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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신작

비오는 계절
2020년 06월 17일 07시 43분  조회:1136  추천:1  작성자: 동녘해

1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주먹을 쳐드는 순간 빈이는 쏜살같이 뛰여가 그 애의 허리를 겨냥하고 오른발을 날렸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보기 좋게 옆으로 나가 널부러졌다. 빈이는 순간 몸으로 녀자애를 막아서면서 괴성을 지어올렸다.
“뭣들 하는 거냐?”
 “이…이건 어디서 굴러온 놈이냐?”
민머리를 한 남자애의 옆에 서있던 남자애 둘이 빈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왼쪽에 선 남자애는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였는데 키가 늘씬했고 오른쪽에 선 남자애는 상고머리를 했는데 가슴이 탁 튀여나온 것이 박달나무처럼 단단해보였다. 달려드는 품이 례사롭지가 않았다. 단번에 빈이를 짓뭉개버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빈이는 오른손으로 녀자애를 보호하면서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남자애들은 빈이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숨막히게 앞으로 박근해왔다.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기신기신 기여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죽여라, 당장 잡아 죽여라.”
그 소리에 힘을 입었던지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인 남자애가 빈이에게 달려들었다. 빈이는 슬쩍 옆으로 몸을 뽑았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오른주먹을 번개같이 날려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인 남자애의 가슴에 한주먹을 안겼다. 머리에 노란 물감을 들인 남다애가 삽시에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빈이는 오른발을 날려 오른쪽에 선 상고머리를 한 남자애의 배를 걷어찼다. 민머리를 한 남자애는 그 기세에 지레 겁을 먹었던지 연신 “죽여라, 죽여라.” 하고 소리치면서도 감히 빈이에게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짜식들, 그 재간을 가지고 뭐…”
빈이가 옆에다 “퉤” 하고 침을 뱉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썩 꺼져라.”
남자애들은 대단한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던지 간신히 기여일어나 “씨발, 재수 없군.” 하고 씨벌이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빈이는 오른주먹을 왼손바닥에 대고 썩썩 비비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짜삭들, 까불고 있네…”
빈이는 말하다 말고 머리를 돌려 목석처럼 굳어져있는 녀자애에게 눈길을 돌렸다. 녀자애의 두 눈동자는 당금 튀여나올 것만 같았다. 얼굴에 경이로움이 가득차있었다.
“너 몹시 놀랐지?”
빈이가 히쭉 웃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좀… 와— 대단하다. 멋졌어!”
녀자애가 갑자기 손벽을 짝짝 치더니 빈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대단하구나. 싼다(散打)를 배웠니?”
“아니, 이 정도야 뭐… 방금 너 아는 애들이니?”
빈이가 멋스럽게 주먹으로 코 밑을 쓱 쓸면서 물었다.
“아니. 모르는 애들이야. 하학하여 집으로 가는 길이였어. 저 굽인돌이를 금방 돌아서는데 걔들이 앞에서 마주오는 거야, 나는 그저 길 가는 애들이겠지 하구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그 뺀뺀대가리를 한 애가 나의 옆을 지나가는 것처럼 하다가 나와 부딪치더니 팔을 상했다면서 치료비를 내라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돈이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랬더니 그 애들이 나의 팔이며 옷섶이며를 잡아쥐고 돈이 없으면 보내주지 않겠다는 거다.”
녀자애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꼬리를 이어갔다. 빈이는 방금 아무 일도 당한 적이 없는듯 너무도 태연한 녀자애를 살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조금도 무서워하는 눈치가 없구나.”
녀자애는 그제야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얼굴을 쳐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짜식들, 걔들이 셋이였으니 내가 참은 거지, 딴따(单打)를 했더라면 흥, 이래뵈두 난 태권도를 배운 녀자란다.”
녀자애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면서 자부심에 넘친듯 말했다.
“와— 우!”
빈이는 일부러 과장스러울 정도로 두 팔을 쫙 폈다가 두 손바닥을 탁 마주치면서 함성을 지어올렸다.
“고마웠어, 너두 참 대단했다. 멋졌다구. 나는 은지야, 서은지, 5중에 다닌단다. 3학년이야, 넌?”
은지가 도전적으로 물어왔다.
빈이는 다시 한번 히쭉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제1고중에… 1학년이야.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멀리서 걔들이 너를 에워싸고 있길래 필경 무슨 일이 생겼겠다 싶어서… 아니나 다를가… 녀자애가, 아무리 태권도를 배웠다고 해도 혼자 다니지 말아라.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오늘 너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하하하… 그 말투 제법이네, 어쩜 내 오빠라도 되는 것 같단 말이다. 줘봐라.”
은지가 빈이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뭘?”
빈이는 은지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모르겠다는듯 물었다.
“모르겠니? 우리 저 쪽에서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은지는 말을 마치고 빈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개울 가로 걸어갔다. 빈이는 은지의 뒤모습을 잠간 지켜보다가 소리없이 은지를 따라섰다.
파란 풀이 미풍에 하느작이는 개울가는 유난히도 고요했다. 졸졸졸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가끔 “삐쭁—삐쭁—삐삐—쭁—” 하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올 뿐이였다. 은지가 먼저 개울가의 펑퍼짐한 돌 우에 엉뎅이를 붙아고 앉았다. 빈이는 앉지 않고 은지의 뒤에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뭘 줘보라는 거니?”
은지가 빈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말했다.
“위챗이지. 앞으로 우리 친구하자.”
빈이는 깜짝 놀라는듯 순간적으로 야릇한 눈길을 은지에게 주었다가 당기면서 말했다.
“녀자애가 겁도 없이. 가져라.”
빈이는 말을 마치고 핸드폰을 꺼내 위챗을 찾아 보여주면서 말했다.
“네가 스캔해라.”
빈이는 은지에게 핸드폰을 넘겨주고는 옆에 앉으면서 자기의 QR 코드를 열심히 스캔하는 은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국보급 보호동물이라도 지켜보는듯 진지했다.
은지가 핸드폰을 빈이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인젠 물리지 못한다. 워이신 까지 추가했으니까.”
“뭘? 너 3학년이라면서? 오라지 않으면 고중입학시험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녀도 되니?”
빈이가 근심스러운듯 물었다. 그러자 은지가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이런 샌님이라구야. 고중입학시험은 너 같은 글벌레들에게나 어울리구. 난 이미 결정했다. 직업고중에 가려구.”
“직업고중? 왜? 너, 공부는 별로구나…”
순간 빈이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느꼈던지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고는 자기의 말을 중둥무이했다가 이렇게 얼버무렸다.
“직업고중도 괜찮지 뭐. 꼭 고중에 가야 맛이냐? 사실 나도 지루해, 고중 공부가…”
“공부에 소질이 있으면 계속 공부하는 게 원칙이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소학교 때 부터 공부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
중학교 3학년 학생이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은지가 괴물이라도 되는듯 빈이는 잠간 그를 살펴보다가 물었다.
“너의 어머니는 뭐라구 안하니?”
“어머니가? 말루야 공부를 잘하면 나를 류학까지 보내준다고 하지. 그래서 내가 일곱살 때 나를 외할머니에게 맡겨놓구 한국에 갔단다. 내 류학경비를 벌어온다구 말이다. ‘네가 아니면 내가 왜 이러구 다니겠니?’ 이게 우리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란다. 흥…”
은지는 남의 말을 하는듯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빈이는 알겠다는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너의 어머니두 한국에 가셨구나. 무척 고생하셨겠네. 쯧쯧…”
빈이는 제법 성숙된 이웃집 아저씨마냥 혀까지 찼다.
“그런데 내가 직업고중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요즘 돌아왔다. 개고생을 한 보람이 없대, 벌어온 돈으로 호강하며 여생을 산대. 내가 우리 엄마 로후를 위해 돈을 절약해준 셈이지. 하하하…”
은지가 막무가내라는듯 사람 좋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이어 빈이가 한술 떴다.
“너의 아버지가 좋아하시겠구나. 어머니가 돌아와서.”
“아버지?”
은지의 어조가 뒤끝이 높아졌다. 빈이는 흠칫하면서 은지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없어. 인젠 그 사람의 얼굴도 기억 나지 않아.”
“아, 미안. 너의 어머니가 더욱 고생 많았겠구나.”
