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zxkhz 블로그홈 | 로그인
张学奎文学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장학규 소설

26년
2016년 10월 21일 13시 11분  조회:844  추천:1  작성자: 장학규
단편소설 
 
26년
 
 
 
 
1.
발치에 책 한권이 널부러져 있다. 겉표지는 어느새 떨어져나가고 하아얀 속지가 부끄러움을 잃고 척 드러누워 있다. 
친구집에서 저 책을 호주머니에 쑤셔넣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책가위는 있었다. 검은 색이 주바탕이 되어진 어눌한 디자인의 책이었다. “26년”이란 제목의 책이었는데 소설책인지 시집인지 아니면 사회교양책인지 회억록인지 또는 어떤 다른 유형의 책인지 전혀 알바 없었다. 그런 분류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또 알고싶은 마음 자체도 없었다. 
 
책이라는 물건에 관심을 가져보기는 어제가 처음이었다. 무료해서 막 미칠 것 같은 경우를 여러번 당하고나서 그럴 때 혹시 책이라도 몇장 뒤적거리면 하다못해 숨이나마 고르게 내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어들었을뿐이었다.  
친구는 책이 아까와서 그저 죽어가는 상통을 지어보였다. 책이 할아비도 아니고 돈덩이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가슴 아플까 싶었다. 하기사 책보다는 밉상인 손님이 싫어서 눈쌀을 더 많이 찌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기는 했었다. 술 한잔 얻어먹는 게 그렇게 고역인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진이는 베개를 등밑에 받치고 누운채로 발을 이불밖으로 내밀어 책을 당겼다. 고시원 방은 난방이 되어있지 않아 발을 꺼내놓기 바쁘게 오싹해났다. 칼로 에이는듯한 추위가 발등을 통해 금세 대뇌로 전달되어왔다. 진이는 미처 책을 다 끌어오지 못하고 급히 발을 이불속으로 다시 숨겼다. 이불속은 노가다판에서 친한 손씨 아저씨가 창고 구석에서 뒤져냈다는 손바닥만한 전기담요 덕분에 그나마 따스했다. 
 
책은 무릎 부근까지 올아와 있었다. 손을 내밀어봤지만 한뺌 차이 정도로 잡혀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발을 내밀어 걷어올리면 바로 잡을 수 있을 듯도 싶지만 진이는 그러고싶지는 않았다. 
올해는 왕년에 비해 별로 춥지 않고 따스한 편이라고 매스컴들이 맨날 아양을 떨고 있지만 정작 난방이 안된 집에서 살아들 보시라고, 그러면 추위가 무엇이란 걸 금방 알게 되실 거라고 진이는 괜히 속으로 심술을 쓰고 있었다. 사실 진이도 크게 추위를 타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창 젊은 시절 고향에서 뛰놀때는 영하 30도 추위에도 솜옷 따위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지난 번 청도로 날아갔을 때도 홑바지에 팬티 바람으로 온동네가 먼지 나도록 뛰어다녔었다. 그게 옆사람들 보기에는 크게 놀랄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득한 옛날에 유행했던 국방색의 군용솜외투를 온몸을 감싼 그 자식이 얼굴을 뒤덮은 구레나릇을 만지면서 뭐랬던가?
“타마디, 이넘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여.”
분명 첫마디가 그랬었다. 
“이 날씨에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이런 차림새로 나올리 없어. 암, 그렇구말구. 거시기 얼어떨어져 개 주워먹게 멀리 던져버리고 말아. ”
 
고작 영하 2도에 엄살을 떠는 놈팽이가 진이에게는 더 이상한 넘으로 보였다. 그렇게 놈팽이들을 우습게 본 덕분에 진이는 팬티 한장 달랑 남겨진채로 어느 생소한 바다가에 버려졌다. 주위에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 산자락이었다. 차디찬 바다바람이 막힘 하나 없이 그대로 불어와 훌 온몸을 한번 감아돌고 달아나군 할 때마다 전율이나 하듯 후두둘 떨려났다. 고향의 겨울날씨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떠나올 때의 서울과도 많이 달랐다. 다행히 30여년 다져놓은 몸이 그런대로 쓸만 했다. 그리고 산등성이를 돌아나오면서 뜻밖에도 떠돌이군들이 지어놓은 움막 비슷한 집 한채를 발견하였고 집앞의 나뭇가지에 남루하기는 해도 대수 몸에 걸칠 수 있는 옷견지들이 걸려있었다. 
(자식들이 아직 독하지는 못하군. 흐흐흐)
 
