 받고, 공사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한 괴상한 거지 아이가 나타나 조부한테 조그마한 종이말이를 쥐여 주었다. 조부는 그 종이말이를 펼쳐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대로 호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공사장에 도착하여 일본인 현장감독에게 령수증을 넘겨 주면서 조부는 깜빡 잊고 그 작은 종이말이도 함께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인 현장감독은 그 종이말이를 펴서 찬찬히 보더니 불시에 《바가!》하면서 조부의 귀뺨을 치기 시작하였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인지라 영문 모르고 맞으며 몇걸음 뒤로 물러서던 조부는 본능적으로 그 일본인 현장감독에게 골받이를 안겼다. 일본인 현장감독은 뜻밖의 강타에 뒤로 휘청이며 물러서더니 마차에 부딪치며 쓸어졌다. 말들이 놀라 자꾸 대가리질 하더니 마차에 실었던 재목들이 그만 와그르 무너져 내리며, 그 일본인 현장감독을 깔아 놓고 말았다. 크게 놀란 말들은 마차를 끌고 내달리며 또 일본인 몇사람을 치여 놓았다. 당황해난 일본 보안대원들은 총으로 그 놀란말을 쏴 죽이고 조부한테 몰려와 집단구타를 시작하였다.
조부는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일본 사람들 한테 맞아서 당장에서 숨이 지고 말았다. 공사장에서 함께 일을 하던 동료들이 조부의 시체를 건사하여 집으로 옮겨 와서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
먼저번 조모 장례날, 조모 혼령은 어린 아이들을 차마 이대로 버리고 갈수가 없어, 천규까지 어겨 가면서 사사로히 자기 남편에게 재화 피하는 천기를 누설히 주었건만, 천분이 없는 조부는 끝내 사주도망 못하시여, 소경 점쟁이 말대로 이집에서는 한해에 두번씩이나 복을 입게 되였다.
그후, 당시 조부를 따라 목재회사에 재목사러 갔었던 한 일군이 그 화근의 종이말이를 건사하여 가져왔는데, 거기에는 세로줄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庚戌合邦國恥》. 경술합방이란 1910庚戌年에 조선이 일본에 병탄된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국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 조선 정치인들의 反日 선동 삐라였다.
그런데 순박한 조부께서는 이런 영문을 알지도 못한채, 어머니 제사에 가려고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피하여, 다른 길을 택하여, 자기 안해를 찾아 서천으로 혼자 가시고 말았다.
그해 조부의 나이가 42세였다.
 
제二회: 김해김씨 가문에 입양되다
한해에 량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된 다섯남매들 중에서, 제일 큰 백부(公洽)라야 이제 금방 15세밖에 안되였고, 그 아래로 세 고모들도 모두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 가정을 유지해 나갈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동네사람들이 주선하여, 이제 겨우 세살밖에 안되는 나의 아버지가 남의 집에 입양 가게 되였다.
그런데, 입양하려는 집에서는 아이네 가문에서 혹시 후에 아이를 도로 찾아 가기라도 할가봐 근심되여 조금 각박한 요구를 제출하였다. 즉 아이네 집에서 아이를 마을밖에 업어다가 버린 다음에, 자기네가 가서 업어 가겠다고 하였다.
나의 아버지를 《버리는》 전날 저녁, 나의 백부(公洽)는 온밤을 새면서 족보를 정리하였고, 붉은천에 나의 아버지의 학명과 생신 년월일을 써서는 자고 있는 그의 품에 넣어 주었다. 나의 고모들은 온밤을 새면서 아기 포대기와 아기 옷에 솜을 더 넣고 다시 만들었으며, 아기 솜모자도 만들고, 아기 버선과 아기 수갑도 만들었다.
이튿날 오전 巳時경에 길을 떠났는데, 때는 동지달이였지만 그날따라 날씨가 대단히 좋았다. 백부가 승냥이를 쫓기 위해 긴 장대기를 들고 앞에서 가고, 그 뒤를 큰 고모가 어린 나의 아버지를 업고 따르고, 작은 고모들이 각기 아기 짐을 들고 흑-흑- 느끼면서 큰고모 뒤를 따라 갔다.
마을 밖에 나가 한참 걸으니 허름한 상두막이 나타났다. 그곳이 바로 나의 아버지를 버리기로 한 곳이다. 큰 고모는 상두막에 들어가 건초우에 나의 아버지를 내려 놓고는 엿이랑 과줄이랑 옆에 놓고 나왔다. 나의 아버지는 무슨 일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듯 처음부터 좀처럼 울지 않았다.
백부와 고모들은 멀리 물러가 상두막을 바라보며 지키다가, 모를 사람들이 와서 나의 아버지를 업고 가는걸 보고서야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저녁녘에 보니 큰 고모가 보이지 않았다. 여러날 지나도 돌아 오지 않았다. 그렇게 40여일이 지난 이듬해 설날 아침에야 큰 고모는 절뚝거리며 집에 돌아 왔는데, 너무 지쳐서 집에 들어서자 마자 쓸어지고 말았다. 백부와 작은 고모들이 울면서 큰 고모를 부축하여 구들에 올려 눕히고, 그의 얼어 붙은 신과 버선을 간신히 벗기고 보니 열 발가락이 얼어서 몽땅 무즈러져 있었다.
그 당시 열두살 밖에 안되는 나의 큰 고모는 어린 동생에 대한 정을 차마 끊지 못하여, 어른들도 상상할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고생을 이겨내면서 나의 아버지를 업고 가는 사람들의 뒤를 몰래 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동생을 입양하는 집이 그 당시 和龙县 头道沟 江城(广新)村의 金海金氏 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그집 뜰앞에 특별히 큰 비술나무가 있다는 것까지 마음속에 단단히 표식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지도를 펼치고 목단강부터 화룡현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볼때 육칠백리는 푼히 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기차나 뻐스같은 것이 없었는데, 열두살 밖에 안되는 큰 고모가40여일 동안 엄동설한에서 어떻게 이렇게 먼길을 갔다 올수 있었는지?
연길고모도 대답 대신에 머리만 설레설레 저으시였다.
후에 큰 고모는 결국 열 발가락을 몽땅 잃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 1918年에 열네살 난 큰 고모(甲順)는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한동네의 수원최씨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의 명함이 내헌(乃憲)이라고 하였다.
1919年에 열두살 난 둘째 고모(乙順)도 큰 고모의 주선으로 린근 동네 김해김씨 가문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 명함이 금손(今孫)이라고 하였다.
1923年에 이미 스물두살이 된 백부(公洽)는 둘째 고모의 주선으로 연길에 있는 둘째 고모 시집 친척이 되는 김해김씨집의 딸에게 《누이바꿈》으로 장가들게 되였다. 즉 백부가 그집 딸에게 장가 들고, 자기의 작은 누이, 즉 나의 작은 고모(參順)를 그집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해에 이미 열네살 난 작은 고모(參順)도 연길 김해김씨네 집에 시집을 가게 되였는데, 남편 명함이 승진(承谮)이라고 하였다.
연길현은 화룡현과 린접되여 있었으므로, 작은 고모는 일부러 몇번 시간을 내여 큰 언니가 알려 주던 대로 비암산 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平崗벌을 내려다 보면서, 头道沟 江城村의 그 특별히 확연하게 보이는 큰 비술나무를 찾아서 멀리 바라 보며 동생을 하염없이 그리군 하였다.

제三회: 江城村 金海 金桂贤 할아버지
나의 아버지를 입양한 和龙县 头道沟 江城村의 金海 金桂贤 할아버지는 조선 이민으로 중국에 건너 온 江城村의 제일대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1912壬子年, 이곳 새밭속에 집터를 닦고, 육간 초가 한채를 지어놓고는 본격적으로 논밭을 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풀어 놓은 논밭이 몇마지기 잘되여 혼자 부치기가 힘에 부치니, 또 조선 고향의 친척과 친우들을 많이 불러 들였는데, 마을은 규모가 잡힐 정도로 꽤나 크게 되였다.
그런데 1915乙卯年 봄에 모두들 한창 새해 농사 차비를 하는데, 투도구에서 성이 郭가인 지주가 관청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땅문서를 보이며, 이 일대가 모두 자기네 땅이니 금년 가을부터는 소작료를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시비를 걸어 봤자 칼자루 쥔 놈이 이기게 되여 있으니, 金桂贤 할아버지는 차라리 한수 앞서서: 그렇지 않아도 땅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소작료는 당연히 바치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형편도 좀 돌보와 준다면 이 지역에 논밭을 많이 많이 일구어 놓겠다고 하면서 곽지주와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金桂贤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그해 소작료를  2할만 바치고, 나머지 8할은 모두 농사지은 사람들이 가지도록 결정 지였다.
그당시 조선인들이 간도땅에 건너와 막상 밭을 일구어 놓고 보니, 그땅의 임자가 이미 어떤 중국인이나 관청의 이름으로 되여 있었기 때문에, 몇해 부치고는 그 땅임자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그 땅임자에게 소작료를 바쳐야 하였다. 이것이 중국의 조선 이민들 중에 지주가 극히 적었던 원인의 하나이다.
江城村의 金海 金桂贤 할아버지는 남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고 남보다 더 검박하게 치가하면서 가정살림은 비교적 부유하게 꾸려 놓았다. 그런데 유감이라면 할머니가 병으로 잉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는 그것이였다. 이리하여 이 가문에서는 어린 나의 아버지를 입양하게 되였던 것이다. 金桂贤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두 부모가 모두 계시지 않는다는 형편을 아시고는, 나의 아버지를 자신의 친자식으로 만드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아기 품속의 붉은천에 씌여진 이름을 그대로 옮겨와 성만 바꾸어 학명을 김진흡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던 1920庚申年, 金桂贤 할아버지께서는 곽지주를 도와서 큰 재화를 모면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은 간도를 중국을 공격하는 발판으로 만들기 위하여 《훈춘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으로 부터 2만명 정규군을 간도에 파견하여 《경신년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홍범도와 김좌진이 각기 인솔하는 간도지구의 두 항일무장대오는 일본 정규군과 우회하면서 선후하여 화룡 청산리, 이도 완루구, 어랑촌 야계곡 등에서 불의의 습격전을 벌려 일본군 천여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변 조기 항일사에서 크게 한자리 차지하는 《청산리 전투》이다.
당시에 곽지주는 관청의 징용 명령에 따라 말을 몇필 바친적 있었다. 당년 10月의 어느 하루, 金桂贤 할아버지가 곽지주네 집에 가서 장부를 알아 보는데, 갑자기 밖에서 떠들썩 하기에 나가 보았더니, 곽지주네가 며칠전에 관청에 바쳤던 한필의 말이 마차를 끌고 와서 대문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마차우에 실은 몇개의 싸리 광주리 안을 들여다 보니, 몽땅 꼬리표가 달린 일본군 사람머리가 담겨져 있었다. 일본군들은 전투에서 전사한 자기네 병사들을 머리만 베여 꼬리표를 달아서 싸리 광주리에 담아 내려 보낸것이다. 그런데 이 마차가 일보군 병영으로 가야 하는데 왜서 여기로 왔느냐가 문제였다. 아마도 중도에서 습격을 받고 마차부가 죽었거나 도망간 모양이였다.
곽지주는 빨리 마차를 몰아 내 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데, 집의 일군들중 그 누구도 감히 얼씬 나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곽지주는 이 마차를 몰고 나가서 일본군에게 바치는 사람에게 땅 얼마를 주겠다고 상을 내 걸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은 자칫하면 목숨과 상관되는 일이기 때문에 누구하나 선뜻이 나서지 못하였다. 곽지주는 조급하여 쩔쩔 매다가 한 어리숙한 총각머슴을 가리키며, 《내 너에게 내 며느리를 주고, 집도 주고, 땅도 좀 주겠으니, 네가 좀 갔다 오너라!》하고 소리쳤다. 그 당시 곽지주의 둘째 며느리는 몇해전에 상부하고 과부가 되면서, 자주 시아버지와 걸고들어 심술을 부리므로 집안에 조용한 날이 별로 없었다. 차리리 이 기회에 인심도 쓰고, 골치덩이도 없애고, 꿩먹구 알먹구 아닌가? 그래서 그 젊은 머슴이 우물쭈물 나서기는 하였는데, 일본군들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한분이 함께 가서 일본군들 앞에게 교대하여 준다면 자기가 마차를 몰고 갈수는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곽지주는 金桂贤 할아버지 손을 잡아 흔들며 앞으로 많이많이 우대하여 주겠으니 한번 도와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金桂贤 할아버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차마 거절할수가 없어서, 마차를 따라 일본 경찰서까지 갔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일이 순조로와 일본경관들은 金桂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는, 차렸하고 군례를 부치면서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치하하였다.
그후부터 곽지주는 金桂贤 할아버지를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여러방면으로 우대하여 주었으며, 점차 특수한 개인 관계를 맺었다.
 