“고생은 뭐, 그 녀자가… 우리 외할머니가 고생했지, 나 때문에.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외할머니를 내처 못 살게 굴었거든. 어느 날인가 내가 또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발버둥질을 치니 외할머니가 큰 마음을 먹고 어머니에게 국제전화를 한 거다. 나는 전화가 통화자마자 외할머니의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아들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어. 어머니는 전화 저 쪽에서 ‘뭘 갖고 싶니? 엄마가 돈을 보내줄 게 갖고 싶은 것을 다 사가져라.’라고 말하면서 나와 함께 펑펑 우는 것이였어. 그 후부터 어머니는 진짜 많은 돈을 보내주었구. 그 덕에 나는 돈을 펑펑 쓰면서 호강을 하긴 했지만…”
침 한번 삼키지 않고 술술 내리 엮는 은지를 바라보면서 빈이는 풍상고초를 다 껶은 어느 할머니의 인생담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은지도 그러는 빈이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하다고 생각했던지 말끝을 흐리면서 말했다.
“내가 참, 웬 주책이냐, 오늘 처음 보는 애한테. 그래도 네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 어쩌니. 나의 구명 은인!”
“뭐? 구명 은인?”
“아니니? 넌 1대 3으로 나서서 남모르는 녀자애를 위험에서 구해준 호걸인데.”
“뭐? 어… 하하하…”
빈이는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소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은지가 빈이의 곁으로 한뽐 다가 앚으며 말했다.
“인젠 너도 말해야지.”
빈이가 무슨 말이냐는듯 되물었다.
“뭘?”
“우리 공평해야지. 내가 나의 신상을 이 정도 밝혔으니 너도 너의 신상을 털어야지.”
은지는 당연하지 않느냐는듯 빈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빈이는 쑥스러운듯 눈길을 돌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저 그렇지 뭐. 별루 없어. 털 게.”
“내가 어머니에 대해 말했으니까 너도 그 쯤은 털어야잖아?”
은지가 뚱겨주었다.
“어머니?”
빈이가 잠간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야, 고정 직업이 없어. 개인 식당에서 주방보조로도 일했구 슈퍼에서 물건도 팔았댔다. 그러나 지금은 잠간 집에서 쉬고 있어.”
“오, 넌 그래두 어머니 곁에서 자랐으니 사랑은 듬뿍 받았겠네. 생활은 유족하지 못해두.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크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단다. 사는 게 좀 힘들어두 어머니 곁에서 자란다는 게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니? 외할머니도 물론 의지가 되지만… 지금은 나도 괜찮아.”
“왜?”
“뼈가 굵어졌거든. 그래서 어머니의 품이 아니래두 외할머니의 품이 아니래두 홀로 날 수 있으니까.”
“홀로 날 수 있다구?”
“왜 아니니? 너 자신 없니? 마음 여려가지구. 너 아까 걔들 셋을 족치던 용기는 어디갔니? 하하하… 하긴 너의 얼굴에 쓰여져있단다.”
“뭐가?”
“난 첫눈에 너의 얼굴에서 흐르는 사랑을 보아냈단다.”
“그런 것두 얼굴에서 보이니?”
빈이는 모르겠다는듯 은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론이지. 눈이 말해주거든. 너의 눈은 내 눈 같지 않아.”
은지가 자기의 두 눈을 끔뻑거리면서 말했다.
“너의 눈이 어떤 데?”
은지를 바라보는 빈이의 눈이 기대에 차보였다.
“나의 눈? 하하하…”
은지는 잠간 통쾌하게 웃어제끼고는 정색해서 말을 이었다.
“날카롭겠지. 난 말이야, 누가 나를 업신 보면 사정을 두지 않아, 애비 없는 년이라구 애들이 놀리면 목숨을 걸구라두 덤벼, 그래서 태권도도 배웠구. 그런데 넌 아니잖아… 분명 사랑 받으면서 자란 아기염소 같은 눈이잖아…”
빈이는 도도하게 열변을 토하는 은지를 이윽토록 살펴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잠간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은지는 빈이의 다음 말에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듯 초조한 눈길로 머리를 숙인 빈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졸졸졸…”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삐쭁…삐삐쭁…”
이름 모를 새들이 빈이와 은지를 내려다보면서 뭐라고 지저귀였다. 빈이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지저귀는 새들을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늦었네. 그만 가봐야겠다.”
“아, 그래… 오랜만에 동지가 생겼다구 한참이나 너스레를 떨었더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갔네. 오늘 즐거웠다. 우리 다시 만나는 거지?”
은지가 빈이를 따라 일어서면서 물었다.
“글쎄, 만날 수도 있겠지. 아니, 꼭 만날 거야. 우린 다시 만나야 해.”
“하하하…빈이야, 너 말투를 봐서는 무척이나 인연을 믿는 것 같다. 좋아. 다시 만나자. 내 먼저 갈 게. 너 나의 뒤 모습을 바라봐라. 영화에서처럼.”
말을 마친 은지는 길지도 않은 단발머리를 손으로 멋스레 빗어넘기면서 몸을 돌렸다. 은지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보였다.
 

열일곱살 그 해의 비오는 계절에
흘러간 동년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가 커가고 있음을 알았네.
열일곱살 그 해의 비오는 계절에
우리는 공동의 기대가 생겼네

 
향항 가수 림지영이 부른〈열일곱살 그 해 비오는 계절에〉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였다.
그린듯이 굳어진 채 은은한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멀어져가는 은지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빈이의 얼굴에 착잡한 기운이 괴여올랐다.
 
 
 
2
 
“아빠—”
챙챙한 목소리가 빈이의 귀구멍으로 날아들었다. 빈이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목소리의 임자를 찾았다. 목소리는 빈이로 부터 서너메터 밖에 있는 개울에서 들려오는 것이였다. 남자애는 개울가에 서있는 중년 남자를 향해 까르르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찰방찰방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였는데 실로 입이 귀에 가 걸릴 지경이였다.
“아빠두 내려와요, 물이 하나도 차지 않아요. 완전 시원하다니까요.”
남자애가 재촉했다.
“조심해라, 넘어질라. 넘어지면 무릎을 상한다.”
중년 남자가 짐짓 근심스러운듯 남자애에게 소리쳤다. 남자애가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중년 남자에게 뿌리면서 소리쳤다.
“해해해… 아빤 겁쟁이, 겁쟁이구나.”
남자애의 웃음소리가 너무 맑아서 빈이는 귀에 거슬렸다. 괜히 부아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뭐가 저렇게 좋아. 오줌줄기 같은 개울에서 청개구리처럼 첨벙대면서두…’
빈이는 그림과도 같은 그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면서 잔등을 풀밭에 대고 큰 대(大)자로 누워버렸다. 온몸이 나른해나면서 저도 몰래 몹시 피곤하게 느껴졌다. 빈이는 고통스럽게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가? 아버지는 워낙 그런 사람이였을가?’
갑자기 얼굴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빈이는 두 눈을 번쩍 뜨면서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을 쫙 펴 얼굴을 만져보았다. 찐득찐득한 것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빈이는 손바닥을 눈 앞에 당겨다댔다.
“앗, 재수가…”
빈이는 벌떡 일어나 앉아 눈길을 공중으로 날렸다. 이름 모를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중 어느 놈이 대담하게도 빈이의 얼굴에 똥을 쐈던 것이다. 빈이는 부랴부랴 호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얼굴에 묻은 새똥을 닦았다. 저도 몰래 두 눈에서 맑은 것이 괴여올랐다. 빈이는 무기력하게 다시 풀밭에 등을 대며 벌렁 누워버렸다. 고통스럽게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퍼런 불이 뚝뚝 떨어질 것 같던 아버지의 그 눈길만은 도무지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토요일이라 빈이는 실컸 늦잠을 자고 싶었다. 어머니가 들어와 이불을 당기면서 “일른 일어나 밥 먹어야지.” 할 때까지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누워 실컸 어리광을 치고 싶었다.
그 때 객실에서 아버지의 괴성이 들려왔다.
“쌍년이, 점점 담이 배 밖으로 나오고 있구만. 남정 무서운 줄도 모르는 년.”
“왜 또 욕해요? 내 말이 틀렸어요?”
어머니도 몹시 화가 났던지 호락하락하지 않았다.
