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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리남조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다”고
2020년 10월 17일 10시 40분  조회:1717  추천:0  작성자: 오기활
할머니 가족사는 중국조선족 100년사의 축소판
 
 
언제부터 시대의 화제로 오가던 “지금은 고령화시다”가 오늘(10월3일) 에 “지금은 백세시대다”로 확실해 졌다.
 이날 연길 카이락스수정궁에서 펼쳐진 “백세수연례”의 주인공은 리남조(李南祚,延吉市北山亍丹城委42组5单元201)로 이날  “수연례”먼저 방영한 동영상에서 모든 하객들이 리남조할머니의 독서, 필기. 바느질. 설겆이. 두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땅을 짚는 운동을 하는 믿기어려운 화면을 보고  “확실한 백세시대다!”고 찬탄하였다.
 
“백세수연례”는 리남조네 가족사를 소개하는 록화방송으로 막을 올렸다.
 리남조할머니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 3대가 반일투사이고 형제 8남매(7남1녀)인 리남조는 10살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농사일을 했고 결혼후 54세에 남편을 잃고 혼자몸으로 자식들(2남 6녀)의 뒤바라지를 하여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대학교수 등 5명인재를 키워낸 자랑스러운 어머니로 지금 5대에 53명(큰딸 80세)의 대가족이 중국, 한국, 미국, 오스틀리아 4개국서 살고있는 존경스럽고 행복한 할머니이다.
리남조의 할아버지 리수원(数元,1874-1959)은 어린나이에 서당공부하며 신동이라 불렸다.
리수원은 어느날 마을에서 조직한 시(诗)발표모임에서 반일(反日)시를 발표했다는 죄명으로 일본경찰들이 체포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자 1913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신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망명한후 “사람은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된다”며 자비를 출자하여 유하현 삼원포에 생물동학교를 설립, 우수한 학생을 반일무관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에 추천하였다. 그리고 명신년토벌을 피해 흑룡강성 녕안 밀강에 이사한 후에도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촌장으로 일했다.
 1923년 가을에 리수원은 동경성으로 이사, 1924년에 처음으로 대종교의 제3주교인 윤세복을 만나 대중교에 입교하고 아들 리대성도 입교시켰다. (大倧教란 1909년에 창교된 우리 민족의 고유의 종교로 1910년ㅡ 1920년까지 독립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 1911년에 만주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 후에 교단중앙본부를 만주로 옮기고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무장세력을 양성, 일제는 “종교통제안”이란 명목으로 대종교를 탄압ㅡ 편자)
리수원은 대종교 동경성교당의 전무, 상교를 력임하면서 대종교 2인자로 활약, 1928년부터는 전직 대종교요인으로 대종교의 운영비, 대종교총본사사업, 대종학원운영으로 큰공을 세웠다.
 
리남조의 아버지 리대성(大成)은 1923년초에 간목성공사(垦牧城公司)가 설립되였는데 동북군집단군 10군 부군장 곽송령이 공사주임이였다.
1924년에 리대성은 간목성공사의 한국인대표로 있다가 공사경리로 발탁하여 곽송령의 소개로 민국지방군 기병중대장인 마해산을 알게되고 그와결의형제를 맺고 간목성공사산하의 500여쌍의 수전을 경영하는 실업가로 된후 동경성,할빈을 나들며 곡식무역을 담당하였다.
리대성은 1925년에 김좌진장군이 영안에서 신민부를 설립할때 동경성대표로 참석하여 회의 장소와 식사까지 전담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후 일제가 중국의 조선인을 전면적인 타격을 시작하자 리대성은 마해산에게 군자금을 후원하는 등으로 영안현내의 4000여명의 한국인들이 위기를 넘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32년초에는 마해산과 공동으로 작전하여 소룡만과 잉가령에서 일본군 천야부대 기습에서 성공, 당년 12월에는 한국독립군의 차도선과 함께 경박호반대첩을 하였다.
1932년부터는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농장을 운영하면서 딸 리근숙이 유격대를 조직하는데 10만원의 자금을 해결해 주었다.
 1933년 10월에 영안에서 체포되여 할빈관동군 사령부에 7개월 감금되였다가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되여 지방형 3년재판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후에 일본놈들에세 참살당했다.
 
리남조의 사촌언니 리근숙(根叔)은 리대성의 큰형님 리만석의 딸인데 그녀가 출생 1년후에 생모가 죽자 리대성이 입양한후 이름을 선오(善吾)로 개명하고 친딸로 되였다.
리근숙은 어려서부터 중국말을 잘하고 웅변능력이 좋고 독서를 아주 즐겼다.
9.18사변후 항일구국운동에 뛰여들고 1930년에 입당, 1934년에 참군한후 정치사업을 하다가 항일독립 제4군 부녀주임겸 선전처 처장을 담임했다.
리근숙은 1940년대 초에 쏘련에가 모스크바대학에서 공부하고 만주로 돌아와 동경성 사라진에서 지방사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 뻐스안에서 일본 사복경찰에게 발각되여 체포된후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불구가 되여 잠시 석방되였다가 다시 체포되여 일제놈들에게 참살당했다.
 
