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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의 시련
2017년 08월 23일 08시 33분  조회:487  추천:1  작성자: 장학규
황해의 시련

청도에 진출한 겨레들
 
 
황해연안의 명주 청도는 중국에서 최초로 국외에다 개방한 항구도시중의 하나이다. 북으로 발해만경제권을 업고 있고 남으로는 최대 국제도시인 상해와 무릎을 맞대고 동으로는 조선반도와 일본을 향하고 서쪽은 광활한 중원땅을 안고 있는 청도는 그 우월한 자연 지리적환경과 따스한 기후(가장 추울 때 령하 10도 정도)로 하여 한국투자인들의 눈길을 모으는 초점으로 되고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유럽식의 건축물들이 일떠서는가 하면 촌사람들도 제법 변속자전거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그중 정식 생산에 들어간 한국기업이 2백 여개로 외상총수의 70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투자가 시작되였거나 허가가 나와있는 기업은 더욱 많았다. 항목으로 보면 옷, 신, 양말, 완구, 피혁 등 봉제제품회사가 대부분이고 체육용품, 전자재부속품 등 일손을 많이 쓰는 가공업체가 그다음이였다. 그곳 조선족들의 말대로 “새비들의 진출”에 불과한 것이다. 
그만큼 명성높은 대기업의 투자는 공백이나 다름없고 그대신 인건비 높은 한국에서는 도무지 경쟁해나갈 방법이 없거나 이미 파산되였던 기업들이 주도였으니깐. 그래서 그 설비란 것들을 보면 눈이 감기게 졸렬하거나 형편없이 낡아빠진 것들이였다. 
한번은 한국에서 기계설비가 들어와서 기중기차로 작업현장에 “모셔”가게 되였는데 반쯤 가다가 나무무지처럼 와그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이였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외자인입의 피동성과 맹목성을 쉽사리 보아낼 수 있지만 그 우렬판단은 정부측에서 할 일이다. 어쨌던 이런 기업들이 중국에서의 재기를 맛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또 실제적으로 청도에 많은 혜택을 가져다준 것도 사실이였다. 몇만을 헤아리는 여유로력을 해결해주었고 전기, 물, 연료 그리고 여러가지 원자재를 소비해주고 있으며 해관세를 포함한 여러가지 세금을 물어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유흥업소와 봉사업체들이 그들때문에 날따라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중 가장 돌출한 것이 가라OK인데 거의 모두가 한국노래들을 갖추어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구시와의 자매결연후 기자회견에서 유정성(俞正声) 청도시장은 흐뭇해서 멀지 않은 장래에 청도에다 한국촌과 한국학교를 건설하겠노라고 선포했다. 
한국기업이 있으니 자연 중국조선족도 있게 되였다. 의사소통의 교량이라는 이 점만도 조선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지 인사들의 말에 의하면 대략 7,8년전만 해도 조선족인구는 십단위로 계산되였단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단위가 천으로 뛰여올라 대략 3천에서 4천 정도로 불어났다. 물론 정부측 통계가 아니고 주먹구구라 하지만 결코 이 수자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조선족들의 견해였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증가되는 추세였다. 따라서 취업난, 대우의 하강 등 문제도 매우 첨예해졌다. 
하다면 청도의 조선족들은 구경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그들의 사업 및 생활상태는 어떠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은 어떤 것들인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저 청도에 있는 8개월간 필자는 청도시 7대구와 그 산하의 즉묵, 교주, 래서 등 3개 시를 두루 밟아보았다. 총적으로 기쁨보다 고통이 더 많았고 자랑보다 서러움이 더 컸다. 필자가 글을 쓸 목적임을 안 후에는 자기들이 보고 겪은 일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그 리해득실을 상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을 꼭 세상에 알려주시오. 지금 고향에서는 청도를 서울인가 압니다. 꼴을 먹어도 알고 오는 것이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기업에서 중견으로 일하는 김모씨가 필자의 손을 부여잡고 부탁한 말이다. 그는 어찌어찌하다가 1천원을 담보금으로 잡혀놓고 마지못해 붙어있는 사람이였다. 