진이는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성은 산에 둘러싸여 있었고 산에는 싸리나무들이 무리져 자라고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겨울 불쏘시개로 싸리나무를 베어가군 했다. 싸리를 베어간 자리에는 뽀죽뽀죽한 그루터기들이 서슬 푸르게 남아있다. 그속에 맨발로 서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진이는 씨물씨물 웃음이 나왔다. 
 
 
 
 
 
2.
“광이가 왔다.”
엄마가 전화로 이런 말을 걸어왔을 때 진이는 이상야릇한 전율을 느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며칠째 광이가 시도때도 없이 머리속에 떠올랐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호랑이도 제 소리 듣는 귀는 열두자란 말이 그른데 없는 모양이었다. 
 
단풍이 든 산야에 싸리그루터기가 송곳처럼 촘촘히 서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치는 가운데 맨발의 소년이 막무가내로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루터기를 밟지 않고 이 싸리밭을 벗어날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린다. 
 
“너한테 여러번 전화했는데 자꾸 핸드폰을 끈 상태더란다. 그래서 우리한테 연락왔더라.”
“요새 밧데리 다 나간줄 모르고 있었소. 그런데 광이는 왜 왔다우?”
엄마는 미처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마 광이가 옆에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 난처했을 것이다. 엄마는 광이 이름만 나와도 별로 기죽은 목소리다. 광이는 공무원 출신이다. 옛날 같으면 떵떵 소리치면서 살 넘이다. 그런데 1년전부터 심심하면 전화를 걸어와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묻군 했다. 
 
진이는 이불속에서 기어나와 잽싸게 옷을 주어입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쳐들어 양말을 꿰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이면서 절반쯤 양말이 꿰진 발로 꽝하고 무엇인가 밟았다. 인츰 심한 통증이 발바닥으로부터 엄습해왔다. 발을 들어보니 벌써 일주일째 발치에서 나딩굴던 책이었다. ‘26년’인가 하는 제목의 그 책은 진이가 여러날 째 발로 끌어왔지만 결국 손에 잡지 못한 그 책이었다. 
부랴부랴 7호선 지하철을 타고 조선족들이 줄레줄게 모여사는 대림으로 가면서 진이는 그냥 싸리밭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진이도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광이가 약속대로 돈을 가져오지 못하면 싸리밭에 세워둘거라고 엄포를 벌써 놓았었다. 진이네는 그 경고대로 실행했을뿐이었다. 
광이도 사실 좀 그랬었다. 전처럼 곱다랗게 돈을 가져와 진상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진이네는 그 돈으로 학교 부근의 소매점에서 담배랑 먹을 거랑 사서 뒷산에 가 하루종일 즐기면 될 일이었다. 정 돈을 구할 수 없으면 아예 종적을 감추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광이는 고지식하게 자기 발로 학교에 걸어와 돈을 더이상 구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래서 진이네는 광이를 우격다짐으로 뒷산으로 끌고 갔다. 
 
뒷산은 진이네의 아지트와 같았다. 그곳은 일년사시절이 모두 경치였다. 봄에는 민들레꽃이 샛노랗게 덮혔고 여름에는 함박꽃이 활짝 피어났다. 가을에는 개암을 까먹기 좋았고 겨울에는 산토끼가 뛰어놀군 했었다. 이맘때는 동네방네에서 싸리나무 가을을 하고난 뒤여서 그루터기들이 부채살처럼 쫙 뻗어나간 계절이었다. 
 
