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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고 있는 걸 그들만 몰랐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4월29일 14시08분    조회:2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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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업계 1위를 굳건히 지키며 시대를 풍미했던 브랜드 중에는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주저앉는 사례가 있다.
최근 기업들에 반면교사의 모델이 되는 대부분 실패담들은 스마트폰이 광풍이 불었을 때쯤인 2010년을 전후로 들리기 시작했다. 
각각 도토리왕국, 게임왕국, 필름왕국, 휴대폰왕국이라 불렸던 싸이월드, 닌텐도, 코닥, 노키아의 얘기다.

환경에 적합한 종만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생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생존에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기존의 방식과 이익에만 집착하다 명성을 잃어버린 브랜드의 사례를 정리했다.


도토리왕국의 몰락 '싸이월드'

2004년 SERI 선정 '올해의 히트상품' 이었는데…
2011년 SK컴즈가 운영했던 글로벌 싸이월드 /조선DB

1999년 시작, 2000년 초중반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던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는 대한민국 대표 1인 미디어이자 소셜미디어였다. 서비스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회원이 1000만명을 넘었고, 싸이질·싸이홀릭·도토리 등의 신조어를 유행시키며 2004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그해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선정됐다. 당시 한 개인의 모든 인맥과 일상은 미니홈피 하나에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련기사 : 올 최고 히트상품 싸이월드

페이스북의 등장과 연이은 악재
2008년 5월 말부터 한글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당시 페이스북 페이지/ 서명덕 기자

싸이월드가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첫째 페이스북의 등장이 가장 크다. 페이스북은 초창기 싸이월드에 밀려 국내 시장에서는 큰 성과가 없었으나 2008년 한국어판을 처음 실시하고 서비스가 날로 진화하면서 이용자 수가 점점 늘어갔다. 같은 시기 싸이월드는 국내 이용자의 수와 주요 비즈니스 모델이었던 도토리 매출이 주춤세였다. 또한 야심차게 진출했던 미국과 대만 시장에서 사업이 정리 절차를 밟고 있었다. 미국 서비스 3년째 월 방문자 11만2000명으로 초라한 성적이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도 각각 회원 수 700만명과 45만명으로 기대에 못 미쳤다.

싸이월드의 악재는 계속되었다. 2011년 8월말 대규모 해킹으로 3500만명 가입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사생활 침해 우려에다 개인정보 유출까지 더해지며 신뢰를 잃어갔다. 한때 호기심으로 남의 미니홈피를 엿보는 ‘관음증’과 나를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노출증’의 2가지 심리를 최적으로 조합한 ‘고도 심리전의 최고 상품’으로 추앙받던 싸이월드는 개방형 SNS 페이스북에 점차 길을 내주었다. 내부에선 "도토리의 경쟁력만 믿다가 결국 제 발등을 찍었다"는 자성(自省)이 나왔다. 현재 싸이월드는 2014년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 독립, (주)싸이월드를 신규 설립하여 서비스 개편을 했으나 옛 전성기를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관련기사 : 싸이월드 아 옛날이여


게임의 법칙 바뀌었는데도 '닌텐도'

2006년부터 2013년까지 닌텐도의 매출액과 영업이익 추이

2007년은 '닌텐도의 해' 였었지…
2000년대 초반 한때 부진을 겪다가 닌텐도DS의 출시로 재기에 성공한 닌텐도의 2007년과 2008년은 눈부셨다. 2006년 9665억엔이던 매출은 이듬해 1조 5724억엔으로 치솟았고 2008년엔 1조 8386억엔을 기록하며 정점을 달렸다. 게임 산업 뿐만 아니라 전세계 산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장세였다. 그러나 2009년부터 이런 성장세는 대폭 둔화하다 못해 오히려 감소하기 시작해 2011년 부터는 영업이익이 적자가 나는 상황에 이른다.
▶관련기사 : 어른을 잡았더니 아이들도 열광… 단순함이 부른 성공
▶관련기사 : 스마트폰에 밀린 게임 신화… 日닌텐도 추락

'게임기'라는 틀에 갇혀 '모바일'을 놓치다
닌텐도는 스스로를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라고 정의했다. 전 세계에 게임기를 2억대 이상 팔았던 회사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닌텐도의 게임기 개발 역량은 2006년 말 시판된 '위(Wii)'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닌텐도는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너무 좁게 가뒀다. 닌텐도가 스스로를 '게임기를 잘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게임을 잘 만드는 회사'라고 생각했다면, 급격히 확장하는 모바일 시장에 진출하는 등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지 않을까? 기득권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위와 DS를 합쳐 게임기를 2억대 이상 판매한 닌텐도가 게임기라는 플랫폼을 무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컴퓨터 이용자가 MS 오피스 프로그램을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듯이 이미 닌텐도 게임기를 산 고객들은 새 버전의 게임기가 나오는 대로 사곤 했다.