리남조가족사소개 록화방영이 끝나자 선임국가민족사무위원회주임 리덕수와 주당위선전부 선임부부장 채영춘이 축사를 올렸다.
리덕수는 축사에서 “조선족 100력사의 견증인인 리남조할머니의 건강장수비결은 ‘화목+건강=애심’이다”  “리남초할머니는 많은 각고(各苦)를 이겨내고 나라와 가족, 이웃을 위하여 기여하었다”고 말하였고 채영춘은 “리할머니의 가족사는 우리 민족력사의 숙영이며 중국조선족100년사의 축소판이다”,  “리남조할머니의 100년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오늘의 실천으로 증명했다.”  “리남조할머니는 우리 모두 의 교오이고 자호이다!”고 말하였다.
축사를 이어 리남조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손을 높이 흔들며 기쁨과 감사를 표하고 나서 이렇게 답사했다.
 
... 나의 오늘의 있음은 나라의 덕분이고 자식들이 효도한 덕분입니다. 우리집의 모든 사람들이 나쁜일을 절대 안했습니다.
... 지금은 글을 써도 글씨가 삐뚤어서 쓰고싶은 글도 방정하게 못써서 아주 아쉽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식들의 효도하에서 건강장수하십시요!
 
이날의 “백세수연례”는 실로 모든 하객들의 기쁨과 행복의 현장, 배움의 현장, 감동의 현장이였다.
 
필자는 리남조할머니의 수연례 먼저 그를 인터뷰했는데 그때 인터뷰채록 요약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문; 언제 중국에 오셨습니까?
: 우리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다. 백년전에 할아버지가 온가족을 데리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 심양, 해림서살다가 나중에 동경성에 정책했다. 나는 심양태생이다.

문: 문화정도는?
: 할아버지한테서 한글(韓文),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사비로 6년제 소학교를 세운후 4년간 그학교들 다녔다.
그리고 초혼후 7년간을 혼자지낼 때 대정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중학교도 대수 다녔다.
 문: 결혼은 언제 하였습니까?
: 결혼을 말하자니 힘들다. 이때까지 비밀로 지켰다.
내가 18살 때 8남 1녀네집의 막내아들의 눈에 들어 부모들이 그를 만나본후  그가 병자인것을 모르고 한달후에 나를 그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하자부터 앓는 남편을 의사가 보더니 부부생활을 하면 안된다기에 7년간을 혼자지냈다. 
25세에 5년 년상인 김병훈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2년 터울로 6녀 2녀를 출산하였다.
문: 지금의 건강상황은 ?
: 안경이 없이 신문을 보고 바늘귀도 꿴다. 썩 오래 전에 딸집을 가다가 물도랑에 넘어져서 무릅뼈가 탈골했던 후유증으로 가끔씩 무릎이 아픈 외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 이발이 부실하여 십년 전에 8500원을 팔아 치료를 하고 요즘에 불편해 3000원을 팔아 틀이를 했다.
나의 몸에 로인반점도 없다. 건강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나를 못 따른다. 
문: 건강비결은?
리: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40세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여러가지 건강운동을 만들고 그운동을 50년견지해 왔다. 얼마 전에 큰아들이 나에게 발운동을 어떻게 하면 좋다며 알려주니 나는 그운동을5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견지했다니 놀라 하였다.
문: 이제 몇 년을 더 살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리:. 운동원처럼 건강하지는 않지만 먹을 것을 제대로 먹으니 지금 생각에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환한웃음)
문: 지금까지 잘했다고 하는 일이 있다면?
: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혼 때 둘이 털털 이로 만난 것은 잘한 것 같고 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문;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 생활이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 간고하고 고지식하게 살아 온 것이다. 
그밖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문; 억울한 일이 있다면?
: 내가 가도에서 련조장, 선전워원으로 공작하다가 감독원을 시키니 나는 남을 감독할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아버지가 일본놈들에게 총살 당한후 원쑤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후에 보니 토비로 되였다. 하여 오빠의 문제로 가도에서 “可疑分子”로 몰려 모든 사업을 박탈당한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항일렬사인데 오빠문제로 렬사가족을 묵과당하고 “가이분자”로 몰리니 그때 정말 억울 하였다.
문: 반성되는 일은 없는지요?
리: 이때까지 “예, 예”하면서 살아왔기에 반성할 일이 별로 없다. 마음에 가책되는 일이 한 점도 없다.
문: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지금까지 우리가문이 좋은 가문인지 아니면 나쁜 가문인지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뜻인즉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의 항일력사를 기록한 책이 없다는데서의 서운함이다 ㅡ편자)
문: 효도란?
: 효도란 부모님이상 조부, 증조부…를 대상해 쓰는 말이다. 녀자가 절개를 지키면 렬녀, 훌륭한 안해를 조강지처, 훌륭한 어머니를 현처량모라고 말한다.
문: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다면?
: 아무런 요구가 없다. 저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문: 그 년세에 이성에 대한 생각이 나는가요?
: 나는 이성을 말하면 듣기도 싫다. 나는 총명한 증손들에게 빠진 재미로 산다.
실로 리남조할머니로 말하면 마음은 진짜고 나이는 수자에 불과하다.

오기활
 
(길림신문 2020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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