“짤랑” 하고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건은 왜 메쳐요? 내 말이 과분한가요? 한국에서 돌아와 두달간 여태까지 밖으로만 돌지 않았어요? 아침밥술이 떨어지면 밖에 나갔다가 밤 늦게야 들어오지 않구 어쨌나요? 그 새 가시집에는 시퍼런 바나나 서너근 사가지고 한번 다녀온 게 고작이 아니구 뭐예요. 오늘 가시집 가서 밭일이나 좀 돕자는 게 뭐가 잘못됐나요? 우리 아버지 인젠 허리가 다 나가서 밭일이 힘들단 말이예요.”
어머니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감수 같은 것은 뒤전이라는듯 이죽거렸다.
“왜? 둥글소 같은 당신의 오빠가 곁에 있지 않소? 그 황소가 어련히 알아서 돕지 않을라구. 출가집 외인이 웬 오지랍이 그렇게 넓어서 본가집 일까지 신경 쓰는 거요.”
“이 사람아,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네.”
할머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마이는 좀 가만 있습소. 무슨 도움이 된다구.”
아버지가 할머니를 향해 고함치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빈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소리치는 것은 그냥 부부싸움이겠거니 하고 지나치려했지만 할머니에게까지 큰 소리를 치는 것은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빈이는 침실 문을 차고 나가면서 버럭 소리쳤다.
“모두 그만하세요, 아침부터 왜 이러세요.”
모두들 깜짝 놀라 빈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자식이, 너야 말로 아침부터 어른들에게 웬 훈계냐?”
아버지가 민이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뭘 잘했다구 그러세요? 이 집에 관심이나 있어요? 엄마 생각 조금이나 하세요? 량심에 꺼리끼지도 않아요?”
“뭐가? 뭐가 어쩌구 어째?”
아버지가 빈이의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조심해요,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줄 아세요? 지난 번에…”
빈이는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순간 아버지의 손이 번쩍 하고 빈이의 얼굴에 날아올랐다.
“짜식, 소처럼 벌어 기껐 키워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아버지는 분을 사기지 못하겠다는듯 힘겹게 모두숨을 몰아쉬였다.
“왜 아침부터 애는 때리고 그래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질렀다.
“에잇, 참 시끄러워 못 살겠다. 이렇게 살 게면 갈라지자.”
아버지가 바닥에 놓인 맥주병을 걷어차면서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걸, 저것 좀 보우. 아무 소리나 하는 것을…”
할머니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 밖으로 나가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못 마땅한듯 할머니의 뒤모습을 찍어보다가 다시 어머니 쪽에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에서 퍼런 불꽃이 탁탁 튀여나오는 것 같았다.
빈이는 더럭 겁이 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길에서도 저런 불꽃이 튈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여태 집이라 믿고 살아온 그 곳이 당금 자기를 삼켜버릴 심연처럼 느껴져 온몸으로 소름이 끼쳤다.
빈이는 홱 몸을 돌려 어머니의 손을 와락 잡아끌고 침실로 들어가면서 소리쳤다.
“상대하지 말아요, 엄마, 저런 사람을…”
“이…이것들이…”
아버지는 실망한듯 빈이와 어머니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악청을 뽑았다.
“탕” 하고 문을 차는 소리와 함께 빈이는 자기의 가슴을 지지누르던 돌덩이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였다. 또 한고개를 넘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그 시각 걸상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엇이라고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일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빈이는 “어머니…” 하고 불러놓고는 잠간 주밋거리다가 말 없이 몸을 돌려 어머니의 침실에서 나왔다.
지난밤에 아버지가 텔레비죤을 보면서 비운 맥주병이며 안주로 했던 명태껍질 같은 것들이 객실바닥에 그대로 널려있었다. 빈이는 허리를 굽혀 맥주병과 명태껍질을 주어들고 주방으로 갔다. 아침반찬으로 감자채를 볶으려고 했던지 썰다만 감자가 그대로 도마 우에 놓여있었다. 빈이는 퀭하니 두 눈을 뜨고 멀거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맥 없이 걸상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좋아, 아버지를 과연 어쩌면 좋아.’
아들로서 빈이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금이 가는 이 가정을 지켜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빈이가 아버지의 외도를 발견한 것은 너무나도 우연한 기회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 빈이는 친구들과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갔었다. 5월에 접어든 공원은 곳곳에 록음이 짙었다. 풋풋한 록음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 곳이면 옆에 큰 양산을 세워놓고 아래에 상 몇개와 걸상을 마련한 간이점들이 보였다. 혹은 한두 사람이 혹은 서너 사람이 상에 둘러앉아 음료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있었다.
그 날 빈이는 공원 뒤산의 미니광장에 갔다가 간이점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아버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앞에는 생머리를 어깨까지 내리드리운 통통한 얼굴의 한 녀인이 앉아있었다.
‘누굴가?’
빈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친구들 뒤에 몸을 숨기고 아버지와 그 녀인을 지켜보았다. 녀인은 새물새물 웃으면서 휴지로 아버지의 입가를 닦으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무엇이라 말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분명 벙글써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이더니 귀여워 죽겠다는 식으로 주먹을 내밀어 녀인의 이마에 꿀밤을 한대 먹이는 것이였다.
“아우- 닰살, 다 늙은 것들이.”
함께 갔던 친구 민호가 그 장면을 보고 심사가 꼬였던지 입속으로 씨부렁거렸다.
“왜, 보기 좋기만 하구먼. 너의 아빠, 엄마는 저런 애정표현을 하지 않니?”
친구 수호가 민호를 보면서 도전적으로 물었다.
“짜식, 너의 눈엔 저게 정상으로 보이니? 너의 아빠, 엄마면 공원에 와서 저러구 놀겠니? 저건 무조건 불륜이야.”
정민이가 자신 있다는듯 찍어말했다.
“맞아, 정민이의 눈이야 말로 레이저라니까. 척 하면 문제의 정곡을 찔러내거든, 하하하하…”
민호가 과장스럽게 머리를 뒤로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하긴, 세상이 어쩌자구 저러는지, 쯧쯧쯧…”
수호가 애들에게 뭐라고 한칼 더 박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너무나 순순히 수긍하는 것이였다.
“그러게, 봐라, 좋단다. 흐흐흐…”
정민이가 뒤에 선 빈이의 어깨를 톡 치면서 말했다.
“가자, 짜식들. 뭐 볼 게 있다구.”
빈이는 친구들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픽 돌려 씨엉씨엉 걸음을 옮겨놓았다. 친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씨구 좋네, 바람이 났네
온 세상이 모두 바람이 났네
신바람 났네 색바람이 났네

 
수호가 괴상하게 목소리를 뽑아댔다.
‘누굴가? 그 녀자는… 설마 아버지가 정말 바람이 난 걸가?’
빈이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원에서 보았던 그 장면은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빈이는 사실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다. 빈이가 열살 나던 해 한국으로 나간 아버지가 그 사이 서너번 집에 다녀간 외에 빈이가 열일곱살을 먹도록 밖으로 돌기만 했던 것이다. 그 사이 어머니는 집에서 빈이를 키우고 할머니를 돌보면서 뒤바라지를 해왔었다. 눈치로 보아 아버지는 집에 생활비도 얼마 보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그 사이 대부분 시간을 바삐 보냈다. 집안일을 하랴, 출근을 하랴 하루도 편히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아버지가 두달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는 일을 하다가 허리를 상했는데 더 이상 한국에서 중로동을 할 수 없어 돌아왔다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집에 와서 사흘 후인가 어머니와 함께 외가집에 한번 다녀온 후로는 어머니의 말처럼 거의 밖으로 돌았다. 어머니는 처음에 아버지가 그 새 만나지 못한 친들을 만나러 다니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차수가 너무 잦아지자 어머니가 아버지의 행적을 캐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차츰 어머니의 관섭을 못 마땅해 하는 눈치더니 차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필경은 어른들의 일이라 빈이는 남들이 말하는 ‘부부싸움’이겠거니 하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낮에 우연하게 보게 된 그 장면은 너무나 보기 좋게 정면으로 빈이의 머리를 들이쳤던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외도를 하고 있는 것이였다.
빈이는 그래도 믿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우리 집에 발생하다니?’
빈이는 사실을 똑똑히 밝혀내고 싶었다.