제四회: 아버지의 소년시절
金海金氏 가문에서의 나의 아버지의 동년은 행복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밥을 배불리 먹을수 있었고, 옷도 좋은걸로 입을수 있었으며, 또 나이가 되니 头道沟 국민학교에 들어가 공부도 할수있게 되였다.
나의 아버지가 15세가 되던 1928年의 어느하루, 한마을에서 사는 한 金氏성의 사람이 갑자기 나의 아버지를 마을앞 강변에 불러놓고 정중히 선포하였다; 《오늘부터 너는 共产党 령도를 받는 少先队 일원이다. 조직에서 주는 임무를 목숨으로 완성해야 하며, 완성하지 못하거나 밀고하는 날에는 징벌을 받는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로서는 아무런 사상준비도 없는 형편에서 共产党 배에 오르게 된것이다. 혁명이란 왕왕 이렇게 자원에 의하여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에 의하여 참가하는 것이다.
그때 평강구 지방조직에서는 곽지주집을 습격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조직의 임무를 맡고, 할아버지와 그 곽지주와의  특수 개인관계를 리용하여 그 중국인 곽지주집에 들어가 내부정황을 알아 가지고 그 김씨인 공산당 공작인원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이 정보에 근거하여, 어느 깊은 밤에 공산당 적위대가 곽지주 집을 가만히 습격하여 많은 량식과 물품들을 가져갔다.
곽지주 집에서는 인차 발견하고, 안건을 투도구 일본경찰서에 보고하였다. 그 김씨성의 사람이 혐의분자로 지목되여 체포되였다. 그런데 그 김씨성의 사람은 일본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만 실성하고 말았는데, 미친사람처럼 아무사람 이름이나 마구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열두명 사람들이 또 투도구 일본경찰서에 잡혀가게 되였다.
일본경찰서에서는 잡혀온 혐의범 열두명을 절반씩 갈라 두줄로 마주세워 놓고는 서로 상대방의 귀뺨을 피터지도록 때리게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사정을 보아주는 사람은 따로 형틀에 묶어놓고 더 혹독하게 취조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어른들과 함께 일본경찰서에 잡혀간후, 金桂贤 할아버지께서는 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잡혀간 여러 사람들을 빼내오기 위하여 많은 재물과 돈을 썼다. 그때에 쓴 재물과 돈의 가치를 모두 합치면 공산당들이 그 곽지주집을 습격하여 가져간 물품가치보다 엄청 더 많았다고 한다.
보름이 지난후, 투도구 일본 경찰서에서는 혐의범 김씨가 이미 실성해 버린 형편에서 확실한 근거를 찾을수 없었고, 또 많은 마을사람들의 례물과 보증도 있고하니, 이미 거의 죽게된 그 김씨성의 사람과 후에 잡혀간 모든 사람들을 결국 석방하게 되였다. 류치장을 나올때 관례대로 문옆에 《출문 기록부》를 작성해 놓고는 이 문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싸인하고 지장을 찍게 하었다. 그 《출문 기록부》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에 대하여서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문화혁명 기간에 《귀순분자》, 《변절자》등 모자를 쓰고 투쟁 당하고, 충격을 받게 된 전부의 원인이다.
1930年, 공산당이 령도한 《붉은 5월투쟁》이 연변지역을 휩쓸었는데, 당시의 중공 연변 특별지부에서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농민들을 동원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함으로써 인민무장을 건립하고, 쏘베트 정권을 건립할 강령을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연길, 화룡, 왕청 등지의 여러 마을에서는 지주의 고리대 문서를 태워 버리고, 지주의 량식과 물품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해 5월27일, 중공 연화(연길,화룡) 현위에서는 약수동 웃마을에서 《약수동 쏘베트정권》 건립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두도구 강성촌 지하조직에서도 통지를 받고 20여명의 군중 대표들을 파견하여 약수동 군중대회에 참가시켰는데, 나의 아버지도 따라 가게 되였다.
대회에서 당시 만주지역 첫번째 공농혁명 정권인 《약수동 쏘베트정부》의 성립을 선포하고, 李凤三이 정부주석으로 당선되고, 王耿이 연화 현위서기로 당선되였다. 대회에서 격정에 넘치는 선전고동이 한바탕 있은후 金槿과 苏圣奎의 인솔하에 군중대오는 호호탕탕하게 룡정으로 진발 하였다.
연도에서부터 친일분자라고 지명된 집은 무조건 불을 달아 태워 버렸고, 두도구와 룡정의 일본회사 건물들을 습격하여 억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반재역 철교를 파괴하고, 레루를 뽑아 버렸다. 이것이 바로 연변의 항일 력사에서 이름이 있는 《5.30暴动》이다.
당시 룡정 일본 령사관에서는 군경과 지방 경찰들을 파견하여 진압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체포되여 갔다. 江城村에서도 여러사람이 실종되거나 체포되여 갔는데, 나의 아버지는 집에 숨어 있으면서 곽지주가 보증을 서 주었기에 별일없이 무사할수 있었다.
약수동 쏘베트 정부는 3일동안 유지되고는 결국 진압 당하고 말았다.
그해 8월에 추수폭동을 조직하면서 중공 평강구위에서는 또 사람을 파견하여 여러번 나의 아버지를 찾았지만, 모두 金桂贤 할아버지가 리유를 만들어 막아 버렸다.
金海金氏 가문의 후계를 위하여, 金桂贤 할아버지가 엄격히 단속하였으므로, 그후부터 광복이 날때까지 나의 아버지는 기본상 사회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제五회: 자기姓을 다시 찾다.
1935年, 나의 아버지가 22세가 되던 해에, 그당시 江城村 아래 개방지 半载驿 (지금의 和龙市 东城镇)에서 사는 全州李氏 가문의 18세 나는 큰 딸과 인연을 맺고 결혼하게 되였다.
그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이시다. 나의 어머니는 명함이 경희(京姬19181997)라고 하였는데, 말띠로서 성격이 콸콸하고, 마음이 넓었으며, 씀씀이가 대범하였다. 명절 아침같은 날에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했다하게 되면, 식전에 먼저 온 동리에 한번 돌리고 난후에야 제집 아침식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로하여 큰 할머니로부터 악의없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해에 이집에는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두 녀인이 열살좌우의 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큰 비술나무 뒤의 金海金氏집을 찾아 왔던 것이다. 처음에 할아버지께서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들을 돌려 보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어쩔수없이 집에 들여놓게 되였다.
두 녀인은 할아버지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하늘같이 덕을 쌓으신 金桂贤 할아버지에게 깊은 사이를 표시하고는 사연을 말하였다;
그 두 녀인중의 한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의 작은 누님(參順)이시고, 다른 한분은 나의 아버지의 형수(公洽之妻-參順이 시누이겸 올케)이신데, 데리고 온 이 아이는 나의 아버지의 친 조카로서 이제 열두살이란다. 나의 아버지의 큰 형님(公洽)은 이 아이가 태여나 석달만에 돌아 가셨는데, 림종하면서 이 아이한테 꼭 자기 친 삼촌을 찾아주라고 유언하셨다고 한다.
당초에 나의 백부님께서는 어쩔수 없이 어린 자기 동생을 남의 집에 입양 보내고는 대성통곡하면서 장차 꼭 동생을 도로 찾아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몸에 병이 많았으며, 힘든일을 별반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막내 누이를 내세워 누이바꿈으로 겨우 장가 들었는데, 자기 아들이 태여났을 때는 이미 그의 생명이 경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앞날이 얼마 없음을 예감한 그는 족보에 금방 태여난 자기 아들을 올리면서 학명을 鶴松이라고 적었다.
이것은 1924年도의 일인데, 그때 다행히도 나의 백부님께서 나의 아버지와 자기 아들을 모두 족보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76년후인 지난 2000年도 《延州玄氏八修大同谱》 등록때에 우리 가문의 련계점을 쉽게 찾을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백부님께서 돌아가신후, 백모님께서는 목단강에서 혼자 어린 아들을 힘겹게 키웠는데, 그 아들이 열두살나던 해인 1935年에 한 조선인 일본상인을 따라 일본에 가기로 되였었다. 그리하여 만약 정황이 허락된다면 그 아이를 자기 삼촌인 나의 아버지한테 맡기고 갈 예산이였다.
그런데, 이 일로하여 할아버지가 몹시 충격을 받고 계셨고, 또 아이도 아직 어리기 때문에 결국 그 아이는 자기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몇해 공부를 더하고, 좀 더 큰다음, 다시 합당한 시기에 자기 삼촌을 찾아오는 것으로 약속이 되였다.
불청객들을 보내고 난뒤, 金桂贤할아버지께서는 그만 식음를 전페하시고 몸져 누우셨다. 그만큼 정신적 타격이 컸으리라. 오직 나의 아버지 하나만 믿고 강성촌 김해김씨 후계의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으며, 또 이미 결혼까지 시켰으니 이제 바야흐로 번창하여질 일만 남았는데, 운명도 무심하지, 어찌하여 이렇게 때아닌 유월에 찬서리 내린단 말인가? 인젠 나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앞에서 계속 충실한 아들질을 하겠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 하여도 아무런 의의가 없게 되였다.
부근의 용한 의원들을 모두 모셔 보였지만 모두 머리를 저으며 돌아갔고, 할아버지 병세는 점점 악화되여만 갔다. 하기야 의원들은 사람의 몸에난 병은 치료할수 있었겠지만, 사람의 마음에 난 병이야 어찌 치료할수 있었겠는가?
이제 곧 강성촌 김해김씨 가계가 끝나가는 시각에, 새로 들어온 며느리(나의 어머니)가 그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방안을 제기하였다; 즉 할아버지한테 씨받이로 첩을 맞아 들이자는 방안이였다.
그때만 하여도 이런 방안이 사회적으로는 가능한 것이였다. 나의 어머니는 먼저 큰 할머니를 설득시켰고, 그 다음 김해김씨 가문의 일가친척들을 설득시켰다. 이런 시각에 그 누구도 이보다 더 현명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어머니는 사람을 띄여 사처에 수소문 하던끝에 웃마을 青河村의 한 소경녀인을 적임자로 지목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손수 혼수례물을 준비하여 가지고, 나의 아버지와 함께 그 소경녀인의 집에 찾아가서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청혼하여 일을 성사시켰다.
이것은 1935年도의 일인데, 이때로부터 강성촌 김해김씨 가문은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였으며, 진정한 자기의 후대를 가질수 있게 되였다.
그 소경할머니를 나도 어렸을때 많이 보았는데, 키가 작으마한 아주 청수한 분이셨다. 종래로 머리 한카락 흐트러진적이 없었으며, 저고리 한곳 구겨진 곳이 없었다. 앞못보는 소경이면서도 바느질 솜씨가 대단한 분이셨다. 옷을 만들고, 이불을 꾸미고 하는 일들이 그에게 있어서 아주 보통의 일이였다. 나는 그이를 《작은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그 작은 할머니는 강성촌 김해김씨 가문에 첩으로 들어와 모두 두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金成烈(1937~1998)이라고 하였는데, 몇해전에 이미 사망하셨고, 그가 남긴 자식들은 一男二女로서, 이미 모두 성가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金成哲(1947~)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신체가 튼튼하며, 자식들은 一男一女로서, 역시 이미 모두 성가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작은 할머니가 아들을 낳게되자, 할아버지는 너무 기쁜 나머지 큰 잔치를 벌리고, 련며칠 온동리 사람들을 청해놓고, 춤도 추고, 그네도 뛰면서 마음껏 경축하였다.
할아버지는 뜰앞의 그 몇백년 묵었는지 알수없는 큰 비술나무에 그네를 매여놓고, 해마다 명절이나 경사있는 날에는 동네 녀인들이 이곳에 와서 그네 뛰면서 마음껏 즐기게 하였던 것이다.
(이 유서깊은 비슬나무는 몇백년동안 평강벌과 강성촌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며 오다가, 1962年 삼년 대기황 마지막 해에 그만 액운을 당하여, 잘리우고 겁질을 벗기워 강성촌 백여명 기민들의 하루 대식품감이 되는 것으로 자기 일생을 마쳤다.)
며느리의 처사를 너무 기특하게 여긴 할아버지께서는 특별히 그 동리에 따로 살림을 한방 아담하게 꾸며놓고,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가 함께 세간 나가도록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 한테도 이미 어린 아이가 있었으니,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성을 다시 玄氏로 회복하도록 윤허하여 주셨다.
그때부터 나의 아버지는 학명을 현구(玄九)라고 불렀다.
 
제六회: 사회공작에 투신
1943年, 나의 부모들은 여덟살 나는 한 서울 녀자아이를 입양한적 있는데, 이름이 옥순이라고 불렀다. 그는 몹시 귀엽게 생겼는데, 이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빠!》, 《엄마!》 하면서 각근하게 굴었으며, 농촌에서 나무연통을 소똥으로 칠하고, 가을에 탈곡장을 소똥으로 칠하는것을 보고는 몹시 신기해 하였다. 그는 성격이 아주 쾌활하고 굴강한 녀자애여서 동네 아이들중에 녀자아이고 남자아이고 그를 이기는 아이가 없었다. 성질이 역시 굴강한 편인 나의 외사촌 누님(리순녀-영예군인, 이미사망)도 그한테는 적수가 못되여 여러번 맞아서 울었다고 한다.
1953年 팔가자에 있을때 일인데, 한번은 그가 항아리를 깨여놓아 어머니한테 야단을 당하고는 어디엔가 없어진것을 이틀이나 찾았다. 후에 찾고보니 큰 독안에 들어가 앉고는, 벼짚 방석으로 아구리를 덮어 가리우고, 이틀이나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후 그는 갓 설립된 연길의 자치주 정부를 자체로 찾아가서, 이붓 어머니가 자기를 학대한다고 고발하여, 자치주 정부에서 조사인원이 내려온적까지 있었다.
1954年에 그는 자기 친구의 소개로 개산툰의 한 군인한테 시집갔는데, 늘상 다른 남자들을 꼬여서는 말썽을 많이 일으켰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때는 1959年인데, 그는 이 동생을 특별히 사랑해 주었으며, 맛있는 과자랑 사탕이랑 많이 사왔었다.
그해 그는 또 자기친구의 남자와 눈이 맞아 가지고, 함께 조선에 건너가서 살기로 약속하였다. 그가 먼저 조선에 건너가 자리를 잡은후 어느 약정한 장소에서 그 남자와 만나 함께 월경하기로 되여 있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눈치를 채고 그 약정한 장소에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을줄이야. 두 녀인은 한 남자를 놓고 그곳에서 결투를 벌렸는데, 결국 세사람이 모두 제각기 헤여지고 말았다.
몇해후, 조선 황해도에서 한번 그의 편지가 왔었는데, 그후론 소식이 영 끊겼다. 나는 지금도 그 누님이 그립다. 그 누님은 참으로 전기식적인 누님이시였다.
이것은 우리가정의 한 에피쇼드이다.
1945年10月, 일본이 망하고 금방 광복을 맞이한 강성촌에, 한 학생복 차림의 20대 청년이 찾아왔다. 그가 찾는 사람인즉 바로 나의 아버지였는데 자기는 부산에서 자기 삼촌을 찾아왔다고 하였다. 동리사람들이 그를 나의 아버지앞까지 데려 와서 확인하여 보니, 그가 다름아닌 10년전에 자기 어머니와 고모를 따라 이곳에 자기 삼촌을 찾아 왔던 나의 아버지의 친 조카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鹤松이라 하였는데, 후에 万硕이라고 고쳤다.
10년전 그는 강성촌에서 자기 삼촌을 찾은후, 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건너 갔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한 일본남자와 결혼하게 되였다. 그도 일본인 이붓 아버지 덕분에 일본 초등학교에 들어가 공부할수 있게 되였다.
그후 태평양 전쟁이 폭발하면서 일본 국내에서 대량으로 징병하게 되자, 그도 징병을 면치 못하고 일본군 운수부대에 편입되였다. 그러나 그는 운수가 좋았던지 전쟁마당에 끌려간것이 아니라, 선박을 타고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면서 후근부대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일본을 떠난 때가 1945年 8月초였는데, 부산항구에 건너와서 일본천황이 투항조서를 읽는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날부터 바다길이 막혔는데, 만약 일본에서 하루만 늦게 떠났더라도 자기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며, 가능하게 죽었을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들은데 의하면, 그들 운수선의 뒤를 따르던 같은 부대 운수선은 부산에 채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서 일본의 투항소식을 접하였는데, 미쳐버린 일본병들은 그 선박안의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몽땅 바다에 처 넣었고 돌아 갔다고 한다. 그는 부산에서 일본병영이 투항기분에 혼란해진 틈을타서 탈출한후, 천신만고 겪으며 두달을 걸어 간도에 건네와 자기 삼촌을 찾아 왔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힘든길을 걸어 자기를 찾아온 친조카를 아주 반갑게 맞아 들였으며, 호적을 한집에 올리고, 한집에서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한가지 상당히 현명한 처사를 하셨는데, 그당시 중국인이나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정을 고려하여, 조카의 일본군 경력사실을 영원히 없었던 일로 하고, 단지 부산에서 아라바이트로 신문을 나르면서 힘겹게 공부를 했다고만 동리사람들 한테 소개하였다.
(이분이 바로 후기에 和龙市纪检委 主任직과 和龙市检察局 检察长직에서 공작하셨던 나의 사촌형님 玄万硕(1924~1985)이다. 문화혁명기간에 그도 몹시 충격을 받았지만, 자기 삼촌의 당년의 뜻을 따라 광복직전의 그 일본군 경력만은 시종 다시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벌한 환경에서도 맞아 죽지 않았고, 후에 락실을 받고 다시 공작까지 할수 있었다.)
그후 얼마 안되여 강성촌에도 농회조직이 성립되였는데, 나의 아버지께서 강성촌 농회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나의 어머니께서 강성촌 부련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였으며, 나의 사촌형님 万硕이는 강성촌 농회 보위간사로 당선되였다. 온집 사람이 모두 혁명의 길에 들어선 셈이 되였다.
1947年도 한동리의 延日鄭氏가문에 좋은 혼처가 나서자,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자기들의 조카를 결혼시켜 주었으며, 새살림까지 꾸려주어 세간 나가도록 하였다.
1949年 공화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강성촌에서도 토지개혁을 시작하였는데, 모두 농회간부인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작때문에 눈코 뜰사이 없이 바삐 보냈다. 그후 얼마 안되여 万硕이는 和龙县 公安局에 발령을 받고 올라갔다.
 
제七회: 강성촌을 떠나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의 마음을 항상 아프게 찌르는 일이 한가지 있었는데, 결혼하여 15年 사이에 선후하여 이미 어린자식들을 아홉이나 몽땅 요절시킨 그일이다. 나의 어머니는 가사 처리나 사회활동 방면에서는 능력이 뛰여난 분이시였지만, 어머니로서는 아직 《합격증》을 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홍진》이라는 전염병이 몹시 성행하였는데, 그때의 의료조건하에서 어린 아이들이 이 병에 전염되기만 하면 십상팔구는 죽었다. 어린 아이가 이병에 전염되지 않게 하려면, 상당히 엄격한 격리조치가 필요하였는데, 나의 어머니는 성격상에서 너무나 활동형이였기 때문에, 번마다 격리조치에서 실패 하였던 것이다.
그당시 半载驿(지금의 和龙市 东城镇)철로에서 양로단 단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의 어머니의 큰 오라버님께서는 자기 누이동생의 불행에 대하여 몹시 걱정하고 계셨다. 고심끝에 유일한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길밖에 없다고 인정하셨다. 자기 누이동생을 소위의 공작에서 해탈시키고, 좀 편한곳에 보내서 모든 정력을 아이를 키우는데 돌릴수 있게끔 새환경을 주어 보리라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1950年에 나의 아버지를 팔가자 철로 양로단에 취직시켜 주셨고, 나의 어머니가 안정된 환경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면서 안전하게 애를 낳아 기를수 있게끔 하려 하였다.
그런데 팔가자 철로에 와서 나의 어머니는 또 아이 하나를 잃었다. 조금도 조용히 있을줄 모르는 나의 어머니는 안정된 환경에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는것이 아니라 몇몇 철로 부녀들과 함께 철로연선의 공지에 숱한 밭을 일구고는 또 제 본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던 것이다.
몹시 상심한 나의 아버지께서는 철로일을 그만 두고, 고금을 내고, 그 부근 농업 합작사에 입사하여 다시 농민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1952年도의 일인데, 그 당시 나의 아버지께서는 군대 규률처럼 엄격한 철로보다 비교적 자유스러운 농촌환경이 아이를 키우는데 더욱 합당하다고 인정하셨던 것이다.
아이를 열이나 요절시킨 나의 어머니께서도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자기의 성격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집에서 돼지나 닭같은 가축을 기르면서 의식적으로 가외 접촉을 공제하였다.
1951年 아버지한테는 5촌조카라는 이십대 청년이 찾아 왔다. 그는 이름이 원식(元植1932~1957)이라고 하였는데, 나의 세째 할아버지(贞宗)의 손자였다. 5년전에 아버지가 사망한후 사회를 휩쓸며 싸움질만 하며 다녔기 때문에 유약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단속할 방법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가문의 어른한테 보내여 단속하면 좀 사람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가문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를 밀어버릴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집에 들이고는 합당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 사이 그는 벌써 허래성 벌판의 싸움세력들을 몽땅 손에 넣고 쌀개를 피워 댔다. 아침이면 우물가에 가서 물동이를 인 고운처녀를 보면 슬그머니 옆에 접근한후 불시에 키스해 버리군 하였다. 그녀들은 물동이를 이고 있는지라 어쩔수 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물동이를 깨여버린 집도 여럿이였는데, 어쩔수 없이 아버지가 그 값을 배상해 주고 사과 해야만 하였다.
몇번 일자리를 찾아 일을 시켜보았지만 이미 야인이 된 그가 안착할리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를 장가 보내 주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는 벌써 허래성 벌판에서 제일 고운 처녀 몇을 점 찍어두고 있었다. 결국 이도구의 鎭川趙氏네집 큰딸이 지목되였는데, 참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처녀였다.
1952年 음력설에 혼례식을 올리고 살림까지 마련하여 주었다. 이 방법이 확실히 효험을 보아 그는 다시는 싸움질 하지 않았으며, 일도 찾아하군 하였다. 그 이듬해 아들까지 낳았는데, 아이의 이름을 忠烈(1953~)이라고 지었다. 소문에 조선에 가면 한창 복구건설시기여서 좋은 일자리를 찾을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 부부는 젖먹는 아이를 안고 조선으로 건너 갔다.
그런데 조선에서 2년후의 어느날, 그의 안해가 너무 출중하게 아름다웠던 탓에 그만 조선 깡패들의 눈에 들고 말았다. 조선 깡패들은 트집을 잡아 원식이와 싸움을 걸고는 그의 안해를 끌고 갔는데, 그의 안해는 결사적으로 반항하는 과정에 돌에 머리를 박고 자결하고 말았다.
원식이도 워낙 유명한 싸움꾼인지라 몇놈은 쓸어 뜨릴수 있었지만, 혼자서 그많은 깡패들을 당해내는 수가 없었다. 그는 아이를 구하는것이 급하였는지라, 많은 매를 맞으며 아이를 구하여 가지고 겨우 빠져 나왔다.
그는 조선에서 안해를 잃고 아이만 구해 가지고 중국에 다시 건너 왔는데, 아이를 자기 어머니한테 맡기고, 2년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1957年 그도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밖에 안되였다.
이것은 우리가정의 또 하나의 에피쇼드이다.
 