담보금 말이 나온 김에 해석이 있어야겠다. 어떤 회사에서는 조선족들이 청도에 많이 몰려든 것을 턱대고 입사시 담보금을 낼 것을 강요한다. 리유라면 조선족들이 듬직하지 못하고 자주 자리를 뜨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속셈 밝은 한국인들의 리익계산이 주되는 원인이였다. 일단 서약서란 것을 쓰고 담보금을 낸 후에는 그 어떤 정당한 요구도 모두 거절당하고만다. 마땅히 올려줘야 할 봉급도 아니 올려주고 뚱딴지같이 무슨 명목을 내세워 많지 않은 봉급마저 제대로 내주지 않는다. 그런줄도 모르고 처음 청도에 오는 조선족들은 무작정 서약서에 사인한다. 좀 깐깐하게 볼라치면 “돌아가시오.”하는 판이라 그럴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였다. 문제는 조선족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때문이였다. 투자를 하려는 사람보다 취업위주가 대부분이였기에 경쟁이 치렬하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배부른 흥정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가령 조선족이 없다면 어떻게 될가? 당장 생산이 중지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근심은 하지 않아도 되였다. 아직도 청도거리바닥엔 취업을 하지 못한 조선족이 수백을 헤아린다는 것을 한국경영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때문이였다. 
필자가 몸 담고 있는 회사만 해도 7명의 아가씨가 담보금 천원에 묶이워있었다. 그들의 평균로임은 250원정도이고 모두 고중졸업생이지만 일반직원(대부분 초중생)과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제 부르면 수시로 일어나 통역을 해야 하고 조금만 늦어도 핀잔당하기가 일쑤였다. 그중 설씨성을 가진 치치할아가씨는 필자가 돌아올무렵 어린애같이 엉엉 우는 것이였다. 
“장선생이 가시면 누가 또 바른 말을 해주겠어요. 저도 엄마가 보고파요. 여기서 돈도 못 벌면서 개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흑흑…”
돈 천원에 매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동포아가씨, 21세 애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싶겠냐만 그 가증한 서약서때문에 2년을 참아야 하는 동포아가씨를 필자는 위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향에서 지금 하는 일만큼 힘을 내면 그 곱배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무릅쓰고 회사에 온 까닭은 무엇일가? 한국회사가 돈을 무더기로 안겨줄줄 알았던가?
그래도 그녀는 행운아인셈이였다. 필자가 여직껏 만나본 사람중에서 취업하지 못한 시일이 가장 오랜 사람은 계서에서 온 23살난 김군이였다. 렴치를 무릅쓰고 사돈집에, 친구들 집에서 1년이나 얹혀 살면서 분주히 뛰여다녔지만 운명의 신은 시종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군 역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니였다. 교하에서 온 최씨는 믿을데도 없는 형편에 돈이 뚝 떨어져서 피를 팔아 집으로 돌아갈 로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궁지에 빠진 림구의 박모씨는 같은 려관에 든 손님의 가방을 훔쳤다가 감방신세를 지고. 이러루한 일화는 많고도 많다. 
고난의 취업길, 귀숙을 찾은 사람이나 못 찾은 사람이나 똑같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한두가지 실례로 해석이 될 현상이 아니다. 어차피 도시진출은 막을 수 없는 또 막을 필요도 없는 대추세이다. 그러니 잘 되였던 못 되였던 그런 시비는 력사에다 맡겨버리고 우선 먼저 눈앞의 생활상, 인간상부터 진실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청도의 조선족들은 그가 혼자 왔든 여럿 왔든 3년이 되든 석달이 되든 한결같이 집이란 것이 없다. 혹자는 회사 숙사에, 혹자는 세집을 맡고 생활한다. 그 옛날 땅의 부름을 받고왔던 1세들은 흙집이나마 자기 집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살았었는데 오늘날 그 후대들은 땅을 떠났기에 몸을 덥힐 “굴”도 없는걸가. 가방과 보따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방바닥에는 별 오가잡탕들이 지저분히 쌓여있는 것이 마치도 려관같은 느낌이였다. 수시로 머나먼 려행길로 떠나갈듯한 태세들이였다. 