그 날부터 빈이는 기회만 되면 아버지의 뒤를 밟았다. 아버지가 거울 앞에 마주서서 머리를 다듬고 옷을 손질하고 나가는 날이면 거의 번마다 그 녀자를 만나고 있었다. 코스도 거의 비슷했다. 아버지가 하남 공공뻐스정거장으로 가면 그 녀자가 기다리고 있었고 함께 39선 공공뻐스를 타고 공원으로 가서는 진종일 춤도 추고 음료도 마시고 숲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던 것이다.
빈이는 그 녀자가 어디에 사는 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 그 녀자의 뒤를 밟은 적도 있었다. 녀자는 제3소학교 뒤골목에 있는 서원아빠트에 살고 있었다. 얼마전에는 빈이 또래의 녀자애와 함께 아빠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기까지 했었다.
‘흥, 딸까지 있는 년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려고 해?’
빈이는 지대한 분노를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당금 달려나가 그 녀인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였다. 아버지도 성인 군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쳤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분을 풀 수 있을가?’
빈이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날마다 하학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이 생각 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녀자가 아버지에게 꼬리질을 하는 것 같았고 순진한 아버지는 꼬리가 아홉개 달린 그 불여우한테 놀아나는 것 같았다.
빈이는 밤이면 밤마다 어떻게 그 녀인에게 복수하고 가정을 지켜내며 어머니를 지켜낼 것인가만 궁리하였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곬은 점점 더 깊어지고 아침에는 끝내 갈라지자는 말까지 아버지의 입에서 튀여나왔던 것이다.
빈이는 더 이상 복수계획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손을 쓰지 않으면 가정이 그 녀자의 손에서 정말 파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내가 우리 가정을 지켜야 한다. 내가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 갈라진다구? 안된다. 갈라지면 할머니는 어쩌구? 아버지와 어머니가 갈라지면 할머니가 더 이상 나의 할머니가 아닐 수도 있다.’

 
“아빠, 새들이 노래하고 있는 게 맞지?”
개울물 흐르는 듯한 소리가 빈이의 귀를 파고 들었다.
아까 물놀이를 하던 남자애와 그 애의 아버지가 어느새 개울가에 올라와 앉아 “삐쭁—삐쭁—” 노래하면서 날아지나는 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넌 어떨 때 노래하니?”
남자애의 아버지가 사랑이 듬뿍 담긴 눈길로 남자애를 바라보면서 자애롭게 되 묻는 것이였다.
“난…난 선생님이 노래하라고 할 때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
“그럼 저 새들의 선생님도 쟤들 보고 노래하라고 했겠지, 아니면 쟤들이 무척 기분이 좋으나…”
“그렇구나, 그런데 쟤들은 왜 기분이 좋을가?”
남자애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치하기는…”
빈이가 괜히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호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으로 메시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빈이는 인차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은지가 보낸 메시지였다.
“안뇽? 이 토요일엔 뭐하구 있니? 나의 구명 은인.”
은지는 거의 매일 한번 꼴로 문안 메시지 같은 것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래, 오늘이야.’
빈이는 결심을 내린듯 건반에 대고 손가락을 놀렸다.
“은지야, 오늘 만나자. 나 지금 우리 지난번에 만났던 그 개울가에 나와 있다. 너 당금 달려오는 거지?”
 
 
3
 
“빈이야—”
반가움에 한껏 들뜬 목소리가 바람결에 날려왔다. 빈이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은지였다. 은지가 빈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장면이였다. 무척이나 랑만적으로 느껴졌다. 빈이는 다가오는 은지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빈이야—”
은지가 빈이의 앞에 달려와 서면서 다시 한번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빈이가 짐짓 눈을 흘기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급하게 뛰여오기는… 다 큰 계집애가. 몹시 힘들지?”
“아니, 한시가 급했어.”
은지가 말하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은지의 손에는 분명 연분홍 꽃 몇송이가 들려있었다. 산이나 들 그리고 개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꽃이였다.
은지가 빈이의 옆으로 다가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쌕쌕 숨을 고르는 소리가 귀전을 스쳤다. 얼굴이 발가우리하게 상기되여있었다. 은지가 연분홍 꽃을 쥐고 있는 손을 약간 떨면서 빈이를 향해 방긋 웃었다.
“오다가 꺾었어.”
은지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꽃은 왜? 너의 얼굴이 꽃보다 더 예쁜데.”
빈이의 롱담에 은지가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얼굴이 꽃보다 더 예쁘다구? 하하하… 너 참 선수구나.”
은지가 머리를 약간 외로 돌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찔레꽃이야.”
“뭐, 찔레꽃이라구?”
“맞아. 찔레꽃. 개울가에 듬성듬성 꽤 많이 피여있더라.”
은지의 얼굴이 행복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너 찔레꽃을 좋아하니?”
빈이가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 얼굴에 왠지 모를 야멸찬 웃음 같은 것이 스치는 것 같았다. 은지는 빈이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고 꽃송이를 내려다보면서 여전히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지 그럼, 나도 녀자거든. 나는 꽃 중에서도 찔레꽃을 더 좋아해.”
은지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면서 제법 녀성스러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렇게 고운 줄도 모르겠구나 뭐, 찔레꽃이.”
빈이는 한마디 던지고는 힐끗 은지의 표정을 살폈다. 은지가 타는 듯한 눈길로 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빈이의 입가에서 묘한 웃음이 피여올랐다.
“그새 어떻게 지냈니? 우리 지난번에 만난 것이 한 사나흘 전인가?”
“오늘이 여드레째야.”
은지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벌써 그렇게 됐니? 난 며칠 안되는 것 같은데.”
“우리 날마다 메시지를 주고 받았잖아. 속에서 서로를 잊지 않고 있은 때문이겠지.”
은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잊지 않고 있었어? 속으로…”
은지가 말 없이 빈이를 쳐다보면서 머리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빈이야. 너 찔레꽃 꽃말이 뭔지 알고 있니?”
“찔레꽃 꽃말? 뭔데?”
은지가 방긋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찔레꽃의 꽃말은 고독이래.”
“고독?”
빈이는 너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듯 ‘독’자를 길게 뽑아올렸다.
“왜? 나는 고독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니?”
은지가 풀바닥에 엉뎅이를 대고 앉으며 물었다.
“고독은 아무나 하는 줄 아니?”
빈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은지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이번에는 빈이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은지는 분명 그 목소리의 변화를 감지한 것 같았다. 은지는 빈이의 곁으로 다가앉아 손에 든 찔레꽃을 빈이의 얼굴에 가져다대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너에게는 어울릴가?”
“어울리겠지. 나, 지금 정말 고독해. 고독해서 미칠 것 같아.”
빈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왜? 왜왜왜?”
은지가 흠칫 놀라면서 ‘왜’자를 수없이 반복했다.
“고독해서 말동무를 찾고 싶었다. 분출구를 찾고 싶었다. 마음속의 울화를 털어놓을 상대를 찾고 싶었다…”
“왜왜왜, 왜냐구?”
은지가 찔레꽃송이를 꽉 움켜잡으며 급히 물었다.
“울 아버지가 바람 났어.”
“뭐라구?”
은지가 벌떡 일어섰다.
눈길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아, 누구에게 이 울화를 털어도 못 놓구… 오늘 너 나의 상대를 해줘라.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 우리 오늘 두번째 만남이지. 그러니 남과 같은 사이잖아. 내 이 속마음을, 내 이 고독한 심정을, 내 이 터지려는 울화를 네가 싹 다 쓸어서 안아주란 말이다. 그런 다음 툭툭 털구 가버리란 말이다. 그럼 내 속이 좀 가벼워질 것 같다.”
빈이가 열변을 토했다. 은지는 미처 말꼬리를 잡을 새가 없어서인지 한마디 께끼지도 못하고 빈이의 입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였다.
“미치겠다. 다 그 나쁜 년 때문인 것 같아. 울 아버지, 그 정도로 형편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울 아버지가 워낙 그렇게 형편 없었을 수도 있어. 아니, 아니, 울 아버지 한국에서 나쁜 물을 먹었을 거야…”
“너 뭘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잖니?”
은지는 그제야 사태의 엄중성을 실감했던지 손에 들려있는 찔레꽃을 한켠에 던지면서 한술 더 떴다.
