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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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아픔과 치유
2019년 07월 19일 09시 49분  조회:150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아픔과 치유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의 경우

우상렬

 

사람이 살아가는 데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人生十有八九不如意-인생 십중 팔구는 뜻 대로 안된다지 않던가. 그러니 아픔이 없을 수가 없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쫓는 존재라 할 때 아픔은 자연히 치유의 대상이 된다. 이로부터 아픔과 치유는 현단계 보편적인 담론으로 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문학도 례외가 아니다. 문학치료학이 이것을 말해준다.

본고에서 살펴보게 될 단편소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아픔과 치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 우리 같이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 속으로 골인해보자.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에는 우연으로 인한 아픔의 이야기들이 많다. 우연성과 필연성의 문제, 하나의 철학적인 문제인 줄로 안다. 우리의 삶은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학이 인간학이라 할 때 같은 론리가 적용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문학은 이 때까지 너무 필연성을 많이 강조해온 듯하다. 이른바 생활의 본질, 시대정신 등 필연성의 범주에 속하는 전형성을 강조한 반영론이 바로 그렇다. 우연성이라는 것도 바로 필연성의 반영임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실 우리의 세상과 삶에는 우연성이 란무하다. 생로병사는 우리 인생의 하나의 비극적인 필연이 되겠다. 그래 불교에서 이것을 강조하지 않던가. 그런데 바로 이 생로병사의 필연 속에 수많은 우연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인생본연의 가장 중요한 실존문제로 안겨오는 생사, 즉 우리가 언제 태여나고 언제 죽는가 하는 문제조차도 지극히 우연성의 베일에 가려있다. 여기에 로병, 즉 늙고 병드는 문제도 마찬가지. 언제부터 어떻게 늙고 병드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연에 속한다. 필연을 벗어나거나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연도 지천에 깔려있다. 오늘 펀펀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는 비극, 그래 무엇으로 풀이해야지? 우연으로 밖에. 그럼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경우의 사례를 좀 들어보자. 미안하지만 나는 공부를 잘 안하는 만큼 잘 못한다. 그런데 나는 시험을 잘 친다. 그것은 시험문제가 내가 복습을 잘한 데서만 잘 나오니 그럴 수 밖에. 전적으로 우연의 행운! 사랑도 마찬가지. 나는 현재 내 안깐(아내)과 저렇게 만나 요렇게 요 모양으로 살지 정말 생각지 못했다. 나는 전적으로 우연의 인연이라는 하느님 덕택으로 생각한다. 몇백만, 몇천만의 1이라는 로또도 마찬가지∼

이른바 현대라는 세상과 삶은 대단히 복잡하고 변화다단하고 일사천리로 내달린다. 실로 헛갈리고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 우연성이 그 어느 때보다 란무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연성의 문제, 우리 세상과 삶에 좋든 궂든 많은 영향을 준다. 물론 좋은 영향은 좋아서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궂은 나쁜 영향은 문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이 나쁜 영향이야말로 오히려 문학의 감로수가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문학은 가벼운 송가보다는 어두운 인생을 직시하고 그것을 적라라하게 보여주는 비극성이 더 충격적이고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조원의 단편소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일단 우리 세상과 삶에 있어서 이 우연성의 비극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 세상과 삶에는 인생이 뜻대로 안되는 만큼이나 아이러니나 역설적 비극이 많다. 잘살려고 노력한 것이 오히려 더 못살게 되는 아이러니나 역설의 비극, 아름다운 기원을 담은 것이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아이러니나 역설의 비극,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형국의 아이러니와 역설의 비극은 그 보기가 되겠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런 아이러니나 역설적 비극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에서는 주로 부모자식 두 세대의 비극적 운명을 다루고 있다. 먼저 부모세대인 강필두와 조순재 부부를 보자.  