: 아기 접수의식
1953癸已年四月十八日, 어머니께서는 또 아이 하나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나였는데, 나는 어머니에게서 제 열한번째 아이로 태여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어느때보다 달랐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낳으신후 나를 볼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인젠 더는 실패를 감당할 심리능력이 없었고, 이번까지 실패하면 아버지께서는 철저히 붕괴될것만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염씨성을 가진 덕망높은 의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일련의 특수한 민속 방토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태여나자마자 생모한테는 보이지 않고, 포대기에 싸서는 이미 약속이 되여 있는 양어머니(김련분1928~2005) 한테 가져갔는데, 이집에서 백날을 지내야 하였다. 그 사이에 생모는 이집 근처에서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하였다. 생일은 《四月十八日》을 이틀 앞당겨 《四月十六日》로 종이에 써 놓았다. 그리고는 나를 안고 소 외양간에 들어가서 포대기에 소똥을 묻히면서 소똥을 밀어내는 작은 똥구멍으로 나를 바같에 빼내온후, 《쇄지야, 음매!》하고 웨친다. 새끼소가 태여 났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나의 이름은 《쇄지》로 되였다. 《쇄지》라는 말은 농촌 사투리인데 송아지라는 뜻이다. 소는 생명력이 특별히 강한 동물로서, 새끼소는 태여나서 한시간만에 자체로 일어나 뛰여 다닐수 있다.
50年이 지난 2004년, 나의 양어머니께서 사망하시기 한해전에 나를 불러놓고 그때의 그 괴상한 행사들을 해석하여 주었다;
그 당시에 밤이 되면 아이들만 전문 업어가는 《어베》라는 死神이 있었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이전에 아이들이 울때 어른들이 왕왕 《어베 온다.》라고 하는데, 그려면 아이들은 울음을 뚝 그치군 하였다. 나의 어머니가 또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그 《어베》가 제일 먼저 알게 되는데, 이미 열번이나 우리집에 와서 성공적으로 아이를 업어 가서 재미를 붙였기 때문에, 얼씨구나! 하면서 밤을 기다려 지체없이 인차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베》가 이번에 나를 업어 가려고 찾아 오게되면 그만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새로 낳았다는 아기가 사람이 아니라 송아지고, 생일이 다르고, 집이 다르고, 임자가 다르고, 또 소똥냄새까지 확실하게 나므로 어리벙벙해 있다가, 새벽 수탉이 울면 돌아 가야 하는데, 이렇게 백날까지 속이면 그 死神도 재미를 잃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리유였지만, 나는 그로부터 죽음의 액운에서 벗어나 이미 60여살까지 살아왔으며, 그때로부터 우리집에서는 다시는 아이들이 요절되는 일이 없었다.
백일이 찬후, 덕망높은 염의사(원 팔가자 중남위생소 원로 의사, 원 중남대대서기 염의택의 부친)의 감독하에 고마운 양어머니와 나의 어머니 사이에는 《아기 접수의식》이 있었다.
아침을 끝내고, 양어머니께서 아기를 목욕시켜 업고, 팔가자 역전에 나가 가장 큰 나무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나의 어머니께서 그앞에 가서 깊은 인사를 올리고, 사례금을 바치고, 새 포대기에 아기를 바꿔 싸서 안고는 그곳으로부터 쭈크린 앉음 걸음으로 집까지 가야 하였다. 아마도 어머니의 과도 활동형 성질을 고쳐주기 위하여 염의사가 고안해낸 조치였다고 짐작된다. 그 당시 우리집은 길아래 새마을에 있었는데, 역전부터의 거리가 300m는 푼히 되였다.
전대미문의 《아기 접수의식》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구경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새 포대기에 싸서 안고는, 쭈크린 앉음 걸음으로 오리처럼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옮기면서 천천히 집으로 향하였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집에 그때의 그 장면이라고 짐작되는 사진이 한장 있었는데, 가석하게도 문화혁명 기간에 없어졌다.
때는 9月중순이라 정심때가 되면서 날씨는 그래도 무더워 났다. 아버지께서는 아기 먹을것이랑 두루 넣은 가방을 메고, 양산을 들고서 시종 나의 어머니 옆에서 시중 들어 주셨다. 동네의 아기 어머니들은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분분히 사탕가루, 홍탕 등 그 당시에는 아주 귀중한 아기 영양품들을 조금씩 가져다가 나의 어머니옆에서 시중 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의 가방에 넣어 주었다. 한 순박한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苦行에 대하여 성원과 지지의 뜻이였으리라.
《아기 접수의식》은 저녁켠이 되여서야 끝났는데, 그 사이 염의사는 호사를 데리고 세번 현지에 나와 아기와 어머니를 진맥하고, 주사를 놓아 주었다. 어머니께서는 《오로지 아들을 위하여!》라는 하나의 신념으로 혹독한 《아기 접수의식》을 원만히 완수하셨다.
후에 어머니께서는 종종 이일을 말씀하시며, 이렇게 하면 내 아들이 다시는 죽지 않을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기는 혜택을 받는 기분으로 한없이 감사하기만 하더라고 하셨다. 지금 사람들한테 이런 처벌이 내려지면 인격모독이라고 펄쩍 뛰겠지만, 그 당시 어머니로서는 얼마나 감사한 혜택으로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그후에도 나는 자라면서 여러번 큰병을 앓았는데, 모두 염의사 덕분에 죽지않고 살아났다. 이 세상에 신선이란것이 하늘에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염의사같은 분이야말로 우리 신변에 있었던 진짜 신선인 것이다.
고 염의사의 명복을 두손모아 비는 마음이다.
 
: 동성용에서
1956年 내가 네살나던 해에 화룡지역에서 또 홍역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께서는 또 임신중이시였다. 또 홍역이 돈다는 소식을 들은 나의 아버지께서는 너무 질겁한 나머지 부랴부랴 짐을 꾸려 가지고 집이고 밭이고 다 버리고 팔가자를 떠났다. 그리하여 새롭게 정착한곳이 지금의 龍井市 东盛涌鎭 昌盛村 자리다.
东盛涌에서 나는 2년동안의 유년기를 보냈는데, 그때의 일들이 몇가지는 어렴풋이 생각난다.
우리집은 세 세간이 한데 붙은 긴 남향집이였는데, 동쪽집이 우리집이였고, 한 50평방쯤 되였으리라 짐작된다. 가운데 집은 작은 살림방이였는데, 우리 유아원 녀선생님이 그집에 계셨다. 내가 유아원에 갈때나 올때에는 항상 그 녀선생님한테 업히워 다녔다. 우리집은 동쪽으로 뜰악 출입을 하였고, 뜨락을 나서면 동쪽 맞은켠에 검은 대문을 한, 옛 부자집 장원이 있었는데, 집체 창고로 쓰고 있었다. 동북쪽으로 옛 비행장이 멀리 보였고, 남쪽으로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맞추어 기차가 달리는것이 보였다. 동남쪽으로 나가면 농용 관개수로가 있었는데, 팔뚝같은 고기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으며, 빨래하던 아낙네들도 방치로 서너마리는 쉽게 때려잡았다.
내가 东盛涌기간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아버지한테 혹독하게 매를 맞았던 일이다. 누구네 상가집이였는데, 아버지가 상여를 메고 가는것을 보았다. 나는 장례행렬이 너무 재미있어서 따라가며 구경하였다. 아버지가 몇번 큰소리로 나를 돌아가라고 웨쳤지만 나는 들은척도 안 하였다. 불시에 아버지는 상여를 내려놓자고 호통을 쳐댔다. 상여는 열사람이 함께 메게끔 되여 있었는데, 모두들 영문 모르고 상여를 내려 놓았다. 아버지는 나한테 달려 오더니 나를 몹시 아프게 때렸다. 다시는 이런 곳으로 오지말란다. 아버지는 내가 사람주검 옆에서 서성대는것이 그렇게도 싫었으리라.
그해 시월에 나의 녀동생 善子가 태여났다. 팔가자에서 《아기 접수의식》의 세례를 겪은 어머니의 성격은 인젠 많이 침착하여 졌으며, 많이 자상하여 졌다. 아마 그 덕분이랄가? 나의 녀동생 善子는 태여나면서 부터 별탈이 없이 잘도 자랐다. 어머니는 바깥일을 별반 나가시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만 돌보았으며, 젊고 경험이 많은 아버지는 몇번 생산소대 업무 대장으로 선출되였지만 번마다 사절하였다.
얼마 안되여 전국적으로 대약진 운동이 일어나면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정치적 선전 고동의 세찬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제 겨우 잠잠해졌던 어머니의 마음은 또다시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몇번의 사원대회에 참가하여, 아기한테 젖을 먹이면서 토개때의 밑천을 꺼내여 몇번 정치발언을 한것이 공로가 되여, 어머니는 생산소대 부녀대장으로 선출되였다. 그런데 보아하니 어머니 본신도 굳이 사절하려는 뜻이 없었다. 급해난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업무대장직을 맡겠으니, 제발 집사람을 부녀대장을 시키지 말아달라고 사정하였다. 일이 이쯤되자 상급의 공작대 대장은 아버지의 사상이 너무나 보수적이라고 엄숙히 비판하면서 장편 정치연설을 하였다.
결국 아버지는 자기가 이미 대답하였으니 어쩔수 없이 업무대장직을 맡게 되였고, 어머니는 군중선출에 의하여 여전히 부녀 대장직을 맡게 되였다. 그야말로 혹떼려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혀 온 격이 되고 말았다.
 