“어른들의 일이잖아? 우리는 아직 애들이구. 어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하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나의 아버지란 말이다. 지금 우리 엄마와 가라진다고 하잖니? 리혼한다고 하잖니?”
“어른들은 왜 그러는지 참…”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돌아온 뒤 쭉 그랬어. 밖으로만 나돌았단 말이다. 아마도 한국에서부터 그 녀자랑 만났던 것 같아.”
“너의 어머니는 어쩌니?”
“울기만 하지, 악에 받쳐 바락바락 소리만 지르지. 아버지는 어머니와 리혼할 거래. 오늘 아침에 대판 싸우고 나갔어.”
빈이는 말을 마치고 두 손을 옆구리에 찌르면서 머리를 쳐들었다. 하늘 저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오려는가 봐.”
빈이가 중얼거렸다.
은지도 빈이의 눈길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비오는 계절이잖아. 그런데 너 어쩔 건데?”
은지가 근심스러운듯 넌지시 물으면서 빈이의 팔을 잡았다. 빈이가 은지에게 잡힌 팔을 빼서 휘두르며 소리쳤다.
“복수 할 거야.”
“어떻게?”
은지가 빈이 쪽으로 한발 다가섰다.
“몰라.”
빈이는 한마디 던지고 다시 풀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에서 후둑후둑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지가 웃옷을 벗어 빈이와 자기의 머리를 가리며 말했다.
“정말 떨어지네, 비방울이…”
은지가 빈이의 곁으로 좀더 다가앉으며 엉뚱하게 물었다.
“아버지가 널 사랑하니?”
“사랑? 아버지가?”
빈이가 의아한 눈길로 은지를 건너다보면서 되물었다.
“그러잖아, 사람들이. 바람나면 새끼도 모른다구.”
은지는 말하면서 살그머니 바지가달을 걷어올렸다. 오른다리 종아리에 반뽐 쯤 되는 상처자국이 나있었다. 빈이가 웬 일이냐는듯 은지의 얼굴을 찍어보았다.
“우리 아버지도 사실 내가 여섯살 때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단다. 나는 지금도 그 날 아침만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
“…”
빈이는 말 없이 은지의 기색만 살폈다. 은지가 잠간 입술을 감빨더니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봐서라도 가정만은 깨지 말자고 그렇게 매달렸는 데도 아버지는 기어코 나와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갔지. 그것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웠던 어느 오전이였어. ”
은지는 또 그 소름이 끼치는 오전을 생각하는지 지긋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회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가방을 들고 객실에 나왔어. 그 뒤로 어머니가 따라서구. 어머니는 제발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해달라고 울면서 비는 것이였어. 하지만 아버지는 옷섶을 잡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쳤어. 늦었다고 말이야, 모든 것이 만구할 수 없다는 거야. 어머니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먹이는 것이였어.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집을 나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소리쳤어. 아버지를 가지 말라고 말이야, 앞으로는 아버지 말도 잘 듣고 어머니 말도 잘 듣겠다고 하면서 애걸했지. 아버지는 처음에 잠간 머뭇거리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인차 허리를 굽혀 자기의 다리를 안은 나를 뜯어 옆에 던져놓는 거야. 나는 엉금엉금 기여가 다시 아버지의 다리를 부여잡았더랬지. 그러자 아버지가 인내심을 잃었던지 그대로 다리를 날려 나를 한쪽에 팽개치는 거야. 나는 허망 뿌리워나가 유리로 된 차탁 우에 떨어졌어. 일이 커질라고 그랬던지 차탁이 그만 깨지면서 유리 쪼각이 나의 종아리를 찔렀어. 나는 새된 소리를 질렀지. 어머니가 달려와서 나를 품에 안았어. 나의 종아리에서는 피가 샘솟듯 솟아올랐어. 어머니는 너무도 당황스러워 나를 안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였어. 애가 다 죽어간다고 미친듯이 소리치는 것이였어. 하지만 아버지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나가버렸어.”
말하는 은지의 눈에서 독기가 서려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죽든 살든 관계하지 않았어. 그렇게 집을 나간 아버지는 한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구. 설상가상으로 유리에 긁힌 나의 상처가 곪으면서 진물이 흘렀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다니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 그 때면 나도 어머니를 따라 펑펑 눈물을 쏟아더랬지. 시간이 흐르면서 종아리에 난 상처가 차츰 아물었고 그 날 오전의 그 악몽도 차츰 색이 바래졌어.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옅어지지 않았어. 그 어린 가슴에서도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꿈틀꿈틀 했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니?”
빈이가 다잡아 물었다.
은지가 잠간 생각을 굴리는듯 싶더니 입을 열었다.
“얼굴도 기억 나지 않는 사람을 붙잡고 지금도 미워해서는 뭘 하니? 지금은 아버지라는 그 이름이 그저 담단하게 느껴질 뿐이야. 하지만 아마 지금 그런 일을 당한다면 너처럼 이를 갈고 복수를 꿈꾸었을지도 몰라.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은지는 자기를 버린 아버지가 앞에 있기라도 하듯 이사이로 한마디한마디 내뱉었다.
“복수 할 거야.”
빈이가 다시 그 말을 반복했다.
“세상 일이란 그런 것 같아.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근심하면 근심할수록 점점 더 커지고 현실로 다가오 것 같아.”
은지가 머리를 가렸던 웃옷을 활 내치면서 말했다.
“우리 아예 이 비를 다 맞고 말자. 실컷 맞아보자. 비물이 너의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들을 말끔히 씻어가라지 뭐.”
“결심했다, 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복수 할 거야.”
빈이가 또박또박 말에 그루를 박았다.
“그래, 복수해라. 그럼 나는 너를 도와 무엇을 할 수 있을가?”
은지가 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몰라.”
은지는 더 이상 빈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결심한듯 말했다.
“속시원히 망신주자, 그 녀자를. 감히 머리를 쳐들구 다니지 못하게 사람 많은 곳에서 톡톡히 망신을 주잔 말이다.”
“어떻게?”
빈이가 머리를 돌리면서 다급히 물었다.
“몰라.”
은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빈이가 피식 웃으면서 입을 다셨다.
“나는 또…”
“하지만 확실해, 망신을 주는 거야. 그 녀자가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확실하게 경고하는 거야.”
은지의 목소리에는 빈이에 대한 동정과 련민과 관심 같은 것이 다분히 담겨져있는 것 같았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가?
빈이는 복잡한 눈길로 은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불렀다.
“은지야.”
빈이가 으스러지게 은지를 품에 안아주었다. 은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빈이는 은지를 안은 채 한참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였다. 은지는 놀란 토끼처럼 빈이의 품에 안겨있었지만 목소리에만은 예리한 가시를 품고 있었다.
“그 녀자를 찾아가 시비를 거는 거야. 사람들이 가득 구경하러 모여들었을 때 그 녀자가 남의 가정을 파괴했다고 소리치는 거야. 아무리 개방된 세상이라 하지만 여전히 바람 나서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녀자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아.”
“그래?”
빈이는 품에 안겨 앙칼지게 쏘아대는 은지를 내려다보았다.
“난 말이야, 누가 나를 업신 보면 사정을 두지 않아, 애비 없는 년이라구 애들이 놀리면 목숨을 걸구라두 덤벼, 그래서 태권도도 배웠구…”
지난번에 은지가 하던 말이 다시 귀전에서 쟁쟁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빈이의 입가에서 가는 웃음이 스쳐지났다.
빈이는 방불히 그 어떤 장면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좋아, 그게 참 좋을 것 같아. 매장해버려야지. 완전히 이 세상에서 그년을 매장해 버려야지.”
빈이가 으드득 이를 가면서 품에 안았던 은지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섰다. 빈이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확실하게 그 어떤 결심을 다지는 것 같았다. 푸들푸들 떨리는 두볼을 타고 비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하하…”
은지가 빈이의 몰골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 약간 흔들리는 은지의 얼굴에서도 비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빈이가 손가락으로 은지의 얼굴에서 흐르는 비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완전히 물병아리가 되였구나.”
“비오는 계절이잖아.”
은지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괜찮아, 인차 비가 그칠 거야.”
“그치겠지. 그쳐야지…”
빈이는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비 속을 걷는 빈이의 모습이 은지의 눈에 클로즈업되는 것 같았다.