이처럼 누구의 간섭도 없는 독점적인 판매 플랫폼이 있는데, 왜 남들이 구축한 스마트폰 세계에 수많은 공급자 중 하나로 끼어들어야 하나? 게임기 신화를 이끌었던 닌텐도 주역들은 그럴 의지가 없었다. 게임기로 계속 신화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2012년 말 내놓은 위유(wii u)를 통해 위와 DS의 명성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야심차게 내놓은 위유(wii u)의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기존 제품인 위와 확실히 차별화되는 제품이 아니었기에 위 고객들이 굳이 신형인 위유(wii u)를 새로 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닌텐도만의 컬러를 잃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플레이스테이션과 X박스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데 집착하다가 본연의 컬러를 잃어버린 것이다. '슈퍼마리오'와 '젤다의 전설'로 대변되는 닌텐도 게임의 특징은 누구가 즐길 수 있는 가벼운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담는 그릇이 휴대용 게임기 DS와 가정용 게임기 위였다. 그런데 차세대 게임기인 위유에서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들만의 강점인 단순성을 버리고, 화려한 그래픽과 복잡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X박스의 아류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방향 전환을 한 것치고는 제품의 수준이 미치지 못했다. 성능이 향상됐다고는 하지만, 라이벌인 플레이스테이션4나 X박스원에 비해 수준이 떨어졌다. 닌텐도가 비장의 무기로 선보인 태블릿PC 형태의 조작 장치인 '게임 패드'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고성능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익숙한 신세대들에겐 이 물건이 구식처럼 느껴졌다. ▶기사 더보기 

최근 닌텐도는 최근 모바일 게임을 출시했다. 위기설에도 모바일 시장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이와타 사장은 2013년만 해도 휴대용 게임기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바일 시장은 곧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업의 적자가 계속되고 올해 인력까지 축소까지 하면서 결국 대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닌텐도의 뒤늦은 도전이 시장에 반향을 불러일으킬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필름에만 갇혀있었던 세월 131년 '코닥'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필름 분야의 선구자 ‘이스트먼 코닥’이 19일 미국 뉴욕 남부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사진은 2006년 9월 독일 퀼른에서 열린 국제 사진 기재 전시회인 포토키나에서 코닥 부스를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모습. /신화 뉴시스

한때는 필름 시장 90% 차지하던 공룡기업 
롤필름, 컬러필름, 코닥카메라와 같은 독보적 기술 개발을 주도해온 코닥은 1970년대 미국 필름시장의 90%, 카메라 시장의 85%를 점유했던 공룡기업이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코닥의 순간(Kodak moment)이라고 합니다'가 코닥의 전성기 시절 세계에 울려 퍼진 광고문구다. 하지만 1980년대 디지털 기술이 도래한 것을 과소평가했다가 치명타를 맞는다. 1975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개발하고도 세계 시장의 3분의 2를 장악한 필름사업에 안주하면서 급속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코닥의 멸망, 다섯 가지 이유'를 기고한 카말 무니르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코닥 경영진은 주위 세계가 얼마나 많이 변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코닥은 사람들이 결코 인화본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필름으로 찍은 고화질 사진의 가치를 간직할 거라고 믿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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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결국 파산신청
뉴욕주 로체스터시 한복판에 자리한 코닥 본사(왼쪽). 필름제국의 131년 화려한 역사는‘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오른쪽)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 김윤덕 기자

코닥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영상 판도가 변하는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점차 몰락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선점한 기존 사업에 매달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개발하고도 기존 주력제품이던 필름 시장을 잠식할까 봐 디지털 카메라의 개발과 마케팅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소니가 필름이 필요없는 디지털카메라 '마비카'를 출시한 1981년에도 코닥 경영진은 디지털카메라를 기회가 아닌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코닥은 당시에도 미국 필름 시장의 80%를 차지할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디지털카메라로 점차 눈길을 돌렸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공식 후원사로 선정된 일본 후지필름이 값이 싼 필름을 들고 미국 시장에 뛰어들면서 시장 점유율을 잠식한 것도 코닥 침체의 원인이 됐다. 악재가 겹친 코닥의 영업이익은 1996년 159억7000만달러(약 18조원)에서 1997년 143억6000만달러(약 16조원)로 10% 이상 감소했다. 비록 2005년까지 필름 업계 1위를 지켰지만 이미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활성화된 상황에서 필름에만 의존하는 코닥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장에서는 필름 카메라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데 코닥만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기사 더보기 

2013년 파산보호절차가 끝난 코닥은 인쇄업체로 변신을 꾀했다. 필름 사업으로 얻은 사진 인화 기술을 바탕으로 이미지 인쇄업에 뛰어든 것이다.