제十회: 다시 팔가자로 이사
그럭저럭 일년을 부대끼다가 년말에 아버지께서는 룡정에 가서 사흘동안 농촌간부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돌아 오니까, 집에서 맡아 기르던 생산대의 둥글소를 도적 맞혔던 것이다. 그사이 어머니께서도 어린 善子를 업고 고급사 회의에 참석하려 가고 집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유아원의 녀 선생님한테 맡겨져 그집에서 자고 있었다.
회의에서 돌아온 아버지께서는 너무 통분하여 꼭괭이로 소 외양간 나무문을 쳐부신것이 문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말았다. 후날 내가 그 나무문에 난 구멍을 보고 왜 저런가고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글쎄다. 지난밤 우리 외양간에 말승애 왔다간 모양이구나.》 하고 말씀 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그후 그 소도적은 붙잡았지만 소는 찾아오지 못하였는데, 그로하여 우리집은 생산대에 많은 돈을 물어넣게 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어린 善子가 홍역을 앓게 되였다. 그당시 아직 홍역왁찐이 보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홍역은 사람이 죽어서도 한다는 설법이 있었다. 다행히 善子는 그번 홍역을 용하게 이겨 냈는데, 그당시 이미 제고된 의료수준과 어머니의 효과적인 간호에도 그 원인이 있었으리라.
두번 련속 크게 놀란 아버지께서는 계속 이곳에서 정치에 얽매워 부대끼기 싫어졌다. 이곳에는 자기한테 불안전 인소가 너무 많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이러다가 그 어는때에 아이들한테 또 날벼락이 떨어질가봐 두려웠다. 어떻게하면 한개 가정에 차려진 두가지 대장직무에서 해탈될수 있겠는가? 유일한 방법은 이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원래 살던 팔가자 중남대대에 가서 다시 돌아 올것을 신청하였다. 그 당시 농촌 어디에서나 대약진 운동을 하느라고 로동력이 아주 수요되는 때였으므로, 아버지의 신청은 쉽게 비준되였다.
아버지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마을에서는 극구 만류하였으나, 이미 갈뜻이 정해진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직채 물지 못한 소값으로 사던집을 그대로 소대에 남기고, 이불 몇채와 옷 보따리 몇개만 가지고 东盛涌을 떠나게 되였다.
그해가 1958年도였으니 내가 여섯살, 녀동생 善子는 세살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의 우리집은 이미 네식구로 불었으니, 총체적으로는 발전한 셈이였다.
东盛涌에서 룡정 기차역전까지 10여리 잘 되였는데, 어머니는 어린 善子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커다란 보짐을 이고, 아버지는 커다란 이불짐을 등에 지고, 나의 손을 잡고서 길을 떠났다. 길에서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많은 옛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 무슨 도깨비요, 귀신이요, 하느님이요, 칠선녀요 하는 이야기들이 그렇게도 재미 있어서, 나는 10여리 길이 힘든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별반 말씀이 없으셨는데, 줄곧 그 무슨 일을 묵묵히 상념하고 계시는 듯 싶었다.
룡정역전에 도착하여 나는 처음으로 기차가 정착하여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가까히 가서 그 웅장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렇게 우리가정의 东盛涌생활은 막을 내렸다.
팔가자에 도착한후, 우리집은 중남대대 제1생산소대에 편입되였다. 아버지는 아이 이름이 《누가》라고 부르는 집의 아래칸을 빌어서, 온돌을 놓고 짐을 풀었다. 그집은 그당시 그 지역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전통 조선식 가옥이였는데, 이영은 짚으로 되여 있었지만, 마루가 넓은 나무판으로 되여 있는것이 특징이였다.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우니 천정에 도배한 신문지에 《연변일보》라는 머리글자가 도처에 보였는데, 모두 거꾸로의 위치였다. 잠이 배인 눈으로 거꾸로 된 그 네글자들을 물끄럼히 보노라니, 마치도 먼길로 이사 떠나는 우리집 식구들 같았다. 거꾸로 된 《보》자는 마치도 보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어머니 같았고, 거꾸로 된 《》자는 마치도 목도리 두루고 나의 동생을 업은 아짐이 같았으며, 거꾸로 된 《》자는 등짐을 메고 있는 아저씨 같았고, 거꾸로 된 《》자는 나를 업고 있는 아버지 같았다. 그런데 저 아저씨와 아짐이는 도대체 누구인지 알길 없다. 나는 날마다 그 글자들을 보면서 잠이 들군 하였다.
집이라고 안치해 놓은후, 아버지는 외지 민공으로 떠났다. 나는 다시 유치원에 다니게 되였고,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마을을 다니며 장난도 치고, 또 새친구들도 사귀고 하였다.
우리 아래집에 나 또래의 녀자애가 있었는데, 그집 할머니는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하셔서 나는 자주 그집으로 놀러 갔었다. 그 할머니는 언제인가 면풍(口眼歪斜)이 오셔서 면상이  좀 일그러 졌는데, 이야기를 할라치면 손시늉으로 그럴듯이 표현까지 하면서 하는데, 아이들의 넋까지 뺏어갈 지경이였다.
그 당시에 아이들에게는 별로 놀이감이 없었으니, 남자애들의 과외 유회로는 주로 닥가라, 메뚜기치기, 딱지치기, 딸로치기, 다마치기 등이 있었고, 밤에는 또 《봤다꿍》이라는 놀음이 있었다. 하여튼 하루하루가 재미있기만 하였다.
그해 7월의 어느날, 유치원에서 돌아오니 우리집에 숱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급히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가 보니 어머니가 한발을 큰 옹배기에 담그고 있었는데, 옹배기에는 돼지똥물이 그득 차 있었다. 왜 이러는가고 물었더니 어머니 말씀이; 《뱀한테 물렸다. 내 새끼 못보구 넘살령 하는가 했더니, 네가 왔구나. 돼지똥물이 냄새 쿠려 그렇지, 인젠 부은것이 많이 내렸다.》
어머니는 아침에 채마밭에 갔다가 뱀한테 물렸다. 머리수건을 찢어 지혈시키고 수레에 앉아 내려 왔는데, 이미 위생소에서 처치는 끝냈지만, 다리가 올리 부어나면서 통증이 심해지는 통에, 누구인가 알려준 민간료법으로 돼지똥물에 발을 잠그고 있는 중이였다.
그날밤 어머니는 통증으로 몹시 고통스러워 하면서, 눕지도 서지도 못하고 시종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내 손과 어린 선자의 손을 꼭 잡고, 땀을 비오듯 흘렸다. 우리는 돼지똥 냄새를 맡으며, 시종 어머니옆에 기대여 있으면서, 물도 떠다 드리고, 땀도 닦아 드렸다. 밤이 깊어가자 어린 선자는 어느사이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나도 자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그 사이에 죽을가봐 겁이 났다. 이렇게 어머니는 반혼미 상태에서 여러날 고생하였는데, 나는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어린 선자와 함께 어머니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드렸다. 그때는 농촌 집체식당때였는데, 우리 앞집이 바로 집체식당하는 집이였지만, 나는 내가 곁을 떠난 사이에 어머니가 죽기라도 할가봐 두려워 밥 타려 가지도 못하였다. 다행히 동네분들이 우리밥을 가져다 주었길래 우리는 굶지 않을수 있었다.
며칠후,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민공에서 돌아왔는데, 산에서 민간료법으로 약을 손수 만들어 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우리는 너무 기쁜김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사이 우리는 울고 싶어도 감히 울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강한 의지와 자식들의 무한한 기대, 그리고 아버지의 극진한 정성에 힘입어 어머니의 상처은 점점 호전되였다. 어머니의 상처가 좀 호전되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수레에 앉혀 가지고, 10여리밖의 이도구에 있는 의사집으로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의 그때의 상처는 한달 푼히 치료 받아서 낳아졌지만, 그 상처자욱만은 1997年 어머니가 80세 고령으로 사망하셨을 때까지도 력력히 남아있는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제十一회: 약암동 흉년세월
1960年 우리는 팔가자 중남대대 남산 너머에 있는 약암동이라는 곳에서 살게 되였다. 림시로 외딴 창고를 수리하여 문을 달고, 구들을 놓고, 살림집이노라고 만들어 놓은 십여평방되는 오두막이였다.
이해가 극심한 삼년 자연재해의 첫해이며, 전국적으로 대기황이 폭발한 첫해이다.
아버지는 우리집 식구들을 안치해 놓고는 또 민공으로 떠났다. 이해 3월에 나는 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마을 뒤의 령을 넘어 중남소학교까지 사오리길은 되는것 같았다. 그해에는 년초부터 눈이 어찌나 자주 오는지, 그곳에서 학교 다니던 기억에는 온통 허벅다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엎어지며, 구을며, 장난치며, 다니던 기억밖에 없다. 그때에는 키가 작았으니까 그럴수도 있었으리라.
신이라는것은 헌 헝겊으로 발을 두텁게 감고, 아버지가 신던 여름 고무신안에 그대로 넣고, 노끈으로 이리저리 동여 매였다. 그때에 새신을 신고 싶다는 것은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생각이여서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헌솜옷을 뜯어 고쳐서 나의 솜저고리를 지으셨고, 모자는 머리에 아버지의 목수건을 동이고, 아버지의 옛날의 개털모자를 그대로 눌러 썼다. 나는 그래도 아버지가 광신에서 공작할때의 공문가방이 있어서, 거기에 책을 넣고 어깨에 메고 다닐수 있었지만, 많은 아이들은 가방이 없어서 헝겊보에 책을 싸서는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그런데 이런것쯤은 큰 문제가 될것 없고 얼마든지 견뎌낼수 있었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것은 먹을것이 없는 문제였다. 괜찮은 곳에서는 하루에 한사람당 쌀을 한량씩 공급하였는데, 많은 곳에서는 그것조차 없었다. 모자라는 부분은 대리식품으로 보충하여야 하였는데, 대리식품이란 사람이 먹어서 일시 죽지만 않는다면 그 무엇이든 리용이 가능한 것이였다.
봄이 되자 산의 산나물들은 땅우에 미처 돋아나기도 전에 이미 뿌리채 몽땅 거덜이 났고, 다른 풀들도 독초가 아니면 모두 먹을수 있었다.
좀 고급적인 대리식품 재료로는 비술나무 껍질이였는데, 그것을 가공하여 만든 대리식품을 《난치떡》이라고 하였다.
그다음 좀 괜찮은 재료라고 하자면 소나무 껍질인데, 소나무 껍질을 가공하여 만든 대리식품을 《송진떡》이라고 하였다. 이런떡을 먹으면 뒤가 막히면서 변을 보기 어려웠다.
그다음 또 《전분떡》이라고 하는것이 있었는데, 콩깍대를 삶아서 가루낸후 그것을 가공하여 만든것인데, 경상적으로 먹으면 낯이 딩딩 붓긴다.
이 외에도 그 당시 발굴해낸 대리식품 품종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나는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어린 선자를 데리고 앞산에 올라가서 전문 쑥풀뿌리를 캐여 먹었다. 그당시 그것이 참으로 맛있었다. 저녁녘에 어머니가 큰소리로 불러서 집으로 내려오면, 온 입안에 흙이 그득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생활은 쾌활하기만 하였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하면서 근심걱정을 몰랐다. 어린 선자는 일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그당시 어머니는 또 임신중이시였는데, 늘상 우리들을 보고는 《얘들아! 내 이제 저기 다리밑에 가서, 너희들의 동생을 하나 데려오겠는데, 남동생이 좋겠냐? 녀동생이 좋겠냐?》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남동생!》하고 소리 지르고, 어린 선자도 지지않고 《녀동생!》하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는 둘이서 다툼이 시작되는데, 어머니는 언제나 나의 편을 들어주셨다. 그러면 어린 선자는 항의의 뜻으로 울음을 터뜨리군 하였다.
1961年 원단전날 저녁에 동기 목재 채벌에 갔던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남의 부축을 받으며 집에 들어선 아버지께서는 《에구야! 다 왔구나!》하면서 신을 신은채 구들에 쓰러지더니 일어날 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만삭이 된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신을 벗겨 드린후, 나와 어린 선자가 합심하여 《어기영차》를 부르며, 아버지를 구들우의 따뜻한 가마목 쪽으로 끌어 올렸다. 이불을 덮여 드려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 보니, 피골이 상접하고, 두 눈이 푹 꺼져 들어간것이 마치도 해골 같았다. 나는 한손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어 드렸다.
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뜨시더니 낮은 소리로 《얘! 저 가방 열어보렴!》하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가방을 가져다 열어보니, 거기에는 콩알사탕 두봉지가 들어있었다. 나와 어린 선자는 너무 좋아 환성을 올렸다. 나는 사탕알을 입에 넣고 녹이느라고 여념이 없는데, 어린 선자는 퐁퐁 뛰면서 사탕알을 어머니 입에도 넣어 드리고, 아버지 입에도 넣어 드리면서 부산을 떤다. 아버지는 눈을 감은채 빙그레 웃으신다. 아버지는 분명 굶어서 지치셨다.
이튿날 어머니께서 만삭이 된 몸으로 조양천에 계시는 친정집을 찾아갔다. 그때 어머니 친정집 친척들은 모두 공인호구였기 때문에 생활형편들이 비교적 좋았다.
이튿날 어머니께서는 수수쌀 한자루를 이고 돌아 오셨다. 그리고 돈도 좀 가지고 온것 같았다. 어머니의 극진한 공양속에서 아버지는 아주 빨리 원기를 회복하셨다. 원기를 회복한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며칠동안 무언가 상론하시더니 어느날 안쪽(관내)으로 떠나갔다.
음력설을 일주일 앞두고, 어머니께서는 나의 두번째 녀동생 춘자를 낳으셨다. 어린 선자는 자기 요구대로 어머니가 녀동생을 데려왔다고 우쭐해 댄다. 그 당시 어느집에서 아이를 낳게되면 공소사로부터 규정된 수량의 사탕가루와 홍탕을 살수 있었는데, 그 구매권 발급은 촌의 부녀주임이 관할하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무엇이 잘못되였는지 그 구매권을 가질수 없었다. 이 일로하여 어머니가 그곳 부녀주임과 다투시는것을 나는 여러번 보았다. 사탕가루와 홍탕은 통제상품으로서, 구매권이 없으면 돈이 있어도 살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우유가루라는것이 없었고, 모유가 없는 아기들은 보통 사탕가루와 홍탕을 찹쌀가루, 콩가루 등에 섞어 안죽이란것을 만들여 먹였다. 그런데 우리집은 사탕가루와 홍탕이 없으니, 가련한 춘자의 어린 생명이 굶어서 요절될 위협에 처하게 되였다.
음력설이 지나 며칠후, 상상밖으로 안쪽으로 떠났던 아버지가 랑패상을 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굶어 죽게된 형편에서 궁여지책으로 어머니와 상론하고, 화북성 定州에 있는 어머니의 조카녀를 찾아갔다.
그 조카녀는 어머니의 제일 큰 오라버님의 딸인데, 이름이 리순녀이고, 나한테는 외사촌 누님이 된다. 초년에 부모를 모두 잃고, 셋째삼촌과 큰 고모인 우리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어렵게 살다가, 1949年 스믈두살의 나이에 참군하였다. 조선전쟁이 터지자 지원군에 편입되여 조선에 나가서 모 부대병원에서 호사로 근무하였다.
한번은 폭탄에 중상을 입은 지원군 공군부대의 朱显换이라는 기계 기술병을 간호하게 되였는데, 그 과정에 서로 감정이 맞아 자기보다 열살 우인 그사람과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후 그가 근무하던 부대병원도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당했다. 그도 폭격에 맞아 중상을 입고, 수술을 받았는데, 왼쪽 갈비뼈를 몽땅 잃었다. 전쟁이 끝난후, 그들은 퇴대하여 정식 가정을 이루고, 남편이 화북성 定州의 한 국영 기업에서 공작하고 있었다. 남편이 국영 기업에서 공작하고, 또 두분 다 국가 일급 잔페 영예군인인지라, 국가로부터 많은 무휼금이 나오므로, 그들의 생활은 그 당시 표준에서는 상당히 우월한 형편이였다.
아버지가 어려운 길을 걸어 처 조카녀의 집에 갔을때, 그들은 자기들의 초년의 은인인 고모와 고모부의 사정을 몹시 동정하면서, 많은 옷과 식품을 큰 트렁크 두개에 챙겨 드렸으며, 돈도 적지않게 장만하여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북경 역전에서 한 도적패에게 당하여, 트렁크 두개를 몽땅 잃었다. 다행히 돈은 몸에 간수하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객지 귀신이 될번하였다. 어머니는 사람이 다치지 않고 몸성히 돌아왔고,  또 돈도 얼마간 살렸으니, 그까짓 두 트렁크의 물건을 운수땜 한셈 치자고 하면서 아버지를 안위하여 드렸다.
어머니는 남의 눈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조금 있는 돈으로 웃돈을 더 주면서, 다른 아이 어머니들 한테서 사탕가루와 홍탕을 좀씩 얻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까짓 돈은 인차 바닥이 났으며, 갓난 춘자는 엄중한 영양실조에 걸려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봄이 되자 아버지는 어쩔수 없이 또 민공으로 떠났다. 떠나는날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업히운 어린 춘자의 조그마한 손을 쥐고 흔들면서 손에서 놓을념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속으로 이번에 가면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할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날씨가 더워지면서, 어린춘자는 또 여러가지 질병에 걸려 괴상하게 기침을 짗으며, 열이 자주나군 하였다. 어린 춘자의 모양은 마치도 못난 새끼고양이 같았다. 어머니도 인젠 맥을 버린듯 싶었다. 어머니가 종종 혼자말로 중얼댄다: 《네 명이 박해서 죽겠으면 좀 빨리빨리 죽어라. 이그! 이그! 네가 사람 피를 다 말리우는구나…》
그런데 천명이 아직 죽을 운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험악한 환경에서도 죽지않는 수가 있더라!
6월의 어느날, 중남대대 위생소의 염의사께서는 자기의 부인을 우리집에 보내셨다. 소문에 또 아이를 낳았다 하는데, 좀 가서 형편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염의사 부인께서는 약암동령을 넘어서 우리집에 올때 사탕가루와 홍탕을 조금 가지고 왔다. 위생소에 약제용으로 얼마간 준비해 두었던 것이였으리라.
염의사의 부인께서 우리집에 도착하시여, 《쇄지 있냐?》 하고 나의 애명을 부르시면서 바당문을 여시였다. 불시에 “웡-”하는 소리와 함께 컴컴한 집안 가마목에서 파리떼가 연기처럼 솟아 오른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바줄의 수건을 벗겨 파리떼를 쫓아내고 보니, 집안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가마목에 큰 광주리가 놓여있었다. 그 광주리안을 들여다 보니 조끄만 고양이같은 아이 하나를 눕혀 놓았는데, 코밑에 손을 대보니 이미 숨이 알리지 않았다. 급히 돌아 나오며 큰 소리로 나의 어머니를 불렀다: 《쇄지 에미 있소? 에그! 이년이 죽은 아이를 집에 두구 어딜 동네돌이 갔나?》
앞 개천에서 빨래하던 어머니는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염의사 부인께서는 큰 소리로 어머니를 꾸짖으셨다: 《이사람아! 정신나갔네. 죽은 아이 집에 두구 어델 갔댔나?》 어머니는 어설프게 웃으며 《어디 그리 쉽게 죽기나 함둥? 저러다가 해가 지믄 또 살아 나꾸마.》. 그말을 듣고 정신이 펄쩍 든 염의사 부인께서는 《그래? 그럼 아직 안죽었니? 빨리 아이를 포대기에 싸라! 나와 같이 우리 영감한테 가자!》… ….
그후 어린 춘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염의사는 어린 춘자를 치료하면서, 한편으로 우리가정의 정황을 대대에 반영하였고, 대대에서는 또 우리가정의 정황을 서성향 정부(그 당시 팔가자는 서성향 정부에서 관할하였다.)에 반영하였다. 서성향 정부에서는 조사인원을 우리집에 내려 보내여 조사한후, 사탕가루와 홍탕의 구매권을 보상하여 주었으며, 그 약암동 부녀주임과 대장은 처분을 받은후 어디론가 이사가 버렸다.
모두가 염의사의 덕분이다. 염의사께서는 우리 가정에 이렇게 큰 은공을 주셨지만, 아무런 보답도 받지 않으시고 이미 저 하늘나라에 가서 계신다. 고 염의사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면서, 그의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제十: 다시 중남1대로
삼년 대기황이 끝난후, 1963年 우리집은 다시 중남대대 제1소대에 돌아오게 되였다. 《당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하더니만 우리집은 이미 다섯 식구가 되여 돌아왔다.
그 이듬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달 두고 상론하시더니, 그들이 여직까지 소중히 보관하여 오던 결혼때의 례복들을 팔기로 최후 합의 하셨다. 어머니는 당년의 일본뉴동으로 만든 검은 치마저고리 한벌과, 아버지는 당년의 쏘련니즈로 만든 국방색 결혼례복 아래웃 한벌씩 팔기로 하였다. 그당시 이런 물건들은 아주 휘귀한 것들이여서, 혼수품을 준비하고 있는 집이라면 우선적으로 욕심을 내는 물건들이였다.
사람을 내세워 모두 500원 받고 팔았다. 이돈에서 300원 주고 낡은 초가 한채를 사고, 나머지로 가정기물들도 얼마간 갖추어 놓았다. 동성용에서 이불과 옷보따리만 달랑 가지고 팔가자에 이사온후, 6년만에 있게된 자기의 집이다.
그후부터 아버지는 일년의 대부분 시간을 민공에 가 계셨고, 어머니는 낮에는 생산소대에 나가 집체일에 참가하고, 밤이면 누가어머니와 합작하여 밤늦게까지 벼짚으로 가마니 짜기 부업을 하였다.
그당시 가마니는 주로 홍수방지에 많이 쓰이였는데, 수리건설이 락후하였기 때문에 해마다 홍수가 터지군 하였다. 그리하여 유관부문에서 해마다 많은 가마니를 수구하여 저장하게 되였는데, 그 수요량이 제한없이 많았고, 지불해 주는 값도 그리 각박하지 않았다.
그당시 집체일에 참가하면 공수기입제를 실시하였는데, 일년 년말에 가서 총결산하고 분홍을 내여주었다. 일한날에 따라 계산해 보면, 하루에 잘 벌어서 그때돈으로 1원 좌우밖에 안되였다. 민공으로 가면 공수를 좀 높으게 받을수 있었는데, 하루에 거의 2원은 벌수 있었다.
그런데 가마니 짜기를 하면 하루 저녁에 다섯장은 짤수 있었는데, 한장에 그때돈으로 40전씩 하였으니 하루저녁에 2원을 버는 셈이다. 두집에서 나누어 가져도 낮에 온 하루 집체일에 참가하여 버는 수입에 맞 먹는다. 한 열흘씩 짜면 50여장 되는데, 수레에 높이 싣고 공소사에 가서 팔면 직접 현금으로 지불하여 주었으므로, 진짜 크게 횡재한 우쭐한 기분이였다.
그러나 농망기에 집체일에 참가하지 않고 낮에도 집에서 가마니만 짠다면 사원대회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 누구네나 모두 이렇게 한다면 집체는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농촌 집체경제 시기에 가마니 짜기 부업은 가정 경제수입의 가장 중요한 래원의 하나였으므로, 집집마다 거의 짜지않는 집이라곤 없었다. 우리지역에서 가마니 짜기 부업은 집체 농민들의 개인 민생문제를 보조적으로 해결하여 줌으로써, 집체틀에 얽매인 농민들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데 있어서 참으로 마멸할수 없는 력사적 공헌을 하였다.
우리집에서 선자는 열살부터 가마니 짜기에 나섰다. 그가 직접 가마나 짜기에 나서게 되니, 초기에는 좀 서툴었지만 남과 합작하기보다는 수입정황이 많이 좋아졌다. 후기에 와서 그의 가마니 짜기 솜씨는 온 동네에서도 첫손꼽힐 정도로 날쌔였는데, 우리집은 전 대대적으로도 소문이 있는 가마니짜기 대호로 되였다.
후기에는 무시로(황연 포장용) 짜기가 보급되였는데, 많은 겹손이 필요하였다. 무시로를 다 짜서 틀에서 뚜루룩 하고 끊어내면, 옆이 헤쳐지지 않게 녀인 머리태 따듯 곱게 틀어놓아야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좁은 쪼각으로 량옆에 날개처럼 달아 놓고, 한짝을 맞추어 포개놓아야 하였다. 무시로 옆을 틀고, 꿰매고, 포개고 하는일은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였으나, 나는 어머니의 《아들우대 정책》을 리용하여 항상 뺑소니 치기가 일수였다. 그때문에 여러번 아버지한테 야단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어머니는 항상 나의 역성을  들어 주었다. 참으로 동경스러운 어린시절의 화폭이다.
1966年 문화 혁명이 폭발하면서, 응당 소하교를 필업해야할 우리들은 필업하지 못하고, 계속 소학교에 남아서 7학년이라는 특수한 학급으로 문화 혁명을 해야 하였다.
그 이듬해 드디여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게되였는데, 나는 학습성적이 워낙 좋지 못하여 그만 락방되고 말았다. 나는 정서가 퍽 가라앉아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시물시물 웃으시며, 《옛말에 빌어 먹으면서 아들 공부 시켰더니, 동지섣달에 아들한테 쫓겨났다 하더라. 중학교 떨어져 차라리 잘 됐다. 나하구 매일 소궁디나 두드리자. 농사일이 제일 좋다. 이 애비는 그 잘난 공인질은 돈을 석섬씩 준대두 싫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눈을 흘기며, 《저 영감 정신 쑥 나갔어! 농중에라두 보내야 하지, 저리 어린거 어떻게 벌써 일을 시키오? 소궁디를 두드려두 알구 두드려야지. 항상 남한테 당하기만 하구두 분하지두 않은가 보지?》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현실을 정시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당시 농중이란것이 새로 나왔는데, 교육개혁의 한개 내용으로 공반중학교에 붙지못한 아이들을 그대로 농촌에 보내자고 하니 아직 이르고, 또 그 수량이 아주 많은 정황에서 《신형의 농민을 배양한다》는 종지로 세워진 민영성질의 학교였다.
나는 어머니의 견결한 요구를 못이겨 농중 등기처에 가서 이름을 등기하였다. 정작 가보니 공반에 붙지못한 아이들이 기본상 모두 와 있었다. 같은 처지에서 의가 통한다고 우리는 기 죽지 말자고 서로 고무해 주면서, 마치도 위대한 력사적 사명이나 맡는듯한 기분이였다. 그러면서도 때아닌 이른가을 서리처럼 엄습해 오는 렬등감은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농중은 아직 자기의 교사도 없었기 때문에 교사를 짛는 일이 급선무였다. 학생들은 두패로 나뉘여, 한패는 지방에 남아 교사를 짛을 토벽돌을 만들고, 다른 한패는 화룡립업국 장흥림장에 가서 산장청리 부업을 하여 자금을 마련하게 되였다. 나는 산에 가는 패에 들었는데, 청춘시기에 진입하여 첫 수업으로 산에가서 두달푼히 일하였다.
일을 끝내고 지방에 돌아와 보니, 두달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거리에 큼직큼직한 정치적 선동 구호들이 도처에 나붙어 있고, 여기저기에 대자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길옆집 벽에 붙여 놓은 한 대자보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것을 보고 나도 호기심에 가서 보았다. 대자보의 제목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유주임이 백골정과 씹을 했다.》 대충 읽어보니 대체로 자기들 령도의 부당한 작풍문제를 적발하는 내용이였다. 씹이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우리말 은어로서 성관계를 뜻하는데, 이말이 이렇게 버젓이 문자로 씌여진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나는 속으로 문화혁명 한다하더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소학교 마당에서 낡은것을 타파하는 대회를 연다 하기에 달려가 보았다. 마당 한 복판에서 사람이 죽으면 들어 내가는 조선족 상여가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외지에서 온 반란파들이 마차우에서 마작이요, 골패요, 년화그림 같은것들을 쉴새 없이 불속에 던져 넣는다. 심지어 양걸대의 기괴한 복장과 공구들도 불의 세례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개팔이라고 하는 한 얼꾼이 불속에서 타는 마작이 아까워 얼른 견져 내려 하다가 외지 반란파들한테 덜미를 잡혔다. 그는 운동장 교단에 끌려 올라가 머리가 땅에 닿을 지경으로 허리 굽히고 벌을 받다가, 자기로 《개팔이를 타도하자!》하고 목이 터지게 여러번 웨쳐서야 겨우 풀려 내려갔다.
전국적으로 이미 대련계가 시작되여, 학생들은 면비로 기차타고 북경에 가서 모주석을 만나뵐수 있단다. 그런데 알아보니 우리는 산에 가서 일하는 사이에 기회를 이미 놓혀 버렸던 것이다.
그후 사처에서 반란대요, 전투대요, 결사대요 하는 군중조직들이 파리떼처럼 일어나면서, 주요한 공격 목표가 각 단위, 학교, 가두, 농촌의 제1책임자였다. 팔가자진에서 진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서기, 소장, 주임, 교장, 심지어 생산소대의 대장까지, 여하튼 직무에 《장》자가 붙은 사람들과 서기, 주임들은 일률로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의 모자를 쓰고, 투쟁, 비판의 세례를 받아야 하였다.
이렇게 어지러운 정치 환경에서도 농중의 교사는 두번의 재건을 거쳐 끝내 일어섰다. 그후 《농중》을 《진중》으로 이름을 고치고, 공반과 민반의 구별을 취소하게 되면서, 공반중학에 입학하였던 팔가자진내의 학생들은 모두 진중에 와서 공부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공반에 붙지 못하여 렬등감에 모대기던 우리들의 체면이 좀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전국의 학교계통의 형세는 점점 혼란해 지면서,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교수를 진행할 방법이 없었다.
한번은 썩 늦어서 학교에 가보니, 텅빈 교실에 해방군 공작대의 한 사람이 혼자 앉아 있다. 나를 보자 그는 아주 기뻐하면서 당면 형세에 대하여 잡담을 나누었다.
갑자기 학교 웃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우리는 급히 달려나가 보았다. 한 로인이 높다란 고깔모자를 쓰고, 목에는 커다란 괘패를 걸고, 텀벙텀벙 걸어 오는데, 바지 가랭이는 흙탕물이 튕기여 지저분 하다. 저쪽 뒤에서 두 청년이 총을 메고 따라 오는데, 팔에는 서성중학교의 어느 반란파 조직의 붉은 완장을 둘렀다. 아마 십리밖의 서성으로부터 줄곧 이렇게 걸어서 기차역전으로 가는 모양이다. 높다란 고깔모자에는 검은 글씨로 《打倒金明!》이라고 씌여 있고, 목에 건 커다란 괘패에는 《和龙县头号走资本主义道路当权派-金明》이라고 씌여 있었으며, 고깔모자나 괘패의 《金明》이라는 두 글자에는 모두 붉은색으로 승표를 쳐 놓았다. 그는 대여섯 발짝씩 걷고는, 오른손을 힘없이 들었다 놓으면서 자기로 《打倒金明!》하고 웨치는데, 목소리는 신음소리처럼 너무나 애처로왔다.
그가 바로 원 중공 화룡현위 제1서기 김명이였는데, 응당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분이 우매한 학생들의 《혁명적 행동》에 의하여 이런 무서운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의 심령은 몹시 강렬한 진동을 받았다. 그후 그 광경이 때없이 나의 머리에 자두 떠오르면서, 그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리하여 나는 난생 처음으로 시 한수를 썼다;
초려에 높이누워 잠이 오질 않는데,
대붕의 혜안빌어 온 누리가 환하구다.
현덕은 좀스럽고 맹덕은 간사한데,
어지러운 거북등엔 기발만이 촘촘하다.
만세소리 가운데 신음소리 애처로와,
강호를 두루봐도 와룡이 제일이야.
 