은지도 빈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개울가에 피여난 찔레꽃들이 비 속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4
 
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제법 진지한 빛이 어려있었다. 그는 잠간 친구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너희들의 도움으로 나는 이번 복수계획을 원만하게 완수할 수 있었다. 자, 들자.”
빈이는 말을 마치고 잔을 높이 쳐들었다.
“축하한다!”
“마시자!”
“통쾌하게!”
빈이를 빼고 나머지 세 친구의 잔에는 맥주가 들어있었다.
민머리를 한 남자애가 먼저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단숨에 굽을 냈다.
“와— 민호, 대단하다.”
그러자 민호가 머리에 노랑물감을 들인 남자애를 향해 소리쳤다.
“정민아, 넌 뭐 빠질 수 있을 것 같니? 소리만 치지 말구 쭉 굽을 내라.”
정민이가 감히 술잔을 들 생각을 못하고 고수머리를 한 남자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호가 먼저 내면 나두 내지.”
“자식, 튕기기는. 자, 봐라.”
수호가 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러자 정민이도 따라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빈이야, 이렇게 기쁜 날에 너도 맥주를 마셔야 하는데.”
민호가 빈이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빈이가 민호의 눈길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마시고는 싶지만 아직 학생이니 별 수 없지. 그만 사정을 봐줘라. 대신 나도 이 음료를 굽 낼게.”
빈이는 말을 마치고 잔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래서, 그년이 제 에미를 부르고는 기절했다구”
정민이가 빈이에게 물었다.
“아니, 빈이는 걔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냥 돌아섰다고 하지 않았니?”
수호가 한술 떴다.
빈아가 입가에 실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그 애가 ‘어머니!’ 하고 피터지게 소리치더니 어디론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것이였어. 그 뒤로 걔 엄마가 쫓아가면서 걔 이름을 부르구. ‘은지야, 은지야—’ 하구 말이다…”
“하하하하…”
“에잇, 통쾌해.”
민호가 짝짝 손벽을 쳐댔다.
빈이가 그러는 민호를 멀거니 바라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사실 내가 정말 통쾌한지는 잘 모르겠다. 너희들에게 무지 고맙기는 하지만.”
빈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민호의 눈길이 확 도는 것만 같았다.
“너 그게 무슨 말이니? 너 진짜 통쾌해 해야 정상이 아니니? 그년들을 완전히 철저히 무너뜨려야 정상이 아닌가구?”
민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었다. 빈이의 심성이 여리다고 탓하는 것 같았다.
“그래, 맞아. 빈이야, 넌 진짜로 통쾌하게 생각해야 해. 그 애 엄마가 너네 가정을 파탄시키려고 작정하고 달려든다면서.”
정민이가 빈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빈이야, 그 복수를 위해서 우리 함께 머리를 짠 게 아니니?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
수호의 말에 정민이가 또 한술 떴다.
“그러게, 너는 또 얼마나 열심히 은지 그년을 거기까지 끌어갔구.”
말이 길어지는 것 같자 민호가 손을 저었다.
“그만해라, 이 좋은 자리에서 술이나 실컷 마시자.”
말을 마친 민호가 친구들의 술잔에 맥주를 붓기 시작하였다. 친구들은 웃고 떠들면서 다시 맥주잔을 쳐들었다.
하지만 빈이는 진짜 그 순간을 통쾌하다고 해야 할지,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은지가 피터지게 “어머니!”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가 칼이 되여 자기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무시로 뇌리를 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 날도 빈이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그 녀인이 사는 제3소학교 부근으로 갔었다. 그 녀인에 대한 새로운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가 해서였다. 그 녀인의 활동반경도 사실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였다. 채소 사러 시장으로 가지 않으면 아버지와 함께 공원으로 가서 춤을 추거나 음료를 마시는 것이 고작이였다. 분명 그 녀인이 풍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빈이는 그 녀인을 단번에 때려엎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꼭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이다.
빈이가 학교 담장에 기대서서 별 기대가 없이 주변을 두리벙두리벙 살피고 있을 때 제3소학교 서쪽 골목으로부터 한쌍의 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빈이는 첫눈에 나이들어보이는 그 녀인이 바로 아버지와 사귀는 녀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녀인이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옆에 선 소녀에게 뭐라고 말하는 품이 얼핏 보아도 모녀 지간이 틀림없었다.
순간 빈이는 몰려오는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흥, 딸까지 있는 년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겠다구? 렴치 없는 년, 량심 없는 년, 칼탕 쳐 죽일 년…’
빈이는 당금 달려나가 그 녀인을 족쳐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였다. 하지만 빈이는 인차 자기도 다치지 않고 그 녀인에게도 더 큰 타격을 주려면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어떻게 복수하면 좋을가?’
순간 떠오르는 이들이 바로 고중에 붙지 못한 초중 때의 동학들인 민호와 정민이와 수호였다. 그들은 모두 한 동네에 살고 한 학급에서 공부했던지라 초중에 대닐 때는 아주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공부에서 뛰여난 성적을 자랑하는 빈이와는 달리 그 애들은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결과 빈이는 고중입학시험에서 순리롭게 제1고중에 입학하였지만 그 애들은 결국 고중에도 붙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찍 사회와 접촉해서였던지 엉뚱한 궁리를 하거나 사회교제에서는 빈이를 찜 쪄 먹을 정도였다.
빈이는 할 일이 없이 맨날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그들이라면 엉뚱한 방법으로 그 녀인을 골탕먹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빈이는 인차 민호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뭐야? 우리 대수재님께서 무슨 일로 우리 같은 건달들을 다 보자구 하니?”
“보구 싶어서, 청 들 일도 있구.”
“좋지, 좋구말구.”
민호가 기다리기나 했다는듯이 정민이와 수호를 데리고 인차 빈이를 찾아왔다.
빈이에게서 대충 사연을 듣고난 친구들은 중구난방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그 녀인네 집에 돌멩이를 뿌리자는둥, 골목을 지키다가 랍치를 해서 산 속에 가져다 버리자는둥, 지어는 그 녀인에게 쥐약을 넣은 음식을 먹여 죽여버리자는둥… 그들이 내놓은 복수방법은 실로 여러가지였다. 하지만 빈이는 결코 그 방법들이 어느 한가지도 실행이 가능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빈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그림이 바로 그 녀인이 딸과 나란히 걸어오던 장면이였다.
‘딸이 상처받는 것을 가슴 아파하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에 있을가?’
빈이는 자기의 생각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바로 그거야, 그 녀인의 딸을 리용하는 거야,”
정민이가 무릎을 탁 쳤다.
“어떻게?”
민호가 빈이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다잡아 물었다.
“몰라, 그것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 녀인의 딸에게 무서운 고통을 주어 그 녀인도 곁에서 끙끙 속을 앓다가 우리 아버지와 헤여지게 하는 거야.”
빈이의 말에 수호가 동을 달았다.
“내 생각에는 됨직하다. 빈이야, 너 그 녀인의 딸과 련애해라.”
정민이도 수호의 말에서 계발을 받았던지 한술 떴다.
“맞아, 살살 잘 구슬려서 그 녀인의 딸이 너와 떨어지면 죽겠다고 할 때 너는 짠 하고 너의 아버지를 데리고 그 녀인 앞에 나서란 말이다. 그러면 그 녀인이 기혼해서 쓸어질 게 아니니? 하하하… 에미 딸이 함께 너네 부자간과 련애할 수는 없을 거니까.”
“하하하… 지독한 자식, 소설을 써라.”
민호의 핀잔에 수호가 두덜거렸다.
“왜, 좋기만 하구만. 그래야 그 녀자들의 가슴에 아물 수 없는 큰 상처를 줄 수 있을 게 아니니?”
빈이는 수호의 말이 그럴듯 하게 생각되였다. 자기의 인물이나 체격에 제1고중 학생이라는 간판이면 얼마든지 그 녀인의 딸을 쟁취할 자신이 있을 것 같았고 깊은 련애를 하는 척 하다가 그 애가 자기를 떨어질 수 없어할 때 아버지와 함께 은지 어머니 앞에 나타나면 은지 어머니의 두 눈이 휘딱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되였던 것이다.