진이네는 단짝이 넷이었다. 진이를 포함해 둘은 부모가 한국에 가있고 하나는 고아였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감옥에 수감되어있었다. 모이다보니 어떻게 끼리끼리 그렇게 모여졌다. 솔직히 진이는 돈이 별로 그립지 않다. 할머니한테 입만 벌리면 매일 백원 하나씩은 타내올 수 있었다. 
“가져가라. 먹고싶은 걸 다 사먹어. 네 에미애비 다 니를 위해서 그 고생이지.” 
할머니는 초중에 올라온 진이를 따라 현성에 세집을 잡은 후로부터 손자가 남한테 업수임당할가봐 매일이다싶이 용돈을 주머니에 질러주군 했다.
“아끼지 말고 팍팍 써라. 그리구 혼자 먹지 말고 옆에 애들 더러 나눠줘. 그래야 친구들이 많이 생긴다.”
 
아닌게 아니라 욱이가 먼저 접근해왔다. 고아원에서 자란 욱이는 먹을 것만 보면 밸까지 다 꺼내주는 인간이었다. 다음 철이가 자기네 패거리에 끼어들라고 제의해왔다. 감옥에 갇힌 깡패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거친 철이는 패거리 두목노릇을 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민이는 처음에 철이랑한테 돈을 뜯기다가 나중 그들과 섭쓸리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초중 3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다른 애들은 대부분 떨어져나가고 그들 넷이 단짝이 되어 매일 붙어다니군 했었다. 
 
“여기가 좋겠지?”
시다바리나 다름없는 민이가 철이에게 잘 보이려는듯 물었다. 
“니 보기에는 어떻니?”
철이가 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왕좌왕하는 철이도 진이한테만은 가끔 양보하군 했었다. 언젠가 욱이를 때리는 철이를 말리다가 진이와 철이가 오히려 대판 싸운적이 있었다. 물론 주먹바닥에서 뼈마디를 굳혀온 철이한테 얻어맞긴 했지만 진이의 강기에 철이도 얼마간 주눅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후부터 철이는 진이한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글쎄, 벌 주는 거니까 비슷하면 되겠지.”
“애들아, 동창끼리 이러지 말자. 나중 생기면 또 줄게.”
광이가 아무리 손을 비비며 사정해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넷은 한사코 발버둥치면서 뻗치는 광이를 싸리그루터기들이 촘촘히 박힌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약살바른 욱이가 광이의 구두를 벗겨서 저만치 던져버렸다. 
 
그 일로 인해 진이와 철이는 퇴학처분을 받았다. 욱이는 오갈데 없는 고아라고 학교에서 특별히 처분을 보류했고 민이네는 교장한테 많은 돈을 썼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진이의 엄마도 그 소리를 어디서 얻어듣고 자기도 돈을 쓰겠다며 얼리고 닥쳤다. 불법체류 신세인 엄마는 그저 전화로 애걸복걸할 수밖에 없었다. 
 
“진이야. 제발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응? 앞으로는 대학 나오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못받아.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는지 알잖아. 모두 너를 위해서잖아.”
 
그러건말건 진이는 다시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20여 년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진이의 엄마, 아버지는 규제 조건이 완화되면서 자진신고로 귀국했다가 2년 후 다시 한국으로 떠났다. 
“니 결혼할 돈도 벌고 아파트도 사줘야지.”
엄마는 떠나면서 진이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원래 공부를 잘한 광이는 그후 고중을 거쳐 대학까지 나왔고 배운 전업에 따라 현성 공상국에 배치받았다. 국가적인 직업 배치가 없어진 마당에 쉽지 않게 좋은 운이 따라준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잘 나가는 거 같던 광이가 몇년 후의 어느날 갑자기 직업을 때려치우고 청도로 진이를 찾아왔었다.
“처음에는 돌멩이를 주워 들고 싸리그루를 하나씩 짓이기면서 한걸음씩 나왔어. 그런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 나중에는 옷을 벗어 오른 발 감고 바지를 벗어 왼발 감고 막 걸어나왔지. 여러번 찔려 피도 나구. 약 오르니까 아픈줄도 모르겠더라. 그렇게라도 나오지 않으면 그대로 서서 죽겠니?”
오래전 시절의 일이라 광이는 대수롭지 않게 술을 마시면서 마실삼아 얘기했지만 진이는 속이 질려서 말이 아니었다.
 