강필두는 “‘파란 돼지의 해’인 을해乙亥년 1935년생의 돼지띠로 태여났다. 하지만 복돼지로는 될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은 신산하였다. 그의 ‘잘살아보려던 욕망은 파멸되였다’지 않는가. 그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말년의 알콜성치매로 오는 기억상실일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실패한 인생. 구체적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두번 크게 꺾인다. 그는 원래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N진의 조선족소학교에 배치받았다. 그만하면 잘 나가는 괜찮은 청년이였다. 여기에 ‘열혈문화청년의 개성을 불태웠다’지 않는가. 그런데 반우파투쟁시기 “그것이 화근이 되여 학생들에게 ‘불건전한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자’라는 감투를 쓰고 학교에서 쫓겨나서 N진 술공장으로 전근 발령이 되였다. 술공장의 단순로동자로 좌천되였다.” 우파로 몰렸던 것이다. 그래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암울한 현실에서 강필두가 가까이할 수 있었던 것은 술이였다.’ 젊음의 정상적인 아름다운 패기가 아이러니하게도 타도의 대상이 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문화대혁명시기 억울하게 반혁명으로 몰려 고깔모자를 쓰고 비판을 당하는 등 갖은 수모를 당한다. 그의 이런 인생비극은 ‘그 때’ ‘미친 세상’ 같은 시대상으로 놓고 보면 필연적이라 해야 하겠다. 그런데 사실 그 때는 ‘미친 척함서 세상 살믄 된’다. 이렇게 보면 강필두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골방샌님 ‘돌대가리 필두량반’은 고지식하지 않던가. 그리고 여기에 그의 ‘귀는 팔랑개비고 의욕은 하늘에 삿대질할’ 정도다. 따라서 그의 이런 개인적 성격과 포부, 어쩌면 개인적인 성격약점이라 할 수 있는 우연적 요소들이 결국 비극의 화근이 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 ‘강필두의 교원시절의 과오를 파헤쳐서 반혁명으로 몰아간’ 왕얼, ‘쌀독에 붙여놨던 황색그림’이 우연한 객관적인 도화선이 되였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비극은 필연성을 나타내는 우연성의 작간에 결정타를 입은 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걸으며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속에 빠지고 어둠 속 새잡이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버’려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는 개혁개방의 좋은 세월을 만나 ‘부자 된다꼬 오리부업’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골방샌님의 자기 주제를 모르는 망동에 불과했다. ‘돈, 돈, 돈. 세상이 좋아졌기로 골방샌님에게 돈따발 쏟아질 리야.’ 실제로 그의 오리부업은 ‘수백마리의 오리들의 뻐드러진 랑자한 죽음의 현장무더기’의 처참한 결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강필두와 강희경은 강림촌에서 야반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싶이 이 비극도 결국 따져보면 강필두의 개인적인 재간의 한계에 기인하는 것으로 밖에 풀이할 수 없다. 한마디로 강필두의 비극은 보다 많이 성격비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사회비극보다는 이런 성격비극[1]에 더 모를 박고 있다.

조순재는 강필두가 ‘로동자’라는 리유 하나로 ‘가족을 배신하’고 시집을 가버린다. 그런데 ‘비루하고 고단하고 치졸한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이사짐에 눌리우고 처진 자신들의 불확실한 그림자를 밟으며 강림촌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들의 그림자에는 무서워하는 표정이 있었다.’ 그들에게 ‘일가친척들은 비난의 쓴웃음을 보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 덕에 촌놈신세를 벗어나려다가 오히려 더 촌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녀는 남편의 우파, 반혁명 신세에 련루되여 더 고생을 한다. 그녀는 만삭이 되여서도 일밭에 나가야 했다. 그녀는 결국 아들의 억울한 감옥살이 및 오리부업 실패로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비극적 운명도 결국은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연적인 계기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여왔다. 

자식세대인 강희수와 강희경 남매를 보자.

강희수는 만삭이 된 어머니가 들에 새참을 갖다주고 오다가 자기도 모르게 낳은 아이다. 어쩌면 그는 우연히 이 세상에 왔다. 그는 어느 하루 아침에 공부가 싫어져 학교를 그만둔다. 우연적인 학교 중퇴다. 그리고 ‘강희경의 질투와 나분의 질투 사이’에서 우연히 빚어진 ‘강간’사건에 말려든다. 결국 나분이가 ‘물증인 나비머리핀을 제공하’고 ‘범죄 물증이 발견된 범죄현장을 제공하’기도 한다. 공안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피해자 쑈훙은 인정을 했고 물증과 사건현장도 확보된 완벽한 범죄’였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적인 질투로 인한 가짜 강간사건이였던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고 간’ 것이다. 그래서 강희수는 실로 ‘청산별곡’의 ‘믜리도 괴리도 업시- 미운이도 고운이도 없이 / 마자셔 우니노라- 맞아서 우는구나’[2]의 형국이 되고 만다. 자기도 모르는 우연의 덫에 치여 억울하게도 인생의 파란곡절을 겪게 된 것이다.