제十三회: 귀순분자로 몰리다
3년동안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들을 투쟁, 비판하고는 《관》을 넘은 사람은 《해방》하고, 갈아버릴 사람은 갈아버리고 하면서, 인젠 아마 한단락 마친 모양이였다. 다음 계단의 계속혁명 목표는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 계급이색분자》 등 소위의 5류분자라고 한다. 우에서는 공작대를 파견해 내려왔다.
1969年3月5日, 이날은 정월 대보름날이다. 생산대에서는 저녁에 《계급투쟁 뚜껑 여는》 사원대회를 연다고 집집마다에 통지했다.
사원대회 장소는 김해룡 동학의 집이였다. 저녁을 먹고 구경삼아 사원대회 장소의 문앞에 도착하니, 집안에서 구슬픈 합창소리가 들려 나온다. 《뭇별은 졸고 별빛만 반짝이는데 생산대의 소고대회는 원한에 넘치네… …》 집안에 들어가 보니 웃방에는 남자사원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는데, 나의 아버지도 거기 계셨다. 아래정지에는 부녀 사원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는데, 나의 어머니도 거기 앉아 계셨다.
회의가 시작되자, 이미 해방받은 로 대장이 한 낯모를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우리 학생들은 바당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데, 그 낯모를 사람이 우리옆을 지나갈때 술냄새가 코를 찌른다. 로 대장은 회의를 정식 선포한후, 함께 온 분은 이번에 우에서 내려온 공작대라고 소개한다. 공작대 사람이 일어나 정치 동원 발언을 한바탕 하였다.
정치 동원 발언이 끝난후, 두 부녀가 큼직한 음식 다라를 하나씩 이고 들어온다. 하나는 푸른다라, 다른 하나는 붉은 다라이다. 음식 다라를 내려놓고 그중의 푸른 다라에 덮은 흰보를 헤치니, 그 안에는 검은떡으로 그득찼다. 겨자를 섞어서 일부러 먹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하나의 붉은 다라를 헤치니, 그안에는 흰떡으로 그득찼다. 기름을 발라가며 먹음직스럽게 입쌀가루로 만들어 졌다. 매사람마다 검은떡 하나와 흰떡 하나씩 차려졌다. 먼저 검은떡을 먹으면서 구사회의 쓰라림을 생각하고, 그다음 횐떡을 먹으면서 오늘의 행복한 생활을 생각하란다. 어떤아이들은 검은 떡을 슬그머니 부엌 장판밑에 던져 버렸다. 나도 한입 조금 뜯어 먹어보고는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여기저기서 흐느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불시에 구호소리가 터져 나온다 《계급투쟁을 잊지말자!》, 《피눈물 원한을 잊지말자!》, 《류소기를 타도하자!》 드디여 한 부녀가 일어서서 울먹거리며, 자기의 과거사를 회억하면서 공산당과 모주석을 극구 치하하였다. 그 뒤를 이어 선후하여 대여섯 사람들이 일어나 발언하였는데, 대체적으로 구사회를 잊지말고 공산당과 모주석의 은덕을 잊지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였다.
갑자기 공작대 사람이 종이장을 들고 살기 등등하여 일어났다. 《여러분! 조용합시다. 지금부터 중남1대 계급투쟁 뚜껑을 열겠습니다.》 그리고는 살기찬 눈으로 좌우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불시에 주먹을 휘두르며 벼락치듯 련속 소리를 내 지른다: 《귀순분자 현구를 잡아내라!》, 《위만툰장X X X을 잡아내라!》, 《부농분자X X X을 잡아내라!》, 《포로병X X X을 잡아내라!》… …. 두 젊은이가 벌떡벌떡 일어나더니, 그 공작대 사람이 소리치며 부르는 이름에 따라 한사람, 한사람 덜미를 잡아가지고 끌어 내온다. 모두 네사람이 잡혀 나왔다. 공작대 사람은 잡혀나온 네사람을 정지칸 남쪽벽에 기대여 세워놓고는, 머리를 눌러 90도로 사원들을 향해 허리 굽히게 하였다.
회의장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나는 아직 미처 반응을 못하는데, 어머니가 일어나시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이요? 없다구 사람 너무 업신보는거 아니우? 우리와는 한마디 말도 없다가 도데체 이게 누구의 수작이요?》 어머니는 손을 내 저으시며 높은소리로 항의하신다. 공작대 사람은 손사래를 치면서 《가속은 앉으라! 가속은 앉으라! 가속에서 이렇게 나오면, 혁명군중들의 혁명열정을 탄압하는 것으로 된다. 진상은 혁명적 군중들에 의하여 곧 밝혀질 것이다. 당의 정책은 언제나 탄백하면 관대하고, 항거하면 엄벌하고, … ….》 불시에 또 구호소리가 터져나온다; 《온잦 잡귀신을 쓸어내자!》, 《계급투쟁을 절때 잊지말자!》, 《모주석 혁명로선 승리 만세!》… …
나는 그 자리에 더는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문을 차고 도망치듯 빠져 나았다. 뒤에서는 여전히 귀신이 울부짖는듯한 구호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집에 돌아온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나는 자고있는 어린 두 녀동생을 내려다 보면서 착찹한 생각에 잠겼다. 여직까지 나는 우리도 혁명 대오내의 일원으로 여겼었는데, 오늘 알고보니 그런것이 아니질 않는가? 높은 고깔모자를 쓴 김명서기의 처참하던 모습이 또 떠오른다. 온몸에 소름이 오싹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비된 머리에는 아무런 궁리도 떠오르질 않는다.
이슥하여 어머니가 돌아 오셨다. 어머니는 아직 자지않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신다. 《별일 없을거다.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너무 근심 말어라. 무슨일이 생기면 동생들을 잘 돌보아야 한다.》
새날을 잡아서, 닭이 두홰를 쳐서야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아버지는 몹시 랑패상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말도 없으시다. 어머니가 조용히 한마디 하신다. 《무슨 문제 있었으믄 제대루 말해야 할거유. 이전에 농회에서 공작할때 보지 못했소? 공산당 눈은 속이지 못하우.》 아버지는 앉아서 담배삼지를 꺼내 담배를 말면서 깊이 상념하시고 계셨다. 그러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때 열둘이 지장 찍구 나올때, 누구두 거기에 무스거 썻는지 못 봤지, 볼 경향두 없었구. 일본 경찰서에서는 〈출문 기록부〉라구 했으니깐. 그저 그러려니 했지. 거기에 공산당 하지말란 내용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야단인데.》 내가 얼른 한마디 참견하였다. 《지금은 그 지장 찍었다는 한가지 리유만으로두 반역자로 몰릴수 있으꾸마. 어디가서 ‘이사람이 일본 경찰서에 잡혀 갔다가 지장 찍고 나왔다’ 이렇게 말해봅소. 백에 백사람이 모두 ‘그사람 반역자구나’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아버지는 아무말도 없이 애꿎은 담배만 피우신다. 어머니도 더는 말씀이 없으시다. 우리는 끝없는 근심속에서 묵묵히 새날을 밝혔다.
 