1등 기업의 저주  '노키아'

아이폰 등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3년만에 브랜드가치가 곤두박질 친 노키아

핀란드의 국민 기업으로 불렸었지만…
1998년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1위 휴대폰 기업이 된 노키아는 경이로운 '성공 기업'의 대명사였다. 노키아는 아이폰이 나온 첫해 2007년 당시에도 휴대폰 업계 2,3이던 모토로라와 삼성전자를 합친 것보다 휴대폰을 많이 팔았다. 한때 북유럽 핀란드 전체 수출액의 23%를 혼자 일궈낸 '국민 기업'이자 520만 핀란드 국민들의 자부심이었다.

모바일 경영컨설턴트인 토미 에이호넌(Ahonen)는 '1등기업 노키아의 쇠퇴'를 주제로 한 인터뷰 제의를 하자 "할 말이 많다. 언제든 오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핀란드인인 그는 노키아 본사의 글로벌 컨설팅 부서장으로 3년 동안 일해 전 세계 여느 IT전문가보다 노키아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 홍콩섬 중심가인 셩완(上環)에 있는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노키아 사례는 1등기업의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범"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보는 노키아의 결정적인 패인(敗因)은 '전략적 실수'와 '전술적 실수'를 동시에 범했다는 점이다. '전략적 실수'란 1등기업 유지를 위한 비용관리에만 집중하다 보니 조직의 현실 안주(安住)화와 보수성을 초래했다는 것. '전술적 실수'로는 경영진의 판단 미스를 꼽았다. 세계 유명 MBA(경영대학원)의 성공사례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해온 노키아가 어떻게 사망의 길에 접어들었는지부터 물었다.

노키아 본사의 글로벌 컨설팅 부서장으로 2년 일했던 모바일 경영컨설턴트인 토미 에이호넌(Ahonen)
조직 비대화로 비용관리 집중→혁신 종말
―노키아는 원래 '혁신 조직'이었는데 왜 경직된 조직이 됐는가.

"노키아의 최전성기인 2006년, 올리 페카 칼라스부오(Kallasvuo)가 CEO가 된 후 관료화 현상이 본격화됐다. 법률·회계전문가인 그는 어떤 사업을 하건 '비용관리'를 제1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러다 보니 엔지니어보다 재무 파트의 발언권이 세졌다. 주요 시장인 인도에선 휴대폰 수리 조직을 아웃소싱하는 바람에 소비자들이 예전과 같은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품질은 좋아지지 않는데 소비자 불만은 쌓여간 것이다."

―글로벌 1등이 되면 '관료화'를 불가피하게 겪게 되나?

"노키아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매우 실행력 강한 '혁신 회사'였다. 예컨대 그럴 듯한 아이디어를 내면 얼마 안 가 이탈리아, 미국, 싱가포르 등 세계 각지의 노키아 연구소에서 같은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매우 놀라운 조직이었다. 이후 노키아 종업원 수는 두 배가 커져 한때 13만명까지 늘었다. 이 과정에서 관료화는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회사가 비용관리에만 신경을 쓰자 조직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 직원들이 속출했고 특히 창의적인 중간 간부 중 상당수가 퇴사하기 시작했다. 유능한 모바일 인력들은 노키아를 떠나 애플과 삼성, 블랙베리 등으로 몰려갔다."

―애플 아이폰이 2007년에 처음 나왔을 때 노키아의 반응은?

"아이폰을 일종의 '조크(joke)'라고 봤다. 그다지 매력적인 제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키아는 아이폰이 나오기 2년 전 터치스크린폰을 내놓았다가 시장에서 실패를 맛봤다. 그래서 터치스크린폰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한손으로 작동시키기 힘든 폰을 왜 만드느냐는 식이었다. 물론 오판(誤判)이었다."

―업계 1등이었다가 쇠락한 소니, 코닥 등과 노키아와의 다른 점이 있다면?

"자동차·TV·필름 등 대부분의 시장에서 1등의 몰락은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 모바일 산업에서 1등의 추락 그래프는 훨씬 더 가파르다. 모바일 제품 시장의 평균 사이클은 15개월인데, 모바일 제품 하나를 개발하는 데 18개월이 걸린다. 만약 이제 막 개발한 제품이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이를 만회할 길이 없다. 지금 홍콩·싱가포르·브라질 등 전 세계에서 기존 노키아 사용자들이 삼성·애플·HTC 등으로 휴대폰을 바꾸는 이유다." ▶기사 더보기 

노키아는 2012년 휴대폰 사업부를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했다. 2014년엔 구조조정을 단행 통신 네트워크 장비 분야를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했다. 사물인터넷을 중심으로 재기를 노리고 있다. 


싸이월드, 닌텐도, 코닥필름, 노키아 등 한때 시대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초라해진 브랜드와 기업들은 대부분 변화에 둔감했거나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기업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아이템', '완벽한 메뉴얼 또는 시스템'이 아니라 누구보다 빨리 변화를 감지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다. 이는 변화의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IT기술 산업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생활 속 모든 영역에서 IT기술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이든 변화의 시기에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위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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