강희경은 어릴 때 ‘나분의 미모와 나분의 총명과 나분의 부유와 나분의 재능과 겨룰 자기의 빈약을 느껴’며 많은 콤플렉스 속에 초라하게 살았다. 그래 ‘방아간집 외손자’를 두고 나분에게 은근히 심한 질투심을 느낀다. 결국 나분에게 전해주라는 ‘방아간집 외손자’의 나비머리핀을 전해주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화근이 되여 오빠인 강희수가 우연히 강간사건에 억울하게 말려들어 인생을 망친다. 그녀는 이 모든 사연을 잘 안다. 그래서 ‘그토록 아름답고 눈부신 조그마한 큐빅이 박힌 나비머리핀이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고 간다는 것에 강희경은 몸서리를 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운 것과 범죄의 아이러니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이날 이 때까지 스스로의 가슴 속에 삼켜서 품고 있었다.’ 심한 죄의식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에서도 불행하다. 그녀는 남편과 리혼을 한다. 그런데 “전남편이였던 대춘이 교통사고로 사망된 뒤에야 강희경은 대춘이 생명보험을 해두었으며 그 수혜자는 ‘강희경’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몰라보고 놓쳤던 것이다. 사랑의 비극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예지가 부족한 성격비극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녀는 ‘눈물을, 울분을, 슬픔을 삼키는 데 버릇되여’있는 비극적 인물이다.

강희경은 많은 죄의식을 안고 산다. 그녀는 ‘그 나비머리핀을 나분에게 곧바로 전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 나분과 그 소년은 결혼을 했을 수도. / 강희수는 감옥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며 원양어선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며 미국으로도 가지 않았을 수도. / 조순재도 자살을 하지 않았을 수도. / 강필두도 타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와 상관없는 모든 우연적인 비극을 자기의 원인으로 돌린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속죄를 하고 있다. ‘미안이라는 말 한마디로 속죄할 수 있을 정도의 미안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준비도 안된 상대에게 하는 사과는 사과도 아니다, 사과를 받아준대서 자신이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속죄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이다, 강희경은 이렇게 믿어왔고 자신을 괴롭혀왔다.’