래서의 하씨는 금년에 49세인데 다섯식구의 호주였다. 6급 전공이 어느 정도의 기술소유자인지는 필자로서 알 수 없지만 자격증명서까지 보이며 으쓱해하는 것을 보면 전업수준이 꽤나 높은 모양이였다. 룡강현출신이라니까 그곳에 처가를 두고 있는 필자와는 연고가 있는 사람인셈이였다. 퍼그나 반갑다며 한사코 자기 집으로 끌기에 가보았더니 글쎄 이런 법이라구야. 10평쯤 되는 집안에 두치두께의 스폰지 석장을 펴놓고 구들 겸 침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서 밥도 먹고 잠도 잔다는 말인데 남녀성인 5명이 몇달동안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 그 “밥상”을 마주하고 쓴지 단지를 모르게 한근 술을 들이켰었다. 
“돈을 벌어서 무얼합니까? 침대두 사구 밥상두 사구 좀 사는 것처럼 꾸미면 안됩니까?”
주기를 핑계대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들이대였더니 그 대답 또한 절승경개였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는다구 그따윌 다 갖추겠나. 래일 퇴사하라면 하는 판인데.”
마찬가지로 한국회사에서도 조선족을 크게 믿어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족들이 자주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였다. 쩍하면 싸움질하고 도적질하고 며칠 일하고는 나는 가겠소 하고 나눕는다. 
로산구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 저녁은 조선족  6명(흑룡강 3명, 교하 3명)이 술을 잔뜩 마시고 거리에 나갔다가 길 가는 한족청년이 자기네를 본다고 다짜고짜 접어들어 육장벌레가 되도록 팼다. 중국 옛말에 사나운 룡도 지방뱀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영문 모를 매를 맞은 한족청년이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친척, 친구 50여명을 동원하여 회사에 찾아왔는데 단꿈에 빠진 영웅들을 하나 하나 찰떡 쳐준 것은 물론 회사의 쏘나타승용차까지 훌딱 뒤집어놓고 가버렸다. 사장이 정신 잃게 놀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 경제손실은 또 얼마인가.
즉묵시에서도 이와 류사한 일이 발생했었다. 다르다면 지방애들이 너무 애를 먹여서 조선족 20여명이 집단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결과 량쪽에서 병원에 입원한 수가 30여명 되였고 조선족은 빠짐없이 퇴사를 당하고말았다.
이런 대규모적인 충돌은 물론 국부적이다. 그러나 조선족을 먹칠하기에는 충족했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강물을 흐린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회사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튀는 사건들이 비일비재인데야. 모 회사에서 무역일을 보던 정아무개는 어벌 크게 단번에 12만원의 거금을 가지고 어디론가 튀여버렸다. 필자가 있던 회사에서도 박아무개란 사람이 소가죽을 가져가다가 들키워서 크게 망신을 당하고 퇴사를 강요받은 일이 있었다. 
“보시다싶이 조선족은 우리에게 많은 실망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동포라는 점에서 되도록이면 중임을 맡겼댔지만 지금은 그것이 꿈같이 무서워지는 실정입니다.”
모 회사의 리부장이 필자의 질문에 정색해서 하는 대답이였다.
그만큼 현재 조선족의 지위란 것은 운운할 나위도 없이 밑바닥이였다. 사무실인원중에서 최하층인 통역 겸 관리인원인 조선족들은 말그대로 하인과 같은 존재였었다. 그러니 현미경으로나 알아낼 수 있는 극히 적은 몇몇을 내놓고는 영원히 진급과는 인연이 없었다. 한국인은 입사하자마자 차간주임 명찰을 차고 다니고 얼마후면 계장, 과장으로 승급하지만 조선족은 재능이 아무리 뛰여나도 그 어떤 명분도 주지 않는다. 관리인원이란 명색뿐이지 실지는 심부름군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었다. 한국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면 그대로 할뿐이지 수하직원들을 지배하고 거느릴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원래 눈치밥을 잘 먹는 중국직원들이 그 실정을 알아내고는 “네가 뭐기에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빡빡 대드는데 복통이 아니 터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가슴 가득하던 웅심은 차츰 사라지고 따라서 무능하고 적극성이 모자란다는 평판을 받게 된다. 
림학원 출신의 허씨는 회사에 다닌지 2년이 되여서 일에 환했다. 원체 총명한데다가 직심이여서 성적이 돌출했지만 겨우 주임의 자리를 차지했을뿐이다. 입사한지 두달이 되여서 계장으로 된 스무나문살 되는 한국총각이 그앞에서 거들먹거리다가 된 코빵을 맞았다며 림씨는 서글프게 웃는것이였다. 