(그때 왜 산동넘들처럼 옷까지 벗겨버릴 생각을 못했을까? 쿡쿡. 그랬으면 우리가 살인죄라도 먹었을까?)
결국 보면 옷을 벗기고 신발을 남겨준 산동넘들이나 신발을 벗겨놓고 옷견지는 고스란히 놔둔 자기들이나 아둔함의 극치랄까 전형이랄까 아무튼 피차일반에 피장파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전철속에서 혼자서 키들거리고 있었다. 
 
 
 
3.
 
광이는 사흘만에 학원에 취직이 되었다. 중국어를 배워주는 학원이었는데 숙사도 있어 광이는 출근하자 바람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너도 아무 일이나 찾아해. 노가다 뭐라니? 남들 다 하는 건데.”
광이는 떠나면서 이렇게 뇌까렸다. 
 
(자식이, 누군 그런 도리 몰라서 이러고 있는줄 알아? 배 부른 사람이 굶은 넘의 배고픔을 모른다더니 체…)
진이는 괜스레 발치에 널부러진 “26년”을 흘겨보았다. 광이가 이틀간 와서 묵으면서 어느새 다시 발치까지 밀려나간 책이었다. 진이는 별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발을 내밀어 책을 끌어오려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또 무릎 근처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벌써 한달째 진이는 이러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청도를 한번 다녀온 후부터 만사가 귀찮아졌고 무슨 일이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몇년을 굴러온 노가다판이 몸서리가 나도록 거부감이 생겼다. 막돼먹은 오야지의 거친 욕지거리가 점점 역겨웠고 먼지와 땀범벅인 현장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래서인지 평소 현장에서 남달리 진이를 잘 챙겨주던 손씨 아저씨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진이는 진한 감동보다 먼저 스트레스 비슷한 짜증부터 앞섰다. 
 
“아우야, 왜 안나오는겨? 어디 아픈겨?”
“아니, 그저요. 이만 끊어요.”
“글라므 안된다 아이가. 돈 벌어 아들내미 대학 보낸다믄서?”
“글쎄요…”
“그게 무슨 대답이가? 교포들 통병이더라꼬. 개주머이에 은자 몇푼 들면 정신 싹 이자뿌리는 거…”
손씨 아저씨는 안타까운듯 높은 톤으로 질책했지만 진이는 오히려 심드렁했다. 
 
정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싶어진다. 그런데 다른 곳에는 취직이 잘 되어지지 않는다. 가방끈이 짧아서 어디에 이력서를 마구 들이밀 게제가 못된다. 이럴 때면 자기도 모르게 광이가 못내 부러워진다.
“야야, 걷어치워. 그따위 공부해서 뭐해? 대학 물 먹은 넘이 초중도 못나온 나를 찾아왔잖아?”
허여멀쑥한 광이가 반듯한 양복 차림새로 청도에 왔을 때 진이는 비단에 싼 개똥이라고 속으로 비웃었었다.  
 
그런데 그 광이가 진이의 소개로 한국기업의 현장 관리로 들어간지 반년도 되지 않아 사무실로 불려 올라가더니 인츰 계장 뱃지를 궤찼다. 회사근무 10년 경력에 얼마전 겨우 계장이랍시고 나돌기 시작한 진이에게는 얼굴이 띠끔한 일이었다. 다시는 광이앞에서 으시대지 못했고 곧 초등학교에 진학할 아들애에게 공부왈을 훈학하기 시작했다.
 
“우리 명이는 꼭 공부 잘 해야 해. 알겠어? 우리집에서도 대학생이 나와서 이 더러운 운명을 좀 개변시켜야 해.”
 
