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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이야기54] 사촌 큰형님, 내 인생의 본보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26년9월22일 10시41분    조회: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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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송권

세월은 바위 우에 이끼를 덮고 사람들의 기억에 망각을 준다지만 사촌 큰형님의 형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생생하게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세월이 갈수록 내 생활에 더 크게 부각된다.

하늘같이 믿고 따르며 의지해 살아오던 사촌 큰형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20여 년 세월, 그래도 형님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가슴속에 산처럼 쌓여만 간다.

지난 세기 60년대, 나라 살림이 가장 어려워 먹고 살기도 힘들던 시절이였다. 큰사촌형님도 학교에서 마음 놓고 공부할 처지가 못 되였다. 부모님들은 새벽달을 이고 일밭에 나갔다가 저녁해를 지고 돌아오면서 죽기살기로 일했지만 초롱초롱한 여섯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여서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었다. 일찍부터 형님은 지식이 출세의 유일한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소학교를 졸업하자 인차 부모를 도와 농사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촌 큰형님은 어려서부터 말문이 무겁고 부지런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가타부타 말없이 묵묵히 일만 하는 성품이였다. 언제나 행동이 말보다 앞섰던 사촌 큰형님은 20여 세밖에 안 되는 젊은 나이에도 집체일을 몸을 내던지고 잘해 현 ‘사회주의 건설 청년 모범’으로 뽑혀 붉은 꽃을 달았다고 아버지께서는 늘 형님 자랑을 하셨다.

1977년 7월,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에 돌아와 농업생산로동에 참가할 때 형님은 이미 10여 년의 생산대 대장 경력이 있는 경험이 풍부한 로농이였고 농촌에서는 둘도 없는 우수하고 세련된 촌간부였다.

그때 농촌 생산대에서는 대장을 1년에 한 번씩 갈아대는 돌개식 대장 바람이 불었다. 소대의 중장년들 중 대장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가난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농민들의 생활은 구차했다.

그때 우리 동네에는 6개 소대, 180여 세대의 농가가 살고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소대가 제일 잘 살았다. 년말 결산으로 수입 분배를 할 때면 다른 생산대에서는 한 공에 40~50전이라 해도 우리 소대에서는 70~80전씩 받았다. 비록 많이 공부는 못 한 형님이였지만 다년간의 농사일에서 끊임없이 경험을 총화하면서 쌓은 지혜였다.

계획경제의 엄격한 감독 아래에서도 해마다 상급에서 배치하는 수한전 파종면적을 보장하는 한편, 잎담배 같은 경제작물 면적은 밭을 일구어 늘렸고 소대에서 두부방도 꾸리고 그 비지로 사료를 삼아 양돈장도 꾸렸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한가한 시간을 보냈으나, 우리 소대에서는 당지에 석탄 자원이 풍부한 우세를 리용해 수직 탄갱을 내리고 석탄을 캐내 이듬해 잎담배를 말리는 건조실 땔감을 해결했다.

한겨울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때면 림장 지도일군들을 찾아다니며 부업거리를 마련해, 겨우내 중장년들이 산판에서 일거리를 맡아 품삯을 벌어들이게 했다. 그리고 경운기 고무바퀴 수레도 마련하고 온 동네에서 처음으로 400여 평이 넘는 벽돌기와 소사양실도 지었다. 10여 년 생산대 대장으로 일하던 사촌 큰형님은 후에 영광스럽게 입당도 하고 촌 주임으로도 발탁되였다.

그는 농사만 지어서는 잘살 수 없다고 하면서 당지 자연자원의 우세를 리용해 다종경영에 뿌리를 박고, 촌 집체에서 목이버섯장, 록장, 목장, 약재 재배장을 대대적으로 꾸리고 석탄자원이 풍부한 당지 우세로 탄광을 꾸렸으며 그 석탄으로 벽돌공장도 세웠다. 하여 향내에서 일찍 동방홍뜨락또르와 고무바퀴 뜨락또르도 갖추어 온갖 부업에 나섰다.