“일에 행방이 있나요. 제딴에는 한국인이라고 대단한줄로 알겠지만, 일을 핑계로 마구 시켜먹었지요. 사후에 눈치를 알고 노발대발했지만 회사 규정을 들이대며 따졌더니 말문이 막혀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우선 우리 자신부터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할 것이다. 무엇무엇해도 독립의식이 강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흠집이였다. 한사코 남에게만 의지하려 하고 앉아서 뒤장을 보려한다. 서로 책임을 밀어버린 덕에 응당 받아야 할 대우도 받지 못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전무라는 사람이 채용기에 얼마를 준다고 명확한 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받아본 사람이 없었다. 한국기업에서는 시용기 3개월이라는 규정이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채용기에 들어서는데 일반적으로 봉급이 시용기보다 50프로 좌우 늘어난다. 뿐만아니라 일종 “보너스”라는 상금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무가 낯가죽 두껍게 입을 합봉하고 있는데다가 그 권리의 향수자들인 조선족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만 보고 있으니깐.
한편 우리의 문화소질도 확실히 차했다. 모르는 사람은 청도조선족 거개가 대학생으로 오해한다. 실은 대부분이 고중생이고 대학생은 20프로좌우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초중이나 겨우 다닌 아줌마들과 쉰을 오르내리는 젊은 로인들과 사회부랑배들이였다.
초중생은 물론 고중생들도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전업공부를 했다는 대학생들도 기업에서는 별로 쓸데없는 문과생이 대부분이였고 그나마 거개가 영어를 모르고 있는 형편이였다. 한국회사에서는 기계명칭으로부터 보통 술어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통용하고있었다. 그러니까 그 마당에 들어서면 대학생, 고중생, 초중생의 립장이 그만 똑같아지고만다. 다같이 영어를 모르고 다같이 일에 미립이 없는 형편이니깐. 게다가 현장통역이란 것은 조중 두가지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깐. 그래서 조선족대학생이 한국초중생보다도 못하다는 평가를 들을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의 학교교육을 다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해지구에서 그처럼 활발한 직업교육이 우리 이곳에서는 오히려 저조기에 처해있었다. 청도에서는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중학교들이 직업학교로 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중학교들은 아직까지도 좁은 진학선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락방거자가 된 고중생들은 재간은 없고 입만 퍼렇게 살아있는 “기형인재”로 되고말았다.
대학진학도 최종적으로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할때 더 많은 “락방거자”들을 위해서도 직업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외국어선택문제인데 일본어는 시기가 지난 것이라고 본다. 영어야말로 세계적인 언어인 것이다.
한번은 일본회사에 면접을 갔었는데 예상외로 간판부터 상표까지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다. 자명한바 영어는 세계인 모두의 필수과목인 것이다. 영어를 모르고서 세계로 진출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학교의 외국어가 새롭게 선택되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건의해본다. 
보편적으로 말해서 조선족들에게는 많은 흠집이 있었다. 지식구조가 단일하고 성격이 조폭하고 술을 즐기고 자유산만하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몸을 내번지고 한다. 천성이 부지런한 민족이니깐. 또 남달리 총명하여 인츰인츰 일을 배워내기도 하여 한국경영인들도 꽤 만족해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리용의 목적에 그칠뿐이지 내 사람으로 만들자거나 회사의 기둥으로 배양해 보려는 타산은 꼬물도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조선족과 한국인의 모순은 날이 감에 따라 더욱 돌출해졌다. 