그 명이를 위해 진이는 결연히 10년 회사 노하우를 박차고 엄마가 있는 서울로 떠났다. 엄마네는 선후 20여 년을 그곳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진이를 잘 먹이려고 아득바득했고 지금은 진이의 아들 명이를 위해 목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아내와 장모가 돌보는 명이는 공부도 잘했었다. 3학년이 되도록 해마다 3호학생을 따왔고 계속 학년에서 1등을 했다. 민영학교이지만 그래도 조선족학교여서 우리말을 또박또박 잘도 했다. 그런 걸 마누라가 중국에서 살자면 한족들 무리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기어코 2만원이나 퍼주고 좀 괜찮다는 한족학교로 전학시켰다. 탈은 그때로부터 생겼다. 
 
“자네 아무래도 한번 들어왔다 가야겠어.”
장모의 전화를 받은 진이는 느닷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누라가 아닌 장모가 전화올 때는 호소식인 경우가 거의 없다. 자기 마음대로 명이를 한족학교로 돌려놓고 아내는 성질이 불같은 남편앞에서 언제나 숨 죽이고 지냈다. 명이가 반간부도 못하고 성적이 중등에 머물고 3호학생도 되지 못했다는 등등 소식은 모두 장모가 전해주고 있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진이는 화가 동했고 그러면서도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신 할머니는 그때 어떻게 아버지 엄마에게 자기의 소식을 전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한번 학교까지 따라가봐. 무슨 일이 꼭 있을 건데.”
장모의 부탁대로 진이는 명이의 뒤를 멀찌감치 따라갔다. 4학년 애답지 않게 걸음이 무거웠다. 집에서 거리 두개를 사이둔 학교까지 가는데 명이는 꼬박 반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가다가는 주춤 멈춰서서 거리를 멀거니 바라보는가 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하군 했다. 
 
학교 정문앞에는 머슴애들이 한무리 뭉쳐있다가 명이를 발견하고 다가오더니 빙 둘러섰다. 그중 명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자식이 다짜고짜 명이의 책가방을 들추는 것이 보였다.
(오, 지금은 소학교때부터 이런 일을 하는군. 많이 진화했네.”
진이는 광이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광이의 아버지는 그들이 광이의 호주머니를 들추는 것을 발견할 때면 “이넘들 그러면 못써” 하고 훈계하지 않으면 곧추 담임선생님께 일러바치군 했다.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 애들의 버릇을 고쳐주지 못한다는 것을 진이는 잘 알고 있었다.
 
진이는 큰 기침을 둬번 한 후 애들을 헤집고 들어갔다. 아버지를 발견한 명이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내 이 애의 아버지인데 어디 너 한번 보자.”
진이가 꽁무니를 빼려는 우두머리의 팔목을 틀어잡기 무섭게 그넘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야마야, 사람 죽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눈물콧물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진이는 사정없이 애를 담장 밑으로 끌고가 귓쌈을 연속 서너대 후려갈겼다. 야들야들한 뺭에 금세 굵은 손가락자국이 새겨졌다. 
“이제 한번만 더 그러면 발목대기를 분질러버릴테다. 알았어?”
“네, 제발 용서해주세요.”
 
이틑날은 보란듯이 명이와 함께 가지런히 걸어서 학교에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 버릇들이 덜 떨어진 모양으로 학교 정문에는 여전히 한무리의 애들이 몰려있었고 그 속에는 어른도 둬사람 섞여있는 거 같았다. 진이는 별 생각 없이 그들 옆을 스쳐지나 명이를 학교내로 들여보내고 돌아섰다. 그때 온 얼굴에 구레나릇이 덮힌 웬 사나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국방색 군용외투는 때가 번지르했고 수염에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잔뜩 게발려있었다. 어느새 진이의 전후좌우에 시커먼 장정들이 빙 둘러서있었고 허리에는 딱딱한 물건이 대여왔다. 
“어이 친구, 우리랑 어디 좀 가자구.”
“저 애가 당신 아들인가? 몇달째 우리애한테서 돈을 빼앗아냈다구.”
“이 자식이 사람 때려놓고 지금 나하고 도리 따지고 있네.”
날아오는 주먹을 냉큼 한손으로 받는데 홀옷을 입은 허리춤이 또다시 섬뜩해왔다. 
“친구야. 양아치처럼 비겁하게 이게 뭐야? 자신 있으면 우리 단둘이 한번 붙어보자.”
구레나릇은 의외인듯 놀라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이 자식이 어딘가 돌았어. 그렇지 않구서야 이 날씨에 이런 차림새로 다닐 수 있을라구. 바다가에 던져 얼군 새우 만들어버려. 거시기 떨어지면 강아지들 좋아하겠네 흐흐흐”
 