그러한 계획을 가지고 지난번에 처음 은지를 만난 후 은지의 다혈적인 기질을 보아낸 빈이는 복수계획을 좀더 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자 은지의 가슴에 그 녀인에 대한 반감을 가득 심어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녀인에 대한 은지의 반감을 빌어 그 애가 직접 어머니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한다면 은지에게도 은지 어머니에게도 더욱 큰 타격으로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빈이는 어느 기회에 어떤 방법으로 은지의 가슴에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심어줄 것인가를 두고 시종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 날 아침에 아버지가 어머니와 갈라지자고 하면서 문을 차고 집을 나서는 순간 더 이상 계획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던 것이다.
비 내리던 그 날 찔레꽃의 꽃말이 ‘고독’아라고 하면서 자기의 고독을 빈이에게 열어보일 때 빈이는 잠간 동병상련 비슷한 알알한 감정이 가슴속을 치고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빈이의 가슴속에 쌓여진 원한과 상처는 한순간의 그 감정을 무찌르기에는 족한 것이였다. 빈이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리고 주먹을 부르쥐였다.

빈이는 일부러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저녁무렵에 은지를 불렀다. 자기는 어떤 환경에서라도 은지 어머니를 첫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저녁무렵이고 근본 그런 장면을 그려본 적이 없는 은지로서는 주의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뒤모습을 첫눈에 알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빈이는 은지를 데리고 은지 어머니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이제 은지 어머니가 그들의 앞을 스쳐지난 다음 은지에게 뒤를 따르다가 부딪치는 척 하면서 시비를 걸라고 할 생각이였다.
일은 생각대로 척척 진척이 되여갔다.
사람들 속에서 시름놓고 걸어오는 은지 어머니의 모습이 저 멀리로 보였다. 빈이는 일부러 은지를 당겨다 길을 등지고 서게 한 다음 열심히 작전계획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빈이의 일장연설을 들을수록 은지는 더 열광하는 것 같았다.
“지켜봐라. 내가 어떻게 그 년을 망신주는가? 오늘 내 손에 잘 못 걸린게지.”
은지가 주먹을 휘둘러보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너만 믿는다.”
빈이가 은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은지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골목 앞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빈이는 은지를 끌고 골목어구에 다가섰다. 은지 어머니의 뒤모습만 보였다. 빈이가 슬쩍 은지를 밀며 말했다.
“저 사람이다. 저 회색웃옷을 입은 녀자…”
은지는 빈이의 손길을 따라 희미하게 보여오는 회색웃옷을 입은 녀자의 뒤모습을 잠간 바라보더니 자신 있다는듯 다시 한번 주먹을 흔들어보이고는 종종걸음을 놓기 시작했다. 은지가 먼저 가서 그 녀자에게 시비를 건 후 빈이가 달려가서 시비를 가려주는 척 하면서 그 녀자를 더욱 난처한 궁지에 밀어넣는다는 게 그들의 작전 방안이였던 것이다.
빈이는 그 녀자의 뒤를 급히 쫓아가는 은지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긴장하게 하회를 기다렸다. 은지가 어깨로 그 녀자의 등을 툭 치는 것이 보였다. 시름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 녀자가 잠간 멈추더니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은지가 흠칫 하는 것이 멀리서도 똑똑하게 보여왔다.
이어 “어머니!” 하는 괴성이 터졌다.
그 소리는 사냥군의 화살을 맞은 어린승냥이의 비명 같았다.
그 소리는 무너져내리는 하늘 밑에서 절망을 부르짖는 어느 소녀의 마지막 통탄 같았다.
빈이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놀랍게도 머리가 하얗게 바래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기쁜지, 통쾌한지, 허전한지,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정상적인 정서대로라면 응당 더없이 통쾌하고 승리의 희열을 느껴야 할 것이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런 기분만이 아니였다.
비오던 그 날 보았던 은지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던 것이다.
“너 찔레꽃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니?”
“찔레꽃의 꽃말은 고독이래.”
빈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은지도 사실은 고독한 애구나 하고 잠간 생각했었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나 애틋한 사랑 같은 것은 없지만 적어도 어머니의 덕분에 자기가 돈이나마 ‘펑펑 쓰면서 살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는 애라고 생각되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로부터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녀인으로 극대화된 그 ‘나쁜 녀자’가 바로 자기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타격이 얼마나 클가 하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빈이였다…
빈이는 생각지 못했던 찜찜한 기분으로 골목길을 나와 자기를 위해 방도를 내주고 각자 악역까지 담당했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복수계획을 완성한 후 빈이가 한 때 거나하게 쏘기로 친구들과 약속을 했던 것이다.
“자자자, 우리의 진정한 우정과 달콤한 래일을 위하여 ’진달래’는 해야지?’
민호가 잔을 높이 들고 제기했다.
“진—달—래—”
친구들의 흥분에 들 뜬 소리를 들으면서 빈이는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뇌를 쳤다. 빈이는 그대로 엎어져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그렇게 한잠 자고 나면 괴로움도 고통도 모두 잊혀질 것 같았다.
“진—달—래—”
친구들이 또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5
 
빈이가 잠에서 깬 것은 아침 5시 30분 정도였다. 사실 잠에서 깼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빈이는 긴긴 밤을 깊은 잠에 들지 못하였던 것이다. 엉뎅이에 꼬리가 아홉개 달린 불여우를 쫓아다니는가 싶다가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그 심연에서 헤여나오려고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뜨니 가슴에 식은땀이 흥건히 내돋아있었다.
빈이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파났다. 밤새 큰병을 앓고난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지난밤에 은지는 어떻게 보냈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는 것이 야속스러웠다. 그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했지만 점점 더 얄궂게 머리속을 파고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젠 나하고 상관 없는 애야, 한평생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애라구. 그런데 왜 자꾸만 …’
빈이는 어제 질러올리던 은지의 그 “어머니!”라는 소리가 그대로 다시 귀전을 치는 것 같았다.
빈이는 정통편이라도 찾아 먹으려고 객실로 나갔다.
어머니가 아침 준비를 하는지 주방에서 똑딱똑딱 칼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왜 벌써 일어났냐?”
할머니가 객실바닥을 닦다 말고 빈이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주름이 쪼글쪼글한 할머니의 얼굴을 반나마 가리고 있었다. 빈이는 피발이 선 할머니의 멀건 눈동자를 잠간 들여다보다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억지로 띄우면서 말했다.
“머리가 아파서요, 정통편을 먹으려구요.”
할머니의 멀건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어메— 빈 속에 먹으려는 거냐? 그럼 속을 버릴 텐데.”
“괜찮아요.”
“그래두 속을 버릴 텐데, 에미야— 빈이가 정통편을 찾는다—”
할머니가 주방에 대고 길게 소리쳤다. 주방으로부터 슬피퍼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언제보아도 부석부석한 얼굴이였다.
“왜? 감기에 걸렸니?”
“몰라요.”
“좀 기다렸다 아침을 먹은 후에 정통편을 먹어라.”
“한알만 먹겠는 데요 뭐.”
“애두 그새를 못 참고.”
어머니는 빈이를 향해 눈을 흘기는 체 하더니 말했다.
“어머니 침실의 경대 서랍에 있다.”
빈이는 그 소리가 떨어지자 주저없이 아버지, 어머니가 쓰는 침실문을 밀었다.
침대가 란잡했다. 어머니가 빠져나간 이불이 바닥에 끌려있었고 베개도 아버지의 발치에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웃통을 들어낸 채 다리 사이에 이불을 끼우고 죽은듯이 누워있었다. 그 때까지 자고 있는게 분명했다.
빈이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볌발볌 다가가 경대 서랍을 열고 정통편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인차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아버지도 진작 깨나 눈만 감고 있은 모양이였다.
“뭐라구? 딸애에게 큰 일이 생겼다구?”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두 눈이 거슴푸레 했지만 목소리는 급하게 들렸다. 전화 저쪽에서 뭐라고 급히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알았소. 급해하지 말고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요. 시병원 급진처라구 했지. 1층이지? 기다리오, 내가 인차 갈 테니.”
아버지가 핸드폰을 이불 우에 던지고 용수철 튕기듯 일어나 문을 차고 세면실로 달려갔다. 빈이는 허둥대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이불 우에 던져진 아버지의 핸드폰을 주어들었다. 방금 통화를 한 전화번호 앞에 ‘곰돌이’라는 세글자가 박혀있었다.
‘곰돌이? 분명 애들과 하는 통화는 아닌 것 같았는데?’
