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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 봉선화 등 우리 민족의 애창곡을 작곡한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
2016년 08월 05일 14시 42분  조회:848  추천:0  작성자: 중국민족

 글/김원범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 홍란파(洪蘭坡, 본명은 홍영후1898.4-1941.8)라면 일부 음악연구자와 작곡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만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홍란파의 가요들중 “봉선화”가 대표작이라면 동요 대표작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고향의 봄”이다.
    필자도 그전에는 홍란파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몰랐다. 다만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지은 작곡가라는 생각에만 그쳤을 뿐이였다. 련련이 뻗은 삼천리 금수강산에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여나는 지난 4월초, 필자는 한국에 갔다가  홍란파의 생가를 찾아뵙는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그의 생가를 돌아본후 일부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들을 만나 홍란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문헌자료들도 찾아보았다. 조선의 유명한 음악평론가인 최창호 선생이 1995년 평양출판사에서 출판한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란 서적과 한국의 “두산백과”, “한국예술지”, “한겨레음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홍란파에 대한 이 글을 정리하게 되였다.
    홍란파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홍란파는 5살에 상경하여 14살이 되던 해인 1912년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류달리 음악에 흥취를 갖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의 초기음악학교였던  “정악전습소”에서 공부하였는데 창립당시에는 “조양구락부”라고 불리웠다. 이곳에서 홍란파는 1년동안 김인식 선생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조선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라는 책에서 “홍란파는 정악전습소 재학당시에 양산도와 노래가락을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하여 그의 예술적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정악전습소”를 졸업한후 홍란파는 음악으로서는 외세에 짓눌린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부모들의 주장으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려는 지향을 굽히지 않고 그후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신청하여 입학했다.
    일본에서 그는 음악, 문학, 미술 등 세가지 분야에 걸쳐 배우면서 잡지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일본에서의 고학은 참으로 눈물겨운 생활의 련속이였다. 낮에는 땀을 철철 흘리며 신문배달을 하고 밤이면 번화한 네거리에 나서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담배장사도 했지만 학비를 마련하는데는 여전히 힘에 부쳤다. 일본에서 겨우 2년간을 수료하고 1919년 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재일류학생들중에서 항일운동 중심인물로 적극 활동한것이 드러난것 또한 서둘러 귀국하게 된 계기의 하나로 된다.
    귀국후 홍란파는 “대한매일신보” 의 기자로 또한 소설가로도 활동하면서 창작노래집 “처녀혼”을 출간하였으며 1920년 22살에 “처녀혼”이란 단편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홍란파는 창작노래집을 내기 전에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 “사랑”, “그리움”, “봄처녀”, “여름의 별무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들과 기악곡들을 창작하였다.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처녀혼”의 첫 머리에 “애수”(哀愁)라는 곡 이름으로 발표되였다.


한국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 복원한 홍란파 선생의 생가 

    1920년에 창작된 가요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애조곡으로 널리 불리워졌다. 가요 “봉선화”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1919년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란파는 어릴 때 송아지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고향산천이 하도 그리워 팔달산을 끼고 앉은 시골마을을 찾아갔다. 그가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회사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왔다.
    소학교시절에 홍란파는 가난한 탓으로 학교에 못가는 봉선이가 불쌍하여 그에게 가끔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군 하였는데 봉선이는 홍란파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때 봉선이는 봉선화를 그토록 좋아하였으며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다 봉선화를 심고 가꾸었으며 홍란파의 집 울타리 밖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주군 하였다.
    봉선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후 살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리워가면서 홍란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잘 있으라요. 인젠 오빠의 양행금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 곡조 듣고 싶어요.”
    홍란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따르는 봉선이의 마지막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바이올린을 들었으나 정작 그를 위로해줄만한 곡을 찾을수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 앞에서 “양산도”를 탈수도 없었고 “노래가락”을 탈수도 없었다.
    “아리랑”을 타던 홍란파의 머리에는 피뜩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그는 그 곡상을 잡고 활을 그어나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바이올린의 음선을 적시고 음선에서 미끄러져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소리도 뚝 멎고 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서있던 봉선이는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봉선이가 흐느껴 울자 그를 바래주려고 모였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홍란파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바래주고는 방금전에 탔던 곡상을 그대로 5선지에 적어나갔다.
    그후 홍란파는 울밭에 피여난 봉선화를 볼 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군 했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이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홍란파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홍란파의 처녀작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창작초기에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가사가 없이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이 “애수” 였다.
    그는 5년뒤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작사자 김형준에게 위탁하여 가사를 달게 했다. 김형준은 그의 집에 봉선화가 많아 가사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작곡가 홍란파가 봉선이를 바래주면서 얻은 곡상이기 때문에 노래제목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조선의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고향의 봄” 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시기 이 땅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느는 겨레들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는 동포들이 날따라 늘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으니 ‘고향의 봄’이 창작된것은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다.”고 했다.
    홍란파는 1922년에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였고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 지휘자, 음악전문지 발행인, 소설가등 다양한 신분으로 활동을 펼쳤다.
    홍란파는 생전에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그는 대표작 “봉선화”를 비롯해 “봄노래”, “고향의 봄”, “봄처녀”, “고향생각” 등 100여수의 노래를 작곡했는데 그가 작곡한 가곡들이 조선반도와 해외동포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홍란파는 음악수준을 더 제고하려고 1931년 미국에 건너갔으며 “SHEYWOD”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수업에 진력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독주회를 여러번 가졌으며 졸업 후 경성보유학교(지금의 리화녀자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후 홍란파는 1936년 서울방송국의 현악단 지휘자로부터 레코드의 부장으로 력임하기도 하면서 평론집  “음악만필” 등을 통하여 우리 민속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홍란파가 작곡한 많은 노래중에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조선의 최초가곡으로 불리우고 있는 “봉선화”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노래는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이기도 하고 우리 겨레의 아픔을 대표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을 그때 당시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였으며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구금되고 고문까지 당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어떤 탄압수단으로도 가요 “봉선화”의 전파를 막을수 없었다.
    1981년에 81세 나는 일본의 량심있는 지식인 노무라 모토유기 목사가 한국주재 일본대사관 앞에 위치한 “평화소년상”을 찾아 플루트(목관악기)로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노래속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가을바람은 일본침략자를 의미하고 떨어진 꽃송이는 위안부 피해자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봉선화”노래가 창작된지도 어느덧 한세기가 된다. 이 노래는 아직까지도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을 뿐만아니라 조선반도와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고 있다.
    홍란파 작곡가는 1937년 일제반항운동을 벌린 연고로 감옥에 갇혔으며 차디찬 옥중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그후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홍란파는  “나 죽으면 연미복(악대지휘자들이 입는 옷)으로 내 몸을 덮어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1941년 8월 30일, 우리 민족의 작곡가 홍란파는 명곡들을 창작할 나이(43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1954년부터 “홍란파기념사업회”가 성립되여 매년 한국 경기도 수원시에서 란파음악콩클을 비롯하여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며 홍란파의 넋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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