놈팽이들이 너털 웃음을 남기고 돌아서는 그 뒤에 대고 진이가 한마디 박았다. 
“이걸로 끝내는 거다. 아니면 니들 모두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이틑날 진이는 여전히 명이를 앞세우고 학교로 갔다. 애들 우두머리인듯한 그 자식이 먼저 와서 우물쭈물하더니 무슨 보따리를 말없이 내밀었다. 진이가 헤쳐보니 전날 벗기운 자신의 옷가지들이었다. 
다음날도 명이와 함께 학교로 갔다. 그날은 아무 사람도 정문에 서있지 않았다. 하학하여 집에 돌아온 명이도 이 며칠은 자기를 괴롭히는 애들이 없다고 말했다. 
 
 
 
4.
“저녁에 뭘해?”
광이가 이런 전화를 걸어왔을 때 진이는 또다시 “26년”을 무릎 근처까지 거의 끌어오는 중이었다. 
“내사 뭐 할 일 있나?”
진이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손으로 책을 잡으려고 했지만 역시 한뺌 정도 거리가 모자랐다.
“그럼 곱창에다 한잔 빨자. 내 쏠게.”
“그래, 알았어.”
 
불현듯 찬바람이 불어치는 바닷가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나무가지에 걸린 헌 옷가지들을 벗겨내어 벌거벗은 몸을 감싸던 자신의 모습이 방불히 보인다. 고향의 뒷산도 환영인듯 나타난다. 그속에서 광이가 옷과 바지를 벗어 발을 동여매고 있다. 아득하게 검푸른 색으로 펼쳐진 바다와 새노랗게 물결쳐간 산자락은 칼라만 달랐을뿐이지 그 기세나 웅장함이나 멋스러움은 별로 다를바 없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고 될법도 한 일인가? 주제넘은 자식같으니라고. 타마디.”
구레나릇은 분명 그 한마디를 내뱉고 시다바리들을 이끌고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낯설고 황량한 바닷가에는 파도소리만 요란했다.
“저 넘을 저렇게 놔두고 가도 괜찮을까?”
광이를 홀로 야산에 세워두고 나오면서 마음 약한 민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었다. 
 
그러나 진이나 광이나 둘 다 살아남았다. 죽지 않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서울의 한 거리에서 마주 앉아있다.
“어서 마셔라. 술 식겠다.”
“한잔 달리자.”
“응, 한잔 댕겨라.”
둘은 승부 내기나 하듯 연거푸 술잔을 기우렸다. 인차 술 기운이 오르고 얼굴들이 붉어졌다. 
광이는 난생 처음 많은 말을 했다. 어느날 문뜩 술을 먹자고보니 주변에 온통 노인들이 포진해있었고 유일한 학교가 폐교되면서 몇 안되는 어린이마저 사라져갔다고 사직한 원인을 말했다.
“그대로 뒀다간 아들애를 망치겠더라고. 안 그래도 만날 중국말만 해요. 우리 다닐 때는 한 학급에 세개 반씩 애들이 와글와글했었는데…”
진이는 또한번 가슴이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싸리나무는 곧게 자라는 것보다 비스듬히 자라는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가을할 때도 낫을 사선으로 세워가지고 베기에 그루터기가 대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기게 된다. 
 