순간 빈이의 머리에는 통통한 모습의 그 녀인이 떠올랐다. 그 녀인이라면 아버지가 ‘곰돌이’라고도 애칭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빈이는 가슴에서 무엇인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그 녀인에 대한 원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가 근심하던 일이 터진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여들었던 것이다.
‘그래, 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빈이는 정통편을 찾다 말고 자기의 침실로 달려들어갔다.
“정통편은 찾았냐?”
할머니가 물었다.
“네, 좀 있다 먹을 게요.”
빈이는 급히 옷을 주어입기 시작하였다.
잠간 지나 객실에서 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에 어디로 가려구 그러냐?”
“네, 친구 딸내미 병원에 입원했대요. 지금 혼자라서 도와달래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저런, 저런, 어쩌면 좋다냐? 몹시 상했다냐?”
“그런 것 같아요. 다녀올게요.”
그 때 어머니가 주방에서 객실로 나오는 것 같았다.
“친구라니요? 누군데요? 어떻게 아프대요?”
“누구라면 아오? 한국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요. 삐치지 말구 저리 비키오.”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쏘아부치는 소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참…”
어머니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지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빈이는 그 새 옷을 다 입고 조용히 침실문을 밀어열었다. 아버지가 출입문을 밀고 나가고 있었다. 빈이는 잠간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다가 누구에게라 없이 소리쳤다.
“저, 동네를 한바퀴 돌고 들어올게요.”
어머니가 주방에서 소리쳤다.
“일찍 들어오너라. 따가운 밥을 제때에 먹게.”
“네.”
빈이는 외마디 대답을 하면서 문을 나섰다.
하늘에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있었다. 빈이는 숨 쉬기조차 힘든 것 같았다.
“당금 폭우라도 쏟아질 것 같네.”
빈이는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들어 길어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한창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
빈이도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빨리요. 저 앞에 가는 택시 뒤를 따라주세요.”
운전수는 웬 일이냐는듯 빈이를 힐끔 겻눈질 해보고는 소리 없이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라 길에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택시는 순리롭게 시 병원 문 앞에 달려가 멈춰섰다.
아버지가 먼저 택시에서 내려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빈이도 택시에서 내려 아버지의 뒤를 따라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빈이는 대청의 정문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버지가 대청에서 웬 녀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녀인이였다. 그 녀인이 진작 대청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은 것 같았다. 빈이는 잠간 주저하다가 서쪽에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고 몸을 돌렸다.
문 옆으로 주사실 두개가 나란히 있었다. 빈이는 성인주사실이라고 쓴 문 앞에 다가서서 안을 살폈다. 침대 여덟개가 두쪽으로 갈라져 놓여있었다. 맞은 켠 침대에 두 눈을 꼭 감고 누워있는 은지가 보였다.
얼굴이 해쓱해진 것 같았다. 왼쪽 팔목에 붕대가 칭칭 감겨져있었다.
‘설마…’
빈이는 온몸으로 속름이 쫙 끼치는 것 같았다. 악몽 같은 환영들이 빈이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을 진정하자 차츰 어지럽게 흩어졌던 그림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대략 사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빈이는 지난밤에 은지가 무엇으로 팔목을 그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가슴이 갑갑해왔다. 눈앞이 아찔해났다. 고통에 모대기다가 끝내는 헤여나오지 못하고 면도칼을 찾아 자기의 손목을 긋는 은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모두 내 탓이다.’
크나큰 죄의식이 홍수처럼 빈이의 머리를 치고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시각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빈이는 감히 주사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자기가 은지를 사경에 밀어넣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대로 그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 매정하게 그 자리를 뜨게 되면 영원히 그 죄책감에서 헤여나오자 못할 것 같았다. 벗어내칠 수 없는 굴레를 쓰고 힘겹게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머리를 쳐들었다. 빈이는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았다가 풀면서 끝내 주사실 문을 살며시 밀어열었다.
빈이는 발볌발볌 은지가 누운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은지는 미동도 없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돋아있었다. 빈이는 망설이지 않고 침대궤 우에 놓인 휴지통에서 종이를 뽑아 은지의 이마에 돋아난 땀을 닦아주었다.
은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후—”
빈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은지를 보았으니 한시 급히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 가슴 막히는 분위기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빈이의 발자국은 대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여서 그런지 대청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 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와 그 녀인이 대청남쪽에 놓인 걸상에 앉아있을 뿐이였다. 녀인은 몹시 지쳤던지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두 눈을 살풋이 감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금실이 좋은 부부간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빈이는 곧추 아버지와 그 녀인을 향해 걸어갔다. 발걸음소리에 머리를 쳐든 아버지가 흠칫 놀라면서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녀인이 아버지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아버지와 빈이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대청에는 잠간 숨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너…너… 여기는 웬 일이냐?”
빈이는 아버지를 쏘아보면서 한마디한마디 뱉어냈다.
“미안하지 않습니까? 아버지, 나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어머니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저기…저 침대에 누워있는 은지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너… 네가…”
아버지는 너무도 놀라 후들후들 떨기만 할 뿐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행복합니까? 어머니를 속이고 나를 속이고 할머니를 속이고 여기서 행복합니까? 저분의 딸이 저기에 누워있는 것을 보면서 행복합니까?”
빈이는 말하면서 눈길을 그 녀인에게로 돌렸다. 녀인의 두 눈이 화등잔이 되고 있있다.
“아들인가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부인은 세상 뜬지 10년이라면서요?”
“네?!”
빈이가 억이 막혀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그래서 고독하다면서요, 고독해서 말동무나 찾는다면서요? 이게 무슨 일인가요?”
녀인의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지…진정하오. 내가 설명할게. 사실은… 사실은…”
녀인이 물 먹은 담벽처럼 무너져내렸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힘들 때 기대자고 만났더랬어요. 여섯살부터 아버지를 불러보지 못한 은지에게 ‘아버지’라고 부를만한 사람이라도 찾아주려고 만났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예요. 명년에 아들애가 대학에 가면 두 가정을 합치자면서요, 훌륭한 남편으로 훌륭한 아빠로 되여주겠다면서요? 그리고 방금까지도…”
“어머니!”
어느새 왔는지 은지가 뒤에서 녀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녀인이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두 눈으로 콩알 같은 눈물이 둘둘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미안해요,”
“은지야…”
녀인이 으스러지게 은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당금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할가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영원히 품에서 놓지 않으련다고 맹세하는 것 같았다. 은지가 녀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가 천천히 쳐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의 그 마음이면 저는 만족이예요. 저는 행복해요. 그 줄도 모르고 저는 지난밤에는 정말 죽고 싶었어요. 불결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다는 생각에 당장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새날이 밝는 것을 보기 두려웠어요. 세상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 같아 소름이 끼쳤어요.”
녀인이 갑자기 머리를 돌리더니 아버지를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 벌을 받을 거예요. 천벌을 받을 거예요.”
녀인이 벌떡 일어나 아버지 쪽으로 다가섰다. 아버지가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면서 더듬거렸다.
“나는 진진…진정으로 그 쪽을 사랑하오. 사랑해서 그렇게 말한 거요. 그 쪽을 잃을 것 같아서 그런 거요.”
“그만하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본댁을 두고 어찌 죽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나요? 집에서 새끼 키우고 당신의 어머니를 봉양하는 본댁의 감수는 생각이나 해보았나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그랬다구요? 그 말을 저더러 믿으라구요?”
녀인의 입에서 뜨거운 침이 탁탁 튕겨나오고 있었다. 그 서슬에 아버지는 주눅이 들었는지 감히 머리도 제대로 쳐들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나는 그 쪽하구 만날 때…때마다 진정이였소. 쟤 엄마는 나의 마음을 도무지 익을 줄을 모르는 녀자요. 황소처럼 우직해서 따…땅을 뚜질 줄 밖에 모르는 시골녀편네란 말이요. 갑갑했단 말이요. 나를 리해하는 녀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단 말이요…”
“꺼져요, 썩 꺼져요.”
녀인이 악에 받쳐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더 이상 변명을 못하고 잠간 멍하니 서있다가 힘 없이 몸을 돌렸다.
밖에서 “우르릉 꽝—꽝—” 하고 우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살 같은 비줄기가 유리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은지는 빈이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빈이도 말 없이 창문가에 다가섰다.
은지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은 비 오는 계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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