   제十四회: 조리돌림을 당하다
1969년6월, 해마다 오는 벼모내기 농망기철이다. 벼농사가 주체인 우리 고장에서는 모내기는 농사일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 환절이다. 모내기는 그당시 가장 늦어서 6월20일좌우의 《하지》전에 반드시 전면 완성하여야 하였다. 이것은 진짜 엄숙한 정치임무였다. 이때가 되면 공사의 혁명위원회(각급 정부는 이미 모두 혁명 위원회로 교체되였다)에서는 각 기관, 학교, 단위, 가두를 모두 동원하여, 성세호대한 모내기 방조대군을 조직한다. 모내기철이 되면 온 들판에 붉은기가 나붓기고, 고음 확성기에서는 미친듯한 혁명가요를 그칠새없이 방송하며, 모내기 대군은 온 들판에 새까맣게 덮여있다. 그리하여 농촌 모내기는 《모내기 대회전》이라고 시대적 이름이 붙게 되였다. 학교에서는 이때가 되면 모내기 방학을 하였는데, 농속 학생들은 직접 자기집이 소속된 소대에 내려가 사원들과 함께 모내기에 참가하게 하였다.
모내기가 시작되여 이미 며칠이 잘되는 어느날, 나는 그날도 여느때처럼 모내기 대오속에서 모를 꼽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이 있는 부녀들과 함께 저 도랑건너의 모상판에서 벼모를 뜨고 계셨고, 아버지는 써레질 소조에서 이랴! 이랴! 소를 쫓으며 써레를 놓고 계셨다.
갑자기 4소대의 《강철 반란단》의 한사람이 로대장을 찾아 무엇을 교대한다. 로대장은 인차 나의 아버지를 부른다, 《저기 현동무! 지금 소를 세우구, 이 사람 따라서 저 6대 마을 길목 거기를 가라이.》 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대장의 안배인지라 소를 멈추고, 두렁에 올라 신을 찾아 쥐고, 바지 가랭이를 걷은채, 그 사람을 따라 갔다. 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속이 자꾸 떨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자주 머리를 들고 아버지가 가신쪽을 살펴 보았다. 그쪽에는 무슨 사람들인지 많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특수한 대오가 나타났다. 일곱사람으로 이루어진 이 《특수대오》는 중남 대대의 잡귀신들의 대표 인물들로서, 한소대에서 한사람씩 불리워 갔던 것이다. 모두들 머리에 높다란 고깔모자를 쓰고, 목에는 커다란 괘패를 걸고, 일하던 맵시 그대로 줄을 서서, 각소대의 모내기 현장을 돌면서 조리 돌림을 당하는 판이였다. 제일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몇해전에 중남위생소로 새로 온 조의사의 부친으로서, 부농분자라는 괘패를 걸고 있는데, 구멍이 뻥 뚫린 헌소래를 손에 들고서, 나무꼬챙이로 절주있게 두드리며 사구려를 부르듯이, 《牛鬼蛇神跑不了!牛鬼蛇神跑不了!》 이렇게 끊임없이 웨친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를 포함한 뒤의 사람들은 그것을 한구절씩 한구절씩 따라 웨치면서, 텀벙텀벙 따라가고 있다. 아버지의 고깔모자에는 검은 글로 《현구를 타도하자!》 이렇게 씌여 있고, 괘패에는 검은 글로 《귀순분자 현구》 이렇게 씌여 있는데, 이름자에는 모두 검은 승표를 쳐 놓았다. 그 《특수대오》가 우리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히 올수록 나는 가슴이 점점 옥죄여 들면서 숨쉬기가 가빠진다.
그들이 우리가 일하는 곳까지 다 와서 한줄로 가로 서서는 우리를 향하여 깊이 머리숙이고 죄를 청할때, 나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그만 논밭에 그대로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시며 분명 한발 움쭐 내 디디신다. 선배 누나가 나를 얼른 부축하면서, 《얘! 너 몹시 아프구나. 빨리 집에 올라가라. 여긴 지금 그렇구나.》 나는 계속 거기에 있을 용기가 없었다.
나는 감히 아버지를 쳐다보지 못하고, 저쪽켠으로 두렁에 올라 마을로 향하였다. 논밭을 거의 벗어날 무렵, 부련듯 어머니가 근심되였다. 그리하여 방향을 돌려 어머니가 일하시는 모상판으로 달려갔다. 모상판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두통이 나서 이제 금방 집으로 올라갔다고 한 아줌마가 알려주었다. 분명 아버지의 사연 때문에 몹시 놀라신 모양이다.
다시 큰 길에 올라 마을로 향해 올라가는데, 길에서 소학생 조무래기들이 이제 금방 그 《특수대오》의 흉내를 내면서, 재미있다고 웃고 지껄여 댄다. 나는 너무나 서글펐다. 나의 마음은 그 일로하여 이렇듯 혹심하게 아픈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그 일이 그렇게도 즐거우냐? 인정세태가 너무나 삭막함을 느꼈다.
어머니는 몸져 누우셨다. 며칠 죽 한그릇 드시지 않고, 말 한마디 하시지 않는다. 다행히 선자가 이미 부엌일을 할수 있었고, 춘자가 자기 언니 말을 곰상곰상 잘 들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진지는 제때에 갖춰 드리수 있었다. 나는 조의사를 청하여 우리집에 모셔왔다. 그도 지금 나와 같은 처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소탈하시다. 그는 어머니를 진맥하시며 말씀하신다, 《너무 걱정 맙소! 이제 봅소, 이래다 맙꾸마. 갸네 몇이 자꾸 떠들어 그렇습꾸마. 우리라구 살지 말란법이 어디 있습둥?》
동네 아줌마들이 저녁이면 우리집에 잠깐 들려 나한테 이것저것 물으며 우리일을 걱정하여 주신다. 양어머니께서도 오셨다. 그는 달걀이랑 넣어가지고 영양죽을 쑤어왔다. 그는 누워있는 어머니 입에 죽을 한술한술 떠 넣어 들이며 어머니를 나무란다. 《빨리 이걸먹구 힘을 내오. 새끼들을 봐야지. 에미 이러구 있으니 애들두 나가 기를 못펴오.》
갑자기 어머니는 몸을 움직이며 일어나시려 한다. 나는 얼른 어머니를 부축하여 일어나 앉게 하였다. 자기 때문에 아이들도 기를 못 편다는 말씀에 정신이 드신 모양이다. 그는 양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참 드려다 보시다가 끝내 입을 여신다. 《얘들 새끼 아니믄사, 내 벌써 열번두 죽어 버렸지. 이게 글쎄 무슨 꼴이요? 어쩌믄 내연에 이런일두 다 있소?》…
그후 어머니는 아주 빨리 원기를 회복하셨다. 이 기간 아버지께서는 식구들 앞에 아주 적게 나타나시였다. 진지 드실때와 저녁에 주무실때 외에는 거의 아버지를 볼수가 없었다. 집안이 이렇게 불편하게 된것이 모두 자기의 탓이라고 여기시고, 집식구들을 보기조차 미안하였으리라.
그 사이 아버지께서는 바깥에서 또 어떤 험악한 일들을 당하셨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아무리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나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한집식구라는 생각만은 여전하였다.
 
제十五회: 투쟁대회에서 구타를 당하다
모내기가 끝나고, 첫벌기음도 끝나면서, 농촌은 농한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사원들은 한가할 사이가 없다. 왜냐하면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혁명을 해야 하니깐.
그당시, 농촌의 시대적 특징의 하나가 《사원대회》이다. 일년 365일중에 사원대회를 열지 않는 날이 거의없다. 사원대회에서는 생산토론도 종종 하지만, 대부분의 사원대회에서는 주요하게 계급투쟁을 진행한다. 계급투쟁을 모든 사업의 기본고리로 하였으니, 매 소대마다에는 반드시 자기소대의 계급의 적이 있어야 한다. 계급의 적이 없이 어떻게 계급투쟁을 한단 말인가? 아직 계급의 적을 확정하지 못한 소대는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쥐지 않는 소대로 되기 때문에 락후한 소대로 인정받는다. 그리하여 만약 아직 마땅한 투쟁 대상이 없으면, 방법을 대여 인위적으로 한사람, 혹은 몇사람을 계급의 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는 전체 사원들을 동원하여 그 계급의 적을 투쟁, 비판하는 수단으로 전체 사원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전체 사원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전체 사원들의 생산로동을 통제한다. 이것을 가리켜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한다.》고 한다.
1969년 농한기에 들어서면서, 농촌 《계급대오 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아버지는 낮에는 생산대에 나가 일하시고, 저녁이 되면 사원대회에 나가셔서 비판을 받아야만 하였다.
소대에서는 아버지의 옷 가슴에 손바닥만한 흰 헝겊으로 명패를 만들어 달게 하고는, 거기에 푸른 잉크로 비뚤비뚤 《귀순분자 -현구》라고 써 놓았다. 마치도 늙은 소학생이 커다란 명패를 단것 같았다. 평소에 일을 할때나, 어디를 갈때나, 반드시 그 명패가 달린 옷을 입고 다녀야 하였으며, 만약 다른옷을 입게되면 그 명패도 옮겨 달아야 하였다. 그래도 커다란 괘패를 걸고 다니기만은 많이 관대하여진 셈이다.
학교에서는 여름 방학을 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죄가 조금이라도 경감될가 하여, 생산대장을 찾아가서 방학기간에 일을 시켜달라고 청구하였다. 생산대장은 나더러 두렁서리(논두렁 풀베기)를 하라고 비준하였다. 그리하여 낮에는 사원들과 함께 논에가서 풀을 베노라면 잠시라도 아버지의 생각을 잊을수가 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아버지가 명패 달린 옷을 입고는 비판을 받으려 사원대회에 나가시는것을 볼때마다 무엇이라고 형용할수 없이 마음이 복잡해진다.
한번은 회의 장소가 우리 앞집의 바로 옆집 마당이였는데, 내가 아래칸에 매놓은 간이침대에 누워서 불을 죽이고 상념에 잠겨 있노라니, 회의장소에서의 모든 소리들이 지척인듯 똑똑히 들려온다. 《빙빙 에돌지 말구 찍어 말하라! 당신이 변절자가 옳은가? 아닌가?》, 《당신이 공산당을 몇이나 물었는가? 로실하게 교대하라!》, 《일본 경찰서에서 당신한테 무슨 임무를 주었는가? 제대로 말하라!》 … … 그러다가도 느닷없이 구호소리가 터져나오다; 《반역자 현구를 타도하자!》, 《무산계급 독재 만세!》 정지칸을 건네다 보니 가마니 짜기를 끝내고, 녀동생들은 이미 자고있고, 어머니는 앉아서 바느질을 하시는데, 표정이 너무나 평온하시다. 나는 불을 켜고,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다음, 《삼국연의》를 꺼내 펼치고, 거기에 정신을 집중한다. 옛날의 제갈량 한테서 어떤 해결책이나 찾으려는 듯이.
그러던 어느하루, 그날도 아버지는 저녁을 자시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명패달린 옷을 입고, 비판을 받으려 사원대회에 나가셨다. 나도 인젠 좀 습관이 되여서 처음처럼 그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날의 비판대회 장소는 탈곡장이라고 한다. 탈곡장은 우리집과 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높은 구호소리외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시계가 금방 아홉시를 쳤는데, 불시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사람이 아버지를 업고, 두사람이 옆에서 겯들면서, 집안에 급히 들어선다. 우리는 너무 놀라 한참 멍하니 서 있는데, 그 아버지를 업고 있던 사람이 다른 두사람과 함께 아버지를 천천히 구들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여 있다. 피를 보는 순간, 나는 흥분되여 한사람의 멱살을 틀어 쥐면서 소리쳤다, 《누가 때렸소? 어느새끼 때렸는가 말이요?》 어머니는 앉아서 아버지의 옷 단추를 벗기며, 슬피슬피 낙루하신다, 《이런일이 어디있소? 사람으 어쩌믄 이렇게 치오? 모주석두 사람은 치지말라구 했다는데. … …》 나의 가슴은 금시 떵 얼어 붙는것 같다. 함께 들어 온 그 사람은 도리여 피투성이 되여,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아버지를 나무란다. 《교대할때 어째 자꾸 말을 빙빙 돌굼두? 그러니 그 외지청년들이 격분하지 않을수 있슴두?》 그러니까 아버지가 외지 청년들한테 맞았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아무런 해석도 없이, 한마디의 안위의 말도 없이, 그대로 가버렸다. 두 녀동생은 놀라서 울음을 터뜨리는것을 나는 큰 소리로 제지시키고, 물을 떠다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얼굴과 몸의 피를 닦아 드리고,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웃방의 자리에 눕혔다. 아버지는 눈을 꼭 감고, 아무말도 없으시다.
아버지는 허리를 몹시 다친것 같았다. 내가 위생소에 가서 약을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는 앉아서《모택동 선집》을 펼쳐 드시고 물끄럼히 들여다 보고 계신다. 내가 아버지한테 약을 대접시키고 돌아서니,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이 문제는 혁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어머니가 정신이 잘못 되신것 같았다.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잡아 흔들었다. 《엄마! 어째서 이러오? 그게 뭐라구 들구 있소?》 어머니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완곡히 말씀하신다; 《아니다. 이전에 동시영에 있을때 황순옥이 나보구 하는 말이 모를 일이 있으믄 모주석의 저작을 보라더라.》 그러면서 또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 …》 어머니께서는 너무 심한 정신타격에 분명 일시 실성하셨다.
나는 급히 달려나가, 이미 주무시고 계시는 양어머니를 급히 불러 깨워서 모시고 왔다. 양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여전히 《모택동 선집》을 들고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 양어머니는 옷 섶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엄마가 저러다가 한잠 자구 깨난 다음 다시보자.》 하고 말씀하신다. 어머니는 새벽 세시후에 끝내 쓰러져 잠이 드셨다. 그 사이 어머니께서는 《누가 우리 적인가? 누가 우리 벗인가?… …》를 몇백번 외웠는지 나도 모른다.
이튿날 어머니는 정심때가 되여서야 깨여났다. 어머니는 깨여나서 습관적으로 정통편 두알을 입에 던져 넣고는, 물 한바가지 떠서 벌컥벌컥 마이신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가서 증세를 물으시고는, 가마니틀에 새끼를 메우면서 선자를 부르신다, 《거기 바당에 짚으 추린거 한단 가지구 오나!》 그리고는 선자와 함께 본격적으로 가마니짜기를 시작한다.
저녁녘에 가서, 다시 어머니를 관찰하여 보니, 어머니 정신은 이미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셨다. 참으로 하늘이 도우신 일이다.
(그후, 나는 어머니가 또 실성하시는 일이 있을가봐 몹시 근심하였었는데, 1997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실때까지 다시는 그런일이 없었다.)
맞아서 상한 아버지는 꼼짝 못하고 자리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20여일 누워 계셨다. 어머니는 사처에 수소문 하여, 비싼 능담을 사서 아버지한테 대접하였다.
한달후, 상처가 아물자 아버지는 다시 생산대의 일에 나가야만 하였고, 또 시시로 불리워 나가 비판을 받거나 심사를 받아야만 하였다.
 