1980년에는 촌의 크고 작은 골짜기 50여 곳에 수토류실을 막고자 현 수리국 기술원들의 지도 아래 사원들을 이끌고 버들을 베여다 골짜기에 작은 댐을 만들어 장마철이나 우기가 많은 해에 밭을 허물어 가던 홍수를 잘 다스렸다. 하여 우리 촌은 현과 주의 선진생산대로, 사촌 큰형님은 주 수리계통의 선진 사업일군으로 표창 받았다.

집체일에서도 앞장섰던 사촌 큰형님은 가문에서도 둘도 없는 믿음직한 년장자이고 버팀목이였다. 형님 밑으로 남동생 하나에 녀동생 넷이 있었는데 모두가 형님 손끝에서 시집장가를 갔으며 자식 넷도 모두 성년으로 잘 키워냈다.

그때 그 세월, 형님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가? 그런 형편에서도 부모에 대해 원망 한마디 없었고 자신이 맏아들로 태어남을 숙명으로 여겼고 응당해야 할 일로 생각하고 가타부타 말없이 묵묵히 감당해 나갔다. 나의 큰사촌형님은 제집 일도 무겁고 번거로운데 사촌들의 크고 작은 궂은일에도 늘 제 일처럼 발벗고 나섰다.

그때 우리는 이웃으로 살면서 설 명절이나 잔치, 궂은 일이면 모두 함께 보냈고 정말 대가족이였다. 그래도 사촌끼리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고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지냈다. 아버지는 늘 시름시름 만성병으로 앓으셨는데 젊어서 로동력을 상실하고 일년 사시절 앓음자랑만 하셨다.

우리 6남매도 큰누님이 일찍 시집을 가고 큰형님도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니 모두 큰사촌형님의 손길이 필요했다. 집에 어려운 일이 닥쳐도 급한 일이 생겨도 우리는 사촌 큰형님부터 찾았다. 그것이 응당한 일인 줄로 알았다.

해마다 집 이엉을 엮어주고 집에 불이 잘 들지 않아도 구들장을 털어 고쳐주었으며 큰형님이 세상을 떠날 때도 수의를 갈아입히고 장례식까지 깔끔히 치러 주셨다. 그리고 둘째형부터 나까지 장가들 때도 모두 사촌큰형님이 나서서 사돈 보기며 결혼잔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 처리해 주셨다. 1983년 내가 왕청에 있는 처가집에 장가들러 갈 때도 형님이 나섰다. 변변한 구두 한 컬레도 없어서 남의 구두를 빌려 신었다. 그런데 나를 데리고 길을 떠나 앞에서 걸어가던 형님이 자주 신발을 벗고 밑창을 털어내고 돌을 주워들고 신바닥을 두드리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한참 걷다가 또 반복했다. 걸음을 멈추고 다가가 보니 밑창에 박은 징이 솟아 올라 발바닥에 피가 묻어 절뚝이며 걸음을 하신 것이였다. 그래서 돌로 박아 넣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신 것이였다. 너무 미안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차 시간이 늦겠다”고 하면서 앞에서 걸음을 재촉하시는 것이었다.

부모처럼 그렇게 믿고 따르던 사촌형님은 다년간의 힘든 로동과 여러 동생들, 자식들에 대한 로심초사로 고혈압을 앓으면서도 일심으로 남을 위해 일하면서 병을 등한시한 탓에 1985년 봄에 끝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도문시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목숨은 구했으나 재차 뇌출혈이 와서 몇 해 고생하다가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말문이 무겁고 언제나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집체를 위하여 일체를 헌신하며 혈육을 그 누구보다도 귀중하게 여기고 사랑하셨던 사촌형님이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사촌형님의 형상은 오늘따라 더 크게 안겨 온다. 시간이 흘러 갈수록 사촌형님의 자애로운 그 모습이 더 그립고, 나도 형님처럼 참된 사람으로 살려는 욕망이 커진다.

내 인생에 무언의 본보기로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나의 큰사촌형님은 나를 실속 있게 행동으로 인도했던 본보기였다. 형님은 늘 교육은 너무 많은 말이 아니고 행동은 말보다 힘 있다는 인생철리를 가르쳐 주셨고 최고의 인간사랑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족사랑과 사회를 감싸는 리치를 깨닫게 해준 스승이다.


성송권 프로필

1959년생

도문시 랑수진 출생

훈춘현 진수학교 중등전업 졸업

연변시조협회 회원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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