한국인들은 의식적으로 조선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종한다. 식사를 해도 저희들 식탁을 따로 정하고 사무실, 지어는 세면실, 화장실마저 한국인용으로 따로 정해서 쓴다. 마치도 조선족들이 더러운 거지여서 코를 막고 피하려는듯한 인상을 준다. 어찌보면 한심한 인격무시였다. 자존심을 자극받은 조선족들이 일을 제대로 해줄리 만무했다. 따라서 동족의 우애란 찾아볼 자리가 없고 오히려 한족로동자들과 같은 나라 국민이라는 강한 련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더욱 한심한 규정들을 내세웠는데 이를테면 근무시간이외에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그 리유는 물론 아주 훌륭했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청시해야 하는데 그날의 관계자에 따라 그 기분에 따라 허락여부가 결정된다. “오늘은 안돼.” 하면 못나가는 것이다. 주관자의 싸인이 없으면 경비가 내보내지 않으니깐. 이런 규정은 휴일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래서 회사를 생감옥이라고 형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희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술집에 나가면서도 조선족더러 술을 먹지 못한다는 엄명이다. 몇푼 안되는 봉급으로 술집에 갈 주제들이 못되고 하니 숙소에서 짭짤한 채소에 술 한모금 마시며 피로라도 풀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허용하지 않으니 젊은 나이들이 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모 회사의 몇몇 젊은이들이 한국인들이 밖에 나간 틈을 타서 도적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들이여서 그만 재미가 들어 시간개념을 잊어버리고말았다. 한밤중이 되여 사장님이 거나해서 돌아오는데 숙소들이 환하고 떠들썩했다. 문을 활 열고 들여다보니 술놀이가 한창이였다. 단통 욕사발이다. 
“이 개놈들아. 술을 처먹구 있어? 그게 무슨 물인지나 알고나 먹어?!”
이쯤이면 세상은 끝난 거다. 억눌렸던 분노의 총폭발이랄가. 혈기의 젊은이들이 약속없이 후다닥 뛰여일어났고 사장님을 비롯해서 5명의 한국인이 잠간새에 땅바닥에 나누웠다. 할아버지를 부르며 잘못을 비는 것도 사정없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았다. 그러고는 보따리들을 둘쳐메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사장님도 술김에 그랬겠지. 너무하지 않아. 년세도 있고 한데. 사후의 평론이다. 그러나 전후인과를 따져보면 그런 것도 아니였다. 석자 얼음이 하루에 얼구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욕설이란 것도 단번에 생기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신병자들아. 왜 아직도 전등을 끄지 않았어?”
장부결산을 하다가 이런 소리에 후다닥 놀라 현장에 뛰여내려가 보면 규정대로 행여나를 념두에 두고 밝혀놓는 전등 하나가 고스란히 켜져 있을뿐이다. 그래도 “녜, 죄송합니다.” 한다. 
“상넘들아, 창문도 걸지 않구 뭘해.”
그래서 달려가보면 창문고리가 마사진 것이다. 그래도 “예, 미안합니다.” 한다. 위촉과 타협이 한국인의 오만을 키워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준비를 해야 하고 저녁 늦게까지 현장정리를 해야 한다. 연장작업을 해도 연장비라는 것이 따로 없다. 그래도 즉살날 욕은 항시 떠날 줄 모르고.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곱게 자라난 조선족청년들이 그 고된 로동과 심리적고통때문에 신체가 때이르게 허약해졌다.
서란에서 온 양씨는 반년남짓한 사이에 코피만 해도 서른번은 터졌다고 한다. 연변태생의 최씨는 얄편한 몸으로 남성 두사람몫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 드러눕기만 하면 크게 앓을 징조가 뚜렷했다. 
아무렴 그렇게 해주어도 봉급만은 변동이 잘 되지 않는다. 돈에 그렇게 짠 사람들이였다. 금방 입사한 한국인에게는 하루 몇십원씩 하는 고급 호텔에 주숙시키면서도 조선족에게 10원을 더 줄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열삼일을 연구한다.
지난해초만 해도 일반 회사의 시용기 봉급이 보통 3백원이였는데 후에는 260원까지 내려간 회사도 있었다. 그래도 취직자는 줄을 서고. 어떤 도경으로 어떻게 왔든지를 불문하고 어쨌든 외가닥나무에 목매죽을 민족이라는 인상이 진하다. 
여하튼 청도는 우리의 의지를 단련하고 능력을 검열하는 훌륭한 고장이였다. 거기에는 눈물도 있고 흔들림도 있지만 동시에 획득과 성공도 있었다. 4년간의 고심참담한 노력끝에 드디여 무역과장으로 날랜 활력을 보이는 김성수씨, 일반 회사 직원으로부터 서비스회사 사장으로 된 한룡태씨, 그리고 한국직원들의 헌신적인 사업정신은 우리에게 산 본보기로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청도진출을 정주영옹의 말씀대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평가하고싶다.
                                               
                                                                                                                                                  199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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