제十六회: 잘못된 력사 증명
어느날 정심때 내는 학교에서 돌아 오다가 탈곡장에서 광신에 계시는 이모부를 만났다. 나는 반갑게 인사 올리고 집으로 끌었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는 좀 당황해 하더니, 머뭇거리며 《정심에 볼일이 있으니, 일이 끝나는 대로 시간을 봐서 … …》하며 얼버무린다. 집에 들어와 나는 어머니한테 이모부가 왔더라고 하였더니, 어머니는 몹시 반가와 하는 기색으로 손님의 정심을 갖추신다.
그러나 이모부는 정심에 우리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도 정심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심상은 갖춰놓은 대로 한쪽켠에 밀어놓고, 어머니는 선자의 정심시간을 리용하여 가마니를 조금이라도 짜느라고 여념이 없다.
저녁에 아버지가 돌아 오셨는데 또 랑패상이다. 《그 사람은 어디루 갔소?》 어머니가 물었더니, 아버지는 우는상을 해가지고 대답한다. 《내가 옛날에 <새집>(옛날 아버지의 광신 양부모의 집을 이르는 광신촌 사람들의 말)에서 양자로 있은게, 지금 정책에는 고농으로 된다우. 그 사람이 투도 혁명위원회 문건을 가지구 와서, 내가 증실인이라면서 도장 맞아갔소.》 그말을 듣고 어머니는 펄쩍 뛰신다, 《에구 이 귀신양반! 이즈는 제동생까지 다 잡아먹네. 그거 도장 찍었으믄 어찌오?》
어머니는 즉시 차비를 하시더니, 그길로 광신으로 떠나신다. 우리 고장에서 광신까지는 40여리 잘 되는데, 그 당시에는 교통이 몹시 불편하여 항상 이렇게 걸어다녔다. 세시간 남짓이 밤길을 걸어, 모두들 자려고 등잔불(당시 그곳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가지 못하였다)끄기전에 광신에 도착한 어머니께서는 곧추 당년의 토지개혁때에 함께 농회에서 공작했던 최서기란 분의 집을 찾아가서 밤문을 두드렸다. 그분도 그당시 한창 조사대상이였다. 그집에서 어머니께서는 모주석의 최근의 지시들을 알아 보았으며, 당년의 토지개혁때의 문건들을 찾아 대조하면서, 우리의 그 이모부의 처사가 완전히 틀렸다는 충분한 증거를 장악하였다.
그날밤은 최서기네 집에서 묵고, 이튿날 아침 《새집》에 들어가 보니, 마치 초상난 집처럼 스산하다. 그집 두 아저씨는 우리 어머니를 보고도 본체만체 하면서 인사도 없다.
어머니는 두 아저씨한테 자기가 오늘 오게된 사연을 설명 하시고, 어제밤 최서기네 집에서 장악한 증거를 알려주면서, 이제 오늘저녁에 있게 될 사원대회에서 여사여사히 하자고 약속하였다.
그제야 큰 아저씨는 아이들처럼 엉-엉- 소리내여 울면서 말한다, 《우리 형수 참으로 사리 밝은 분이시요. 어제밤 우리 두형제는 온밤 자지 못하고 도끼를 갈았소. 내 오늘 팔가자에 올라가 형님을 찍어 죽이구, 얘가 여기서 그 두상(나의 이모부)을 찍어 죽이구, 우리 다 같이 죽자 했소. 우리가 지주되는 날에 살아서 뭘 하겠소? 형수 정말로 고맙소!》
천만 다행으로, 어머니가 지체없이 광신으로 내려 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한차례의 무서운 참사가 빚어질번 하였다.
그날저녁 예상했던대로 광신에서는 사원대회가 열렸다. 나의 그 이모부는 두툼한 문건을 들고 일어나서, 높은 소리로 선독한다, 《투도 혁명위원회의 문건정신에 좇아, 당년의 당사자의 증실재료를 해온데 의하면, 해방전 위만시기에 본촌의 김계현의 집에서는 확실히 고농을 한명 고용하고 있었다. 해방후 토지개혁 당시, 농촌성분 획분표준에 의하면 응당 지주나 부농으로 회분되여야 했으나, 중농으로 잘못 획분되여 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모주석의 혁명로선의 정확한 지도아래, 잘못된 력사에 대하여 반드시 견결히 시정하여야 한다. … …》 《내 한마디 발언하겠소!》 광신에서는 듣지않던 목소리가 과단히 그 문건선독을 중단시킨다. 어머니가 일어섰던것이다. 모두들 뜻밖이였으나, 광신의 로농들은 모두 당년 토개때의 부련회 부주임인 어머니를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으기 반기는 모습이다.
《내 <새집>에 시집와서 들은데 의하믄, 이 동네의 김해김씨와 직산김씨는 모두 우리 <새집>아바이 덕분에 여기와서 발을 붙였다 합데. 아니라는 사람이 있으믄 어디 좀 일어서 보오!》
회장은 쥐죽은듯 조용하였다.
《그리구 우리 <새집>아바이가 밭을 많이 일궜지만, 일구구 보니 모두 중국 지주집 땅이였소. 해마다 소작료를 바쳤단 말이요. 그런데 우리 <새집>아바이 소갤루 밭을 얻어 부치구, 감사의 뜻으루 <새집>아바이 한테 쌀 반되라두 가져간 사람이 있으믄 어디 좀 일어서 보오!》
회장은 여전히 물뿌린듯 조용하였다.
《모두 공째루 얻어 부치지 않았소? 사람이 도리를 모르믄 은공이라두 알아야지, 어찌 은공을 원씨로 갚소? 그리구 내 갑술년에 우리 영감하구 약혼하구 <새집>에 와보니, 고농은 무슨 고농이요? 친자식보다두 더 호갱스레 살고 있었소. 어느 지주집에서 고농을 한 호적에 올리고, 공부까지 시키는 집이 있다고 합데?》
회장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마치도 당년의 부련회 부주임으로 되돌아 간듯 싶었다. 어머니는 손을 내 저으시며 계속 연설하셨다;
《토개때에 <새집>이 중농이 된것두 모두 그때 모주석과 공산당 정책에 기준한 게오. 우리 제맘대루 획분한게 아니란 말이요. 모주석 최신지시에두 토개때 획분한거 고치지 말라구 했소. 그런데 어째 이 동네서는 모주석 지시대루 하지 않는가 말이우?》
나의 이모부는 합당한 말을 찾지 못한다. 더우기 지금 자기의 장훈을 치는 사람이 자기의 친 처형인지라 더구나 어쩔줄 몰라한다.
이윽고 로 최서기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재 금방 저 로 부주임이 하시는 말씀이 한마디두 틀린게 없소. 모주석 최신지시에두 계급대오청리에서 토개때 획분한거는 고치지 말라구 했소. 로 부주임이 먼데서 우정 와서, 우리공작의 부족점을 지적해 준데 대해 감사를 드리오!》
어머니는 전면적 대승리를 걷우시였다.
그후, 이모부네는 동네여론에 못이겨 흑룡강 어딘가에 이사 갔다가, 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상하셨다. 몇해후 이모부는 상한 다리를 쩔뚝이며 가속을 데리고 다시 광신으로 돌아 왔는데, 어머니가 조해하여 이모부는 과일고 술을 사 들고, 《새집》에 가서 깊이 사과 하고는 다시 화해하였다.
이 일로 하여 《새집》의 두 아저씨는 자기들의 형수인 우리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1988년 어머니 70탄신때, 큰 아저씨는 며칠품을 들여 자체로 축하문을 작성하여 가지고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랑독하여 올렸던 것이다. 
 
제十: 새집을 짛다.
1970년에 접어 들어, 우로부터 많은 새로운 혁명지시들이 륙속 내려 오면서, 아버지에 대한 비판은 좀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옷가슴의 명패도 우의 새로운 지시에 의하여 달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해 2월, 많은 유감을 남긴채 나의 중학교 시절은 드디여 끝을 보았다. 우리는 《귀향지식청년》이란 멋진 시대적 월계관을 쓰고, 마을에 돌아와 정식으로 인민공사 사원으로 되였다. 농촌에 돌아온 나는 인차 민공으로 남구 저수지 건설 공지에 올라갔다. 거기 가면 마음이 퍽 편안할것 같았다. 거기 가면 아버지를 비판하던 마을 사람들을 보지 않을수 있고, 지겨운 모내기에도 빠질수 있었다. 나는 남구민공에 가서 여러해 있을 타산을 하였다.
몇달동안 일하면서 상해지식청년 몇을 사귀였는데, 나는 그들의 소탈한 성격을 아주 흠모하였다. 그렇게 큰 대도시에서 생활하다가 언제 돌아간다는 기약도 없이 이렇게 험악한 산골에 내려와 가장 원시적인 힘든일을 해야 하였건만, 그들은 오직 하나의 시대적 정신만을 믿고, 언제나 그렇듯 쾌활하고 락천적이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번화한 남경로를 거니는것 같았고, 그들과 함께 끝없는 바다를 구경하고 있는것 같았다. 다시 혼자 있을 때는 내가 마치도 무리에서 버려져 방황하고 있는 한마리의 개미처럼 보인다. 아니지! 이래선 안되지! 하면서도 정신을 분발시킬 그 어떤 동력을 찾을길 없었다.
7월달에 집에서 한번 왔다 가라는 기별이 왔다.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우리의 원래 낡은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짛고 있다. 비판대상인 형편에서 너무나 아름찬 일을 벌린것 같았다. 원래보다 좀 높으게 다져놓은 기지돌 우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고, 도리목도 올렸으니, 집의 결구는 형성된 셈이다. 이제 가시오를 올리고, 연목을 엮고, 벽을 바르고, … … 나는 며칠 묵으면서 먼저 중요한 일들을 끝내고 올라 가리라 생각하였다. 쉬는 날에 공지의 친구들이 내려와 흙을 이겨서 아시벽을 발라 주었다. 이제 가시오를 올리고, 즌새를 치고, 이영을 이여 놓아야 비가 와도 근심이 없다.
그날 우리 두 부자간은 어머니가 싸준 정심밥 보자기를 각기 허리에 차고 아침 일찍 서둘러서 다이야 평판수레에 곤두뿔 소를 메워가지고, 마을 서쪽에서 칠팔리 떨어진 먹덕고개에 구들돌 실으려 갔다. 진짜 좋은 구둘돌을 실어 오자면 몇십리밖의 전문 구둘돌 캐는 산에 가서 돈을 주고 사와야 하였지만, 우리는 그 당시 그럴 형편이 못 되였다. 그리하여 먹덕고개 강바닥의 납작하고 좀 큰돌들을 골라 주어서 구둘돌로 쓰기로 하였다.
먼저 수레를 벗겨 곤두뿔이 절로 풀을 뜯게 하고는, 우리는 여지저기 강바닥을 누비며 구둘돌 됨직한 것들을 골라 한수레 될만하게 모았다. 정심을 먹자고 음식보자기를 푸는데,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몹시 조급해 하신다. 《이거, 어제 바른벽이 다 떨어지겠다.》
우리는 정심을 먹다 말고, 서둘러 곤두뿔을 수레를 메우고, 모아놓은 돌들을 수레에 주어담기 시작하였다. 곤두뿔도 비를 맞으니 귀찮다는 뜻인지 대가리를 자꾸 흔들어 대는 바람에 실어놓은 돌들이 자꾸 도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돌을 실으며 수시로 큰소리로 《와!-와!-》(소를 멈춰 세울때 부르는 소리)하면서 곤두뿔한테 움직이지 말라고 엄중경고를 준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 돌을 다 싣고나니 입에서는 겨불내가 확확 난다. 아버지는 숨을 돌리고 소고삐를 찾아쥐고 《이랴!》하고 곤두뿔을 내 몰았지만, 곤두뿔은 몇번 대충 힘을 써 보더니 꿈쩍하지 않는다. 살펴 보니 돌을 싣는 사이에 물의 흐름에 의하여 수레바퀴밑의 모래가 패우면서 수레바퀴가 깊숙히 빠져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수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론하고 돌을 일부 부리웠다. 그러나 수레는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다. 또 부리웠다. 여전히 못 나온다. 이렇게 몇번 부리워서 거의 빈차가 되여서야 곤두뿔은 슬쩍 힘을 쓰더니 수레는 아주 가볍게 빠져 나왔다. 어찌보면 고놈 곤두뿔한테 속히운것 같았다.
이번에는 수레를 강변의 땅땅한곳에 세워놓고 물속의 돌들을 날라 올려다가 싣기로 하였다. 그런데 고놈 곤두뿔이 자꾸 도망치려 하는 바람에 나는 아버지더러 소고삐를 쥐고 지키게 하고는, 나 혼자서 분주히 달아다니며 물속의 돌들을 날라서 실었다. 한 절반 실으니, 아버지는 나더러 와서 소고삐를 쥐고 숨을 돌리라고 하고는 자기가 돌을 싣겠다고 한다. 내가 소고삐를 넘겨 받고 숨을 좀 돌리는데, 아버지가 돌 주으려 물에 들어서다가 미끄러워 그만 물에 넘어진다. 보아하니 아버지는 이미 몹시 지치셨다. 나는 아버지를 불러서 올라 오시라 하고는, 소고삐를 다시 넘겨 맡기고 계속 힘을 내여 돌을 실었다. 두번째로 돌을 다 싣고나니 나는 손가락 까딱할 맥조차 없다. 비는 어느사이 이미 그쳤다. 나는 축축한 풀우에 벌렁 들어 누웠다. 아버지는 근심 되시여 어디 상하지는 않았는가 물으신다. 나는 웃으며 《몇달 공지에서 목도채 멨더니, 인젠 밥값이나 할것 같수꾸마.》 나의 마음은 종래로 이렇게 상쾌하여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곤두뿔을 몰아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고놈 곤두뿔이 계속 말썽을 부린다. 앞의 길이 조금만 올림막인것 같아도, 곤두뿔은 일부러 멈춰서서 떼질 쓴다. 내가 뒤에서 소리치며 젖먹던 힘까지 다내여 밀고, 아버지가 앞에서 무섭게 호통치며 채질해서야 곤두뿔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긴다. 마치도 《당신네의 이렇게 무거운 짐을 왜서 내 혼자 끌어야 한담? 당신네도 좀 고생해 보라이!》하는것 같았다. 그러다 나니 어느덧 날씨가 어두워 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곤두뿔은 여전히 늘쩡늘쩡 늦짱만 부린다.  나는 조급하여 곤두뿔 궁둥이에 채질하며, 《이랴! 이눔의 곤디뿔아! 해가 다 넘어 갔다.》하고 소리쳤다. 곤두뿔은 귀를 벌죽벌죽 하더니, 마치도 내말을 알아 듣기나 한것처럼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아무리 올림막이라 하여도 곤두뿔은 무거운 수레를 끌고 씨엉씨엉 잘도 걷는다. 그놈이 비록 미물이지만, 저녁때가 되였다고 하니 빨리 제집에 가서 맛있는 여물을 먹고 싶었으리라. 나는 아버지한테 청들었다. 《그 고삐를 이리 줍소. 내 좀 몰아 보깁소.》 아버지는 나한테 소 고삐를 넘겨 주신다. 처음으로 해보는 소수레 운전이다. 아버지는 내 뒤에서 지휘를 멈추지 않는다, 《술기채서 좀 멀찍이 서라!》, 《웅텅개 넘을때 고삐를 나꿔채서, 천천히 넘어라!》, 《굽이돌이 돌때 즐거 돌지말구, 멀찍이 돌아라!》… ….
소수레를 몰고 탈곡장에 들어서니, 곤두뿔은 주제넘게 자체 주장하여 자기 우사칸쪽으로 수레를 끌고 꺾어든다. 나는 고삐를 확 나꿔 채며, 《아니다 이눔아! 먼저 일루 가자!》하면서 우리집 방향으로 끌었다. 그러자 곤두뿔은 아주 억울한듯 대가리를 외로 틀면서 천천히 따라온다.
집앞에 이른 우리는 눈앞의 정경에 그만 깜짝 놀랐다. 이미 맞벽을 다 발랐고, 가시오를 올리고, 즌새를 다 쳐놓았으며, 비 맞지말라고 비닐로 잘 덮어 놓기까지 하였다. 우리의 인기척을 듣고 어머니가 사랑칸 림시 거처에서 나오며 반긴다, 《우리 어른들이 왔구만. 빨리 대장인데 가서 인사하오! 오늘 동네서 우리집에 와서 숱한 고생을 했소!》
알고보니 로 대장께서 동네분들을 동원하여 우리집에 와서 비를 맞으며 온 하루 작업하여, 이미 큰 일들은 기본상 모두 해 놓았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일어선 집을 쳐다보며 멍하니 서있는데, 나는 분명 아버지 눈에서 반짝이는 그 무엇을 보았다.
《아니, 거기서 머 하오? 빨리 가 보지않구.》 어머니가 재촉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대장한테 인사 가려고, 급히 빈 술병을 찾아 들고는 상점으로 갔다.
나는 곤두뿔을 수레에서 벗기여 우사칸으로 가져가면서 생각하였다; 《보아하니 아버지가 진정한 인민의 적은 아니것 같구나!!!???》
 