광이는 고향을 떠나기 전날 뒷산에 올라갔다고 한다. 마침 그때가 가을철이어서 옛날처럼 싸리밭에 다시 서보았다. 물론 신은 신은채로였다. 이제는 누구도 그의 신을 벗겨버릴 수 없었다. 돌을 들어 싸리그루터기를 짓이겨보았다. 쉽지 않았다. 돌이 빗나가면서 싸리그루에 손이 찔리기도 했다. 살짝 스친 거 같은데도 핏방울이 줄레줄레 흘러나왔다. 광이는 그 상처를 처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루터기 한개를 짓이기는데 몇분이 걸린 거 같았다. 열서너살 나이때 어떻게 그것들을 짓이기면서 나왔던지 스스로도 놀랍고 장했다. 그런 골기와 용기로 세상을 마주하면 못 이겨낼 일이 없을 거 같았다.
청도를 선택한 이유는 조선족이 많이 모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족 민영학교도 있어서 애를 바로 입학시켰다. 그런데 입학 당시 두개 반급이던 것이 일년후에 한개 반급으로 줄어들었고 다음해는 스물명 좀 안되게 남았다. 고향의 전례를 답습하는 모양새였다. 주위 사람들이 다시 여기저기 떠나기 시작했고 또 어떤 집들에서는 애를 한족학교로 옮겨갔던 것이다.
 
광이는 한국을 떠나 다시 청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아들애가 성장하는데에는 그나마 청도만큼 적합한 고장이 없을 거 같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남이 모두 포기한다고 하여 자신도 거기에 휩쓸려서 안될 일이라고 모박았다. 바람 맞으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격이지만 어쩌면 진이의 생각과도 비슷했다. 
 
“오늘 올나이트(通宵) 가는 거야.”
“안돼. 술 여기까지 하고 찢어지자(分手).”
광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밖으로 나온 진이는 기지개를 켜면서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겨울기운이 페부를 시원하게 훑어주었다. 
 
요즘 기온이 뚝 떨어질 것이라고들 한다. 역대 최저 기온을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추위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진이네가 자랄 때는 고향의 겨울은 마냥 30도 밑에서 흘러갔다. 그래도 재미있기만 했고 훈훈하기만 했다. 고작 이따위 추위가 다 뭐냐?!
 
진이는 청도의 그 바닷가에 다시 찾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이가 고향을 떠날 때 뒷산의 싸리밭을 찾은 것처럼 자기도 그 바닷가에서 한번 안면몰수하고 버럭 멋지게 성질 한번 써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거 같았다. 아무튼 개같은 인생에 엿같은 일밖에 더 있을까 싶었다. 하기야 여래불도 물에 빠지면 저절로 헤엄쳐서 나와야 한다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발악밖에 남은 게 더 없겠지. 
 
진이는 약간 정신이 가출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찬공기가 다져진 집안은 냉랭하기만 했다. 전기담요에 전기를 올리고 이불속에 기어들어가려다가 문뜩 여직껏 발치에서만 맴돌던 책이 떠올랐다. “26년”이던가 하는 그 책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광이의 연락을 받고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던 책이었다. 이불을 발칵 뒤집어도 “26년”은 어디로 기어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절로 발이 달려 달아났을리는 없었다. 도둑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출입문을 점검해보았으나 문을 뜯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시 이불을 뒤집었으나 여전히 책은 보이지 않았다.
 
 “26년”이 잃어진 것이다.  
 
진이는 그 “26년”을 꼭 찾아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여직 한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책이었다. 그 컨텐츠를 확인하고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믿고 있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1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31 바이러스 2020-04-25 0 463
30 2020-04-25 0 541
29 막차 2019-11-29 0 504
28 개미 투 2018-09-10 0 828
27 왕로얼 별전 2017-06-07 3 787
26 향이의 맞선 2017-05-23 1 762
25 개미 2017-01-13 0 773
24 26년 2016-10-21 1 844
23 빈하로 레전드 2016-04-08 1 861
22 두 녀인의 포옹 2015-12-23 1 1002
21 낚시 2015-06-25 1 1317
20 에볼라 에볼라 2015-04-22 1 939
19 노크하는 탈피 2015-01-25 1 1207
18 하늘엔 울바자가 없다 2014-08-31 0 1222
17 필터링 2014-08-31 0 986
16 청도로그인 2014-08-31 0 1234
15 조깅 2014-08-31 0 1003
14 일탈 2014-08-31 0 1144
13 인저리타임 2014-08-31 0 887
12 하숙집 2014-08-31 0 1069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