보다 싶이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의 주인공들은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우연성이나 아이러니로부터 야기된 요인들 때문에 모두 나름 대로의 아픔을 안고 살거나 살았던 것이다. 이 소설은 일단 이 문제에 대해 풀이를 하고 심사숙고하고 있다. ‘강희경은 삶에 따르는 우연과 삶의 가능성을 재고 있었다. 우연이라는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들이 삶을 무자비하게 흔들어버렸으며 가능성이라는 일말의 기대조차도 매장해버렸다. 어쩌면 우연은 필연의 또 다른 형태의 존재였는지도 몰랐다.’ 바로 강희경이 느끼는 이 ‘우연’의 철학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강희경은 아픔의 치유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작가의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단 ‘∼ 인간들아, 제발 개처럼 물고 뜯지 말거라.’, ‘∼ 무식하고 외롭고 볼품 없고 제멋대로이고 리기적인 인간들’이 되지 말라는 아름다운 주문인 것이다. 좀 공허할지라도 그것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과 인도주의에 가닿은 말이다. 세계명작들인 똘스또이의 《부활》이나 빅또르 유고의 《비참한 세계》의 주지도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 말을 너무 삼키면 속이 썩는다. 속으로 뭉쳐삼킨 말들이 몸을 썩게 하는’ 만큼 시원하게 뱉어버리고 털어버려야 한다. 인간은 표현의 동물이 아닌가. 말하는 것,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여기에 표현을 통해 소통하게 되고 리해만세에 이른다면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치유가 된다. 개혁개방 후 우리는 반우파투쟁으로부터 문화대혁명시기까지 서로간에 맺힌 그 피 묻은 앙금들조차도 ‘리해만세!’로 풀지 않았던가. 그래서 강희경은 ‘미안해요. 오빠.’ 하고 강희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지 않던가. 그것은 ‘용서. 용서라고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부터 용서는 용서로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희경은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오빠도 내려놓을 때 안됐어요?’를 권유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막무가내로 ‘잊고 살어. 다 잊고 살자.’는 강희수의 소극적이고 퇴행적인 치유방법에 대한 시정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잊자고 하면 더 잊혀지지 않는 법이거늘.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에서는 한술 더 떠 ‘하지만 용서는 개인의 것만은 아니기도 할 것 같아. 세월이 인간에게 해야 될 용서도 있지. 세월이 인간에게 구할 수 없는 용서의 그 아픔을 우리는 속수무책이 되여 어찌됐든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겠나? 쉽지 않은 세상은 버티라고 생겨난 것일지도 몰라.’로 한층 승화된 주제적 의미를 창출한다. 즉 미시적인 개인의 용서문제 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세월이나 시대, 사회적인 용서문제도 제기한다. 그런데 이런 용서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이 세월이나 시대, 사회의 원론 혹은 원천적인 비극일 경우에 말이다. 작가의 결론은 ‘쉽지 않은 세상은 버티기’란다. 그것은 ‘속수무책이 되여 어찌됐든 견뎌야 하’는 ‘그 아픔’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라 하지 않던가. 세월이 흐르고 나면 스스로 치유가 되는 법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안겨올 수도 있다. 뿌쉬낀의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의 론리처럼 말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세월이라도 참고 견디면 아름다운 생활은 꼭 온다지 않던가. ‘그래 우리도 언젠가 옛말하면서 살겠지∼’ 하는 론리. 그래서 지난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했던가. 참고 견디는 락관성이 가장 좋은 치유의 하나가 된다는 말이 되겠다. 한마디로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철리적인 문학치료학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럼 이 소설의 제목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의 의미도 자연히 해명될 줄로 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느끼자는 것, 즉 우연과 필연의 세상, 어쩌면 보다 많이 우연으로 나타나는 세상, 그것이 피해갈 수 없는 필연의 아픔일지라도 그대로 느끼면서 표현하고 소통하며 리해만세로 치유해가는 삶의 자세를 취하고저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 관통된 나비이미지의 상징적 의미도 자연히 해명될 줄로 안다. 나비, 나풀나풀, 나란히 나풀나풀, 그것은 천사 같은 자유로움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나비머리핀이고 목제나비가 등장한다. 따라서 ‘관두껑을 덮기 전, 강희경은 나비머리핀을 강필두의 손에 쥐여주었다.’ ‘1985년 강림촌에서 강필두와 함께 야반도주하던 강희경의 손에 꼭 쥐여졌던 나비머리핀이였다.’도 리해가 간다. 그런데 ‘공안일군이 꺼내든 쑈훙의 나비머리핀, 강희수의 고기발 초막에서 수색된 나비머리핀을 보면서 강희경은 무서웠다.’ 악마 같은 범죄의 상징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아이러니에 다름 아니다. 보다 싶이 나비이미지는 소설에서 우리 세상과 삶에 있어서의 천사와 악마 같은 극단적인 아이러니를 나타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부모세대인 강필두와 조순재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남으로써 원혼으로 남아 치유문제를 운운할 여지도 없는 듯하다. 비극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치료학은 이런 원혼도 달래주어야 하거늘! 그러나 자식세대들인 강희수와 강희경 남매는 아픔에 대한 표현, 소통, 리해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이상 보다 싶이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현 단계 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선족문단에는 아직 부족한 아픔과 치유의 문학치료학 문제를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면서 그것은 장면전환이나 슈제트전환에 있어서 굳이 이야기 전개의 내재적 론리를 나타내는 ‘1, 2, 3∼’으로 하기보다는 ‘와/과’, ‘그리고’ 식의 ‘&’로 수많은 아픔과 치유를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실로 문학치료학적인 서사구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이러저러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한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한번 읽어보는 것만으로 치유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만큼 의의와 가치가 있는 줄로 안다. 그런데 앞부분 아픔의 문제와 뒤부분 치유의 문제의 형평성, 어쩌면 치유가 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너무 소략하고 의론적으로 된 점 그리고 전반적으로 볼 때 아픔과 치유라는 초점에 잘 맞춰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외에 소설이 좀 지리멸렬할 정도로 슴슴하다. 좀 발랄하고 재미나게 썼더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조원선생이 이미 발표한 ‘나비야 나비야 모르포나비야’, ‘블랙 블랙 블랙아웃’과 같은 나비계렬 소설의 하나가 되겠다. 그는 아픔과 치유의 문학적 명수다. 그의 성공적인 문학치료학이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1] 유럽에서는 비극을 고대 그리스시기 운명비극, 문예부흥시기 성격비극, 현대의 사회비극으로 나눈다. 이른바 성격비극이란 쉐익스피어의 《햄리트》에서 보듯이 주로 인물의 성격적 문제에서 비극의 원인을 찾고 있다. 이에 반해 사회비극은 비극의 원인을 주로 사회적 원인에서 찾는다.

[2] 배달민족 고대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구절.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에 우연히 말려들어 상처 입은 상황을 메타포를 동원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장백산>2017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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