제十: 중풍을 맞다.
1972년 년초부터 나는 생산소대의 안배에 의하여, 부업으로 철로에 나가 적사공일을 하게 되였다. 한창 나이 젊었을 때였으니, 아무리 무거운 짐도, 아무리 많은 짐도 두렵지 않았다. 일은 비록 고되였으나, 마음은 그래도 상쾌한 상태였다. 아버지 문제가 아직 결론은 내리지 않았지만, 소대에서는 이미 새로운 계급투쟁 동향으로 엄중한 남녀작풍 문제가 있는 김씨성의 사람을 붙잡아 내왔으니, 정치운동 때마다 그 사람이 비판을 받고, 아버지는 한쪽 구석에 잊혀진채 소외시 되였다.
그해 6월의 어느날, 정치대장과 업무대장(그 당시 정치대장은 제1대장이고 업무대장은 제2대장이다)이 나를 불렀다. 그들은 나를 회의실에 불러놓고, 평소의 후배 취급하던 말투를 고쳐가지고,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소대에 지금 회계자리가 비였는데, 령도에서는 용수가 이 자리를 맡았으면 하오. 용수의 의향은 어떻소?》 뜻밖의 일인지라 나는 어정쩡해 있다가, 회계질을 하자면 반드시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할것이라고 생각되여 좀 주저하였다.
기실 내가 중학교 필업생이라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것은 《모주석 어록》밖에 생각나는것이 없는데, 회계라는 것은 절대로 몇마디 어록으로 할수있는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하여 나는 《내같은 주제에 어떻게 그리 큰일을 할수 있겠소.》하고 대답하면서 돌이질 하였다. 그러자 정치대장은 진짜 정치가가 되여 엄숙히 말한다. 《대채대대 회계를 따라배워 정치임무로 여기고 대담히 맡아보오. 이 일 때문에 용수를 찾은것두 령도에서 용수에 대한 신임이오. 우리 전적으루 지지해 줄것이니 근심할것 없소. 새시대 청년이라는면 대담히 중임을 떠 메야지!》
나는 할말을 찾지못하고 궁리하다가, 《그렇다믄 글쎄! 고려해 보겠소.》하고 대답해 버렸다. 《고려는 무슨 고려? 그럼 하는걸로 결정하기오! 저녁 사원대회에서 정식 선거시키겠으니, 래일부터 철로일은 그만두고 소대에 들어와 장부를 맡소.》 정치대장은 정치가로부터 다시 대장으로 돌아와 생산로동을 안배하듯 결정해 버렸다.
저녁에 집(우리는 이미 새집에 들었다)에 들어와 저녁을 먹으면서 낮의 일을 꺼냈더니 어머니께서는 두말없이 찬성하신다, 《애비 비판대상이래두 너를 시키는거 보믄, 너절루 너 앞길으 열라는 게다. 기죽지 말구, 너라두 정신차려야지! 어찌 모두 머저리 가문처럼 집에 떡 들어 앉아만 있겠니?》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근심하시는 태도이시다, 《회계부터는 큰 일인데, 애들한테 시켜놓구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두 하면… ….》 《제만 밑궁기 깨깢으믄 무스게 겁나오? 혼자 못할거는 모다들어 하잴리. 한번 본때스레 해봐라!》 어머니는 여전히 지지하시는 태도이시다.
그날저녁 사원대회에서 나는 사원들의 요란한 박수소리 속에서 정식으로 소대회계로 임명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튿날부터 철로일을 그만두고, 소대에 돌아와 회계장부를 맡게 되였다.
그해도 저물어 가는 11월27일, 아버지께서는 소대의 로동안배에 따라 화물잠에 나가서 차에 실을 사과배들을 밤 사이에 보초서는 일을 하였다.
어느날 이른아침, 아버지는 밤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섰는데, 부엌에서 아침불을 때시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급히 소리를 지르신다. 《저 아바이! 입이 어째 저러오?》 나는 이불속에서 급히 머리를 들고 보니 아버지의 면상이 한쪽으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아버지께서는 어리둥절해 하시더니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신다. 아버지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실 뜻으로 《어!-어!-》하시더니, 바당에 그대로 털썩 쓸어지셨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악!-》소리 지르며 펄쩍 뛰여 일어나, 급히 바당에 쓰러진 아버지를 부축하여 구들에 올려 눕혔다. 이미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의 일그러진 입에서는 거품이 기질기질 나온다.
아버지께서는 중풍을 맞으셨다. 밤새 겨울의 찬 기운에 마비된 얼굴은 언제부터 일그러졌는지 아버지 자신도 모르고 계셨다. 《빨리 가서 조의사 모셔 오너라!》 어머니께서 급히 소리치시자, 나는 정신없이 위생소로 달려갔다. … …
년말에 나는 중풍에 걸려 웃방에 누워 치료받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살피는 한편, 령도의 관심과 동네 회계능력 있는 분들의 대폭적인 방조를 받으며, 50여호 300여명 사원들의 년말 결산분배 임무를 비교적 순리롭게 완수하였다. 그해 소대에서는 나에게 회계공으로 80공을 보충해 주었다.
1973년, 아버지께서는 석달 푼한 극진한 치료를 거쳐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신체는 그만 반신불수가 되여버렸다. 그후부터 아버지께서는 성질이 아주 괴벽스럽게 변했다. 손놀림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담배를 말수 없어서 왝-왝- 소리만 지르신다. 그대로 담배를 끊겨 버릴가 생각했다가도 이제 앞날이 얼마 없는 아버지한테 너무 잔인한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담배를 말아서 불까지 붙여 들이고는, 수시로 꺼내 피울수 있게 담배를 여러대 말아서 담배통안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어디 나갔다가 돌아와 보면, 아버지께서는 말아놓은 담배를 구겨서는 사처에 뿌려 던지여 온 방안에 온통 담배 천지다. 생각해 보니 그럴짐도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자체로 담배불도 부칠수 없었으니, 담배를 말아만 놓아서 무슨 도움이 되였으랴? 공연히 심기만 상하셨으리라. 내가 며칠 훈련을 시키여 아버지는 자체로 성냥을 켤수있게 되였다. 아버지는 몹시 기뻐하신다. 나는 화룡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아버지한테 담배대통을 하나 사다 드렸다. 담배대통이 있으면 담배를 말 필요가 없이 담배를 직접 담배대통에 담아 불을 붙여 피울수 있었다. 아버지는 조금 흡족해하는 표정 같았다.
그런데 그 어느날부터 아버지께서는 갑자기 어쩐 일인지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면 욕설부터 퍼 붓는데, 말씀이 되시지 않으니 신경질이 나서 담배대통으로 문턱을 잡아 두드리다가도 대통을 사람한테 마구 뿌려 던진다. 아마도 아주 중대한 발표를 하시려는것 같았으나,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를 병자취급만 하니 분통이 터졌으리라. 나는 안전을 위하여 아버지 한테서 담배대통을 압수하였다. 그리고는 아버지앞에 가서 자세히 들어 보았다. 아버지는 《거-거-기, 거-기… …》하신다. 나는 그말과 비슷한 말들을 찾아서 한가지, 한가지 물어 보았다. 《어머니를 거기 좀 앉으라구 그럼두?》, 《아이!》아버지는 손을 내 저으신다, 《그럼 거기서 썩 물러가라구 그럼두?》, 《아이!》아버지는 머리를 저으며 손바닥으로 입을 치며 먹는 시늉을 한다. 《오! 아버지가 고기를 잡숫기 싶어 그럼두?》, 《응!응!응!》 아버지는 기뻐서 아이들 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쳐댄다. 그것도 그랬으리라. 아버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신후 별로 영양보충을 하시지 못하였으니, 몸이 허약하여져, 몹시 구춘하였으리라. 어머니는 너무 우스워 악의 없이 욕을 해댄다, 《두상짝이 호강났네. 추석두 아니구, 설두 아니구 어디가서 고기를 가져온다니?》
하긴 그랬다. 그당시 농촌에서는 보통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이 와야만 소나 돼지를 잡아서 소대적으로 인구에 따라 분배하여 주었다. 때때로 추렴이란것이 있기는 하였지만, 닭이나 개를 잡아서 여럿이 함께 모여서 한때나 두때에 끓여 먹으면 그만이였다. 상품고기는 공인 호구만 대상하여, 엄격히 고기표(고기 정량 구매권) 제도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돈을 가지고도 상품고기를 살 권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하다 못해, 팔가자 림업국에 있는 나의 누나벌 되는 친척을 찾아가 방법을 대여 보기로 하였다. 내가 누나벌 되는 친척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였더니, 그 누나는 선뜻이 자기집 두근짜리 고기표를 몽땅 나한테 주면서, 아버지를 잘 공대하라고 당부하신다. 참으로 고마운 누나였다. 그로하여 나는 아버지의 생전의 소원 한가지라도 더 풀어 드릴수 있었다.
아버지한테 몇때에 나누어 고기를 대접하였더니, 그후 아버지의 정신상태는 많이 좋아졌으며, 신체도 빨리 회복되여, 인제는 쩔뚝거리며 천천히 걸어 다닐수 있게 되였다.
 
: 아버지의 본능
 1973년5월의 어느날, 일밭에 나갔던 사원들은 기약없이 내리는 비에 쫓기워 정심전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는다. 비오는 이런 날씨에 불편한 몸으로 어디로 나갔단 말인가? 나는 비닐쪼박을 머리에 쓰고, 온 동리를 다니며 찾아보았지만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종적조차 없으시다. 누가 보았다는 사람도 없다.
오후 한시가 좀 지나서, 비는 여전히 구질구질 내리는데, 중학교를 다니는 우리 소대의 한 학생이 우리집에 찾아와서 알려준다. 《이집 아바이, 지금 저 앞산에 있슴다. 길이 미끄러워 자꾸 넘어짐다.》 나는 바지가랭이를 걷우고, 맨발로 앞산을 향해 달려갔다.
중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자그마한 나무단을 등에 지고, 비를 흠뻑 맞으며 산에서 내려 오고 있었다. 중학교에서도 오늘 비올줄을 모르고, 학생들을 조직하여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여오고 있었다. 나는 비속으로 달리면서 마주 내려오는 학생들한테 소리쳐 물어보았다.《저 우에서 한 아바이를 보았니?》 학생들은 너도 나도 대답한다. 《예! 어떤 아바이 손에 낫을 들고 내려 옵디다.》, 《자꾸 신이 벗겨집디다.》… … 나는 미끄러운 올림 산길을 기를 쓰고 달려서 산등성이에 올랐다. 저 앞의 비속에서, 산을 내리는 학생들의 대렬옆에 비츨거리며 내려오고 계시는 아버지의 키큰 모습이 보인다. 두 학생이 등에 나무짐을 진채, 우리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서, 그 두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것도 잊은채, 아버지를 둘쳐업고 산길을 내리 미끌기 시작하였다. 한 학생이 달려와서 아버지의 벗겨진 고무신과 나무낫을 나한테 넘겨준다. 나는 신을 아버지한테 신기고, 낫은 아버지의 바지띠에 질러 넣었다. 낫날에는 새끼를 감은채로 있는것을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할때가 아직 일을 시작하기 전인것 같았다. 아버지는 나의 등에 업히운채 입으로 《왜재!》, 《왜재!》하고 중얼거린다. 나는 대뜸 아버지가 지금 근심하시는 것은 집앞 터밭의 울바자 감이라는것을 알아 들을수 있었다.
워낙 며칠전에 림업국 제재공장으로 부터 재목을 가공하고 남은 변두리 널잎들을 한차 사기로 하였는데, 그 널잎으로 울바자를 하면 오래 견디기도 하고, 또 보기도 좋았다. 그리하여 아직 마당의 울바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본능적인 책임감으로부터 자기의 현재 신체 상황을 잊은채, 습관적으로 나무낫을 찾아들고, 산으로 바자감 하려 떠났던 것이다.
책임감이란 아버지 사랑의 주요한 표현 방식이다. 어머니 사랑은 주요하게 보살핌으로 표현되지만, 아버지 사랑은 주요하게 책임감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어머니 사랑은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고, 항상 따스하지만 아버지 사랑은 간접적으로 깨달을수 있을 뿐이며, 어떤때는 아프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몇천년 내려오면서, 어머니 사랑에 대한 노래는 수없이 많지만, 아버지 사랑에 대한 노래는 듣기 어려운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아버지는 심한 촉한에 걸려 끝내 다시 몸져 눕고 말았다. 몇달간 치료를 거쳐 좀 차도가 보이는듯 하더니, 벼 싣걱질을 시작한지 며칠되는 어느날, 갑자기 또 중태에 빠져 버린다. 의사가 와서 진찰해 보고는 재풍이 왔다고 한다. 보통 이런 형편에서는 환자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아주 적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평생두고 유감스러울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아버지의 회갑년 문앞까지 왔다가, 아버지한테 회갑상을 차려 드리지 못하는 그것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날 아버지 병문안을 오신 광신의 큰 아저씨한테 제의 하였다. 《이제 탈곡이 끝나서, 오는 양역설이 아니면, 음력설에 아버지한테 회갑상 차려 드립시다. 원래 환갑날이 명년의 음력 오월스므닷새지만, 지금 형편을 봐서 그때까지 견지할것 같지 못합니다.》 큰 아저씨는 나의 제의에 찬성하면서도, 문제를 하나 제기한다. 《환갑은 미룰수는 있어도, 앞당기지는 않는다구 하더라. 별일 없을가?》 나는 전통례법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그 당시는 전통적인 례법을 타파하는 시대였으므로, 별로 고려없이 손을 내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로선문제두 아니구, 당의 정책문제두 아닌데 뭐가 두렵습니까? 례법은 례법이구, 실제 상황이 특수하니까, 그럼 너무 어긋나지 않게, 음력 정월 초 이튿날루 하면 되겠습니다. 환갑날은 아직 안되였지만 환갑년인 갑인년에는 이미 들어섰으니, 옛법에두 너무 어긋나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특수한 상황에서는 환갑두 이렇게 셀수있다는 새법을 우리집에서 만듭시다.》
그리하여 최종으로 아버지의 환갑 잔치날을 이제 오는 음력설 이튿날로 결정하고, 여러 친척들한테 두루 통지하여 준비시키기로 하였다. 하늘이 아버지한테 혜택을 베푸셨는지, 음력설이 다가 오면서 아버지의 병세는 많이 호전되였다.
 
마지막회: 환갑을 쇠다.
1974년 갑인년 정월 초이튿날, 우리는 계획했던 대로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우리집에서 정성껏 차렸다. 많은 친척들은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할것없이 온집식구 총동원하여 왔다. 동네에서는 어느집에서나 부조금을 가지고 모두 참석하였다. 동네 어른들도 귀순분자 아버지를 꺼리지 않고, 흔쾌히 아버지 옆에 배동하여 앉아서 함께 축수를 받았다. 대대에서도 빈하중농대표 한분을 파견하여, 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하러 왔다. 큰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간력을 읽었는데, 문제가 되는 귀순사건을 대담히 빼 버렸다. 그렇다고 그누구도 구호를 부르며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간력 랑독이 끝나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벽을 짚고 안깐힘을 쓴다. 한 동네 어른이 부축하여,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성공한다. 아버지는 일어서서 손만 자꾸 내 저을뿐 말씀이 되시지 않아서 입으로 《헉-헉-》 바람소리만 내다가 끝내는 한마디 인사말에 성공한다. 《감사--하오!》
이윽고 축수가 시작되였다. 나부터 시작하여,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큰 아저씨가 큰 소리로 부르는 명단에 따라 조용히 나와서 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하여, 술을 붓고 큰절을 올렸다. …
아버지의 환갑잔치는 생각밖으로 아주 의의있게, 아주 성공적으로 치려졌다.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치른후 신체가 아주 빨리 회복되여서, 몇달후부터는 지팽이를 짚고 또다시 천천히 걸어 다닐수가 있었다. 너무나도 생각밖의 효과였다.
1975년9월의 어느날,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되였다. 그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을 먹고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시고, 어머니와 나는 생산소대로 일하려 나가고, 선자와 춘자는 학교로 갔다. 그런데 정심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동네돌이 나가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가까운 동네집들을 다니며 찾아 보았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할수없이 먼저 정심을 먹고 다시 찾아 보았지만 여전히 어디에서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오후 로동 출근시간이 되여서 사원들이 제가끔 자기 일터로 나가는데, 적비조 사원들이 아침에 우리 아버지가 철로 방향으로 나가시는것을 보았다고 알려준다.
나는 부랴부랴 역전으로 나가보니, 오후에 화룡에서 내려오는 객차를 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오전차를 타시고 긍정코 화룡으로 올라갔으리라 짐작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역전 직반실에 들어가 사정하고, 화물차의 꼬리바곤에 앉아 화룡으로 올라갔다. 나는 화룡역전에 내려서 곧추 나의 사촌형님네 집으로 찾아갔다. 화룡에는 그집밖에 다른 친척이 없었다.
그런데, 화룡 사촌형님네 집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그당시 사촌형님은 문화혁명 충격을 받고, 먼 변강농촌으로 하방되여 내려갔으므로 집에 계시지 않고 형수님만 계셨는데, 아버지가 오신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 아버지가 어디 갔단 말인가? 반신불수로 걸음도 겨우 한발작 한발작 옮기시는 형편에서, 아버지가 가면 어디로 갈수있단 말인가? 내가 다시 화물차 꼬리차에 앉아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중이였다. 어머니도 온 오후 찾으면서 갈만한곳은 모두 가보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다. 우리는 그날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나는 앞산에 올라가 두루 찾아 보았다. 혹시 앞산에 올랐다가 맥이 진하여 어디에 눕지나 않았는지? 나는 온 오전 남산을 샅샅히 훑으며 찾아 보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는다.
정심때가 되여 나는 허기찬 배를 안고 집으로 내려오니, 뜻밖에도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누워 계신다. 그리고 광신에 계시는 큰 아저씨께서도 와서 계신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고 큰 아저씨한테 사연을 물었다. 큰 아저씨께서는 너무도 생각밖이라는 뜻으로 련속 머리를 저으시며 말씀하신다, 《… …신새벽에 바깥에서 무슨 인기척 같은게 나길래, 귀를 귀울어 들었는데, 인차 다시 조용해 지더라. 다시 한잠자구 아침에 일어나 바깥에 나가보니, 마루에 한사람 앉아있었다. 가까히 가서 찬찬히 보니 글쎄 팔가자 형님이 아니겠니? 아마 새벽에 우리집에 도착한것 같은데, 우리를 깨우지 않느라구 마루에 앉아 날새기를 기다렸구나. 어떻게 왔는가구 물어봐두 말두 방정히 하지 못하지. 그래서 아침 대접시킨후 소수레로 명신역까지 실어다가 객차에 이렇게 모시고 왔다. 여기와서 형수님말 들어보니, 가능하게 네 아버지는 하루낮 하루밤을 걸어서 우리집에 온겄갔구나. 40여리 길이다. 명신에서 큰물은 또 어떻게 건넜구? 이렇게두 우리형제 보구퍼 하는걸 우리는 모르구 있었지. 우리가 언녕 자주 와서 뵜어야 하는건데… …》 큰 아저씨는 목이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그랬다. 40여리 길이다. 명신에서 강성촌 마을을 들어 가려면 또 해란강 물을 발 더듬하며 건네야 하였다. 성한 사람이 걷자하여도 벅찬 거리인데, 반신불수의 병자가 마비된 한쪽다리를 지팡이에 의거하여 간신히 옮겨놓으면서, 오로지 동생들을 찾아 보겠다는 마지막 일념으로 20여시간 물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완성한 기적의 거리라고 하겠다. 아버지 머리에서는 이미 피곤하다든가, 배고프다는 감각은 모두 마비되여 버렸으리라. 그리하여 자기의 마지막 소원을 상식을 초월하는 자기의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실현하셨다. 인간 신체의 능력에는 제한이 있겠지만, 인간 정신의 잠재력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것이다.
너무나 지치신 아버지는 또 다시 몸져 누우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운이 다시 아버지한테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병세는 점점 악화되여만 가더니, 국경절 이튿날 세번째로 재풍을 맞았다. 의사가 와서 진찰해 보고는 인젠 빨리 후사를 준비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친척들한테 두루 알려, 아버지가 아직 임종하시기전에 모두 한번씩 와서 보도록 하였다.
아버지가 세번째로 재풍을 맞아서 세주일후, 1975년 10월22일, 음력 九월十八일 亥時, 가속과 많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아버지께서는 평온하게 숨을 거두시였다. 종년61주세였다.
고 아버지 묘소는 지금, 길림성 화룡시 팔가자진 중남촌 약암동 동글산 마루에 모셔져 있다.
고 아버지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2011년10월 초고   2013년 9월 정리
 
著者:
延州玄氏判尹公派卅一世孫;
(八修大同譜127p/第五倦)
延邊朝鮮族禮儀研究會會長—玄龍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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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차홍란
날자:2014-01-25 10:15:40

아버지에게 효도하신 현선생이 모습에 감탄을 보내드립니다 !
며칠후면 2014년춘절이 다가옵니다,새해에 복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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